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대한민국 봉황 "국새"

rainbow3 2019. 9. 20. 13:16


대한민국 봉황 "국새(國璽)"


2008년 2월부터 새로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국새는 건국이래 네번째 국새이다.

지난 2005년 국새에 균열이 가 있는 것이 확인되어 그때부터 새로 제작해와

2007년 12월 4일에 시험 날인 공개를 가진바 있다.


 
▲.2005년부터 준비하여 2008년 2월부터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새 대한민국 국새.
봉황 인뉴가 있다.

 
▲. 국새의 인문은 한글로 '대한민국'이라 되어 있다.

정부수립 후인 1949년 5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첫번째 국새는 
1963년 제3공화국 출범 때까지 그 모델의 원형이 분실되어 어땠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박정희 대통령 때인 제3공화국에서 두번째 국새를 제작하였을 때
그 모델은 조선시대 국새를 본따 거북이 인뉴(손잡이)를 가진 것으로 만들어
1998년까지 우리나라 국새로 유지되어 왔었다.
이 거북이 국새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산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거북이는 꼭 명, 청의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물건으로만 볼 수는 없다.
가야에서 거북이는 국가 엠블렘의 의미가 있었고 이순신의 거북선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온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다.
사신도 중에 북현무는 거북이와 커다란 뱀 수호신의 이미지를 가지기도 하지만, 
거북이 국새는 제1호 국새의 모델을 찾지 못하여 새로 만든 국새였다.
1998년 보다 자주적인 새로 만든 국새는 청와대 대통령 엠블렘의 의미에 맞추어
우리 역사의 전통을 살린 봉황 인뉴를 가진 국새를 제작했던 것이다.
1998년 봉황국새를 제작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거북이 국새는 
5백년 조선시대 기간 사용했던 모델로서 명나라와 청나라가
용 손잡이 국새를 가진 것에 대한 하사받은 의미릴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국새는 오직 명나라,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에 들어와서 우리 자체의 국새를 만들었다.
이때 제작된 국새는 인뉴는 거북이가 아닌 서수(瑞獸)의 인뉴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대한국새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3년 제작했던 국새는
조선시대 국새를 모델로 한 것이지 대한제국 국새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 국새는 나라를 일제에게 강탈당했던 국새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해 전 제1호 국새에 대한 사진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대한제국 때의 국새 모양
그 사진을 모델로 제1호 국새를 다시 복원해 놓기도 했다.
몸체는 용을 닮아 있으나 다리는 짐승의 다리이며 머리 또한 용이 아닌 사자나
다른 동물의 수호신상이다.

▲.2008년 2월부터 사용할 봉황 국새를 제작했던 민홍규씨가 복원한 조선시대 국새와
대한제국의 국새 모습
국새 제1호를 찾아낸 배경은 다음과 같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당대 대표적인 옥새 전각 장인이었던 석불 정기호씨가 남긴 국새 관련 자료인
‘고옥새간회정도 (古玉璽看繪鄭圖)’에서 본인이 1949년 국새를 제작했다는 증언과 함께
인뉴(印 손잡이)는 '용의 형태'로 돼 있다는 관련 기록을 찾았다
국가 기록원은 제1호 국새를 새겼던 곳이 서울 충무로의 천상당(天賞堂)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용의 형태'란 전통적인 용 이미지가 아닌 다른 이미지를 그
렇게 '용'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국새 1호의 인뉴가
용을 닮은 면도 있는 신수상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문화공보부로 넘겨진 자료에 남아 있는 제1호 국새 사진자료에 의하면
그 인뉴는 용을 닮기도 하고 해태를 닮기도 한 대한제국 때의 국새 모양과 같은 신수상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민홍규씨가 복원한 것은 이 사진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정면 모습이 용은 아니며 해태상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옥새를 만든 장인들의 계보와 국새 1호의 위쪽 및 정면 모양이 담겨 있다. 
오른쪽은 1958년 촬영된 국새 1호의 사진 (국가기록원 자료 사진)
해태를 닮은 대한제국 국새모양을 닮아 있다. 일설에 '삽살개'를 닮아 있다는 것도
역사적인 연유가 있다.
제1호 국새는 대한제국 때의 국새 형태로 은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삽살개'를 닮아 있다는 것도 역사적인 연유가 있다. 일본의 신사나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
가라구니나 가라시지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청삽살개와 황삽살개라는 면에서
집 앞을 지키는 살살개의 의미가 사찰이나 궁궐을 지키던 역사적 연유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삽살개는 신라 때의 궁중개로 궁궐을 지키던 개였다는 것은 그러한 배경을 설명해준다. 
삽살개는 그런 면에서 어처구니의 영향과 함께 광화문 앞 해태상의 배경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삽살개 국새'라고 할만한
제1호국새의 인뉴에 사용된 수호신은 일면 궁궐의 어처구니에 속하는
해치 또는 해태상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처구니는 궁궐의 지붕에 올리는 잡상 또는 전우로 불리는 아홉가지 수호신상이다.
그 아홉가지 어처구니는 龍, 鳳, 사자, 천마, 해마, 산예, 押魚, 해치, 斗牛로서
각각 조금은 형태를 고전적인 신수상을 지니고 있다. 이에 관한 글은 광화문 해태상은
문헌상으로도 화재 방어용에서 볼 수 있다.

