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데미안}에서의 내면성과 꿈
한 일 섭 (서강대)
Ⅰ
소설 {데미안 Demian}은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작품의 형식에서만이 아니라 소재적인 면에서도, 즉 저자 자신의 전기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주인공 징클레어의 삶은 헤세가 소년 시절에 겪었던 일들을 닮고 있고, 또 헤세의 중년기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서 유의할 점은 징클레어의 이야기에서 헤세의 소년시절은 외적인 삶과 관계되고 헤세의 중년기는 내적인 삶과 관계되는데 이 나중의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제의 헤세의 중년기 체험은 그 스스로가 그의 "삶의 두 번째 큰 변화"라 일컫는 그의 내적인 변화이고, 그의 자기 인식과 삶에 큰 전환을 가져 온 것이다.
이러한 내적 변화 자체는 지금까지 자연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애썼던 헤세가 자기 내면에서 '나'를 찾는 것을 삶의 목표를 삶는 내면성의 인간으로 변화된 것을 뜻한다. 헤세는 이를 다음처럼 기술한다. "이 목적지는 다시 하나의 은신처이다. 그것은 동굴도 아니고 배도 아니다. 나는 나의 은신처를 나의 내면에서 찾아 갖고자 한다. 그것은 '나'만이 있는 하나의 공간이고 점이며 그 곳으로는 세계가 미치지 않고 그 곳엔 '나'만이 거처하고, 그 장소는 산이나 동굴보다 안전하고 관이나 무덤 보다 안전하고 잘 보호돼 있다. 그것이 내 목적지이다. 그 곳으로 아무 것도 들어가서는 안되고, 그 곳이 완전히 '나'가 돼야 한다." 그러니까 헤세는 이제부터는 자연에서가 아니라 그가 찾으려는 '나'를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하는 '안식처'로 삼겠다는 것이다.
헤세의 이러한 '큰 변화'는 1916년과 1917년 사이에 일어났고, 그 직후인 1917년 9월과 10월에 그가 [데미안]을 집필했으며, 징클레어도 당시의 헤세와 똑같이 자기 내면 속의 '나'를 찾는 것을 자기의 삶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헤세 자신의 내적 변화의 결실이다.
징클레어는 그의 이야기의 중반에서 '나'를 찾는 것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지상 과제임을 천명할 정도이다. "새로운 신들을 소망한다는 것은 잘못된 짓이었다. 세상에 어떤 무엇을 주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짓이었다. 각성한 인간들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 이외에 어떤 다른 의무도 결코, 결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의무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고, 자기 속에 확고하게 있게 되는 것이고, 어디로 가게 되든 간에 자기의 길을 더듬어 가는 것이다."(126)
징클레어가 '나'를 찾는 것 또는 '자기'가 되는 것을 그의 삶의 최대의 과제로 삼는다는 것을 소설 {데미안}의 '머리말'에서 또한 화자가 예고한다. 즉 화자와 주인공이 동일인인 이 1인칭 소설의 머리말에서 '이야기하는 나'로서의 화자 '나'는 '행동하는 나'로서의 주인공 징클레어가 앞으로 '자기'가 되기 위해서 '나'를 찾는 것을 그의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린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찾는 자이다. 그러나 나는 별들이나 책들에서 찾지 않는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나의 피가 속삭이는 가르침들을 듣기 시작한다. [...] 어떤 인간의 삶도 자기 자신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하나의 길을 가는 시도이고, 하나의 오솔길을 암시하는 것이다."(8)
유의할 것은 이 인용문에서 화자가 거론하는 '내면'은 가르침을 주는 소리('나의 피가 속삭이는' 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징클레어가 이러한 내면의 소리에서 얻는 가르침에 따라 자기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징클레어가 자기찾기의 과정에서 그렇게 그의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예컨대 자기찾기 과정의 중반에서 그는 다음처럼 내면의 소리를 듣기에 몰두한다. "나는 외부세계에 대해선 완전히 무관심했으며, 종일 내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내면의 심층에서 살랑살랑 흐르는 물의 소리, 금지된 흐름이나 검은 흐름의 소리를 듣는 일에 몰두했다."(69)
Ⅱ
소설 {데미안}에서 징클레어의 자기찾기는 여러 해 동안의 '자기형성(自己形成)'의 과정 또는 여러 해 동안의 점진적인 '내적인 성장'을 거쳐서 비로소 그 목표에 도달한다. 특기할 것은 이 내적인 성장과정의 여러 중요한 부분이 무의식에 의해서, 특히 일련의 꿈에 의해서 표출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여기선 무의식 또는 꿈이 인간의 내적 성장의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인데 이는 C. G. 융의 정신분석 심리학의 학설과 일치한다. 융은 꿈의 대상작용(代償作用) 기능을 전제하고 나서 인간의 내적 성장의 과정을 '자기화(自己化)의 과정'이라 일컬으면서 이것이 꿈에 의해 표출된다는 것을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대상작용의 개념으로써 물론 꿈의 기능에 대해서 지극히 보편적인 성질을 말했을 뿐이다. [...] 무수히 이어지는 꿈의 연속들을 관찰하면 점차로 개개의 꿈의 배후에 숨어 있는 한 현상이 포착된다. 그 현상은 개별 인간에게서 진행되고 있는 일종의 성장 과정이다. 우선 대상작용들은 일방적인 것을 그때 그때 균형 잡는 것으로 혹은 방해된 균형을 바로잡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깊이 살펴보고 더 깊이 알아보면 흡사 일회성의 이 대상행위들이 일종의 계획에 맞추어 이어져 있다. 대상행위들이 서로 연관이 있고 의미심장하게 한 공동의 목표에 종속돼 있다. 그래서 장기간의 꿈들의 연속은 통일이 없는 일회적인 사건들의 무의미한 연속이 아니고 치밀하게 계획된 과정과도 같은 성장 과정 혹은 질서 과정이 된다. 장기간의 꿈들의 연속의 상징 속에 스스로 나타나는 이 무의식적인 과정을 나는 '자기화의 과정 Individuationsproze?'라 일컫는다."
