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우리역사는 중국 한족과의 자랑스런 투쟁사"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上)- "우리는 예맥족의 후예"
그는 20여 년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앞선 중국측 1차 사료 발굴을 통해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작년 10월, 上ㆍ下 두 편에 걸쳐 그의 인터뷰가 나가자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심원장의 주장과 노력에 격려를 보냈지만, 일부는 그가 지나친 민족주의적 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 인터뷰에서 ‘고조선’과 ‘낙랑’의 영토 고증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면, 이번 인터뷰에서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삼국시대에 관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번 인터뷰도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심백강 원장을 또다시 인터뷰 한 이유
필자는 작년 10월, 심백강(沈伯綱)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의 인터뷰를 <조선Pub>을 통해 소개했다.
당시 심 원장은 우리 고대사와 관련 두 권의 책을 펴낸 상태였다.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바른 역사)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이라는 두 책에서 심 원장은 《사고전서》에 실린 우리 고대사 사료를 찾아내 소개함으로써, 후학(後學)들이 1차 사료를 통한 고대사 연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심 원장은 이 두 책에서 ‘고조선’과 ‘낙랑’의 강역(疆域)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심 원장은 “고조선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중심 활동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원 대륙이었으며, 오늘날 우리 강단 사학계는 일제(日帝)가 왜곡해 놓은 고대사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심 원장은 이 두 책 발간에 이어 현재 《사고전서》에서 ‘삼국시대’ 관련 기록을 모두 뽑아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책이 발간되면 다시 한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 심백강 원장으로부터 《사고전서》 시리즈 세 번째 편인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가 발간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앞서 두 권의 책이 《사고전서》 사료의 원문을 소개하고, 주석과 해설을 단 다소 무거운 편집이었다면, 3번째 펴낸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는 한눈에 봐도 누구라도 읽기 쉽도록 편집한 대중역사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문에는 다양한 컬러 사진과 지도를 곁들여 내용의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구성했다.
필자를 만난 심 원장은 “최근 펴낸 세 책을 계기로 우리 고대사의 근간을 바로 세우기 위한 나의 수십년 간 노력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며 “방대한 중국 측의 1차 사료(사고전서)를 통해 한중일(韓中日)의 역사학자 그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 고대사를 저술했다”고 자평했다.
“앞서 발간한 두 책은 《사고전서》에 기록된 우리 역사에 관한 1차 사료를 충실하게 소개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는 우리 역사(고대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전의 인터뷰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인 ‘대동강 낙랑설’을 통설로 받아들여 우리 역사를 반도의 역사로 축소시킨 내용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교과서는 한 나라 국사교육의 길잡이가 되는 책입니다. 국사교과서가 잘못 서술되어 민족정기를 훼손시키고 있다면 그것보다 심각한 사태가 어디 있겠습니까.”
심 원장은 “국사교사과서 어느 곳에도 우리 민족의 기원에 관해 정확하게 기술해 놓은 것이 없다”며 “이번에 펴낸 책은 국사교과서가 잘못 가르치고 있거나, 당연히 가르쳐야 할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바로잡고 보완하기 위해 집필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 민족이 광대한 중원 대륙에서 중국 한족(漢族)과 투쟁하며 전개해온 자랑스러운 실제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안에서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왜곡ㆍ조작된 엉터리 역사를 배우다 보니 우리 국민은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아무런 자긍심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자기들의 위대했던 역사를 축소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았습니까? 자기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엉터리 역사를 배우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10월의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 펴낸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의 내용까지 소개해야, 심백강 원장이 일생의 연구를 통해 바로 세우고자 한 우리 고대사의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다시 한번 심 원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예맥족이 바로 우리 민족"
-이번 책에서 소개된 학설도 앞서 펴낸 두 책의 경우처럼 《사고전서》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셨겠군요.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저의 학설은 제가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원래 있던 기록을 찾아내어 소개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 역사가 왜곡되지 않고 제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면 지금까지 제가 주장한 학설이 ‘새로운 학설’이 아니라, 당연히 ‘정설(定說)’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가 남긴 기록은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20여년 동안 중국 측의 역사 기록인 《사고전서》를 뒤져 우리 고대사를 복원해 온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은 “후대에 의해 조작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1차 사료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들여다보니, 그동안 미로 속에서 헤매던 역사의 퍼즐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들어가기 시작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하다’ 혹은 ‘훌륭하다’며 칭송하는 기록을 남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1000년 혹은 1500년 전에 우리와 대립했던 중국 한족(漢族)이나 북방의 선비족(鮮卑族) 같은 민족이 우리를 위대하다고 기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그들이 우리 민족이 중원대륙에서 자기들과 투쟁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 기록이야말로 객관적인 기록이며, 믿을 수 있는 기록입니다. 더군다나 한족은 자기들의 역사를 쓰면서 부수적으로 우리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런 한족의 눈에 우리가 그렇게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위대한 민족으로 조명되었는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너무나 초라하게 인식해 왔던 것입니다.”
