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
배신의 칼끝
어디서나 최고의 권력은 고독합니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구걸하는 사람들만 바글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는 그야말로 보옥입니다.
‘명상록’의 아우렐리우스, 아시지요?
대로마 제국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인 그 남자!
지중해가 로마의 호수였을 때 로마의 황제였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얼마나 많은 혀에 치이고, 얼마나 많은 사건들에 치였겠습니까?
그가 믿었던 친구 중에 장군 카시우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 카시우스를 형제라 믿고 이집트 근방의 국경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지키는 줄 알았던 카시우스가 거기서 ‘황제’임을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믿음을 줬던 친구가 배신을 한 거지요. 무엇보다도 모욕감이 컸을 것입니다.
주변에서도 난리였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작태에 대해서는 분명히 응징해야 한다고. 당신이라면 어찌할까요? 그날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절대로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망동을 삼가라.… 남이 나를 모욕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그만이다.”
말이 쉽지 의혹이 누룩처럼 부풀고, 배신의 칼을 맞아 쓰라림 속에서 분노가 솟구칠 때 차분해질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내공입니다. 실망으로 분노가 솟구치는 상황에서 분노를 성찰의 에너지로 바꿔 쓰는 그 지혜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까?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에 그는 친구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납니다. 왜 그랬느냐고 묻기 위하여.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본 후에, 친구의 얘기가 옳다면 권력을 양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당하는 쪽에서는 배신이지만, 하는 쪽에서는 홀로 자기 길을 가는 건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친구가 누군가의 칼에 맞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통곡합니다. 분수도 모르고 반역의 칼을 휘두른 친구의 배신이 아파서가 아니라 상처 난 우정을 화해하지 못하고 떠난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현제(賢帝)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니겠지요?
배신을 당했을 때, 당신은 어떤 타입이십니까?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내고 응징하는 타입이십니까?
아니면 왜 그랬냐고 묻는 타입이십니까?
신뢰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신뢰하는 자만이 물을 수 있습니다. 왜 그랬냐고.
속지 않기 위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믿음을 주며 일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실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는 자꾸 권력 뒤에, 재물 뒤에 숨어 박약한 자존감을 감추려 합니다. 더더욱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럴수록 그는 재물과 권력에 집착하면서 난폭해집니다. 악순환이지요.
아우렐리우스를 스토아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스토아학파는 우리 안에 신적인 불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신적인 불꽃을 발견해야 하는 곳은 경건한 성전도 아니고, 한가한 강의실도 아닙니다. 거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배신과 음모가 춤을 추며, 간교한 혀와 무모한 용기가 판단을 흐리게 하는 중생의 땅이고,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길을 찾고자 했던 깨어있는 마음에서입니다.
2000년을 내려오는 명상록은 언제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올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쓰였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자기가 자신에게 쓴 영혼의 일기입니다.
[고전톡톡 다시읽기]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나는 철학한다, 고로 자유롭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121~180)는 로마 ‘오현제(五賢帝) 시대’의 마지막 황제이자, 스토아학파의 주요 철학자다. ‘명상록’은 황제의 어록도, 황제 권력에 대한 장황한 연설문도 아닌, 아우렐리우스 자신의, 자신을 위한 ‘메모집’이라 할 수 있다. 황제보다는 철학자로 살고 싶어했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우주와 자연의 섭리, 공동체와 인간의 보편이성에 대한 사유를 비롯해서 스승들의 가르침과 일상의 도리들, 죽음과 행복, 마음의 평안에 대한 기록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행사할 줄 알았던 자유로운 ‘철인(哲人) 황제’의 사유를 담고 있다. 부드럽고 평온하면서도 단호하고 단정한 그의 메모를 읽노라면 안정된 치세를 연상하기 쉽지만, 사실 ‘명상록’의 한 구절 한 구절은 포화 가득한 전장에서 쓰인 것들이다.
