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먹는’ 시기 견디는 법
승승장구하던 그, 유배의 아픔 이겨낸 건 ‘소명’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라!” 정조를 도와 개혁을 추진하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위기를 맞는다. 노론 벽파와 가까운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실학을 추구하던 남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잘나가던 다산은 창졸간에 ‘물을 먹게’ 됐다.
하지만 정약용은 어떻게든 목숨을 건졌고, 18년의 유배 기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이 시기가 없었다면 다산의 저서 500여 권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희대 사학과 출신으로 ‘베니스의 개성상인’, ‘북벌’, ‘구텐베르크의 조선’ 등 역사소설을 집필해온 소설가 오세영 씨가 유배 시절 다산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에 대해 이야기체로 정리했다. 오 씨는 저서 ‘원행’에서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를 배경으로 한 조선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 및 정조 시해 음모를 막으려는 다산의 활약상을 긴박하게 그려낸 바 있다. 》
정조 24년(1800) 음력 6월 28일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났다. 독살설이 떠돌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실학을 적극 지원했던 정조의 죽음으로 남인들은 위기를 맞게 됐다. 나이 어린 세자를 대신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다산은 관직을 사임하고 경기도 마현으로 낙향했지만 노론 벽파가 쳐 놓은 덫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신유박해의 피바람이 몰아치면서 순조 1년(1801) 2월 8일, 다산은 마현에 들이닥친 의금부 관헌들에게 끌려갔다. 지난달 초순에 정순왕후가 사학(邪學) 엄금의 하교를 내렸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오래전에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던 탓에 그만 방심을 했던 것이다.
선대왕(정조)의 뜻을 받들고 개혁을 추진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 모든 일이 그러하듯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남인 탄압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렇다면 자신은 천주교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될 것이다.
국문장에 끌려나온 다산은 자신은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천주교 신도들을 고발했다. 그들 중에는 셋째 형 정약종도 포함돼 있었다. 정약종은 매형 이승훈과 더불어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믿음을 지켜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학(西學)으로 천주교에 접근했던 다산은 그들과 입장이 같지 않았다.
‘독실한 신자인 셋째 형은 어차피 기쁜 마음으로 순교할 것이다.’
다산은 그렇게 판단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정약종을 사석(死石)으로 활용키로 한 것이다.
‘아우 약용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정약종도 동생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다. 이런 날이 올 것을 내다보고 거처를 옮겨 형제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던 정약종은 적극적으로 다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밝히고 나섰다. 상대의 수를 정확히 간파하고 빠져나갈 대책을 마련한 동생과 생사를 초월한 형제애로 다산을 도운 형. 덫을 놓고 정약용을 옭아매려던 노론 벽파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산은 사지를 빠져나왔고 먼 남쪽 땅으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경북 장기(포항)를 거쳐 전남 강진에 당도한 다산은 위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이 밀려온 것이다. ‘이대로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잊혀진다는 것은 서럽고 두려운 일이다. 다산처럼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람은 새벽에 정신이 제일 맑다.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만큼 두려움도 가장 심하게 느낀다. 잔월이 영창을 통해 은은한 빛을 뿌릴 때면 심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다산은 가족들을 강진으로 불러들이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죄인의 신분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지런히 친지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면 외로움은 극에 달했고 이대로 잊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떻게 하면 밀려오는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가.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생각을 낙천적으로 하고 바쁘게 살아야 했다. 이때 힘이 되어준 사람이 바로 신유사옥에 함께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된 둘째 형 정약전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외딴섬으로 유배된 정약전은 어민들과 어울려 물고기 족보(‘자산어보’)도 만들고, 학동들을 모아 서재를 열며 적극적으로 외딴섬에 적응하고 있었다. 현지에서 여인도 맞았고 아들도 얻었다. 그런 둘째 형을 보며 다산은 용기를 얻었고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게 됐다.
같은 처지의 형제지만 답을 구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정약전이 적극적으로 현지에 동화해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데 비해 다산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실학과 민초의 삶을 접목해 앞으로 조선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소명(召命)으로 다산은 붓을 들었다. 그것이 선대왕의 뜻을 받들고 셋째 형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라 믿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해서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유배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찾아온다. 흔히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만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위기가 저절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본질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정확하게 대응해야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다산이 이른바 ‘물먹는 시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겼냐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개혁가들은 대부분 낙천주의자들이다. 박영효는 훗날 갑신정변의 동지였던 김옥균을 ‘형편없는 허풍쟁이’라 평했다. ‘신해혁명’의 주역인 손문의 별명은 ‘대포’였다. 그런 이들은 위기에도 잘 적응한다. 하지만 다산은 선천적인 낙천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명을 정확히 헤아리고 정진해서 이 시기를 잘 극복해냈다. 오늘날 다산이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추앙을 받는 건 18년의 유배 생활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체됐던 조선 사회의 개혁을 추진하고 개인적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했던 다산이 새삼 그리워진다.
