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인과와 도덕적 책임-나나야까라

rainbow3 2020. 6. 9. 08:49

인과와 도덕적 책임

D. 나나야까라 지음
강대자행 옮김

Causality and Moral Responsibility

D.D.P.Nanayakkara
(BODHI LEAVES NO. B.8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인과와 도덕적 책임

 

불교는, 육체 및 정신의 작용을 정신물리적 에너지의 역학적 흐름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유일한 지식체계라는 점부터 먼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부처님이 설명하시는 정신물리적 역학의 세세한 의미를 여기선 깊이 파고들 필요도 없고 또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 의하면, 흔히 ‘삶’이라고 불리우는 현상의 정체는 단지 인과관계의 진행일 따름이고, 그것은 정신적 에너지와 육체적 에너지간의 부단한 상호작용과 관련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는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순간적으로 생겨났다-사라졌다-생겨났다 하면서 생성[有]의 흐름[流轉]을 이룬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매순간의 생성은 다음 순간의 다른 일어남을 유도하여 원인-결과-원인의 순환을 지속시켜 나갑니다. 생겨남 때문에 사라짐이 있고 사라짐은 또한 생겨남의 전제조건 입니다. 그럼으로써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란 인과관계가 진행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대성의 세계는 큰 변화의 세계일 뿐입니다. 인과관계가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것은 바로 이 변화에 의해서 입니다. 과거의 순간은 현재 순간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고, 현재 순간은 미래 순간의 발생을 조건지워 줍니다. (물론 바로 직전의 순간만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작용하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는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다르지만은 않은 인과의 연속작용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정신물리적 에너지 단위들이 이 몸뚱이라고 하는 신체적 구조 안에서 찰나로 생멸하면서, 인과관계의 과정을 지속하고 있는 동안 생명은 지속하여 인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이 멈추는 것을 불교에서는 죽음으로 봅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이 결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금생의 마지막 정신물리적 에너지의 양이 다음 생의 첫 정신물리적 에너지의 단위를 형성합니다. 통속적으로 이것을 재생(환생)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고-죽고-태어나는 연쇄관계가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몸의 주인으로부터 다음 몸의 상속인으로 흘러가는 에너지의 연결작용 때문에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잠재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과법 즉 원인-결과-원인이라는 토대 위에서 존재를 계속시키는 자양분 또는 원동력을 축적하는 것이 미혹한 마음입니다. 이 연쇄의 고리에서 결과는 원인 자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인과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자양분 또는 연료를 끊어버려 마음속에 있는 불순물을 없애버리면 인과의 속박에서 해탈하게 됩니다. 그러나 번뇌에 찬 마음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지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도록 강요하는 어떤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번뇌가 인과율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고 계속 작용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히 업의 교리에 입각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교리[業設]는, 부처님께서 무지의 장막을 꿰뚫어 마침내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신 데에 전적으로 연유하고, 또 바로 거기서 나온 직접적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적으로 이해된 업의 작용은 부처님 이전의 그 어떤 종교적 사상이나 인도의 철학들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사후존속(死後存續)이나 업에 대한 언급이 베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고 다만 브라흐마나(Braahma.na) *7 에 암시 정도로 나타나 있을 뿐이며, 초기 우파니샤드에 약간의 견해가 나타나고 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윤회론을 분명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불교사상에서 빠알리어의 ‘kamma’ 산스끄리뜨어의 ‘karma’가 가지는 전문적인 의미는 의지적 행위 또는 의도적 행위란 뜻입니다. 행동을 야기시키는 것은 바로 이 바라는 생각입니다. 즉 의지가 행동을 조건지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 *8 을 발견하시고, 존재의 지속을 인과적 요소와 연관시켜 이를 업의 이론으로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불교에 있어서 업의 교리는 철저한 결정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우연론도 아닙니다. 이 두 가지의 극단적인 관점을 피하여 부처님은 중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인생이 그 어떤 절대적인 신의 계획적 의도나 조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셨고 또 한편으로는 삶은 인과관계의 방식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전개된다는 진리를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내리신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이 지은 생각의 주물공장에서 스스로 찍어낸 작품일 따름이다.” 부처님은 작위적 의도 내지는 그 의도의 구성요소인 의욕을 업(karma)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하여 인류의 행복을 위해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이끌어 줄 윤리기준이 전혀 없었던 시대에, 도덕적으로 지켜 마땅한 고귀한 윤리적 가치를 세웠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오로지 인류에 대한 자비심에서 였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상태와 연관되기 마련이므로 우리가 지어 나가야 할 일은 행위에 유익한 조건이 될 수 있는, 윤리적 면에서 고양된 정신적 상태를 만드는 일입니다. 행동을 결정짓는 생각 자체가 자기향상에 알맞도록 도덕적으로 고양되려면 윤리적인 면에서 성격이랄까, 인간성이랄까 하는 것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의 윤리적 쇄신을 특히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휘어잡는 번뇌들을 약화시켜 마침내 근절시켜 버리는 윤리적 노력의 순서를 수행 방법론 속에 잘 엮어 놓으셨습니다.

