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이 ‘문학의 여왕’ 된 비밀
‘오이디푸스 렉스’와 카타르시스 * 배철현 *
-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렉스’를 무대에 올린 건 2500년 전이다. 그러나 지금도 관객은 이 작품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이건 마술이다. 아테네에 우뚝 선 파르테논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성화처럼 아름다운 실존이다. 이 아름다움을 만드는 비결은 무엇인가.
국립극단이 무대에 올린 ‘오이디푸스’. [국립극단]
1. 비극, 문학의 여왕
인간은 오래전부터 이성, 감정, 감성을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황금시대에 등장한 비극 작품은 문학의 여왕이었고, 오늘날에도 그 왕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비극은 신화, 전설, 서사시의 주제를 선별해 원형극장의 아테네인들에게 들려준 드라마다. 드라마는 ‘무대’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공연을 통해 재현된 표현 방식이다. ‘drama’라는 단어는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고대 그리스어 ‘drao’의 명사형으로, 굳이 번역하자면 ‘행위’라는 뜻이다. 드라마는 극작가의 의도를 이해한 배우에 의해 청중 앞의 무대에서 재현된다. 드라마는 극작가, 배우, 오케스트라, 관객, 그리고 작품을 지원하는 후원자와 제작진이 한데 어울려 만드는 공동 작업이다. 서사시나 서정시에서는 등장인물이 운율이 담긴 ‘노래’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만, 그리스 비극에선 배우가 극중 인물 혹은 관객과 ‘말’로 소통한다. ‘배우’를 그리스어로 ‘휘포크리테스(hypocrites)’라고 하는데, 이는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hypo) 다른 배우, 관객과 적절한 말을 선택하고 판단해 말하는(crites) 사람’이란 의미다. ‘위선자’를 뜻하는 영어 ‘hypocrite’와는 다른 의미다. 왜 우리는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행’과 같은 드라마에 열광하는가. 특히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을 기록한 고전 그리스어를 모르면서도 시공간적으로 2500년이나 지난 지금, 왜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읽고 감동을 받는가. 고대 그리스 비극들, 특히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아직도 무대에 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 작품들이 후대 작품에 비해 탁월하기 때문이다.신문에 ‘비극’ 혹은 ‘비극적’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9·11테러 이후 끊임없이 일어나는 테러 사건과 최근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엽기적인 범죄를 보고 우리는 ‘비극’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9·11과 같은 끔찍한 사건은 고대 그리스 극작가들이 사용하는 ‘비극’이란 단어와 같은 의미일까.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사건을 무대에 올려 아테네인들을 고민하게 만들긴 했다. 2. 소포클레스
그리스 최초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보다 30세 어리고 에우리피데스보다 15세 많은 소포클레스는 아테네 근처 콜루누스 마을에서 기원전 495년 태어나 거의 90년간 살았다. 그의 아버지 소필루스는 상류층 지식인으로 음악과 시, 레슬링을 즐겼다. 소포클레스는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감성을 이어받아 16세 때 살라미스 전쟁을 축하하는 공연에서 합창대를 이끌었다. 플라톤이 기록한 그의 어록엔 이런 구절도 있다. “노년이 나를 욕정(술과 여인)으로부터 건져내 얼마나 감사한가!” 그는 젊은 시절 철없는 부잣집 아들처럼 방탕하게 생활했던 것이다. 그가 당시 최고의 비극작가로 등극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아이스킬로스는 최초의 비극작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 있는 비극작가는 없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한 비극 경연에서 승리하면서 일약 최고의 비극작가로 등극한다.그 과정에 정치지도자 키몬(Cimon)이 있었다. 키몬은 마라톤 전쟁 승리의 주역인 밀티아데스(Miltiades)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기원전 490년에 일어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마라톤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이 살라미스 전쟁을 통해 그리스 주변 해상권을 장악하려 하자 페르시아 식민정책을 거부한 에게해 도시들을 규합해 아리스테이데스(Aristedes)와 함께 새로운 정치·군사 조직을 창설했다. 이것이 델로스 동맹으로, 키몬은 기원전 463년까지 이 동맹의 지도자였다. 그는 기원전 475년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아테네를 창건한 신화적 존재인 테세우스의 ‘뼈’를 스퀼로스 섬에서 아테네로 가져왔다. 아테네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새로운 지도자와 지식인에 대한 갈망이 고조됐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68년 처음으로 아이스킬로스와의 비극 경연에서 경쟁해 승리했다. 이 경연의 승자 선정 과정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원래는 제비뽑기로 심사위원을 선출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때만큼은 키몬과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직접 소포클레스를 우승자로 뽑았다. 정치지도자들의 후원을 잃고 비극 경연에서 진 아이스킬로스는 시실리로 이주했다. 3. 오이디푸스 렉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렉스(Oedipus Rex)’를 최고의 비극 작품으로 꼽았다. ‘오이디푸스 렉스’는 라틴어 명칭으로 ‘오이디푸스 왕’이란 의미다. 학자들은 ‘오이디푸스 렉스’라는 라틴어 제목을 더 선호한다. 이 비극은 다른 비극들이 그렇듯이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창작됐다. 소포클레스는 역사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신화적인 사건을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 맞게 재해석했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로 이름난 델피 신전의 여사제가 수수께끼와 같은 예언을 한다. 테베라는 도시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끔찍하고도 반인륜적인 내용이었다. 태어난 아이는 괴물이기 때문에 테베는 그 아이를 살해해야만 지탱할 수 있다.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는 아이의 다리를 줄로 꽁꽁 묶은 다음 아이를 산비탈에 버렸다. 