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韓國 古代 建國神話’ 연구의 동향과 과제

rainbow3 2020. 2. 14. 11:52


‘韓國 古代 建國神話’ 연구의 동향과 과제


文 昌 魯*



목 차

1. 논의의 방향

2. 인식의 변천

3. 연구 동향과 쟁점

   (1) 식민사학의 전개와 극복

   (2) 역사적 실상의 복원 노력

4. 앞으로의 과제



국문초록


神話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집단 기억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을 내포하지만, 신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建國神話의 전승 자료에 관한 역사적 탐색은 그 원형을 복원하고 그것을 통한 초기국가의 형성과 사회상에 접근하려는 노력으로 전개되었다. 실제로 건국신화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初期王系의 변화와 결부시키면서 건국의 주체 세력과 그 계통을 해명하려는 작업으로 이어졌으며, 건국신화를 만들어내고 전승시켰던 고대인들의 세계관에까지 관심의 영역이 확대․심화되었다. 그리하여 건국신화는 初期國家의 실상에 대한 접근뿐 아니라 주변과의 문화 전파 및 교류 양상 등 그 계통성을 추정하는 실마리로 기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건국신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제의는 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게 되므로, 건국신화와 祭儀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한국 고대의 국가 및 지배 권력의 기원과 정치적 목적의식 등을 해명하는데 자주 활용되어 왔다.


건국신화에 대한 연구가 보다 충실하려면 지금까지 이루어진 구체적이고 개별적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상호 비교․분석을 통한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의 특수한 문화양상에서 내재되어 있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면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접근이라 하겠다. 하나의 건국신화는 그것이 독자적으로 형성․전승되기 보다는 한국 고대의 문화와 사회구조 속에서 다른 건국 신화와 서로 얽히면서 전승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화와 제의의 상징을 그 문화 속에서 해석하는 노력과 함께 그것을 배태한 사회생활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앞으로 종교학 내지 신화학적인 접근에 보다 유의하면서 비슷한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의 건국신화와의 비교․분석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 이후 각국의 建國始祖에 대한 인식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후대의 자료에 그 편린이 어떻게 남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무덤의 벽화나 제사 유적 및 청동 제기 등의 유물이나 유적 자료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1. 논의의 방향


일반적으로 神話의 사전적 정의는 우주의 기원이나 태초에 일어났던 일들, 민족의 시원 등과 관련된 신성한 이야기라고 규정된다.1) 신화는 모든 사물의 기원을 신비적․초경험적인 논리에 기반을 두고 우리에게 전승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 특히 신화는 객관적 세계를 묘사하기 보다는 고대인들의 궁극적 관심이나 종교적 사실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자연 고대인들이 신화를 통해서 표현하려는 내적인 의미를 중요하게 보았다.3)
사실 ‘神話’는 상상과 허구를 포함해 전승되는 이야기로 인식된다. 이에 비하여, ‘歷史’는 사실과 이성의 영역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서술을 추구한다. 때문에 신화와 역사 사이에는 일견 간극이 커 보이기도 하지만, 양자는 과거에 대한 인간의 기억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서로 맞물려 공유할 수 있는 부분 또한 적지 않다.4)

이러한 점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전승되는 신화와 역사는 그것을 영위해갔던 인간과 사회의 현재 뿐 아니라, 미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특정 왕계의 始祖傳承을 비롯한 한국 고대의 건국신화는 그 내용이 비교적 소략하고 단편적으로 전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史書에 실려 있어 신화와 역사가 표리 관계에 있음을 알려 준다. 신화를 구성하는 주요 내용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비일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판단하지만, 신화가 전승된 이야기 체계라고 할 때, 당시 그것을 전승하는 입장에서는 신화를 神聖하고도 진실된 것으로 인식하였다고 보았다.5)

곧 건국신화는 신화에서 역사로의 전환점에 자리한 것으로 이해하며, 종교사적인 관점에서 신화와 역사를 직결하는 중개적인 위치에 있다고 이해된다.


신화의 모습과 내용은 한번 만들어진 뒤에 그대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하며 기록되는 시기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의 상황을 반영한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는 고조선을 비롯한 삼국의 건국신화가 실려 있는데, 현전하는 건국신화 또한 그것이 성립할 당시의 원초적인 모습과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 건국 신화는 만들어지던 단계에서 문헌에 수록되기 보다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거쳐 구전되다가 일정한 시기에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식과 윤색을 더하면서 본래의 모습이 변형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6)

실제로 고조선의 단군신화와 부여의 동명신화 뿐 아니라, 고구려의 주몽신화를 비롯한 삼국의 건국신화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내용이나 구성요소에서 다양하게 변화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대의 건국신화는 후대에 옮겨 적거나 다시 기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당대의 정치․ 사회상이나 윤리관 등에 의해서 건국신화의 내용과 요소가 첨삭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1) 신화의 사전적 의미는 “우주의 기원, 초자연 존재의 계보, 민족의 시원 등과 관련된 신에 대한 서사적 이야기”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신화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적 교리 및 의례의 언어적 진술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고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徐永大, 「檀君神話의 意味와 기능」, 『韓國古代 神觀念의 社會的 意味』,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1, 127쪽.
3) 柳東植, 「始祖神話의 構造」, 『韓國巫敎의 歷史와 構造』,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7,28쪽.

4) 李有鎭, 「끊임없는 담론-신화의 역사화, 역사의 신화화」, 『中國語文學論集』 24, 中國語文學硏究會, 2003, 518쪽.
5) 하정현, 「建國神話의 연구동향 및 과제-三國遺事의 紀異編을 중심으로」, 『한국종교연구회회보』3, 한국종교문화연구회, 1991, 31쪽.
6) 李鍾泰, 「三國時代의 ‘始祖’ 認識과 그 變遷」, 國民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6, 171쪽.



건국신화에서는 주로 개국시조의 신성성을 부각하는 면과 함께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7) 한국 고대의 건국신화 역시 그것이 실존한 국가의 창업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신화성과 역사성이 공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건국신화로 가장 오래된 「檀君古記」의 경우에도 순수한 신화의 부분과 조촐한 역사 서술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8)

이처럼 건국신화는 인간 세계의 일상과 현실을 넘어서는 비현실적이고 신비한 내용을 담은 신화적인 요소는 물론,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관련된 역사적인 내용도 포함하는 복합적인 구성 요소를 갖는다.
다만 건국신화로서 「단군고기」는 고조선의 건국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하기 힘든 것으로 상정할 수 있으므로, 신화학의 도움이나 역사적 배경등을 고려하면서 그와 같은 내용이 신화로 전승된 까닭을 해명하고, 역사적인 발전 속에서 그 의의를 찾아보려는 노력으로 수렴되었다.9)


일찍이 역사적 입장에서 한국 고대의 건국신화에 접근한 崔南善은 「朝鮮의 神話」를 논급하는 첫머리에서 神話는 고대인들의 종교이자 철학이요 역사라고 하면서, 인류의 역사는 모두 신화로써 시작하기 때문에 신화는 인류의 가장 오랜 역사가 된다고 설파하였다.10) 실제로 그는 東西를 막론하고 上古시대 인류의 역사는 대체로 신화 형식으로 전해졌으며, 그 까닭은 인간 생활이 아직 원시 문화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단계에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조차 자연 현상의 하나로 인식하고, 그것을 神話化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신화에서 역사로의 이행은 인간 생활이 원시 문화에서 벗어나 문명의 단계로 비약하면서 대두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11) 그리하여 신화에서 역사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대면하게 되는 建國神話는 대부분 고대 국가의 성립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국가기원신화로 받아들였다.


사실 시대적 산물로서의 신화는 바로 고대 사회에서 그것을 형성시킨 집단의 공동체적인 생활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12) 집단의 사회적 경험을 객관화한 이야기로 상정할 수 있다. 특히 한국 고대의 국가들은 건국신화를 통하여 자국의 기원을 전하면서 그 정체성을 확인하였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국가의 기원을 전하는 건국신화는 그것을 배태한 집단의 역사적 산물이자 역사적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해당 사회집단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 뿐 아니라 종교 신앙 및 儀禮 등을 해명할 수 있는 유효한 통로로 접근할 수 있다.13)


선사시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많은 신화를 만들고 전승했겠지만, 그것이 문헌에 실려 현전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초기국가단계에 형성되었던 ‘건국신화’들로 본다.14) 대체로 건국신화(Foundation myth)는 종말론적 신화(Eschatological myth)와 함께 정치신화(Political myth)의 한 유형으로 분류된다.15)

실제로 정치신화란 인류 역사에 있어 비교적 문명화된 사회에 출현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정치사회가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신화로 이해된다. 따라서 건국신화는 건국을 주도해갔던 지배 세력이 국가의 기원 및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성립․형성했던 경우가 많기 때문에,16) 다른 신화와 비교해 볼 때에 상대적으로 역사성과 정치성이 짙은 점을 꼽을 수 있다.


건국신화는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건국하였고, 그 나라를 세운 행위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알리려는 신화이기 때문에, 건국의 주인공이 가장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다.17) 한국 고대의 건국신화 역시 대체로 始祖王의 신성한 탄생에서 건국의 기원을 찾았다. 물론 신성성과 실제성이 혼재된 건국신화는 제의, 곧 국가 제사인 祭天儀禮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18) 자연 건국신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제의는 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건국신화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주로 한국 고대의 국가 및 지배 권력의 기원과 정치적 목적의식 등을 해명하는 데 자주 활용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전개된 한국 고대의 건국신화에 대한 인식의 변천과 역사적 접근 방향을 가늠하면서 앞으로의 과제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곧 기왕의 주요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건국신화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 그 기능은 무엇이었는가를 염두에 두고 건국신화에 대한 바람직한 역사적 이해 방향을 가늠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신화에서 역사로 전환되는 지점에 자리한 건국신화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역사학방면에서는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확인한 뒤에, 건국신화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의 흐름을 일별하려고 한다.

그런 다음 근대 이후 日帝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주의 사학의 왜곡된 연구 실상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광복 이후 건국신화를 통해 역사적 실상의 복원을 추구했던 주요 연구 성과들을 검토하면서, 향후 한국 고대의 건국신화에 대한 이해방향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7) 건국신화의 사전적 정의는 “나라를 세우게 된 내력에 대한 신화로서, 대부분 신의 의지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고 더러는 그 건국사업 도중에 天佑神助의 役事가 수반하곤 하는데, 그 대부분이 특정의 王家나 首長家의 유래를 말한 이야기이며 그 창업자가 시조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1998).
8) 단군신화와 관련하여 현전하는 最古의 기록인 『삼국유사』紀異篇에는 고조선에 대하여 『魏書』․「古記」․「唐裵矩傳」 등의 전승 자료를 인용하였다. 그 가운데 「古記」의 기록은 주로 단군신화를 서술하고 있으며, 일부 내용은 『魏書』․「唐裵矩傳」의 기록과 함께 조촐한 역사 기록으로 이해된다(金杜珍, 「檀君古記의 이해방향」, 『韓國學論叢』 5, 1983; 『韓國 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一潮閣, 1999, 9~15쪽).
9) 李基白, 「檀君神話의 問題點」, 『韓國古代史論』(探究新書 75), 探究堂, 1975; 『檀君神話論集』, 새문社, 1988, 69쪽.
10) 崔南善, 「朝鮮의 神話」, ≪每日申報≫, 朝鮮總督府, 1939년 2월 16일~3월 13일; 『조선의 신화와 설화』, 弘盛社, 1986, 7~8쪽에서

神話란 것은 原始時代의 未開한 사람들이 그네의 지식 정도와 상상력으로써 천지 만물과 인간 만사에 대하여
그 내력과 성질을 설명한 이야기인데, 모든 것이 대개 神靈의 활동을 말미암아 생겼다고 말하므로 이 특점을 취하여 그것들을 신화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신화는 곧 원시 인민의 종교요, 철학이요, 과학이요, 예술이요, 역사입니다.

