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사 손자병법 : 깊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라

rainbow3 2019. 9. 20. 14:06


한국사 손자병법

전략의 조건 - 깊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라!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심모원려(深謀遠慮)’

 

 

원문
孫子曰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故經之以五 校之以計 而索其情, 一曰道 二曰天 三曰地 四曰將 五曰法, 道者 令民與上同意也 故可與之死 可與之生 而民不畏危 天者 陰陽寒暑時制也 地者 遠近險易廣狹死生也 將者 智信仁勇嚴也 法者 曲制官道主用也 凡此五者 將莫不聞 知之者勝 不知者不勝 故校之以計 而索其情 曰 主孰有道 將孰有能 天地孰得 法令孰行 兵衆孰强 士卒孰鍊 賞罰孰明 吾以此知勝負矣 將聽吾計用之 必勝 留之 將不聽吾計用之 必敗 去之 計利以聽 乃爲之勢 以佐其外 勢者 因利而制權也
손자왈 병자 국지대사 사생지지 존망지도 불가불찰야, 고경지이오 교지이계 이색기정, 이왈도 이왈천 삼왈지 사왈장 오왈법, 도자 영민여상동의야 가여지사 가여지생 이민불외위, 천자 음양한서시제야, 지자 원근험이광협사생야, 장자 지신인용엄야, 법자 곡제관도주용야, 범차오자 장막불문 지지자승 부지자불승, 고교지이계 이색기정 왈 주숙유도 장숙유능 천지숙득 법령숙행 병중숙강 사졸숙련 상벌숙명 오이차지승부의, 장청오계용지 필승 유지 장불청오계용지 필패 거지, 계리이청 내위지세 이좌기외, 세자 인리이제권야

 

 

해석
손자는 말했다. “전쟁은 국가의 중대사다.

백성의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땅이요, 국가의 보존과 멸망을 결정짓는 길이다.

깊이 살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쟁의 승패를 다스리는 다섯 가지를 핵심 요소로 살피고,

(일곱 가지) 계책으로써 정확한 상황을 분석해보아야 한다.

 

그 다섯 가지란 첫째가 도(道), 둘째가 천(天), 셋째가 지(地), 넷째가 장(將), 다섯째가 법(法)이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임금과 똑같은 뜻을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이 임금과 함께 살고 죽으며,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천(天)이란 밝음과 어두움, 추위와 더위 등의 기후 조건 그리고 계절의 변화 등과 같은 시간적인 제약을

말한다.

 

지(地)라고 하는 것은 거리의 멀고 가까움, 지세의 험하고 평탄함, 넓고 좁음, 죽을 곳과 살 곳 등

온갖 지형 조건을 말한다.

 

장(將)이란 깊게 살피고 넓게 볼 줄 아는 지략(智), 부하들에 대한 믿음(信), 부하들을 아끼고 포용할 줄 아는

통솔력(仁), 전장에서의 용맹함과 결단력(勇), 군기를 엄숙하게 하고 규율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嚴) 등으로 장수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을 말한다.

 

법(法)이란 군대의 편성(曲制), 명령계통(官道), 무기와 식량(主用) 등을 말한다.


이상 다섯 가지는 장수라고 한다면 누구나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제대로 아는 자는 승리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가지 계책으로써 적군과 아군의 실정을 비교 분석해보면 전쟁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적군과 아군 중 임금의 정치와 리더십(道)은 누가 더 나은가?
둘째, 적군과 아군 중 장수의 자질과 통솔력은 어느 편이 더 유능한가?
셋째, 적군과 아군 중 천시(天時)와 지리(地理)는 어느 쪽에게 더 유리한가?
넷째, 적군과 아군 중 군대의 법제(法制)와 명령(命令)은 어느 편이 더 엄격하고 공정하게 시행하고 있는가?
다섯째, 적군과 아군 중 병력과 무기는 어느 편이 더 강한가?
여섯째, 적군과 아군 중 병사의 훈련은 어느 편이 더 잘 되어 있는가?
일곱째, 적군과 아군 중 포상과 형벌은 어느 쪽이 더 공명정대하게 시행하고 있는가?


나는 이상의 일곱 가지 계책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적군과 아군 중 어느 편이 이기고 질 것인지를 미리 알 수

있다.
장수가 나의 계책을 잘 듣고서 군대를 지휘한다면 반드시 승리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이로움을 살피고 헤아려서 그것에 따라 유리한 형세(勢)를 조성하고, 그 형세가 외부에서 돕는 보조 조건

이 되도록 한다. 여기에서 ‘형세’라고 하는 것은 이로움을 장악해서 상황 변화에 따라 주도권을 통제하는 것이다.

 

 

 

손자의 병법과 전략의 제1테제는 ‘심모원려(深謀遠慮)’라고 할 수 있다.

