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③] 인류 기원을 품은 ‘이름’의 변천사

rainbow3 2021. 6. 7. 00:05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③] 인류 기원을 품은 ‘이름’의 변천사

신이 준 이름표 떼내고 스스로 이름을 붙이다

숙명적 인간관 담긴 ‘아담’ 명칭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 제기… 자주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안쓰로포스’, ‘호모 사피엔스’로 대체

#1. 들어가는 글

인간은 공부하는 동물이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자기 자신을 연구하면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높은 차원의 지적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대상을 깊이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신을 망각하고 그 대상과 일치하는 순간에 도달해 그 대상처럼 사고하게 된다. 이 경지가 바로 공부다. 인류는 자신을 둘러싼 대상을 연구하고 공론화하여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의견을 비교하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독특한 문화적 진화를 거듭해왔다. 이것이 바로 ‘학문(學問)’이다. 학문은 다른 사람들의 탁월한 식견에 대한 수용이며 자기변화의 과정이다.

학문에는 구별이 없다. 인문학, 과학 그리고 예술은 우주와 자연, 특히 그 안에 순간을 살고 있는 동식물과 자신의 찰나성을 유일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간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서로 유기적으로 학문적인 발견을 공유해 자신이 속한 분야에 적극적으로 적용함으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창의적이며 도발적인 예술의 시도는 인문학과 과학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마련한 이해의 지평을 조금씩 넓히거나 혹은 과거에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과감하게 유기함으로써 생소한 학문의 단계로 진입한다.

대부분의 과학자와 인문학자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탐구의 성과들을 공유하고 서로 자극하는 공생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공생관계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부터다. 이 시기에 등장한 눈부신 과학적 성과를 수용하지 못한 일부 종교인이 스스로를 근본주의(根本主義)라는 이데올로기에 가둔 것이다. 근본주의란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서 만든 무식(無識)이라는 환상 안에서 스스로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를 포기하는 삶의 태도다. 여러 가지 근본주의 형태 중 가장 골치 아픈 집단이 바로 종교적 근본주의 집단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수용한 나름의 진리를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논쟁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에 두고, 그 무식을 막무가내로 주장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리는 사실 ‘신’이나 ‘피안의 세계’라는 어설픈 용어를 빌려 자신의 편견을 확장한 자기기만인 경우가 허다하다.

#2.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오전 9시

인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지구에 살기 시작했을까? 인간은 오래전부터 이 모습의 인간이었나, 아니면 찰스 다윈의 주장대로 유인원에서 진화했는가?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했다면 인간과 유인원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침팬지나 원숭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인간처럼 진화할 수 있는가? 혹은 다른 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이 된다는 가정이 너무 인간 중심적인가?

과학으로 포장된 창세기의 신앙고백

인간의 기원에 대한 탐구를 시도할 때, 서양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간 창조 이야기를 역사적이며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들도 인간 창조 이야기에 대해 서로 상충되는 다른 이야기를 소개한다. 우선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인간 창조 이야기는 “우리(신)가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자”라는 구절 밖에 없다. <창세기> 1장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포로가 바빌론에서 작성한 신앙고백이다. 역사적이나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기원에 대해 깊이 성찰했다. 그 후, 그가 얻은 결론은 인간은 신적인 존재라는 깨달음이었다. <창세기>는 바로 그 성찰의 결과물이다.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신은 마치 도예가나 조각가 같다. 그는 붉은 흙으로 인간을 만든다. 그래서 인간을 ‘붉은 흙으로 만든 존재’ 즉 ‘아담’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0세기 이스라엘은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여성 작가는 인간 창조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근대 근본주의자들의 우주와 인간 창조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 학자는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라는 17세기 북아일랜드 아르마그의 성공회 대주교였다.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아담의 족보를 바탕으로 모든 날짜를 역으로 계산해 우주창조와 인간창조의 시점을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계산에 동조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부총장 존 라이트풋(1602~1675)은 유언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우주창조의 정확한 시간은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오전 9시 정각.”