人類의 역사는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모두 다 신화로써 시작합니다. 어느 국민의 역사든지 그 初頭에 적혀 있는 사실은 죄다 神話요, … 신화를 제쳐 놓고 인류의 最古 歷史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11) 노명식, 「‘알기 위한 역사’에서 ‘살기 위한 역사’로」, 『21세기 한반도의 세계사적 전망』, 책과함께, 2013, 16쪽.
12) 神話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집단적인 혹은 공동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을 영위하는 사회집단의 정체성을 제시해 주기도 하며, 또한 그것의 생명력은 定形性과 定期性을 갖춘 의례를 통해서 발휘된다고 보았다(나희라, 「신라의 건국신화와 의례」, 『韓國古代史硏究』39, 2005, 57쪽).
13) 나희라, 앞의 논문, 2005, 58쪽.
14) 나희라, 「신화와 민속」, 『한국역사민속학강의』 1, 민속원, 2010, 61~62쪽.

15) Henry Tudor, Political Myth, 1972, Paul Mall Press ; 송기복 옮김, 『정치신화 』, 삼문, 1994, 119~120쪽에서 “정치신화(Political myth)는 바로 정치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정치신화들은 모두 건국신화(Foundation myth)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
16) Ernst Cassirer, The Myth of the State, 1946, Yale University Press ; 최명관 옮김, 『국가의 신화』, 서광사, 1988, 46~47쪽.
17) 조현설, 「한국 건국 신화의 형성과 재편」, 『동아시아 건국 신화의 역사와 논리』,문학과지성사, 2003, 202쪽.
18) 崔光植, 「고대의 신화와 제의」, 『한국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46~47쪽.



2. 인식의 변천


일찍이 一然이 편찬한 『三國遺事』에는 단군신화를 비롯한 삼국의 건국신화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일연이 지닌 神異的 역사관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19) 일연은 「紀異」편을 엮은 취지를 밝힌『삼국유사』의 서문에서 ‘怪力亂神’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전통적 유교주의 역사관을 언급하면서도, 삼국의 시조 탄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신이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무릇 옛날 聖人들이 바야흐로 禮樂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仁義로써 교화를 펼치고자 하는데 있어 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는 符命을 받고 圖籙을 얻게 된다고 하여 반드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일이 있는 법이다. 이렇게 된 연후에야 큰 변화를 타고 군왕의 지위를 장악하여 제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黃河에서는 圖가 나왔고 洛水에서는 書가 나와서, 聖人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神母를 둘러싸 伏羲를 낳았고 龍이 女登에 감응하여 神農을 낳았으며, 皇娥가 窮桑의 들에서 노닐 때에 자칭 白帝의 아들이라는 神童과 交通하여 小昊를 낳았고 簡狄이 알을 삼키고 契을 낳았으며, 姜嫄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弃를 낳았고 堯는 임신 14달 만에 태어났으며, 큰 연못에서 龍과 交合하여 沛公(漢高祖)을 낳았으니 이로부터 그 뒤의 일을 어찌 모두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즉 三國의 始祖가 모두 다 神異한 데에서 나온 것을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것이 紀異를 모든 편의 첫머리로 삼는 까닭이며, 그 뜻도 바로 여기에 있다.20)"



일연은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태도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고대 제왕의 탄생과 같은 중대한 일에는 일반적인 출생과 달리 남다른 현상이 있다고 전제하였다. 실제로 무지개가 神母를 둘러싸서 탄생한 복희씨, 龍에 감응하여 태어난 신농씨, 그리고 큰 연못에서 용과 교합하여 태어난 패공 등 일련의 중국 사례를 들어 삼국 시조의 신이한 탄생 또한 괴이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연은 고대사회에서 제왕의 탄생에는 일상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름’ 이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자연 현상인 무지개나 용이라는 神格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았다.21) 그는 神異한 일들을 기록한 「紀異」편에서 고조선을 비롯한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일반민과 구별되는 제왕들의 신이한 탄생담을 수용하였고, 삼국의 시조가 제왕으로서 지배력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던 것으로 인식하였다.

특히 일연은 『三國遺事』의 첫째 편에 「기이」편을 설정하여 삼국의 시조에 대한 신이한 인식이 타당함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시조의 유래와 탄생에 신성성을 부여함으로써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엿볼 수 있다.22)


한편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국 고대의 건국신화에 대한 인식은 유교적 사관이 정립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사서인 『?東國通鑑?(1485)의 다음 기록을 통해서 건국신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23)


"唐․虞로부터 夏․商에 이르러서는 세상 인정이 점차 야박해져서 人君이 나라를 오래도록 누린 자가 5,60년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檀君만이 홀로 1,048년의 수명으로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단 말인가? 그 말이 꾸며낸 것임을 알겠다. … 공자가 詩書를 정리할 적에 唐․虞에서 끊어서 시작하였으니, 당․우 이후로는 이미 괴이한 일이 없거니와, 삼국시조의 출생이 漢나라와 같은 시대인데, 어찌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閼英과 脫解가 태어날 적에도 또한 모두 괴이하고 정상이 아니니, 어찌 그 처음 海東의 사람들이 순박하고 무지하여 간혹 괴이한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믿고 신성하게 여겨서, 후세에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리 괴이함이 많을 수 있단 말인가?"


고조선에서 고려에 이르는 통사인 『동국통감』은 철저한 유교주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삼국의 시조전승에 대한 내용을 비판하고 있다. 곧 단군의 수명이 지나치게 긴 점을 거론하면서 단군전승이 후대에 꾸며진 이야기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삼국 시조의 탄생 시기가 중국 漢나라와 같다는 사실도 건국시조의 신이한 탄생담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단군을 비롯한 주몽과 혁거세, 수로 등은 神的인 존재라기보다는 개국시조이자 실존 인물로서 인식하였다.24)


조선 후기 近畿南人 계열의 학문적 종장으로 평가받는 李瀷(1681~1763)은 하나의 서적만을 취신하기 보다는 ‘歷考前書’와 ‘旁證諸書’를 바탕으로 철저한 교감과 고증을 강조하였다.25) 이익은 종래 답습 전승되어온 단군신화를 위시한 삼국의 시조전승 뿐 아니라 國史에 전하는 여러 기록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26) 실제로 이익은 실증되지 않은 고대의 전설이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단군시대는 인정하면서도 환인과 환웅에 관한 전설을 ‘荒誕可棄’ 또는 ‘荒遠難徵’한 것으로 부정하였다.27)

또한 난생설 등의 괴이한 탄생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曲說異論이 세상에 행해지게 되므로 그러한 것은 결코 취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특히 삼국의 시조탄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하였다.


"太古시대에는 반드시 먼저 천지가 있고 그 뒤에 사람이 있게 되었을 것이다. 천지 사이에는 본래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으므로, 맨 처음 아무것도 없었을 때는, 氣化로 생겨났다는 것이 그 이치로 보아 마땅히 그러했을 것이지만, 사람이 이미 생겨난 후에는 形化로 연이어지게 되는데, 어찌 다시 기화로 형성되는 자가 있겠는가? … 人文은 미비하고 풍속은 귀신을 믿었기 때문에 지모가 있는 선비가 어리석은 백성을 우롱하려면 반드시 무슨 형식을 만들어서 모두 숭배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렇게해서 사람이 ‘알에서도 나고 궤에서도 난다.’는 것으로써 계속 백성을 우롱하여 다 믿고 높이도록 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정하기를 자기의 장중에 있는 것처럼 마음대로 하였다. 이러한 諢言․稗說의 잠꼬대 같은 헛소리가 세상에 전하는 데 사기를 짓는 자가 지식이 없어서 이런 말을 모아 기록해 놓았으니,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니겠는가?"


李瀷은 건국시조의 신이한 탄생담이란 어리석은 백성을 우롱하여 모두 숭배하도록 만든 이야기 형식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내용이 사서에 전하는 것은 바로 후대 史家의 사료 취사에 미흡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건국 시조의 난생을 비롯한 탄생담을 배격하면서 역사가는 史書를 저술할 때에 사료의 취사선택에 유의할 것을 당부하였다.28)


이익의 학맥을 이은 安鼎福(1712~1791)은 합리적인 사실 고증과 폭넓은 인용 사서의 수집과 활용을 바탕으로 『東史綱目』을 편찬하였다. 안정복 역시 이익의 건국신화에 대한 인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怪說辨證」을 통하여 보다 철저하게 비판하였다.29) 그는 ‘怪說’에 해당하는 건국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앞서 유형원(1622~1673)의 「東史怪說辨」에서 언급했던 ‘조작된 誣說을 모두 역사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견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30) 실제로 안정복은 ‘檀君古記’에 대하여 「괴설변증」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말은 너무 허황하여 변증할 수 없으니, 『通鑑』에서 생략한 것이 옳다. 무릇 단군은 우리나라의 맨 처음 임금으로서 그가 반드시 신성한 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임금으로 삼았을 것이다.

물론 옛날 신성한 사람이 탄생할 때에는 진실로 여느 사람과 달랐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하도록 무리한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대개 『三國遺事』는 고려의 승려가 지은 것이요, 『古記』또한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俚俗의 호칭에서 나와 고려 때 이루어졌으니, 역시 중이 편집일 것이다.

그러므로 허황한 말을 부질없이 많이 하여 그 인명과 지명이 佛經에서 많이 나왔다. 세상에서 일러오는 이른바 ‘桓因帝釋’ 역시 『法華經』에서 나왔는가 하면, 그밖에 이른바 阿蘭佛․迦葉原․多婆羅國․阿踰陁國의 등도 모두 중의 말이다. 신라나 고려시대는 불교를 존숭했기 때문에 그 폐단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역사를 쓰는 사람이 그 기록할 만한 사실이 없음을 민망히 여겨 심지어는 이와 같은 것을 정사에 엮어서, 한 구역 어진 나라를 모두 괴이한 무리로 만들었으니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19) 李基白, 「三國遺事의 史學史的 意義」, 『震檀學報』36, 1973, 162~178쪽.

20) 『三國遺事』卷1 紀異1.
21) 하정현, 「신이, 신화 그리고 역사-『삼국유사』에 나타난 神異 인식의 의미를 중심으로」, 『신화 신화담론 신화 만들기』(종교문화비평총서2), 모시는사람들, 2013,194~195쪽.
22) 김병곤, 「신라 시조 인식의 변천과 五廟制의 太祖大王에 대한 시론」, 『삼국유사 기이편의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204쪽.
23) 『東國通鑑』은 조선 초기에 발달된 역사 정리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서로,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元典처럼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사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 책은 철저한 유교주의를 표방하고 있어서 이단인 불교는 물론, 풍수지리설에 대한 신봉 자세도 크게 비판하고 있다고 하였다(鄭杜熙, 「朝鮮前期의 歷史認識」, 『韓國史學史의 硏究』, 乙酉文化社, 1985, 120~121쪽).

