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경제 민주화·상향식 정치… 다산 사상에 이미 녹아 있어"
<1> 왜 다산을 주목하나
박석무 다산硏 이사장 인터뷰
"다산 사상이 주목 받는 이유? 우리 시대 적용 가능하기 때문
'목민심서'의 핵심개념 애민은 국민이 아닌 사회적 약자 뜻해"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은 다산 정약용의 초상. 고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 개혁가, 교육자, 수원 화성 설계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ㆍ1762~1836)을 수식하는 말들은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재능,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경학과 인본주의를 근본으로 사회 개혁을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했던 다산의 사상은 다양한 갈등과 변화가 일어나는 21세기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그의 사상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기획시리즈를 6회에 걸쳐 싣는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오늘날 다산 사상이 주목받는 까닭을 소개한다.
한형조, 금장태, 강신주, 정민, 이정우씨는 기고를 통해 다산이 살았던 18~19세기 조선 사회 풍경을 제시하며 당대 동아시아 대표 사상가들과 정약용의 사상을 비교한다.
박석무(71)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손꼽히는 '다산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72년 다산의 법사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40년간 다산 사상 탐구에 몰두해왔다. <흠흠신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 저서 번역과 학술적 연구 외에도 다산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특히 힘을 쏟았다. 2004년부터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연재해온 칼럼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는 이메일을 통해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독자가 35만명을 헤아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지난해 11월 '희망버스'를 기획한 혐의로 송경동 시인이 구속됐을 때는 농민시위를 주도했다 자수한 이를 무죄방면한 정약용의 일화를 소개해 큰 반향을 불렀다.
박 이사장은 이렇게 다산 사상이 주목받는 까닭에 대해 "지금 우리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약용은 근대 이전의 인물이지만, 상당히 근대적인 사상을 펼쳤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대표적인 것이 '탕론'과 '신아구방', '손부익빈'으로 요약되는 국가, 정치, 경제 사상이다.
다산은 맹자의 '방벌론'을 발전시킨 '탕론(湯論)'을 통해 고대 중국의 선왕 탕 임금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 민의(民意)에 배반하는 통치자는 언제라도 추방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민주론을 펼친다. '천자(天子)란 뭇사람이 추대해 지위에 오른 사람'이란 전제를 내걸고, 통치자는 아래에서 추대하여 위로 올렸다는 '하이상(下而上)'의 주장을 했다.
박 이사장은 나아가 다산이 <경세유표>에서 표방한 '신아구방(新我舊邦)'은 한국사회를 개혁하자는 최근의 '2013년 체제' 논의와 부합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약용은 오래된 나라를 새 나라로 바꾸자는 논리로 모든 법과 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토지제도, 과거제도, 세금제도, 군제(軍制), 신분제도, 행정제도, 관제(官制)까지 바꾸자고 주장하면서 각 부문마다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다산은 조선의 생산수단 핵심인 토지의 균등한 분배 없이는 바르고 고른 세상은 올 수 없다고 믿었다. 때문에 경제분야는 전제개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성호 이익의 사상을 계승한 '손부익빈(損富益貧)'의 정책을 추구한다.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사람에서 더해야 한다'는 것으로 토지의 국유나 공전(公田) 제도를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했다.
박 이사장은 "빈부격차를 해소할 경제정책, 공직자들의 업적평가를 바탕으로 한 공정한 인사정책, 올바른 교육개혁, 보편적 복지 확대, 이런 정책의 실현을 위한 법과 제도의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다산의 지혜를 통해 배운다"고 말했다.
다산 사상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박 이사장은 인본주의를 꼽았다. 그는 "<목민심서>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애민(愛民)에서 민(民)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냥 국민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뜻한다"면서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 애민정신이며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정신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다산의 사상 역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상이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유교적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 이사장은 "다산은 신분제도 개혁을 주장하며 '서자도 정승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자기 아들인 정학연이 약방을 열어 의원 일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분노를 표했다. 민주론을 펼치며 왕에 대한 충성을 노래하는 등 인간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며 "19세기 조선이란 역사적 상황, 양반이란 신분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자기 생각을 독단적으로 말하지 않고 고대 선인의 말로 반드시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혁명적인 사상을 펼치면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죠. 절대적 민주주의, 평등을 주장했다면 그의 사상이 오늘날 온전히 전해지기 힘들었을 겁니다."
박 이사장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다산전기>를 집필하고 있다. 파고들수록 더 깊고 넓어지는 다산의 사상을 탐구하고 전하는 일이 그에겐 평생의 숙제인 듯하다.
[탄생 250주년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정통 주자학 해석 뒤엎고 '정치' '권력' 중심으로 사회 시스템 변화 꿈꿔
<2> 학문의 뿌리, 경학
명상→활동, 개인→공동체 등 지식인들의 탁상공론 탈피 촉구
'백성들의 윤택한 삶 위해 어떻게 권력을 펼쳐야 하나' 정치적 개혁에 온 관심 쏟아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누구인가. 1,000편이 넘는 논문과 수많은 연구서들이 있으되, 그는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행정관의 가이드북인 <목민심서>가 주로 운위되고, 남양주의 실학 박물관 입구에는 그가 설계했다는 기중기 모형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가 꿈꾼 나라의 응용, 혹은 분지에 해당한다.
다산이 구상한 세계의 전체 모습을 보려면 그의 필생의 저작인 '경학(經學)'을 만나야 한다.
경학이란 '유교 경전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가리킨다.
안다. 주석은 원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뛰어야 벼룩"이라 코웃음 칠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해석학은 삶의 지향을 뒤바꾸고, 문명의 성격을 재정위하는 데까지 이른다. 조선시대는 12세기 주자가 정위한 지침을 주조로 삶의 제 부면을 구축해 왔다. 그런데 이 프레임을 19세기 다산이 '전복'시키고, 새 문명의 구상을 제시한 것이다.
가족과 친구, 선배들이 가톨릭 신앙을 빌미로 한 정치적 숙청에서 무수히 죽어나갈 때, 그 피비린내에서 살아남아, "머나먼 남쪽 땅끝에, 북풍에, 흩날리는 눈처럼 내몰린" 몸으로, 자신의 희망을 담아 육경사서(六經四書)의 재해석에 몰두한 것이다.
