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w of Karma and Mindfulness
카렐 베르너 지음 김봉래 옮김
업에서 헤어나는 길
사람들은 이 세상을 자기의 뜻과는 아무 관계없이 별개로 돌아가는 세계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어떤 개선의 노력도 소용이 없는 적대적인 세계속에 자신이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느낌마저도 갖는다.
인류발전 초기의 원시단계에서 사람들은 물질세계의 모든 현상에는 그 배후 에 어떤 의식을 가진 개체가 하나씩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상상하였다. 이 들을 보통 신 또는 신령이라 부르면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들 강력한 세력들과 교섭을 가져보려고 애쓴다. 그 단계에서도 사람들은 신들의 처분 만 기다리고 있기는 싫어서 직접적 이해가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발전 단계에 오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물 론 자기 생에 일어나는 사건까지도, 죄다 관장하는 힘과 권능을 어떤 절대 적 존재, 전능하신 한 분의 창조주에게로 돌리게 되고 그리고는 이전의 단 계에서나 마찬가지로 이 세력있는 존재 - 사사로운 인격체이면서도 보편적 힘을 가진 것으로 상정된 존재 -와 교섭을 해보고자 애쓴다.
사람들이 이 창조주이자 세계의 통치자인 존재를 상대로 해서 자기 이익을 꾀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여 갖가지 가치관이 동원되고 있다. 즉 기도를 통해 설득하려 드는 천진한 방법에서부터 물질적 복을 기대해 희생을 올리 겠다는 신과의 흥정방식이 있는 가 하면 명상을 통해 접근해 가는 신비주의 자의 미묘한 방법에 이르기까지 여러 길이 있는 것이다.
과학이 자리잡게 된 최근의 발전단계에 와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조정하는 비인격적인 자연의 힘을 공식에 의해 설명하기에 이 르렀으며 이 힘을 그들은 자연의 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기껏 물리적 사건이나 일부 심리적 현상에 관한 법칙을 파악, 이해하는데 그칠 뿐이고, 도덕적 행위의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는 법 칙성에까지 그의 관찰을 확대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분야에선 과학자들 역시 현명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세상을 잘 돌 보시어 사람들이 하는 소행에 대해 공정한 응보를 내려 주실 것으로 믿어마 지 않거나 아니면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에 있어 어떤 원칙성 이 작용한다는 생각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그 어느 쪽이건 둘 다 현대인들의 시야가 얼마나 좁아 빠졌는지 잘 보여주 고 있는 것이며, 오늘날 세상꼴이 이처럼 한심하게 돌아가게 된 직접적 원 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전능하신 창조주를 믿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믿음 때문에 관찰과 실험 을 통해 얻어내고 추상적 사유과정을 통해 공식화시킨 자연법칙에 관한 자 신들의 지식을 도덕적행위의 영역에까지 확대시키는 노력을 제대로 해볼 수 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만일 매사가 신의 뜻에 달렸고, 신이 바라지 않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믿어 버린다면, 도덕적 영역에도 어떤 자연법이 작용하고 있는지 탐 구해 보고픈 의욕이 생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 반대로 요즘 자주 목격되듯이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 지거나 아주 사려져 버릴 경우에는 적수 공권으로 이 야박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히 남에게야 어떤 해악을 끼치든 돌아볼 것도 없이 자기 이익만 최대로 챙기면 그만이라는 식 이 될 것이다.