#3. ‘존재의 사슬’ 이론

지금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화지만 당대엔 권위 있는 최고 지식인들의 과학적이며 신학적인 첨단 지식이었다. 어셔와 라이트풋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우주관인 ‘존재의 사슬(The Chain of Being)’이라는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존재의 사슬’이란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각각 계급이 정해진 사슬에 연결되어있으며 상위 사슬에 연결된 존재들은 그보다 낮은 하위 사슬에 연결된 존재들을 이성과 능력으로 지배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식물들은 광물들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광물의 자양분을 착취한다. 식물 위에는 동물이 존재해 식물과 광물을 먹고 산다. 예컨대, 말은 돌과 자갈을 밟고 다니며 식물을 먹고 산다. 반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된 신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은 자연계를 다스리고 잡초를 뽑고 정원을 가꾸며, 돌이나 철을 채굴하여 도구로 만들고 심지어는 그것을 재료로 예술 작품을 창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인간과 달리 천사나 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과 물질세계를 관장하며 조절한다.

‘존재의 사슬’은 서양의 오랜 전통인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BC 481년경~미상)의 사상으로부터 발전해왔다. 고대 로마 작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나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에 등장하는 만물의 ‘이성적 질서’다. <변신>은 존재의 사슬이라는 개념을 처음 체계적으로 표현하였고, <전원시>는 생물과 무생물 간의 정교하면서도 경험적이고 동시에 예술적인 연결을 강조한다. 근대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 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구분을 기초로 동식물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시도는 나중에 등장하는 찰스 다윈의 종의 분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4. 알렉산더 포프의 이신론

둘째 원칙은 인간의 우수성과 초월성이다. 계몽주의 시대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저작 <인간에 관한 에세이> (1733~34)는 신이 인간을 자신의 은총으로 특별히 창조했다고 말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를 넘어서 거의 신적인 경지에 도달했다고 믿는 긍정적인 철학을 담은 글이다. 당시 영국을 방문했던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포프와 2년 동안 교류하면서 큰 영감을 받았다. 볼테르는 프랑스로 돌아가 <비평에 관한 에세이>에서 포프를 로마 시인인 호레스보다 위대한 사상가라고 칭송했다.

만물의 영장이면서 사물의 먹이인 역설의 존재

포프는 신을 인격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에게 신은 인간이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주지 않는다. 신은 삼라만상을 창조했지만, 창조 후에 인간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우주와 자연의 질서 안에 자신의 비밀코드를 숨겨놓았고, 인간은 이 비밀을 찾아 신적으로 살 수 있다. 이런 종교를 이신론(理神論) 혹은 자연종교(自然宗敎)라고 부른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혼돈에 빠진 우주에서 신이라는 질서를 찾고 파편적인 지식을 지닌 인간이 그 질서를 일견하여 신앙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에 관한 에세이> 2권 첫 단락에서 자신의 종교적이며 인간적인 철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당신 자신을 헤아리십시오
신을 자세히 살피겠다고 하면서 추정하지 마십시오.
인류에게 적당한 연구대상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어정쩡한 중간상태인 지협에 있습니다.
우울하게 지혜롭고 건방지게 위대한 존재입니다.
회의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는 것이 많고, 금욕주의적 자부심으로 보기엔 너무 약합니다.
인간은 그 중간에 매달려있습니다.
행동하기와 삼가기를 주저하며 자신을 신으로 혹은 짐승으로 여기기를 주저하고 자신의 정신과 육체 중 무엇을 선호할지 주저합니다.
태어났지만 죽으며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만 실수합니다.
그는 무지에 거하면서도 그의 이성은 건재합니다.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거나 너무 적게 생각하거나 상관없이 생각과 열정의 혼돈은 모두 혼동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시달렸거나 시달리지 않았거나, 그는 반 정도는 일어서려고 반 정도는 넘어지려고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사물의 위대한 주인이지만 모든 사물의 먹이입니다.
진리에 대한 유일한 재판관이지만 동시에 끝없이 실수합니다.
인간은 세상의 영광이며, 농담이며, 동시에 수수께끼입니다.
오, 놀라운 피조물이여! 과학이 인도하는 곳으로 올라가라!