독자들은 경학이란 이름이 여전 생소할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주윤발이 주연한 영화 '공자'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하나 등장한다. 위나라 영공의 부인 남자(南子)이다. 공자가 이 여인을 만난 기사가 <논어>에 실려 있다.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 자로가 싫은 기색을 했다. 공자 말했다. '내(予) 맹세컨대(所) 잘못이 있다면(否者),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야.'" 사마천 이래 다들, 공자가 방문국의 제후 부인을 예방하는 관례를 존중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해 주었다.
다산은 이 전통적 독법에 잠깐만, 하고 이의를 제기한다.
"웬 변명인가. 여기 로맨스의 흔적은 없다. 당시 위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공자로 하여금 남자를 방문하게 했다. 행실이 문란한 어머니 남자에 격분해 아들 괴외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나섰고, 거사가 실패하자 망명했다. 영공의 죽음으로 위나라의 권력이 괴외의 아들 출공 첩에게 가게 되자, 공자는 부자간의 골육 상쟁을 우려했다. 여기 제자 자로와 공자의 의견이 갈렸다. 공자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괴외를 후계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했고, 자로는 어머니 목에 칼을 들이댄 패륜아에게 권력을 줄 수 없다고 맞섰다. 자로가 공자의 방문을 싫어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하여 다산은 이 구절을 공자의 변명이 아니라 확신으로 해석한다.
"내 그렇게 (조언하기 위해 남자를) 방문하지 않았다면(否者),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야."
다산의 경학은 이전의 정통인 주자의 해석을 뒤엎는 구절로 그득하다. 그 단편적 전복들은 하나의 체계를 예고하고 있다. 위의 예에서 보듯, 주자가 '개인'과 '일상'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면 다산은 '정치'와 '권력'을 축으로 해석의 가닥을 잡았다. 해석은 시대적 정황의 산물이고, 해석자 고유의 열망과 좌절을 당연히 반영한다.
놀랄지 모르지만, 유학(儒學)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다. 조선의 유학에도 수많은 개성들이 명멸했다. 화담같은 풍류 예술가, 퇴계같은 수도사형 학자, 남명같은 무사형의 기개, 허균이나 연암같은 문학적 천재들, 그리고 한말의 혜강같은 경영사상가까지….
다산은 이들과 달리, 관료적 자의식에 철저하다. 정도전과 율곡처럼, 그는 정치적 개혁에 모든 관심을 투여했다. 캐치프레이즈는 신아구방(新我舊邦), 즉 "묵은 내 나라를 다시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였다. 목표는 택민(澤民), 즉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사회적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그의 관심사였다.
다산은 당대의 '학문'이 옛 유교의 정신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대의 지식과 학문을 전방위적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지식과 이념의 지도를 구축해 나갔다.
다산은 명청대 훈고학의 방법과 새로운 발견을 흡수했으되, 그 학풍이 '지식을 위한 지식'일 뿐이라서,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삶의 개선에 기여하는 실질이 없다고 물리쳤다.
엄격한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새로운 문체를 실험하는 '신 기풍'에 대해서 다산은 정조와 더불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삶은 절제되어야 하고, 의미에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 점에서 "울부짖고, 한숨 쉬고, 웃고 떠드는" 문학을 마뜩잖게 보았다. 그는 가령 동시대 이옥(李鈺)의 다음과 같은 시에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 틀림없다.
"한밤중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새벽이면 시부모 문안 드리는 (이 지긋지긋한 일상), 내 언젠가 친정에 돌아갈 날 있으리, 그럼 밥도 안 먹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잠만 자야지."
다산이 맞닥뜨린 가장 큰 적수는 정통 주자학, 혹은 성리학이었다. 조선유학의 이 오래된 성채에 그는 홀로 맞섰다. 윤휴가 주자의 주석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그리고 머나먼 땅에 유배 온 그의 신세를 생각하면 이 도전은 목숨을 건 위태로운 모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은 망치를 들고 '주자학'을 전면적으로 깨기 시작했다.
왜? 핵심은 주자학이 '불교'처럼 '개인'에 유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덕성이란 사이와 관계에 걸쳐있는 것이라서, 명상의 삶에서는 확보될 수 없다!" 그는 명상에서 활동으로, 자연(無爲)에서 정치(有爲)로, 개인에서 공동체로 관심의 초점을 전면 이동시켜 나갔다. 다산은 세상의 악과 대면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소명을 환기하고, 그들이 감당할 권력의 합리적 운용을 촉구했다.
이 이동을 위해 그는 분명한 신학에 의존했다. 신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편만한 주자학의 지렛대인 이(理)의 무기력함을 해소하는 한편, 아울러 이기(理氣)를 둘러싼 어지러운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것이다! 그렇게 단순함으로 확보된 에너지는 행사(行事)에 필요한 지식과 역량으로 발휘될 것이었다.
'주재하는 하느님'이라는 관념은 그가 한때 깊이 심취했던 가톨릭의 영향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 상제(上帝)라는 토속적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제사를 금지함으로써 유교 문명과 대치하는 순간, 다산은 그 이국의 '종교'와 결별했다.
다산의 '신(天)'은 오직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충동의 원천인 점에서, 그리고 신에 대한 봉사는 오직 이웃을 통해서만 하라고 권한다는 점에서, 그 초월자를 위해 따로이 드릴 예배는 없다! 다산의 신학이 종교가 아니라 정치로 귀착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가 꿈꾼 세상은 민생이 윤택하고, 부(富)가 공정하게 분배되는 세상, 모두에게 직업과 가정이 있고, 사회적 약자들이 쉼터를 갖는 나라였다. 대동(大同)의 이상은 유교의 오래된 꿈이다. 여기 관건은 '정치'이다. 다산은 권력은 덕성과 전문지식을 갖춘 엘리트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유교의 오랜 생각에 철저했다.
일본의 유학은 그 뛰어난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막부(幕府) 체제를 의식하여, 군주의 덕성을 마키아벨리처럼 면제해 줌으로써 다산의 질타를 받았다.