남에게 끼친 결과가 언젠가는 자기를 되옭아매게 될지도 모른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오관(五官)을 통해 인식한 것만 믿으려 들고, 그 밖에 선험 적인 것들을 일체 부정해 버린다면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 영역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들에 대해선 캄캄할 수 밖에 없다. 설사 그가 제 아무리 우수한 과학자이더라도, 또 현상계의 법칙에 밝고 이것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이런 사람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고도의 도덕적 수 준에 적합한 것이 되기 어려우며, 따라서 그의 그 훌륭한 과학도 권력을 탐 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가장 사악한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어 버릴 수가 얼마든지 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보통 모든 이웃들의 안녕과 복지를 생각하는 현명함보 다는 목전의 이익이나 만족을 추구하는 근시안적 우를 범하고 만다.오늘날 동서양의 모든 국가들이 이런 근시안적 철학에 입각해서 그 정치를 펴나가 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나 사회 집단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이유는 지배자가, 탄압에 의해 서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또 이런 잘못된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가 자 기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을 줄로, 또 미치더라도 모면해 낼 수 있을 것으 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긴 온 세계의 사활이 달린 핵전쟁의 경우는 요즘 와서, 핵전쟁을 발발시킬 능력을 갖춘 자신들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 실을 알았을 테니까 무모한 짓은 않을테지 하고 다소 마음을 놓으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끔찍한 세계전의 발발 가능성을 두고 이런 논리에 의거해 안전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런지? 따라서 세상사 돌아가는 법칙 에 대해서 보다 깊은 통찰을 가해 볼 필요가 절요(切要)하지 않을수 없다.
서양과학이 비인격적인 자연법 개념을 형성해 내기 훨씬 이전 베다시대에 이미 인도의 현자들은 우주의 돌아가는 모습에 관한 깊은 통찰에서 지혜[洞 察智]를 얻어냈다. 그들은 이 통찰결과를 리타(rta)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데, 이는 전 우주에 걸쳐 사물의 돌아가는 일관된 법칙성을 의미한다. 이 개념에 의하면 우주는 비인격적인 어떤 법칙에 의해 통어되며 이 법칙은 밖 으로는 물리세계의 자연질서로 나타나고 안으로는 사람과 신들의 마음 속에
올바름을 추구하는 성향으로서 나타난다.
만약 리타의 도가 행해지면 세계는 조화에 의해 운행된다. 하늘에 뜨는 해와 별들이 하루같이 그 궤도를 도는 것이나 정의로운 사람이 일상 행위를 영위하는 것이나 모두가 동일한 조화의 법에 따른 것이다. 천체의 세계에 나타나는 외부적 질서나 도덕으로 나타나는 인간 내면의 질 서나 똑같은 '리타'란 비인격적인 법칙의 소산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처럼 리타의 개념이, 밖으로는 우주적으로 또 안으로는 도덕의 영역에서 사태의 돌아가는 진로를 지배하는 비인격적 힘이란 의미로서 고스 란히 그 순수한 뜻을 간직해 내려온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수호신 바루나의 개념과 접합되었고 계속 내려오면서 다른 신들이 나 혹은 하나의 절대신과 접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본래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모든 인도 사상가들은 결코 잊지 않았으며 마침내 업의 설교로, 보 다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되었다.
사실 업의 이론은 리타의 개념을 개개인의 도적적 면에 적용시켜 다듬은 것 에 불과하다. 이런 사상적 배경 탓인지, 인도나 그밖의 동양국가의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네가 행하는 도덕적 행위가 조만간에 자기 운명에 영향을 미 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며 결코 그냥 묻혀 버리는 법은 없다고 아주 당연 하게들 생각하고 있다. 그에 반해 현대 유럽인들은 과학에서는 자연법칙의 개념을 잘 다듬어 놓으면서도 도덕의 분야에 이 개념을 연결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도덕의 영역은 전능한 창조주의 독점분야로 치부 되어, 인간으로선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의지에 따라 은총을 베풀기 도 하고, 인간의 소행에 따라 상벌을 내리기도 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현대 에 와서 그런 신앙심이 사라져 버리면서 유럽인들은 도덕적 과보란 관념을 잊어 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마저 지려 들지 않는 수가 많아졌다. 이 점은 특히 그 행위가 각종 법 령이나 법조문에 범죄나 위반사항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을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도덕적 영역에 관한 한 현대유럽인들은 소박유물론자.주1) 가 되어 버린 셈이다.
서양 철학자들은 보통 자신들의 철학체계의 한 부분을 할애하여 필수적 도 덕가치 목록을 나열하고서는 그 가치들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원칙적 의 무들을 사변적 방식에 의해서 짜내려고 헛되이 애만 쓰고 있다. 어찌된 영 문인지 서양사람들은 배운 사람들일수록 바깥 물질세계의 제 현상간에 일어 나는 필연적 인과관계는 잘 이해하고 또 과학적 공식으로 표현도 잘해 내면 서 유독 인간사에 작용하고 있는 도덕적 응보에 대해선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질 못하는 것 같다.