 

청정한 마음은 모든 업으로부터 해탈케 하는 데에 반해, 번뇌에 찬 마음은 업을 자꾸만 짓게 하는 힘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바퀴 속에서 한 생은 시간상으로 따져 별 것 아닌 듯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금생의 모든 행위는 가차없이 인과법에 따라 다음 생을 지배하게 되므로 금생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업 또는 의지[行]는 감각적 접촉[受] 인식[想] 그리고 의식[識]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인과의 지속적 흐름에 필요한 힘을 취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각 존재가 좋게든 나쁘게든 제나름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상황의 유형을 조건지우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해온 바의 결과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위에 세워져 있다… 수레바퀴가 소의 뒷발굽을 따르듯 악은 그것을 행한 사람의 뒤를 따른다… 그림자가 사람을 떠나지 않듯이 선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같이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인간이면서도 사람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까닭은, 주로 윤리적인 의미에서 선하거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거나 또는 악하게 마음낸 그 의지적 생각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의도적으로 행한 경험내용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선도 악도 아니든, 현재의 생각의 찰나[心刹那]를 조건지우고, 또 바로 다음 찰나는 현 찰나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지금 미래를 향해 방출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당연히 우리의 나아갈 궤도를 조건짓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도, 운명이나 숙명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생각의 성향과 관계있을 뿐입니다. 즉 계속 이어질 존재의 유형을 형태지어 주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음 속에 선 또는 악이 어느 정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현재로부터의 연이생(緣已生)이기에, 원인을 이루는 근거 즉 생각이란 근거를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사람은 현 순간을 윤리적 향상 쪽으로 조건지울 수 있으므로, 조건지워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입장은 결코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숙명론을 펼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현재 생각의 찰나들을 윤리적으로 고양시킴으로써 현재를 준거하여 일어나게 될 미래 생각의 찰나들은 자연히 더 좋아지는 쪽으로 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사에 따른 모든 행동은 그렇게 행동하도록 밀고 있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행동은 개인 각자가 그렇게 행동하려는 의도를 스스로 만들어 낸 탓으로 취해지는 것이니까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감관 또는 느낌[受]과 상호 작용되는 의지작용[行]은 말을 하도록 만들거나 행동을 하도록 만들며 때로는 두 가지를 동시에 유발시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 분명히 드러난 행위들은 윤리적으로 판단해 보아 건전한 마음 상태나, 건전하지 못한 마음상태, 또는 건전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은 마음상태 중 어느 것에건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리적인 측면으로 보아 이로운 행위를 지을 수 있는 업인(業因)을 내게끔 우리의 생각을 윤리적으로 순화시키도록 강조하고 있으므로, 우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계행(戒行)면에서 건전치 못한 마음상태를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일입니다. 그러자면 쉼없는 경계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순간일지라도 경계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믿었던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감각을 재료로 하여 생각을 구상화시키며, 인식은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을 인지합니다.

