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집착, 하나로 뛰어들라
무언가를 나누어 주거나 또 무언가를 받을 때, 참 기분이 좋다. 줄 때도 기분이 좋고, 받을 때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주었을 때 좋은 기분하고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좀 다르다. 주었을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무얼까. 무언가를 주게 되면 ‘내 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괴로워야 할텐데 좋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우리 안의 참나, 다시 말해 온 우주 법계의 참성품이 둘이 아닌 하나로써, 대아(大我)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주는 것 또한 모두가 하나의 성품이니까 무엇을 주고 받고도 없이 그냥 좋은 것이다. 즉 주었을 때 좋은 기분은 가만히 살펴보면 근원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고,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보통 세간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받았을 때 ‘내 것’이 늘어나는 것이니까. 받았을 때는 들뜨는 기쁨이지만 주었을 때의 기쁨은 그저 담담하고 맑다. 물론 주고 받고를 다 초월해 버렸다면 주는 것이든 받는 것이든 똑같이 근원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겠지만 보통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주었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근원적인 통찰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주었을 때 좀 더 근원의 마음자리를 느끼게 된다. 좀 더 본래의 마음자리, 참성품과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었을 때 ‘내 것’이 소멸되니까 괴로워야 하겠지만 참으로 맑게 주었을 때는 ‘큰 나(大我)’가 ‘큰 나’에게 주고 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도 ‘큰 나’가 받는 것이니까 좋은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베풀고 보시를 해야 하는 이유다. 보시가 단순한 복을 짓는 일을 뛰어넘어 깨달음의 씨앗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보시를 했을 때, 그 베품의 행위로 인해 기쁨을 느낄 때, 우리가 내 본래자리 참성품과 하나됨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물론 주고 나서, 베풀고 나서 좋은 느낌이 아닌 싫은 느낌일 수도 있다. 주고 나서 마음이 괴롭다거나 ‘내 것’을 잃었다는데 아깝다거나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집착이 남아 있는 베풂은 기쁠 수가 없다. 참된 베풂은 집착이 없는 데서 온다. 베풂이야 말로 무집착의 온전한 실천이다. 집착하지 않아야 맑게 베풀 수 있고, 또한 베풀었을 때 집착을 버릴 수 있다. 좀 단정적으로 말하면 베푸는 것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무집착이야 말로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풀어줄 수 있는 해답이다. 집착이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괴로움의 씨앗은 집착이고, 집착을 놓아야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바로 그 집착을 놓으려면 베풀어야 한다. 집착을 놓는 것이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공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반야 지혜를 얻는 깨달음의 길이다. 지혜가 무집착이고, 무집착이 보시이며, 보시가 복덕이니 이 넷은 하나로 귀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와 지혜는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복과 지혜가 수레의 양 바퀴일 수 있는 것. 조금 달리 말하면 집착없는 행이야말로 베풂의 행위이다. 집착 없이 일을 할 때 그 일은 복덕을 증장시키며 지혜를 증장시킨다. 집착 없이 자식을 낳아 기르고, 집착 없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집착 없이 사랑을 하며, 집착 없이 수행을 하고, 집착 없이 출가를 하고, 또 결혼을 하고, 집착 없이 길을 거닐었을 때, 집착 없이 삶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다시 말하면 함이 없이 무엇이든 행하고 있을 때, 그 걸음 걸음은 그대로 지혜가 되고 복이 된다. 모든 일에 집착이 없으면,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집착이 없으면 그 모든 삶이 무량대복전이 되는 것이다. 수행 따로 하고, 복 따로 짓고 그러는게 아니라 집착없는 행위는 그대로 보시이고 그대로 지혜이며 그대로 복이 되는 것이다. 집착없는 행을 하려면 과거도 미래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과거를 기억은 할 지언정 연연해 하거나 붙잡고 늘어질 것은 없고, 미래를 계획은 할 지언정 연연해 하거나 집착할 것은 없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마음이 걸리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렇기에 집착없는 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놓아버리고 다만 이 순간에 존재할 때 집착은 없다. 아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空)만이 남는다. 그랬을 때는 줘도 준 것이 아니고 받아도 받은 것이 아니며 주고 받은 것 또한 공한 삼륜청정의 보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물을 볼 때 이 세상은 좋고 나쁠 것도 없고 옳고 그를 것도 없는 텅 빈 고요 그 자체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하고 고집할 것이 없으니 그 마음의 모든 분별이 쉬게 된다. 모든 분별을 쉬고 텅 빈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전혀 새로운 순간이 열린다. 이 세상은 이전에 알고 있던 세상도 아니고, 내 틀 속의, 내 고정관념 속의 세상도 아니며, 오직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텅 빈 새로운 순간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이 새롭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집착이 없다는 것은 분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고, 날마다 새롭다는 말이며, 그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 삶 자체가 보시의 삶이 되고 복을 짓는 삶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그 실천을 따로 따로 공부하고 따로 따로 실천하고 그 수없는 방편을 다 수행하려고 애쓴다면, 그것부터가 분별의 시작이고 번뇌의 시작이 아닐까. 하나를 잡고 늘어지면 그 하나에서 전체를 보게 된다. 무집착. 방하착. 그 하나만 붙잡고 부여잡고 공부를 하면 그냥 거기서 다 통하게 된다. 금강경도 무집착이고, 화엄경도 무집착이고, 공사상도 무집착이고, 무아도 무집착이며, 연기도 무집착이고,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도, 응무소주 이생기심도, 반야심경의 오온개공도,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도,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도, 열반경의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이락도, 팔만사천의 모든 법문이 무집착이면 된다. 또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팔만 사천의 모든 법문이 다 보시바라밀이고, 다 무분별이며, 다 깨어있음이고, 지혜와 복덕이며, 관이다. 하나를 잡고 그냥 죽기 살기로 뛰어들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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