도덕적 측면이 개개인의 삶 속에 어떻게 자연스런 사태 진전으로 드러나는 지 그 모습을 가장 잘 정리하여 우리 앞에 보여준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설 하신 업의 가르침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행위란 뜻이지만 이는 결코 외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용어는 어떤 존재가 외부사태에 대하여, 이를 지켜보는 데 서 멈추지를 못하고 그 사태에 정신적으로 관여하여 이러저러한 입장과 자 신과를 동일시하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등으로 바깥 경계에 휘말려 들 때의 '의사' 또는 '의지'라고 하는 정신적 과정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외부적인 일에 관여하거나 휘말려 들게 되면 당연히 몸이나 말로 저지르는 어떤 행위 또는 단순히 생각만으로만 범하는 어떤 행위가 즉각 뒤따라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어떤 경계에 말려 들게 되는 것은 무지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 의 비실체성을 잘 모르고 자기가 정신활동이나 외적 활동에 있어 독립적 중 심체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비실체성에 대해서 무지한 탓으 로 그는 자기의 개성을 중시하고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개성을 함양하다 보면 자연히 어떤 것은 바람직하고 어떤 것은 불필 요하다는 식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 그릇된 분별의 결과로 그는 바람직한 것은 추구하게 되고 불필요한 것은 피하게 된다. 이러한 추구와 기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바 그중에는 좋다, 싫다 하는 미세한 느낌으로부터 갈애와 증오라는 거칠은 감정에 이르 기까지 여러가지가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마음 속에서 일어나며 그 때문 에 보통은 그 복잡하게 얽혀 돌아간 최종적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즉 이미 행하여진 행위나 뱉어진 말, 형성된 생각 또는 어떤 특정 한 마음상태 등의 형식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 진행과정의 미묘한 내막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려면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이나 아니면 진행된 후에라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이들 심리적 진행을 매우 주 의깊게 거듭해서 분석해 보는 길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 심리적 과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인의 창의적 참여 가 불가능할 정도로 거의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당사자는 다만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대상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고 실은 거기엔 즐거움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맹목적 추고와 예측 못할 결과가 존재할 뿐이다. 모든 존재의 행복은 이 심리적 진행과정의 질적 차이에 달려 있는 만큼 이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결과들
「의지」라고 하는 정신적 행위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이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먼저 명심해 두어야겠다. 이 의지는 바깥으로 부터 들어오는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서 발생한다. 이 반응을 사람들은 자신 과 동일시하게 되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이 의지는 다시 갖가지 결과를 빚어낸다. 그 중 몇가지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정신적 의지가 가져오는 첫번째 결과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빚어내는 행위 이다. 이 행위는 그 당장에는 행위자 자신의 자유의사로 또는 자신의 이익 을 위해서, 아니면 자체가 흥미있기 때문에 행하였다고 느끼거나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행하는 행위가 그 후에 빚게 되는 결과는 행위자의 의견과 는 전연 무관계하며, 그가 바라던 대로 되어 주는 일은 희소하다. 그의 행 위는 주변 환경과 남들이 그에게 대해 가지게 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그들 타인들은 보통 자기네 나름대로의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으므 로 서로간에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행위 때문에 우리는 다시 미래에도 그와 유사하 게 행위할 가능성을 만들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행위방식, 어떤 습과 또는 기질상의 성향 같은 것을 만드는 기초작업을 하는 셈이다. 이는 달리 표현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인격적 특성에 대해 새로운 면모를 첨가하거나 낡은 면 모를 강화시켜 줌으로써 이 존재라는 조건지워진 상태를 영속하도록 만들며 또한 장차의 자신의 품격의 질을 결정짓는다. 뿐만 아니라 마음 씀씀이나 몸과 말에 의한 행위가 가져오는 정신적 부수효과에 의해서 우리는 자신의 외양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즉 행위를 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순간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다. 친절한 행위나 친절한 말을 하게 되는 심리적인 상태라든가 친절한 생각은 우리의 얼굴을 밝고 즐겁게, 심지어는 아름답게까지도 만든다.
