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rainbow3 2020. 5. 17. 03:21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최 유 경*

 

 

들어가면서
Ⅰ.<피렌체의 피에타>의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
Ⅱ. 듀러의 영향
Ill.[부활]과 피에타와의 관계
Ⅳ. 육체의 부활
Ⅴ. 구원의 포즈
Ⅵ. 신앙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상
Ⅶ. 부활에서 탄생으로
나오면서

 

 

들어가면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는 젊은 시절 프랑스 추기경의 주문으로 《산피에트로의 피에타》l)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만년에 자신의 묘를 위하여 《피렌체의 피에타》.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제작하여 켈란젤로는 그의 생애를 통해 3개의 피에타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나중의 두 피에타는 주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 자신의 무덤을 위해 제작된 작품이라는 점과 미완성으로 그친 점 그리고 죽은 그리스도를 앉고 있는 성모의 남다른 포즈 때문에 도상학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교류가 있었던 전기작가 죠르주 바자리 (1511-74) 는 1568년 로마에서 출판되었던 『미켈란젤로전』(1553년)의 재판본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실물보다 큰 4명의 군상을 대리석으로 조각하고 있다. 그것으로 죽은 그리스도를 만들었다. 이 작품을 즐기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며 ·   그가 만든 다른 어떤 작품과도 그 전에 만든 그 어떤 것들과도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노력이 많이 든 석조물로 정말로 신에 의해 만들어 진 것과 같은 작품이었다. 이것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는 자신의 묘에 이것을 사용할 생각으로 그것을 제작해 놓으려 생각하고 있었다.2)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1555년경《피렌체의 피에타》가 대리석에 금이 갔기 때문에 도중에서 완성을 단념하고3) 다른 돌로 새로운 조각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론다니니의 피에타》였다.


이렇게 미켈란젤로는 이《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위해 꽤 오랜 기간을 소비하였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 버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하여 《피렌체의 피에타》와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그의 만년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 조각의 그리스도는 바자리가 지적한 것처럼 기존의 피에타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종래의 피에타는《산피에트로의 피에타》처럼, 성모마리아의 무릎 위에 안긴 고전주의적인 방식괴는 다른 취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나중의 두 개의 피에타는 수직으로 서 있는 죽은 그리스도를 성모마리아가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더욱이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의 몸은 몹시 뒤틀리어져 있다. 이런 모습 때문에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중세회귀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모와 그리스도의 몸이 심하게 패어져서 기묘한 실루엣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피에타》와《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전통적인 피에타와 전혀 다른 독자적인 해석을 하였다. 본고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죽기직전까지 제작 중이었던 피에타를 검토하여 그의 죽음과 부활사상을 검토하여 보도록 한다.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1) Howard Hibbard, Michelangelo, New York, 1973, p.43. 1496년 8월 27일에 계약된 이 피에타상은 프랑스의 추기경의 묘를 위하여 주문된 것이다.

2) Giorgio Vasari , The Líues qf the Painters. Sculptors and Archilect,Trslated by A.B.HINDS, New York , 1970, p.145.
3) Ibid., P.158.

 

 

1.《피렌체의 피에타》의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

 

《론다니니의 피에타》와 마찬가지로 《피렌체의 피에타》의 정확한 제작년도는 알 수 없다. 히버드는 미켈란젤로의 친한 동료이자 페스카라후작의 미망인인 비토리아 코론나{Vittoria Colonna 1490-1547)가 사망한 1547년경부터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

지오르지오 바자리 (Giorgio Vasari 1511 - 1574)가 1550년에 출판한『 예술가열전』속에 《피렌체의 피에타》에 대한 기술이 들어있는데『 예술가열전』초고가 1547년 6월 이전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피렌체의 피에타》가 1547년경에 제작되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피렌체의 피에타》가 비토리아 코론나가 죽은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것은 코론나의 죽음이 《피렌체의 피에타》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피렌체의 피에타》를 코론나와 관련지어 《피렌체의 피에타》의 제작의도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밝혀 보고자 한다.

 

〈그림 1> 미켈란젤로, < 피렌체의 피에타>, 1 550-55년, 대리석, 피렌체대성당미술관

The Deposition ("The Florentine Pietà") c. 1547–1555. Museo dell'Opera del Duomo, Florence

 

 

《피렌체의 피에타》(그림 1)는 도상학상적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 십자가에서 끌어 내려진 모습을 그린「비탄」과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매장」이 융합되어진 형태이다. 피에티는 일반적으로 《산피에트로의 피에타》처럼 죽은 그리스도와 아들을 죽음을 슬퍼하는 성모마리아라는 2인상으로 구성되어진다. 그런데 《피렌체의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진 죽은 그리스도를 니코데모와 성모마리아 그리고 막달라마리아가 양 옆과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성모마리아는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십자가에서 내려온 죽은 그리스도의 몸을 자신의 무릎으로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쓰러져 있는 그리스도의 왼팔 사이로 그리스도를 들어 올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미 경직되어 뺏뺏해져 있다. 성모마리아의 몸은 고통스럽게 왼쪽으로 향하여 있고 심하게 뒤틀려 있는 그리스도의 상반신을 지신의 무릎과 양손으로 떠 받들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모마리아의 볼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 막달라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오른쪽 어깨 밑에 쭈그리고 앉아 오른 손으로는 그리스도의 배 쪽을 지탱하고 있고 왼손으로는 성모마리아를 끌어 당기고 있다. 그리고 뒤에서는 후드를 쓴 니코데모가 서서 그리스도를 꿀어 올리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조각에서는 전체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행위가 강조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하여 미켈란젤로의 제자, 콘디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금 그는 대리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을 위하여 만들고 있다 ... 십자가에서 끌어 내려온 죽은 그리스도는 성모에게 의지하고 있다.
성모는 유체를 가슴과 무릎으로 기묘한 자태로 받들고 있다. 니코데모가 위에서 다리에 힘을 주고 그리스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떠 받치고 있다. 또한 왼쪽에서는 막달라마리아 혼자서 그리스도를 받들고 있다.

성모는 헤아렬 수 없는 너무나 큰 슬픔 속에서도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죽은 그리스도의 팔다리가 축 쳐져 쓰러져 버릴 것 같다.5)"

 

이처럼 콘디비가 《피렌체의 피에타》의 형태를 기묘하게 생각한 것은 이것이 전통적인 피에타의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피에타는 본래 중세 북구(독일) 형식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다. 피에타는 북독일에서 창안되어 15세기말경 이탈리아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본래 피에타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쇠약해진 그리스도를 성모마리아가 무릎 위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왔다{그림 3).

이처럼 피에타는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슬픔이 강조되어진 것으로 성모는 늙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표현된다. 이것이 중세적인 리얼리즘이었을 것이다.