심 원장이 최근 펴낸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는 모두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고조선과 낙랑에 관한 내용은 이미 앞서 펴낸 두 권의 책에 소개된 내용을 좀 더 알기 쉽게 요약한 내용이며, 나머지 5개 장은 《사고전서》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기원과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기원과 변천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원장님께서는 이번 책 첫 장에서 곧바로 ‘예맥족(濊貊族)’을 언급하셨습니다. 예맥족과 우리 민족은 어떤 관계인가요.
“예맥족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우리 민족입니다. 중국인은 한족(漢族)이라고 하면 끝이지만, 우리 민족은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가 매우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상고시대에 우리 민족이 예족, 맥족, 한족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한족과 예족은 맥족에서 분파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맥족이라고 하면 예족과 한족을 모두 포괄하는 표현이 되지만, ‘한민족’이라고 하면 예족과 맥족을 분리한 한개의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민족을 지칭할 때 ‘한민족’ 보다는 우리 민족의 원류와 분파된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밝달민족’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산동성 곡부에 있는 소호릉 입구(좌)와 소호릉(우). 소호릉은 다른 한족 황제들의 무덤과 달리 동이족의 무덤 형태인 적석총 형태로 되어 있다. 중국의 시조 황제의 탄생지도 이곳 곡부에 조성돼 있다. 심백강 원장은 "산동성은 서주(西周) 이전에는 동이족(우이ㆍ내이)의 근거지였고, 오제(五帝) 시대에는 조이(鳥夷) 소호의 활동무대였다"며 "최근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한족의 시조인 황제가 동이족에서 발원했다'고 주장하거나, '원시 한족 형성에 동이족 집단이 우세한 주체가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밝달민족’이라면 언뜻 듣기에도 우리가 흔히 우리 겨레를 일컬을 때 쓰는 ‘배달민족’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물론 ‘배달민족’도 밝달민족과 같은 말이지만, 배달민족은 중국 한족이 한자로 ‘밝달’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한자로 옮겨서 표현하는 과정에서 굳어진 중국식 용어입니다. 우리 민족을 왜 ‘밝달민족’ 혹은 ‘배달민족’이라고 했는지 이기백이나 이병도 같은 역사학자도 명확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교과서를 보면 우리 민족에 대한 설명은 <언어학적으로 우랄 알타이 계통의 어족과 가깝고 오래전부터 하나의 민족단위를 형성해서 농경생활을 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는 한 문장이 전부입니다. 너무 개괄적이라 이 설명만으로는 우리 민족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밝달민족’이 왜 ‘한민족’보다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더 정확한 표현이 된다는 것인지 그 근거를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요.
“《삼국유사》에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사실을 전하면서 국조를 ‘단군(檀君)’이라고 했습니다.
단군은 ‘밝달 단(檀)’ ‘임금 군(君)’, 즉 그 자체로 ‘밝달임금’의 한자표기입니다. 그리고, 춘추시대 중국 고전인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발조선의 한자 ‘발’은 우리말 ‘밝’의 다른 표현이므로 ‘발조선’은 곧 ‘밝달조선’과 같은 말입니다. 《한서(漢書)》<고제기(高帝紀)> 「북맥(北貊)」 조항에 <맥족은 동북방에 살고 있는데 삼한의 무리가 다 맥족의 종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기록으로 마한ㆍ진한ㆍ변한으로 일컬어지는 삼한의 원류가 바로 맥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밝달민족이 왜 예족ㆍ맥족ㆍ한족 등 다른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건지요.
“예(濊)는 우리말 ‘새’의 뜻이고, 맥(貊)은 우리말 ‘밝’의 뜻이며, 한(韓)은 우리말 환(桓)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먼 옛날 우리 민족은 아침 해가 선명한 동방에 터전을 이루고 살았으며 태양을 숭배하였습니다.