성내거나 미워하는 생각이나 말, 행위는 우리 얼굴에 추한 모습을 만들어낸 다.
현재의 모습을 대체로 견지하게 마련인 금생 동안엔 이런 변화들이 가져오 는 지속적 효과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아서 길게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선 그 결과를 추적해낼 수 없으며, 또 우리의 신체적 외양은 인격상의 변화를 일일이 알맞게 반영해낼 수도 없다
그러나 다음 생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때에는 그 순간에 갖추고 있는 인격에 일치되게 외양을 갖추게 마련이다. 이 점에 대해선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서 직접 언급하신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주2)
행위가 주변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의 태도면에 끼치는 직접적 결과 이외에 도 보다 먼 장래에 끼치는 훨씬 중요한 결과가 또 있다. 어떻게 보면 그것 은 주변환경에 끼친 직접적 영향의 확대판이라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짓는 모든 행위는 그 하나하나가 전 우주를, 그 질서정연한 진행을 바꾸어 놓는다. 물론 그 변화는 지극히 작은 것이긴 하다. 그러나 한 개인이 전 생 애에 걸쳐 짓는 행위의 총체는 그가 씨뿌린 영향력의 양을 나타내는 것이며 , 그것은 반드시 때가 되면 익어서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하여 그 행위자의 내적 성향 및 외적행동과 정확히 부합되는 적절한 환경이 도출되게 된다. 그런데도 그 개인은 무지한 탓으로 자기가 살고 있 는 환경이 실제로는 자기 마음이 투사된 것에 불과하며 또 자기가 봉착하는 갖가지 사건이나 사태도 자신이 과거에 지은 행위가 빚은 열매에 불과하다 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개개인간에 겹겹으로 얽히고 설킨 복잡한 관계와 그리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수많은 유사성의 욕구와 성향 때문에 갖가지로 색다른 존재들 이, 이를테면 한개의 동일한 세계에 같이 존재를 누리게 된다. 그래서 모든 세계는(뿐만 아니라 모든 우주까지도) 존재들의 내면적이며 맹목적인 성향 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며, 그 세계에서 존재체들은 자개네의 욕구와 성향이 갈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각기 특유의 목표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 겉으로 보기엔 하나의 같은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신적으로 는 각자 나름의 세계관이란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며, 사실상 자기가 스스로 만든 자기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창조 과정의 법칙에 무지한 탓으로 인해, 그리고 현재의 세계 를 배출시킨 진짜 씨앗인 자기 자신의 과거의 욕구겮恬햨분노곀敾§ 등등을 기억하지 못하는 탓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릇된 견해 즉 이 세상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과 전연 별개의 독립된 객관적 세계이고 자신은 그속에서 살고 있는 한낱 동떨어진 주체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가지게 된다.
베다와 우파니샤드 시대의 일부 현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 며, 그들의 이런 통찰의 지혜는 힌두철학에 오면 마야[幻]이론으로 정립되 는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면서 잘못 이해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변을 일삼아 철학 이론들을 더듬고 있을 때가 아니다 . 눈뜨신 분께선 모든 사변이 헛되며 실천적으로 해탈에의 길을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실례로 보여주시지 않았는가. 일단 업의 법 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해 초보적 통찰이나마 얻은 이상 우리는 어떻 게든 이를 일상 생활 속에서 노력을 통해 유익하게 활용하여 저 위대한 해 탈의 순간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마음을 챙기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모든 상태와 모든 행위를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럼으 로써 우리는 과거의 업의 결과(vipaaka)가 현재의 우리 마음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또 그것에 대해 마음이 구체적 반응을 취하는 중요한 순간을, 다 시 말해서 의지적 행위가 취해져 업의 전개를 다시 한번 작동시키고 그래서 결국 영속적으로 거듭 되풀이되도록 만들고 마는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주3)
우리는 지각작용을 기초로 해서 의식생활을 영위한다. 그렇지만 지각된 것 이 모두 충분하게 의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몸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리적 과정들은 각양각색의 감관적 지각에 대해 신경계가 반응하여 빚는 산물이지만 그 감관적 지각을 우리는 알아차 릴 수 없고 살펴볼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신경계의 반응은 비록 자각할 수는 없지만 - 아니 어쩌면 자각할 수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서도 - 조건지워진 상태로서의 우리 존재의 한 구 성 요소임은 분명하다.
