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물소를 닮는 마음-아잔 수메도

rainbow3 2020. 6. 9. 08:28

 

 

 

 

 

 

지은이 아잔 수메도 스님은 미국 태생으로 태국의 유명한 수행자 아잔 차 스님 밑에서 공부하였다. 지금은 영국에서 여러 불교 사원의 조실로 계시며 영국불자협회(The Buddhist Society of Great Britain)의 명예회장을 겸하고 있다.

 

 

물소를 닮는 마음


아잔 수메도·지음
강 대 자 행·옮김
 

Patience

Ajahn Sumedho

(Bodhi Leaves No. B 10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참을성이란 덕목은 불교인들 세계에선 대단히 찬양되는 것이지만 현대와 같은 물질주의 사회에서는 원하는 것을 즉각즉각 구해오는 능력을 더 중시하지 참을성 같은 것은 별로 대단찮게 치부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온갖 인스턴트 제품이 범람하는 바람에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거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그 즉시로 그것을 손에 넣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을성이 매우 없어져서 혹시라도 구하는 것을 곧바로 못 구하는 경우가 생기면 단박에 심란해져서 "이놈의 세상 개판이군."라고 투덜대거나 성을 내게끔 되어버렸습니다.
하도 이런 불평소리를 많이 듣다보니 이 세상에는 사람들의 불평거리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구나 싶을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가령 파업 때문에, 또는 사람들이 신속하지 못하거나 효율적이지 못해서 우리의 성에 차지 않을 때 어쩌겠습니까, 기다리며 참아내는 길밖에 더 있겠습니까.


좌선하고 있는 중에 여러분 몸 속에 고통스런 느낌이 일어나거든, 자신이 얼마나 참을성 없게 그 고통을 면해보려 버둥대고 있는지 한 번 관찰해 보도록 하십시오. 열이 나거나 병이 들었을 때도 그 육신의 불편이나 고통을 얼마나 속상해하고, 조급하게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 쓰는지를 잘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이렇듯 버둥대고 속상해하고만 있어서야 언제 정신적 발전을 기약해 볼 틈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때야말로 참을성이라는 덕목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수행길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빗나가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이를테면 "인스턴트 선(禪)을 공부할까보다. 이렇게 기약 없이 상좌부(上座部) 불교에 매달려봐야 괴롭기만 할 뿐이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는 정말이지 지금 당장 빨리 깨쳐버리고 싶단 말이야. 이처럼 지긋지긋한 일들을 하면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시간만 허비하면서 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을 언제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나. 어디 시원하게 속성과정을 밟든가 기막히게 효과적인 알약이나 기계장치를 써서라도 금방 깨닫게 되는 길은 없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엘.에스.디(LSD) 환각제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 때 사람들은 이 약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속성법이라고 떠들어댔지요. "이 약 한 알만 삼켜보십시오. 그러면 뭐든지 훤하게 알게 될 테니까요! 구태여 번거롭게 승려가 되어 절에서 눌러앉아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 한 알만 복용하면 단박에 깨달을 테니까요. 약사나 마약 취급자만 찾으면 됩니다. 달리 애쓰고 있을 필요는 하나도 없어요."


정말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 그것뿐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몇 번 엘.에스.디를 먹고 환각상태를 맛본 연후에야 사람들은 깨달은 것 같던 기분이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은 전보다도 더 못한 상태, 참을성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게 아닙니까?

 

그래서 사찰에서는 참을성을 키우는 일이 변함없이, 여전히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태국에서는 특히 동북부에 있는 숲 속 사원에 가면 여러분은 얼마든지 참을성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맛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 생활은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불편하기 때문에 참고 견뎌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은 온갖 불쾌한 육체적 경험부터 견뎌내야 합니다. 말라리아 열병이라든가 뜨거운 여름철 같은 것을 말이지요. 사실 동북 지방의 여름철은 내 생애 중에 겪어본 중 가장 지겹고 황량한 계절이었습니다. 허구한 나날이 마냥 똑같이 지겹기만 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또 똑같은 날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모든 것이 지루하기만 합니다. "오늘도 무덥구나. 더위와 모기와 땀 범벅의 이 길고도 긴 하루여."


정말 끝도 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하루, 이런 하루가 나날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루해하던 어느 날 정신이 퍼뜩 듭니다. "아, 이 얼마나 참을성을 기를 좋은 기회인가!"
물론 여러분은 미국적 현대판 깨달음 방식에 대한 소문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온갖 과학적 기구를 다 동원해가면서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느낌을 서로 신나게 주고받으며 거기에다 깨달음까지 성취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게 뭐란 말인가. 이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한 시간 보내기가 영원을 사는 것만큼이나 지겨운데 끝도 없이 황량한 나날을 앉아서 지새우고 있다니."