24) 朴光用, 「檀君認識의 歷史的 變遷」, 『檀君 그 이해와 자료』, 서울대학교출판부,1994, 161쪽.
25) 『星湖先生文集』 卷25, 書, 答安百順(乙亥).
26) 『星湖僿說』第20卷, 經史門, 氣化에서 “三國이 일어난 것은 西漢 말기였고, 우리나라도 역시 檀箕 때부터 전해 온 세대가 오래 되었는데, 三韓이 솥발처럼 서서 이리저리 서로 변해진 그 시대에 氣化로 생겨났다는 인물들이 어찌 그토록 많았을까? 이러므로 나는 먼 조상에 대한 神聖하다는 이야기도 다 믿을 필요가 없고, 國史에 전하는 허황하고 괴상한 말도 역시 없애 버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27) 『星湖先生全集』 卷26, 書, 答安百順(丙子)에서 “而舊史云神人降太白山神檀樹下生子曰檀君…其說皆未可信 其桓雄桓因等荒誕可棄”라고 하여, 옛 사서에 전하는 檀君과 관련 설화는 모두 믿을 수 없으며 桓雄과 桓因 역시 허망하여 취할 바가 못 된다고 하였다.
28) 『星湖僿說』第22卷, 經史門, 高金二姓에서 “지금은 비록 온갖 서적이 다 갖춰진 후라 할지라도 만약 수백 년 전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면, 민간에서 아무렇게나 전하는 말에 따라 외람한 붓으로 허황하게 쓴다면 의논이 모두 잘못으로 되어 버릴 것이다. 하물며 삼국이 처음으로 일어날 즈음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붓을 잡는 자로서는 마땅히 取捨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29) 『東史綱目』 附錄 上卷 中, 怪說辨證에서 “살피건대 우리나라에는 고대의 怪說이 매우 많았다. 역사를 쓰는 사람들은 前代의 기록이 미비하여 일컬을 만한 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서, 常道에 어긋나는 속설을 취하여 正史에 편입해서 마치 실지로 그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하였기에, 이제 모두를 刊定하여 ‘怪說辨證’을 짓는다”고 하였다.
30) 李基白, 「順菴 安鼎福의 合理主義的 史實 考證」, 『韓國實學硏究』 創刊號, 韓國實學學會, 1999; 『韓國傳統文化論』, 一潮閣, 2002, 231~233쪽.



안정복은 최초의 군왕으로서 단군의 출생이 뭇사람과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단군고기의 신화적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편집한 점에 대해서는 단호히 배격하였다. 특히 기록에 사용된 ‘桓因帝釋’을 비롯하여 阿蘭佛․迦葉原 등의 불교식 용어를 거론하면서, 신라나 고려가 불교를 존숭하였기 때문에 변증할 수 없을 정도로 허황된 신화를 전승하였다고 비판하였다.31)

또한 부여의 金蛙를 위시하여 신라의 박혁거세․석탈해․알영, 가야의 수로와 허황후, 그리고 고구려의 주몽 등의 전승 역시 허황한 사실이기 때문에, 기록 그대로 역사적 사실에 편입할 수 없다고 하였다.32)

다만 건국신화의 내용 가운데 허구적인 부분을 떼어낸다면 일부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33)


안정복과 더불어 성호의 학맥을 이었던 丁若鏞(1762~1836) 또한 「疆域考」를 통하여 고대의 건국신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허황하고 거짓된 설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세상의 시비를 가리고 혐의를 결판 지으려면 마땅히 그 본말을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역사책은 모두 漢․魏晉의 여러 역사에 의거하여 서로 이었으며, 간혹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기록들을 모았으나 이는 모두 허황되고 거짓되어 근거 없는 말이니, 알이 깨지고 궤가 뜬다거나 닭이 울고 까치가 짖는다는 상스러운 말들뿐이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 믿을만한 역사를 멀리하고 거리의 야담을 내세우니, 어찌 근본을 살피는 일이라 하겠는가?34)

34) 『與猶堂全書』第6集, 地理1, 疆域考, 弁辰考에서 “鏞案天下之辨是非決嫌疑者 當先揆本末 … 故我邦史冊 皆據漢魏晉諸史 點綴成文 其或收拾於本國之傳記者 皆虛荒誕妄 不根之說 卵剖櫝汎 鷄鳴鵲噪 下俚詿言 可愧之甚 今乃輕違中國之信史 自立委巷之野言 其可曰揆其本乎”라고 하였다.


"또한 高麗史에 보면 金榼, 金卵의 설이 있으나 망령되고 상스러워서 여기서는 모두 삭제한다. 漢書와 魏志에는 辰․弁韓의 왕이 모두 馬韓人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에 모두 실지로 들은 말이다. 진한의 昔脫解와 변한의 金首露가 모두 西韓계통 사람이지만, 후세에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마침내 틈이 생겨 신라 사람이 그 前代에 백제에게 天命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그 근본을 숨긴 것이다. … 또한 東國史略에 보면 6卵에 대한 설이 있으며 東國總目에는 수로왕의 형제 여섯 명이 나뉘어 6가야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 나오지만, 이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미루어 짐작해서 설을 만든 것으로 족히 증거를 삼을 수가 없다. … 살피건대 駕洛古記에 있는 6卵의 설은 비록 믿을 수 없지만 최치원의 정견 두 아들 이야기는 반드시 근거가 있다(원래 山神․天神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그 허황한 곳이다). 수로왕 형제가 나뉘어 세운 것은 비류, 온조의 사실과 꼭 같다.35)"

35) 『與猶堂全書』第6集, 地理2, 疆域考, 弁辰別考에서 “又按鄭史 有金榼金卵之說 妄誕鄙俚 今竝刪之 余謂漢史魏志 皆云辰韓弁辰之王 皆以馬韓人爲之 此當時之實聞也 辰韓之昔脫解 弁辰之金首露 皆係西韓之人 而新羅百濟後世 竟成仇隙 新羅之人 恥其前代受命百濟 諱其根本 …又按東史略 有六卵之說 而東國總目遂云 首露王兄弟六人 分作六伽倻之始祖 此皆後人推演爲說 不足徵也 … 鏞案駕洛古記 六卵之說 雖不可信 崔孤雲正見二子之說 必有所本(原有山神天神之說 此其荒誕處)首露王兄弟分立 必如沸流溫祚之事矣”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삼국유사』에 실린 金榼․金卵說話는 저잣거리의 이야기로 믿을 것이 못되며, 이러한 사실을 수록한 『고려사』역시 잘못된 일이므로 모두 삭제한다고 하였다. 곧 그는 시조탄생과 관련하여 신비한 요소가 있는 부분은 불신하여 단호하게 삭제하였다. 그리하여 석탈해와 김수로의 출생에 관한 금합․금란설화가 만들어진 까닭을 후세에 신라와 백제 사이에 틈이 생겨 신라인이 백제에게 受命한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근거로 『北史』新羅傳에 주목하여 신라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로부터 신라에 도망해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백제에 부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36) 비록 건국시조의 신성성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건국시조의 역사적 실체까지 모두 부정하지는 않았다.37)


정약용은 금합․금란설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이과 같은 신이한 탄생 전승이 성립되었던 역사적인 사실 내지는 그 배경에 대해서 탐색하였다.
특히 그는 수로왕의 기원에 대하여 최치원이 대가야의 시조 朱日과 금관국의 시조 靑裔가 同母兄弟라고 했던 말을 합리적인 근거로 삼으면서, 이를 백제의 비류와 온조가 分立했던 사실에 견주었다. 정약용은 가야의 건국신화에 관한 여러 이설 가운데 합리적인 기원을 선택하고, 그 내용 중에서 山神․天神과 같은 불합리한 요소를 걸러낼 뿐 아니라, 백제의 기원과 유사한 구조라는 점을 들어 건국신화의 합리적 접근을 모색하였다.


31) 『東國通鑑』이래로 『三國遺事』의 단군신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사서에서도 일관되게 확인된다. 『海東繹史』第2卷, 世紀2, 檀君朝鮮에서도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사책에서 말하는 단군에 대한 일은 모두가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단군이 맨 먼저 났으니 반드시 그 사람에게는 신성한
덕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에 신성한 사람이 태어남에는 참으로 일반 사람들보다 특이한 일이 있기는 하나, 어찌 이처럼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겠는가.

古記에 나오는 桓因이니 帝釋이니 하는 등의 말은 法華經에 나오는 말인바, 新羅와 高麗시대에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가 여러 차례 兵火를 겪어 祕藏되어 있었던 國史가 모두 불타 남아난 것이 없게 되고, 승려들이 기록한 것만이 암혈 속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이에 역사를 쓰는 자들이 기록할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나머지 간혹 이를 正史 속에 편찬해 넣었다. 그런데 세대가 오래될수록 그 말이 사실로 굳어져서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가 드디어는 仁賢의 나라인 우리나라를 말이 괴이한 나라로 만들고 말았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
32) 『東史綱目』 附錄 上卷 中, 怪說辨證.
33) 『東史綱目』第1上, 己卯年 朝鮮 箕子 元年에서 “내가 이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일체 취하지 않는 것을 그릇된 것을 답습하여 온 고루한 버릇을 씻어 버리고자 하는 까닭이다. 대저 先王의 制禮는 祀典이 가장 엄한 것이다. 이제 文化縣 九月山에 三聖祠가 있어, 勝國부터 本朝까지 桓因․桓雄․단군을 제사하는데, 단군을 제사하는 것은 워낙 마땅하거니와, 환인․환웅은 망설이지 말고 빨리 제거하여야 한다. ‘올바른 귀신이 아닌 것을 제사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안정복은 제사제도의 정리를 통해서 단군을 신화적 인물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인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본다(이건호, 「성호학파의 한국 건국신화 인식」, 『한국언어문화』 44, 한국언어문화학회, 2011, 345쪽).

36) 『與猶堂全書』第6集, 地理2, 疆域考, 弁辰別考에서 “北史新羅傳云 新羅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라고 하였다.
37) 이건호, 앞의 논문, 2011, 332~333쪽.



3. 연구 동향과 쟁점


(1) 식민사학의 전개와 극복


『삼국유사』에 수록된 단군 관련 전승은 『위서』와 「고기」 등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이전의 문헌기록에서 그와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은 단군신화를 부정적으로 취급하였다. 일본학자들에 의해 전개된 건국신화 연구는 식민사학의 범주에서 이루어졌으며, 단군신화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거나 고려 말경에 조작된 것으로 전혀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하였다. 다음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三國遺事』에 “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桓因이…”라고 하였다. 단군의 이름을 王儉이라고 한 것은 평양의 옛 이름 王險의 險자를 사람 人변으로 바꾼 것이다. 이 전설은 불교가 동쪽으로 전파된 뒤에 중들이 날조한 망령된 이야기로서 조선의 古傳이 아닌 것은 한눈에 분명하다. … 오직 僧徒의 妄說을 역사상의 사실로 뽑아 쓴 것이다.38)"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는 단군신화가 예전부터 조선에 전해오던 이야기가 아니며, 고려 시대에 승려들이 날조한 망령된 이야기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역시 단군의 사적이 본래 佛說에 근거한 가공의 仙談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39)

곧 ‘古記’에 나오는 檀木은 산중에 나는 香木으로서 佛國의 牛頭栴檀에 비긴 것이며, 그 나무 아래 내려온 인연으로 단군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단군은 단향목의 정령이며 단군신화는 『華嚴經』․『智道論』․『正法念經』․ 『阿含經』등에 보이는 인도의 摩羅耶山과 그곳에 있는 우두전단에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고구려의 주몽신화를 부여 동명신화의 改作으로 보는가 하면, 백제의 비류․온조설화 역시 백제가 부여로부터 나왔던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만들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후대에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였다.40)


