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예수의 위대한 질문⑧
“진리란 무엇인가?”(요한복음 18장 38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빌라도는 예수의 믿음을 로마제국의 질서 파괴하는 미신으로 파악
…예수가 빌라도에게 말한 ‘진실’은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과정으로서의 ‘믿음’이었다
독일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1455∼1528)가 그린 <십자가형>. 갈기갈기 찢긴 듯한 예수의 최후를 보여준다. 예수는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는 굳은 결단으로 십자가에 매달렸다.
세 개의 세계관이 충돌했다. 황제를 숭배하는 그리스-로마의 세속적 세계관, 유대의 율법주의 세계관, 그리고 예수의 보편적 사랑의 실천적 세계관. 이 상이한 세계관(진리)이 서기 1세기 예루살렘에 공존했고, 예수는 역사상 유례 없는 ‘진리’의 존재를 죽음을 통해 입증하고 실천했다.
그리스도교의 발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사건이다. 신약성서 복음서 저자들에 따르면 예수는 30세에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 최고의 가치와 그 가치를 도달하기 위한 패러다임을 깨닫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다.
기원후 70년경,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이 막 기록되기 시작할 무렵, 요세푸스(A.D. 37∼100)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66년부터 73년까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로마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에 가담하여 갈릴리 지휘관으로 싸웠으나 실패하고 로마에 살면서 유대인들에 관한 책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그의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를 보면 1세기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로마에 의해 혹은 로마가 세운 헤롯왕가에 의해 십자가형이나 참수형을 당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십자가형에 관한 기사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로마에서 파견 나온 총독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어 그가 마지못해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도하였다고 전한다. 빌라도는 예수가 극형을 당할 만큼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유대 지도자들과의 협조가 유대를 치리(治理)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소극적으로 예수 처형에 가담한 인물이다. 반면 유대의 지도자들은 당시 유대교의 교리에 맞지 않은 주장을 일삼고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몰아간 장본인들이다.
기원후 4세기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유일한 제국의 종교로 수용한 후,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생각이 서양인들의 인식에 깊이 새겨졌다. 그 죄의식은 지난 2천 년 동안 반유대주의의 원인을 제공했고, 20세기에는 인류 최대의 인종청소인 홀로코스트에 이르렀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장본인은 유대인들이었나? 아니면 몇몇 유대지도자였나? 그렇지 않다면 본디오 빌라도가 대표한 로마제국이었나?
이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우선 빌라도와 관계된 고고학적 유물 두 개를 살펴보자.
빌라도 동전이 증언하는 세계사의 가장 중대한 순간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기원후 30년에 주조된 로마 동전. 당시 총독 빌라도는 동전을 주조해 광범위하게 유통시킬 정도로 유대 경제에 깊이 관여했다.
그 하나는 빌라도의 동전이다. 이 동전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고 희귀하지도 않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이 동전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아래 그림에서 두 번째 동전이 제작된 시기는 왼쪽 동전 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로마 숫자 LIZ로 추정해본다면 기원후 30년, 그러니까 예수가 로마식 재판을 받고 십자형에 처한 그 해에 만들어진 동전이다. 이 동전이 발견된 곳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장소인 예루살렘의 외곽 골고다 언덕 근처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루살렘 땅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그 당시 유다는 로마에서 파견된 군인이자 행정가인 빌라도가 치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동전은 빌라도가 직접 구상하고 주조하여 유대지방에서 표준 주화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 당시 상인, 노동자,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도 이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물건을 사고 세금도 바쳤을 것이다.
빌라도는 이렇게 동전을 주조할 만큼 유대의 경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예수가 활동했을 때 유다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어느 정도 자율을 인정받는 자치정부였다. 유다의 반란이 끊이지 않자, 로마는 유다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다. 빌라도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기원후 26년부터 36년까지 11년 동안 유대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한 군인이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빌라도는 그 자신이 유대를 치리하는 동안 세 번에 걸쳐(29, 30, 31년) 동전을 주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수는 유대 자치정부의 왕인 헤롯왕 때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었다. 디오뉘수스 엑시구우스(470∼544)라는 사제는 그레고리 달력과 줄리안 달력을 기초로 기원전과 후를 가르는 ‘아노 도미니(Anno Domini·AD)’를 만들 때 실수를 범했다. 예수가 태어난 해는 기원후 1년이 아니다. 만일 예수가 33세에 돌아가셨다면, 그는 기원전 4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0년이란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는 기원후 30년에 돌아가셨다.