헤세는 소설 {데미안}을 집필하기 이전에 융의 꿈의 기능에 관한 학설과 더불어 무의식에 관한 정신분석 심리학의 견식을 많이 갖고 있었다. 즉 그는 1916년 무렵에 "일종의 정신분석 입문서"가 될 만한 레온하르트 프랑크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거기서 "프로이드류(流)의 학설의 흔적"을 감지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프로이드나 융 등의 무의식에 관한 논문들을 깊은 관심을 갖고 읽었고, 더욱이 그들의 이론이 무의식에 관한 그의 개인적인 견해와 원칙적으로 동일함을 확인했다. "이 새로운 학술의 심리학에 대해서 예전에 추호의 관심도 없었던 내 자신에게 프로이드, 융, 슈테켈 등등의 논문이 새롭고도 중대한 것으로 생각되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읽었다. 그 논문들 모두에서 나는 정신현상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내 스스로 작가들이나 관찰들에서 얻은 예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나의 예견, 나의 어렴풋한 상념, 나의 얼마쯤 지각하지 않았던 지식 등이 그들의 글에서 표현되고 성문화돼 있음을 알게 됐다." 이어 헤세는 정신분석 심리학을 통해서 무의식, 특히 꿈에서 정신현상을 파악하는 일이 작가에게 매우 유익한 것임을 강조한다. "정신분석의 길, 즉 회상 꿈 연상으로부터 정신현상의 근원을 찾는 일을 어느 정도 행했던 자는 '자신의 무의식과 더욱 친밀한 관계'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을 불변의 소득으로 갖게 된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더욱 열심히 더욱 효과 있게 더욱 정열적으로 왕래하게 된다. 그는 '의식역하(意識?下)에' 머물러 있으며 주목하지 않았던 꿈들에서 일어나는 것을 많이 밝혀 낸다." 이것 모두를 감안하면 소설 {데미안}에서 헤세가 징클레어의 내적 성장의 과정을 형상화하는 데에 부분적으로 무의식, 특히 융의 학설과 일치하는 꿈의 기능을 활용한 것은 한 신념, 즉 그 자신의 생활체험과 그가 밖으로부터 얻은 정신분석 심리학의 지식에서 비롯한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생활체험이란 무엇보다 그의 신경병과 그 치료를 위한 그의 랑 박사와의 대담이 되는데 이와 관계해서 후고 발 Hugo Ball의 주장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헤세가 랑 박사와 "약 60회의 대담"을 가졌고, 이 "대담의 결실이 [...] {데미안}의 전부가 된다"고 한다. 이 주장은 무엇보다 정신분석 심리학의 논문들을 읽고 얻은 헤세의 지식을 배제하고 있는 탓으로 제한적인 타당성을 가진다. 부연할 것은 이 소설에서의 꿈의 형상들은 신비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Ⅲ
앞서 인용한 화자의 머리말에 따르면 징클레어는 자기찾기 또는 내적 성장 과정에서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내면의 소리는 그의 이야기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자기형성 과정에서 갖게 되는 그의 그때 그때의 체험에 대한 성찰이 알리는 것이다. 그의 그러한 체험들은 그의 의식하는 삶과 그의 무의식의 두 영역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무의식의 영역은 주로 꿈과 관계된다.
그가 성찰하는 그의 체험의 대상은 두 극성(極性)이다. 두 극성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이고(93), 전자를 "선(善)", 후자를 "악(惡)"이라 일컫기도 한다.(11) 그리고 신적인 것은 "밝은 세계"의 속성, 악마적인 것은 "어두운 세계"의 속성이다.(11, 109) 징클레어는 무수히 이러한 극성의 체험과 성찰을 하다가 끝내 자기를 찾는다. 그가 끝내 찾아낸 자기 또는 '나'는 두 극성, 즉 신성(神性,'신적인 것')과 마성(魔性, '악마적인 것') 모두를 존중하고 이 두 극성을 결합하는 총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인간이다.
한편 징클레어의 자기형성에 필요한 그의 체험과 성찰과 관계해서 우리는 그의 무의식, 특히 그의 꿈들의 구체적인 기능을 명시 하고자 한다. 그의 자기형 과정에서 그의 꿈들은 그의 그때 그때의 현위치를 밝히고 나아가 그의 목적지로 가는 방향을 예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꿈들은 그에게 이정표(里程標)의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그의 꿈들은 그가 목표에 도달하는 데 긴요한 도움을 준다.
징클레어의 자기형성 과정은 그 진척(進陟)의 정도에 따라 3단계로 구분된다. 제1, 2, 3 단계는 각각 그의 성장의 초반, 중반, 종반이 되며, 이 3개의 단계는 징클레어의 성장의 자연적인 순서에 따라 이야기되고 있다. 제1단계는 징클레어의 초등학교 시절에 해당되고, 그 이야기는 제1장부터 제3장까지의 것이다. 제2단계는 그의 김나지움 시절에 해당되고, 그 이야기는 제4장부터 제6장까지의 것이다. 제3단계는 그의 대학시절에 해당되고, 그 이야기는 마지막 두 개의 장, 즉 제7장과 제8장의 것이다. 징클레어의 이러한 자기형성 과정은 10세부터 20세까지에 이르는 약 10년간의 그의 생애에서 진행된다. 달리 말해 소설 {데미안}의 기본 이야기는 약 10년 동안에 전개되는 징클레어의 자기형성 과정의 이야기이다.