분명 그것들은 우리를 주변상황 속에 더욱 휘말려들게끔 조장해 주며, 어찌 보면 우리를 현재의 부자유한 존재상태에 옭아맨다. 그렇다고 힌두교의 요 가에서 하듯이 이 무의식적 반응을 의식의 지배하에 두려고 애쓰는 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정신적 반응들이 반사적으로 작용하는 상태인 채 방치되 어 있는 한 부질없는 짓일 수밖에 없다.
내면적 성향
또 우리가 어느 정도나마 의식하게 되는 지각작용들도 있다. 그 경우 우리 는 그것들이 우리식의 살아가는 방식에 쓸모가 있을지 어떨지 건성으로 살 피면서 잠깐 신경쓰다가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일단 지각 작용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되면 그때는 그 지각작용들 은 충분히 의식되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들 성격 가운데 일부 내면적 성향들과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렇게 되면 우리는 그런 종류의 지각작용에 대해 연장시키거나 반복시키거나 또는 기피하는 등의 조치를 경우에 따라서 알맞도록 취하게 된다.
비록 이 과정은 의식되어진 상태에서 진행은 되지만 그러나 이 역시 정신현 상들이 반사적, 맹목적으로 이어지는 연속일 뿐 아무런 실제적 의미는 없으 며 살아있는 유기체 내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 생리현상의 연속작용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이들 두 종류의 전개 과정은 단지 그 과정자체를 영속 화시켜 끝없이 계속 재생시키는 이외엔 달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여기선 의식[識]은 본격적인 추상화 작업은 연출하지 않으며, 단지 선택과 정이 도달하는 귀착점에 불과하다. 우리의 감관에 떠오르는 그 허다한 지각 대상 중에서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우리의 내적 성향중 어떤 것과 부 합되는 것들만이 좋고 싫은 느낌을 통해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되고 그래서 의식 되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듯 선택당하여 의식과 상면하게 된 지각들은 그때 비로소 우리의 욕구나 집착, 아니면 증오나 반감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모든 지각은-그리고 지각 외에 달리 어떤 환경도 어떤 세계도 우리 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우리가 과거에 행한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즉 우 리가 몸으로 지은 일, 입으로 지은 일 그리고 적극적 마음상태로 지은 일들 의 결과인 것이다. 요컨데 일체의 지각작용은 그것이 의식되어지든 않든 간 에 모두가 업의 소산인 것이다.
우리 내부로부터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지각들은 더이상 결과를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 서 반응을 이끌어 낸 지각들은 우리의 관심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행위를 위한 계기가 되며 이렇게 해서 업짓는 과정은 거듭되어진다.
우리가 노력하기만 하면 어떤 대상이 지각을 통해 우리의 마음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즉각적으로 취하는 반응을 지켜볼 수 있다. 우리는 그 대상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싫어한다. 그 대상은 우리를 즐겁게 만들거나 슬프게 만든다. 그 대상은 소유욕을 일으키기도 하고 딴 사람에 소속된 것에 대해선 부러운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의 뒤에는 대개, 아니 언제나, 실질적 조치가 따르게 된다.
즉 우리는 그 원하는 대상을 획득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에 수정을 가하게 되며,
못마땅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선 어떤 조치를 강구하게 되며, 자기의 의도에
반하는 발언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거친 말을 내뱉기도 한다.
거기까진 안가더라도 남들의 논란을 듣기만 하고 있을 경우에나, 어떤 사건을
지켜보고 있을 경우에도 그 사건이 자기와 개인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는 데도
마음속으로는 시비를 가리고 누군가의 편을 들게 된다.
이 모두가 행위이며, 이 모두가 업이며, 이 모두가 미래에 결과를 빚어 갖 가지로 마음에 들거나 들지않는 지각의 모습을 덮어쓰고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며, 이는 다시 우리의 미래의 삶에다 유쾌하거나 불쾌한 조건들을, 그리 고 좋은 일이나 궂은 일들을 마련하게 된다.