밧줄로 묶인 발이 퉁퉁 부어올라 이 아이는 발(푸스)이 부어오른(오이디) 아이, 즉 ‘오이디푸스’라고 불렸다. 후에 이 신화는 심리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저서 ‘꿈의 해석’에서 ‘오이디푸스 렉스’에 주목해 인간은 자립하기 위해 자신에게 생명과 생존을 제공한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버지와 성적인 관계가 있는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고 썼다. 아버지는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이 스스로 걷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목동에게 구출된 오이디푸스는 이웃 도시 고린도의 왕과 왕비에게 입양됐다. 오이디푸스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신탁(神託)을 받으러 간다. 고린도 시민들에게서 자신이 어릴 때 입양된 고아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신탁에 따르면, 그는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할 운명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이 신탁이 자신의 양부모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여기고 고린도를 떠나 테베로 향한다. 테베는 오이디푸스의 원래 고향이다. 관객들은 테베로 향하는 오이디푸스를 보며 그가 맞게 될 비참한 운명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다. 이 끔찍한 운명을 감지하지 못하는 유일한 사람은 오이디푸스 자신이다.
그가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마주 오는 전차와 만난다. 인생은 갈림길의 연속이며, 그 순간의 결정이 운명을 결정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밀치는 전차의 마부를 내리쳤고 싸움이 일어난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오이디푸스는 전차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도 살해한다. 그가 바로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이며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운명의 소용돌이 안에 생존하는 비극적인 존재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공포를 느낀다.
4. 스핑크스의 질문
카프라왕의 피라미드 앞에서 수호자 스핑크스가 왕의 영혼을 지키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여행한다. 무시무시한 사건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순진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관객들은 테베에서 펼쳐질 사건을 상상해 드라마에 점점 몰입한다. 다음 단계를 통과하려면 반드시 ‘경계’를 통과해야 한다. 경계는 신화에서 성문, 사막, 강, 산 등으로 은유적으로 등장한다.
평범한 장소와 특별한 장소가 구분되는 공간엔 반드시 ‘괴물’이 등장한다. 괴물은 이 경계를 지키는 자로, 경계를 통과하려는 입문자들을 시험하는 존재다. 괴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 ‘monster’는 ‘(경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괴물은 한쪽에 속해 있지 않기에 늘 ‘하이브리드’로 등장한다.
테베로 들어가는 성문 입구에 있는 존재도 바로 괴물이다. 이 괴물의 이름은 ‘스핑크스’. 스핑크스는 원래 고대 이집트에 등장하는 괴물로 피라미드를 수호한다. 그는 산 자의 땅과 죽은 자의 경계에서 이곳에 진입하려는 자를 막는다. ‘스핑크스’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준비하지 않고 통과하려는 자를) 목 졸라 죽이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핑크스의 임무는 테베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정답을 말한 사람이 없었고, 테베에서는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는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이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질문한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오후엔 두 발로 걸으며 저녁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오이디푸스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말한 최초의 인간이다. 그는 대답한다. “인간입니다. 어린아이는 기어 다니고, 어른은 두발로 걸어 다니며,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이 질문의 근원적인 의미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사회는 점점 무질서, 폭력, 이기심으로 가득 차게 됐다. 오이디푸스는 이런 역병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때 사라진다고 본다. 오이디푸스가 정답을 말하자 스핑크스는 절벽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러자 테베에선 역병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테베 시민들은 오이디푸스에게 감사를 표하며 왕이 돼달라고 제안한다. 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라이오스 왕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친모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왕으로 등극한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는 라이오스 왕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관객들은 이들의 무지를 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동정한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다스리는 왕이 됐을 뿐 아니라 이오카스테 왕비에겐 훌륭한 남편, 그리고 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에게 나무랄 데 없는 아버지가 됐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끔찍하고 알 수 없는 전염병이 테베 전체에 돌아 수천 명이 죽고 흉년이 든다. 먹을 것이 떨어져 여성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다. 그때 티레시아스란 장님 점쟁이가 진실을 말한다. 누군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근친상간을 저질렀기 때문이란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이것이 자신의 얘기임을 알고 목을 매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의 브로치 핀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된다. 그는 일생을 거지로 거리를 배회하며 살다 생을 마친다.