제1단계는 원래 밝은 세계에 속하는 징클레어가 어두운 세계를 체험하고, 나중에는 두 세계, 즉 "전체 세계"(62)를 존중하는 사상에 접근해 가는 것으로써 특징 된다.
징클레어의 어두운 세계의 체험은 처음엔 이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악동 크로머에 의해서, 다음엔 데미안에 의해서 이뤄진다. 데미안은 악마적인 속성도 갖지만 동시에 신적인 속성도 갖는다. 데미안은 두 속성 모두를 결합하고 있는 삶을 지향하는 인간이고, 이 점에서 단지 한 쪽의 속성, 즉 악마적인 속성만을 갖는 크로머와 다르다. 이로써 데미안은 징클레어에게 특별한 역할을 한다. 그는 징클레어에게 자기형성의 조건을 점진적으로 알리면서 바람직한 '나'를 발견케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그는 징클레어를 종국에는 '전체 세계' 존중의 삶을 하는 일종의 데미안이 되게 한다. 징클레어의 이야기를 전하는 책제목이 '데미안'으로 돼 있는 것이 이를 시사한다.
부연할 것은 징클레어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둘 다 존중할 수 있기 위해선 애초에 소속돼 있는 밝은 세계의 생활규범을 부시고 어두운 세계를 수용할 대담성을 갖는 일종의 "카인"(34, 132)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의 자기형성의 우선 조건이 되고, 또한 데미안으로부터 이를 직간접으로 배우게 된다.
크로머를 통한 어두운 세계의 체험은 징클레어에게는 자기형성의 한 전제가 된다. 이 체험에 의해서 징클레어는 악마적인 속성이 특정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이런 인식이 그 후에 그에게 데미안의 전체 세계 존중의 사상을 수용케 하는 한 동인이 된다.
크로머와의 만남에서 얻게 되는 어두운 세계의 체험은 징클레어로 하여금 비싼 값을 치르게 한다. 징클레어가 하지도 않은 사과 도둑을 영웅심에서 사실처럼 꾸며서 이야기한 것이 빌미가 돼 악동 크로머의 협박을 받는 가운데 갚기에 힘겨운 "2마르크"(18)의 '거액'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강압을 당한다. 이로 인해 징클레어는 생전 처음으로 가정부의 장바구니에서 잔돈을 훔치는 절도를 해야 하는 곤욕과 크로머의 종복이 돼야 하는 수모를 당한다. 이 과정에서 징클레어는 내적으로 한편으로는 죄책감과 후회, 밝은 세계에의 향수와 절망감 등으로 고뇌를 거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어진 곤경의 불가피성을 절감하고 싹터 오르는 마성을 감지한다. 징클레어의 꿈은 그의 이러한 내적 상황을 반영한다.
크로머의 마수에 걸려든 후의 징클레어의 첫 꿈은 밝은 세계에의 복귀를 바라는 소원을 반영한다. 그는 그 날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죄의식으로 번민하면서 부모로부터의 구원으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가게 되기를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그는 잠들기 전까지도 떠오르는 크로머의 얼굴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크로머의 꿈 대신에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꿈을 꾸었다. "우리는, 부모님과 여동생들 그리고 나는 보트를 타고 가고 있었으며 우리의 주위는 휴가 날의 평화와 광채로 가득했다."(23) 가족과 함께 밝은 세계에 있고 싶은 징클레어의 간절한 소원이 꿈에서 구현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꿈은 그의 현실에서 결여돼 있는 것을 대상(代償)해 주는 것이다. 이 꿈은 그의 무의식에선 신성(神性)이 지배하고 있으며 마성(魔性)이 조금이라도 용인될 수 없음을 알린다. 이는 다시 악마와 손을 잡았던 것을 절대적으로 죄악시하는 어린 징클레어의 의식과 일치한다.
징클레어가 크로머로부터 돈을 강요당한 지 몇 주되는 무렵에 밤마다 꿈을 꾸는데 그 꿈들은 그가 크로머 때문에 갖은 고역을 치르는 것을 나타낸다. 당시에 현실의 징클레어는 돈을 다 주지 못한 탓으로 크로머로부터 질책과 협박을 받는 이외에 그의 아버지의 심부름을 대신하고, 행인의 등에 종이 쪽지를 붙이기도 하고, 또 한 쪽 다리로 서 있어야 하는 등의 벌을 예사로 받는다. 징클레어의 이러한 고통스러운 현실이 당시의 꿈들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많은 밤의 꿈들에서 나는 이러한 고역을 계속했고, 그 때마다 악몽의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27)
상당한 시일이 지나서도 여전히 크러머에게 얽매여 시달리고 있는 징클레어가 역시 그러한 일과 관계되는 꿈을 자주 보는데 그 꿈들이 색다른 것들이다. 즉 그 꿈들에선 크로머가 징클레어가 현실에선 시키지 않는 일들을 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꿈들에선 징클레어가 크로머에게 그의 노예가 될 정도로 전에 없이 완전히 예속돼 있다. "나의 꿈들에선 그가 나의 그림자와도 같이 나와 함께 지냈고, 또 이 꿈들에선 그가 현실에서 나에게 시키지 않았던 일을 나에게 시키고 있었으며, 나는 철저히 그의 노예가 됐다."(35)
이러한 꿈들 중에는 징클레어에게 가장 무서웠던 꿈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꿈이었다. "크로머가 칼을 갈고 나서 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우리는 가로수 길의 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서 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지 몰랐다. 그러나 누군가가 오자 크로머가 나의 팔을 누르면서 저게 내가 찔러야 할 자라고 말할 때 그게 나의 아버지였다. 그 때 내가 깨어났다."(35-36) 이 꿈은 징클레어가 현실에선 시도하지도 않고 또 시도할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여 주지만 당시의 그의 무의식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징클레어에게서 아버지는 밝은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 꿈은 그의 무의식에선 어두운 세계 또는 악마적인 것이 밝은 세계 또는 악마적인 것을 제압할 정도로 강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꿈을 비롯한 당시의 그의 꿈들 모두가 그의 무의식의 이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 그 꿈들 모두가 그를 어두운 세계를 대표하는 크로머의 '노예'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 살해기도의 꿈에서의 방금 언급한 의미의 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징클레어에게서 이전에 일어났던 일 하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징클레어가 크로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는 고난을 당한 직후에 자기의 그러한 참상을 감지 못하고, 때문에 그의 마수로부터 자기를 구해 낼 수 없는 아버지를 경멸하고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21)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 일을 말한다. 