▲.불타기 전의 숭례문의 아홉가지 어처쿠니들.
그 가운데 하나가 한동안 상실된 채 방치되어 논란이 있기도 했다.
이들 어처구니는 화재 등 재앙을 막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해태는
용과 관련된 어처구니로서 광화문 앞에 세워왔던 바로 그 해태이다.
그러나 본래의 궁궐 지붕에 올려져 있는 해치상은 오히려 대한제국의 국새와 정부수립후의
제1호 국새 모양을 닮아 있다.
대한제국 국새를 모델로 했다는 정도의 유사성 외에 국새 제1호가 어떤 모델을 한 것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근거가 없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종임금이 광화문에
해태상을 만들어 세울 때 국새도 아울러 해치상을 모델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국새 1호의 인뉴와 비교해보면 그 모습은 거의 일치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볼 때 
고종황제가 세운 광화문 해태상과 그때의 국새는 같은 면에서 대한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나라의 상징으로서 제작되었던 같은 신수상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해태상을 모델로 하여 국새 제1호를 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의 사진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경복궁 근정문 계단 해태상
한편으로는 대한제국 국새를 모델로 한 제1호 국새의 이미지를 '삽살개' 인뉴로 해석하기도 한다. 
건물 앞에 세웠다는 면에서 해치가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전통 개인 삽살개의 신화적 이미지가
해태에 서려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수호신으로서의 '삽살개'는
단순한 삽살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화문 앞에 세워져 온 해태상은 일본의 신궁이나 신사 앞에는 '고마이누'로서 개를 닮은 
신수상이 세워져 있다. '고마이누'는 한자로 ' 拍犬'라고 쓰지만 본래 '고마'라는 말은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고마(高麗)'를 의미하여 '고마이누'는
우리민족문화에서 건너간 수호신 이미지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고마이누'를 '가라이누(韓犬)'이라고도 한다. 그 '가라이누'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삽살개 신수상이다.
어처구니의 동물 수호신들이 나름대로 신화적으로 강조되었던 고려시대의 불교문화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로 바뀌어지면서 신수상들은 많이 현실의 동물들로 전이되었다.
삽살개 수호신상을 모델로 한 '가라이누'이겠지만, 국새 제1호의 모델이었던
대한제국 국새에 새겨진 인뉴의 신수상은 실제의 '삽살개'보다는 보다 신화적인 표현을 가진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삽살개가 아닌 삽살개를 닮은
어처구니와 같은 신수상 즉 해치의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치'를 모델로한 대한제국의 국새는 을사늑약으로 일제 총독부가 탈취하여 
국제외교에 무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일합방조약 문서에도
이완용은 국새를 불법으로 사용했다는데 있어서 우리나라 국새 관리는
나라의 주권과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새는 청와대 대통령 엠블렘이 봉황과 무궁화로 되어 있는 것을 본 따 
봉황 인뉴를 가진 국새에는 무궁화가 봉황 가슴에 새겨져 있다
청와대 대통령 문장을 기본으로 대통령의 명함에도 대통령 봉황 - 무궁화 문장이 들어간다.