그래서 여러분은 생각할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캘리포니아에 가면 얼마나 신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게 신나는 속에서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깨칠 수가 있을 텐데. 캘리포니아는 이따위 태국 동북부보다 훨씬 앞서 있고 가능성도 풍부해."라고. 그러고 있는 중에 이번에는 또 편지가 날아들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전세계를 쏘다니며 방방곡곡의 선지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친견하고 다니는, 성급한 미국인들에게서 오는 편지지요. 그러면 또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이렇게 온 전신을, 가사까지 땀에 적시며 모기에 뜯기고 앉아서."

 

이렇게 온갖 망상 속에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이윽고 여러분은 다시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 나는 참을성을 기르고 있는 중이지. 금생에 참을성만이라도 제대로 기르게 되면 헛되게 사는 것은 아니지. 조금이라도 더 참을성을 기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해. 캘리포니아에는 안 갈테야. 사람들의 넋을 빼는 그따위 집단 감수성 훈련그룹이나 현대식 정신요법, 과학적 실험 따위에 열중하고 있는 그런 곳에 내가 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 나는 여기서 이러고 앉아 있겠어. 모기가 팔뚝을 물어뜯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을 배우며….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이 무덥고 지루한 여름철을 참고 견디어내는 힘을 키우며."

 

그러고 있으면 다시 이런 생각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은 너무 곤두서있고 예민해. 이렇게 불안정하게 흔들리기만 하고 있어서야 무슨 공부가 되겠어. 왜 이럴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언제나 남들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자연히 그런 방향으로 나를 길들여 온 셈이고 그래서 쓸데도 없는 온갖 잡동사니 정보나 어리석어빠진 생각들을 잔뜩 긁어모아 남에게 매력적이고 즐거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했다. 그러나 태국 동북부의 사원에서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나. 그건 참으로 쓸데없는 짓이지. 즐겁게 만들어 줄 아무런 대상도 신나는 일도 없는 이런 곳에서 그것은 마음을 들쑤시는 정신적 습관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 것이 아무 알맹이도 없는 무의미한 것인 줄 알게 되었기에 이젠 신바람을 내거나 매력적이 되는 대신 다른 데로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때 우연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소입니다. 나는 물소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녀석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태국 물소는 참으로 세상에서도 제일 미련하게 보이는 동물이지요. 덩치는 커다란 놈이, 상판은 어쩜 그렇게 미련해 보이는지.


"가만있자. 나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게 아닐까. 토굴에 들어앉아 가사마저 땀으로 멱감으며, 물소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상상해보려 애쓰고 있는 이것 말이야." 그래서 물소의 영상을 마음속에 그리며 그곳에 죽치고 앉아있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우둔하고 더 미련하고 더 참을성 있게 되며 멋지고 영리하고 관심 끄는 쪽은 점점 퇴색해 가는 것입니다.

 