다산은 다가올 근대의 원리를 고민했다기보다 유교의 옛 정신을 '회복'시킴으로써 현실을 근본적으로 혁신시키는 방향을 택했다. 이 엇갈림이 우리가 다산에게서 보는 곤혹의 실체이다. 근대를 지향했다는 실학의 대표자가 왜 "공자와 맹자의 옛 학문(洙泗學)으로 철저히 복고하겠다"는 스탠스를 지키고 있느냐 하는 것. 그러나 가장 래디컬 한 혁신은 종종 과거로의 회귀라는 외피를 입고 온다는 것은 역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임을 기억하자.
시대가 달라져도 풍경은 데자뷔, 여전하지 않은가.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사정 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삶, 높아진 스펙의 기준에 취업은 어렵고, 결혼은 늦어지고 있으며,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체감 행복지수는 바닥인데, 정치는 여전히 이념과 진영으로 이전투구 중이다. 이기심을 감춘 그럴듯한 명분과 현란한 언어를 넘어 어떻게 살 만한 세상을 '실용'으로 구축해 나갈 것인가.
경학을 위시한 다산의 경세학, 그리고 시와 편지, 논설에 이르기까지 전 저작이 이 오래된 '정치'의 과제를 풀기 위한 고심의 토로이다. 시대는 달라졌으되, 다산이 '마음의 구상(心書)으로', 실행해 보지 못하고 꿈으로 남겨, '백세(百世) 후를 기다리겠다'고 한 이 해법을 지금의 현실에 적용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해 볼 수 있을까.
전남 강진군 도암면의 다산초당.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유배된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 18년 가운데 11년을 이곳에서 살면서 실학체계 대부분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강진군청 제공
다산의 대표 저서로 꼽히는 <목민심서>.
다산초당 인근 다산수련원 앞에 자리한 다산의 동상. 박정환 광주교대 교수가 조각했다. 강진군청 제공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우물가 아이 구하지 않는다면 仁이 아니다"
… 주희의 '마음'에 '실천'으로 도전한 정약용
<3> 정약용 vs 주희
선한 본성 가지고 있어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면 헛것
심리적 나약함·한계 극복… 그게 바로 실학 정신
강신주 철학자
정약용이 1801년 처음 전남 강진으로 유배 당해 4년 동안 머물렀던 주막집 한 켠 방 '사의재' .
강진군이 2007년 집터로 추정되는 곳에 복원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역사를 보면 한 가지 담론만이 허용되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당연히 이런 시대에는 특정 텍스트가 가공할 만한 권위를 행사할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에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즉 사서(四書)가 그런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사서가 이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단순히 정치권력의 필요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상이한 시대를 가진 4권의 책을 사서라는 하나의 틀로 묶어낸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해석 체계 아닐까.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사회와 정치의 문제, 나아가 우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합적인 설명틀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사서는 그토록 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4권의 고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시킨 주희(朱熹ㆍ1130~1200)라는 위대한 사상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동양적 사유의 촘촘한 그물망 펼친 주희
새로운 사유를 꿈꾸는 사람들 앞에는 이제 넘기 만만치 않은 거대한 성곽이 우뚝 솟아있는 셈이다. 주희의 모든 고뇌와 그 찬란한 결과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서집주(四書集注)>다. 주희의 사유는 어떤 곤충도 쉽게 빠져 나가기 힘들게 촘촘히 짜인 거미줄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거미줄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일본에서는 이토 진사이(伊藤仁齋ㆍ1627~1705)가, 중국에서는 대진(戴震ㆍ1723~1777)이 목숨을 걸고 그 힘든 작업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힘이 딸려서일까. 그들은 지엽적으로만 주희와는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데 만족했다. <사서집주>의 거미줄을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통과해서 극복하려면 동아시아는 정약용이라는 걸출한 철학자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어떤 식으로 주희의 거미줄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맹자>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지금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모두 깜짝 놀라며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측은지심은 사단(四端), 즉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4가지 도덕적 마음 중 하나다. 맹자는 나머지 세 가지 마음으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이야기했다. 측은지심이 일종의 동정심이라면, 수오지심은 모욕을 당했을 때 생기는 수치심이고, 사양지심은 손님이 집을 방문할 때 생기는 공경하는 마음이고, 시비지심은 부당한 것을 보았을 때 생기는 무엇이 불의고 정의인지를 판단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4가지 마음에 대해 주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은 감정(情)이고, 인(仁), 의(義), 예(禮) 그리고 지(智)는 본성(性)이다. (…)사단이라고 할 때 단이란 글자는 실마리를 말한다. 그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 본성의 본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이 본성을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여 묵묵히 확장하여 마음에 채울 수만 있다면 하늘이 내게 준 것을 모두 다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맹자집주(孟子集注)>)
그렇다. 주희에게 측은지심과 같은 윤리적 감정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진 선한 본성이 실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잘해야 사단이란 본성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 의, 예, 지란 본성이 있기 때문에,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이란 선한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주희에게 있어 본성이 원인이라면, 감정이란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모든 논의가 그렇지만, 본성이 원인이라면 본성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주희는 배우는 자들에게 권고했던 것이다. 하늘이 내게 준 선천적인 본성을 자각하여 그것을 마음에 가득 채우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선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정약용, 사색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다
하지만 '우물에 빠지려고 했던 어린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되물어보았을 때, 우리는 정약용의 속앓이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위기에 빠진 아이를 목격했을 때 측은지심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내면에는 인한 본성이 있다는 증거라고 주희는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지금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이지, 마음의 본성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주희와 정약용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위기 상황에서 본성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아이에게로 나아갈 것인가. 주희가 본성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면, 정약용은 확고한 의지로 아이를 구하는 길로 나아가려고 한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반드시 행사(行事) 이후에 성립한다. 어린애가 우물에 들어가려 할 때 '측은지심'이 생겨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인'이라 말할 수 없다. 한 그릇의 밥을 성내거나 발로 차면서 줄 때 '수오지심'이 생겨도 그것을 버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의'라 말할 수 없다. 큰 손님이 문에 이르렀을 때 '공경지심'이 생겨도 맞이하여 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예'라 말할 수 없다. 선한 사람이 무고(誣告)를 당했을 때 '시비지심'이 생겨도 분명하게 분별해 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지'라 말할 수 없다.'(<맹자요의(孟子要義)>)
측은지심이 생겼다면, 아이를 구해야만 한다. 수오지심이 생겼다면, 치욕스러운 밥을 내팽개쳐야만 한다. 공경지심이 생겼다면 몸소 나아가 손님을 정성스럽게 맞이해야만 한다. 시비지심이 생겼다면 당당하게 옳고 그름을 증언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데도 하지 못한다면, 인의예지가 인간의 본성이든 하늘의 본성이든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정약용이다. 주희가 심오한 깊이를 가진 본성으로 침잠해 들어갈 때, 정약용은 자리를 박차고 타자와 어울리는 삶의 세계로 뛰어들려고 한다. 물론 그가 인의예지라는 명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실천, 그러니까 행사 이후에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일 뿐이다.