▲.새 국새 제작 모델로 채택된 민홍규씨의 작품인 이 봉황국새는 본래 가슴에 무궁화를 달고 있어
전체적으로 청와대의 대통령 엠블렘의 축소형이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특리 전통한방 휴양관광지내 국새전각전 건립현장에서 국새 모습
우리나라의 국새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였다.최초의 국새는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의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삼국시대에도 당나라 등과의
외교문서에 국새를 썼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왕조시대에 국새는 바로 국가이자 임금의 상징이었다
국왕의 즉위식이니 그 계승은 선왕으로부터 국새를 물려받음으로서 그
권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요, 금, 원 등의 금인을 받아 국새로 썼다 1392년 건국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3년(태종 3)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지인 이라는 금인을 받아 이것을 '대보'라고 하여
1636년 (인조14) 까지 중국과 관련된 외교문서에만 썼다.
나중에 일본관계 문서에는 소신지보 (昭信之寶)라는 것을 따로 사용했었다.
이 소신지보는 조선 후기에 이덕보 (以德寶)라는 이름으로 고쳐져 사용되었다. 
일본에 덕을 베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리라.
인조 14년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서 만들어준 국인을 썼으나 숙종 때 명나라 때의
옛 국인을 다시 찾아서 왕위 계승 때 썼다는 것은 국새에 관련하여 그 권위의 이미지가
왕위 계승에서 그 배경 의미를 찾는데도 고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대주의적인 '대보'는 1894년(고종 20) 갑오개혁 후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끝내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대신에 고종임금은 '大朝鮮國寶' 또는
'大朝鮮大君主之寶'를 만들어 썼다. 대한제국 이전이지만, 1894년을 전후하여
고종임금은 자주적인 국가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해치를 모델로 인뉴를 만든 대한제국 때의 국새는 엄격히 말하여 
조선말기의 국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국새도 '대한국새'(大韓國璽) 또는 '황제지새(皇帝之璽)' 등으로 칭해졌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뒤 1949년 5월 새로운 국새를 제작했다. 그것이 정부수립 이래 제1호 국새이다. 
그 인문(印文)에는 '大韓民國之璽'라는 한자로 새기고 내각사무처에서 관리했다.
이러한 한자 국새가 한글로 고쳐진 것은 1970년 3월이었다.
고대 삼국시대 이전부터의 국새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글로 국새를 만든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국새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한글 국새는 새 국새규정을 따라 한글 전서체로 '대한민국' 4자를 가로로 새기고 
총무처에서 관리하게 했는데 지금까지 사용하는 한글 '대한민국' 국새의 인문(印文)의 아키타입이다.
1998년 이후의 제3대 국새는 고대 우리민족의 역사에서부터 이어져온
난생신화의 전통인 봉황을 인뉴로 만든 국새로서 균열이 갔기 때문에
2005부터 새로 준비하여 2008년 2월부터 사용되는 제4호 국새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의 국새는 그렇게 한글로 '대한민국'이 새겨져 있으며 봉황 인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과 대만 일본에도 국새는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부터 국새를 제작했다.
중국의 국새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지인'이라는
한자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국새는 1954년 제 1차 전국인민대표자 회의 이후
사용하지 않고 국가박물관에 1급 국가문물로 보관되어 있다.
반면에 대만은 청동이 아닌 옥으로 만든 옥새로서
'중화민국지새(中華民國之璽)'라는 인문을 쓰고 있다.
대만은 '옥새'라는 전통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새는 메이지 유신이후인 1874년부터였다. 
일본의 국새는 '大日本國璽(대일본국새)' 그리고 '天皇御璽(천황어새)'라는 인문을 가진
금으로 만들어진 국새로서 궁내청에서 사용 관리한다. 일본국새도 내각임명장과 훈장 등에 날인한다.