곧 전쟁이란 국가가 생존하고 멸망하는 갈림길이므로 ‘깊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는’ 전략이 없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심모원려’의 테제에 충실하려면 무엇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전략적으로 통제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고구려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시대였다.

그러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의 융성기는 부왕(父王)인 고국원왕을 살해한 백제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전략적으로 통제하면서 깊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볼 줄 안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탁월한 국가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서기 371년 겨울, 고구려는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백제의 정복왕, 근초고왕의 공격 앞에 평양성이 함락 당했는데, 그때 고국원왕이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패배로 고구려는 황해도와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황해(서해)에 대한

제해권마저 백제에 빼앗겼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임금이 된 사람이 바로 소수림왕이었다.

소수림왕은 부왕 고국원왕을 잃은 슬픔과 치욕에 몸서리를 쳤다.

고국원왕은 제왕의 신분으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간의 전쟁터에서 최초로 전사한 불명예까지 뒤집어써야

했기 때문에 소수림왕은 반드시 백제를 정벌해 부왕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했다.

당시 고구려의 백성은 물론 백제와 신라 모두 소수림왕이 즉각적인 보복 전쟁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소수림왕은 개인적인 분노와 감정에 치우쳐 보복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고구려의 상황으로 볼 때 자칫 나라의 멸망을 재촉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백제 정벌에 나서는 대신 고구려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국력을 회복해 재도약할

수 있는 방법과 전략을 모색했다. 실제 당시 최강의 국력과 군사력을 자랑한 백제의 근초고왕을 상대로

섣불리 보복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짚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수림왕은 국력의 열세와 불리한 전세를 냉철하게 꿰뚫고 자신의 분노와 감정을 통제하면서 먼저 주변 국가,

곧 중국의 전진(前秦) 및 동진(東晋)과 외교관계를 맺어 백제를 압박해 더 이상 고구려에 대한 공격에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백제의 공격이 느슨해지는 틈을 이용해 내치(內治), 곧 국력 회복과 정치 안정에 온힘을 쏟았다.

특히 이때 소수림왕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기본으로 한 세 가지 정책, 즉 ‘불교 도입, 태학 설립, 율령(법

령) 반포’를 통해 고구려를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로 탈바꿈시켰다.

불교의 도입은 종교적 권위와 일체감을 활용해 왕권의 신성함을 강화시켰고,

중앙교육기관인 태학의 설립은 왕을 보좌해 중앙집권체제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인재와 국가 관료를 체계적

으로 양성할 수 있게 했으며,

율령 반포는 나라의 법과 명령은 오직 임금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 강력한 힘과 권력을 행사한

당시 유력 귀족 집단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 세 가지 정책으로 소수림왕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정치 안정과 민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편에서 그가 ‘웅대한 지략’을 갖춘 제왕이었다고 평가했

다. 이것은 김부식이 무모한 보복 전쟁에 나서 고구려를 끝 모를 위기 속으로 몰지 않고 오히려 착실하게

‘외교와 내치’에 힘써 나라의 미래를 다진 소수림왕의 ‘전략적 지혜’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부식이 높게 평가한 소수림왕의 전략적 지혜는 다음 보위를 이은 그의 아우 고국양왕(광개토대왕의 아버지)

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국원왕은 백제의 진사왕과 동시대 인물인데, 그는 부왕이 피살당한 원수와

강토를 빼앗긴 치욕을 갚기 위해 늘 백제를 벼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소수림왕처럼 섣불리 백제에 대한 보복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말갈을 압박해 백제에 맞서도록 하면서 자신은 북쪽 국경을 위협하는 후연(後燕)을 방어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는 한편 소수림왕의 내치(內治) 전략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렇다면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2대에 걸쳐 분노와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토록 내치에 힘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고국양왕의 뒤를 이은 태자 담덕(談德), 곧 광개토대왕

의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밝혀진다.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 국가다”

 

서기 391년 임금의 자리에 오른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때와는 전혀 다르게 즉위와

동시에 병마(兵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10여 개의 성(城)을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이때 백제의 진사왕은 여러 차례 크게 패배해 마침내 한강 남쪽의 위례성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의 패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강 이북의 여러 주(州)와 군(郡)은 물론 천혜의 요새인 관미성(지금의 강화)까지 차례로 고구려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후 광개토대왕이 이룬 위대한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은 모두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복구한 고구려의 국력과 열정을 쏟아 닦아놓은 국가체제와 정치 안정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깊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국가 전략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큰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심모원려’한 국가 전략은 광개토대왕의 시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시대에 이르러 그것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고 할 수 있다.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는 명실상부하게 요동과 한반도 전역을 자신의 세력권에 둔 ‘패권 국가’로 자리 잡고서 최고의

융성기를 구가했기 때문이다.

장수왕은 꾸준하게 남하 정책을 추진해 한강이남 지역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했다.