아이를 구하는 데 성공했을 때, 우리는 인(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치욕스러운 밥을 버렸을 때, 우리는 의(義)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손님을 정성스럽게 맞이했을 때, 우리는 예(禮)를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당하게 타인을 위해 옳고 그름을 증언했을 때, 우리는 지혜(智)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사의 어려움이다. 아이를 구하느라 자신도 우물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 치욕스러운 밥을 포기했을 때 배고픔이 지속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공포, 자신의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을 방해한다는 귀찮음, 그리고 타인을 위해 증언했다가 자신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소심함. 이 모든 심리적 장애물을 극복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가 고귀한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닌가.
실천에 대한 감각! 이것이 바로 정약용의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한가로운 방에 앉아 글을 읽거나 수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활을 걸 정도로 어려운 것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옳은 것을 관철시키기 어려운 우리의 나약함이 아닌가. 옳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실천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외적인 조건, 그리고 우리의 내적인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 정약용이 구체적인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도, 혹은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뿐만 우리 후손들이 사변에 사로잡혀 삶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병든 지식인이 아니라, 당당하고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약용의 실학 정신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정약용의 '산수도'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 실학박물관 제공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퇴계 편지 읽고 감동해 '도산사숙록' 기술… 공부자세에 무한 존경 표해
<4> 정약용 vs 이황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양쪽의 대립된 입장 종합해 '이발기발변' 펴내
퇴계와 사상적으론 깊은 단절 있었지만 그의 '수양론'은 적극 수용
다산 정약용은 어떤 학설을 받들어 계승하거나 비판해서 넘어서는 단선적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일찍부터 전해오던 한학(漢學)과 주자학, 양명학은 물론이요, 그 시대에 새로 들어온 청나라의 고증학, 일본의 고학(古學)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교리를 포함하는 서학(西學)에 이르기까지 사방으로부터 다양한 사상 조류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자신의 독자적 철학을 정립한 종합적 사상가이다.
말하자면 당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사상을 모두 모아 하나의 도가니에 담아 뜨거운 불길로 버릴 것은 태우고 취할 것은 녹여서 새로운 물질을 주조해내는 장인에 비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산은 16세 때부터 서울에서 성호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을 따라 성호의 저술을 읽으면서 학문의 길을 찾아갔다. 훗날 조카들에게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았다"고 밝혔던 것처럼, 그의 학문적 기반은 성호와 더불어 성호학파 안에서도 서학에 적극적 관심을 지녔던 '신서파(信西派)'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성호학파의 연원을 점검하면서, 다산은 "퇴계 이후로 윤휴의 학문이 본말이 있고, 윤휴 이후로는 성호의 학문이 옛 성인을 이어주고 후세의 학자를 열어주었다"고 언급하였다. 곧 퇴계의 학풍이 윤휴를 거치고서 성호에 이르러 제대로 계승과 계발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다산 자신의 학문적 뿌리도 파고 내려가면 성호를 거쳐 퇴계에 닿는다. 실학자로서 성호는 현실의 경제 문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동시에 퇴계의 학설을 계승하는 성리학자로서도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실학자이면서 주자학자라는 두 얼굴을 지닌 성호는, 주자학에서 실학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은 성호의 실학 정신을 계승하였지만 주자학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호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理)와 '기'(氣)로 하늘과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주자의 관념적 세계관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면서 그 기초부터 허물고 자신의 독자적 철학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다산은 퇴계의 철학적 기반인 성리설을 계승하는 입장이 아니다. 다산과 퇴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단절이 가로놓여 있다. 그런데 다산은 주자의 성리설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도 퇴계의 성리설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고 있다. 성리설의 원조인 주자를 비판했으니 그 계승자인 퇴계를 비판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그의 가슴 속에는 퇴계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단칠정 논쟁 종합해 성리학사에 획을 긋다
퇴계의 학문적 견해에 대한 다산의 중요한 언급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어볼 수 있다.
먼저 성리설에 관한 해석이다. 다산은 23세 때(1784) 주자의 <중용> 해석에 관해 정조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논쟁이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해 율곡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퇴계의 견해를 지지하는 이벽과 토론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34세 때(1795) 온양의 봉곡사(鳳谷寺)에서 성호의 종손 이삼환을 모시고 선비들과 강학회를 열었을 때, 사단칠정에 관한 이론에서 퇴계는 인성론(人性論)의 입장이요 율곡은 우주론의 입장에 따른 해석이라 규정하여, 대립하는 양쪽 입장을 종합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 견해는 그후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으로 저술되었다.