 

정신이 얼마만큼 평온하고, 혼란스러운가 하는 정도는 자신이 마음 속에 스스로 일으켜 놓은 생각의 성질에 따라 좌우됩니다. 행복을 자기 것으로 지켜 나가는 주체는 곧 윤리적인 계를 척도로 삼아 이에 제어되는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방법의 요지는 자꾸만 산만해지려는 생각을 거두어 들이고 마음이 변덕을 떨지 못하도록 각자가 수행에 직접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먹은 음식으로 나의 배고픔을 달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남의 마음을 단련시켜 줄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단련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업의 작용은 인과현상의 한 측면에 불과합니다. 남전대장경의 하나인 중부경(Majjhima Nikaaya)에는 업과 과보 간에 내재하는 일정한 상호연관성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지면상 거기 쓰여진 많은 상호관련성을 다 들 수는 없지만 몇 가지 특수한 예를 들 필요는 있을 듯 합니다. 그 경에 의하면 동물을 해치거나 골려주거나 잔인한 짓을 한 사람은 병약하기가 쉽고, 반면에 동물들을 잘 돌봐준 사람들은 건강하다고 합니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화를 잘 내고, 불쾌한 성격에, 남을 혹사시키기를 예사로 하는 사람은 못생긴 외모를 타고 나기 쉬우며, 그 반대인 사람은 단정한 용모를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남의 재산이나 성공을 시샘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고, 반대인 경우에는 존경과 명예를 얻게 됩니다. 또한 남에게 보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재산이 없기 쉽고, 허영에 가득 차고 거만해서 마땅히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천한 가문에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로 든 상호관련성만을 가지고 일반적인 추론을 끌어낼 수는 없겠지만, 인간생활에서 드러나는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일어난 우연한 행운도 아니고 우발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현대의 유전학은 유전의 기초를 체계화시키는 데 아직 미비한 상태여서, 예컨대 건강이나 장수, 매력적 자질, 재능, 적성, 기질과 같은 결정적 기본 유전인자를 알아내는 기능면에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한 인간이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에게 고루 똑같이 퍼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적인 견해로 보아, 사람은 자신이 일으킨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자의로 하는 행동은 어떤 특정 순간에 있어서 건전한 마음, 불건전한 마음, 혹은 건전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은 마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일 뿐입니다.

 

착하든지, 악하든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든지 하는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을 취하게 하는 마음상태인 것입니다.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변화생성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생각도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생성과정 속에서 생겼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는 생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악한 상태의 마음을 착한 마음이 극복해 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지속적인 수행이 없을 때는 착한 상태가 악한 마음으로 더럽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을 재는 표준은 생각에 대해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도덕적 요소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의로 입력시킨 경험내용의 성격에 따라서 다시 몸을 받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한 행위의 결과는 미래 언젠가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행동 하나하나의 결과를 따로 떼어 어떤 특정 행위와 연결시킬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두 개의 그릇 속에 똑같이 나누어 넣은 소금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두 그릇에 똑같은 분량의 소금이 들어 있어도 한 쪽에는 물을 적게 담고 다른 한 쪽에는 많이 담는다면 짠맛은 서로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비유는 업의 결과를 일반화시켜서 요지부동의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추리는 그릇된 견해를 낳습니다. 악한 마음의 소유자라도 후에 덕스러움을 되찾아서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윤리적 향상 쪽으로 흐르게 조건지울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에너지 흐름을 어느 정도는 건전하게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 생에서 갖는 마지막 생각의 찰나가 인과법으로 보아 건전한 것이면, 생성력으로 충전된 재결합력 때문에 그와 가장 닮은 종류의 생각들 쪽으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더 행복한 환경에서 새 몸을 받을 수 있는, 최초의 정신물리적 에너지 충격을 만들어 내는 조건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건전하지 못한 마지막 생각의 찰나는 불행이 있는 하향의 길로 몰아갑니다.