‘새’는 ‘새해’, ‘새 아침’, ‘새 봄’ 등 ‘새롭다’는 우리말의 줄임말이고 ‘밝’과 ‘한’은 밝고 환한 태양을 상징하는 우리 고유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족ㆍ맥족ㆍ한족에 대한 용어들은 태양을 숭배하며 살았던 밝달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이들 민족의 본류와 지류를 구분할 필요성이 있었을 테고, 거주지가 이동됨에 따라 새, 밝, 한 등으로 호칭 상의 구분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우리 고유 언어를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예(濊), 맥(貊), 한(韓ㆍ桓)으로 표기된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의 주 활동지인 고대의 요서지역(고조선과 낙랑군의 중심무대). 동으로는 발해만 인근 노룡현에서 서쪽으로는 수성진의 갈석산(백석산과 낭아산)까지 경계가 이어진다.
중국 학자, "한족을 제외하고 맥족이 가장 수준 높은 민족"
-어떻게 새ㆍ밝ㆍ한이 한자의 예ㆍ맥ㆍ한으로 발음이 변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요.
“예는 원래 濊가 아니라 세(歲)였는데, 뒤에 중국인들이 옆에 물수(氵)나 벼화(禾)변을 덧붙여 예(濊)나 예(穢)가 되었고, 맥은 원래 백(百) 또는 백(白)이었는데 여기에 치(豸) 변을 첨가하여 맥(貊)이 되었으며, 맥(貊)에서 다시 맥(貉)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새롭다’는 음의 세(歲)가 더럽다는 뜻인 예(濊)가 되고, ‘밝다’라는 우리말 음을 표기한 백(百ㆍ白)은 오랑캐 맥(貊)이 된 것이죠.
이는 중국이 원수같이 여긴 훈족(薰族)을 흉노족(匈奴族)으로 바꾸어 부른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향기로울 훈(薰)자와 음이 비슷한 호(胡)자를 써서 호인(胡人)이라고 하다가, 다시 호자를 음이 비슷한 흉(匈: 오랑캐)으로 바꾸고 인(人)까지 노(奴)로 바꾸어 ‘흉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민족을 배척하고 한족 중심주의를 지향해온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민족적 관점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맥의 원래 음이 ‘밝(박)’에서 유래했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유교의 경전 중의 하나인 《주례(周禮)》에서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주례는 춘추시대 이전인 서주(西周) 시대 기록인데 당시 사냥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대대적인 국가 행사가 일년에 4차례 정도 벌어졌습니다.
《주례》에 <사냥할 때 군신(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맥제(貊祭)라고 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후 후한(後漢)시대 대학자인 정현(鄭玄)이 《주례》에 나오는 이 맥제에 대한 주석을 내면서 <맥제의 제사지내는 대상은 군신 치우>라고 하였고, 맥자에 대해서는 <맥이 아니라, ‘십’ ‘백’의 숫자 백과 같은 발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정현의 주장을 따르면, 서주 시대에 사냥할 때 지냈던 맥제가 밝달족의 승리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치우에게 지냈던 제사인데, 그 제사의 명칭은 맥제가 아니라 ‘박제’, 즉 ‘밝달제’로 발음해야 옳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정현은 어떤 학자였습니까.
“역대 다른 중국 학자들은 맥을 해석할 때 맥자의 뜻을 풀어서 그 의미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정현만은 유독 발음에 주목하면서 맥이 아닌 백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동이문화(東夷文化)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현이 살았던 산동성 청도 불기산(不箕山) 지역은 춘추시대까지 동이족의 하나인 내이(萊夷)가 활동하던 지역입니다.
불기산은 ‘불족’ 즉 ‘밝달족’과 ‘기족’ 즉 ‘기자족’이 활동한 데서 명칭이 유래했다고 <청도유적(靑島遺跡)>에 소개돼 있습니다. 불기산은 지금은 철기산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수천년간 동이족이 생활했던 곳으로 정현이 거기서 동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쌓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맥’이 바로 ‘백’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며, ‘맥족’은 바로 ‘밝달족’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은 “우리는 그동안 우리 민족이 예족ㆍ맥족ㆍ한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맥족이 밝달민족과 어떤 관계인지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었는데, 《주례》와 정현의 주석을 통해 확실한 문헌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 것”이라며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민족사를 바로잡을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되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중국 학자들은 예맥족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하고 있습니까.
“중국 강서성 출신으로 대만 중앙연구원 민족학연구소장을 역임한 문숭일(文崇一)은 <예맥민족과 그 문화>라는 책에서 <예맥족은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이며 동시에 강대한 민족이다. 한나라 초기에 중국의 북쪽지역(섬서ㆍ산서ㆍ하북성의 북쪽)과 황해ㆍ발해연안에 모두 그들의 족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활동했던 강대한 민족으로 간주한 거죠.
