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철학, 본질과의 대면

rainbow3 2019. 9. 15. 13:53


철학, 본질과의 대면

 

철학의 본질은 앎 속에서 제 생각을 키워가는 것

 

 

 

 

 

적잖은 사람들이 점집을 찾아가 제 미래를 물어본다. 요즘도 소문난 점집들은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서 문턱이 닳는다. ‘철학관’들은 번성하지만 철학은 쇠퇴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다.

이 ‘철학관’들에서 행해지는 관상술에 관해 철학자 서동욱(1969∼)은 이렇게 쓴다.

 

“관상을 보는 행위는 ‘이론적으로’ 인식하는 행위가 아니다. ‘인식’은 개념의 매개가 불가결한데, 얼굴의 징표들은 개념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상을 보는 행위는 공동체의 감각에 따라 판단하는 ‘실천적 기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동욱, ‘일상의 모험’)

 

골상의 구조가 미래 운명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을까? 관상을 보는 이들은 골상의 구조와 미래 운명은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골상과 그것을 덮은 얇은 피부는 어떤 이들에겐 훌륭한 재화(財貨)다. 그러니 골상의 구조와 미래 운명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관상은 ‘학(學)’이 아니라 ‘술(術)’이다.

관상은 ‘개념의 보편성’이라는 구조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감각의 보편성’이라는 직감에 기초한다.

 

철학은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존재의 기원과 의미의 근거를 따져 묻는다.

하지만 점쟁이들은 내일에 닥칠 길흉화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객의 호기심에 응답한다.

그것도 아주 애매모호하게.

 

괴테의 ‘파우스트’에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네 이름이 뭔가?”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대답한다.

 

“그 질문 시시한 것 같은데요. 말이란 걸 그다지도 경멸하시고 일체의 외관을 초월해서 본질의 깊은 곳만을 탐구하시는 분으로선 말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한 것은 철학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철학자가 “일체의 외관을 초월해서 본질의 깊은 곳만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은 맞다. 철학의 바탕은 존재라는 ‘빅 퀘스천’에 대한 ‘생각함’이다. 이때 생각함은 의미가 만들어지는 기원들과 연관되는 문제다. 철학은 의미의 의미, 그 의미의 시초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철학관에서 의미와 그것의 기원들은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길흉화복을 몰고 오는 미래를 예측함이다. 위기들을 회피하고 생존의 최적화를 위해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를 아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가시계(visible world) 안에서 은하수는 작디작은 파편이고, 그 파편 속에서 태양계는 무한히 작은 얼룩이며, 그 얼룩 속에서 지구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점 하나다. 이 점 위에서 약간 특이한 물리화학적 성질에 복잡한 구조를 가진, 불순물이 섞인 탄소와 물로 구성된 작은 덩어리가 몇 년 동안 기어다니다가 다시 분해되어 자신을 구성했던 원소들로 되돌아간다."(버트란트 러셀·줄리언 바지니, ‘빅 퀘스천’, 재인용)

 

인간은 우주 속에서 우연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수수께끼다. 진화의 역사에서 끝없이 이루어진 생식세포의 고리 속의 하나를 이루는 고리, 유전자의 전달자, 지각을 가진 ‘생존기계’다. 그리고 인간은 죽는다. 이로 인해 인간은 더욱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단세포 해조류와 균류에게 생각이 필요없는 것은 그것들이 개체로서의 죽음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는 것들에게는 살아남으려는 노력도 무의미하다. 죽음에 잇대어져 있는 생명체는 제 체세포를 환경에 최적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형태를 바꾸며 진화해온 긴 여정으로 제 역사를 써간다.

철학이 예전의 영광을 뒤로한 채 사양화되는 학문이 된 것은 그게 먹고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을 먹고사는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치부한다. 아주 가끔 철학을 입에 올릴 때에도 ‘개똥’과 연관해서만 그 어휘를 사용한다. 그만큼 철학이 현실에서 멀고, 그만큼 현실에서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물론 철학을 모른다고 해서 사는 데 불편한 것도 아니다.

 

철학은 우리는 누구이고,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따져 묻는다. 당연히 철학은 삶과 세계를 구성하는 본질들과의 대면이다. 철학자들이 일견 자명한 것들마저 자명하게 여기지 않고 그걸 따져 묻는 까닭도 그 안에 본질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새롭게 사유하기 위함이다.

철학은 관습적 이해를 껍질을 벗겨내고 주체로 하여금 스스로 제 생각을 키워가도록 돕는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앎을 지향하고, 앎에서 길어낸 지혜를 먹고 살아간다. 이때 그 모든 동력이 생각함에서 나온다. 우리가 굳이 철학자로 살 필요는 없고 그렇게 살 수도 없다.