1499년에 제작된 《산피에트로의 피에타》(그림 2) 에서 야위고 나이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성모도 마치 15, 16세 정도밖에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소녀로, 고통스럽게 죽어간 그리스도의 육체는 고대조각처럼 아름답고 단정한 용모로 잡든 것처럽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표현된 조각은 도식상으로는 전통적이지만 성모가 너무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피에타]라고 하는, 죽은 아들을 비슴듬이 끌어 안은 성모의 슬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거꾸로 그리스도는 무릎 위에서 낮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성모와 그리스도의 모습은 제작 당시부터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 (Ascanio Condivi 1525-74) 의『미켈란젤로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순수한 여인이 일반여자에 비하여 젊음을 유지한다"6)고 반론하였다고 한다.

 

 

Michelangelo's Pietà, St Peter's Basilica (1498–99).

<그림 2> 미켈란웰로. < 산피에트로의 피에타> . 1498 -1500년,대리석, 바티칸 성당의 베드로 성당입구

 

<그림 3> 작가미상. <피에타>. 14세기 초
The Rottgen Pieta was created between 1300-1325 by an unknown German artist. It is 35 inches tall and is made of wood that has been painted.

 

4) Howard Hibbard, op. cit., p.397.

5) Ascanio Condivi, The life Michelangelo, Translated by Alice Sedgwick Wohl and Hellmut Wohl, oxford, 1976. p.90.

6) Ascanio Condivi. op. cit., pp.24- 26. 프랑스인의 주문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북방의 피에타의 형태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 이탈리아적인 조각은 1549년에는「루터적인 관념」이 들어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 조각은 전후 어느 젊은이에 의하여 코와 손가락이 망치로 절단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문은 광기어린 행동이었다고 보도하였지만, 이 피에타상은 제작 당시부터 이상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11 , 듀러의 영향

 

톨나이는 《피렌체의 피에타》처럼 뒤에서 끌어 올려 수직으로 서 있는 피에타의 형태를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 ( 1539년경, 런던, 대영박물관)의 발전된 형태로 보고 있다. 그는 《피렌체의 피에타》에서는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의 두천사의 역할을 막달라마리아와 성모가 맡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티브의 유래를 14세기의 이탈리아 미술의 전통에서 설명하고 있다. 조반니의 《빌라노의 판넬》( 1365, Accademia of Florence) 이나, 후라 · 피릿포 • 릿피의 《통곡》( the Cherbourg Museum)에서는 이미 죽은 그리스도를 감싸서 수직 선상으로 꿀어올리는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피렌체의 피에타》의 피에타의 형태가 이들 작품의 영향올 받았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톨나이의 지적처럽 당시 독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독일의 예술가 알브레히트 · 듀러 (Albrecht Drer 1471-1528)의 판화의 영향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Albrecht Dürer


15세기 말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의 동판화는 판화예술의 모체가 되는 독일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듀러는 이탈리아 방문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1494 년에서 95년, 그리고 1515년에서 17 년에 걸쳐 베네치아를 두 번 여행하였다.
그 이전부터 듀러의 판화에는 이탈리아의 목판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도나텔로나 안드레아 · 만테냐의 목판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7) 이렇게 이탈리아판화에 영향을 받은 듀러의 목판화나 동판회는 그 후 거꾸로 이탈리아에 전해져 매니얼리스트들의 교과서로 이용되었던 것이다.8)


《피렌체의 피에타》의 세 방향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꿀어올리는 피에타의 군상은 듀러의 목판화 《성삼위 일체》(그림 4) 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피렌체의 피에타》에서 니코데모에 의하여 일으켜 세워지는 그리스도는 듀러의 목판화 《성삼위 일체》에서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뒤에서 받쳐주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오른팔은 천사가 떠 받치고 있고、 그리스도의 몸은 뒤쪽으로 뒤틀려진 채로 하느님께 전신올 맡기고 있는 구도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포즈나 주변 인물묘사의 구도가 《피렌체의 피에타》와 아주 유사하여 《피렌체의 피에타〉가듀러의 목판화의 영향하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뒤에서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듀러의 《수난전》시리즈의 동판화《애곡》(B14 1507), 목판화 《통곡》 (B.43, 1509- 10), 동판화《매장》(B.l5, 1512) 둥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림 4> 듀러,《삼위일체》, 1511, 목판화

Albrecht Durer The Holy Trinity, Albrecht Durer (1471-1528)

 

《피렌체의 피에타》에서는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와 옆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오른편에는 막달라마리아가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팔을 길게 펴 그리스도의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다. 이 옆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세바스치아노 · 텔 · 피온보(Sebastiano del piombo 1487 -1547년)의 《나사로의 부활》(그림 5)에도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죽은 그란도 대신 부활한 나사로가 일으켜 세워지고 있다.
이 작품에 사용된 옆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1498년에 제작된 듀러의 목판화 《통곡》(그림 6)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미켈란젤로의 “듀라의 영향’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통곡》의 전경에는 수평 선상에 비스듬이 누워있는 죽은 그리스도를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그 인물의 구부린 다리나 길게 뻗은 팔은 미켈란젤로의 《피렌체의 피에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우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과 부활하는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는 모습과 비슷하다.

 

〈그림 5> 세바스치아노 · 댈 · 피온보,《나사로의 부활》 , 캠퍼스에 유화, 1517-19, 내셔널갤러리,런던

The Raising of Lazarus (1517-1519) Sebastiano del Piombo

 

《나사로의 부활》에서 듀러의 목판화 《통곡》( 그림 6) 의 영향은 그 외에도 여럿이 나타나고 있다.

《통곡》은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펼쳐지는 언덕 위에 십자가가 묘사되어 있고, 나무 밑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삼각형구도로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스도를 왼쪽 다리를 세워 앉은 자세로 뒤에서 들어올리려는 인물이 있다.

한편,《나사로의 부활》은 커다란 나무 밑에서 나사로에게 부활을 명하는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사림들이 모여 있다. 듀러의 목판화에 지주 보이는 십자가는 《통곡》과는 반대의 위치에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림 오른쪽 밑에는 부활한 나사로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나사로는 왼쪽 팔을 굽히고 왼쪽 다리를 길게 뻗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포즈는 듀라의 죽은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우는 인물과의 관련성올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처럽 《통곡》은 《나사로의 부활》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었는것을 알 수있다.