그렇다고 다산이 퇴계나 율곡의 사단칠정설에 대한 이론을 자신의 이론 속에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성리설의 이론체계 안에서 보면 양쪽이 각각 논리적 정당성을 지닌 것이라 인정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갈라져 대립하던 쟁점을 종합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성리학사에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다음은 경전 해석에 관한 문제이다. 주자의 제자인 왕백이나 조선시대의 이언적 등이 <대학> 에서 몇 구절을 옮겨다가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을 만들어 보완한 데 대해, 퇴계는 "본채를 헐어내어 곁채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다산은 퇴계의 이 비판을 적극 찬성하였다. 이처럼 그는 퇴계와 차이점은 덮어서 감추고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점은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퇴계의 인품과 공부 자세를 깊이 사모하다
다산은 34세 때 충청도 금정역(金井驛)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어 있을 때, 매일 새벽 세수를 하고 나서 퇴계의 편지를 한 통씩 읽고, 오전에 공무를 처리한 다음 정오에는 그 편지에 대한 감회를 적었다. 퇴계의 편지 30통을 33조목으로 기술한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에서 다산은 퇴계의 인간적 품격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밝히고 있으며, 퇴계의 수양과 학문 자세에 깊이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퇴계는 제자 이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포부를 알아주지 않음을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리석고 거칠음을 알아주지 않음을 탄식했다. 이 구절을 읽은 다산은 "겸손한 군자이시다. 선생이 아니면 누구를 따르겠는가!"라며 존경하는 마음을 밝히고 있다.
퇴계의 인간적 포용력을 보여주는 편지를 읽고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남명 조식이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제자들이 성리설의 토론에 열중하면서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인다고 비판하자, 퇴계는 토론도 필요하다고 변호하면서 학자라는 명예만 취하려는 과오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고 답장했다.
"이 편지(퇴계의 답신)를 여러 번 되풀이 읽으니, 나도 모르게 기뻐서 뛰어오르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다산의 감회는, 그가 퇴계의 인품에 얼마나 깊이 감동하고 있는지를 절실하게 고백하고 있다.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부 방법으로 이치 탐구와 공경함에 관해 설명한 데 대해, 다산은 "이 편지는 어느 한 글자 한 구절도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여, 한 마디 한 마디가 학문과 수양에 절실한 훈계임을 강조하였다. 퇴계가 제시한 독서의 방법론에 다산은 특히 공감했다.
퇴계는 독서는 문장의 뜻을 아는 단계를 넘어 몸과 마음으로 성품과 감정 속에서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 참되고 절실히 체험하여 그 깊은 맛을 실지로 맛보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이에 다산은"믿음의 마음과 체험의 말씀은 더욱 정밀하고 확고하여 마땅히 항상 눈에 두고 마음에 간직하여 성찰해야 할 것이다"라며, 퇴계가 제시한 학문 방법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자신의 병통을 위한 치료약으로 삼을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지은 시에서도 "반평생 가시밭길에서 낭패를 당하고/ 칠척 몸은 화살과 돌팔매 속에 지쳐버렸다오/…도산의 산과 퇴계의 물은 어디에 있는가/ 아스라이 높은 기풍 끝없이 흠모하네"라 읊어, 더구나 비방의 표적이 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퇴계의 덕을 얼마나 절실하게 사모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자신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고
다산은 분명 퇴계의 성리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퇴계의 사상 체계 안에서 수양론의 깊이와 학문 방법의 진지성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500권이 넘는 자신의 방대한 저술이 크게 경학과 경세론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하였다. 곧 육경사서(六經四書)의 경학은 자신을 닦는 수기(修己)의 문제요, 일표이서(一表二書)의 경세론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치인(治人)의 문제로 대비하여 제시하였다. 성리설의 형이상학은 거부하였지만, 자신을 닦는 수양론의 문제는 퇴계에게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다산의 철학은 수양론의 내면적 세계에 빠지거나 경세론의 현실적 관심에 쏠리는 일방적 사유 체계가 아니다. 수양론에 기반하면서도 경세론으로 열어나가고, 경세론을 추구하면서도 수양론의 근거를 확립하고 있는 것이 다산 철학의 핵심 정신이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 경세론 저술인 <목민심서>는 첫머리에서 목민관의 실무를 논의하기에 앞서 마음의 자세를 규정하는 심법(心法)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수양론과 경세론이 다산 철학의 두 날개를 이루는 것이라면, 퇴계의 수양론은 다산 철학의 한 날개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민심서> <흠흠신서>와 더불어 다산의 경세론을 대표하는 저술인 <경세유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퇴계 이황. 다산은 퇴계를 깊이 존경했다.
다산 철학의 두 날개인 경세론과 수양론 중 수양론은 퇴계 사상에 힘입은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산의 그림 '매화병제도.' 고려대박물관 제공
하늘에서 내려다본 다산의 고향, 경기 남양주 능내리. 실학박물관 제공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목민관 덕목 담은 연암의 '칠사고'와 다산의 '목민심서'
… 핵심압축 vs 방대함 규모 차이 불구 작업방식 닮은꼴
<5> 정약용 vs 박지원
정보 수집·축적 이후 재배치 다산의 지식경영법 연암 본떠
세부적 연구방법엔 차이점 다산, 제자에 할당후 총괄정리, 연암은 각개격파식 홀로 작업
2인의 친필저술·문집초고 최근 다수발견 학계 '들썩'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높고 깊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넓고 크다. 이 말을 벌써 여러 번 했다. 연암은 무서운 스승이고, 다산은 친절한 스승이다. 친절한 스승은 무릎에 앉혀 놓고 곰실곰실 가르쳐주지만 그 무릎을 벗어나기 어렵다. 무서운 스승 밑에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도 갈피를 잘 잡아 제 길을 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둘 다 제 힘으로 일어서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연암은 교란시켜 헝클어 놓고, 다산은 추슬러 정돈시킨다. 다산은 묻고 적고 정리하게 해서 뒤엉킨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낸다. 연암은 물어보고 뒤흔들고 교란시켜서 오리무중 속으로 밀어넣는다.
연암은 태산 같고 다산은 바다 같다. 한 사람은 굽이굽이 꼭대기가 보이지 않아 골짜기만 맴돌다 만다. 한 사람은 가도가도 끝없는 수평선뿐이다. 두 사람은 우리 학술과 예술이 도달한 정점이다. 깊이와 높이와 너비에서 당할 자가 없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르지만 꼭 같다. 달라서 같고, 같으니까 다르다. 두 정신이 합체하면 천하무적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연암도 다산도 최근 들어 화려한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술과 문학의 대표 선수인 두 사람의 저작들은 부끄럽게도 너무 방치되어 왔다. 문집에 실린 것이 전부가 아니다. 강진을 비롯한 곳곳에서 문집에 빠진 다산의 친필과 저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발굴된다. 제자들의 저술까지 합치면 그 수가 결코 만만치 않다. 잘 모르고 잘못 알던 내용들이 새로 알려지고 바로 잡힌다. 잘못 안 것이 많아서 부끄럽고, 모르던 것이 새삼스러워 화가 난다.