빌라도 동전은 로마 동전이지만 그 위에는 라틴어가 아니라 기원전 4세기부터 지중해 전역의 국제 공용어이자 학문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기원전 4세기부터 그리스어는 지중해 지역의 국제 공용어이자 학문의 언어였다. 이 동전은 유대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 유대 땅에서 일어난 여러 메시아 종교운동, 특히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증언하고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기원후 70년에 돌이킬 수 없는 타자의 길에 들어선다. 유대인들의 반란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인 티투스 장군에 의해 진압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이란 장소를 더 이상 삶의 중심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대안으로 자신들이 의례에서 사용하던 <토라>라는 경전과 그 경전에 대한 파격적이면서도 시의 적절한 해석이 등장했다.
이 <토라>에 대한 해석은 그 당시 유대인의 삶을 둘러싼 첨예한 문제들에 실마리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더 이상 <토라>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들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살해한 사건은 1세기 유대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감동도 없다. 그들의 생존윤리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토라>에 대한 해석에서 이 부분을 과감하게 누락시킨다. 유대인들은 경전에 대한 자신들만의 해석 전통을 지상의 어떤 세력도 파괴할 수 없는 ‘영적인 예루살렘’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활동영역의 중심을 유대 땅이 아니라 소아시아, 그리스, 그리고 유럽으로 옮겼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이 복음을 바울과 베드로를 통해 서양에 소개했다.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믿는 조그만 ‘예수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들의 선교지에서 그리스-로마문명과 조우하면서 예수에 관한 기록도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번역한다.
예수의 구어는 아람어였는데, 이 언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많은 개념이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가 형성될 때 로마-그리스 문명의 세계관 안에서 유사한 개념어를 찾게 되었고, 그 유사개념어로 로마세계에 소개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셈족 종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 유럽종교로 태어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빌라도 동전이 통용되고 있었다. 빌라도는 유대지방의 행정수도였던 가이사리아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 동전은 예루살렘에서 주조되었다. 이 동전이 35년 동안 유대뿐만 아니라 요르단과 예루살렘에서 500㎞ 떨어진 안디옥에서도 발견된 것으로 미뤄볼 때 빌라도는 이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빌라도가 어떤 사람인지 이 동전에 새겨진 형상들을 분석함으로 추적해볼 수 있다. 동전의 한 면에는 당시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로마종교에서 가장 흔히 등장하는 상징인 ‘심풀룸(simpulum)’이 등장한다. 심풀룸은 로마 황제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가 사용하는 제기(祭器)다.
유대교의 명절 하누카의 상징은 촛대 9개가 연결된 ‘하누키야’다. 다양한 하누키야를 파는 예수살렘의 종교 상품점.
로마 황제의 동전 보며 통탄한 유대인들
심풀룸은 몸체와 손잡이로 되어 있어 사제들이 희생제사에 사용할 동물의 머리에 부을 포도주를 맛 볼 때 사용한다. 한마디로 ‘포도주 국자’다. 제사장이 심풀룸으로 포도주 맛을 본 후에 점쟁이가 나와 신이 보낸 징조가 남겨져 있는 그 동물의 내장을 조사한다. 빌라도는 자신의 동전에 로마의 황제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제기를 새겨놓았다. 심풀룸이 로마 동전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심풀룸이 다른 형상 없이 홀로 등장한 것은 빌라도 동전이 처음이다.