다음 장에서 서양의 봉황 전통에 대하여 상세히 다루겠지만, 서구의 국가 인장은 글자 인장이 아니라 
그 찍히는 인문이 그림을 중심한 문장 (紋章) 즉 엠블렘
미국의 국새는 'The Great Seal'이라고 하며 독수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것을 기본으로 백악관 대통령 엠블렘(Presidential Seal)이 만들어졌다
프랑스도 전통적으로 독수리 엠블렘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유의 여신상 문장(紋章)을 사용하는데
왁스를 녹여 붙인 뒤에 그 위에 날인하지만, 19세기 프랑스의 전통 엠블렘은 계림 신라처럼
닭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서양에서도 닭은 봉황과 관련하여 오랜 신수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쌍봉황과 관련하여 러시아의 성 로마제국의 쌍두 독수리상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것도 주목된다.
▲.프랑스 전통 엠불렘
                           
▲.Emblem of the The Holy Roman Empire double eagle
지금 우리나라가 사용하는 국새는 봉황 국새이다.
그것은 세계사 전체에 나타나는 봉황(鳳凰, Phenix)의 불사조 엠블렘에 연맥이 닿아 있는
국새라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제1호 국새가 분실된 뒤에 그 원형을 몰랐을 때엔
거북이 국새는 나름의 조선시대 5백년 역사를 잇는다는 정통성의 의미가 있었다.
그 후 1998년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국새를 제작했을 때 봉황 인뉴를 사용한 것은
1967년부터 제정된 청와대 봉황엠블렘을 국새에 확대시킨 의미를 가진다.
봉황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인 이미지도 아니며, 중국이 강조해온 용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엠블렘으로서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을 가진 국새가
금년 2008년 2월부터 사용하게 된 봉황 인뉴 한글 국새이다.
특히 국새와 청와대 대통령 엠블렘으로 사용되는 봉황은 우리의 국기인 태극문양과 관련이 있다
특히 새로 만든 봉황 국새의 제작 방식은 주물 방식이 아니라 거푸집 방식을 택했다는데서
또 하나의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국새 제작이 거푸집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갖는 특유의 방법이다.  
밀랍으로 만든 거푸집 안에 쇳물을 녹여 부어 만드는 거푸집 방식은
우리나라의 옛 청동기 시대의 청동거울이나 통일신라시대 에밀레 종 등의 제작방식을 말한다.
다음장에서 논하겠지만, 에밀레종에 새겨진 비천상은 봉황 이미지의 하나인 음악의 신선인
가루라 이미지를 바탕하고 있다.
그러한 봉황 이미지에 닿아 있는 비천상을 부조로 새긴 에밀레종을 만든 거푸집 방식이 
봉황 국새 제작에 도입되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깊은 역사적 의미가 서려 있다.
에밀레종은 소리를 울리는 음악의 의미에서 오색 오음을 낸다는 봉황의 역사적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제작기법이 오늘날 우리나라 새 국새의 제작 기법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밀랍형주조법 즉 거푸집 방식은 밀랍에 섬세한 조각을 미리 해놓고 그것을 주물에 넣어 만든 방식이다. 
이러한 밀랍형 주조방식으로 에밀레 종의 섬세한 비천상 조각을 만들 수 있었던 전통을
이번 국새 제작자들은 잘 수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수천년 전수되어 온 것으로 알려진 이러한 거푸집 방식의 제작 기법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 만들 수 없는 특별한 기술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의 국새는 전통 봉황과 섬세한 제작기술 그리고 우리민족이 만든 