밝은 세계를 대표하는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징클레어의 이같은 무엄한 태도를 화자는 "아버지의 신성(神聖)에 최초의 균열을 낸 것"이고, 자기형성을 위해 지금까지 기댔던 "기둥"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21) 이어 화자는 밝은 세계를 파괴하는 그같은 성향은 "가장 비밀스러운 밀실"(21)에서 계속 남아서 커진다고 한다. 화자의 이러한 예고가 아버지 살해기도의 꿈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꿈을 꾸었던 당시의 징클레어는 현실에서 그러한 꿈에 의해 지배된 삶을 했다. "나는 현실적인 것보다 [...] 이러한 꿈들 속에서 살았고, 이러한 그림자들에게 힘과 삶을 빼앗겼다."(35) 이는 그의 의식이 무의식에 의해 지배돼 있고, 때문에 그의 의식에서도 악마적인 것이 신적인 것을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그의 의식에선 그가 밝은 세계를 수호할 의향이 지극히 미약하고 반대로 어두운 세계를 수용할 의향이 엄청나게 커진 것임을 뜻한다. 이에 상응되게 당시에 그는 가끔씩 밝은 세계에로의 "향수"(36)가 강렬하더라도 그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의 현상황을 그의 "운명"(37)으로 받아 드렸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꿈들을 보았던 당시에 징클레어가 또한 데미안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전에 데미안으로부터 카인 예찬론을 들은 적이 있었고, 그 후에 이번 꿈에서 그와 재회하는 것이다. 꿈에서 데미안이 크로머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박해와 폭력을 가했지만 그는 데미안에게서 받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크로머에게서와는 달리 기꺼이 받고 싶었다. "내가 크로머에게서 고통과 강압 속에 받았던 모든 것을 데미안에게선 기꺼이 받고 싶었고, 그 때의 나의 감정에는 환희와 두려움이 들어 있었다."(36)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데미안은 악마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크로머와 동일하지만, 신적인 속성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즉 신성과 마성의 두 속성을 각고 있다는 점에서 크로머와 다르다. 데미안은 두 속성 다 존중하고 그것에 입각한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크로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니까 무의식에서 징클레어가 크로머보다 데미안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가 당장은 데미안에게서 크로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악마적인 세계에로 유도되더라도 앞으로는 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 세계를 수용하는 길로 전환할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예고한다.
얼마 있다가 징클레어는 실제로 데미안의 안내에 따라 전체 세계를 수용하는 사상에 접근할 기회를 갖는다. 징클레어가 이른바 카인의 "이마 표시"(30, 34)를 단 데미안의 힘에 의해 크로머로부터 해방되고, 그 때부터 그러한 기회를 갖게 된다. 그 후로는 크로머는 영영 사라지고, 데미안이 자기형성의 과정에 있는 징클레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그 후 1년 이상이나 지나서 징클레어는 데미안으로부터 전체 세계 존중의 사상을 역설하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일체를, 전체 세계를 존중하고 성스럽게 여겨야 한다. 이 인위적으로 분리해 놓은 공적인 절반만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위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가져야 한다. 이게 옳은 거야. 아니 악마도 내포하는 신을 창출해야만 한다."(62-63) 이러한 데미안의 종교관 또는 세계관은 징클레어가 그새 남몰래 품고 있던 생각과 일치한다. "그것이 정확히 내 자신의 생각이고, 내 자신의 [...] 신화였다."(63) 그래서 그는 데미안에게 이를 실토한다. 그러나 징클레어는 전체 세계 존중의 사상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적인 세계에 대해서 찬성을 유보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그로서는 "살인이나 모든 가능한 악행(惡行)"(64)은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비록 전체 세계의 존중의 필요성을 느끼더라도 아직도 밝은 세계의 윤리적 규범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음을 뜻한다.
유의할 것은 징클레어의 자기형성의 과정은 목표까지 지속적으로 전진(前進)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뜻에서 화자도 징클레어가 애초에 내적으로 아버지의 밝은 세계를 파괴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 관계해서 그러한 성향은 그의 내면에서 장기적으로는 계속 살아 남아 커지지만 단기적으로는 "치유되고 망각되기도"(21) 한다는 것을 알린다. 그는 자기형성에 있어서 때로는 뒷걸음질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전진한다. 달리 말해 그는 밝은 세계에서 어두운 세계로 전환하다가 다시 거꾸로 후자에서 전자에로 전환하고, 이런 과정을 자기형성을 완료하기 이전까지 반복한다.