실풀룸이 가운데 새겨진 동전 주위에는 그리스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로마 종교는 황제를 숭배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황제 이름이 왼쪽 아래서 위쪽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 밑으로 ‘TIBEPIOY KAICAPOC’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어 대문자로 새겨진 비문을 영어로 음역하자면 ‘tiberiou kaisaros’이며 그 의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라고 직역된다. 즉 ‘이 동전은 티베리우스의 황제의 것이다’라고 번역된다.
이 동전은 분명 유대인들의 공분을 샀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신을 상징하는 형상은 십계명의 제1항에 등장하는 것처럼 터부인데, 빌라도는 그런 상징을 유대 전역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모든 유대인이 매일 사용해야 하는 주화로 삼았다.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 형상의 동전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무력함에 통탄했을 것이다.
동전의 다른 면에는 ‘리투우스(lituus)’라는 막대기와 월계관이 새겨져 있다. 리투우스는 점쟁이가 오른 손에 쥐고 제사를 지내는 의례용 막대기다. 점쟁이가 리투우스를 하늘을 향해 치켜 올리는 동안 사제들은 로마 신들의 이름을 낭송하고 점을 친다. 로마신화에 의하면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 로마를 건국할 때 사용했다.
그리고 막대기와 혼재되어 동전 주위를 둘러싼 월계관은 권력과 승리의 상징이다. 그 안에 희미하지만 기호와 숫자인 ‘LIZ’는 이 동전이 주조된 연도다. 그리스어 L은 ‘연도’를 의미하고 I는 10, Z는 7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LIZ’는 17년이다. 즉 티베리우스 황제가 제위한지 17년이 되는 해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기원전 14년 9월 17일에 즉위했기 ‘LIZ’는 정확히 기원후 30년, 즉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해와 일치한다.
이 동전이 말없이 증언하는 것처럼 빌라도는 로마제국이 유다라는 조그만 식민지로 보낸 총독이자 로마 황제숭배의 제사장이었다. 로마의 황제 숭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다. 빌라도는 식민지를 통치하는 총독이자, 황제를 대신하여 ‘로마황제숭배’라는 종교의 대제사장이었다. 그가 로마의 황제 숭배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여실이 보여주는 또 다른 고고학적 자료가 있다.
그가 만든 동전에는 자신이 숭배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은 등장하나 정작 ‘빌라도’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1961년까지 유대의 다섯 번째 총독인 빌라도가 실제인물이라는 고고학적 유물은 없었다. 빌라도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에 등장하고 기원후 4세기 초대교회가 사도신경을 작성할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을 삽입할 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행정 기록은 전무했다. 이스라엘에 남겨진 어떤 유물도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수로도 남아있지 않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62년 여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가이사리아 마리티마 극장 주변을 정리하다가 너비 82㎝, 높이 68㎝의 석회암을 발견했다. 헤롯왕은 이곳을 가이사리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라고 명명하고 자신의 수도로 정했다. 가이사리아 마리티마에서 발견된 이 석회암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가이사리아와 예루살렘은 로마황제가 옹립한 본봉왕인 헤롯이 건축한 공공시설의 최고작품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을 위해 재건축되었고 가이사리아는 로마인과 헤롯의 왕가를 위한 거주지였다. 이곳은 헤롯이 자신을 유다지방의 왕으로 임명해준 로마황제 시저와 아구스투스에게 헌정하는 도시들 중의 하나였다. 이 도시는 지중해 안에 자리 잡아 유대를 지중해 다른 세계와 연결시키는 항구 도시였다.
가이사리아는 자연항구가 아니다. 그가 가이사리아에 만든 항구 세바스토는 로마에 조공을 바치고 유대 엘리트들을 위해 사치품들을 수입하는 창구였다. 여기서 수출하고 수입하는 모든 물건에 세금을 물리고 헤롯 자신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곶에 왕궁을 짓고 공공 유흥을 위해 궁궐 앞에 극장을 지었다. 그래서 가이사리아는 헤롯 왕국의 상징이 되었다.
도시 전체는 엄격한 격자형식으로 나열되어 질서를 유지하였고 건물을 장식하는 문양들은 이곳의 부를 상징했다. 공공건물들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위계질서를 여실히 드러낸다. 기원전 4년 헤롯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들이 유대를 분할 통치하였지만 가이사리아는 여전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사회적-정치적 수도였다.
