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번잡한 저잣거리로 나가기를 즐기기 보다,
고요한 아란나*에서 내면을 마주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자주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요한 삶, 조금 외로운 삶과 벗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음’, 외로움에 익숙치 않은 이를 중생이라 합니다.
외로움에 익숙하다는 것은
이미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란 수행자의 영원한 길동무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마땅히 벗을 하고자 마음 낼 수 있어야 참된 수행자 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므로 외롭지 않은 것은
외로움을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내 옆에 누군가가 있더라도
아무리 많은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 우린 모두가 혼자입니다.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일 수 없는 ‘전체로서 혼자’인 것입니다.
혼자임을, 외로움을 이겨내는 일은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수행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혼자 있음에 불안해하며, 외로운 것을 참지 못합니다.
혼자 있으면 뭔지 모를 답답과 무기력을 느끼곤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린 지금껏 함께 있을 때 세상을 사는 방법만을 익히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혼자일 때 더 자유로운 도리, 더 행복할 수 있는 도리를
거의 생각조차 해 보지 못 한 채 세상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살아오며 추구하던 그 모든 것들은
내 혼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와 견주어 질 때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나와 견줄만한 누군가가 있을 때,
내가 (그 보다) 잘생겼을 수도 있고, 똑똑할수도 있고,
명예로울 수 있으며, 부자일 수 있고,
학벌이 좋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혼자서는 잘나고 못나고도 없으며,
부자와 가난도 없고
아름다움과 추함도, 뚱뚱함과 가냘픔도
학벌이나 명예, 지위가 높고 낮음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 혼자일 때
그 어떤 시비분별도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시말해
혼자일 때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잘나고 못남에, 높고 낮음, 크고 작음
이 모든 양극단의 판단 분별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혼자일 때 답답하고 무기력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혼자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며,
혼자라는 것은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잘 살고, 남들에게 인정받는지
남들에게 잘 보일 수 있으며,
남들에게 승리할 수 있는지를 교육 받아왔습니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행과 불행을 좌우해 왔습니다.
돈이 남보다 많으면 행복, 그렇지 않으면 불행,
권력이나 지위, 계급이 남보다 높으면 행복, 그렇지 않으면 불행,
얼굴이며 몸매가 남들보다 잘 빠지면 행복, 그렇지 않으면 불행,
학벌이 남들보다 좋으면 행복, 그렇지 않으면 불행,
남들보다 커야하고, 남들보다 잘나야 하고,
남들보다 똑똑해야 세상 살아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듯 남들에 비해 어떠어떠한
상대적인 행복을 찾는 대에만 익숙해 왔습니다.
남들과 함께 있음으로 ‘나’를 느끼고 맛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착하다, 잘생겼다, 똑똑하다, 키가 크다 등 등...
이 모든 ‘나’를 규정하는 판단 분별은 상대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홀로 있음이란
나를 내세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혼자는 괴로운 것입니다.
나를 내세우는 일만 배우고, 그것만을 하며 살아왔는데
그 일에서 한번 떨어져 보라고 하니 무기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혼자있음’의 공부는 상대적인 모든 시비분별을 떠나는 공부입니다.
그러기에 ‘혼자있음’ ‘외로움’이란
가장 빨리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체험적인 공부, 생생한 공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나’라는 놈 때문입니다.
‘나’가 남아 있는 이상 여전히 시비분별은 닦이지 않을 것입니다.
생(生)이 없다면 사(死)는 논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생이 있기 때문에 죽음 또한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남들 즉 상대가 없다면
나 즉 혼자라는 것 또한 혼자라고 이름 붙일 필요조차 없게 됩니다.
상대가 없는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입니다.
조금 쉽게 말해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면
둘 셋이란 말 조차 필요 없을 것이고,
상대라는 말 조차 끊어진 개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혼자있음이란
상대와의 시비분별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일이다보니 혼자있음이 답답하고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배워 온
상대와의 분별 속에서 남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신념들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이겨내야 합니다.
홀로있음에서 오는
그 고독감과 외로움에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며
시비 분별을 끊어버리는 큰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혼자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수행자는 외로워야 합니다.
아니 혼자있음, 외로움 속에서도
늘 자기 마음의 주인을 확고히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주장자 밝게 서 있다면
주장자로 살지 곁가지로 휘둘려 살지 않습니다.
혼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황입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단풍 지듯
그렇듯 상황 따라 잠시 일어난 인연일 뿐입니다.
결코 우리가 얽매여 외로움에 치를 떨어야 할 그런 경계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 왔다가 혼자 가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사실은 혼자 살고 가는 것입니다.
잠시 부모, 부부, 친구, 친지, 형제, 이웃, 도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잠시 조건따라, 우리 업식따라 인연지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함께 하기 때문에 덜 외로운 것처럼 생각하지만
외로움의 근본을 살펴보면
함께 한다고 적어지거나 혼자라고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없어짓 듯 해도 조건이 맞으면 다시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바로 깨닫게 되면,
즉, 외로움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상황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면
그 헛된 마음에 놀아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상황을 바꾸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어야 수행자 입니다.
수행자는 외로움과 즐거이 벗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이란 놈의 실체를
가만히 관해 벗겨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인 것을 싫어하지만
어느 한 순간도 혼자이지 않은 때는 없습니다.
올 때도 그랬고 갈 때도 그럴 것이며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이 그러할 것입니다.
혼자 있음,
외로움과 벗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란나: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무쟁처(無諍處), 적 정처(寂靜處)라고도 하며,
시끄러움과 번 잡함 이 없는
숲이나 들판 같 이 수행하기 좋은 고요한 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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