문숭일은 또 <예맥민족을 상고시대 소호씨(少昊氏)의 조이(鳥夷) 계통에 속하는 민족>이라고 했는데, 소호씨는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와 함께 동이족 시조의 한 분으로 여겨지는 분으로 중국 역사의 출발점에 해당합니다. 또한 문숭일은 <맥족은 순임금이나 은나라와는 정치적 문화적으로가 아닌 혈통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심 원장은 “문숭일의 말을 정리하면, ‘예맥민족은 중국 역사문화에서 아류가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고 개척한 주체요 주인이었다는 소리’”라며 “이런 예맥의 적통을 오늘에 계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의 민족사학자가 이런 소리를 하면 식민사학에 오염된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국수주의에 빠진 재야사학자의 잠꼬대쯤으로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심 원장은 “하지만 문숭일은 ‘오랜 역사를 지닌 강대한 민족이었던 고대의 예맥민족이 오늘날의 누구인가를 가정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며 “이에 반해 중국 근현대 역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여사면(呂思勉ㆍ1884~1957)은 대놓고 ‘예맥족의 후예가 바로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ㆍ백제로 이어진 우리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밝혔다”고 말했다.
“여사면은 <동양역사상에서 한족을 제외하고는 맥족이 가장 수준이 높은 민족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양역사상에서 한족이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진나라ㆍ한나라 이후>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진ㆍ한 이전 동양역사상 수준이 가장 높았던 위대한 민족이 맥족이었다는 논리가 됩니다.
여사면은 특히 <고대 조선은 결코 한반도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대체로 연나라의 개척에 의해서 동쪽으로 발전해 나간 것>이라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이는 전국시대 연나라 진개(秦開)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 서쪽 강역을 상실하기 이전까지 고조선은 한반도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동강 낙랑설’을 중심으로 하는 반도사관에 빠져 있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맨 위 왼쪽 사진에서 시계방향으로 낭아산 정상, 낭아산 입구, 백석산 입구, 백석산 정상으로 가는 길의 모습. 심백강 원장은 백석산과 낭아산이 중국 《전한서》에 등장하는 갈석산이라는 것을 사료를 통해 고증했다. 낭아산은 백석산의 줄기산이다. 《전한서》에 '한무제가 갈석을 지나 현도ㆍ낙랑으로써 군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심 원장은 "이 기록은 곧 갈석산 동쪽 지역에 우리 고조선(낙랑군)의 영토가 있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기자가 망명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조선'
-지난번 인터뷰에서 고조선과 낙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이며, 서쪽 경계선이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 부근의 백석산(白石山)까지 이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일대에 낙랑군이 설치되었고, 이후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중심 무대였다’는 것이 원장님이 주장하신 요지였습니다.
“저의 주장은 모두 수천년 전 사람들이 기록한 중국의 1차 사료에 근거한 내용입니다. 사료는 오래될수록 신뢰성이 있습니다. 《회남자(淮南子)》의 저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서기전 179~서기전 122)이 조선을 설명하면서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경유한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기 이전입니다.
갈석산은 제가 지난 인터뷰에서 고증했듯이 오늘날 보정시 수성진 부근에 있는 산으로 현재는 ‘백석산’ ‘낭아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유안의 말만 가지고도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갈석산 동쪽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죠.”
-고조선과 낙랑에 관해서는 지난번 인터뷰에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다시 한 번 간략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고조선과 낙랑의 서쪽 변방이 갈석산 즉 현재의 백석산 지역이라면, 그 중심지라는 노룡현은 어디입니까.
“노룡현은 현재 휴양지로 유명한 발해만 부근의 하북성 진황도시에 그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이성계의 조선이 생기기 전 송나라 사람 낙사(樂史)가 쓴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조항에는 바로 <조선성: 기자가 봉함을 받은 곳이다. 지금 황폐화된 옛 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송나라 때까지 다 무너진 고조선의 조선성 유적이 이곳에 보존돼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중국인이 기록한 송대 4대사서 중의 하나로 꼽히는 《태평환우기》라는 책에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 교과서에서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고, 고조선도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가르치는 게 얼마나 엉터리라는 게 드러난 것입니다.”
-지난번 인터뷰에서 은(殷)나라 왕자였던 기자(箕子)가 은의 쇠망 후 찾아간 지역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셨는데요.