 

Durer, la grande passione

〈그림 6> 알프레히드 • 듀러,《통곡》, 1498~99년 (B.13) 목판회,39x28

 

그런데,《나사로의 부활》의「나사로j 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는 인물」의 밑그림을  제작한 것은, 세바스치아노 • 델 · 피온보가 아니라, 미켈란젤로였다. 미켈란젤로는 그 무렵 피렌체에서 산 · 로렌쵸 교회 정면의 설계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그 와중에 세바스치아노 • 텔 · 피온보를 위해 밑그림 2장을 그려 준 것이다. 이 그 밑그림에 듀러의 판화의 구도가 사용된 것은 아마 듀러의 판화를 이미 알고 있었던 세바스치아노 · 델 · 피온보가 밑그림의 제작 전에 미켈란젤로에게 그 형태를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처럼 미켈란젤로의 작품에는 듀러의 판화의 영향이 보인다. 세바스치아노 · 텔 · 피온보는 미켈란젤로와 듀러라는 영향 관계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20년 가까이 공동작업을 했다. 베네치아 사람인 세바스치아노 • 텔 • 피온보는 미켈란첼로와 1512년 말이나 1513년 초부터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당시 베네치아에서는 듀러가 모조품 제작 금지를 요청하는 소송을 이탈리아에서 일으킬 정도로 듀러의 모조품이 유행하였다. 그런 일련의 것들로 종합해 보더라도 베네치아사람이었던 피온보가 듀러의 모조 판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듀러의 모조 판화가 이탈리아에도 많이 유포되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추정되지만 세바스치 아노 · 델 · 피온보와의 공동작업으로 미켈란젤로의 듀러의 영향이 더 커졌으리라 생각된다.9)

이처럼 미켈란젤로는 세바스치아노 • 델 · 피온보를 통하여 듀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리라 본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듀러의 판화를 사용한 것은 아마 둘 다 경건한 도미니코파의 신자였다는 종교적인 공감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Noah's Ark floats in the background while people struggle to escape the rising water of the Great Flood.

〈그림 7> 미켈란젤로,《 대홍수》 ,1508- 12년 , 프레스코, 시스티니성당  천정화부분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자주 사용되는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시스티나성당의 천정화 《대홍수》(그림 7)에도 이 모티브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홍수를 피하여 바위 위의 천막으호 피난하는 피난민들, 화면 왼쪽에는 몸이 앞으로 구부린, 아마 죽은 사람인 듯한 인물을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묘사되어 있다. 《율리우스  Ⅱ 세 영묘를 위한 스케치》(l516 - 17년)에서도 죽은 융리우스Ⅱ를 뒤에서 천사들이 일으켜 세우고 있다. 즉 이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듀러의 판화나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에 있어서 죽은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모티브는 《피렌체의 피에타》나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두 작품이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올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하여 볼 때 이 모티브가「죽음」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한 죽음의 이미지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Ⅱ세 영묘를 위한 스케치》( 피렌체, 카서 보오나로티)를 제작했던 1516년에 세바스치아노 • 텔 · 피온보를 위하여 《나사로의 부활》의 밑그립을 제작했다. 거기에서 미켈란젤로는 부활하는 나사로를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으며《최후의 심판》에서는 죽은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데에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수난과 죽음만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부활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피렌체의 피에타》에서 사용된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미켈란젤로에 의하여 제작된 《나사로의 부활》를 위한 두 장의 밑그림과 관련하여 《피렌체의 피에타》에 숨겨진 의미를 밝혀 보고자 한다.

 

9) Michael Hirst, Sebastiano del Piombo, Ox ford, 1981, p.4l.

 

 

Ⅲ. [부활]과 피에타와의 관계

 

미켈란젤로의 《나사로의 부활》의 밑그림을 미켈란젤로의 부활 사상과 관련하여 고찰하고 보도록 하자.

미켈란젤로는 세바스치나 · 텔 · 피온보(1485-1547) 의 유화 《나사로의 부활》(1517-19년)올 위해 2장의 밑그림을 제작하였다. 우선 그 중에서 먼저 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윤곽선이 흐린 왼쪽 밑그림(그림 8) 의「나사로」의 오른팔과 왼쪽 다리 형태가 시스티나성당 천정화의 《아담의 창조》의 아담과 비슷하다. 대지에 몸을 기대고 왼쪽다리를 앞으로 펴고 오른쪽 다리를 구부린 이 포즈는 고대조각 《강의 신》의 포즈이다.


《나사로의 부활》을 위한 이 밑그림에는 나사로가 앞을 웅시하며 오른쪽 다리를 꼬고 앉아 구원을 원하는 것처럼 오른손을 내밀고 있다. 이 포즈는 《아담의 창조》의 아담과는 반대 방향으료 묘사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활하던 나사로의 자세에는 신을 향하여 손올 내밀고 있다.

이 포즈는 《아담의 창조》의 아담과는 반대방향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담이 하느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창조하게 되었듯이 한 번 죽었던 나사로도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세상에서 부활된 것이다. 즉 여기에서는 신의 창조 행위가 그리스도의 부활행위로서 표현되어진 것이다.

 

 

<그림 8> 미켈란젤로《나사로의 부활》의 밑그림, 보나미술관. Drawing of Lazarus and attendants by Michelangelo, which Sebastiano used for the painting.

 

예형론(typo!ogia) 에 의해 집필된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에 의하면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형이며 그리스도는 천지가 만들어진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제2의 아담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제2의 이브라고 보고 있다 10)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예형으로서 아담을 《피렌체의 피에타》의 죽은 그리스도에 사용하고 있다11)
그리고 아담의 한쪽 다리는 구부리고 다른 한쪽 다라는 쭉 핀 다리의 형태를 다시 부활하는 나사로에서 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여 보면 미켈란젤로가 창조된 아담의 형태를 부활하는 나사로에 동일하게 사용한 것은 그 주제가 아마 창조와 부활 행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볼 때 《피렌체의 피에타》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진 모습이므로 죽은 상태임이 툴림없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를 단지 죽은 모습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부활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부활에는 창조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 모티브는 미켈란젤로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그 중에서 《최후의 심판》의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는 장면의 중앙에 해골의 도움을 받으며 부활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구부린 다리의 포즈와 조금 위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은 《아담의 창조》의「 아담」하고 비슷하다. 그러나 앞으로 모아진 양팔은「 나사로」나,《린보의 그리스도》(British Museum NO, 166) 의 린보의 아담의 팔을 연상시킨다. 이 밖에도 《삼손과 데릴라》(옥스포드、오아슈모리언미술관) 에도 초능력을 잃어버린 삼손의 오른쪽 다리의 형태와 가슴을 가로지르는 팔의 모티브에 사용되고 있다.

 

《도니의 성가족》( 1503-6, 피렌체 우피치미술관)의 바닥에 앉은 성모는 몸을 뒤로 젖혀 어깨 위로 아기 그리스도를 들어 올리고, 뒤에서 성요셉은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다. 이 어린 그리스도에서도 오른팔을 앞으로 구부린 모티브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미네르바의 그리스도》(l519-21 로마 산타마리아 소프라미네르바성당)도 왼팔을 앞으로 구부리고 있다. 즉 부활을 명하는 그리스도와 부활하는 나사로의 동작이 같은 모티브가 사용되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도 앞으로 구부린 모티브는 그리스도의 수난 혹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음올 알 수 있다.