한글을 사용하는 그런 자랑스러운 국새인 것이다. 특히 새로 사용하는 봉황 국새는
그 거푸집 제작 과정에서 오합토 (五合土)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오색과 오음은 봉황의 캐릭터에 들어 있는 오방사상 예술의 핵심이
국새 제작 기술에 들어 있는 것이다.
국새 제작은 겨울동안 밀랍 덩어리를 세밀히 조각해 뉴를 만들고 이어서 
봄, 여름에는 오합토를 배합하여 조각이 완성된 밀랍 위에 덮어 씌운다.
그 오합토의 흙은 장호원토, 강화토, 포천토, 합천토, 강진토 다섯 곳의 진흙을 섞어
옥새 밀랍조각 위에 씌우는데 이 진흙의 배합도 극비에 부쳐져 왔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오합토 거푸집은 가을 동안 건조시키고 숫가마라고 부르는 가마에서
1500℃ 이상으로 그것을 굽는다고 한다.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국새 즉 어보의 제작은 정도전의 주장으로 시작되었다. 
그 제작 비법이 기록되어 있는 ‘영새(榮璽)부’라는 것이 전해져 오는데
어보 위조 문제가 가끔 발생하여 옥새 전각장 1인에게만 그 내용이 비전으로 이어져 왔다.
그 계보는 철종 때의 옥새전각장인 ‘황식’으로 계승되었고 다시 ‘전홍길’로 이어져
조선왕조 마지막 옥새장인은 '황소산'이었는데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어보를 제작했었다.
황소산 뒤를 이은 '정기호'는 동양 삼국 중 유일한 옥새 제작 계승자로서 그의 제자가 '정기호'이며
정기호의 유일한 제자가 ‘민홍규’라는 사람으로 현재의 우리나라 국새를 만든 사람이다
우리의 봉황 국새는 그 전통적인 이미지와 국가의 자주성 및 기술의 전통에서도 
세계성과 독자성을 가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청와대 대통령 엠블렘에만 봉황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새에도 깊고 오랜 우리의 역사적인 봉황 인뉴를 가진
국새라는 면에서 봉황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상징 이미지이다.
그 어떤 면에서도 제거되거나 손상되어서는 안된다
옥새 이야기
서문 대권을 물릴 세자 없이 임금이 승하하명 대권의 상징인 옥새는 임금의 할머니나 어머니 손에 든다. 철종이 아들을 못 낳고 병환이 위독하자 야심가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의 친정 조카인 조성하가 후에 이완용을 양아들로 들이는 이호준의 사위라는 것을 알고 접촉한다. 이 인맥의 다리가 성공하여 철종 승하 후에 조대비는 옥새를 수중에 넣고 흥성대원군의 둘째아들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한 것이다. 다시 한국 치안의 총책임자이던 아카시 경무 총감이 예고도 없이 창덕궁을 구경하겠다는 핑계삼아 들이닥쳤다. 곤도라는 일본인 사무관 하나만을 앞세워 실은 옥새가 보관된 현 위치에서 통로가 어디로 나는가를 위한 예비답사였다. 이 비밀 내방을 알아차린 순종황제는 짐짓 아카시를 내전에 불러 아이스크림을 대접했다. 아카시는 줄곧 식을 땀을 흘렸다 한다. 남겨진 우리나라 최고의 국새는 예나라의 예왕지인이다. 그 후 중국을 사대하면서 중국이 새겨준대로 써야 했기에 부마국왕지인이니 하는 굴욕적 국새가 많았다. 옥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옥새의 맥이 소실되었다. 일본은 계승이 불분명한 상태이다. 일본의 문화재급 전각가인 ‘고바야시’는 일본 ‘묵(墨)’지 ‘90년 11월에서, “중국 한나라 때의 동장(옥새)을 재현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라고 밝혔다. 한국은 1999년 월간조선 10월호에 개제된 바처럼, KIST에서도 국새(옥새)제작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옥새는 그만큼 전통의 신비가 현대를 능가하는 장르임에 틀림없다. 