단 한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막을 걸어가는 고행자처럼, 그는 죽음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흔들림 없이 사유하고 기록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다진다. 아우렐리우스에게 철학이란 그런 것이었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당장 꺼내어 쓸 수 있는 것. 한시도 내 몸과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 죽음조차 평온한 일상의 하나로 넘길 수 있게 해주는 것. 그에게 철학은 고담준론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이자 실천이었다.
●운명, 우주적 섭리의 또 다른 이름
‘명상록’에는 유독 죽음과 운명에 대한 기록들이 많은데, 이는 스토아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스토아철학자들에게 죽음이란 고통이나 종말이 아니라 해체와 소멸이라는 자연의 작용에 불과하다.
“어떤 것들은 생성되려고 서둘고, 어떤 것들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었으며, 생성되고 있는 것들도 일부는 소멸되었다. 흐름과 변화가 우주를 쉴 새 없이 새롭게 하는데, 그것은 시간의 부단한 진행이 끝없는 세월을 언제나 새롭게 하는 것과 같다…. 각자의 삶은, 말하자면 피의 발산과 공기의 흡입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그러하듯 공기를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이나, 네가 엊그제 태어나면서 받은 호흡 능력 전체를 네가 처음으로 그것을 낚아챘던 곳으로 돌려주는 것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반복해 말한다. 죽음은 피조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해체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선도 악도 아니라고,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삶 또한 마찬가지다.
시간이란 ‘생성되는 만물들의 급류’다. 무언가가 떠내려오고 무언가가 휩쓸려가는 시간의 급류 속에서 삶이란 잠깐의 체류일 뿐이다. 삶에서 주어지는 행복과 불행, 고통과 쾌락, 부와 가난에 일희일비하거나 다가올 죽음에 대해 불안해하는 자는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애와도 같다.
아우렐리우스에 따르면, 우리의 두려움과 집착과 망상은 사물에 대한 ‘그릇된 표상’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어둠 속에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이는 ‘어둠’ 때문이 아니라 어둠에 대한 나의 표상과 가치판단 때문이다. 어둠이란 빛이 부재하는 자연현상임을 인식한다면 공포스러울 것도, 당황할 것도 없다. 우리가 ‘쾌락’으로 여기는 행위들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성행위는 살이 접촉할 때 발생하는 ‘약간의 경련과 배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 대체 집착할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처럼 미세한 시선으로 사물과 사건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표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에 대해서도,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표상에 얽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그리하면 모든 것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인식하게 되리라는 것, 선도 악도 아닌 세계 자체를 긍정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명상록’의 또 다른 화두는 운명이다. 생사, 사고, 부귀, 강약 등은 우리 자신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들, 즉 운명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강에 낚싯줄을 드리운 어부에게 물고기가 많이 잡히느냐 안 잡히느냐도 운명이고, 세상에 태어나 무병장수하다 가느냐 요절하고 마느냐도 운명이다.
개체는 이 ‘운명’ 때문에 행복해하고 불행해하지만, 이것이 곧 우주적 차원의 행·불행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우주와 운명은 개체에게 무관심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채로 내버려두라. 단,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있으니, 고기를 잡으려고 낚싯줄을 드리우는 행위, 몇 년을 살다 가든 우주의 섭리와 공동체의 윤리에 부합하게 살려고 하는 행위는 개체의 의지요, 개체의 자유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나야말로 불운하구나!’ 천만에.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라. ‘나는 이런 일을 당했는데도 고통을 겪지 않았고, 현재의 불운에도 망가지지 않고 미래의 고통도 두렵지가 않으니, 나야말로 행운아로구나!’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행이나 불행으로 인도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다. 우주의 사건들은 일어나야 할 방식대로 일어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요, 운명이다. 인간이 여기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하지만 어떤 운명이 닥치든 초연하고 담담하게 대처할 수는 있다. 어떻게? 철학하기를 통해!
●철학, 자기구원을 위한 수행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인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세운 철학 학교를 ‘진료소’에 빗대 설명한다. 누구는 어깨를 삔 상태로, 누구는 두통을 호소하며 진료소를 찾듯,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자는 철학 학교를 찾아야 한다.