《나사로의 부활》의 오른쪽 밑그림에서 나사로는 오른팔을 앞으로 구부리고 있다. 이 앞으로 구부린 팔은 《브뤼허의 성모》( 1503-4 ,브뤼허,노틀담성당) 에서 동일한 모티브가 사용되고 있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성모의 다리 사이에 서 있는 어린 그리스도의 오른 팔은 가슴으로 구부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왼발은 앞으로 그리스도가 받아야 할 수난에 의한 죽음올 암시하는 것이라고 히버드나 툴라이 등은 지적하였다 12)


미켈란젤로의 《나사로의 부활》의 나사로는 건강하고 이주 건장한 육체로 부활하여 자신의 묘에 앉아 있다. 종래의 회화에서 나사로는 수직으로 서 있고 미라처럼 흰 천으로 둘둘 말려있는 상태로 표현되었다. 그 의미에서 본다면 미켈란젤로가 그린 나사로의 모습은 전통적인 나사로의 형태와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나사로의 모티브는 이미 말했듯이「죽음」과「부활」을 의미하지만, 미켈란젤로는 특히 부활한 육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의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죽은 막달라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그리스도가 부활하게 하는 이야기이다(요한 11장). 성서에는 한 번 죽은 인간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예는 매우 적다.13)

이 테마를 주제로 한 회화는 르네상스 이전에는 많이 제작되었지만 르네상스기 후기에는 불합리적인 이야기로 간주되어 그 예가 많지 않다. 그러나 1517년 l 월 클레벤스 VII세는 세바스치아나 · 텔 · 피온보에게 「나사로의 부활」을 주제로 한 대작을 의뢰했다. 왜 클레맨스 VII는 불합리하다고 간주된「나사로」의 부활을 주문한 것일까?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나사로」의 포즈에 피렌체의 「피에타」와 같은 포즈를 사용한 것일까.

나사로의 발이나 손의 포즈가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피에타》에서 부활한 「나사로」의 형태에 사용한 것은, 아마 「나사로」가 이승에서 육체로 부활한 것과 연관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피에타》에서 단순히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하는 죽음」만이 아니고 그 죽음에 의한 「부활」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부활은 「나사로」와 같은 육체의 부활이다. 즉 죽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아담의 창조」의 모습으로 「나사로」가 부활하는 모습이 융합되어 그리스도를 비롯한 죽은 사람의 부활은 육체를 가지고 그것도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서 부활한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미켈란젤로의 이런 생각을 당시의 종교적 논쟁의 속에서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l이 정인찬 편,「성서대백과」 제8권, 생명의 말씀사. 1980. p.272.
11) Esther G. Gordon. An Augustinian Interpretation of Michelangelo’s Sistine Ceiling," in The Art Bulletin LXI, 1979, Part 1. 고든온 시스티나예배당의 천정화의 《술취한 노아》를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 제16권 제2장를 들어 해석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은 예정론에 의거하여 집필된 것으로 고든은 시스티나성당의 전체적 구도률 비테르보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비테르보는 바티칸을 노아의 가르침이 전해져 옹 에트르스크의 거리로 보고 바티칸이 종교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바티칸올 정치적, 종교적인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12) Howard Hibbard, op. cit., .p.67.

13)「누가」 제7장 14 절- 14절,「마르코」 제5장 31 절-43절.

 

 

Ⅳ. 육체의 부활

 

15세기 후기부터 이탈리아에서는 플라톤을 다시 연구하게 되었고 플라톤의 영혼 불사사상이 그리스도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부활을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의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철학가 마르실리오 · 피치노(Ficino, Marsilio,1433 -1499)는 1497년「플라톤학파의 신학- 영혼의 불멸에 대하여(Theologica Platonica de lmmoπalitate Anirnarum)」 라는 플라토니즘에 근거를 둔 논문올 발표하여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피치노의 영향으로 1512년 라테란공의회에서 영혼불멸론은 카톨릭의 교리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14) 그리고 4년 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기의 철학자 폼포나치(Pomponazzi, Pietro 1 462- 1525)는 1516년에 출판된 그의 책「영혼의 불사성론」에서 자연적 이성에 의하면 영혼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고 불사성의 논쟁은 자기 인식과 보편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 논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하여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올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인간의 부활은 인간의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의 속죄는 신의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와 같은 논리는 루터 등 종교 개혁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로마 가톨릭이 1520년에 영혼의 부활론에서 육체의 부활론으로 바꾸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종교 개혁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클레멘스Ⅶ세( 재위 1523-34년)는 세바스치아노· 델 · 피온보에게 《나사로의 부활》을 의뢰한 것이다. 그것은 종교 개혁 운동자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클레벤스Ⅶ세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클레멘스 Ⅶ세는 당시 유명한 인문주의자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15)

클레멘스 Ⅶ세는 《나사로의 부활》 이외에도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등을 의뢰한 인물이다. 미켈란젤로와 클레멘스 Ⅶ세와는 교분관계는 미켈란젤로가 메디치가의 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던 같다.

 

클레벤스Ⅶ세는 l534년 3월에 시스티나성당의 제단화의 벽화로 《부활》을,입구쪽의 벽화에는 《반역의 천사》을 배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음해에 클레벤스 Ⅶ세의 사망으로 파울러스 Ⅲ세가 새롭게 교황으로 즉위하고 작품은 벽을 장식하는 작품에서 단독작품이 되고 작품의 주제도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최후의 심판》 바뀌게 되었다 16) 파울러스 Ⅲ세는 르네상스에서 반종교개혁이라는 종교적 전환기에 살았던 인물로 그는 통치 중(1534~48) 에 예수회의 승인, 트리엔토공의회의 소집 등 교회의 내부개혁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최후의 심판》을 반강제적으로 의뢰하였다고 주장되어 왔었다.

 

14) The Encyelopedia of Religion V. 5.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New York, 1987, p.320.
15)  크레멘스Ⅶ世는 1523년 비테르보대사교에 에기디스에 임명되었다. 그는 아고스티노회장이며 마르틴 루터와 친밀하게 교류를 하였던 종교개혁자이다. 비테르보는 가톨릭개혁운동이 강했던 지역이며 사보나활나의 숭배가 강하게 남아있다.
16) Howarcl Hibbard, op. cit., pp.240- 42.

 

 

이와 같은 움직임에 주목한 미술사가 마르시아 .B. 훌은 1976년에 논문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육체의 부활과 예정설」에서《최후의 심판》이 그리스도에 의한 구제와 육체의 부활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훌은 미켈란젤로가 만년에 쓴 소네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시에서 네오플라토니즘의 신비주의적인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17)《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인물은 확실히 크게 강조된 육체로 표현되어 있다. 가령 미켈란젤로가 네오플라토니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육체를 과소 평가했다면 《최후의 심판》의 인물을 《론다니니의 피에타》와 같이 표현했을 것이라며 톨나이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나타나는 부활 사상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최후의 심판》의 오른쪽 밑에 강가에서 부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해골의 상태로 있는 사람, 살이 불으면서 일어서려는 사람, 혼자서 일어서려는 사람, 그리고 천사에 의하여 위에 끌어 올려져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부활은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를 동반한 부활인 것이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가 영혼만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성서에서 약속한 부활도 육체를 벗어나 영혼만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body)와 더불어 부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8) 그 근거로 훌은 「코린트인에게의 편지 1」 제 15장 35절을 들고 있다.