#5. 카를 폰 린네의 관찰(觀察)과 호모 사피엔스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는 우리가 아는 동식물을 종과 속으로 분류한 과학자다. 그는 ‘존재의 사슬’ 안에 숨겨진 신의 비밀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신이 창조한 만물에 린네는 질서를 부여했다. 그는 모든 동식물을 구분하고 각각에 이름을 준 숨은 창조자다. 그는 아직 전통적인 신앙에 갇혀 있어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성과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았다. 자신이 인식한 모든 동식물이 전능하신 창조주의 작품이라고 여기고 그 종류와 수는 항상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노년에 서로 다른 식물의 꽃가루를 교차해 받는 타화수분(他花受粉)을 통해 새로운 식물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고 실의에 빠졌지만, 이러한 변형이나 잡종들도 자연이 정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발견으로 그때까지 과학자들의 시대정신의 고정틀이었던 ‘존재의 사슬’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린네는 타화수분 된 새로운 식물들이 ‘진화’했다고 결론짓지 않았다. 린네는 포프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이 숭고한 삶을 위해 만든 특별하고 구별된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신과 동물의 중간으로 신과 같은 이성적인 마음을 지녔다면서도 인간이 원숭이와 무엇이 다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인간은 이제 과거의 ‘존재의 사슬’이라는 전통이 확고한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스스로 ‘조물주’가 되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교란하고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린네는 비록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 최고의 과학자였다. 그는 1735년에 출간한 <자연체계(Systema Naturae)>란 책에서 모든 생물에 대한 이성적인 분류를 처음 시도했다. 동식물을 생김새와 출산의 방식을 기준으로 묘사하면서 닮은꼴의 정도에 따라 분류했다. 그는 이명법(二名法)을 이용해 속명(genus)과 종명(species)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속과 종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17세기말 영국의 박물학자이자 목사인 존 레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식물 신분류법>(1682)과 <사지(四肢) 동물일람>(1693)을 통해 동식물 분류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를 더욱 구체화한 것이 린네다. 속명 아래에는 여러 종명이 존재한다. 린네의 방식은 오늘날 생물학의 모든 분야에서 사용하고 있다.

린네는 인간-동물-식물이라는 단순한 분류를 정교하게 관찰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를 분류하고 각자의 위치를 확인시켰다. 인간과 동식물을 구별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자화된 동식물과 자연을 정복과 약탈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간을 다른 동식물과의 유기적인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 인간 존재의 위상과 의미를 숙고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계기도 됐다.

이름 짓기: 창조와 재창조의 작업

천재들은 자신이 공부하고자 하는 대상을 보고 또 보아 남들이 감지할 수 없는 차이와 유사점을 찾아낸다. 이런 행위를 관찰(觀察)이라 부른다. 관찰을 위해서 그 대상을 심오하게 봐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식물을 깊이 보는 행위를 할 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분류체계 안에 그 대상을 편입시키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조해야 한다. 관찰자는 어느 순간에 그 대상 안으로 들어가 마치 식물이 된 것처럼 오감으로 느껴야 한다. 그런 후 자신이 알고 있는 체계와 비교하며 정교하게 분류하고 그것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야 한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의미는 그 대상을 우주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분류와 이름 짓는 행위는 모든 과학의 기초다.

#6. 아담, 안쓰로포스, 맨 그리고 호모사피엔스

<창세기>에서 신은 첫 인간을 ‘아담’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명칭은 수천 년 동안 서양인들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가 됐다. 그러나 인간은 오래된 경전에 등장해 사용해온 명칭인 ‘아담’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취한다. 그 이름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다. 이 이름을 지은 사람이 바로 린네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린네는 인간을 ‘호모사피엔스’로 재창조한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그 대상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고대 이집트어로 이름은 ‘렌(ren)’이다. 렌은 상형문자로 두 개의 모형이 위아래로 합쳐져 있다. 위에는 ‘입’이나 ‘태양’을 상징하는 타원형 원반이 그 아래엔 혼돈의 물을 상징하는 물결모양이 그려져 있다. 그들에게 이름이란 혼돈만이 존재한 태초의 우주를 밝히는 태양과 같은 어떤 것, 혹은 흉흉한 바닷물 위에서 아련히 들려와 그 대상을 부르는 최초의 소리를 의미한다. 셈족인들은 이름을 ‘쉼(shim)’이라고 불렀다. 고대 아카드어로는 슘(shum), 아랍어로는 쉼(shim), 그리고 히브리어로는 쉠(shem)이다. 아마도 고대 신화에서 신이 만물을 보고 입을 열어 내쉰 첫 발음 ‘쉼’을 흉내 낸 것이 아닐까. 신의 마음, 아니 이 언어를 맨 처음 사용한 최초의 인간의 심리를 알 수는 없지만, 이 단어는 유대교 경전인 토라,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서, 그리고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름이란 의미를 지닌 셈족어 ‘쉼’은 만물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담은 초월적인 개념으로 ‘본질의 본질’을 뜻한다.