업 지음을 멈추자면 이처럼 끝없이 무의미하게 이어지고 있는 현상들의 변화 무상한 연속적 윤 회가 참으로 허망한 것인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세심한 주의성에 힘입어 어떤 특정 순간에, 어떤 특정 상황에서 그 연속을 중단시킬 수 있으며, 그 렇게 함으로써 그 순간만은, 전체 흐름의 한 부분이 되도록 우리를 몰아치 는 필연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다. 즉 기계적으로 조건지워 나가는 전개 과정을 두고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맹목적으로 우기는 짓거리를 멈 추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 나가면 마침내 우리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나 자기가 짓 게 되는 일을 일일이 공정하게 관찰하는 태도를 익힐 수가 있다. 그래서 우 리는, 주변상황이 몰아치는 대로 정신없이 휩쓸려 들어 자기자신을 이 세상 과 분리 고정된 행동 중심체인 줄 착각하고, 그래서 이 세상을 만족감이나 채우는데 쓸모있는 정도의 한낱 이기적 활동의 무대로 보게 되는 어리석음 을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하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며, 무엇을 획득한다는 관념, 심지어 자신을 위한 최상의 영구한 행복이라는 관 념 마저도 버리게 되는 것이며, 아무런 결과도 기대함이 없이 오로지 빈틈 없는 마음 챙김의 관찰 태도를 견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외면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인격체(존재)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일이 처음부터 곧바로 잘 되어 나가지만은 않을 것은 당 연하다. 이전에 하던 식으로 행동과 말, 느낌 그리고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열심히 되풀이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이를 지켜보겠다는 의도를 되챙기게 되면 적어도 돌이켜 회상하는 식으로나마 이런 노력을 지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여했던 일을 돌이켜 회상하는 경우에는 그 일이나 그 일에 있어서 의 자신의 역할을 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며 이점 매우 중요한 사항인 만치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일들을 찬성해서도 안되며 비난해서 도 안된다. 그럴 경우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정신적 의지행위가 될 것이 며 따라서 새로운 업짓는 활동이 된다. 따라서 그 일들이 우리 마음에 떠오 르더라도 그저 꼭뚝각시 놀음을 보듯 이해관계를 떠난 눈으로 바라보지 않 으면 안된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노력해 나가면 곧 우리는, 단순히 지나쳐 놓고 돌아보 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 어떤 행위가 진행되고 있는 그 현장을 곧 바로 지켜 보는 순간들이 가끔씩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런 때 그 순간 들과 그 순간 동안 우리가 취한 행동을 분석해 보면 우리들의 그 행동이 다 음 사실 즉 우리가 이들 행동을 알면서 하고 있었다는 사실, 우리가 그 행 동에 대해 마음을 기울여 지켜보고 있었다는 그 단순한 사실에서 깊이 영향 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일을 충분히 알면서 행할 때, 즉 자신이 무언가를 행하고 있고 그 행하는 일이 어떤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행동하고 있다면 결코 뒷날 후회하게 될 일은 안할 것이다. 그때 우리의 행동은 밖으로는 누구에게나 사심없는 것으로 비춰지게 될 것이고 또 안으로도 기쁨과 행복을 구태여 찾 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될 것이다.
가령 우리가 자기 중심벽을 조장시키게 될 어떤 일을 막 시작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또는 미움, 선망, 또는 그밖의 어떤 미혹된 마음에서 어떤 일을 하려 들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빈틈없는 마음 챙김의 태도가 때맞취 찾아주면 그 시작된 행동은 끝맺지 않은 채 멈추게 되는 것 이고 시작하려던 마음도 미수인 채 남게 될 것이다. 미혹된 마음상태는 우 리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며 그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양을 우리는 지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관찰 태도는 점차적으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 갈 것 이다. 처음엔 우리 자신이나 이웃들의 형태를 관찰하다가 나중엔 별로 힘들 이지 않고도 그 형태의 배후에 있는 동기를 관찰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 관찰은 어디까지나 관찰일 뿐 심판은 아니므로 남들이 취하는 행동에서 자기중심적인 숨은 동기를 보게 된다고 해서 이를 비난하게 되지는 않을 것 이다. 오히려 그 때문에 그들이 맛보는 달갑잖은 귀결들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미망에찬 행동과 의도들 이 나오게 된 참 동기를 보게 되면서 우리는 그것들을 더이상 지속시키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이들 행동이나 의도들이 전적으로 우리 것은 아 니라는 것, 이들은 오히려 그 배후에 숨어있던 동기들이 상황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튕겨져 나온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기 그 자체는 무력한 것으로 어떤 힘도 지니고 있지 않다.