몸을 돌보는 것과 마음을 돌보는 것은 하나다. 전자에 규칙적 생활이 필수적이듯, 후자에는 일관성과 꾸준한 자기통제력이 요구된다. 철학자는 의사요, 철학하기란 치료행위다!
아우렐리우스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자신의 하루를 ‘진단’하고 ‘점검’한다.
‘스스로를 카이사르와 같은 황제로 착각하지 않고’ 보통사람들처럼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는지,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가식 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들을 두려워하고, 자비롭고, 맡은 바 의무에 대하여 용감’했는지 등….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그것이 마치 생애 최후의 행위인 것처럼 충실하게 완수하고자 한다. 전장에서의 삶은 고달팠고, 그와 로마의 운명은 이미 기울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철학을 통해 자신을 구원했다. 철학이란 매순간 자신에 대해 완벽한 지배 상태에 놓이게 하는 힘이요, 스스로를 구원하는 실천행위임을 보여준 것이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말했다.
1)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서 불행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마음의 움직임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이다.
2) 만약 당신이 대화로써 상대방의 결점을 고칠 수 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일깨우라. 다행스럽게도 그가 당신의 호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결점을 고친다면 그것으로 좋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는 결점에 대해서는 화를 낼 필요가 없다.
3) 인간으로서 당신은 얼마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가. 당신은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고, 바로 이웃에 있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찍이 본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볼 수 없는 후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당신을 알지도 못하는 전 시대에 살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4) 진심으로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싶다면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장점을 생각하라. 너라는 사람의 적극성, 그라는 사람의 겸손, 그녀라는 사람의 관용,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의 미덕과 장점을 생각하라.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동료 인간의 풍부하고 다양한 미덕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그러므로 항상 가까이서 그 사람들의 미덕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힘쓰라.
5) 지나치게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사람의 행동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용하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의 감각을 이용한다. 지각 있는 이는 자신의 행동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6) 어떤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굳이 판단을 내리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물 자체는 당신의 판단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그런 능력을 형성할 자연적인 힘도 없기 때문이다.
7)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남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은 얼마나 빨리 이 모든 것을 거두어들일 것인가! 그리고 시간은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아 갔는가!
8) 의연한 모습으로 똑바로 서라. 혼자 힘으로 설 수 없다면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똑바로 서야 한다.
9)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또는 무엇을 하든지 나는 변함없이 올바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금이나 에메랄드, 자수정이 사람들의 비난이나 평가에 동요됨 없이 보석으로서의 가치나 빛깔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 것과 같다.
10) 쓸데없는 상상력을 버려라.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꼭두각시처럼 남의 조종을 받지 말라. 현재에 충실하라. 당신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의 실체를 파악하라. 눈앞에 있는 모든 대상을 원인과 본질로 나누어 이해하라. 임종의 순간을 생각하라. 다른 사람이 범한 과오는 그것이 일어난 장소에 그대로 남겨두라.
11) 마치 별들과 함꼐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별들의 운행을 자세히 관찰해 보자. 그리고 원소들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이러한 작업은 지상생활의 더러움을 말끔히 씻어 준다.
12)다른 사람으로부터 유익한 것을 받고 그것을 다시 남에게 베푸는 일에 결코 인색하지 말라.
13)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이 일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혹시 나중에 이러한 행동을 후회하지 않을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라. 머지않아 나는 죽게 되고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동안 만이라도 이성적 존재이며 사회적 존재, 그리고 신과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14) 비록 당신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을 당했다 하더라도, 모든 세상 사람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15)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전체 삶에 공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행동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 의무를 다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라. 의무를 완수하려는 당신의 의지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시 외적인 어떤 것이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근심한다면 그 무엇도 당신의 정당하고, 건전하고, 신중한 행동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러나 어쩌면 불가항력적인 힘이 앞에 버티고 서서 방해할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장애물을 묵인하고 당신의 능력이 미치는 다른 일에 노력을 돌려라.
방해받고 있는 활동 대신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며, 바로 그것이 처음 의도한 바와 일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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