히브리어인 ‘아담’은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파생했다.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신인 ‘야훼 엘로힘’이 ‘땅(아다마)’에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 인간을 ‘땅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 ‘아담’으로 명명했다. 여기서 ‘아담’이란 최초의 인간이자, 인간을 총칭해 부르는 용어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아담’이란 용어는 한편으로 숙명적이며 자조적인 명칭이다. 인간은 원래 세상에 깔린 흙이었다가 사람의 몸을 빌려 명을 얻어 세상에 태어나고, 얼마 후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고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동물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안쓰로포스(anthropos)’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안쓰로포스’는 ‘위쪽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아나(ana)’와 ‘얼굴’, ‘가면’을 뜻하는 ‘프로소포스(prosopos)’의 합성어다. ‘얼굴’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기 위한 ‘가면’인 셈이다. 영어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퍼슨(person)은 라틴어에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persona)에서 파생했다. 즉 ‘안쓰로포스’는 ‘얼굴을 위로 하고 하늘을 쳐다보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들은 히브리인들처럼 인간의 숙명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상에서 파라다이스를 끝없이 지향할 뿐만 아니라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테마이오스>라는 작품에서 인간의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덤덤히 말한다. 인간의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하기에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쓰로포스는 인간이라는 종(種)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름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의 눈은 정면을 향하게끔 달려 있다. 다른 유인원들이나 동물들의 눈은 얼굴의 양 옆에 달려 있어 자기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다른 동물들의 움직임을 항상 감지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대상에 대한 관찰이 생존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눈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얼굴 정면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죽음의 숙명 거부한 그리스인의 인간관

600만년 전 아프리카 밀림지대의 나무에서 내려온 인류의 먼 조상 유인원들은 깊이 있는 관찰을 통해 먹을 수 있는 근채류 식물을 가려내고 자신이 사냥하고자 하는 동물의 움직임을 깊이 파악하여 그 동물처럼 생각함으로 사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몰입해 관찰하는 동안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동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어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다.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단순한 존재가 아닌 지상에서 순간을 살면서도 하늘을 쳐다보고 자신이 맡아야 할 배역을 찾아내고,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그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존재다. 이런 개념은 근대 유럽 언어에 영향을 주어 ‘맨(man)’이란 용어를 등장시켰다. man이란 ‘생각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린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명명했다. 그는 인간을 동식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호모(Homo)’라는 새로운 범주에 편입시켰다. 이 범주에는 다른 유인원들, 즉 원숭이와 침팬지가 속해 있다. 린네의 이 구분은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들이 속해 있는 자연의 일부라는 고백이다. 동시에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유인원들과 생물학적으로 유사하다는 암묵적인 증언이다.

#7. 인간의 새로운 이름: 호모 사피엔스

린네는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명명하면서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인간의 특징을 ‘사피엔스’라고 정의했다. 사피엔스는 ‘지혜’를 의미하는 라틴어 ‘사피엔치아(sapientia)’에서 파생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원래 ‘맛보다; 경험하다; 지혜롭게 된다; 알다’라는 의미다. 린네는 인간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지혜로 정한 것일까? 지혜란 무엇인가?

사피엔스는 오랜 경험을 통해 어떤 대상이나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훌륭한 직관력과 대처능력이다. 고대 이집트 도시 멤피스에 프타(Ptah)라는 창조 신이 있었다. 이 신은 우주를 생각으로 창조한다. 혼돈에서 창조하지 않고 이성으로 창조하는 신화는 후대 히브리 문학이나 그리스 철학에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15세기부터 유유히 내려와 후대 문명에 전달된 것이다. 프타는 우주를 ‘시아(Sia)’로 창조한다. 시아는 원래 태양신인 레의 아들로 ‘관찰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시아는 종종 신들의 마음을 기록할 거룩한 파피루스를 가지고 다닌다. 프타는 자신의 생각인 ‘시아’를 말로 표현함으로 우주를 창조한다. 사피엔스는 시아와 유사한 개념으로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최초의 직관력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사피엔스는 고대 히브리어의 ‘호크마’와 그리스어의 ‘소피아’와 같은 개념이다. 사피엔스는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는 원칙이며, 만물이 적재적소에 위치하게 하는 조절능력이기도 하다. 린네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른 것은 인간이 우주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 안에 숨겨진 신비를 지속적으로 알기 위해 노력하게 하려는 뜻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