참고 견뎌내는 공부, 다시 말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모든 장애와 망집(妄執), 들뜬 마음 따위를 견뎌내고 그리고 밖으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공부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곳 치서스트 같은 곳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지요. 여러분들 중에 진정으로 치서스트를 견뎌내고 있는 분은 몇 분이나 될까요.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온통 불평투성이입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못 견디겠다. 이것도 모자라고 저것도 없다. 자유로운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등 불평소리가 많이 들려옵니다. 또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생활이 없다는 등 바라는 것은 많고 이래저래 마음은 마냥 들레기만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마음속에는 더 좋은 곳, 이보다 더 나은 어떤 곳이 항상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로 지금 있는 그대로를 수용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참을성을 입에 올려 운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동북부의 그 뜨거운 여름철을 내내 앉아 배길만한 결의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혹 열대병에 걸리더라도 집에 돌아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을 생각일랑 아예 일으키지 않고 일 년이 되더라도 능히 버텨낼 각오가 되지 않았다면 어찌 참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단 깨닫기만 하는 날이면 깨닫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재미있는 최신식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도 만일 깨달을 수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 때는 잔뜩 자존망대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부처님의 지혜는 교만과는 매우 거리가 먼 지혜입니다. 오히려 부처님처럼 지혜로워지려면 엄청난 참을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붓다의 지혜는 유별나거나 매혹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지혜는 핵 물리학자나 정신과 의사 또는 철학자가 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붓다의 지혜는 대단히 겸허한 것인 바, 모든 생기(生起)하는 것들은 반드시 소멸하며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이나 정신에 어떤 조건이 발생하면 그것이 조건지워진 것임을 알며 이 조건 역시 생기한 것이기에 반드시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解脫]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대로 바로 압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방금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라 말했는데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을 안다는 일이 정말 재미있고 매력적인 일일까요?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재미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응당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절대자인 신(神)이랄까 법(法)이랄까를 알고 싶다. 얼마나 기막히게 재미나는 일이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온통 축복이요 황홀한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명상하는 가운데서 그와 같은 경험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높이 올라가는 것이 그런 경지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 주는 재미는 마치 이 방 안의 공간과 같은 것입니다. 이 방 안의 공간,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재미있습니까? 나에게는 재미있지 않습니다. 이 방 안 공간은 다른 방의 공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방 안에 놓인 물건들이야 물론 재미있기도 하고 또는 없기도 하고, 아니면 좋거나 나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할 테지요. 하지만 공간은 그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에 대해 정말로 그대가 할 수 있는 말이나 생각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어 있다는 점 외에는 어떤 성질도 갖고 있질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비어 있으려면 사람은 참는 것을 배우는 방법밖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거기엔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기에 공간을 깨달으려면 방안에 있는 어떤 물건도 붙들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방안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열중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기를 멈출 때, 여러분은 그 방의 공간을 비로소 체험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많은 참을성과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자만심으로 차 있는 한 우리는 기껏 불상(佛像)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또는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어떻고 벽의 색깔이 어떻다는 둥, 또는 아잔 문 스님의 사진을 보면 신심이 난다, 아잔 차 스님의 사진이 더 그렇다는 둥 별의별 견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이 공간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때… 몸이 쑤시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들뜨거나 졸립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참아내면서 눈 여겨 살피고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입니다.

 

마음의 불평소리들을,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걱정하는 그 소리들을.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어떤 별나게 재미있거나 매력적인 인물로 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모든 생기(生起)한 것은 사라진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인식, 가식 없는 인식으로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붓다의 지혜는 딱히 그뿐, 조건지워진 것은 조건지워진 것으로 그리고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으로 아는 것, 그것뿐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데에 머물고 계시며,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더이상 어떤 것에 대해서든 몰두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은 더이상 어떤 조건에도 매혹되지 않으시며, 공간 안에 있는, 늘 변하기만 하는 이들 조건들에 마음쓰시기보다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비어 있는 공(空)의 쪽에 마음을 기울이십니다.

 

자, 이와 같이 여러분이 참선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쪽에. 공 쪽에 마음을 쓰게 되면 온갖 조건들[行]에 대한 습관적 갈구, 매료, 반감, 공포, 의심, 불안 등이 줄어듭니다. 이제 그런 것들은 다만 왔다 가버리는 것에 불과하며 자아가 아니며, 흥분하거나 낙담할 대상이 아니며, 그 나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조건들을 그대로 놓아둘 수가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왔다가 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만두어도 사라져 갑니다. 따라서 구태여 그들을 쫓아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사물을 제 갈 데로 가게 내버려 둘 수 있게끔 충분히 자유롭고 참을성 있고 버틸 힘이 강해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투쟁과 갈등으로부터 무지한 마음이 벌이는 끝없는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돌아보면 이 무지한 마음이야말로 시종일관해서 무엇이든 만나는 족족 분별하고 평가하면서 어떤 것에는 매달리려 애쓰고 어떤 것으로부터는 피하려 애쓰며 모든 시간을 보내어 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한 얘기를 깊이 숙고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모든 시간을, 못 견딜 일을 견뎌내는 데에 써 보십시오 아무리 못 견딜 것 같던 일도 참을성으로 대하면 견딜만하게 됩니다. 남들을 그리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참고 견디어 보십시오. 그것에서 굳이 잘못된 면만 찾아내려 들고, 그래서 나 같으면 이렇게 만들고야 말 것인데 하고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제 나름으로 갈 길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은 그럴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세상을 참고 수용하는 일뿐입니다. 이렇게 말한다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거나 좋아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나의 말은 자신의 혼란을 실체로 인정해주어 그렇지 않아도 혼란투성이인 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는 뜻, 불평하고 저항하여 마찰과 혼란을 빚지 않고도 얼마든지 평화롭게 그 속에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