이 석비는 빌라도 동전과는 달리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1행: TIBERIEUM; 2행 (PON) TIUS; 3행:(PRAEF)ECTUS IUDA(EAE). 학자들이 비슷한 비문들과 비교하여 세월에 의해 마모된 부분을 재구성하여 비문을 복원했다. 복원된 라틴어 문장을 번역하자면 “신이신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를 위해,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이것을) 만들어 바칩니다.”
1962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가이사리아 마리티마 극장 주변을 정리하다 발견한 석회암 석판. 이 석판에는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그가 역사상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 석비는 세월에 의해 많이 마모되었지만 복음서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이름이 그의 직함인 ‘총독’과 함께 등장하여 당시 최고 정치 권력자들은 로마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빌라도의 직함인 ‘PRAEFECTUS’는 군사용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것처럼 예수를 재판한 판사라기보다는 로마제국의 야전사령관이다.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Newark)에 있는 바실리카 성당 앞에서 부활절 공연을 앞두고 배우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로마군에 핍박받는 예수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유대 지도자와 첨예하게 대립한 총독 빌라도
그는 군대를 지휘하는 총독으로 사마리아에서의 과잉진압으로 로마로 소환된 인물이다. 빌라도 동전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빌라도 비문은 그가 로마제국의 충직한 군인으로 제국의 종교인 황제숭배를 신봉하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신’으로 모시며 로마제국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유지하는 총독이다.
로마 총독은 황제가 임명한다. 그는 황제를 위해 존재한다. 총독의 주요업무는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다. 그는 황제를 대신하여 식민지 관리들과 세금을 관장한다. 그는 이 일을 도모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과 같은 부유한 기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는 또한 문서를 조사하고 공공건축을 주도한다.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최종적으로 법을 결정하고 집행한다. 항소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로마로 여행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유다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이두메아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법적인 문제를 최종 해결한다.
그는 또한 군대를 지휘한다. 총독은 500명 정도 군인들의 대장으로 예루살렘에 두 개 부대, 유대지방의 수도인 가이사리아에 주둔한 부대를 지휘했다. 총독은 여러 가지 직함으로 다시 세분되는데, 빌라도는 ‘프로쿠라토르 쿰 포레스타테(procurator cum porestate)’, 즉 군사·민사·형사를 모두 책임지는 권력자였다.
유대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임명받은 빌라도 총독의 통치가 허용하는 한, 자치권이 보장된다. 유대인들의 사법체계는 산헤드린이라는 유대기관에 의해 운영된다. 산헤드린은 그리스의 시민들의 민회인 ‘에클레시아’의 영향을 받아 70명의 유대인 남성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제사장이 그 회의의 의장이 된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다고 한다. 빌라도는 이탈리아 삼니아 지방의 군사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로마식민지에서 야전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의 근위(近衛) 총대장이자 심복이었단 세자누스(Sejanus)의 추천으로 유대의 총독이 된다. 그는 유대에서 로마제국과 황제를 위해 효과적으로 세금을 징수해야 했기 때문에 유대의 지도자 특히 대제사장, 사제, 그리고 산헤드린 멤버들과 긴밀하게 협조해야 했다. 빌라도는 세자누스의 보호 아래 자신의 처신을 망각하고 유대종교를 욕보이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빌라도의 학정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전한다. 빌라도는 헤롯이 만든 수도 가이사리아에 자리를 잡고 군대를 몰고 예루살렘으로 시찰을 갔다. 그는 로마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상징물을 들고 행진해 들어와 성전에 세워놓고, 예루살렘 전체에 황제의 형상을 걸어놓았다고 전한다.
그 후 유대 제사장들이 가이사리아로 몰려와 빌라도 거주지를 에워싸고 6일간이나 시위를 한다. 빌라도는 이들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경청한다며 가이사리아의 극장에 모아놓고 그들을 창으로 위협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런 강경한 태도는 빌라도의 판단착오였다. 빌라도는 유대인이 자신들의 종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했다.