 

그런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나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은 것 뿐입니다.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 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 하나에 각각 알맞은 몸을 주십니다 ...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연 영적인 몸{body)도 있습니다. 19)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서 죽은 사람들의 육체가 부활하는 것올 표현했다. 그리고 《피렌채의 피에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부활하는 나사로의 모습과 통일한 형태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7) Marcia B IIaLl, Michelangelo’s Last Judgment; Reurrection of the body and Predestination, pp.85-87.
18) Marcia B HalL, op. cit., pp.85- 88.
19)「공동번역성서」 대한성서공회, 1988년. 이하의 성경귀절도 이 성경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Ⅴ. 구원의 포즈

 

마르시아 .B . 홀은, 툴나이가 《최후의 심판》을 위해 스케치 뒷면에 그린 《카자 • 부오날로치 65F》이나 《윈저소묘 12771》을 《부활의 그리스도》의 밑그림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이를 《최후의 심판》의 그리스도의 밑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20)  그리고 《최후의 심판》(그림 9) 의 그리스도의 포즈를 분노에 가득 차 인간을 심판하는 그리스도로 해석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부활하게 하는 구제의 행동으로서 보고 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선행이나 율법의 준수나 공덕에 의해서 구제되는 것을 이단으로 엄격하게 배제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하느님에게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선한 하느님이 인간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부자연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 9>《최후의 심판》 . 1537-1541 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The Last Judgement (1534–41). Michelangelo

 

이러한 주장은「데살로나카의 1」제15장 5절과 9절의 “여러분들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 입니다 .
.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라는 구절과,「요한」 제 12장 46절에서 48절의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라는 성경 귀절을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이 《최후의 심판》의 그리스도의 포즈는 재판이 아니라 구제를 의미하고 있다는 흘의 생각은 1975년의 레오 · 스타인버그의 논문「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자비심이 많은 이단으로 하고 비치고」에도 언급하게 되고 있다,《최후의 심판》은 전체가 중앙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 아래에는 부활자가 위로 올라오려는 움직임과 오른쪽에는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좌우 대칭구도로 되어 있다,


《최후의 심판》의 인물 배치는 세 개의 동심원과 세 개의 수평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우선 최하층은 구원된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지만, 그들은 비교적 작고 서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왼쪽에는 아직 몸이 완성되지 못하고 뼈가 돌출되어 있고 근육과 살이 흙과 뒤엉켜진 상태로 땅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흙에서 부활한 사람도 있고, 천사에게 도움을 받아 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힘으로 위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오른쪽에는 아케론의 물 위에 죄인들이 탄 배가 있다. 공포감에 떠는 사람, 나락 밑바닥으로 던져진 사람들 심연 속으로 뛰어든 사람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영겁의 유폐 속으로 매장되기 위해 대지 위에 쓰러진 사람도 묘사되어 있다. 중간층은 부활한 육체를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사람들과 함께 원래는 하늘에 있었는데 땅으로 떨어지는 죄인들의 층이다.

여기에는 대지에 발올 불이지 않은 인체가 묘사되어 있다. 이 층은 신과 인간의 중간 단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3층, 즉, 최상층은 하늘에 있는 사람들의 영역으로 성모나 성인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맨아래 층의 구제된 사람들의 층이 다른 층 사람들 보다 크게 묘사되어 있다.

 

바자리나 콘디비는 《최후의 심판》에서의 그리스도를 선악을 재판하는 것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죄를 지은 사람」에게 무섭게 죄를 심판하며,「바른 사람」들에게는 상금을 주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21) 이 전통적인 견해를 이이받은 툴나이는 중앙에 나체의 그리스도가 위로 높게 치켜 든 오른손을 비난의 몸짓이며 기슴 앞으로 가로지른 왼손은 모든 부탁을 거절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표정에 대해서도 분노와 격정의 감정은 엿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높은 곳에서 의무를 집행하는 무표정의 심판관의 모습이라고 보고 있다.22) 바자리를 비롯한 전통적인 의견에 대하여 레오 · 스타인버그는 눈을 감고 오른쪽으로 목올 기울이고 있는 그리스도에게는 적어도 분노의 표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위로 들어올린 오른손은 심판의 포즈로 인식되고 있지만 유리우스Ⅱ 세의 분묘 하단에는 성모에게 안겨있는 어린 그리스도의 오른손이 반드시 심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미노스가 심판을 행하는 지옥의 장면에는 고문의 도구는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마르코 제9장 4절) 지옥의 모습은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옥에는 천사와 싸움하면서 밑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약간의 돈이든지 도리로써 머리를 거꾸로 하고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 엉덩이를 적극적으로 하고 천사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20) Marcia B Hall, op. cit., pp.85- 88.
21) 미켈란젤로와 비토리아 · 코론나와의 교제는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었던 l538년경이었던 것 같다. 비토리아 · 코론니는 1543년에 스피리티워리의 사람들과 교체하기 위하여 그녀의 고향인 나폴리로 떠났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녀를 통하여 스피리티워리의 사람들의 교류를 지속하고 갖고 있었다.

22) C. de Tolnay, op. cit. , p.89.

 

The Dream of Human Life, c.1533 - Michelangelo <그림 10> < 인간의 꿈> . 1533 -34년

 

 

이 장면은《최후의 심판》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소묘 《인간의 꿈》(그림10)에도 사용되고 있다. 단테의《신국》의 지옥편에 근거한 이 소묘는 나체의 젊은이가 가면이 들어있는 상자 위에 앉아 있지만 이 가면은 허위의 상징이다. 상자 위에는 젊은이의 상반신 크기의 공이 놓여져 있고 젊은이는 이 공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

이 공은 지구를 나타내고 있다. 젊은이가 앉아 있는 상자의 주변에는 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죄를 나타낸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 인물들은 삶은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사람(탐식), 여자를 꿀어안고 있는 남자와 남근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엉덩이를 내보고 있는 젊은이에게 입맞춤하는 여자(탐색 ), 돈주머니를 양손에 쥐고 있는 사람(탐욕), 두 사람의 소년을 막대기로 때리고 있는 사람(분노),노인의 망토를 잡아 찢으려는 사람(시기) 잠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나태) 등이다.23)

날개 달린 천사는 청년이 악몽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 트럼펫을 불며 급강하고 있다. 젊은이는 이러한 악몽으로부터 눈뜨고 천사를 쳐다본다.

 

젊은이의 주변에 그려진 악몽의 장면들은 《최후의 심판》의 오른쪽 밑에 죄로 인하여 천사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죄인들의 모습과 동일하다. 《인간의 꿈》은 젊은이가 보고 있는 악몽을 지옥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지옥을 사후 죄인을 영원한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젊은이가 본 악몽처럼 인간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세계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지옥의 표현은 지요토의 《최후의 심판》 (1356)의 지옥의 표현처럼 죄인들에 대한 고문의 종류를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열중이었다.

이처럼 중세사람들은 지옥을 고문과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한의 불구덩이로 표현하였다. 이에 비하여 미켈란젤로는 지옥올 하느님에 의한 무시무시한 심판의 장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인간의 양심의 가책의 알레고리로 표현하였다.