징클레어는 데미안의 힘에 의해 크로머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부모에게 그새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참회하고 다시 "부모의 밝은 세계"(46)로 돌아와 이 세계의 "모범소년"(47)이 된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사춘기"(49)에 들어서면서 성적 충동으로 어두운 세계의 압박을 받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밝은 세계가 무너진다. 주목할 것은 이 때의 그의 삶은 의식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이분된 "이중의 삶"(49)을 한다는 점이다. 즉 그는 한번은 그의 의식의 지배하에 밝은 세계에서 살지만, 또 한번은 그의 무의식적인 것의 지배하에 어두운 세계에 산다. 무의식적인 것이란 "은밀한 성질의 꿈들, 충동들, 소망들"(49)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그는 마성이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 즉 "이전에 크로머였던 것이 지금은 내 자신 속에 들어 있다"(50)는 것을 인식케 된 점이다. 요컨대 그는 그의 꿈 또는 무의식에 의해 자기 인식을 새로 하고, 이로써 자기찾기에서 한 걸음 전진할 수 있는 계기를 가졌다. 그러니까 이러한 체험과 자기 인식을 거쳐 데미안의 전체 세계 존중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은 것이다.
Ⅳ
자기형성 과정의 제2단계에서 징클레어는 외형적으로는 제1단계에서와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즉 밝은 세계에 머물러 있던 그가 어두운 세계로 전락하고, 또 거기서 다시 밝은 세계로 돌아오고, 그러다가 나중엔 전체 세계룰 존중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나 여기선 이러한 내적 변화가 다분히 그의 독자적인 힘에 의해 이뤄지고, 또 이 단계에서 꿈의 도움으로 그가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자기형성 과정의 제2단계는 중간단계이고, 징클레어는 이에 상응하는 자기형성의 예비적 요건을 충족시킨다. 이 중간단계를 3개의 국면으로 대별하면, 첫째 국면은 징클레어가 '어두운 세계'로 전락하는 것으로써, 둘째 국면은 그가 '밝은 세계'로 회귀하는 것으로써, 셋째 국면은 그가 전체 세계를 중시하는 인간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것으로써 특징 된다.
첫째 국면에선 고향에서 부모의 밝은 세계의 보호를 받다가 타향에 와 김나지움 학생이 된 징클레어가 어두운 세계로 전락한다. 학교 공부는 뒷전에 두고 술 마시기에 빠지고, 술을 마시면 세상을 비방하고 비웃는다. 그래서 학교에서 소문난 "술 대장이 되고 극심한 조롱꾼"(75)이 됐다. 지금의 이런 마성의 행위는 순전히 자기 자신에 의한 것, 즉 자기의 내적 충동에 의한 것이고, 때문에 어린 시절에 악동 크로머의 강압에 의해 촉발됐던 그의 마성의 행위와는 다르다.
둘째 국면에선 징클레어가 소녀 베아트리체를 짝사랑하는 가운데 밝은 세계로 되돌아온다. 얼마 전까지도 술꾼이고 냉소가였던 그가 이젠 "성자가 되려는 사제였다."(81) 그는 "내면에서 어두운 것과 악한 것을 제거하고, 완전히 밝은 것 속에 머물려는 [...] 단 하나의 소원으로써 살고 있었다."(80) 그러니까 지금 그가 처해 있는 밝은 세계는 스스로가 마련한 것이고, 유년시절의 것은 그의 부모에 의해 이뤄져 있은 것이다.
셋째 국면에선 징클레어가 신성과 마성을 결합하는 총체적 삶을 지향하는 나를 자기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이런 인식에 이르는 데에는 그의 무의식 또는 그의 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무의식이나 꿈은 세 가지 그림과 관계가 있다. 그는 무의식 상태에서 또는 꿈에서 나타난 얼굴을 그려서 재현케 한다.
먼저 그는 아무런 모델 없이 다분히 "무의식"(82)에서 한 얼굴을 그린다. 그려 놓은 그 얼굴은 그에게는 두 극성으로 집약되는 다양한 면모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신들의 형상이거나 신성(神聖)으로 [...], 남성적인 면도 있으면서 여성적인 면도 있고, 나이가 없고, 의지가 강하면서도 몽환(夢幻)적이고, 경직돼 있으면서도 비밀스럽게 생동성이 있는 듯이" 보인다.(82) 당시에 그가 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도 이 "그려진 얼굴이"(83) 떠올랐다. 여러 날 지나서는 그것이 "데미안의 얼굴"(83)로 보였다. 그러더니 그에게 그것이 타인의 얼굴이 아니고, "내 자신"(84)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의 무의식이나 그의 꿈에서 나타난 얼굴이 데미안의 얼굴을 닮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자기형성의 종국의 목표가 한 데미안이 되는 것이다. 한편 그가 데미안을 닮은 얼굴을 보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대강 알게 됐음을 뜻한다.