“예수, 이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요세푸스는 빌라도의 다른 잘못도 기록한다. 빌라도는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지은 거주지의 벽에 로마신의 이름을 새긴 방패를 붙였다고 전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 방패들을 제거하라고 로마에서 명령할 정도였다. 그는 유대인이 성전에 낸 헌물을 제사장들과 짜고 빼돌려 수도관을 만들었다.
유대 군중이 몰려와 항의하자, 로마 군인에게 사복을 입혀 유대인 속에 잠입시켜 이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려 반란을 진압한다. 이 사건들로 미뤄보면 빌라도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동적이며 마지못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집이 세고 영리하며 무자비한 총독이자 황제종교의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복음서에 등장한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마지못해 십자가형을 선도하는 나약한 총독으로 등장한다. 빌라도는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 명절에 예루살렘을 시찰했다. 이런 종교 축제에는 항상 유대독립을 위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유대지도자인 산헤드린 회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지도자인 제사장과도 전략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4개 복음서 모두 다음 두 가지 이야기를 기초로 예수의 죽음을 기록한다.
첫째 이야기는 유대의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그리고 산헤드린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기면서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칭한다.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했을 때, 예수는 “내가 왕이라고 당신이 말했다”라고 대꾸한다. 빌라도는 유대인이 씌운 혐의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예수를 보고 놀란다.
둘째 이야기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하고 유월절의 관례대로 범죄자 한 명을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군중들의 외압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에게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에서 빌라도를 둘러싼 문제는 다음과 같다. 만일 빌라도와 같은 로마총독이 예수의 재판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결정했다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죄인 사람을 풀어주지 않고 이해하기 힘든 유월절 관습에 따라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렸을까? 사실 유월절 관습에 따라 죄수를 풀어주는 예는 성서 이외의 어떤 자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로마 총독이 예수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싶었다면, 처형하면 되었지 왜 ‘유월절 관습’을 언급하며 바라바를 풀어줬을까?
<요한복음>은 빌라도와 예수의 만남을 가장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로마 군인과 대장들, 그리고 유대인으로 구성된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를 포박하여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먼저 끌고 갔다. 그곳에서 예수는 묶인 채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도 이송되었다.
<요한복음> 18장 28절에 “사람들이 가야바의 집에서 공관으로 예수를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을 더럽게 하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하여, 공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기록한다.
자신의 공관 안까지 찾아온 유대인들을 보고 빌라도는 놀라 묻는다. “이 사람이 무슨 중죄를 범해 나한테까지 온 거요?”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이 사람이 악한 일은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두고 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예루살렘이 돌 하나도 여기 남아 있지 않고 무너질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닌 영적인 고향이었기 때문에 그런 장소를 파괴한다는 예수의 말은 민족과 유대교를 부정하는 터부였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예수는 신의 뜻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악한 일, 즉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한 민족반역자였다. 빌라도는 예수가 한 말이 로마제국의 질서에는 상관이 없는 유대인들 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에겐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산헤드린이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던진다. “우리는 당신도 아는 것처럼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상치 않은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면서 한동안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들은 이전 로마황제가 그려진 상징물을 예루살렘에 들여왔을 때만큼이나 비장한 눈빛으로 빌라도를 책망하듯 노려보았다. 그는 유대인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이 일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직감하고 바로 공관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빌라도의 유대 통치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산헤드린의 도움이 필요했다.
유대 땅에서 많은 사람을 몰고다니는 예수는 세례요한과 함께 로마제국의 안정을 위해 지켜보았던 요주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감이 이렇게 심한지는 몰랐다. 예수를 처음으로 마주한 빌라도는 예수를 직접 신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를 공관 안으로 끌고 들어와 유대인들의 아우성이 없는 장소에서 예수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싶었다.
이스라엘의 마사다 유적. 서기 73년 제1차 유대-로마전쟁 때 포로가 되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이 전원 자살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나라인가?”