삼국의 역사를 볼 때 한반도에 대한 패권은 한강 유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강 유역을 장악한 시기에

따라 서기 4세기는 ‘백제의 시대(근초고왕)’였고, 서기 5세기는 ‘고구려의 시대(광개토대왕과 장수왕)’였으며,

서기 6세기는 ‘신라의 시대(진흥왕)’였다.

이렇듯 장수왕은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신라와 백제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특히 장수왕은 서기 475년 친히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 정벌에 나서 도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서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살해당한 지 100여 년 만에 이룬 ‘복수’였다.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가 누린 강국으로서의 위상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장수왕 72년: 484년) 위(魏: 북위)나라 사람들은 고구려가 한창 강성하다고 말하면서 수많은 나라 사절들의

숙소를 정할 때 제(齊: 남제)나라의 사절을 첫 번째로 하고, 고구려의 사절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이 기록은 고구려가 당시 중국 대륙을 양분하고 있던 북위(北魏) 및 남제(南齊)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강력한 국력을 만천하에 과시했음을 뜻한다.

이 때문에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천손(天孫: 하늘의 자손)’이며 또한 ‘고구려

는 천하의 중심 국가’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장의 보복 전쟁보다는 먼 훗날을 기약하고 착실하게 준비한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심모원려’한 국가 전략

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전쟁터에서 임금이 살해당하는 희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거쳐 ‘천하의 중심 국가’로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전략적 목표 전체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전략가는 당면한 상황과 당장 상대해야 할 적을 자신이 완성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의 일부분으로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행동에 옮기기 전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적의 상태를 모든 각도와 차원에서

깊이 있게 헤아리고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멀리까지 내다 본 다음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행동에 나선 다음 어떤 복잡한 상황이나 예측하지 못한 사건에 직면하더라도 애초 자신이 설정했던

전략적 목표를 잃지 않고 전진해 나갈 수 있다.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앞서 말했듯이 희로애락의 감정에

휩싸여 행동하는 것이다.

한 순간의 감정과 분노 혹은 복수심을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의 전략적 목표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최충수의 ‘무모한 행동’과 조선의 태종, 즉 이방원

의 ‘신중한 행동’을 비교해보면 권력 투쟁의 최후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감정과 분노를

전략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최충헌의 무신정권은 동생 최충수와 외종질 박진재가 협력해 세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최충수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서 이의민을 살해하고 최씨 무신정권을 일으킨 일등공신이었다.

최씨 형제는 명종을 몰아내고 신종을 새로운 임금으로 세워 모든 권력을 자신들의 수중에 장악했는데

이때부터 최충수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그는 형을 밀어내고 권력을 독차지할 욕심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최충헌이 그를 찾아와 만류하며 꾸짖자 “다른 사람은 내 행동에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는

데, 형이 홀로 나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그 수하에 사람이 많은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 내가 마땅히 그 무리를 깨끗이 없애 버릴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면서 자신의 수하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최충수의 행동은 순간적인 감정과 분노에 휩싸여 저지른 너무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최충헌을 따르는 무리와 군사력이 온전하고 또한 외종질 박진재까지 최충헌에게 협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충헌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을 향한 욕망과 최충헌에 대한 순간적인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저지른 군사 행동 때문에 최충수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조선의 개국에 끼친 공로나 제왕의 자질 그리고 정치적 능력 모두를 따져 볼 때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될 사람은 이방원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개국한 해(1392년) 세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태조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

인 방석이었다. 강비와 정도전, 남은 등 개국공신의 등에 밀려 세자 자리를 빼앗긴 이방원은 정치 일선에서도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태조)에 대한 배신감과 계모(강비)를 둘러싼 공신 세력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올랐지만 이방원은

최충수처럼 무모하고 충동적인 성향의 사람이 아닌 뱀의 지혜와 독기를 동시에 갖춘 ‘심모원려’형의 인물이었

다. 그는 섣부른 행동은 오히려 자신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당장에 군사

를 일으켜 권력을 되찾자는 주변의 강권(强勸)을 모두 뿌리치고 자신에게 닥친 치욕과 수모를 기꺼이 감내했

다. 그리고 은밀하게 세력을 다지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그로부터 4년 후(1396년) 이방원의 최고 정적(政敵)이었던 신덕왕후 강씨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죽고 태조

이성계마저 병을 얻어 눕게 되자 세자 방석의 후견 세력은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이때를 계기로 해서 이방원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다졌고, 다시 2년이 지나 정도전 세력

이 자신을 겨냥해 ‘사병(私兵) 해체’를 들고 나오자 군사 행동(제1차 왕자의 난)으로 단숨에 권력을 장악해버

렸다. 세자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순간적인 분노와 권력을 향한 끝 모를 욕망을 전략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방원은 자신이 완성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 즉 임금의 자리를 마침내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행동을 취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던 최충수와 이방원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적의 상태를 모든 각도와 차원에서 깊이 있게 헤아리고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멀리까지 내다 본 다음 행동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전략가가 반드시 갖추어

야 할 첫 번째 덕목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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