한편 단군신화의 부정론은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연구에 의해 보다 논리적이고 종합적으로 체계화되었는데,41) 그는 단군이 조선 민족의 본줄기와 무관하며, 단군신화는 고구려 계통의 개국신화라고 규정하였다. 다음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단군의 칭호와 현존의 전설은 고려 중엽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서, 그 주체는 古來의 地祇(神)가 불교, 도교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단군의 칭호는 도교적 칭호로서 평양 방면의 선인왕검에 부회된 것이다. 단군의 계통이 오래된 것이라는 厚意를 가지고 조사한다면 선인왕검은 어쩌면 낙랑, 대방의 韓民族이 모시는 신으로 통일된다고 생각되며, 그렇지 않으면 반도의 북변에서 겨우 제사가 끊이지 않은 고구려의 해모수를 제사지낸 것일 것이다. 본래 평양지방의 한 地神에 지나지 않으며 널리 행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緣起의 구성이 민족의 자존을 느끼게 한 시대의 사상에 적중하였기 때문에 서적에도 게재되기에 이르렀고 그 說이 행해진 것인데, 李朝에 이르러 개국의 神人으로서 官撰 사적의 첫 머리에 기재되면서 그 이야기가 전국에 유포되어 역사적 신인의 위치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단군은 단군으로서 안치된 것에 지나지 않고 그 종교적 신앙이 일어난 것은 현대의 일이다. 그리고 특히 주의할 것은 단군은 본래 부여, 고구려, 만주, 몽고 등을 포괄하는 퉁구스족 중에 부여의 신인으로서, 금일의 조선민족의 본체인 韓種族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부모 중 하나를 신으로 하고 다른 하나를 짐승 종류로 하는 전설은 불교적 장식과 도교적 영향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퉁구스족의 祖上神이 特有하는 것이다. 단군의 전신자인 선인왕검을 낙랑, 대방 漢人의 祀神에 통합하지 않고 고구려인이 모시는 해모수일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실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42)"


이마니시 류는 단군의 칭호와 단군신화를 고려 중엽 이후(인종~고종 연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으며, 단군은 예전부터 모시던 地神이 불교와 도교에 의해 윤색․조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곧 단군왕검은 본래 평양 지방의 성황신이었던 先人王儉에 부회된 것이며, 天符印을 비롯한 풍백․ 운사․우사를 거느리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상사를 주관했다는 기록은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천신과 곰을 부모로 해서 태어난 단군은 퉁구스족 중에 부여의 神人으로서, 부여의 시조 부루 및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버지인 解慕漱로 파악하였다.43)

이밖에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는 서구 신화학과 민족학 이론을 바탕으로 건국신화에 접근하여, 건국신화를 한국 고대문화의 산물이자 고대인의 실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44) 그는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고구려․신라․가야의 건국신화에 주목하면서 신화에 대한 인식과 신화자료의 폭을 확장시켰으나,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에 대한 남방 문화권설이나 타율성론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계가 지적된다.


이처럼 한국 고대의 신화를 중국 문화 내지는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후대에 조작되었다고 보았던 일본학자들의 단군신화 부정론은 한국사의 출발인 고조선의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한국사의 여명이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끝난다는 식민사관의 체계에 맞추려는 필요에 부응한 것이다.45)

또한 단군신화를 고구려 계통의 신화로 연결하여 남쪽의 韓種族과 무관하다는 입장은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 정책과 궤를 같이하며, 나아가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저를 불식하려는 목적이 작용하였다고 본다.


한편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육당 최남선 등 일제강점기에 국내학자들은 단군신화의 연구를 통하여 그 실재적 근거를 주장하면서 일본학자들의 견해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하는 건국신화 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기원 및 자존의식 고취를 추구하였다.46)

실제로 신채호는 한국고대사가 단군에서 시작하여 부여․고구려를 중심으로 계승되었다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여,47) 종래 논란이 많았던 기자․위만․ 삼한 등은 부수적인 존재로 처리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조선 후기 이래 고수되었던 한반도 중심의 ‘삼한정통론’ 및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단군-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인식과 ‘부여․고구려 主族論’ 중심의 한국 고대사 구성 체계를 수립해 한국 고대사의 활동 공간을 만주일대까지 확대하였다.


단재는 처음 『讀史新論』(1908)에서 만주를 주요 무대로 정복활동을 벌였던 ‘정복 영웅상으로서의 단군’을 강조하였다가, 『朝鮮上古文化史』(1910 년대 후반 추정)에서는 ‘자주문화의 상징으로 단군’을 부각하였으며, 『朝鮮上古史』(1931년 조선일보 연재)에서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존재로서의 단군’으로 인식하여,48) 시기별로 그의 단군 인식이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단군은 고조선의 신수두를 개창한 왕으로서 동북아 일대를 아우르는 영웅적 大酋長이었고, 종교적으로도 천신 혹은 태양신으로 비정되는 광명신을 섬길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로 파악하여, 일본학자들에 의해 그 존재가 부정되었던 단군은 물론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부각하였다.


이와 함께 단재는 건국신화의 신이한 내용 중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일정 부분 반영한 것으로 보았는데, 다음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或者는 「記錄을 너무 神話的이라 信據할 수 없다」하나 어느 나라이고 古代의 神話時代가 있어서 後世史家들이 그 神話 속에서 事實을 採取할 뿐이니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짓다」 「天이 阿蘭弗에게 降하였다」
「解慕漱가 五龍車를 타고 天에서 내리었다」한 말들은 다 神話이지만 解夫婁가 人家의 私生兒인 金蛙를 주워 太子를 삼음도 事實이요 解夫婁가 阿蘭弗의 神話에 託하여 遷都를 斷行함도 事實이요 解慕漱가 天帝子라 稱하

여 古都를 襲據함도 事實이니 總括하면 我北夫餘의 分立한 歷史上의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49)


38) 那珂通世, 「朝鮮古史考」, 『史學雜誌』 5-4, 史學會, 1894; 신종원 엮음, 『일본인들의 단군 연구』(동북아역사총서6),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165~166쪽.
39) 白鳥庫吉, 「檀君考」, 『學習院輔仁會雜誌』28, 1894; 신종원 엮음, 앞의 책, 2005,9~32쪽.
40) 李鍾泰, 앞의 논문, 1996, 4~5쪽.

41) 김두진, 「단군에 대한 연구의 역사」, 『한국사시민강좌』 27, 일조각, 2000, 83~84쪽.
42) 今西龍, 「檀君考」, 『靑丘學叢』1, 1929(『?朝鮮古史の硏究』?, 國書刊行會, 1971) ; 신종원 엮음, 앞의 책, 2005, 118~119쪽.

43) 今西龍의 단군신화에 대한 견해는 ‘앞서 불교와 도교에 의해서 구성된 것으로 파악하다가 뒷부분에서는 단군신화의 전통을 퉁구스족으로 연결하여 남쪽의 한족과의 연결을 부정하면서, 그것이 불교의 장식과 도교의 영향에 의해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하여,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주장’임을 지적하였다(홍기문, 「단군신화에 대한 역대의 각종의 태도」, 『조선신화연구』, 과학원 출판사,1964; 지양사, 1989, 195쪽).
44) 三品彰英은 『日鮮神話の硏究』(1943)․『神話と文化領域』(1948)․『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등의 연구를 통하여 건국신화의 내용 분석 뿐 아니라 古代祭政의 실상과 穀靈信仰․農耕儀禮의 양상 등을 탐색하여, 종래 신화에 대한 인식과 자료의 폭을 확대시켰다고 본다(李鍾泰, 앞의 논문, 1996, 5쪽)
45) 김두진, 앞의 논문, 2000, 84~85쪽.
46) 신채호와 정인보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역사적 시조로서 파악하여 그 역사적 실재성을 강조한데 비하여, 최남선은 단군을 역사 이전의 신화적 주인공으로 파악하면서 중국 문화와는 다른 동방 문화의 원천을 탐구하는 중요한 단서로 파악하였다(장석만, 「한국 신화담론의 등장」, 『신화 신화담론 신화 만들기』(종교문화비평총서2), 모시는사람들, 2013, 23~24쪽).
47) 李萬烈, 「丹齋 申采浩의 古代史認識 試考」, 『韓國史硏究』 15, 1977, 61~66쪽.
48) 李萬烈, 『丹齋 申采浩의 歷史學硏究』, 文學과知性社, 1990, 245~271쪽.

49) 申采浩, 『朝鮮上古史』, 鐘路書院, 1948; 『단재신채호전집』제1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318~319쪽.



단재는 일반적으로 고대의 신화시대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법이며, 후대의 史家들이 신화의 내용 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채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화적 요소를 토대로 단군 연구를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단재는 신화에 보이는 신이한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접근할 것을 피력하였다.


"櫝에서 나왔다 알로 깠다고 하는 神話는 古代人이 그 始祖의 出生을 神異하도록 粧飾한 神話이거니와 다만 六部三姓의 事蹟이 古代史의 原本이 아니요 後人의 增加와 刪節이 많음이 可惜하니 이를테면 朝鮮古史의 모든 人名地名이 처음에는 우리말로 짓고 吏讀字로 記하였으며 그 뒤에 漢文化가 盛行하면서 漢字로 改作하였나니 … 50)"


단재는 삼국의 시조전승 가운데 궤짝이나 알에서 태어난 신라 시조의 탄생 사실은 바로 고대인들이 그 출생을 신이하게 꾸몄던 신화로 보았다.
신라 시조의 전승은 시간이 흐르면서 후대인들에 의해 첨삭과 가필이 가해졌고, 마침내 한자로 기록되면서 개작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시조신화 속에 등장하는 고대의 인명과 지명에 대한 후대인의 개작 가능성을 지적하여, 기록 당시의 명칭에 대한 접근에 유의할 것을 당부하였다.51)


崔南善은 단군전승을 신화로 인정하고 학문적으로 근대적 방법론을 적용해 본격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연구자로 평가한다.52) 그는 인류학․민족학․종교사회학․신화학 등을 활용하여 연구 방법론을 다각화하면서, 신화에 반영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일본학자들의 단군 부정론을 논파한 「단군론」(1926)을 위시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탐색한 「兒時朝鮮」(1927), 『三國遺事』의 사료적 가치를 논증한 「三國遺事解題」(1927), 단군 연구의 인문과학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薩滿敎箚記」(1927), 그리고 「檀君神典의 古意」․「檀君神典에 들어있는 歷史素」․「民俗學上으로 보는 檀君王儉」․「檀君及其硏究」(이상 1928) 등의 다각적인 연구를 통해 단군연구에 집중하였다.53)

그의 연구 성과 중에 『三國遺事』의 사료적 가치 논증, 단군이 巫君이었다는 단군샤먼론, 단군기사의 토테미즘적 해석 등은 단군 연구의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한다.