연암은 친필로 고치고 만지고 다듬던 초고본 수십 권이 몇 해 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학자들이 무척 바빠지게 생겼다. 우리에게 연암은 영국인에게 셰익스피어에 해당한다. 셰익스피어의 원고 초고가 수십 책 발견되었다면 그쪽에서 얼마나 난리를 치고, 세계 영문학자들이 어떻게 열광하겠는가?
새로 나온 연암의 초고를 문집과 대조해보니 한편 한편이 조금씩 매만지고 차근차근 깁고 보태서 완성에 이른 공든 탑인 줄을 알겠다. 연암이 가장 아꼈다는 죽은 누이를 위해 쓴 묘지명은 무려 다섯 번이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어떤 글은 초고에는 있는데 어째서 최종적으로 문집에서 빠졌을까?
이 책은 원래 이런 모양으로 만들려 했었구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고 흥분하다가 어째 이것이 이제야 알려지나 싶어 문득 속이 상한다. 한편으로 즐겁다. 그 전인미답의 경계에 내딛는 내 발걸음이 첫걸음이 될 테니까. 이런 행운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암의 <칠사고>와 다산의 <목민심서>
연암의 <칠사고(七事考)>란 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두 해 전 학회에서 처음 소개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칠사(七事)는 고려 말부터 목민관들이 닦아야 할 일곱 가지 일을 일컫는 표현이다. 인사고과 시에 채점 항목이기도 하다. 연암이 쓴 <칠사고>가 앞서의 초고본 뭉텅이에서 새로 나왔다. 분량도 만만찮다. 이것이 <연암집>에는 어째서 빠졌을까? 여러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고, 체계가 정돈되지 않아 당시의 편집자들이 초고로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따지면 <과농소초>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칠사고>는 수령의 일곱 가지 일에 대해 정리한 책이다. 다산의 <목민심서>와 그 성격과 목적이 꼭 같다. 다만 일곱 갈래를 챕터로 두지 않고, 이 일곱 가지에 포함되어야 마땅할 항목을 세워 관련 내용을 주섬주섬 편집했다. 이 책 저 책에서 옮기되 그대로 베끼지 않고 줄이고 압축해서 핵심을 추렸다. <목민심서>의 방대호한함에 견주면 10분의 1도 안 되지만, 한 권으로 읽기는 이것만도 충분하리만치 맵짜다.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만드는 솜씨는 연암이 다산을 도저히 못 따라간다. 연암은 곰배님배 꼼꼼한 사람이 아니다. 핵심을 콱 찌르고 쑥 달아난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던 예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의 사유는 읽고 나면 막막해져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이 혼란스럽다. 다산은 유능한 소방수다. 어떤 큰 불도 그는 방향을 잡아 차근차근 불씨도 남기지 않고 꺼서 재로 변할 뻔한 재산을 확실히 지켜낸다.
다산의 <목민심서>는 미리 목차를 정해 벽에다 붙여놓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카드 작업하는 요령을 숙지시킨 후, 일정한 역할을 분배해서 이룩한 집체 작업의 결과다. 다산은 이를 진두지휘한 야전 사령관이었다.
제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지시대로 움직여 큰 승리를 지켜냈다. 연암은 혼자 앉아서 이 책 저 책 손 가는 대로 뒤져서 그때그때 메모했다. 속도는 느리고 규모는 줄었어도 솜씨야 어디 가겠는가.
엉성한 듯 탄탄하고, 허술한 듯 삼엄하다. 특히 원래 인용 근거가 되었던 원전과 연암이 간추린 문장을 비교해보면 간추려진 품새가 과연 연암답다. <칠사고>가 있어서 <목민심서>가 있다.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요구된다.
같지만 다른 작업 방식
연암과 다산은 달라도 한참 다르지만, 문득문득 닮은 데 놀란다. 다산의 지식경영법은 일찍이 연암 그룹들이 작업하던 방식에서 따온 것이 많다. 박제가의 <북학의>가 그렇고, 유득공의 <발합경>, 이서구의 <녹앵무경>이 그렇다. 사물의 정보를 수집 축적해서 일정한 체계 속에 재배치하는 방식이다. 연암 그룹과 다산 학단의 작업 방식은 규모만 차이 났을 뿐 놀라우리만치 서로 닮았다.
이들의 정보 검색 능력은 과히 위력적이었다. 이서구가 취미로 기르던 앵무새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소책자의 분량이 되자 박제가에게 보여준다. 박제가는 규장각에서 자신의 검색 엔진을 돌려 이서구가 못 찾은 자료를 찾아 추가한다. 이덕무에게 바통이 넘겨진다. 이덕무는 박제가도 못 찾은 자료를 다시 검색해낸다. 이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정보의 총량은 어느새 처음보다 곱절 이상으로 불어난다. 거기에 연암이 서문을 쓰면 책 한 권이 완성된다.
이들이 찾은 정보는 당시 조선의 서책 정보로 수집할 수 있는 정보의 최대치였다. 이덕무와 박제가가 누군가? 규장각에서 그들이 맡았던 직분은 검서관(檢書官)이었다. 말 그대로 서책의 정보를 검사하는 정보검색사에 해당한다.
이런 작업이 다산학단에서도 동일하게 이뤄졌다. 다만 연암그룹이 개별로 각개격파의 방식이었다면 다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체 작업으로 모든 공정을 관리했다. 작업의 핵심 가치를 정하고 목표를 세운다. 목차의 얼개를 짠다. 작업량을 각자에게 할당하고, 작업 방식을 숙지시킨다. 일제히 달려들어 카드 작업을 마무리 짓고, 한꺼번에 모아서 정보의 우열을 정한다.
