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행복 개념에 대한 고찰
강 준 호
[요 약 문]
도덕적 삶과 행복한 삶의 관계에 대한 칸트 윤리학의 대답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된 칸트의 입장에 대하여 두 가지 대조적인 해석을 가정한다.
하나는 칸트 윤리학은 순전히 의무에 관한 것으로서, 거기서 행복은 그다지 중대한 비중과 역할을 갖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윤리학에서 행복과 도덕은 어느 지점에선가 확실한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해석이다. 전자는 그의 윤리학에 대한 전형적 해석에 가깝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이런 해석에 도전하는 후자의 해석이 의존하는 논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런 검토의 과정에서, 필자는 행복의 세 가지 측면을 살펴볼 것이다:
(1) 조건적 선으로서의 행복,
(2) 간접적 의무로서의 행복,
(3) 최고선의 구성요소로서의 행복.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칸트가 이 세 가지 측면에서 행복과 도덕의 분명한 연결을 인정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런 주장은 그것을 확증할만한 근거보다 그것을 반증할만한 더 많은 근거에 둘러싸여 있다. 그럼에도 도덕적 삶과 행복한 삶의 갈등이 윤리학의 한 중요한 문제라고 할 때, 칸트 윤리학에서도 도덕과 행복의 분명한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해석의 가능성은 그의 윤리학에 보다 풍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 주요어: 칸트, 행복, 조건적 선, 간접적 의무, 최고선.
*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1. 머리말
도덕적 삶과 행복한 삶의 관계에 대한 통념은 다분히 모순적이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흔히 진실한 도덕적 삶과 행위는 당연히 행복감을 수반한다고 추상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올바르게는 살아왔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그의 말의 진실성을 의심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도덕적 삶과 행위의 선택이 때로는, 어쩌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불행이나 고통을 수반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올바르게만 살기는 힘들다고 푸념한다. 그런데 도덕적 삶과 행복한 삶의 관계에 대한 이렇게 비정합적인 관념은 이 관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부족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 철학자 칸트에게선 이 관계에 대한 정합적 관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칸트의 행복 개념에 대한, 보다 정확하게는 그의 윤리학에서 행복과 도덕의 연관에 대하여 극히 대조적인 두 가지 해석이 있다고 가정하자.
첫번째는 그의 윤리학은 순전히 의무에 관한 것이어서 거기서 행복 개념은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칸트에겐 어떠한 도덕적 행위에서도 행복이 의무에 선행하는 동기부여의 근거일 수 없다. 오히려 도덕적 행위의 본질은 그런 행위가 그것의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고려 없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두 번째는 그의 윤리학에서 행복은 실천적으로 도덕과 매우 중대한 연결고리를 갖는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칸트의 행복 개념은 어쩌면 목적론적 윤리이론과도 양립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칸트 윤리학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 가운데 그의 행복 개념에 집중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그럼에도 위에서 가정한 두 해석들은 실제로는 어느 정도 밀도를 가진 스펙트럼의 양끝에 놓여있다. 이 스펙트럼의 내부에는 행복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칸트의 여러 주장들 사이에는 심각한 애매함이 있다는 해석을 비롯하여, 여러 측면에서 두 번째 해석에 근접하는 입장이나 위의 두 해석들 모두가 결함이 있다는 의견이 포함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의 주된 목적은 이렇게 상충하는 두 가정적 해석들의 근거를 확인하고, 특히 두 번째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제시된 논증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첫 번째 해석의 궁극적 타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해석, 요컨대 칸트 윤리학에서 행복 개념의 비중이나 역할을 저평가하는 해석에 대항하는 논증들 중 일부는 그가 선의지나 덕을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유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1)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2) 그는 선의지가 무조건적으로 선하며 그 자체로 선한 유일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첫 번째 해석에 대항하는 논증에서 가장 흔히 인용되는 것은 선의지가 “유일한 선이고 완전한 선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GMM, 4:396). 그가 ‘복지’(well-being)나 ‘경향성의 만족’, 때로는 단순히 ‘쾌락’ 등과 동일시하는 행복은 비록 선의지처럼 무조건적이고 본래적인(inherent) 가치는 아니나 분명 어떤 가치를 가진다. 선의지의 무조건적 선함과 대비하여, 우리는 행복을 ‘조건적 선’(conditional good)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조건적 선의 실현이 도덕적 행위나 의무 자체나 그것을 실행할 동기에 어떤 연관을 갖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첫 번째 해석에 대항하는 또 다른 논증들은 ‘최고선’(the highest good) 개념에 대한 칸트의 논의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것들에 따르면, 비록 순수 이성의 순전한 이상에 불과하며 이 세계에서 성취될 가망이 없을지라도, 실천 이성의 최종 목적인 최고선은 행복을 그것의 구성요소로 포함한다. 물론 최고선의 구성에서 행복이 어떤 비중과 역할을 차지하는가에 대한 엇갈린 해석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비중과 역할의 중대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곧 위에서 가정한 두 번째 해석으로 이어지거나 그 해석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게서 행복은 도덕적 행위의 결심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해석은 여전히 유력하다.
1) Christine Korsgaard, Creating the Kingdom of En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96, p. 118.
2) Immanuel Kant, Groundwork of the Metaphysics of Morals(1785), in Mary J. Gregor (trans), Practic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이하 GMM으로 표기함.
한글 번역은 임마누엘 칸트,『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이원봉 역, 책세상, 2002를 일부 참조함.