최남선은 전통시대 유학 지식인이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고수되었던 단군전승에 대한 부정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실제로 그는 “그러나 요사이 日本의 學者는 壇君이라면 의례히 根據가 없으리라는 豫斷을 가진 듯이 덮어놓고 抹削하기에 힘을 써서 아울러 그 神話的 本質과 古傳說的 存立까지를 拒否하여 許多한 證據를 우리의 앞에 提出하였나니…”라고 지적하였다.54)

또한 那珂通世․白鳥庫吉 등 일본인 학자들의 실명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단군신화에 대한 부정적인 주장을 논박하였다.55)
육당은 현전하는 단군전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삼국유사?에 인용한 「고기」의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그 접근 방향을 제시하였다.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재료는 高麗 忠烈王 때의 僧 一然이 찬하고 그 제자 無極이 약간 가필한 『三國遺事』에 인용한 ‘古記’라는 것이다. … 이 古記는 얼른 보기에 일편의 連文이지마는 조금 주의를 더하면 본디 독립한 두 종류의 부자연스런 결합임을 볼 것이다. 곧 古記의 첫머리로부터 熊女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았다고 한 데까지는 純然한 신화에 속하는 것이요, 檀君王儉이 建都立國함으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는 전설적 역사의 草率한 敍述로 認할 것이다. 前者는 거의 전형적이라고 할 미개심리임에 대하여 後者는 아무 神怪한 내용을 포함하지 아니한 합리적 기록으로 되어 있다.56)"


"『三國遺事』의 檀君古記를 자세히 볼 것 같으면, 그 前段이라 할 단군이란 어른이 이 세상에 誕生하기까지의 기사는 순연히 신화에 속하는 것이요, 그 後段이 되는 세상에 나오신 단군이 조선이란 나라를 배포하셔서 평양·백악 등으로 도읍을 옮겨가면서 천 여 년 나라를 다스리시다가, 뒤에 阿斯達山에 들어가 神이 되셨다 하는 부분은 神話하고도 관계없는 전설적 歷史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명백히 하지 아니하면, 단군에 대한 議論이 점점 헝클어져서 정당하게 이해하기가 크게 어려워지는 것입니다.57)"


육당은 ‘檀君古記’가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로서 주목되며, 그 내용 면에서 본래 독립한 두 종류의 전승이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곧 ‘단군고기’ 전반부의 환웅 부분은 신화적인 내용으로 동북아 공통의 건국신화가 갖는 천강설화의 특징을 답습한 것이며, 후반부의 단군 부분은 고조선의 실제 역사적인 사실을 전한다고 보았다.58) 또한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와 곰의 존재를 토템으로 해석하고, 환웅과 웅녀의 결합은 환웅족과 웅녀족의 통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상정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광복 이후 신화 연구에도 영향을 끼쳐서,59) 오늘날 청동기문화와 연관하여 종족의 이동 및 결합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경향에 그 맥이 닿는 것으로 이해된다.


50) 申采浩, 앞의 책, 2007, 354~355쪽.
51) 申采浩, 앞의 책, 2007, 355쪽에서 “脫解王도 註에 一名 「吐解」라 하였은즉 脫解나 吐解는 다 「타해」 혹 「토해」로 讀할 것이며 그 語義는 무엇인지 모르나 당시의 俗語로 지은 名詞임은 明白하니 吐解는 原用의 吏讀字이며 脫解는 改作의 吏讀字이니 佛經에 「脫解」란 말이 있으므로 「吐解」의 意를 脫로 改作한 것인바 元來는 當時 俗語의 取音이요 脫出或解出의 義가 없거늘 金櫝에서 脫出한고로 名을 脫解라 하였다 함이 怪僧輩의 附會임을 斷言할 수 있음이요”라고 하여, 실제로 고대의 인명과 지명에 대한 후대인의 개작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52) 趙芝薰, 『韓國文化史序說』(探究新書3), 探究堂, 1964, 238쪽.
53) 이영화, 「1920년대 문화주의와 최남선의 조선학운동」, 『한국학연구』13,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4, 37~38쪽.
54) 崔南善, 「壇君論(三)」, ≪東亞日報≫ 1926년 3월 6일자, 1면.
55) 崔南善, 「壇君論(六)」, ≪東亞日報≫ 1926년 4월 23일자, 1면에서 “이렇게 那珂氏는 아가미를 따고 白鳥氏는 배알을 끄집어내어 兩大家의 손에 속속 들이가 다환하게 드러난 셈이 되며, 단군이란 이를 朝鮮史의 첫머리에 얹음은 점차 學者의 똑똑하지 못한 표적이 될 듯하고, 그렇다고 開國者를 없달 수 없으매 箕子로써 朝鮮의 國祖임을 그네의 東洋史에 적게 되고 箕子도 假想的 人物이라는 論이 白鳥氏를 말미암아서 提起된 뒤에는 史漢兩書의 朝鮮列傳을 그대로 衛滿이 朝鮮의 發見者 비스름한 地位를 가지는 奇觀을 呈하게 되었다. 혹시 西國의 史家가 四百年前에 日本에 航至하였던 ‘핀토’로써 日本의 發見者라 하는 것을 徹底히 遵守하여 그 以後의 事件만을 歷史的 事實로 대접한다하면 그것을 어떻게 우습다할는지 모르겠지만 日本人은 도리어 이웃집 朝鮮의 歷史에 이런 無識한 짓을 하려고 듦이 그 檀君抹削 後의 朝鮮史 敍述 套이다”라고 하였다.

56) 崔南善, 「檀君古記箋釋」, 『思想界』, 1954; 이은봉 편, 『檀君神話硏究』, 온누리,1986, 19~21쪽.
57) 崔南善, 「朝鮮의 神話」, 『每日新報』, 朝鮮總督府, 1939; 육당기념사업회 편, 『조선의 신화와 설화』, 弘盛社, 1986, 18쪽.
58) 이에 따라 「단군고기」에 대한 이해는 고조선 개국 이전부터 전승되었던 선인들의 생활 습속과 신앙 등이 응축된 신화의 부분, 그리고 고조선 개국 당시 지배씨족의 관념 체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원시적인 조촐한 역사 기술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그 이해 방향을 제시하였다(金杜珍, 「檀君古記의 理解方向」, 『韓國學論叢』 5, 國民大學校 韓國學硏究所, 1983;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一潮閣, 1999, 10~13쪽).
59) 崔南善은 「民俗學上으로 보는 檀君王儉向」(1928)을 통하여 단군 기사를 전설이나 설화가 아닌 신화로 보고 그 종교성과 역사성을 논구하였는데, 특히 환웅과 웅녀의 결혼을 종족의 통합으로 해석하여 현재까지 관련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이영화, 「崔南善 檀君論의 전개와 그 변화」, 『韓國史學史學報』 5, 2002, 26~27쪽).



한편 백남운은 『朝鮮社會經濟史』(1933)를 논급하면서 단군신화의 제재로 다루어진 자연 환경을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짐승이 많이 서식하였던 高山森林 지대로 추정하였다. 신화에 등장하는 쑥과 마늘, 그리고 환웅의 곡물 주관 등으로 보아, 미개 시대의 식용식물 재배 단계(庭園 栽培 ; Gartengewächse)를 벗어나 田野 耕作(Feldbau)․어로 중심의 생산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철기의 사용을 전제로 하는 전야 경작은 농업 공산체의 붕괴기이자 바로 문명기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60)

또한 곰과 호랑이가 함께 동굴에서 생활한 것은 여계 추장과 남계 추장의 병존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특히 웅녀에게서 출생한 단군의 존재는 남계 추장의 확립을 현실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백남운은 단군신화의 특질을 천손강림의 가상화이며 왕검의 신성화라고 규정하고, 단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檀君은 신화적으로는 天孫, 문자적으로는 天君, 종교적으로는 主祭者 등등 아무리 다면적인 특징을 부여하더라도, 실재하는 특정한 人格者가 아니고, 묘향산의 山神도 아니고, 檀木의 精靈도 아니고, 민족의 아버지도 아니며, 현실적으로는 농업공산사회의 붕괴기에 있어서의 원시귀족인 남계 酋長의 호칭에 불과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비판적인 방법론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조선민족의 발전사는 결코 단군신화에서 시작되어야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껏해야 우리 원시사회의 발전사에서 역사적인 지표에 불과하며, 농업공산체의 발전과정을 암시하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 계급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신화는 단순히 신화로서가 아니라 국가의식 또는 국민사상의 함양이라는 문화적 계획 아래 여러 모로 윤색되고 합리화되고 특질화되는 것이다. 우리 단군신화야말로 그 적합한 실례이므로 그 변형된 것을 더욱 점검하고 고찰하려고 한다."


백남운은 단군신화가 문헌상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건국신화로서 사료의 가치는 인정할 수 있으나, 이를 실재화하고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61) 다만 신화 속에 반영된 원시 상태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 ‘단군왕검’은 지배적․계급적 존칭이며 나라를 1500년 동안 다스렸다는 것은 추장 세습제를 표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단군은 특정한 인물이나 산신, 혹은 단목의 정령 내지 민족의 시조도 아니며, 그 실체는 농업 공산사회의 붕괴기에 대두했던 남계 추장의 칭호에 불과하며, 단군신화는 계급사회의 발전과 함께 단순히 신화로서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윤색되고 변형되어 갔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60)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 改造社, 1933, 21~22쪽.

61) 이기동, 「북한에서의 단군연구와 그 숭앙운동」, 『한국사시민강좌』27, 일조각, 2000, 105~106쪽.



(2) 역사적 실상의 복원 노력


일제 시기 식민사학의 목적이 식민통치의 역사적 정당화에 있었기 때문에, 광복을 맞이한 한국 고대사학계의 당면 과제는 식민사학의 청산, 곧 왜곡된 古代史像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자연 광복 이후 국내학계의 건국신화에 대한 연구는 한동안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 학자들의 부정과 배제의 식민사학 논리를 극복, 해소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광복 직후 일제시기 이래의 연구들이 개설서와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가운데, 먼저 고고학적인 접근을 통해 단군신화를 새롭게 해석한 金載元의 『檀君神話의 新硏究』는 주목되는 성과이다. 그는 문헌 기록과 함께 청동기시대의 유물 검토를 바탕으로 단군신화를 구성하는 사상적 배경을 탐색하여, 그 근간은 도교의 신선 사상이지만 중국 고유의 창세 사상이 혼입되거나 북방계 샤먼교의 영향도 받았다고 하였다.62)

또한 단군신화를 무씨사당 화상석과 비교하여 단군신화가 『삼국유사』의 기록보다 약 1,000여 년이 앞서는 시기에 동북아는 물론 중국 산둥 반도까지 산재하여 전승된 창세신화였다고 본다. 그리하여 일본학자들의 단군 부정론을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고대 동이족의 분포지역을 추정하는데 방증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63)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는 경향이 학계 일각에 남아있다.


손진태는 민속자료에 대한 폭 넓은 식견과 서구의 인류학 이론을 바탕으로 건국신화의 실상을 해명하는 데 노력하였다.64) 일찍이 그는 신화 속에 보이는 山神의 性은 본래 여성이었으며, 사회가 발전하면서 가부장권이 강화됨에 따라 夫婦神으로 대두하였고, 마침내 여신이 남신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였다.65)

또한 『삼국유사』에 수록된 한국 고대의 신화를 사회사적으로 접근했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곰․닭 등의 토템사상과 고구려 시조신화에 보이는 太陽祖先思想에 주목하였다.66) 특히 그는 「檀君神話에 表現된 思想의 特色」을 언급하면서 단군신화를 조선족이 소유하였던 유구한 전통의 시조 전설로 보고, 거기에 담겨 있는 원시적인 사상으로 토템 사상, 산신 사상, 山頂의 神壇(서낭당) 숭배, 靈艾․神蒜思想, 禁忌 사상, 天神至高 사상, 그리고 건국시조의 신이성과 위대성을 과시하려는 사상 등을 특색으로 꼽았다.67)


한편 이병도는 단군신화를 비롯한 고대 건국신화의 분석을 통하여 사회사적 측면에서 토착신앙을 천착해 밝혔는데,68) 고대사회의 개국시조에 관한 유래 및 출생 설화를 분석하여 (1)天神族(桓雄 說話․北夫餘 解慕漱傳說), (2)地神族(西述聖母 說話 및 濟州道 三聖 說話), (3)天地兩神族(檀君 및 大加耶 始祖 傳說 등), (4)外來族(箕子東來說․昔脫解 傳說 등), (5)卵生說(朱蒙․赫居世․昔脫解․閼智․首露 傳說 등, 이 중에는 (1)(2)(3)과 공통되는 것도 있음)등으로 유형화하였다.