 

레오스타인버그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묘사된 지옥의 비참한 장면은 인간 하나 하나가 느끼는 죄의식의 표현이며 지옥에서의 고문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고 정신적인 고통이며 여기서 묘사된 사람들은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죄를 지은 인간 일반의 표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24)

다시 말하며 지옥은 비신앙의 세계, 혹은 살아있으면서 인간이 느끼는 여러 가지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살아있으면서 악몽의 지옥에 있는《인간의 꿈》의 젊은이는 천사가 불어주는 나팔로 인하여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영혼은 정제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악몽의 고통에서 해방된 순간 젊은이는 지옥으로부터 구제된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죽음이 꼭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도 물리적인 세계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기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전의 우리는 그 분과 합께 십자가에 못박히어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서] 제6장 5).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확실히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다. 바울이 다마스코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전의 사울은 죽고 바울로 다시 태어났다고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마도 의식의 깨달음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자고 있는 것이다"(누가)라고 말하고 있다.
나사로도 이 젊은이처럼 자고 있는 것이다. 또한 《피렌체의 피에타》의 죽은 그리스도는 이 젊은이의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젊은이가 꾸는 악몽 그 자체를 그리스도가 대신 받음으로 실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지옥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는 생각은, 1540년의 교회에서는 아직 인정되어 지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만년에 있어서 이와 같은 사상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스피리티워리 ( 정신주의자들) 나 비토리아 · 코론나이다. 미켈란젤로는 코론나와의 교제에 의하여 바르데스의「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서 제3장 28절)라는 가르침에 다가가게 된 것이다. 신앙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오리게네스(185-254년경)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나는데, 오리게네스는 지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죽은 사람들의 처벌은 존재하지만 이 처벌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몸의 고통에 따라 영혼은 조금씩 정화되어 부활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오리게네스의 의견을 교회에서는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이단이라고 간주되었던 오리게우스의 이와 같은 생각은 에라스무스와 같은 16세기의 인문주의지들에 의하여 다시 부활되게 되었다.25)


특히 조안 발데스(Juan Valdes 1500 -41 년)은 오르게우스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스페인사람으로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스피리티워리 (Sprituali정신주의자들)라고 불리는 발데스의 공감자들이 서클을 만들어 활동하였기 때문에 사상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신에 의하여만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26) 그는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신으로부터의 무상의 하사품이며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생긴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페인의 이단심문으로 소환되어 1532년에 이단선언을 받는다.

그러나 이 선언 전에 1531년 혹은 32년에 스페인을 떠나,이탈리아로 옮겨왔다.

처음은 교황 클레멘스 Ⅶ세의 재무관을 하다가 l534년부터 나폴리에 거주하고 교회개혁과 영적재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들이 안고 있는 무엇보다 중요한 교리는 구제에 관한 새로운 생각이었다. 그리고 구제주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 이것은 누구라도 지옥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와 같이 16세기의 사상적인 배경은 미켈란젤로의 「 최후의 심판」이나 「 인간의 꿈」을 구성하는 기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Ⅵ. 신앙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상

 

미켈란젤로의「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 라는 사상은 비토리아 • 코론나와의 만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두 사람의 교제는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최후의 심판》을 제작하고 있었던 1438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녀는 당시 모든 유명한 작가들과 교류하고 있었고 그녀의 시는 전 이탈리아에서 읽혀지고 있었다. 코론나는 1534년에, 조안 발데스의 서클에 합류하기 위해 그녀의 고향인 나폴리를 떠났다. 그러나, 그녀가 발데스와 만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가 죽은 1541년은 미켈란젤로가「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던 해이고 이  다음해 1542년에 루터파였던 콘타리니 추기경이 죽고 난 후 카라파 추기경을 장관으로 하여 이단심문이 발족되었다. 위험을 느낀 서클은 비테르보(Viterbo)로 옮겨갔다. 그러나,이탈리아에 머물렀던 사랍들은 이단규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발데스의 서클의 다른 멤버들과 같이 스피리티워리 교리를 강하게 신봉했던 코론나는 1545년 이후, 개혁파의 사람들과 연을 끊고 비관과 회한 속에서 생활했다. 그런 중에서도 그녀의 금욕생활과 자선행위는 지속되었다. 그 중으로 그녀가 가장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은 미켈란젤로리는 교제이었음에 틀림없다.27)


미켈란젤로는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코론나를 만나면서 더욱 강해졌다고 생각된다. 이 사상은《최후의 심판》의 지옥의 장면에, 잘 나타나고 있다. 카론의 배로부터 떨어지는 죄인을 필사적이게 붙잡으려는 인물이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지옥에 떨어지는 인간조차도 하느님이 구원한다는 생각이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티브는 《피렌체의 피에타》이나,《나사로의 부활》의 밑그림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코론나 그룹에의 탄압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분노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즉「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미켈란젤로의 신앙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 감정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테마로 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습작》의 5장 시리즈에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모와 요셉에 있어서 상징화 되어진 미켈란젤로 자신을 포함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 것인가라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우선, 지금 옥스포드에 있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습작》의 5장 시리즈에 있어서의 《루브르의 소묘》와 〈런던 • 브리티쉬 • 뮤지엄 》에는 죽은 그리스도가 Y자형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그 왼쪽의 성모는 왼팔을 앞으로 구부리고、 오른쪽 팔을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쪽 요셉은 탄식과 슬픔의 몸짓으로 양손을 펼치고 있다. 《윈져 • 캐슬의 소묘》는 미완성의 소묘로 그리스도는 Y자형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데 그리스도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축 쳐져 있어 분명히 죽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런던 브리티쉬 • 뮤지엄 》에서의 십자가의 아래의 마리아와 요셉은 그리스도의 발아래 몸을 기대고 있다. 이것은 선례도 없는 양식으로 너무나 꼭 붙어 있어서 개개인의 구별이 잘 안될 정도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옆에 붙어있는 듯한 성모의 포즈는 《최후의 심판》에서의 성모와 동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놀라움과 슬픔은 이미 극복하게 되고 자신들의 무력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할 수 있는 성모와 성요셉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죄와 구원만을 원하며 그리스도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 이 소묘들에서는 인류의 속죄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대한 죄의식이 은총과 구원을 열망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바뀌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이와 같은 신앙은 미켈란젤로가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제작중에 만들어진 《미켈란젤로의 기념 메달》에 반영되었다. 레오네 • 레오니에 의해서 제작하게 된 메달에는 개에게 이끌려가는 순례자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이 순례자의 모습은 노예술가 미켈란젤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메달의 뒷면 가장자리에는 미켈란젤로 자신이 시편 51장 13절에서 인용한 성서 귀절이 새겨져 있다.

「나는 허물을 범했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치고, 죄인은 당신에게 돌아올 것 같습니다.13절)」 .