2. 조건적 선으로서의 행복
『도덕 형이상학 정초』는 선의지 혹은 덕이 유일한 무조건적 선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바로 그 다음에 칸트는 상식적으로 선하거나 바람직하다고 간주되는 것들을 ― “지성, 재치, 판단력 … 또는 용기, 단호함, 참을성” 등과 같은 소위 “자연의 선물”(gifts of nature)과 “권력, 부, 명예, 건강, … 행복” 등과 같은 소위 “행운의 선물”(gifts of fortune)을 ― 선의지와 비교한다(GMM, 4:393).
이런 비교의 요지는 의지의 선함은 어떤 특정 목적의 실현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선한데 반하여, 이런 선물들의 선함은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의지에 항상 의존한다는 것이다. 즉 이 선물들은 그 자체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악한의 냉철함은 그를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를 냉철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첫눈에 그를 훨씬 더 혐오스럽게 만든다”(GMM, 4:394).
이는 행복에도 적용된다. 우선 칸트는 행복을 다양한 용어들로 정의했다. 이런 정의를 크게 두 가지로 단순화하면, 하나는 (1) 경향성 혹은 욕망의 만족이고, 다른 하나는 (2) 쾌락이라는 심리상태이다.
흔히 욕망의 만족과 쾌락은 일치하여, 실천적으로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동일하지 않다. 때로는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그것에 실망하거나 아무 쾌락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았던 대상에게서 예상치 못한 쾌락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더 단순하자면, 칸트의 행복 개념은 우리의 감각적 상태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요컨대 그것은 감각적 또는 육체적 선이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 ‘평화로움’, ‘유쾌함’, ‘안락함’ 등과 같은 느낌(feeling)으로 주어진다. 그런데『도덕 형이상학』에서3) 칸트는 “어떠한 도덕 원칙도 결코 느낌에 …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MM, 6:376). 그러므로 “도덕적 행복”(moral happiness)이란 것은 없다(MM, 6:387-8).4)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교양을 갖춘 이성이 인생을 즐기고 행복을 누리려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진정한 만족(true satisfaction)에서 더욱 멀어진다”고 말할 때(GMM,4:395: 필자의 강조), 도대체 칸트가 이야기하는 “진정한 만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우리의 이성이 고유한 종류의 만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만족의 정체가 무엇이든, 적어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일컬어지는 느낌 혹은 감각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한 듯하다(MM, 6:399-400).5) 만약 이성의 산물인 그런 만족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의식”일 것이다(MM, 6:377).
인간 본성에 대한 칸트의 논증에 따르면, 우리의 실천이성은 우리가 그런 유쾌한 느낌에 안주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가 필요에 대한 만족을 얻는 데에는 차라리 우리의 동물적 본능이 이성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성은 경향성이나 열정에 의하여 설정된 목적을 달성을 위한 적절한 수단을 찾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성은 경향성의 힘을 극복하고 그 자체의 목적, 즉 도덕적 의무인 목적을 설정할 힘을 갖고 있다. 오닐(Onora O’Neill)은 이 논증의 결론을 이렇게 요약한다:
“칸트의 주장은 실천이성을 지닌 누구라도 ― 유한한 이성을 가진 존재일지라도 ― 목적에 대한 수단을 계산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6)
이런 이성의 힘, 즉 도덕적 의무인 목적을 선택할 능력은 우리가 경향성의 대상을 추구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3) Immanuel Kant, The Metaphysics of Morals(1797), in Mary J. Gregor(trans.), Practic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이하 MM으로 표기함.
4) 여기서 칸트는 일부 사람들이 “자연적 행복”과 구별하여 “도덕적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는 ‘행복’ 개념의 오용임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들이 “도덕적 행복”이라고 부르는 느낌은 오로지 “완전성”(perfection)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5) 칸트는 “도덕적 느낌”(moral feeling)을 “단지 우리의 행동이 의무의 법칙에 일치하거나 거스름을 의식함으로부터 나오는 쾌나 불쾌를 느끼는 감수성”이라고 정의한다. 한편으론 이렇게 명확한 정의를 제공하면서도, 그는 그런 느낌의 원천을 “불가사의하다”(inscrutable)고 묘사한다. 도덕 원칙은 느낌에 근거할 수 없고, ‘도덕적 행복’이란 표현은 ‘행복’ 개념의 오용이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는 ‘도덕적 느낌’이란 표현을 자연스레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책무에 대한 모든 의식은 도덕적 느낌에 의존한다”고도 말한다.
6) onora O’Neill, Constructions of Reason: Explorations of Kant’s Practic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89, pp. 73-4.
행복 자체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갖는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의 선함이 조건적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도덕적 의무인 목적과 구별되어야 한다.
"경향성의 모든 대상은 조건적 가치만을 가진다. 경향성과 그것에 근거한 필요가 없다면, 그 경향성의 대상은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요의 원천인 경향성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길 바라게 만들 만한 절대적 가치가 없기에, 그 경향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모든 이성적 존재의 보편적 바람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얻어지는 모든 대상의 가치는 항상 조건적이다(GMM, 4:428)."