행위를 수행하는 힘은 오히려 우리가 그 동기에 관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가 그 동기를 알고 있으면, 다시 말해 동기자체를 관찰의 대상 으로 삼고 있으면 더이상 관여하지를 않게 된다.
우리의 업의 법칙의 작용에 대해 실다운 통찰력을 얻게되는 계기는 바로 자 기 내면에 들어앉은 것들을 주의깊게 자각하며 지내는 그 삶의 순간에 이루 어진다.
마음챙기기를 잊고 있는 동안은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상황의 필연성에 쫓기 며 사는 기간이고, 마음을 챙기고 있는 동안은 자유의 문턱에 서 있는 기간이란
것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마음을 챙기는 공부를 지어나감으로써 이른바 업의 법칙이라는 비인 격적 법칙에 따라 서로 꼬리를 물며 이어져 나가는 정신적 현상들의 맹목적 흐름에서 헤어날 수 있다. 이 말을 바꿔 표현하며, (기존의)업의 결과인 지각작용에 뒤이어 맹목적인 기계적 반응이 나타나고 이 반응에서 파생되어 , 또는 그 반응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정신적 의지가 생기고, 이는 다시 그 다음의 업보를 낳는 업력으로 작용하고, 이렇게 끝없이 계속되어 나가는 흐 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챙기는 공부를 지어 나가면 우리들 존재가 지니고 있는 맹목적 무지, 즉 존재[有]의 생성과정 자체를 자기자신과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장본인 그 무지를 한걸음 한걸음 흩어버릴 수 있으며 따라서 보다 높은 인식에 점진 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불교 덕목중 가장 중요한 덕목 인 지혜와 자비가 우리 안에서 발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마음 챙기기를 일상화시켜서 관찰하는 태도를 몸에 배이게 되었다 해서 반드시 외부활동을 일체 멈추고 절이나 다른 어떤 외 형상의 은거생활로 들어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가족들과 같이 살면서 알맞은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얼핏 보아서는 도대체 우리가 변화한 것같이 보이질 않을 것이다. 진실로 마음을 챙기고 있다면 결코 남 의 눈에 기이하게 보여지거나 이채로운 방식으로 남의 이목을 끌게 되는 따 위의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의깊게 살펴 볼 경우, 우리 말씨나 행위가 보다 적절해졌고 동기 또 한 비이기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적극적 역할을 맡게 될 경우엔 어떻게든 자기에 게 이롭도록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해서 자기에게 이로운 것으로 믿어지는 어떤 결과를 얻고자 행동하게 된다. 물론 때때로 남들의 이익도 고려하긴 하겠지만 어떤 때는 이기심이나 무관심 때문에 그런 고려를 못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참된 인식이나 지혜를 지니고 있지 못한 바로 그 까닭 으로 인해 우리에게 해로운 일을 오히려 이로운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흔히 있다. 예를 들어 뜻밖의 결과를 가져와서 우리를 더욱 더 상황 속에 휘말려 들게 만들어 결과적으로는 존재라는 조건지워진 상태를 더욱 연장시 키게 만드는 따위의 사건을 흔히 우리는 이로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까다로운 상황에 처해서도 빈틈없이 마음챙기는 태도를 성공적으로 지속시켜 낼수만 있으면 자기 중심적 동기에서 나온 행동욕구 는 떨어져 나가게 되고 따라서 미래에 업보를 초래하게 될 근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이란 결코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무위도 아니다. 삶은 동적 과정 이며, 정지하지 않는 것이며,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며, 개개인의 이기적 활 동에 부딪치면 보통 부적절한 방향으로 빗나가게 마련인 것이며 자유를 지 향하는 성질을 띄고 있다. 갈애, 욕망, 증오 따위들은 삶의 권속이 아니며, 단순한 현상에 불과한 것들로 죽음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의도했던 어떤 행위가 잘못된 것인 줄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그래 서 그 행위를 그만 둘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사태를 올 바로 혹은 조화롭게 타결하는데 필요한 외면적 행위나 말을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당연히 우리는 그와 같은 적절한 행동을 수행하게 될 것이고 그와 같은 말을 발언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도 업짓는 행위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양상으로는 이 행위도 여늬처럼 비이기적 자기 희생적 이타적 행위로 남들에게 비쳐질 것이며, 따라서 보답을 요하는 선행으로 보여질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만 약 그 행동이 완전히 내면적으로 무관심한 가운데 다만 그 상황에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다는 순간적 직관에서 취해진 행동이거나 , 혹은 보편적인 자비심에서 기인한 행동이라면 이런 행동에는 어떤 속박하 는 힘도 내포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의도적으로 행한 선행은 반드 시 좋은 결과로써 포상받기를 요구하는 등의 속박하는 힘이 내포되어 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이런 행동에는 해방시키는 효과가 있다. 단 한순간만이 라도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만든다면 그 행동은 분명 해탈에 이 바지한다.