빌라도는 먼저 예수라는 인물이 정말 정치적인 혁명을 꿈꾸는 메시아인가가 궁금했다. 그는 예수에게 “네가 유대사람의 왕이냐?”라고 물었다. ‘왕’이란 단어는 로마제국에서 유일하게 황제에게만 부여될 수 있는 명칭이다. 이 질문은 “네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기다린 메시아냐?”라는 질문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에 즉답을 피한다. 오히려 빌라도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질문한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인가? 만일 그렇지않다면, 나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인가?”
예수는 빌라도가 자신의 행적을 살펴본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오히려 다시 물었다. 그러자 빌라도는 다시 예수의 질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화를 낸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네 동족과 대제사장이 너를 내게 넘겼다. 그들이 너에게 사형을 집행해달라고 하니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빌라도는 “‘나라’를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이 나라란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예수가 던진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빌라도는 첫 질문을 되풀이한다. “네가 왕이냐?”
도저히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빌라도에게 예수는 대답한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지 내가 내 입으로 말한 적은 없다.”
예수는 그리고 나서 자신의 삶의 목적에 대해 말한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 문장은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예수가 발언한 문장의 의미심장함이 떨어져 나갔다.
‘증언’이란 단어와 ‘진리’라는 단어는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와 빌라도가 갖고 있던 그리스-로마의 세계관 속에서 새롭게 조망해야 한다.
‘증언하다’라는 말은 원래 법정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자신이 말한 진술이 사실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다’이다. 이 단어에 대한 그리스단어는 ‘마르튀레오(martyreo)’로 그 원래 의미는 ‘목숨을 바치다; 죽을 각오를 하고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하다’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나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 태어났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증언하다’라는 단어를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로 번역한다면 그 단어는 ‘샤하다(shahada)’이다. 이 단어 역시 채무, 간통 혹은 이혼을 다루는 법정에서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고 고백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놀랍게도 ‘샤하다’가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순교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신앙의 최고 단계를 바로 ‘증언’ 즉 ‘샤하다’로 삼았다. 자신이 말한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의지이자 결심을 나타내는 단어다.
예루살렘 구도시 안에 있는 기독교 성당인 성묘교회(聖墓敎會)의 내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시신이 묻혔다 부활한 곳으로, 성물을 든 신자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뉘었던 석판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예수와 빌라도의 ‘진리’는 서로 다른 차원의 언어
예수는 자신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이성에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진리’에 해당하는 ‘알레쎄이아(Aletheia)’는 “숨길 수 없는 것, 드러나는 것”이란 의미다.
서양적인 사고에서 ‘진리’란 변하지 않으며 왜곡이 없는 것이며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의 구분을 넘어선 어떤 것이며 우주 안에 항상 편만한 것이다. 인간과 우주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진리일 수가 없다. 빌라도는 아마도 그리스-로마의 사고 안에서 진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피안 세계의 이데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빌라도에게 ‘진리’는 본질과 현상이 일치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었는지 모른다.
‘진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에메쓰’이고 아람어로는 ‘아무나’이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어근이 ‘-m-n’이다. 그리스도교에서 기도를 마친 후 말하는 ‘아멘(amen)’과 같은 어원에서 왔다.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에메쓰’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중요한 결정을 하고 그 결심을 지키려는 충성심과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갖는 마음가짐이다. 이 마음가짐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삶이 서서히 변하고, 그른 길에서 벗어나 바른 길에 들어서며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것을 지키려는 일관된 삶의 태도와 같은 것이다. ‘진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여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초월주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과정인 ‘믿음’이다.
예수는 “나는 진리, 즉 인간 안에 씨앗으로 존재하는 신의 형상을 잘 키워 그것에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심지어는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나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빌라도가 상정한 세계관과 예수가 상정한 세계관이 이렇게 전혀 달랐다.
빌라도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유대인을 십자가에 처형한 경험이 있지만 예수는 이전의 메시아들과는 달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열렬한 황제숭배자인 빌라도에게 예수의 믿음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파괴하는 미신일 뿐이었다.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머리맡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붙여놓았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