모든 경향성의 대상은 조건적 가치만을 갖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모든 경향성의 대상이 지닐 가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부는 모든 사람이 얻길 바라는 대상인 듯하지만, 이런 대상의 가치조차 주변상황이나 다른 목적과의 충돌에 의하여 변할 수 있다. 예컨대 완전무결한 인격으로 존경받길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탐욕을 억누른다. 어떠한 경향성의 대상도 일관적이고 무조건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
모든 경향성의 대상은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기 전에는 전혀 객관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다. 권력과 부와 건강은 그 자체로는 객관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다. 코스가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어떤 것이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조건적 가치를 가지며 그것의 선함의 조건이 충족된 경우에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7)
조건적 선인 행복은 주관적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객관적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다만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그것의 가치는 객관적일 수 없다.
그런데 어떤 대상의 선함이 조건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나 경향성 자체가 우연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행복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모든 이성적 존재들에 (그들이 명령들이 적용되는 의존적 존재인 한에서) 실재한다고 전제할 수 있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 필연성에 의하여 그들 모두가 실제로 갖고 있다고 확실하게 가정할 수 있는 하나의 의도가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하려는 의도이다(GMM,4:415)."
칸트는 자유와 성교에 대한 자연적 욕망을 갖듯이 우리는 자연적으로 행복에 대한 경향성을 갖는다고 말한다(GMM, 4:399; MM, 6:386-7).8) 이런 경향성의 영향으로 우리 모두는 행복을 자연적 필연성에 의하여 우리의 목적으로 삼는다. 요컨대 그는 동시대의 영국 공리주의자들이 전제했던 심리적 쾌락주의(psychological hedonism)의 가정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경향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모든 이성적 존재의 보편적 바람”이란 말에서 칸트는 실현가능한 바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또한 우리는 행복을 자연적 필연성에 의하여 우리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가정은 칸트의 중대한 명제와 충돌하는 듯하다. 그 명제에 따르면, 의지된 목적은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지 결코 자연에 의하여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행동의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행동하는 주체의 편에서는 자유의 행위이지 자연적 결과가 아니다”(MM, 6:385).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자연적 필연성에 의하여 가지는 목적이 없다면, 마땅히 우리는 행복을 그런 필연성에 의하여 우리의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
이런 충돌에 대하여 존슨(R.N. Johnson)은 칸트의 두 주장들, 즉 행복은 우리의 필연적 목적이라는 주장과 우리의 목적은 자유롭게 선택된다는 주장을 양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행복에 대한 칸트의 견해는 비일관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9)
이런 태도와는 달리, 앨런 우드(Allen Wood)는 대안적 해석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이성의 목적일 수 있다:
“이성적 존재는 자신의 행복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 그 행복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합리성의 본질에 해당한다.”10)
자연적 필연성에 대한 언급은 어쩌면 우리의 이성의 본성을 잘못 표현한 것일 수 있다. 행복을 이성에서 나온 개념(concept)으로 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왜냐하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행복 개념은 우리의 모든 경향성의 만족의 전체에 대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자신의 온갖 경향성들을 좇을지라도 그것들 전체에 대한 개념은 갖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개념은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행복이 이성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합리적으로 그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자유의 행위일 것이다.
이런 우드의 논증에는 분명한 결함이 있다. 행복이 이성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해서, 자신의 행복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요구된다는 결론은 따라오지 않는다. 요컨대 그것이 이성의 개념이라는 사실로부터 이성의 목적이 된다는 결론으로 건너뛸 순 없다.
무엇보다 칸트는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는 정언명령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그가 행복을 모든 이성적 행위자가 채택해야 할 이성의 목적이라고 간주했을 리가 없다. 즉 행복은 이성의 목적일 수 없다.11)
7) Christine Korsgaard, Creating the Kingdom of En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96, p. 258.
8) 또한 Immanuel Kant, Anthology from a Pragmatic Point of View, Mary J. Gregor(trans.), Martinus Nijhoff, 1974, 7:267-8을 보시오.
9) R.N. Johnson, "Happiness as a Natural End", in M. Timmons (ed.), Kant’s Metaphysics of Morals: Interpretative Essay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2002. 같은 문제에 대하여 코스가아드 역시 칸트의 주장들을 “전혀 불가해하다”고 말한다. Christine Korsgaard, "Motivation, Metaphysics, and the Value of the Self: Reply to Ginsborg, Schneewind, and Guyer", in Ethics 109, 1998, pp. 57.
10) Allen Wood, Kant’s Ethical Thought,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99, p. 66.
11) Alison Hills, "Kant on Happiness and Reason", in History of Philosophy Quarterly 23,006, p. 247. 이와 같은 결론을 주장하면서, 힐스는 우드의 논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힐스 자신도 별다른 근거 없이 칸트가 행복을 자연적으로 필연적인 목적이라고 말했을 리가 없다고만 주장할 뿐이다.
행복의 조건적 선함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서, 행복의 선함에 대한 필수적 조건은 선의지이다. 선의지는 무조건적인 선함을 지닌 동시에 가치의 원천이다. 그러나 선의지에 의하여 어떤 대상에 부여된 선함이 도덕적 선함은 아니다. 도덕적 선함이나 가치를 지닌 유일한 것은 선의지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언명령과 정언명령의 구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가언명령과 정언명령의 본질적 차이점은 후자만이 “도덕의 명령”이라는 점이다(GMM, 4:416). 행복을 위한 기술로서 가언명령은 “무조건적이면서 객관적인, 따라서 보편타당한 필연성”을 지닌 도덕명령이 아니다.
그리하여 행복이 행위의 확실한 원칙일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행복은 확실한 선이 아니라 선택적 목표들의 총합이다.