이 성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피렌체의 피에타》에서 십자가로에서 끌려 내려온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리스도와「죽음과 부활」이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이러한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 옆에서 혹은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이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자주 사용되는 이 모티브는 미켈란젤로의 이웃을 돕는 정신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미켈란젤로의 지옥에는 고문에 의하여 고통받는 죄인도 없고 부활하는 사람들의 장면에는 뒤에서 천사의 도움을 받고 부활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며 부활하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카론의 배에서 지옥으로 끌려들어가는 남자를 뒤에서 불잡는 지옥에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에게도 이 서로 돕는 모티브가 사용되고 있다. 또한 파오리나 예배당의 벽화 《사울의 개종》(l542- 1550 바티칸 파올리나 성당천장부분)에서도 다마스코스로 그리스도 교도들을 체포하러가는 순간 갑자기 하늘로 부터 강한 빛이 비쳐서 눈이 멀게 되어 말에서 떨어진 비울을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인물이 있다. 톨나이는, 바울의 얼굴은 미켈란젤로의 이상화된 자화상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이 뒤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인간이 서로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미켈란젤로의 종교관이 표현인 것이다. 이 모티브에 대하여 미술사가 아이넴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인간은 하느님께 다가서는 길을 찾기 위하여 조력자가 필요하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28)

미켈란젤로의 종교관은 《피렌체의 피에타》에 명확히 나타난다.

 

《피렌체의 피에타》에는 이미 죽은 그리스도의 몸은 뒤틀려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아직 십자가로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그리스도를 좌우에서 받치고 위에서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죽은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부활에 시용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다.

즉 《피렌체의 피에타》의 그리스도는 부활한 나사로처럼,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부활한 상태의 표현일지도 모르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승으로 육체를 가진 부활인 것이다. 두 사람의 마리아와 니코데모는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돕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켈란젤로는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모가 아니라, 죽은 아들의 부활을 도운 성모를 만들어 냈다.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부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Ⅶ. 부활에서 탄생으로

 

미켈란젤로가 죽기 6 일전까지 제작하고 있었다는 《론다니니의 피에타》(그림11 )는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피렌체의 피에타》를 파괴한 1550년 중반부터 제작되었다고 한다.29)

그런데 이 작품에서 성모는 그리스도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몸을 앞으로 구부려 그리스도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 피에타에서는 일으켜 세우는 쪽도 도움을 받는 쪽도 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이 작품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기까지는 여러 차례 수정작업이 있었던 것 같다.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처음 어떤 모습으로 제작되었는지 현재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1973년에 발견된 파괴되어진 피에타의 단편을 종합하여 볼 때《론다니니의 피에타》는 현재와 같이 성모와 밀착된 형태가 아니라 양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으로 계획되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30) 미켈란젤로는 처음 계획했던 이 형태에 불만을 느끼고 다시 제작할 것율 결심하고 l555년경부터 그가 죽는 1564 년에 걸쳐 오랫동안에 걸처 제작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서로 융합된 형태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론다니니의 피에타와 매장을 위한 스케치》(1550-55년, 옥스포드、 이슈모리안 미술관)으로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준비 단계의 소묘이다. 이 소묘에는 세 사랍의 군상이 둘, 두 사람의 군상이 세 개 그려져 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형태에서 추정하여 보면 세 사람의 군상에서 두 사람의 군상으로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31) 중앙에 있는 소묘는 윤곽선이 흐리고 그 형태가 불명확하여 아마 처음에 스케치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오른쪽에서는 지금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죽은 그리스도를 양쪽에서 어깨로 들어 올리고 있다.
이 두 남자가 들어올리는 형태는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두 사람에 의하여 지탱되는 이 형태는 성모가 희생이 된 아들을 뒤에서 끌어안아 올리는 형태로 변하고 있다. 성모는 머리를 떨구고 그리스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림 11> <론다니니의 피에타> . 1 552~64년, 대리석, 미라노 스월츠성.Michelangelo Rondanini Pietà

 

그러나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그리스도는 성모에 의하여 일으켜 세워지고 있다기 보다는 몸이 성모에게 녹아 들어가 있다. 성모는 마르고 허약한 모습의 그리스도를 안고 바로 서 있다.

톨나이는 이 모습이 아들과 어머니의 사랑에 의한 정신적인 융합이며 종교적 최고의 감정이며 신비적인 감정의 표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2) 그러나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모습을 중세 회귀이며 정신적 내면화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피에타는 다시 제작되는 과정에 있었던 작품으로 미켈란젤로가 의도했던 형태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토니즘적인 사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미켈란젤로는 과연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미를 찾아내기 위하여 우선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의 소묘의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이 작업은 미켈란젤로가 만년에 추구하였던 신앙표현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론다니니의 피에타》은 1545년 미켈란젤로가 코론나를 위하여 제작한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그림 12) 에서 유래된 것이다.그것은 이 소묘를 받고 코론나는 이 소묘를 조각으료 제작하여 달라고 미켈란젤로에게 주문을 한 편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33) 아마 미켈란젤로는 그녀의 부탁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 소묘에서 나체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것 같은 몸짓으로 성모의 양다리 사이로 푹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앉아 있는 무릎의 사이로 그리스도가 서있는 구도는 중세의「성삼위 일체」에 보여지는 포즈이다.

 

북방의 로마네스크 미술로부터 발전한「성삼위 일체」는 의자에 앉아있는 하느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를 들어올리는 포즈이다. 이 포즈는 14세기의 이탈리아 미술로 애용되었다.
그것은 나중에「성안나와 성모와 유아 그리스도」의 패턴에도 사용되었다. 성안나의 앞에 성모가 앉고 그 무릎의 사이에 유아 그리스도가 서 있다. 성모는 성안나보다 유아 그리스도는 성모보다 작게 표현하게 되었다.

그것은 성모가 성안나의 유아 그리스도가 성모의 자식인 것을 나타내는 데 상용되었다.

만테냐의 《성가족》이나 미켈란젤로작 《부르쥬의 마돈나》에는 성모의 발의 사이에 유아 그리스도가 서있다. 34) 레오 · 스타인버그에 의하면 넓힌 성모의 무릎은 자궁을 의미하고 유아 그리스도는 성모로부터 태어났던 아이이기 때문에, 성모의 무릎은 출산의 심볼이라고 지적한다. 즉 이 무릎의 사이의 그리스도는 탄생,또는 실질적인 출산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35)

 

31) C. de Tolnay, op. cit., pp.89-90.
32) C. de Tolnay, op. cit., pp.90-91.

33)
34) Robert S.Liebert, M.D., Michelangelo, A Psychoanalytic Study His Life and Images, Yale University, Press, 1983, 313.
35) Leo Steinberg, The Metaphors of Love and Birth in Michelangelo’s Pieta,in stuies in Erotic Art, London, 1970, p.261.