오세영 소설가
♣ ‘평생 공부’ 몸소 보여준 아버지
전남 강진에 유배간 지 10년째 되던 해인 1810년 다산이 부인 홍씨에게서 온 치맛자락에 쓴 편지인 ‘하피첩’. 두 아들에게는 사대부로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시집가는 딸에게는 집안의 화락을, 막내딸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이 하피첩은 9월 9일까지 경기 남양주시 실학박물관 특별전 ‘다산, 한강의 삶과 꿈’에서 볼 수 있다. 실학박물관 제공
‘하피첩’에서 다산이 두 아들에게 남긴 교훈인 경직(敬直), 의방(義方)은 ‘(군자는) 안으로는 마음을 곧게 하고 밖으로는 불의를 좌시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난다’는 뜻으로 선비들이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를 담고 있다(위). 다산이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문 다산초당. 실학박물관, 동아DB
《 1801년 신유옥사(辛酉獄事)로 유배생활을 시작할 당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마흔이었다. 그에게는 열아홉, 열여섯의 두 아들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고3과 중3의 나이. 한창 공부하고 인성을 다듬을 때였다. 하지만 다산은 머나먼 유배지에서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두 아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의 기러기 아빠들보다 사정이 더욱 딱했다. 그랬기에 그의 교육은 엄격했지만 간절했다. 》
다산의 편지를 편역한 책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비)를 펴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아들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 26통을 중심으로 그의 자녀교육법을 살펴봤다. 본문의 인용문은 다산이 쓴 편지의 내용이다.
“떠나올 때 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몹시 안됐더라. 늘 잊지 말고 음식 대접과 약 시중을 잘해드려라.”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에 나오는 첫 편지는 1801년 6월 17일(음력) 첫 귀양지인 경북 포항 근처의 장기에서 쓴 글이다.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전한 다산의 첫 가르침은 ‘효’였다. 유학자인 다산의 가르침은 항상 ‘효제(孝悌)’를 기반으로 했다.
“학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내용인 효와 제로 근본을 삼고, 예(禮)와 악(樂)으로 수식하며, 정치와 형벌로써 도움을 주고 병법(兵法)이나 농학(農學)으로써 그 이익을 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폐족(廢族)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를 하려면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효제가 그것이다. 반드시 먼저 효제를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다산은 효제를 기반으로 한 독서를 강조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함을 근본으로 한 후에야 독서를 통해 학문의 길도 열린다는 것. 실제로 다산의 수많은 편지에서 독서 이야기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둘째 아이가 열심히 독서하는 일뿐이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유학자이면서 실학자인 다산은 두 아들이 사서오경만을 읽고 배우는 학자나 선비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정치학 형법학 병법 농학 부역(賦役) 재정학 등으로 학문의 범위를 넓히기를 요구했다. 실학에 마음을 기울이고 세상을 구제하는 것에 대한 독서를 권했으며 의학에 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세상의 일이나 나라의 정치에 관심을 버려서는 학자도 아니요, 선비도 아니며, 독서군자가 아니다. 나라를 근심하고 세상에 대하여 걱정하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다산은 성리학과 실학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실학적으로 사고하고 실학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쳤다. 성리학자 주자(朱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모두 이(理)로 해석하여 이학(理學)이라는 관념의 세계로 유학의 체계를 집대성했다.
다산은 그러한 주자의 이(理)의 세계를 행(行)의 세계로 대치해 실학의 이론을 세웠다. 즉, 인의예지란 일을 행동으로 실천한 후에야 그 이름이 성립된다는 것.
“이(理)를 말하는 주자학자들은 인의예지를 각각 낱개로 떼어놓고 이것들이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다만 측은(惻隱)이나 수오(羞惡)의 근본일 뿐이지, 이것을 인의예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두 아들을 교육할 수밖에 없었던 다산의 편지에는 눈물겹고 애가 타는 내용이 담겨 있다.
“너희들이 정말로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저술한 저서들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내 저서가 쓸모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마음의 눈을 닫고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될 뿐 아니라 열흘이 못 가서 병이 날 것이고 이런 병은 고칠 약도 없을 것이다. 즉,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다.”
두 아들에게 책 읽고 공부하기를 권장했던 아버지 다산은 유배 기간에 단 하루, 단 하룻밤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학문 연구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아버지였다. 이를 아는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녀 교육의 본질은 부모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丁學淵)과 정학유(丁學游·‘농가월령가’ 저자)는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추사 김정희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이재 권돈인이나 정조의 사위 해거재 홍현주와 수시로 시와 학문을 논했다. 다산의 제자인 초의대사나 황상과도 절친하게 지내면서 당대의 수준 높은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의 간절한 편지와 가르침에 감복했던 두 아들이 효제의 유교원리를 제대로 습득해 자식의 도리와 형제의 직분을 다했다는 것. 다음은 학유가 죽었을 때 황상이 보낸 위로의 글에 형인 학연이 답으로 쓴 편지의 첫 부분이다.
“내 아우 운포(정학유)가 죽었소. 내가 무슨 마음 어떤 손 어느 겨를에 그대의 편지를 받고, 그대의 편지를 보며, 그대의 편지에 답장을 하겠소.” 정말로 이들은 ‘형제지기’였고 ‘형제동학’이었다. 아버지 다산은 두 아들의 훌륭한 스승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해준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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