행복의 기본요소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온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은 서로를 조건지우므로 마음의 평온은 인과법으로 보아 유리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흔히 병을 불러오는 것은 신체작용과 상호관계하는 해로운 생각입니다. 그럴 경우 고통스러운 느낌[苦受] 내지는 인간적인 불행이 일어나게 되며, 그것은 꼭 차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을 잘 지키는 것이 곧 행복의 관건”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악업을 짓게 되는 원인은 반드시 그 뿌리를 뽑아버려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주요 원천이 되고 있는 기반을 다른 쪽으로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오염시키고 동요하게 만드는 삼독심 같은 개념들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 속에 강조되고 있는 정진방법, 예컨대 정정진 정사유 정견 같은 항목에 의지하여 근절시켜야 할 것입니다.

업의 작용은 너무나 복합적이기 때문에 부처님 지혜 말고는 아무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주의 구조에 관한 것만 해도 상대성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무한한 은하계를 부처님은 모두 꿰뚫어 관찰하실 수 있었지만, 부처님 제자 가운데 천안(天眼)제일이었던 아누룻다 조차도 한 개의 은하계밖에 살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편적 인과현상의 얼키고 설킨 구조와 의미를 깨달으셨던 부처님은 인간은 스스로 쌓아올린 정신적 구조에 입각한 존재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현상에는 마음이 선행(先行)한다. 마음이 그들의 지배자이다. 현상은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이것은 법구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씀이며, 법구경은 불교 경전의 압축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조차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인과에 얽혀 있습니다. 그 과거의 행위들이 지금의 우리 삶을 결정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행위들이 미래를 결정하게 됩니다. 좋든 싫든 간에 현재의 인간은 과거에 자신이 지은 행위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미래에도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에서 윤리적 가치쪽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이에 의지해서 살아나가도록 대중들에게 훈계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의 행복을 얻으려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라고 인과법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업에 대한 교설은, 다른 생명체의 안녕에 미치는 자신의 행위의 효과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만드는 도덕적 책임감은 우리를 윤리적으로도 향상시키지만 현재나 미래에 우리 각자의 성향이 더 나아지도록 도와줍니다.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는 윤회 속에서의 이 한 생에는,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는, 세상을 멀리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심을 기르는 계기가 됩니다. 남을 미워할 만한 근거란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비심을 내야 할 이유는 허다합니다. 그중 하나의 경우로, 도덕적 인과관계를 깨달을 때 우리는 자비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해

 

7) 브라흐마나(Braahma.na) : 광의와 협의의 두 뜻으로 쓰임. 광의로는 각 베다의 본집(本集) 부문인 상히따를 설명하며, 또한 이를 제식에 적용하는 법을 설명한 산문 주석서로서 협의의 브라흐마나(祭書), 아란냐카(林書), 우파니샤드(義書)의 총칭. 협의로는 제식의 실시 방법과 찬가(讚歌), 주사(呪詞)의 의의. 목적을 해석하거나, 제사의 기원. 비의(秘義)를 밝히는 일련의 설명적 문헌. 여기선 협의의 뜻으로 쓰였음.

8) 연기법(緣起法. Paticca Samuppada) : 정신적 물질적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상호관련되어 성립해 있는 것으로 독립 자존해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원인과 조건들이 없어지면 결과도 자연히 없게 된다는 가르침으로 불교의 기본을 이루는 진리.

 

* B.P.S의 wheel publication No.47 「불교와 신의 개념」참조.

* 빨리 경전 증지부경(增支部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라 하여 “비구니들에게 수계하게 된 탓으로 정법시대가 당초의 천 년에서 오 백 년 간으로 줄어지리라”는 대목이 있다(증지부 8권 51). 이것이 부처님께서 그런 맥락에서 말씀하신 유일한 예이다. 이것이 후에 가필된 문구인지, 아니면 마치 오백 비구란 말이 많은 스님의 무리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오백 년이 긴 세월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 아마도 긴 시간을 뜻하는 후자의 해석이 옳을 것 같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반드시 문제가 생겨날 것이며, 그것이 가져올 사태, 즉 자신이 가르치신 교법이 단명해지는 사태를 예견하셨을 것이다.   

* 저자는 앞으로 펴낼 불교관계 저술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부처님이 상세히 설하신 에너지 원리의 깊은 의미를 서술할 예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