옥새는 왕이 사용하는 도장으로, 중국 진시황제가 옥에 새긴 도장을 쓰면서 ‘옥새’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중 1370년 고려 공민왕 때, 명(明)나라가 보내온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금인(金印)을 ‘옥새’라 부르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옥새는 전문적으로 옥보(玉寶), 새보(璽寶), 신보(信寶), 행보(行寶), 행새(行璽), 신새(信璽), 어보(御寶), 옥새(玉璽), 관보(官寶)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상고 시대는 옥새를 인(印) 또는 새(璽)라 하였다. 이 후 한민족의 하늘 사상(천손 사상)을 상징하는 새(鳥)를 이입하는 의미 때문에 구체화되고,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영원히 찬성하라 는 뜻에서 새(璽)가 정착되었다. 새의 형성은 다분히 삼신 오제 성격처럼, 집상운신명(集象運神命)의 대자연 법리를 담아내는 명당 개념이 내포되었던 것이다. 오늘 날, 인감도장에 성공인장, 부귀인장 등의 상업적 용어들은 모두 옥새의 운용능력을 표하려는 의도이다. 조선조 왕을 상징하는 도장은 두 가지로 나뉜다. 왕을 칭송하여 바쳐지는 ‘어보(御寶)’와 공무에 사용하는 ‘옥새’가 있다. 조선 어보의 내용에서, 왕은 빛나는 문무(文武)와 효덕(孝德)을 비는 자인(慈仁)과 정경(貞敬)의 뜻을 드러내는 말로 제 꾸며진 것이다. 다음으로, 공무에 쓰는 ‘옥새(玉璽)’는 업무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게 된다. 조선왕조 실록에 보면, 세종(정유년)에 “역대 제왕의 옥새제도는 한나라 때에는 6옥새, 당나라 때 8옥새를 일에 따라 사용하였사온데, 당나라의 신새(信璽), 송나라의 진국신보(鎭國神寶)와 같은 것은 사신발병 등의 일에 쓰였고, 행새(行璽)와 행보(行寶)는 봉국.책봉 등의 일에 쓰였사오며, 황제가 보내 준 대보(大寶)는 사대 문서에만 쓰시고 그 밖에는 쓰지 마옵소서” 고종 때에도 공식 외교 문서에 황제지보(皇帝之寶), 황제의 명령을 입증하는 칙명지보(勅命之寶) 등 여러 옥새를 사용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옥새는 국왕이 바뀔 때, 다음 왕에게 전수되는 대보(大寶)다. 따라서 ‘옥새’는 왕의 실질 권한에 비중을 두고, ‘어보’는 매우 상징적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옥새는 왕권이자 국권으로서 모든 국사에 빠짐없이 지참되었다. 그 의식은 예조 정랑이 교명, 책함, 옥새 끈을 받들고 간 후, 임금의 책상(어안)을 두면 상서관이 옥새를 받들고 사정전 합문 밖에서 기다리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시대 옥새는 도화원, 화공 중에 뛰어난 예술성과 장인성이 있는 사람 중에서 단 한명에게만 전수되었다. 이는 위조를 막기위해 여러 사람에게 제작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인부랑에서, 조선 시대에는 괴원(槐院) 산하인 개물실에서 옥새를 제작했다. 옥새는 학문, 철학, 예술, 기능 등에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갖추어야 완성해낼 수 있는 영역이다. 옥새는 앞서 행한 학문, 철학, 예술의 과정이 아무리 훌륭해도 본 기능 부분에서 성공해내지 못하면 실패를 보는 어려움이 있다. 지금까지의 전반 과정을 오히려 진흙 거푸집을 만든 후에 연금주조술이 필요하다. 특히 전통 옥새의 주조기능인 용주고구술(龍主稿丘術), 합금비전(合金秘傳), 연금전(鍊金典) 등은 현대적 기능이 따를 수 없는 옥새의 숨겨진 비전이다. 옥새를 보면 나라가 보인다고 한다. 전통 옥새 전각은 수 천년 전 고대 동양에 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 최고의 상징물로 시작되었다. 결코, 크기로 잴 수 없는 힘이 잇다. 일본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면서 고종황제의 옥새를 찬탈하는데 열을 올렸던 것도 옥새가 곧 왕권이자, 국권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옥새와 대한민국 국새


▲.정부수립후 지새와 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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