이러한 것이 계기가 돼서 징클레어는 데미안을 더 알고 싶고, 때문에 데미안에 대한 "그리움"(85)이 강렬해지고, 그를 알게 된 이후로 그와 자기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한다. 이 때 그가 특별히 유념하는 한 가지 사항이 있다. 그것은 언젠가 데미안이 그의 고향 집 대문 위에 붙여 있는 새 모양의 "문장(紋章)"(88)을 가리키며 그런 것을 중시해야 한다는 충고이다. 이런 것을 회상하던 날 밤에 징클레어는 바로 그 문장새를 꿈꾼다. 그 꿈에서 벌어졌던 일이 특이하다. 꿈에서 그가 데미안의 강요에 의해 "문장새"(88)를 삼켜 먹었는데 그것이 속에서 살아서 그의 몸 전체를 채우고 안쪽으로부터 그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이 문장새의 행동이 신기해서 그 새를 꿈에서 보았던 모양으로 그려서 그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냈다. 데미안의 회답은 다음과 같은 유별난 내용의 글이다. "새가 알을 부시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부셔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91) 그에게 중대한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되는 이 문구의 뜻을 우연하게 학교 수업시간에 아브락사스에 관한 교사의 설명을 통해서 알게 된다.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과제를 가진 신"(92)을 지칭한다. 징클레어는 예전에 데미안이 전체 세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충고를 했던 것을 상기하면서 이번의 아브락사스에 관한 글 쪽지의 내용도 동일한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는 그것을 "신이면서 악마인"(93) 아브락사스 신을 숭상하는 삶을 하라는 요청으로 받아 드린다. 그러니까 문장새에 관한 그의 꿈은 그의 무의식이 그로 하여금 전체 세계 또는 아브락사스 신을 숭상하는 삶을 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얼마 지나서 그는 한동안 없었던 "사랑에의 그리움과 성적 충동" (93)이 격렬해지면서 많은 꿈을 꾸는데 그 중에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대하고 가장 영향이 많았던 꿈"(94)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의 꿈인데 거기에 나타난 여인이 특이하다. 이 인물도 여러 상이한 면모로써 두 극성을 갖고 있다. "이 여인은 나를 끌어 당겨서 심오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포옹을 했다. 환희와 전율이 뒤섞였다. 그 포옹은 예배이면서 또한 범죄였다. [ ] 그녀의 포옹은 어떤 외경(畏敬)에도 어긋나고, 그러나 지복(至福)이었다."(94) 그러니까 이 여인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징클레어는 이 꿈의 여인상과 아브락사스를 동일한 성질의 것으로 본다. "환희와 전율, 남자와 여자가 혼합되고, 가장 성스러운 것이 소름 끼치는 것과 얽혀 있고, 심오한 죄가 가장 온유한 순결 속을 스며들었다. 나의 사랑의 꿈의 형상이 그런 것이었고, 아브락사스도 그런 것이었다."(94) 이어 그는 이런 두 극성을 결합하고 있는 삶을 하는 것이 그의 '나'에게 알맞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나에게 정해진 삶인 것 같았다. 이러한 것을 치르는 것이 나의 운명인 것 같았다."(91)
그 후 몇 달 동안에 징클레어는 이 같은 두 극성을 결합하고 있는 형상에게 지배되는 삶을 한다. "그 겨울 내내 [...] 나는 데미안과 함께, 익더귀와 함께, 나의 운명이고 나의 애인인 커다란 꿈의 여인 형상과 함께 살았다. [...] 모든 것이 아브락사스를 가리켰다."(96)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이 꿈의 여인상을 그린다. 그려 놓은 그녀의 얼굴은 그가 보기에는 데미안을 닮고, 또 자기 자신과도 닮았다. "그 얼굴은 예전의 것을 닮았고, 나의 친구 데미안을 닮았고, 또 여러 점에서 내 자신을 닮았다."(117) 꿈의 여인상에서 그가 자기의 정체성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그 여인상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이다. "그것이 내 속에 들어 있어서 마치 그것이 완전히 '나'가 된 것처럼 나로부터 떨어질 수 없었다."(118)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세 가지 사항, 즉 무의식으로 그린 얼굴이나 고향 집 대문의 문장새의 꿈, 그리고 사랑의 꿈 모두가 징클레어에게 직간접으로 그의 '나' 또는 정체성을 인식케 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세 가지 형상의 도움으로 그는 명암의 세계 전체 또는 아브락사스의 양극성을 존중하는 삶을 하는 인간이 그의 '나'라고 인식케 됐다. 그의 이러한 인식에는 어떠한 유보도 없다. 이미 보았듯이 그는 그의 자기형성의 제1단계의 끝에서 전체 세계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것에 있어서 살인 등 극악한 행동은 해선 안 된다는 유보가 있었다. 당시와는 달리 지금 제2단계의 끝에선 그가 아무런 유보 없이 전체 세계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가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에서 살인 문제를 논의하는 데서 이를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즉, 딴 일을 "변장"(112)한 것이 아니고 "좋은 뜻"(111)을 갖는 살인은 용인될 수 있다는 피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해서 징클레어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를 찾은 징클레어가 그러한 자기에 알맞은 삶, 즉 신성과 마성을 결합하고 있는 총체적인 삶을 할 수 있으려면 단지 이를 존중하는 견해의 확립만으로는 안되고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대담성을 갖는 한 카인이 되어야 한다. 자기형성의 제3단계의 끝에서 징클레어는 이러한 능력도 갖춘 젊은이가 된다. 그가 그의 '제2의 안내자', 즉 제1안내자인 데미안 다음으로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피스토리우스와 결별하는 무엄한 행동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피스토리우스가 현시적인 것이나 생동적인 것 대신에 "신비스러운 것이나 종교의 형태" 등을 논하고, "교육적인 것"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123)에 대해서 징클레어는 그의 이야기들이 "고물상 같은 것"(123)이라는, 감히 할 수 없는 모욕적인 언사를 던지고 그와 헤어진 것이다. 이 때의 자기의 태도에 대해서 징클레어는 이렇게 술회한다. "당시에 내가 처음으로 내 이마에서 카인의 표시를 감지했다."(125)
Ⅴ
징클레어의 자기형성의 제3단계는 그가 이미 발견한 '나'를 현실에서 확인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확인은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과의 만남에서 이뤄진다. 에바 부인이 그의 '나'의 사랑과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는 그녀를 직접 만나기 이전에 그녀의 사진을 보고 벌써 그녀가 자기의 정체성으로 생각됐던 그의 꿈의 여인상과 동일한 성향을 지녔음을 감지한다. "이것이 나의 꿈의 형상이었다! 이것이 그녀였다. 크고 거의 남성적인 여인의 자태, 그녀의 아들을 닮았고, 모성의 면모, 엄격의 면모, 깊은 정열의 면모, 아름답고 유혹적인 면모, 데몬과 어머니, 운명과 애인. 이것이 그녀였다!"(130)
그는 그녀를 직접 대면하게 됐을 때 그녀가 보내는 시선이 그의 자기찾기를 완성했다는 "성취"를 뜻하고, 그녀가 보내는 인사가 그의 '나'가 깃들일 고향에 "귀향"했음을 뜻한다고 믿는다.(138)