만약 행복이 “하나의 절대적 전체, 요컨대 현재 상태와 모든 미래 상태에서 나의 복지의 절대적 전체, 즉 최대량”이라고 정의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확정적 개념을 가질 수 없다.
(2) 행복을 획득할 명확한 기술이 없다. 칸트에 따르면, 누구도 무엇이 자신을 진정 행복하게 해줄지를 결정할 수 있는 원칙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원칙은 신적인 전지전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GMM, 4:418). 이런 의미에서 가언명령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상태에서만 효과를 보이는 조언이나 권고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나 자신의 행복의 추구에 어떤 도덕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 간접적 의무로서의 행복
지금까지의 논의는 처음에 가정한 두 해석들 중 첫 번째, 즉 칸트 윤리학에서 행복의 비중과 역할을 부정하는 해석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행복에 관한 논의의 대부분은 더 큰 중요성을 지닌 개념들, 요컨대 ‘선의지’, ‘의무’, ‘정언명령’, ‘도덕법’ 등을 설명하기 위한 보완적 수단이다. 그럼에도 비록 조건적 선이지만 행복이 일종의 선이라는 주장은 남는다. 물론 이 주장은 위의 첫 번째 해석에 대응할 수단으로는 전혀 충분치 않다.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행복과 도덕 사이의 명확한 연관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칸트의 소견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의무이다.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여 많은 걱정에 시달리고 필요를 채우지 못한다면, 의무를 어기고 싶은 커다란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의무에 주목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은 이미 자기 안에 행복에 대한 아주 강하고 깊은 경향성을 갖고 있다(GMM, 399)."
이 소견은 인간 본성에 대한 상식적 이해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함의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도덕 형이상학』에서 칸트는 나 자신의 행복은 “결코 자기모순 없이는 의무로 간주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에서 나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의무일 수 있는가?
하나의 명령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의무는 어떤 목적에 대한 제약을 함축한다. 여기서 우리의 경향성이나 바람은 명령, 즉 도덕법에 의하여 제약되거나 때로는 무시된다. 행복이 모든 경향성의 만족이라고 정의된다면, 행복의 추구가 의무라는 말은 명백한 모순이다. 그럼에도 칸트는 위의 인용문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 요컨대 간접적 의무라고 말한다.
행복은 분명 직접적 의무일 수 없다. 그러나 칸트는 그것이 “자신의 의무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을 포함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 그것의 결여는 (예컨대 가난은) 자신의 의무를 어기고 싶은 유혹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12) 따라서 비록 간접적이지만, 행복은 도덕적 목적과 연결고리를 갖게 되며, 그래서 일종의 의무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다. 와이키(V.S. Wike)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이 도덕의 수단인 한에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간접적 의무를 갖는다. 사실 어떤 상태나 대상이 도덕의 수단이 되는 경우마다 인간은 그 것을 추구할 간접적 의무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 열쇠는 칸트의 말에 있다. 행복을 하나의 목적으로 추구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어떤 다른 도덕적 목적을 위하여 행복을 추구할 의무는 있다.13)"
이런 주장의 가능성은 자기 자신의 완전성(perfection)의 추구에 대한 칸트의 논의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의무에 대한 그의 전형적인 구분에 따르면,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완전성에 대하여 불완전한 의무(imperfect duty)를 갖는다. 물론 ‘완전성’과 ‘행복’은 서로 치환될 수 없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완전성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양적 (물질적) 완전성”이고, 다른 하나는 “질적 (형식적) 완전성”이다(MM, 6:386-7).
첫 번째 의미의 완전성은 이성에 의하여 수립된 목적의 실현을 위한 “능력들”(capacities)을 배양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의 완전성은 자신의 도덕적 동기나 성향(disposition)을 배양하는 것이다.
지금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전자의 의미의 완전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 목적의 실현을 위한 자기 자신의 물질적 상태를 향상시키는 것이 일종의 의무이며, 행복은 바로 그런 물질적 상태에 포함될 수 있음을 제안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행복의 추구 자체가 도덕적 의무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완전성의 한 부분으로서, 요컨대 도덕적 의무의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12) Immanuel Kant, Critique of Practical Reason(1788), in Mary J. Gregor(trans.), Practic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5:93. 이하 CPrR로 표기함. 한글 번역은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역, 아카넷, 2002를 일부 참고함.
13) Victoria S. Wike, Kant on Happiness in Ethic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lbany 1994, pp. 97-100.
그러나 이런 논증으로 칸트는 행복을 일종의 의무로 간주함으로써 행복과 도덕의 긴밀한 연관성을 인정했다는 관대한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14) 위의 논증에는 여러 약점들이 있다.
첫째, 위의 논증은 행복이 완전성, 특히 양적 (물질적) 완전성의 구성요소일 수 있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그러나 칸트에게 완전성은 객관적 가치를 지니는데 반하여 행복은 순전히 주관적 가치만을 지닌다. 완전성에 관해선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우리는 그것을 증대시킬 의무를 갖는다. 그러나 행복에 관해선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우리는 그것을 증대시킬 의무를 갖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그런 의무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귀납에 의해서조차도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GMM, 4:418-9; 4:399).