62) 金載元, 『檀君神話의 神硏究』, 正音社, 1947, 102쪽에서 “檀君神話도 그 근간은 道敎의 神仙思想이지만, 그 외에 殷代 혹은 周初의 청동기에 나타나는 밤 혹은 어둠에 광명과 생명이 솟아나온다는 중국 고유의 創世思想이 혼입되어 있고, 다시 그 외에 北方系 샤먼敎의 영향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63) 실제로 무씨사당 화상석이 단군신화의 원류는 아니며, 양자의 내용은 유사성보다 차이가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하거나, 무씨사당 화상석의 내용을 漢代의 다른 화상석인 「虎吃女魃圖」와 비교하여 단군신화의 핵심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李弘稙,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文暻鉉, 「檀君神話의 神考察」, 『嶠南史學』 1, 嶺南大學校 國史學會, 1985; 金元龍, 「武梁祠畵像石과 檀君神話에 대한 再考」, 『考古美術』 146․147, 韓國美術史學會, 1980).
64) 孫晉泰는 문헌 및 현지 자료 수집과 서구 이론 도입을 동시에 하여 민속 및 문화 연구에 진일보를 이룬 것으로 평가하며, 건국신화 연구의 태도는 進化主義와 文化傳播論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된다(金貞淑, 「建國神話 硏究와 外國理論의 導入」, 『三國遺事의 現場的硏究』(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1), 東國大學校 新羅文化硏究所, 1990, 335~336쪽.
65) 孫晉泰, 「朝鮮古代山神의 性에 대하여」, 『震檀學報』 1, 1934.

66) 孫晉泰, 「三國遺史의 社會史的 考察」, 『學風』 2卷1號, 1949, 乙酉文化社, 38~42 쪽; 『孫晉泰先生全集』 6, 太學社, 1981, 224~228쪽.
67) 孫晉泰, 앞의 논문, 1949, 38~39쪽(앞의 책, 1981, 224~225쪽)에서 “檀君神話 중에는 원시적인 사상도 있으나 또 고도로 발달된 고려 당시의 사상도 표현되어 있다.

그 원시적인 부분은 (1)토템사상으로, 熊女神을 선조로 하였다.

(2)山神을 선조로 한 사상으로, 단군은 사후에 산신이 되었다. 이것은 고려 태조의 선조가 산신이란 사상과 공통된다. (3)山頂의 神壇(累石으로 된 지금의 서낭당)을 숭배한 사상으로, 熊女는 이에서 잉태를 기원하였다. (4)靈艾․神蒜思想이니, 쑥은 지금도 약용으로 중요시되거니와 고대의 우리 선조는 이것을 神草視하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마늘도 신성한 食物로 생각하였던 모양이니 지금도 그것은 우리의 음식생활에 극히 중요한 것이다. 인류가 식용하는 이러한 귀중한 음식을 먹으면 짐승이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고 고대인은 생각하였다. … (5)禁忌(Tabu)사상이니, 웅녀와 처녀는 靈艾와 蒜을 먹고 百日동안 日光을 보지 말라는 禁忌가 요청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원시적이요 민속적이므로 이 부분은 후세 학자나 지식계층의 조작이 아니요 民族群團에 의한 전승일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有一熊一虎 同穴而居>로부터 단군을 낳았다는 곳까지와, 뒤에 단군이 다시 阿斯達山에 들어가서 山神이 되었다는 점만이 단군신화의 原始型이요, 그 외의 것은 후세에 윤색된 것이다.

桓因·帝釋은 불교사상이며, 天符印 三箇는 도교사상일 것이다.
(6)단군을 천제의 孫으로 한 것은 조선인의 天孫民族임을 자랑하고자 한 것이니, 熊祖思想의 유치함을 깨달은 후세의 天神至高思想이 熊祖思想과 복합하여 단군 신화를 재편성한 것이다.

(7)단군의 재위 1500年說과 享壽 1908歲說(여기에 대해서는 제서에 모두 차이가 있다)은 건국 시조의 神異性과 위대성을 자랑하고자하는 사상의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68) 金杜珍, 「斗溪의 史學과 韓國古中世 思想史 탐구」, 『震檀學報』 116, 2012, 324쪽.



이병도는 단군에 관한 기록 중에 일부 윤색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옛사람들의 오랜 설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古典으로 인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檀君에 관한 古記錄이 너무도 斷片的인 데다가 說話的 要素를 많이 內包하고, 또 그것이 비교적 後世의 書에 收錄된 까닭에 혹은 荒誕視, 혹은 後人의 捏造라 하여 이를 抹殺·否認하려는 무리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輕率하고 無謀하고 또 非科學的인 態度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檀君에 관한 記錄 중에는 거기에 약간 後人의 潤筆이 加해진 곳도 있지만, 대체로 볼 때 이를 後人의 造作으로 단정할 아무런 理由를 발견할 수 없고, 도리어 吟味 檢討할수록 이것이 故人의 오랜 說話를 전해주는 貴重한 古典임을 認識하지 아니할 수 없다.

특히 說話學的· 民俗學的 方法에 의하여 이를 硏究한다면 자못 興味있고 重要한 示唆와 發見이 隨伴될 것이다. … 檀君古記가 우리에게 示唆하여 주는 것은, 결국 古朝鮮社會가 守護神을 받드는 祭壇中心 「神子」 支配의 阿斯達社會로 發展하여 오는 동안에 新舊支配氏族의 交替가 있어 舊支配氏族은 南으로 지금 安岳方面(眞番)에 옮기어 그곳을 中心地로 삼고, 新支配氏族은 前者에 대신하여 舊都에서 牛耳를 잡았다는 것인데, 종래에는 前者를 「檀君朝鮮」, 後者를 「箕子朝鮮」이라고 하였던 것이다.69)"


그는 고대 건국신화를 신화학적․민속학적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의 복원을 위한 중요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건국신화를 ‘천신족의 남성과 지신족의 여성이 결혼해서 출생한 자손이 국가를 건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상정하였다.70)

특히 고조선은 천신족인 환웅족과 지신족인 웅녀가 혼인하여 낳은 단군이 건국한 국가이며, 그 사회는 제정이 분리되었으며 모계중심의 대우혼이 행해졌다고 보았다. 앞서 최남선에 의해 환웅과 웅녀의 결합을 두 종족 간의 통합으로 해석하였는데, 이병도는 이를 보다 확장하여 고대 건국신화를 천신족 시조전승과 지신족 시조전승으로 분석․구분함으로써 이후 건국신화의 역사적 접근에 일정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71)
나아가 고조선은 지배 씨족의 교체로 기자조선(신지배씨족)이 성립하였고 단군조선(구지배씨족)은 安岳 방면(眞番)으로 남하하였던 것으로 상정하였다.


金廷鶴․李弘稙․金庠基 등은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한국 민족의 신화로 형성된 시기를 밝힘으로써, 이후 민족 이념이나 민족 문화의 전승을 강조하려는 연구 경향에 영향을 끼쳤다.72)

김정학은 단군신화에서 부족의 시조 신앙이라 할 수 있는 토템 신앙을 부각하였으며, 그것은 본래 고조선을 이룩한 부족의 시조 신화였지만 신라-고려로의 민족적 통일과 발전에 따라 민족의 시조 신화로 확대된 것이라고 상정하였다. 또한 고대의 건국신화를 개관하면서 단군관련 중요 자료를 검토하여 곰 토템의 분포지역을 동북아의 여러 민족에서 추출한 뒤, 단군신화에 보이는 宇宙卵的 요소를 알타이족 계통의 太陽神話와 구아시아족 계통의 토템신화가 결합한 것으로 보았다.73)

그리고 이홍직은『三國遺事』에 나타난 ‘檀君古記’가 우리나라의 유구한 원시 사회 문화의 제요소를 포함한 것이며, 민족 신화로서의 연원은 고려 전기에 고구려를 재인식하여 평양을 소중히 여기게 된 상황과 연결하여 찾았다. 곧 단군신화의 구상은 통일 민족을 형성해 가는 고려 초기로 소급되며, 고려 말기에는 한국 민족의 신화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74) 또한 고구려의 국호와 종족문제, 그리고 고대 국가로의 성장과정을 검토하면서, 고구려 건국신화에 관한 역대 기록을 정리하여 부여와 고구려의 민족적 연관성을 강조하였다.75) 뒤이어 金庠基는 한국 고대 신화의 바탕에 자리한 始祖天降 사상과 聖母 신앙의 요소를 밝혀 시조 신앙의 일면을 해명하였다.76)


이기백은 단군신화의 후대적인 윤색을 제거한 원초적인 모습으로 샤머니즘의 세계에 주목하였다.77) 단군신화는 장차 고조선 사회의 중심이 될 곰 숭배 씨족이 지니고 있던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하며, 그것은 샤머니즘 과 곰 숭배 사상의 분포 상태로 보아 동북아 일대의 커다란 문화권을 배경으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곧 단군신화는 샤머니즘의 토대 위에 선 제정일치 시대의 산물로서 고조선시대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발전하는 모습을 신라의 閼智 전설에 견주어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곰 숭배 씨족이 고조선 사회의 지도적 세력이 됨으로써 그들의 단군신화는 결국 고조선의 건국신화, 시조신화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닭 토템씨족인 金氏族의 閼智傳說 내지는 鷄林傳說이 金氏族이 新羅의 왕
족이 됨으로 해서 그 전설도 신라의 始祖傳說의 하나가 되고, 국명도 鷄林으로 불리러지게 된 예와 같다고 할 수 있다.78)"


이기백은 곰숭배 씨족이 고조선의 주도 세력이 되면서 그들의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그 뒤에 고조선이 위만에게 망하고, 다시 위만 조선이 漢에 망함으로써 고조선 고유의 단군신화는 漢族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箕子 傳說과 뒤섞이게 되었으며, 이후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주몽 전설과 교섭했던 것으로 상정하였다. 특히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이며, 국가의 발생은 청동기 시대 이후의 일이므로 그 개국연대는 기원전 12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고, 청동기시대의 상한이 더 올라간다면 고조선의 국가 성립 상한도 그만큼 올라가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79) 처음 성읍국가에서 출발한 고조선은 늦어도 기원전 4세기경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발전과정에서 왕실의 교체가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고조선의 국가 형성 및 그 사회상과 연결시켜 단군신화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으며, 고구려의 건국신화 역시 고구려의 국가 형성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취급하였다.80)


69) 李丙燾, 「阿斯達과 朝鮮 - 特히 그 名稱에 대하여」, 『서울大學校論文集』2, 1955; 「檀君說話의 解釋과 阿斯達問題」, 『韓國古代史硏究』, 朴英社, 1976, 27~43쪽.
70) 李丙燾, 「檀君古記에 대한 신해석」, 『朝鮮史大觀』, 同志社, 1948, 19~21쪽; 앞의 책, 1976, 29~30쪽.

71) 고대 건국신화에서 天神族 시조 전승은 天降설화와 함께 새 혹은 말 토템이나 수목 및 산악 숭배 신앙을 가진 반면, 地神族 시조 전승은 주인공이 배에 실려 수평으로 이동할 뿐만 아니라 뱀이나 거북등 파충류나 수달을 숭배하고, 우물이나 강 및 해변을 신성시하는 신앙을 가졌다고 본다(金杜珍, 앞의 논문, 2012,324쪽). 곧 斗溪는 고구려 건국신화의 柳花나 신라 건국신화의 閼英이 지신족 시조 전승을 가졌으며, 解慕漱나 朴赫居世 등은 모두 천신족 시조 전승을 가진 것으로 상정하였다. 또한 한국 고대 사회의 井泉 신앙(李丙燾, 「韓國古代社會의 井泉信仰」, 앞의 책, 1976, 781~795쪽)을 밝힌 것은 지신족 시조 전승의 모습을 보다 부연한 것으로 이해된다.
72) 김두진, 앞의 논문, 2000, 88~89쪽.
73) 金廷鶴, 「檀君神話와 토테미즘」, 『歷史學報』 7, 1954, 292쪽.
74) 李弘稙, 「檀君神話와 民族의 理念」, 『國史上의 諸問題』 1, 1958,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47쪽.
75) 李弘稙, 「高句麗의 興起」, 『國史上의 諸問題』 4․5, 國史編纂委員會, 1959; 앞의 책, 1971, 83~84쪽.
76) 金庠基, 「國史上에 나타난 開國傳說의 演變에 대하여」, 『庸齋白樂濬博士還甲紀念國學論叢』, 思想界社, 1955.
77) 李基白, 「檀君神話의 문제점」, ≪서강타임스≫ 1963년 9월 21일자; 『韓國古代史論』, 一潮閣, 1995, 17~19쪽.
78) 李基白, 앞의 책, 1995, 19쪽.

