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길을 걷다 보면, ‘철학관’ 내지는 ‘역술원’이란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명칭들이 우리가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몇이나 될까?
이에 따른 명리학의 역사와 현 주소에 대해 알아보자.
지난 반만년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오면서 당시 풍습이 그대로 반영된 전통문화예술의 결정체인 동양역학의
한 분야인 명리학.
과거 국가의 대소사를 가리는 중책으로 막중한 책임을 다한 명리학이 오늘날에는 그 본질이 왜곡된 채
엉뚱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보존가치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이어 서구화·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점차 설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평상시 길을 걷다 보면, 철학관 내지는 역술원이란 간판이 쉽게 눈에 띈다. 이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른 것으로 본래 철학(哲學)이란
단어는 서양의 Philosophy를 일본에서 번역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단어이다. 따라서 역학의 한 분야인 명리학은
Philosophy나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단호하게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걸 강조하고자 한다.
오행과 천간지지를 기본으로 하는 명리학은 괘를 이용하는 점서인 주역의 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술과 혼동하여 명리학을 역술이라는 엉뚱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일제 강점기에 명리학의 학문적 명맥이 끊어지면서 나타난 이상 현상들이며 명리학과 명과학의
왜곡된 부분들인 것이다.
따라서 역학의 한 분야인 명리학은 단순한 점술행위도, 인생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철학도,
주역의 점술행위인 역술도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당시 명리학의 위치는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던 제도권 안의 학문이었
으며,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과는 너무나도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역학의 원리를 기초로 한 오직 명리학과 명과학 그 자체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명리학은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에 따른 의미처럼 죽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살아 숨쉬는 것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명리의 명은 목숨 ‘명’자를 쓰며, 실존은 본질을 선행한다는 샤르트르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실존
즉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이 끝이든 새로운 시작이든 우리는 현재의 육신으로 그것을 인식 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현재를 편히 살 수 있는 것이기에 사주에 의거하여 일생의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학문이 명리학이다. 이에 따라 명리학은 사주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명리학은 개인의 사주, 곧 생년월일시를 분석해 나무·불·물·쇠·흙 등 5가지 기운의 배합률을 알아낸 다음,
사람이 출생한 연월일시의 간지 여덟 글자에 나타난 음양과 오행의 배합을 보고,
그 사람의 부귀와 빈천·부모·형제·질병·직업·결혼·성공·길흉 등의 제반 사항을 판단하고 이를 다시 특정시간의 공간을
구성하는 5가지 기운의 배합률과 비교하는 학문이다.
자료부족으로 인해 명리학의 유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잔존하고 있는 문헌에 따르면 중국 전국시대인 락녹자와 귀곡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중국에서는 주역에 의한 음양의 학설이 먼저 존재했고,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태양계의 오행성으로
운명을 판단하는 오행이란 학설이 유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중국에서 연월일시의 간지를 이용해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 126년 이후의 일이다.
이처럼 명리학이 역학의 여러 분야 중의 하나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는 중국의 당나라
이후로 보인다. 당시까지만 해도 태어난 해인 ‘연주’를 위주로 사람의 운명을 분석하던 것을 이허중이 또다시
태어난 날인 ‘일주’를 위주로 하여 보는 법을 만들어냄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후 당대 초에 원천강에 의해 본격적인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해, 송(宋)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허중·서자평·유기·서대승 등으로 이어지는 1400여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구체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명리학이 고대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파된 시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의 사주명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보다 한참 후인 조선조에 들어와서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종 원년인 14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종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는 아들인 태종의 장래 운명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당시 문성윤에게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 “이 사주는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니, 경솔하게
점장이에게 물어보지 마소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러한 근거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 명리학이 전래된 시기는 늦어도 고려 말 12~1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는 게 학계의 견해다.
명과학의 설치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세종 때인 1445년 연소자 10명을 뽑아 서운관에 소속시키고
훈도4~5명을 선출해 3일에 한 번씩 모여 습업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운관은 관상감의 전 기구이므로 그 이전에 이미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헌에 따르면, 정직의 명과학훈도인 정9품인 2명을 두어, 운명·길흉 등에 관한 학문을 가르쳤다고 되어있다.
합격자는 관상감의 관리로 배속되었으며, 1474년(성종5년) 일시적으로 폐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조 5백 년
간 내내 과거시험에서 음양과 또는 명과학 제도가 시행되었다.
제도상으로는 태조 원년인 1392년부터이지만 과거제도의 잡과에 음양과가 편성되면서부터 이다.
초기에는 문신, 후기에는 기술관이 훈도에 임명되었으며 과거제도의 음양과는 천문학, 지리학과 함께 명과학
을 두어 각 분야별 인재를 등용하는 관문으로 기능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문신, 후기에는 기술관이 훈도에 임명되었으며 시험은 관상감에서 주관하여 별도로 훈도를 두고서 생도를
모집하고 명과학의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들이 시험을 치루거나 배워야 하는 과목으로는 원천강,
서자평, 응천가, 범위수, 시용통서, 극택통서, 경국대전 등으로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로 나뉘어
3년마다 시행되었으며, 복시는 예조에서도 함께 주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명리학의 위치가 제도권 밖으로 왜곡되게 된 가장 큰 이유로는, 조선 초기부터 과거제도의 명과학이라는
제도권내의 학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한민족 정체성 말살과 민족정기 억압의 강압통치
로 인하여 대부분의 학문분야처럼 명리학과 명과학 또한 순식간에 지하로 숨어들면서 그 학문적 명맥이 단절
되는 비운을 맞았다는 데 있다.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우민화 정책의 하나로 이용되었던 셈이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귀신, 조선의 점복과 예언이라는 촌산지순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 민간에서 귀신에 대한
다양한 믿음과 점술이 행하여지고 있는 점에 착안하여 학문적인 체계를 갖춘 명리학·명과학 보다는 오히려
이들 무속과 점술 행위들을 더욱 부추겼다.
조선조 5백년간 과거제도에서 음양과의 명과학으로 시행되어 제도권의 학문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당시의
지배학문인 주자학에 밀려 명리학의 토대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가운데 맞이한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우리 문화말살 정책으로 인해 명리학과 명과학을 민간에서 행해지던 일개 점술행위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근대 서양의 문물이 우리사회 전반에 넓게 자리 하면서부터 이다.
18세기 들어와 서양은 산업혁명으로 동양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19세기 제국주위에 의해 서양은 우등의식,
동양은 열등의식을 갖게 되면서 동양은 서양을 무조건 숭배하기에 이른다.
서양의 분석적 시각이 동양의 조화적 시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동양 역시 모든 것 버리고 서양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결국 명리학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 오늘의 현실에 이르게 된 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말은, 자연의 이치, 우주의 원리, 나의 근원으로부터 시작된 음양오행의
생극제화로 이루어진 학문인 명리학. 사서삼경 그 어떤 책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사상적 깊이가 숨어
있다. 모든 학문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리학이 미신취급을 받으며 제도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
된 현실을 맞아, 명리학의 발전을 위해 우선 제도권 밖에서 안으로 현주소를 찾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에 따른
앎의 자세가 필요한 시기임을 강조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