그렇다면 행복이 어떤 의미로든 완전성의 핵심 구성요소가 된다거나 신뢰할만한 수단이 된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런 문제점을 모면할 한 가지 방법은 칸트의 행복 개념이 순전히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 방법은 예컨대 복지(well-being)같은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이다.『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칸트는 행복을 “현재 상태와 모든 미래 상태에서의 복지의 최대량”으로 정의한다(GMM, 4:418).
오늘날의 일반적인 이해에 비추어, ‘복지’는 순전히 주관적인 개념은 아니다. 인간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일정한 목적들은 충분히 객관적 가치를 가지며, 그 목적들의 목록에는 앞서 언급한 양적 완전성을 위하여 배양해야 할 ‘능력들’이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복지의 일부 측면은 객관적 가치를 지닌 사태로서, 우리는 누구의 것이든 그것을 실현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15) 그러나 이 방법에는 문제가 있다. 요컨대 칸트는 결코 ‘복지’를 이렇게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의 논증으로 돌아가서, 그것의 두 번째 문제점은 칸트가 그것을 ‘의무’라고 지칭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간접적 의무는 실상은 전혀 의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 “우리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증진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행복은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에 ― 허용된(permitted) 수단에 ― 불과하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는 듯하다(MM, 6:388). 요컨대 방점은 ‘의무’가 아니라 ‘수단’이라는 말에 찍혀있는 듯하다.
14) ibid., p. 114. 와이키는 간접적 의무로서의 행복은 “자연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 사이의 연관성을” 지시한다고 주장한다.
15) Diane Jeske, "Perfection, Happiness, and Duties to Self", in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33, 1996, pp. 263-276. 제스크(Diane Jeske)는 칸트의 행복 개념이 순전히 주관적인 개념이었다고 해석하면서도, 칸트가 가까운 타인의 행복을 증진할 의무에 대해서는 인정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을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정은 내가 그 친구의 주관적 가치평가를 공유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친구의 주관적 가치평가를 내가 행동할 이유로 간주할 것을 요구한다. … 그래서 나는 일정한 타인들, 즉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할 의무를 가진다”(p. 271).
여기서 칸트가 나 자신의 행복의 추구를 간접적 의무라고 말할 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일종의 비유적 표현에 불과하다. 결국 “나의 목적인 동시에 나의 의무인 것은 나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도덕적 온전성(integrity)의 보존이다”(MM, 6:388). 그가 말하려던 것은 어쩌면 단지 의무를 어기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단으로서 최소한의 행복의 추구가 허용된다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최소한은 전혀 확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무를 어기고 싶은 유혹은 이미 충분한 부와 쾌락을 획득한 사람에게 더 강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떻게 결정되든 그 최소한을 넘어선 개인적 행복의 추구는 도덕과 아무 연관이 없다. 어떤 사람의 절대적 빈곤이 그로 하여금 의무를 위반하도록 유혹하는 유일한 장애물이라면, 이것의 제거는 그가 그 유혹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16) 하지만 일단 이 장애물이 제거되고 나면, 그의 개인적 행복의 추구는 더 이상 도덕의 수단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적 행복의 추구 일반은 도덕적 목적을 위한 불변의 수단도 아니며 보편적 타당성을 특징으로 하는 의무라고 말할 수도 없다.
16) Curtis Bowman, "A Deduction of Kant’s Concept of the Highest Good", in Journal of Philosophical Research 28, 2003, pp. 45-63. 보우만(Curtis Bowman)은 누구의 것이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간접적 의무라는 해석을 옹호하기 위하여 칸트는 행복을 우리가 의무를 행할 능력을 증진하기 위한 “필수적 수단”(necessary means)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다음에 필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칸트가 행복의 추구 일반을 그런 수단으로 인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4. 최고선의 일부로서의 행복
수단으로서의 행복과 도덕적 목적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 나 자신의 행복의 추구는 도덕적 목적의 추구에 대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은 도덕적 목적의 추구 자체에는 비본질적이다. 그것이 실제로 어떤 사람을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만들리라곤 상상할 순 없다. 예컨대 나는 자식에게 공부방을 만들어줄 순 있지만, 자식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게 만들 순 없다. 또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익함이나 무익함은 의지의 도덕적 가치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다”(GMM, 4:394).
왜냐하면 선의지 혹은 덕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행복의 추구의 유익함은 의지의 도덕적 선함과 아무 연관이 없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도덕의 적절한 수단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여러 학자들은 칸트에게서 행복과 도덕의 어떤 실천적 연결을 (혹은 결합을) 발견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이 가장 흔히 그런 연결을 발견하려고 시도한 장소는 최고선에 대한 칸트의 논의이다. 케이질(H. Caygill)에 따르면, 칸트에게서 “행복은 도덕적 행위의 결심에서는 배제되고, 오직 최고선에서만 도덕적 행위의 불가분한 수반물(indispensable accompaniment)로서 되돌아온다.”17)
『순수이성비판』에서,18) 칸트는 최고선을 덕과 행복의 결합(combination)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도덕 원칙들이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이성에 일치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성의 이론적 사용에 있어서 이성에 일치하여 다음과 같이 가정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 행복할만한 값어치가 있도록 처신한 정도에 비례하여 행복에 대한 기대를 가질 근거를 가진다. 그러므로 도덕의 체계는 비록 순수 이성의 이념에서지만 행복의 체계와 결합되어 있다(CPR, A 809/B837, 필자의 강조)."
문제는 여기서 ‘결합’ ―『실천이성비판』에서 주로 쓰인 ‘종합’(synthesis) ― 이란 말의 의미이다.