5.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구조를 다룬 책 ‘시학’에서 ‘오이디푸스 렉스’를 자세히 다룬다. 그는 ‘오이디푸스 렉스’에서 다른 비극과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가 야기하는 끔찍한 사건들을 비교한다. 그는 우리를 일깨우는 역설로 설명한다. 만일 내가 방금 ‘오이디푸스 렉스’ 연극을 보고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사람이 내게 “연극이 재미있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연극의 내용이 극단적이며 내 삶의 원칙인 도덕과 윤리를 파괴하기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넘어 혐오스럽습니다. 당신이 재미를 느끼길 원한다면, 다음엔 투우 경기장에 가보십시오.”
비극은 사실 비극이 다루는 주제나 인물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에서 중요한 점은 비극의 내용이 아니라 비극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심미적인 쾌감을 주는 것은 무엇이 표현됐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됐는가, 즉 ‘플롯(plot)’이다. 우리가 비극에서 즐기는 것은 폭력, 살인, 근친상간과 같은 관행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재현됐는지다. 비극의 내용이 오감을 통해 이것을 본 인간에게 전달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미메시스(mimesis)’ 즉 ‘흉내’라고 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렉스’와 같은 연극을 비극으로 만드는 요소를 설명한다. 비극에는 ‘사고’ 즉 갑자기 일어나는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없다. 비극이 진행되면서, 신탁이나 점쟁이가 등장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암시한다. 비극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들은 이미 예견된 내용이다. 연극이 진행되면서, 그 당시엔 볼 수 없지만, 나중에 그 사건의 연유를 깨닫는다. 우리가 비극에서 보는 사건들은 “필연적이고 가능한” 일들이다. 비극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사건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은 너무 끔찍하다. 주인공인 신탁이나 점쟁이가 예언한 내용의 화신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숭고한 인격을 지닌 귀족이나 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나 여성이 비극 작품의 주인공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오카스테 왕비가 목을 매는 장면이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핀으로 찌르는 장면은 무대에서 재현하지 않는다. 비극에서 중요한 내용은 주인공의 결함으로 인한 사건의 결과다.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Jean Anouilh·1910~1987)는 소포클레스의 다른 작품 ‘안티고네’를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그는 ‘안티고네’의 구성을 ‘기계’라고 표현했다. 이 비극 작품의 등장인물, 대화 내용, 사건의 전개와 결말은 모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움직이는 스위스 시계와도 같다. 스위스 시계의 시침, 분침, 초침처럼 비극 작품을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비극적인 인간을 만드는가.
6. 하마르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원동력을 주인공의 성격에서 찾았다. 주인공의 어떤 경향이 모든 사건을 촉발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단초라는 것이다. 그는 이 단초를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다.
‘하마르티아’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가다’ ‘길을 잃고 헤매다’이다. 하마르티아는 주인공이 지닌 성격으로, 행운을 불운으로 악화시키는 주인공의 흠이다. 이 흠의 원인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지적 한계인 무식, 순간적 판단의 실수, 자신의 고유한 성격에서 나오는 실수이자 죄(罪)다. 하마르티아는 비극적인 결말을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주인공의 내적인 에토스(ethos)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한 나머지 갈림길에서 ‘낯선 자’인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다.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다. 그의 판단 실수는 비극이라는 커다란 기계를 작동시킨다. 마치 브레이크 페달이 고장 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유도한 자동차의 결함과 같은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하마르티아 탓에 파국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관객들은 무대 위의 오이디푸스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공포와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사건들과는 달리, 비극에서는 관객들이 비극의 개연성으로부터 충격을 받는다. 자신도 모르게 오이디푸스처럼 괴로워하고 울기도 한다.
7. 카타르시스
관객은 자신이 주인공과 같은 비극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런 비극적인 오이디푸스를 보고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객의 감정을 ‘조산(早産)으로 낳은 아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산모의 감정’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와 연민을 느낀 관객이 마침내 도달하는 감정적 평원을 ‘카타르시스’라고 일컫는다.
카타르시스를 번역할 만한 적당한 단어는 없다. 우리가 지금 막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오이디푸스 렉스’ 비극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암울하고 침잠하다. 무대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상하리만큼 감정적으로 고양되고 평온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평온한 상태, 즉 그 끔찍한 사건이 적어도 이 시간에 내게 일어나진 않으리라는 안도감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한다.
그리스어 ‘카타르시스’는 보통 ‘정화’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의미는 ‘공포라는 감정에서 벗어나 마음속에서 그것이 제거된 상태’다. 그것은 마치 몸속에서 불순물을 빼내기 위해 약을 먹고 그 불순물을 제거한 후 갖는 안도감이다.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렉스’를 무대에 올린 지 250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우리도 그 작품을 보고 나면 똑같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이건 마술이다. ‘오이디푸스 렉스’에는, 아테네에 우뚝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성화처럼, 우리 안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 심연에서 샘솟는 순수한 눈물, 바로 그것을 선사하는 숭고한 아름다움이 있다. 인간의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방대하게 늘어나고 있지만, 자신을 찾아보거나 생각해본 적 없는 우리에게 이 작품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비극은 인간의 가장 숭고한 예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