철학자처럼 생각함의 바탕 위에 삶을 세우되, “인생의 취약성과 예측불가능성, 우연성을 직시하고”(줄리언 바지니, 앞의 책) 가치를 향하여 선 존재로 사는 게 중요하다. 데이비드 흄이 했다는 말을 기억하자.

 

“철학자가 되라. 하지만 당신의 그 모든 철학의 한복판에서 여전히 인간으로 있으라.”

 

 

 

철학은 본질적으로 앎을 지향하고, 앎에서 길어낸 지혜를 먹고 살아간다. 모든 동력은 생각함에서 나온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일상의 모험’을 읽고 철학자 서동욱을 주목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 지루하고 하찮은 것, 욕망의 유예와 행복의 지연으로 진부한 지옥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바로 그것. 앙리 르페브르가 “혁명의 장애물·둑·난간”이고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말한 그것. 진리와 구원이 없는 부재와 목마름의 자리. 서동욱은 바로 그 일상의 구체적인 맥락들, 즉 소통·잠·자기기만·유령·관상술·얼굴·패션·웰빙·이름·분열증의 문학·애무의 글쓰기·해방의 글쓰기·노스탤지어·춤·예언 등에 철학의 빛을 비춰 그것들을 의미의 층위로 끌어낸다.

 

오늘의 철학을 만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철학 연습’은 철학을 향한 첫걸음을 떼려는 사람에게 유용한 도움을 주는 책이다. 철학자 서동욱은 난삽한 ‘현대’ 철학의 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 운동’을 시킨다. 그래서 스피노자·키르케고르·니체·프로이트의 세계로 안내한다.

스피노자는 당대 사람들이 잘 빠졌던 미신과 미신에의 예속에 대해 숙고한다.

키르케고르는 우리 마음 안에 도사린 ‘불안’이라는 심리적 경험을 따져 그 의미를 밝혀낸다. 아울러 실존·반복·신앙심에 대해 알아야 뒤에 오는 ‘실존주의’를 제대로 알 수가 있다.

니체는 기독교와 플라톤에서 시작된 서양의 가치체계를 해머로 부수고 다시 세운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차라투스트라’라는 가상의 예언자를 창조하고, 의지·힘·영원회귀·넘어선 사람(위버멘슈), 그리고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에 대해 깊이 사유했다.

들뢰즈와 푸코 같은 스타 철학자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철학자다.

프로이트는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다. 무의식에 억압된 성욕·은폐 기억·트라우마 등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학문으로 승화한다.

 

이어지는 하이데거·사르트르·메를로퐁티·레비나스·레비스트로스·자크 라캉·푸코·질 들뢰즈·자크 데리다 등은 이른바 20세기 철학 전성기를 구가한 스타 철학자들이다.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피겨스타 김연아 선수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 철학자들이다.

철학에 무지한 사람들조차 이들 중 몇 사람은 귀에 익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 사르트르는 실존과 존재, 메를로퐁티는 몸, 레비나스는 타자, 자크 라캉은 욕망과 무의식, 들뢰즈는 차이의 존재론,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연구, 자크 데리다는 해체와 ‘차연’에 대해 독보적인 사유를 끄집어낸다.

 

들뢰즈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 더 중요한 위상을 가진 현대 철학자다. 서동욱은 들뢰즈의 ‘차이’라는 개념을 알아듣게 설명한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다.”(들뢰즈, ‘차이와 반복’)

 

너와 나는 다르고, 이 다름은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존중되어야 할 가치다. 차이와 차별은 그 뜻이 다르다. 차별은 위계적이지만, 차이는 위계적 질서가 없는 다양성이다. 차별은 인종주의의 뒷배다. 차이는 공존의 윤리 속에서 평등과 평화 세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다. 이거 다 설명하려면 한이 없다.

 

‘존재와 무’는 오랫동안 철학적 사유의 핵심이었다. 철학자들은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무(無)가 아닌가라고 묻는다. 존재와 무는 한 몸으로 된 쌍생아와 같은 무엇이다. 존재는 무를 향하고, 무는 존재를 물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 스스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무에 대한 가능성을 알려오고, 이와 같은 가능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신을 알려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에서 태어나고 무로 돌아간다. 따라서 무는 존재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본질이다. 철학은 삶의 구체적 맥락에서 발현될 때 그 힘과 의미가 또렷해진다. 이를테면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고 복제된 것과 진짜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이밖에 돈·사랑·신체·관상술·터치스크린 같은 주제들에 대해 오늘의 철학은 어떻게 사유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어느덧 우리는 성큼 철학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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