“기자가 조선으로 간 사실은 《사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서(晉書)》지리지 <평주 낙랑군 조선현> 조항에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지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나라 때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에서 평주에 관한 기록을 보면 <평주는 은나라 때는 고죽국, 춘추시대는 산융ㆍ비자, 진나라 때는 우북평, 요서2군, 양한(兩漢)에서 위진(魏秦)시대까지는 요서군 지역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찾아갔던 조선은 바로 고죽국ㆍ산융국ㆍ비자국ㆍ우북평군ㆍ요서군으로, 이 지역은 시대에 따라 이름이 바뀌어 왔고, 진나라 때는 평주로 바뀐 곳입니다. 기자 당시로 말하면 단군조선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
심 원장은 “자신의 조국인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의 신하 되기를 거부한 기자가 동쪽으로 떠나 와 주나라의 통치권 밖에 있던 독립국가이자 형제의 나라인 요서조선(오늘날 요하를 기준으로 한 요서지역이 아님)에 찾아갔던 것은 중국 정사(正史)가 인정하는 사실”이라고 덧붙혔다.
하북성 지도에서 백석산과 낭아산의 모습. 그 동쪽에 수성진이 보인다. 서진 시대 지리서인《진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거기서 장성(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다. 심백강 원장은 "사료에 기록된 낙랑군의 영토 설명에 부합하려면 수성현이라는 지명이 있고, 갈석산이 있고, 장성의 기점이 있어야 한다"며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지점이 바로 현재의 수정진"이라고 설명했다.
고조선과 낙랑군의 영토가 한반도로 옮겨간 이유
-하북성 노룡현에 있던 기자조선과 낙랑군의 조선현이 무슨 연유로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졌습니까.
“이처럼 명백한 사료가 있는데도 조선현은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슬그머니 압록강 이남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등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대청일통지》는 평주의 기자조선을 한반도의 이씨(李氏) 조선과 결부시키고, 평주의 낙랑군 조선현을 ‘압록강 이남의 낙랑군 조선현’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심원장은 상념에 잠긴 듯 한참동안 천장을 응시하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명말청초에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주의자 고조우(顧祖禹)는《독사방여기요》라는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책을 저술했는데 〈영평부 노룡현〉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조선성은 영평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한(漢) 나라의 낙랑군에 소속된 현(縣)이다. 지금 조선국의 국경 안에 있다.〉 고조우는 하북성 영평부에 있는 조선성을 설명하면서〈이는 한 나라의 낙랑군에 소속된 현인데 지금 조선국의 경내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비오는 달밤에 단 둘이 홀로 앉아’와 같은 어불성설입니다.
이씨조선을 얕잡아 본 명나라의 민족주의자들이 이처럼 엉터리로 조작한 논리를 일제가 수용한 다음 거기에 날개를 달아 ‘대동강 낙랑설’로 고착화 되어 반도사관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때 펴낸 《독사방여기요》나《대청일통지》는 사료적 가치로 볼 때도 《진서》《위서》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이 나라가 광복된지 70년이 된 지금까지 이런 왜곡된 사관이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으니 이걸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 한마디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원장님께서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곧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 되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낙랑군의 위치고증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역사학계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낙랑군 대동강설’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이신데요.
“낙랑군이 어디 있었느냐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가 결정되고, 한사군의 위치 여하에 따라 우리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발상지와 강역 및 고구려의 평양성 등 상고사의 물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낙랑군에 ‘한국사가 대륙사인가 아니면 반도사인가’를 결정짓는 중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명청(明淸) 시기의 조선을 얕잡아 본 중국인 학자들과 일제 식민통치의 영구화를 노린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과 낙랑군을 한국사 왜곡의 타깃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 한국사에서 낙랑군의 위치 고증이 왜 중요한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사기》<진시황본기> 에 진나라의 강역을 설명하면서 <땅이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당나라의 장수절(張守節)이 《사기》를 설명하는 주석서에서 《괄지지(括地志)》라는 지리서를 인용하면서 위에 나오는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이는 본래 한나라의 낙랑군 왕험성이며 바로 고조선이다.>
이 말은 고조선에서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다시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시대에 따라서 그 지명 상의 변동이 있었을 뿐 고구려 평양성과 낙랑군 왕험성, 고조선 등은 사실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낙랑군이 발해 부근의 요서지역(오늘날 요서지역이 아님)에 있었다면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성도 대동강이 아닌 요서지방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다음 편에서 계속. 다음 편에서는 '삼국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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