징클레어는 에바 부인을 사랑하는 가운데 데미안의 집을 드나든다. 그 때 그는 그의 사랑이 그가 발견한 그의 '나'에 일치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그의 사랑이 두 극성의 것, 즉 감성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비감성적인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에바 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나의 삶의 유일한 내용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매일같이 그녀가 달라 보였다. 때때로 나는 나의 마음이 끌리어 찾고 있은 것이 그녀의 실물이 아니고, 그녀가 단지 나의 내면의 상징이며, 나를 나의 마음속으로 더욱 깊이 인도하려 한다고 느꼈다. 종종 나는 그녀의 말들을 들었는데 그 말들은 내 마음을 흔드는 급한 문제에 대한 나의 무의식의 답변처럼 들렸다. 그런 다음엔 다시 내가 그녀의 곁에서 감성적인 욕구로 애타고, 그녀의 몸이 닿은 물건들에 키스를 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감성적인 사랑과 비감성적인 사랑이, 현실과 상징이 서로 겹쳐졌다."(148)
징클레어가 자기를 찾았다는 것이 그 자신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타인, 즉 데미안과 에바 부인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에바 부인이 징클레어에게 건네는 다음의 말이 이를 뜻한다.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그 그림(징클레어가 그린 문장새의 그림)이 왔을 때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오고 있음을 알았어요."(139) 이제 징클레어는 그녀가 데미안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결성하고 있는 "동맹"(155)에 받아 드려졌다. 이는 그가 전체 세계를 결합하고 있는 총체적 삶을 하는 사람이 됐음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징클레어가 전장(戰場)에서 부상당해 누워 있을 때 데미안을 통해 에바 부인의 "키스"(163)를 받는 것도 그러한 징클레어를 확인해 주는 것이 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에바 부인이 징클레어에게 꿈이 자기찾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그녀는 징클레어가 찾아낸 '나'의 지속성을 상대화하는 이야기에서 이를 함께 말한다. "그래요. 자기의 꿈을 발견해야만 하고, 그러면 길이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구적인 꿈이란 존재하지 않고, 어떤 꿈이든 새 꿈과 교체되지요. 그리고 어떤 꿈이라도 꽉 잡아 두려 하면 안됩니다."(140) 이에는 앞으로도 자기찾기에 있어서 꿈을 잘 살펴야만 한다는 것이 시사돼 있다. 징클레어는 자기찾기에 있어서 실제로 꿈이, 특히 그의 고향 집 대문의 문장새의 꿈이 중대한 역할을 했음을 알리면서 그 꿈의 영원성을 바라고 싶어한다. "나의 꿈이 얼마 동안 지속될지는 모르겠어요. 그 꿈이 영원했으면 합니다. 새의 그림에서 나의 운명이 나를 받아 드렸어요. 어머니처럼, 그리고 애인처럼. 나는 그 운명의 것이고, 그 밖의 어떤 사람의 것이 아니에요."(140)
이로써 우리는 징클레어의 자기형성에 있어서 또는 자기찾기에 있어서 그의 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또 한번 인지하게 된다. 달리 말해 여기서 그가 그의 꿈들에서 스스로가 찾고 있는 '나'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또 한번 확인하게 된다. 한편 그가 그렇게 한 것이 꿈이 '나'를 나타내 주는 기능을 한다는 사전 지식이나 신념을 그가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면 그러한 신념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그것이 그의 꿈들에 대한 그의 성찰에서 생겼음에 틀림없다. 특히 자기형성의 제2단계에서 그의 '첫 번째' 꿈에 나타난 여인상과 '세 번째' 꿈에 나타난 사랑의 꿈의 형상에서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바를 느꼈고, 그런 것이 꿈에 대한 문제의 기능을 믿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갖게 된 데에는 또한 데미안의 가르침이 크게 작용했다.
자기형성의 제2단계의 제1국면, 즉 징클레어가 술대장이 되고 어두운 세계에 빠져 있을 당시에 그는 우연하게 데미안을 만나서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가르침은 사람의 내면 또는 무의식이 사람이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사람의 의식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모든 것을 알고, 또 알고 싶어하는 자가 있으며, 그 자가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안다는 것"(87)이다. 징클레어는 자기형성의 제2단계의 제3국면에서 '첫 번째' 꿈에 나타난 여인상의 그림을 보고 나서 방금 언급한 데미안의 가르침을 상기한다. 그 때 그의 기억에서 데미안의 그 말이 "신기하게도 생생하고 그대로" (87) 떠올랐다. 이어 그는 그림의 여인의 눈을 보면서 다시 한번 데미안을 생각하고는 데미안의 가르침이 자기의 내면 또는 무의식에 들어 있어서 자기 인식을 하게 만든다고 여긴다. "그게 데미안의 눈이었다. 아니, 나의 내면 속에 들어 있는 눈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87) 그러니까 징클레어는 데미안의 가르침에 따라 꿈을 보다 중시하고 꿈에서 만족스러운 '나'를 찾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방금 언급한 데미안의 가르침과 동일한 내용의 가르침을 자기형성을 일단 완료한 징클레어가 그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별을 할 때 그로부터 또 한번 듣는다. "잘 들어 봐, 징클레어! 난 떠나야만 해. 넌 언젠가 다시 내가 필요할 거야. 크로머 같은 녀석이나 다른 일 때문에 그럴 거야. 그 때에 나를 부르면 내가 말이나 전차 타고 오는 그런 조잡한 짓은 안 할 거야. 그 때엔 너의 내면의 소리를 엿들어라. 그러면 너의 내면에 내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거야."(162) 데미안의 이 마지막 가르침의 말이 들어 있는 부분에서 몇 줄을 지나 앞으로도 그같은 가르침을 지키겠다는 징클레어의 독백에 접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명심하고, 언제나 자기 내면 또는 무의식의 소리에 따라 자기를 찾고, 그것에 기초한 삶을 하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내가 때때로 열쇠를 발견하고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즉 검은 거울 속에서 운명의 형상들이 잠들고 있는 곳으로 하강할 때면 내가 검은 거울에 눈을 돌리고 내 자신의 형상, '그'와, 나의 친구이며 안내자인 '그'와 완전 일치하는 형상을 보게 될 거다."(163) 이 문장으로써 소설 {데미안}이 끝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자기찾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내면 또는 무의식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징클레어가 자기형성에서의 내면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된 것과 관계해서 데미안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피스토리우스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자기형성의 제3단계 제3국면에서 징클레어는 '세 번째' 꿈을 꾸고 난 후에 피스토리우스로부터 아브락사스의 본성에 관해 보다 자세히 듣는 것 이외에 인간의 삶의 현실이 내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듣는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들의 내면에 있는 것들과 동일한 것이죠. 우리가 내면에서 갖는 현실 이외에 어떤 현실도 존재하지 않아요."(112) 피스토리우스의 이러한 말은 징클레어에게는 내면성의 중요성을 언급했던 데미안의 말과 동일한 것으로 들렸고, 그래서 신기하고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112) 이밖에 피스토리우스는 내적 성장기에 있는 징클레어에게 꿈, 특히 "사랑의 꿈들"(111)을 중시하고 살펴보라는 충고를 했다.