최고선에 대한 논의에서 칸트는 두 종류의 선 혹은 목적, 즉 자연적 목적과 도덕적 목적을 구분한다.19) 유덕함은 도덕적 목적인 반면, 행복은 모든 인간의 자연적, 따라서 도덕과 무관한(nonmoral) 목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이질적인 두 목적이 최고선이라는 하나의 개념안에서 결합(종합)될 수 있는가?
17) Howard Caygill, A Kant Dictionary, Blackwell, 1995, pp. 222-223.
18) Immanuel Kant, Critique of Pure Reason, Paul Guyer and Allen W. Wood(tr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이하 CPR로 표기함.
19) 이 구분에 대한 대표적 논의는 John Silber, "The Importance of the Highest Good in Kant’s Ethics", in Ethics 73, 1963, pp. 179-97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고선 개념에 대한 칸트의 기본 도식은 “도덕성에 정비례하여 배분되는 행복”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난다(CPrR, 5:110). 『순수이성비판』에서도 그는 “지성적 세계, 즉 도덕적 세계에서 … 행복의 체계는 도덕성과 비례적으로(proportionately) 결합된다”고 진술한다(CPR, A809/B837).
이 도식에 따르면, 최고선은 필연적으로 행복의 달성을 유덕한 삶의 영위와 연결시킨다. 칸트 윤리학이 순전히 의무의 윤리학이라는 해석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 즉 칸트가 행복과 도덕의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연결을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 이르려면, 먼저 여러 쟁점들과 마주쳐야 한다.
첫 번째 쟁점은 칸트 윤리학에서 최고선 개념의 위상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물음에 대해선 긍정적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최고선의 달성을 모든 이성적 존재의 도덕적 바람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도덕법은 “최고선의 실존이 어떤 세계에선가는 가능할 것을, 즉 순수 사변이성의 대상들의 가능성을 … 요청한다”(CPrR, 5:134).
요컨대 도덕법은 우리가 최고선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도록 요구한다.『실천이성비판』의 여러 곳에서 칸트는 최고선과 순수 실천이성의 불가분한 관계를 강조한다. 최고선에 관한 논의는 우리의 (순수) 의지의 궁극적 대상을 ― 즉 최종적 목적을 ― 해명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해명이 칸트 철학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할 가치를 갖는다.
이렇게 최고선 개념의 위상을 변호할 수 있을지 모르나, 두 번째 쟁점은 다루기가 쉽지 않다. 자연적 목적으로서 행복은 본질적으로 자기애(self-love)와 같은 이기적 목적이다. 이런 종류의 행복은 최고선의 구성요소일 수 없다. 칸트는 이러한 이기적 목적에 대한 동기를 억누르는 것을 도덕법의 특징적 기능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나 자신의 행복과 같은 이기적 목적이 선한 목적의 총체인 최고선에 포함된다는 것은 매우 미심쩍다.
어쩌면 최고선의 구성요소가 될 만한 행복은 타인의 행복 혹은 “전 세계에 걸쳐 가장 순수한 도덕성과 결합되거나 일치하는 보편적 행복”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20) 그러나 타인의 행복이나 보편적 행복은 자연적 ― 혹은 도덕과 무관한 ―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최고선 안에서 자연적 목적으로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자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한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도덕성에 정비례하여 배분되는 행복”이라는 표현에서의 행복은 대체 누구의 행복을 말하는가?
20) Immanuel Kant, on the common saying: That may be correct in theory, but it is of no use in practice(1793), in Mary J. Gregor(trans.), Practic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8:279.
세 번째 쟁점은 최고선은 행복과 도덕적 가치의 연결이지 행복과 도덕적 성향(disposition)의 연결은 아니라는 것이다. 감각적 세계에서 행복과 도덕적 성향 사이에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다.
칸트는 “행복을 좇으려는 노력이 유덕한 성향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주장은 절대적으로 거짓이다” 라고 선언한다(CPrR, 5:114). 이런 선언은『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의 주장, 즉 행복은 결코 행위의 확실한 원칙을 제공할 수 없다는 주장과 일관적이다. 단순히 행복이 최고선의 구성요소라는 사실은 행복이 어떤 식으로든 도덕적 성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은 너무 수동적이어서 도덕적으로 행동할 유인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과 일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세 번째 쟁점은 당연히 처음에 상정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많은 윤리학자들은 (공리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는 아니더라도) 행복이 도덕적으로 행동할 동기를 제공할 수 있음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또 많은 윤리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도덕적 의지의 절대 우위성과 순수성을 옹호하는 이론에 매력을 느낄 수 있고, 칸트의 이론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몇몇 학자들이 칸트의 이론에서도 행복과 도덕의 실천적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해석을 지지하는 데에는 역시 나름의 근거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 근거는 대체로 그들의 해석을 확증하기보다는 칸트의 최고선 개념의 애매함을 드러내는 듯하다.
“도덕성에 정비례하여 배분되는 행복”이라는 도식으로 돌아가서, 칸트는 덕과 행복은 “서로 다른 두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을 얻으려는 노력은 “완전히 동일한(quite identical) 행위”라고 설명한다(CPrR, 5:111).