다시 역할을 나눠, 공책을 만들고, 카드 순서를 정리하고, 정리된 내용을 옮겨 적는다. 마지막에 '빨간 펜 선생'으로 다산이 나선다. 위쪽에 ×표시 한 항목은 지우고, ○표는 남긴다. 챕터의 시작과 끝에 총괄 정리의 언급을 보탠다. 정리와 재정리의 작업을 다섯 번쯤 거치면 비로소 서문을 얹어 한질의 책이 완성된다.
다산은 그물코가 촘촘했지만, 연암의 그물눈은 성글었다. 다산은 저인망으로 싹쓸이를 했고, 연암은 대어만 듬성듬성 낚았다. 그렇다고 어느 쪽이 더 실속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둘 다 대단하고, 모두 훌륭하다.
넘어야 할 큰 산
연암과 다산은 우리 문화사의 자랑이다.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다.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 위대한 두 스승의 역량이 하나로 합쳐지면 그 위력이 참으로 막강하다. 오늘날에 적용해도 여전히 새롭다.
고전은 위대하지만 허투루 보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한다. 위대한 정신을 갈고 닦아 흐려진 빛을 다시 광채 나게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다산 탄생 250주년! 숫자가 중요하지 않고, 의미를 되새기는 마음이 중요하다.
연암 집안에 전하는 박지원의 초상. 우람한 풍채며 매서운 눈매가 인상적이다. 연암의 학문이 높고 깊은 태산이라면, 다산은 넓은 큰 바다 같았다
18세기 정조시대는 학문과 예술이 만개한 조선의 절정기였지만, 정약용은 정조 승하 이후 유배길에 올랐고 박지원은 보수적으로 변한 사회 분위기로 제대로 실학 정신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진은 정조대왕이 아버지(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행렬도. 한국일보 자료사진
창경궁 내 규장각(주합루). 정조의 실학정신을 펼치기 위해 세웠던 도서관자료관이다.
다산의 대표작 <목민심서>(위)와 연암이 쓴 목민서<칠사고>.
다산과 오규, 조선·일본의 脫주자학 흐름 주도
… 중세 울타리 부쉈지만 근대 문턱은 못 넘어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6·끝> 정약용 vs 오규 소라이
인간의 주체성 중시 불구 당시 체제의 한계 탓에 미래보다 과거로 회귀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교수
조선통신사 행렬을 담은 에도시대 그림.
일본에 문물을 전달하던 조선통신사는 조선 후기 들어 일본 문화가 크게 발달함에 따라 일본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가 된다. 박제가 정약용 등 조선 실학자들도 일본 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사실 서양 역사에 적절한 용어이며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는 용어이다. 그러나 사상사에서는 이 말이 보다 안정된 의미를 띨 수 있다. 중세란 우선 거대 제국들의 시대이다. 고대에 거대권력이 해체되면서 다원화되었던 세계가 다시 거대 제국들에 의해 통합된 시대가 이 때이다.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마우리아 제국, 그리고 동북아 중원의 여러 제국들이 그런 거대권력들이다.
이런 거대 제국들의 시대에 이르러 철학, 종교, 정치학 등 사상의 차원에서도 통폐합이 일어나게 된다. 철학사적으로 중세란 고대의 철학적 실험들 중 특정한 하나의 사상이 각 문명의 '정답'으로 채택되어 교조화/종교화 또는 통치이데올로기화된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지중해세계에서의 세 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인도에서의 두 종교/철학(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동북아에서의 두 종교/철학(유교와 도교)이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정치적으로는 거대 제국들이, 사상적으로는 이 교조화된 철학/종교가 중세를 특징짓는다.
그래서 이 시대에 등장한 철학들은 고대에 이루어진 사유 실험들 중 어떤 갈래를 잇되, 그것을 거대한 사변적 체계로 확장한 사상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들은 당대의 거대 제국들의 성격과 맞물리면서, 영원한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불멸의 신전과도 같은 위용을 갖추기에 이른다.
본연과 원융의 사유-주자학
이런 중세 사상들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가 바로 주자학이다. 주자학에서 우리는 '본연(本然)'이라 할 만한 것을 찾아서 그로써 모든 것들을 '원융(圓融)'하게 아우르고(자리를 잡아주고) 그로써 영원의 자아와 국가를 정초하려 했던 중세인들의 꿈을 본다.
이런 꿈의 무게는 '리(理)'라는 말에 걸리게 된다. 천지만물을 혼돈이 아니라 조화로, 무의미가 아니라 의미로, 야만이 아니라 도덕으로 비추어주는 원리로서의 리에 대한 믿음이 주자학, 넓게는 성리학을 특징짓는다. 그리고 인간의 본연의 마음 역시 이 리와 다른 것이 아닌 '성(性)'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주자학은 세계에 대한 낙천적 믿음과 자연과 인간의 연속성을 긍정한다.
그러나 세계의 '본연'을 이렇게 이해할 때 현실은 이런 리(理)의 세계와 너무나도 다른 무엇으로 다가오기에, 이제 주자학은 이 현실을 설명해야 할 '이론적 부담'을 지게 된다. 따라서 본연이 그토록 무구한 '리(理)'인데도 현실이 이토록 혼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악역이 도입되어야 했다. 이 악역은 '기(氣)'가 맡게 된다. 세계는 리(理)와 기(氣)의 착종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氣)로 이루어진 현실이 어떻게 변하건 본연의 리(理)는 훼손되지 않고서 꿋꿋이 자신의 본질을 유지한다. 기(氣)란 리(理)라는 거울에 끼는 먼지일 뿐이다. 물론 그 먼지에도 등급이 있어, 그 등급이 현실의 퇴락 정도를 설명해 준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닦고 또 닦아 본연의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 기(氣)의 청탁(淸濁)에 따른 가치의 서열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탈-주자학과 모더니티의 사유
주자학은 동북아세계를 상당 기간 지배했다. 중원의 송ㆍ원ㆍ명, 반도의 조선, 열도의 에도 막부는 주자학이라는 철학에 근거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이윽고 양명학이 출현해 주자학과 대립각을 세웠고, 주자학을 만개시킨 조선에서도 18세기 정도면 비-주자학적, 반-주자학적 사유들이 우후죽순처럼 펼쳐졌으며, 에도 막부의 경우에는 주자학이 발달한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아 이미 탈-주자학적 사유들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근대성=모더니티'라 부르는 삶의 양식은 이런 탈-주자학적 흐름들로부터 배태되었다.