79) 李基白, 「古朝鮮의 諸問題」, ≪月刊中央≫ 1973년 5월호; 앞의 책, 1995, 27쪽.
80) 高句麗의 건국설화를 통하여 첫째 朱蒙의 天孫觀念(建國主의 초월적 권위 표방), 둘째 주몽이 부여로부터 온 外來者 (이주민 세력이 건국 주도), 셋째 주몽을 따른 烏伊․摩離․陜父 및 再思․武骨․默居의 존재(군왕 밑에 일정한 정치조직), 넷째 지배자의 거주지 서술(성곽과 궁실 축조), 다섯째 朱蒙의 高句麗國 이웃에 松讓王의 沸流國 존재(건국 초기의 고구려 위상 및 성장 과정) 등의 사실을 유추하였다(李基白, 「高句麗의 國家形成 問題」,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80~83쪽).



건국신화를 해당 국가의 사회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점차 문화적 배경을 통한 민족 구성 문제와 영역 범위를 설정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먼저 千寬宇는 고조선의 檀君神話가 곰과 범을 숭배하는 先住 漁獵民(古아시아人 또는 古시베리아人)과 天帝의 아들로 상징되는 後來 農耕民(北몽골人 또는 알타이族)의 동화 내지 교체를 반영한 것이며, 오늘날 우리 민족의 직계 조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알려준다고 하였다.81) 특히 檀君은 본래 大洞江 下流 일부 지역의 특정 종족을 이끌던 지배자였는데, 뒷날 그들이 모시던 祖上神으로 숭배되었다가 점차 한국인 공통의 조상신으로 확대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단군신화의 모티브를 환웅에 두면서 ‘檀君’ 또는 ‘檀君朝鮮’에 반영된 史實은 先住民인 櫛文土器系 漁獵民의 사회를 反映한 것이라기보다는, 無文土器 문화를 지닌 北몽골族의 농경민이
처음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사실로 상정하였다.82) 결국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에서 농경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단계를 반영한 것이며, 단군은 한민족 형성의 첫 단계를 반영하는 일정한 지역의 지배자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箕子朝鮮의 실체에 대하여 箕子라는 인물보다는 箕子族이라는 집단에 관심을 갖고, 그 역사적 실체를 각각 ‘早期 기자조선’(B.C. 12세기~)과 ‘晩期 기자조선’(B.C. 4세기~B.C. 2세기)으로 구분하였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위치를 ‘단군조선’-‘조기 기자조선’ 단계에는 요동 방면에서, 그리고 ‘만기 기자조선’-‘위만조선’ 단계에는 대동강 방면에서 구하였다.


신화가 역사적 근거 위에 성립하였음을 전제로, 金貞培는 고고학적 성과를 활용하여 단군조선의 실체에 접근하였다.83) 그는 한국 민족의 기원 문제를 추구함에 있어 단군신화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며, 최초의 국가로서 단군조선의 실체는 단군신화를 남긴 주민의 시・공간적 개념을 부여할 때 보다 명확해진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의 시・공간적 범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의 신석기문화를 이 땅에 남긴 주민은 오늘날 韓民族 형성의 주축이 된 문헌에 나오는 濊貊, 즉 알타이語 계통이 아니고 古아시아족이라고 보는 것이다. 고아시아족은 신석기시대에 시베리아 일대에 광범하게 분포하여 있었으며, 그 뒤에 알타이어 계통의 주민에게 밀려나서 현재 약 3만 정도가 태평양 연안 근처에 살고 있다. 우리는 동북아시아에서 이러한 주민의 일대 이동 상황을 염두에 두고 단군조선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군조선은 시베리아와 연결되어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신석기시대 문화를 가진 주민의 史實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물이나 곰 숭배라는 공통점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문헌에 最古의 개국으로 나온 까닭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84)"


단군조선은 시베리아와 연관되는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가진 주민의 史實을 전승한 것이며, 이때의 주민은 한반도의 선주민인 고아시아족으로 보았다. 김정배는 단군신화의 중심을 곰이 여인으로 변한 뒤에 단군을 낳는 모티브로 보고, 이를 시베리아 종족의 신석기시대 곰 숭배사상과 연결하였다. 곧 곰 숭배는 신석기시대의 산물이며, 단군신화는 신석기 시대인의 사상이자 古아시아족의 일파가 남긴 이야기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은 신석기시대에 시베리아 일대에 광범하게 분포하였던 古아시아족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또한 기원전 13세기 단군조선의 멸망은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며, 그 뒤 청동기 문화를 가진 알타이족이 기자조선을 세웠는데, 이들을 바로 문헌에 보이는 ‘濊貊’으로 상정하였다.


한편 李殷昌은 고고학적인 연구에 바탕을 두고 단군신화를 위시하여 고구려・신라의 건국신화를 고찰하였다.85) 특히 신화 형성의 고고학적 배경을 탐색하여 신화 속에 나타난 인물의 계보와 그 문화적 계통 및 신화를 구성하는 신앙․사상․정치․생산 등의 기원과 성격을 부각하였다. 곧 단군신화는 스키타이 문화를 원류로 한 시베리아 북방계 문화를 근간으로 삼았고, 퉁구스 예맥족이 농경 문화와 청동기 문화를 형성하는 단계(기원전1000~700년경)에 기원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고구려 주몽신화는 천강 설화와 난생 설화가 합류한 전형적인 복합 문화를 지녔으며, 천강 설화는 북방계 문화로서 단군신화로부터 계승되었고 난생설화는 도작 농경 문화와 함께 유입되었다고 하였다. 주몽신화의 형식․내용․성격 등은 남하하여 한반도 남부 및 日本神話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또한 신라신화는 시베리아의 북방 문화 요소를 근간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특징을 赫居世 신화(光明思想的 天降說+日光感精的 卵生說)․金閼智신화(太陽崇拜의 天神信仰 위주+樹木신앙+天鳥신앙)․昔脫解 신화(華北․ 華中 지역의 南方 稻作文化 요소의 卵生說)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건국신화에 관한 기록은 신이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에 반영된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는 노력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다. 金杜珍은 건국신화와 표리 관계에 있는 제의를 통하여 한국 고대 토착 신앙에 대한 연구를 사회사상사로 정립시키려는 노력을 진행하였다.86)

그는 건국신화를 이루는 개개의 사실이 어떠한 문화 배경 속에서 대두한 것인지 탐색하였다. 대체로 天神族은 地神族보다 우월한 물질 문화를 소지한 이주민 세력에 연결하였고, 지신족은 선주한 토착 부족으로 상정하였다. 그리하여 건국신화에서 추출할 수 있는 농업신이나 토템신앙, 대우혼과 일부다처제, 그리고 무사단 등이 어떤 문화 단계를 배경으로 성립하였는가에 주목하여 건국신화가 갖추어져가는 문화적 배경을 부각시켰다. 또한 한국고대의 건국신화가 갖추어져 가는 일반적인 모습을 選民- 英雄傳承-神聖族 신화로 체계화하면서, 건국신화가 정착되는 시기와 그것을 표방한 지배자 집단의 실체를 추정하였다.87) 그리하여 시조 전승을 기반으로 제의가 행해지기 때문에 신화와 제의는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전제로, 고대의 건국신화는 우세 부족의 시조 전승을 중심으로 정비되었고, 왕권 중심의 귀족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는 여타 부족의 시조 전승이 계속해서 국가 祀典으로 체계화되었다고 보았다.


81) 千寬宇, 「桓雄族의 登場」, ≪新東亞≫ 1972년 6월호; 「古朝鮮에 관한 몇 가지 問題」,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1989, 2~4쪽.
82) 단군신화의 줄거리를 크게 ① 太伯 땅에 곰과 범이 본래 살아 있었고, ② 거기에 天帝의 아들 桓雄이 하늘에서 下降하였으며, ③ 환웅이 곰과 결합하여 단군을 탄생하였고, ④ 환웅이 바람․비․구름 등의 諸神을 거느리고 곡식을 비롯한 人間諸事를 주관하였다는 내용으로 구분하였으며, 단군신화의 핵심 모티브는 곰이 아니라 바로 桓雄임을 강조하였다(千寬宇, 「韓國上古史의 問題들」, 『창작과 비평』1976년 봄호, 1976, 303쪽). 여기서 桓雄은 後來民인 桓雄族을 상징하며 그 실체는 알타이系 言語를 쓰는 農耕民으로 보았다.
83) 金貞培, 「古朝鮮의 民族構成과 그 文化的 複合」, 『白山學報』 12, 1972;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161~179쪽.
84) 金貞培, 「檀君朝鮮을 어떻게 볼 것인가」, 『韓國史의 再照明』, 讀書新聞社, 1975.

85) 李殷昌, 「三國遺事의 考古學的 硏究-檀君神話의 考古學的 考察을 中心으로」, 『三國遺事硏究』(上),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3, 281~314쪽; 「高句麗神話의 考古學的 硏究-三國遺事의 朱蒙神話를 中心으로」, 『韓國傳統文化硏究』창간호, 曉星女子大學校 韓國傳統文化硏究所, 99~171쪽; 「新羅神話의 考古學的 硏究(1)- 三國遺事의 赫居世神話와 金閼智神話를 中心으로」, 『三國遺事의 現場的 硏究』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1), 東國大學校 新羅文化硏究所, 1990, 67~123쪽.

86) 金杜珍,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一潮閣, 1999.
87) 檀君神話는 장당경으로 옮긴 고조선의 옛 지배 세력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箕子부족이 고조선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초기에 정착되었던 것으로 본다. 朱蒙신화는 解씨 부족 세력을 대신하여 고구려를 지배한 太祖계 왕실에서 표방되었고, 溫祚신화는 古爾王계를 대신하여 肖古王계 왕실에서 체계화되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가야와 신라의 건국신화에는 여러 시조 전승이 포함되었는데 그것을 받드는 각각의 부족 세력 집단으로 가야의 首露王계와 許王后 부족, 신라의 김씨․석씨․박씨 부족을 상정하면서, 금관가야 건국신화는 6대 坐知王 이후에 정착되고 신라 건국신화는 中古期에 김씨와 박씨의 귀족 연합 정권이 성립된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본다(金杜珍, 앞의 책, 1999).