여기서 그는 행복과 덕을 최고선의 대등한 독립적 구성요소들 혹은 목적들로 간주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적 목적으로서 행복을 증진하고 도덕적 목적으로서 유덕함을 증진할 의무를 가진다. 여기서 전자와 후자는 서로 의존적이지 않을 것이며 양자 사이에는 우열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강조한 것처럼 칸트의 개념에서 행복은 조건적 선이다. 행복의 선함은 선의지 또는 유덕함을 필요로 한다. 선의지는 “단적으로, 모든 관점에서 선하고, 모든 선한 것의 최상의 조건이다”(CPrR, 5:62). “행복할만한 값어치”에서 방점은 행복이 아니라 값어치(worthiness)에 있다. 그리고 그 값어치는 선의지에 의하여 결정된 도덕법을 준수함에 있다. 따라서 행복은 덕에 대하여 전혀 독립적이지도 않고 대등하지도 않다. 즉 행복과 덕은 최고선의 대등한 독립적 구성요소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만약 행복은 여전히 최고선의 구성요소라고 한다면, 행복은 덕에 대하여 어떤 관계로 최고선에 참여하는가? 어떤 의미로는 행복은 유덕함에 대한 일종의 보상(reward)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칸트에게 도덕적 행위는 결코 어떤 보상에 대한 기대로부터 동기를 부여받은 행위일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을 일종의 보상으로 인식하는 것조차 도덕적 의지의 순수성에 대한 위협일 수 있다.그렇다면 행복에는 보상이라는 의미조차 부여될 수 없다. 그래서 행복은 그저 “원인이 결과를 낳듯이” 도덕적 성향이나 행위에서 산출될 수 있는 부산물(byproduct)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이 최고선 개념 안에서 하는 역할이 대체 무엇인가? 차라리 최고선은 유덕함에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최고선이 순수 실천이성, 즉 순수 의지의 전체 대상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순수 의지를 결정하는 근거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직 도덕법만이 그런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최고선은 도덕법에 부과되거나 그것을 대체하는 독립적 근거가 아니다. 만약 최고선이 그러한 근거라면, 선의지는 유일한 무조건적 선이라는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최고선은 도덕적 의지의 대상일 것이며, 인간의 유한하고 감성적인 본성 때문에 최고선 개념이 ― 요컨대 그 구성요소인 자연적 목적, 즉 행복이 ― 도덕적 성향에 필수불가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최고선이 도덕적 의지를 결정하는 근거가 아니라면, 문제는 그것이 일종의 잉여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순수 실천의지의 대상으로서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성은 완전히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필요일 뿐이며, 감성적 존재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만약 최고선을 동기부여의 요소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선의지에 대하여 말한 바와 모순된다. 왜냐하면 어떤 행동이 선한 것은 오직 그것이 의무를 위하여 행해졌을 경우뿐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람들이 적어도 “행복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는 것은 중요하다(CPR, A809/B837)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우리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ideal)이라고 생각했다. 벡(L.W. Beck)이 말한 것처럼, “최고선은 전혀 실천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성의 변증론적인 이상(dialectical Ideal)이다.”21) 하나의 이상으로서 행복 개념은 덕 개념에서 나온 것과 다른 중요한 실천적 결과를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고선의 모든 도덕적 결과는 의무 개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도덕성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행복은 도덕성과 정비례하여 배분되지 않는 한에는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CPR, A811/B839).
그렇다면 최고선은 칸트의 체계에서 아무런 실천적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비유컨대 그것의 목적은 건축학적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칸트는 우리에게 비관적인 철학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살면서 이승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덕에 비례하여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어떤 세계가 있는지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칸트는 이성에서 나온 목적을 완수함으로써만 얻어지는 일종의 ‘만족’을 언급한다.
“선의지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최고의 실천적 사명으로 인식하는 이성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서 그것에 고유한 종류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GMM, 4:396).
이 만족은 분명 행복과는 달라야 한다. 경향적 자아(inclinational self)의 욕망들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만족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부정적 개념이다. 패이튼(H.J.Paton)은 그것을 “어떤 사람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올바르게 행동했을 경우에 그가 얻을 수 있는 위로나 정신적 평화”로 묘사했다.22) 이것조차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는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한 흥미로운 구절에서 칸트는 이런 만족을 행복이라고 칭한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 악덕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흔히 괴롭긴 하지만 자신의 의무를 행했다고 의식할 때, 그는 충분히 행복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태, 즉 영혼의 만족과 평화의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 덕은 그것 자체의 보상이다”(MM, 6:378; 필자의 강조).
여기서 우리는 행복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를 발견하는 듯하다. 칸트는 명백히 덕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관점을 거부하지만(CPrR: 5:112), 이 인용문에 등장한 ‘행복’은 확실히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apatheia)와 흡사하다. 그럼에도 다시 분명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칸트의 거의 일관적인 설명에서 나오는 그것, 즉 순전히 주관적인 심리상태로서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이는 칸트가 유덕한 삶에 대하여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으로 언급한 행복 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신은 유덕한 삶에 대하여 우리에게 보상을 주며, 영혼의 불멸은 우리가 보상을 받을 수 있음을 보장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행복이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칸트가 전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주관적 개념의 행복일 수 없다.
이러한 행복이 무엇일지는 진술할 수 없지만, 확실히 그것은 경향적 행복보다는 숭고한 무엇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 경우에 행복은 우리가 추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엇이다. 따라서 유덕한 삶을 통하여 어떤 사람이 무엇을 받을 값어치가 있든지 간에, 그것은 밝혀질 수 있는 다른 개념의 행복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21) Lewis W. Beck, A Commentary on Kant’s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66, p. 145.