Ⅵ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소설 {데미안}은 젊은이의 자기형성에 있어서 내면성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여기서 내면성은 무의식, 특히 꿈을 주시하는 것을 뜻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 징클레어를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꿈을 주시하고 꿈의 형상에서 만족스러운 '나'를 발견한다. 그런데 꿈이 자기형성의 과정에서 '나'를 알려준다는 것을 징클레어는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데미안의 가르침에 의해 인지하였다. 그러므로 데미안의 도움 없이는 징클레어의 자기형성은 완료될 수 없었다.
꿈 이외의 다른 문제와 관계해서도 데미안의 도움 없이는 징클레어가 자기형성을 완료할 수 없었다. 만족스러운 '나'를 찾아내려면 그러한 '나'의 조건을 수락하게 하는 예비지식이나 내적 성숙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예비지식이나 내적 성숙을 징클레어가 구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다분히 데미안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징클레어가 자기형성 과정의 초반에서 예컨대 데미안으로부터 들었던 카인에 대한 이단적인 견해, 특히 데미안에게서 들었던 인간 세계의 명암의 양면성과 그 세계 전체를 존중하는 사상 등이 그의 '나'를 발견하는 데 필요한 사전지식이 됨과 동시에 그의 내적 성숙의 촉진제가 됐다.
이렇게 보면 데미안은 징클레어의 자기형성의 전체 과정에서 거의 지속적으로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이로써 소설 {데미안}은 특이한 성장소설이 된다. 내적 성장을 하는 주인공에게 그렇게 지속적으로 또 그렇게 크게 영향을 주는 인물은 어떤 성장소설에서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소설 {데미안}은 주인공이 꿈의 형상에서 소망의 '나'를 발견한다는 점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특이한 성장소설이다. 이밖에 소설 {데미안}은 주인공이 찾은 '나'가 신성과 마성을 결합하고 있는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유별난 성장소설이다. 이러한 특이함으로 인해 이 소설은 지극히 창의적인 성장소설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데미안이 징클레어에게 거의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주면서 과도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하여 데미안의 가치관과 자기 인식을 징클레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 이 소설의 작품 의도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데미안의 가치관이란 신성과 마성을 결합하고 있는 총체적인 삶을 의미 있는 삶으로 보는 것이다. 그의 자기 인식은 무의식 또는 꿈에서 만족스러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는 방금 언급했던 뜻에서의 총체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데미안의 이러한 과도한 비중으로 인해서 소설 {데미안}은 성장소설의 한계점에 처하게 된다.
이 소설은 일련의 꿈이 징클레어의 자기형성 과정을 나타냄으로써 성립 당시에 대두되고 또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융의 꿈에 관한 심층심리학적인 학설을 활용한 것이 된다. 이러한 사정은 이 소설에 시대적 한정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꿈을 인간 또는 젊은이의 자기찾기의 매체로 제시함으로써 일반 독자의 경험에 걸맞지 않는 사례를 내놓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이 이렇게 시대적 한정성을 갖고, 또 개연성이 없는 요소를 갖고 있음에도 오늘날까지 시대와 국경을 넘어 뭇 청소년들의 애독서가 되는 청소년문학의 고전이 되고 있다.
이 소설이 그렇게 젊은 독자층을 끌어 드리는 흡인력은 그들 반항 세대의 성향에 걸맞은 가치관을 예찬하고 있다는 데 있다. 데미안이 애초부터 요청하는 그리고 징클레어의 '나'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삶은 신성과 마성을 결합하고 있는 총체적인 삶이고, 따라서 이에서는 마성의 삶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여기선 예컨대 살인이나 혼전의 성관계 등의 마성의 행위도 불가피한 내적인 욕구에서 비롯되는 한에는 정당화된다. 이러한 가치관은 일반적으로 일체의 구속을 벗어난 자유분방한 삶을 갈구하는 젊은 세대의 성향에 부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수호하는 기성세대에게는 교회의 교의를 부정하고 시민적인 미풍양속을 해치는 이단적이고 반사회적인 위험한 책이 된다.
참고문헌-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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