 

 

Michelangelo, Study for the Colonna Pietà Pietà for Vittoria Colonna

<그림 12>《코론나를 위한 피에타》 ,1545년경.  이사벨 스트워트 가드너 미술관 보스톤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는 전통적으로「슬퍼하는 사람」과「피에타」와의 결합으로 이「피에타」의 형태는 성모의 무릎의 사이에 있는 유아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재구성한 것이다. 36) 이 소묘의 성모의 벌린 양다리의 포즈는 출산과 매장 양쪽을 나타내고 있다.《코론나를 위한 피에타》의 성모는 일반적인「피에타」양식에서 사용되는 것처럼 죽은 그리스도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양손을 위로 쳐들고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는것처럼 보인다.그리고 두 사람의 천사는 그리스도를 떠받치고 있다. 그리스도가 성모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순간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37)

그것은 이 소묘를 받은 비토리아 · 코론나는 미켈란젤로에게「“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고 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그리고 이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모든 저의 상상력을 뛰어넘었습니다」38)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를 미켈란젤로는 단지 비토리아 •코론나를 위해 그린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보면 이 소묘에 그려진 성모는 성모이기도 하지만 비토리아 · 코론나를 암시하기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는 죽은 그리스도를 성모가 혼자서 들어 올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모의 허벅지 사이에 들어 있다. 그리스도의 육체에 관하여 톨나이는 「예술가는 지금이야말로 생기를 잃은 그리스도의 육체에서 따뜻한 삶의 따뜻함을 표현하려는 것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주) . 톨나이의 지적처럼, 그리스도의 육체는 따스함을 가진 살아있는 육체로 보이다.

이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을 조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그리스도는 사랑에 의하는 성모와 그리스도의 융합이 아니라 성모의 품에서 태어나는 사랑의 결정인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모습에서 《피렌체의 피에타》 등에서 표현한 부활의 의미를 좀더 명확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신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의 획득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희망은 그의 마지막 소묘인 《성모자》(런던, 브리티쉬 · 뮤지엄)에 있어서는 유아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습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 된다. 성모는 지금 이 순간, 고통이나 슬픔에서 벗어난 표정으로 행복하게 태어난지 얼마 안된 유아 그리스도를 안고 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하여 다시 성모에게 태어난 것이다.

이 소묘에 그려진 성모와 그리스도는 미켈란젤로 자신과 비토리아 · 코론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켈란젤로는 마지막으로 비토리아 • 코론나와 다시 한번 이승에 태어날 날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7) Leo Steinberg, The Metaphors of Love and Birth, op. cit., pp259-265. 스타인버그는 issue의 의미에는 아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지적한다'. Issue는 의학용어로아이의 의미가 었고 원래 이 말의 의미는 배에서 나오는 것 -자손, 아이 - 이다.
38)     전게서, 127-8쪽.

 

 

나오면서

 

미켈란젤로의 대부분의 작품에는「일으켜 세우는 모티브」가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 모티브는 위에서 고찰하여 본 것처럼「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사상은 그의 시에도 나타나겠지만 조형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는 역시 형태로 자기의 사상을 표명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조형 예술의 사상은 형태 속에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일으켜 세우는 모티브」는 미켈란젤로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고 본다. 특히 이 모티브는 피에타라는 주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피렌체의 피에타》에서 죽은 그리스도는 니코데모와 두 사람의 마리아에 의하여 일으켜 세워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대신하여 속죄를 위해 희생이 된 영웅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강인한 육체는 《최후의 심판》에서의 힘센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한다. 이 두 작품이 동일한 정신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은 이 두 작품이 동일한 시기에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제작되었을 때 미켈란젤로는 비토리아 · 코론나와 만나고 있었다.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이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는 이 모티브를 사용하여 피에타의 소묘를 그리고 코론나에게 증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일으켜 세우는 모티브가 나타내는 사상은 스피리튜어리(정신주의자들)의 일원이었던 코론나를 통하여 이 서클과 미켈란젤로가 깊이 관계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비토리아 • 코론나들은 자선 사업, 즉 일으켜 세우는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토리아 · 코론나가 죽은 후에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는 이 모티브가 사용되었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는 이 모티브의 형태도 그리스도의 모습도 이전과는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리스도는 《피렌체의 피에타》에서 처럼 근육이 발달한 이상적인 몸을 가진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마르고 허약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미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하느님의 아들의 강인한 정신과 육체를 갖고 있지는 않다. 뒤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곧 쓰러질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한「인간의 약함」을 드러낸 인간의 대표자로 서의 그리스도가 강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미켈란젤로는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그리스도의 모습에, 신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을 새기려 한 것 같다. 여기에 르네상스의 영웅주의는 뒷걸음질치고 실존적인 세계의 파악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을 중세에의 회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파스칼이『팡세』에서 표명하려고 했던 것처럼 근대적인 주관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피에타》나,《론다니니의 피에타》그리고 《코론나를 위한 피에타》는 주문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제작되었던 작품이기 때문에 이들 작품 속의 그리스도도 미켈란젤로적으로 해석된 것이라 본다.《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표현된 불쌍한 그리스도에게 미켈란젤로 자신을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무릎의 사이에 서 있는 그리스도에서는, 죽음을 통한 부활과 탄생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제 4장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요한」 제 12장 25절에서 바울은 한 알의 보리나 곡식의 비유를 사용하여 윤회전생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에는 윤회사상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식물의 생명의 영속성을 인간의 생명의 영속성에 교체하는 것은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이미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39)


죽기 1 주일 전까지 제작하고 있었던 이 피에타상은, 다시 한번 성모의 배를 통하여 이승으로 태어나는 그리스도의 탄생의 모습이리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와 그리스도상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처럼 자신의 부활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바울처럼 의심하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 (「고린도 1」 제15장 6 절)고 믿으며 부활과 재생을 기원하였던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39) Leo Steinberg, The Metaphors of Love and Birth, op. cit., p.264.


 

*상기 논문은 원본과 다르게 수정하지 못한 오자가 있으며,  註 일부는 옮기지 못했거나 오,탈자가 많습니다.

 

 

 

 

Michelangelo Buonarroti Pieta St Peter's   Bandini     Rondanini    Palestri pieta.ca

 

pietà vesperbild ca 1400 bohemian limestone 38.1 x 39.1 x 14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Last Judgment

 

Human life dream allegoric representation. Created by Michelangelo, engraved by Best, Andrew and Leloir, published on Magasin Pittoresque, Paris, 1843

 

the works featured in Myth, Allegory and Faith is representative of the collection, illustrating in graphic form the sources, evolution and diffusion of what art historian John Shearman called “the stylish style.”

 

The Dream of Human Life | by Lisa Cheney

 

Florence, Galleria Degli Uffizi (Uffizi Gallery) The dream of human life or Allegory of human life, 1570-1590, by Alessandro Allori (1535-1607), oil on copper, 37x27 cm. Copy of a charcoal drawing by Michelangelo Buonarroti.

 

 

Michelangelo – 'Pietà Rondanini'

 

MICHELANGELO Buonarroti Study for the Colonna Pietà c. 1538. Black chalk, 295 x 195 mm.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Boston

 

Pietà Palestrina di Michelangelo / Pieta di Palestrina (casting in Pushkin museum) by shakko

 

Pieta di Palestrina (casting in Pushkin museum) by shakko

 

 

The Passion of Christ Lamentation Over Christ Albrecht Dürer -

 

The Holy Family Albrecht Dürer (1471–1528)

 

Virgin Sitting by a Wall by Albrecht #Durer, copper plate

 

 

Pieta

Michelangelo Buonarroti

 Michaelangelo - The Florentine Pieta (Cathedral Museum, Flo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