22) H.J. Paton, Groundwork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Harper & Row, New York 1956, p. 57.
5. 맺음말
논문의 시작에서 필자는 칸트의 행복 개념에 대한 두 극단적인 해석을 가정했다.
첫 번째는 칸트 윤리학에서 행복은 거의 아무 비중과 역할이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행복은 도덕과 확실한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전자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전형적 전략은 행복은 도덕적 행위의 결심에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칸트의 기본 입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후자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살펴보았다.
(1) 행복은 어쨌든 실천이성의 최종 목적, 즉 최고선의 구성요소이다.그런데 자기 자신의 행복이 최고선 개념에 어떤 자격으로 참여하는지는 다소 분명치 않다. 그렇기에 이 개념을 통하여 두 번째 해석의 지지자들이 원하는 행복과 도덕 사이의 확실한 연결고리를 밝히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개념에 대한 가능한 해석들의 다양성을 근거로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다.
행복은 독립적 목적일 수도 없고 최고선의 구성요소일 수도 없고 심지어 유덕함의 보상일 수도 없기에 결국 최고선은 유덕함에만 있다고 했을 때 최고선은 일종의 잉여 개념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식의 진행은 첫 번째 해석의 지지자들에게도 문제일 수 있다. 어쨌든 최고선 개념 안에서 도덕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정합적 설명은 어느 해석의 지지자들에게든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2) 칸트는 항상 행복과 만족스런 삶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의지와 행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을 간접적 의무라고 일컬었으며, 나아가 어떠한 도덕법도 우리가 우리의 자연적 목적인 행복을 포기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On common saying, 8:278; MM, 6:388).
그러나 그는 분명 어떠한 도덕법도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행복은 도덕의 명령도 아니며 도덕을 위한 일관적 수단일 수도 없다. 여기서 ‘간접적 의무’라는 말이 단순히 비유적 표현에 불과하며, 행복이 도덕적 목적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 수단이 아니라 그의 표현대로 “허용된 수단”에 불과하다면, 두 번째 해석은 다시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두 번째 해석의 지지자들은 칸트가 행복을 순전히 주관적인 심리상태로만 정의했다는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행복이 일정한 조건들 하에서는 완전성의 구성요소가 됨으로써 그것의 증진에 대한 의무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다.
(3) 행복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선이다. 그러나 그것의 선함은 항상 그것의 배후에 있는 의지의 선함에 의존한다. 요컨대 모든 선함의 진정한 원천은 선의지이고, 행복의 선함도 이 원천에서 나온다.
그래서 행복은 조건적 선에 불과하다. 두 번째 해석의 지지자들은 인간은 “자연적 필연성”에 의하여 행복에 대한 경향성 혹은 욕망을 가지게 되며 그것의 만족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게 된다는 칸트의 주장을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것을 자연적 필연성에 의하여 욕구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것이 그 자체로 혹은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논의를 종합하면, 칸트 윤리학에서 행복과 도덕의 확실한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다. 두 번째 해석은 어느 지점에선가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일 결정적 발판을 제시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에 반해, 첫 번째 해석은 단지 지배적 견해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칸트 철학의 정신과 부합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우위를 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첫 번째 해석에 안주하는 태도에도 불만스러운 점은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해석은 무엇보다 칸트가 ‘도덕적 삶’과 ‘행복한 삶’을 철저히 유리시켰다가 일반인들이 느끼는 이 두 가지 삶 사이의 갈등을 고려하면서 최고선이라는 모호한 개념 안에서 다소는 어설프게 봉합시켰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게 된다. 요컨대 첫 번째 해석은 최고선 개념을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공허한 개념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칸트는 분명 도덕법이 개인적 행복의 추구를 부정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적 행복의 추구가 도덕법과 충돌할 경우,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전자에 대한 욕망을 결연히 극복하고 후자를 따르려는 의지에서 전자에 대한 일체의 고려를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실천적으로 유의미한 대답일 수 있을까? 도덕적 행위의 결심에서 경향적 자아를 배제함으로써, 즉 도덕적 삶에 대한 의지로 행복한 삶에 대한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자아 혹은 의지의 통일에 도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이성의 명령일지라도, 그 명령에 따르라는 말이 그 두 가지 삶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느끼는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23)
물론 이러한 문제는 칸트 철학의 정합적 해석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도덕적 삶과 행복한 삶의 갈등이 윤리학이 풀어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인식할 때, 칸트 윤리학에서도 그 둘의 분명한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두 번째 해석의 존재는 그의 윤리학에 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논문에서 필자의 의도는 결코 두번째 해석의 여러 가능성들을 논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해석이 첫 번째 해석에 맞서기 위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조명하는 것이었다.
23) Henry Sidgwick, The Methods of Ethics, 1874. ‘실천이성의 이중성’(duality of practical reason)을 논하면서, 시즈위크(H. Sidgwick)는 공리주의적 의무(전체적 행복의 추구)와 합리적 타산(개인적 행복의 추구), 즉 도덕적 삶과 행복한 삶의 갈등은 결코 이성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문제라는 비관적 결론을 내린다. 물론 이런 결론도 그 두 가지 삶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느끼는 사람에게 전혀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순 없다. 그럼에도 그런 갈등의 실천적 심각성을 인식했다는 면에서 시즈위크의 결론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참 고 문 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