한편 1970년대 이후 건국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연구 주제의 범위 또한 확장되었다. 실제로 金哲埈은 「東明王篇」에 보이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주목하여 神母가 麥作과 관련된 農業神으로 地母神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현전하는 백제 시조 설화는 건국 과정에서의 역사적 경험들이 반영된 것으로 파악하였다.88)


뒤이어 삼국 및 가야의 건국신화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들이 이어졌다.89)
이에 따라 건국신화의 형성과정 및 신화에 내포되어 있는 성격 규정, 건국신화의 내용 분석을 통한 왕실의 지배 세력 및 체제의 변화상 탐색, ‘祭天祀地’ 의례를 통한 백제 건국신화의 복원 시도, 제천 행사 시행을 통한 건국신화의 구체화 양상, 주변 국가와의 문화 전파 및 교류 양상 등 그 계통성의 추구, 시조왕 제사를 통한 건국신화의 기능 등을 구체적으로 포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건국신화를 통하여 고대 사회의 ‘神’관념과 祖上崇拜의 사회적 의미, 祭天儀禮와 祀典, 國家 祭祀 등의 제의 형태 문제 등으로 연구를 이어갔다.90)

이와 함께 불교 수용 이전의 巫覡(토착) 신앙과의 관계, 초기국가의 성립과 祭儀의 정치․사회적 제반 기능, 始祖廟와 神宮의 실체 및 왕실과의 관계 등 그 역사적 의미를 추구하여, 한국 고대의 역사상을 조명하는데 일조하였다.


특히 祭儀는 建國神話의 신앙형태로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일찍이 天君의 존재 및 蘇塗 信仰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방면의 연구는 蘇塗와 관련된 기록이 巫儀를 연상시키기 때문인지 일찍이 종교․민속학적인 연구가 선행되었고,91) 그 뒤에 소도를 정치․사회의 체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역사학 방면의 연구가 이어졌다.

그리하여 소도는 청동기시대의 소산으로 철기 문화로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신․구 문화의 갈등 조절 및 그것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찾은 이래, 君長社會의 산물로서 소도의 정치사적 의미를 추구하거나 당시의 보편적인 사회 발전 단계에서 삼한 別邑社會의 소도 신앙을 설정하고 고구려․부여의 제천의례 등과 비교․검토하여 구체적 양상을 해명하였다.92) 곧 소도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그것이 포함되는 정치 체계와 연관하여 추구하거나 사회 발전 단계에 따른 제의의 변천 과정 속에서 이해하면서, 소도의 정치․사회사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또한 건국신화와 관련한 제의 연구는 고대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그 사회의 운영 원리 및 지배 이념에 대한 역사적 측면을 설명해주고 한국 고대사를 재구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소지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93) 최근에는 제의와 관련된 고대 국가의 儀式이 전쟁과 동반 관계에 있으며, 고대 국가의 통치자들은 의식적 권위와 군사적 권력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여 국가의 구조를 지속한다는 ‘사회문화사’적 방법론으로 고대 국가의 면모를 살펴보려는 입장이 표명되기도 하였다.94)


88)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에 대하여」, 『柳洪烈博士華甲記念論叢』, 探究堂, 1971; 「百濟社會와 그 文化」, 『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 文化財管理局,1973;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百濟建國考」, 『百濟硏究』13,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1982.
89) 文暻鉉, 「新羅 建國說話의 硏究」, 『大丘史學』4, 1971; 李玉, 「朱蒙硏究」, 『韓國史硏究』 7, 1972; 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誕生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10, 1981; 鄭暻喜, 「東明型說話와 古代社會」, 『歷史學報』 98, 1983; 徐大錫 「百濟의 神話」, 『震檀學報』 60, 1985; 金杜珍, 「新羅 昔脫解神話의 形成基盤-英雄傳說的 性格을 中心으로」, 『韓國史論叢』 8, 1986; 「新羅 建國 神話의 神聖族 觀念」, 『韓國學論叢』11, 1989; 「百濟 建國神話의 復元試論」, 『國史館論叢』13, 1990; 「百濟始祖 溫祚神話의 形成과 그 傳承」, 『韓國學論叢』13,1991; 「高句麗 開國神話의 英雄傳承的 性格」, 『國史館論叢』 62, 1995; 「伽耶建國 神話의 成立과 그 變化」, 『韓國學論叢』19, 1997; 李鍾旭, 「百濟의 建國說話」, 『百濟論叢』4, 1994; 金泰植, 「駕洛國記 所在 許王后 說話의 性格」, 『韓國史硏究』102, 1998; 林起煥, 「百濟 始祖傳承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百濟硏究』 28, 1998; 백승충, 「가야 건국신화의 재조명」,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혜안, 2001.
90) 徐永大, 『韓國 古代 神觀念의 社會的 意味』,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1; 姜英卿 「新羅 傳統信仰의 政治․社會的 機能 硏究」, 淑明女子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2; 李鍾泰, 「三國時代의 ‘始祖’ 認識과 그 變遷」, 國民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6; 金杜珍,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一潮閣, 1999; 나희라, 「新羅의 國家와 王室 祖上祭祀 硏究」,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9;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2003; 金炳坤 「新羅 王權의 成長과 支配理念의 硏究」, 東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000; 蔡美夏 「新羅 宗廟制와 王權의 推移」, 慶熙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001.

91) 孫晉泰, 「蘇塗考」, 『民俗學』4-4, 1932; 『朝鮮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趙芝薰, 「서낭竿攷」, 『新羅伽倻文化』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66; 崔吉城, 「韓國原始宗敎의 一考 - 韓國 샤마니즘의 性格과 分布問題」, 『語文論集』11, 民族語文學會, 1968; 金泰坤, 「韓國 巫系의 分化變遷」, 『韓國民俗學』창간호, 民俗學會, 1969; 「蘇塗의 宗敎民俗學的 照明」, 『馬韓․百濟文化』12, 1990;
李鍾哲, 「장승과 솟대에 대한 考古民俗學的 接近試考」,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通川文化社, 1984; 金宅圭, 「蘇塗と卒土」, 『三上次男博士喜壽記念論文集』, 平凡社, 1985; 이필영, 「마을공동체와 솟대신앙」, 『孫寶基博士停年紀念考古人類學論叢』, 知識産業社, 1988; 宋華燮, 「馬韓蘇塗의 構造와 機能」, 『韓國宗敎』17, 圓光大學校 宗敎問題硏究所, 1992; 「馬韓蘇塗의 成立과 歷史的 意義」, 『韓國古代史硏究』 7, 1994.
92) 金哲埈, 「韓國古代 政治의 性格과 中世 政治思想의 成立過程」, 『東方學志』10, 1969; 許回淑, 「蘇塗에 關한 硏究」, 『慶熙史學』 3, 1972; 金貞培,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 『歷史學報』79, 1978; 金杜珍, 「三韓 別邑社會의 蘇塗信仰」,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洪潤植, 「馬韓蘇塗信仰領域에서의 百濟佛敎의 受容」, 『馬韓․百濟文化』 11, 1988; 「馬韓社會에서의 天君의 位置」, 『水邨朴永錫敎授華甲記念韓國史學論叢』 (上), 1989; 崔光植, 『韓國古代의 祭儀硏究』, 高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0;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93) 이를 반영하듯 삼국과 가야의 건국신화 및 제의에 대한 집중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제18회 한국고대사학회 합동토론회, ‘한국고대의 建國神話와 祭儀’, 2005. 2. 17~2. 18. 윤성용, 「고구려 建國神話와 祭儀」; 朴賢淑, 「백제 建國神話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 나희라, 「신라의 건국신화와 의례」; 남재우, 「가야의 建國神話와 祭儀」(이상 『韓國古代史硏究』39, 2005 수록)].
94) 박대재, 『의식과 전쟁-고대국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책세상, 2003, 43~61쪽.



4. 앞으로의 과제


광복이후 건국신화의 전승 자료에 관한 역사적 탐색은 건국신화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것의 분석을 통한 초기국가의 형성과 사회상에 접근하려는 노력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건국신화의 형성과 변천 과정을 初期 王系의 변화와 결부시키면서 건국의 주체 세력과 그 계통을 해명하려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건국신화를 만들어내고 전승시켰던 고대인들의 세계관에까지 관심의 영역이 심화, 확대되었다.95) 그리하여 건국신화는 초기국가의 실상에 대한 접근뿐 아니라 주변과의 문화 전파 및 교류 양상 등 그 계통성을 추정하는 실마리로 기능하였다.


한편 건국신화는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건국하였고, 그 나라를 세운 행위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알리려는 신화이기 때문에, 건국의 주인공이 가장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다. 그리고 神聖性과 실제성이 혼재된 건국신화는 제의 곧 국가제사인 祭天儀禮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자연히 건국신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제의는 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건국신화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한국 고대의 국가 및 지배 권력의 기원과 정치적 목적의식 등을 해명하는데 자주 활용되어 왔다.


사실 건국신화의 생성과 변화가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때, 고대 건국신화를 구성하는 시조전승을 초기 왕실 내의 지배 세력 교체를 비롯한 고대사의 전개 과정과 결부시켜, 그 역사적 원인과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초기 왕계를 구성하는 혈연 집단의 계통과 형성과정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나아가 단군신화를 비롯한 삼국의 건국신화가 갖는 특성과 의미를 서로 비교하여 접근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다시 “왜 건국신화를 연구하는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본다. 건국신화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한국 고대사의 복원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모색해온 이해 방향의 타당성을 점검하고 기왕의 연구 성과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사실 신화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집단 기억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을 내포하지만, 신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96) 신화는 과거를 통해서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키는 입장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곧 신화의 내용이 그대로 역사일 수는 없으므로 신화를 성립시킨 사람들의 사고와 논리를 이해한 바탕 위에서 신화에 반영된 역사적 사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단군신화의 경우에 고급 신화로서 현실적 지향이나 소망이 투영될 가능성이 크므로, 그런 의미에서 단군신화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실 추구에 앞서 그 의미와 기능 파악에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 있었다.97)


물론 단군신화가 역사적 사실과 크게 배치되거나 고조선 사회의 의식과 관념에서 이탈하는 논리 체계에서는 신화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단군신화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건국신화는 비교적 사회 반영이 높은 상징적 측면과 역사성이 짙은 측면을 함께 가지는 특성을 감안하여, 신화와 제의의 상징을 그 문화 속에서 해석하는 노력과 함께 그것을 배태한 사회생활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상호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98)


앞으로 건국신화와 제의에 대한 연구가 보다 충실하려면 지금까지 이루어진 구체적이고 개별적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상호 비교․분석을 통한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건국신화는 그것이 별개로 형성․전승되기 보다는 한국 고대의 문화와 사회 구조 속에서 다른 건국신화와 서로 얽히면서 전승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군신화를 비롯한 건국신화와 제의가 한국 고대의 어떠한 사회 구조 속에서 형성되었는가를 추구하여, 사회사상사의 입장에서 그것의 객관적 보편성을 탐색하거나,99) 티벳․몽골․만주․한국의 건국신화를 대상으로 비교신화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형성과 재편 과정을 고찰하였는데,100) 이러한 노력은 한국의 특수한 문화 양상에서 내재되어 있는 보편성을 탐색한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접근이라고 하겠다.


또한 종교학 내지 신화학적인 접근에 보다 유의하면서 비슷한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의 건국신화와의 비교․분석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삼국시대 이후 각국의 건국 시조에 대한 인식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후대의 자료에 그 편린이 어떻게 남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무덤의 벽화나 제사 유적 및 청동제기 등의 유물이나 유적 자료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95) 文昌魯, 앞의 논문, 2010, 51~55쪽.

96) 나희라, 앞의 논문, 2005, 58~59쪽.
97) 서영대, 「신화 속의 단군」, 『한국사시민강좌』27, 일조각, 2000, 26~27쪽.

98) 金貞淑, 「建國神話 硏究와 外國理論의 導入」, 『三國遺事의 現場的硏究』(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1), 東國大學校 新羅文化硏究所, 1990, 383~384쪽.
99) 金杜珍, 『韓國 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一潮閣, 1999.
100) 조현설, 『동아시아 건국 신화의 역사와 논리』, 문학과지성사, 2003.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