탈-주자학적 철학소들―철학적 사유의 요소들―은 다양하다. 야마가 소코오(山鹿素行)는 주자학의 정적주의(靜寂主義)를 비판하면서, 그저 말없이 앉아 마음을 닦는다고 진정한 유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역설했다. 탈-주자학적 사유들은 대개 주자학에 스며들어 온 도가적-불가적 측면들을 공격하곤 했다. 리 개념은 결국 불가의 '공(空)'이나 도가의 '무(無)' 개념의 변형이 아닌가?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의 말처럼 "리가 있은 연후에 기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리란 단지 기 안에 있는 조리일 뿐이다." 무(無)인 리를 유(有)인 기 앞에 놓는 것이 주자학적 정적주의의 토대라 보았던 것이다.
'성(性)'이란 본연(本然)으로서 즉자적으로(그 자체로써)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이상태이다. 본연지성이란 이상태이며,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은 기질지성이다. 현실의 인간을 죄악시할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 연후 그로부터 이상태를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주체의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오규 소라이(荻生狙徠)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이런 탈-주자학적 흐름의 정점에 서 있다. 오규가 주자학을 탈피코자 했다면 모토오리는 아예 중화중심주의를 탈피코자 했다면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연대기적 차이를 넘어서는 심대한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오규는 주자학적 내면성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외면적 사유를 추구했다. 그에게서 '리', '성', '심', '경' 등등의 범주는 탈락되고 '예ㆍ악ㆍ형ㆍ정'이 전면을 차지하게 되며, 주자가 만들어놓은 '사서'에 대한 연구가 고대의 경전들을 연구하는 '고문사학(古文辭學)'으로 대체된다. 아코 낭인들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훗날 <주신구라>로 극화되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오규는 이들의 '의리'를 인정하면서도 그런 "사적인 것"은 결코 "공적인 것" 즉 법도에 앞설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할복을 주장했다.
오규는 한편으로 고대 경학 연구로의 회귀를 통해 주자학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예악형정에 기초한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과학적인) 경세학을 통해 근대성의 한 단초를 마련했다.
다산과 근대성-성취와 한계
이런 식의 탈-주자학적, 반-주자학적 사유 양태들은 조선에서도 풍성하게 전개되었으며, 다산 정약용은 그런 흐름의 정점에 위치한다. 주자학으로 대변되는 성리학은 비가시(非可視)의 차원에 대한 사변에 기초한다. 그것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상상력이었다.
정약용은, 영국 경험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를 가시성의 장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그는 본연과 현실을 합치시키고자 했으며, 오규의 고문사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고대 문헌들을 새롭게 읽고자 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대한 연속성도 끊어지기에 이른다. 다산에게 성이란 본연의 무엇이 아니라 현실의 무엇이다. 모든 것은 기질에 입각해 논의된다. 주자처럼 선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리(理)는 만물에 보편적으로 부여되며 기(氣)의 차이에 따라 사물들의 차이가 형성되지만, 경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기(氣)가 만물에 보편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기(氣)의 불연속을 밑에서 메워주던 리(理)의 연속성은 해체된다.
초목금수(草木禽獸)와 인간은 도덕성에 있어 단절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性)이란 주자의 리(理)가 아니라 현실적 본성이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현실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성인 도의심을 발달시켜 성(性)이라는 이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중세적 정적주의는 근세적 주체철학에 의해 대체된다. 다산은 이 주체의 철학을 고대 경전의 광범위한 재해석을 통해 다른 누구보다도 정치하게 제시했다.
그러나 오규처럼 다산 역시 미래로 창조해 나가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는 길을 택했다.
'상제'를 긍정함으로써 고대적 종교로 회귀하고, 오규처럼 고대의 성인을 '본'으로 삼음으로써 주자학적 본연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본연을 따랐으며, 도의심의 근거를 찾아 다시 '천명'으로 돌아간다. 이 점에서 두 사람 모두 근대의 문턱에서 오히려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두 사람의 한계라기보다 시대적 한계라 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미래로 자신들을 열어 갈 인식론적 장도 정치적 장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단지 현실의 왕조/막부를 고대적 본에 따라 새롭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누구도 시대적 한계를 한꺼번에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에도시대 반주자학 사상가… '논어' 현실적으로 재해석
오규 소라이는…
일본 에도(江戶)시대 유학자이자 문헌학자 오규 소라이(1666~1728)는 이토 진사이(1627~1705),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와 함께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도쿠가와 막부 5대 쇼군의 시의(侍醫)였던 오규 가게아키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1679년 유배 당한 아버지를 따라가 유배지에서 주자학을 독학했다. 1692년 아버지가 사면되면서 에도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했고, 5대 쇼군의 총신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아스에게 1696년 발탁돼 17년 동안 그의 정치 고문 노릇을 했다. 1709년 5대 쇼군이 사망해 야나기사와가 실각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본격적으로 저술 활동에 돌입해 독창적인 '반주자학' 사상을 세웠다. 주자학에 입각한 고전 해석을 거부하고 고대 중국의 고전을 독해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나기사와와 8대 쇼군 요시무네의 정치적 조언자였던 그는 지극히 현실적 태도로 고전을 해석했고, 특히 주자학에 대한 적극적인 반론을 담아 <논어>를 재해석했다. 일본 정치사상계 거장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ㆍ1914~1996)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1952)에서 오규 소라이에 이르러 일본의 주자학이 비로소 도덕과 정치가 분리된 근대적 정치사상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한다.
오규의 사상은 뒷날 그의 제자 다자이 순다이가 쓴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다산 정약용에게도 전해진다. 다산은 <논어고금주> 50개소에서 오규의 학설을 인용하며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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