다만 주의해야 할 일은 이 경우 혹시라도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이를 부단 히 챙겨 살피기를 등한히 하면, 사변(思辯)이 갖고 있는 유혹적이고도 기만 적인 힘이 우리를 휘어 잡아버려서 우리의 이 조그마한 자아가 어떤 보다 '큰 자아', '뛰어난 자아', '보다 높은 자아' 등등의 가면을 쓰고 나 와 우리를 속일 위험성이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만약 어느 일정 기간만이라도 순수한 마음챙김, 바깥의 긴박한 상황 즉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성향을 촉발시켜 우리를 즉각적이고 맹목 적인 반응으로 몰아치는 상황에 처해서도 혼란되지 않은 채 공고히 견지될 수 있을 정도가 되게 되면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자기가 지금 이 순간 해방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 내면의 성향이란 것이 우리 것이 아니며, 그 성향엔 '나'란 것이 없으며, 그 성 향들이 우리안에 '자아'를 구축하는 것도 아니란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소(小)자아든 대(大)자아든 그 순간엔 느껴지지도 경험되지도 않는다. 그것 은 순수한 앎의 순간적 활동이라 할 수 있겠지만 꼭 맞는 표현은 못된다. 어쨌든 그것은 '순간적인 해탈'이다.
시간이 경과하면 다시 '나'니 '내것'이니 '자아'니 하는 따위의 조건 지워진 개인적 삶의 과정이 도로 나타나겠지만 어쨌든 이 '순간적'해탈 속엔 '전'해탈이 들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은 아직은 다른 존 재들보다 해탈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가지 차이점은 있 다. 즉 새로운 업보를 더이상 짓지 않거나 짓더라도 그 양을 줄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과거 행위로부터 오는 업보가 환경, 사건 , 생각 및 착상에 대한 지각의 형태로 자신에게 제기되어 오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기에 그는 언젠가는 마침내 이들 업보가 종식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 있어서 어떤 실체가 해탈에 접근해 가는 것은 아니란 점 또한 주의해야 한다. 조건지워진 현상들의 연속적 일어남이 점차 끝나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조건지워진 현상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미혹된 짓을 이미 되풀이하지 않기 때문에 그 현상들에 더이상 생명을 부여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히 끝장이 나려면 어느 정도의 세월이 어쩌면 몇겁의 세월이 걸릴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여기선 이미 시간은 아무런 의미도 가 지지 못한다.
물론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별 생각없이 지은 선행들은 나름대로 선한 과보 를 가져온다. 그 개인은 점차 좋지 못한 환경에서 빠져나오게 되고 그의 외 면상의 '운세'는 더욱 좋아진다.
불교에서 미래의 부처님들은 고귀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아무리 운세가 좋아져도 그 사람이 외형적 이익에 집착한 나머지 이 것들을 추구할 욕심을 일으키게 될 위험성은 없다. 빈틈없는 마음챙김이 그 사람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외적 이익을 가 끔씩 어떤 사태를 조화롭게 타결하기 위해서 또는 남들을 도와 보다 나은 인식에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 뜻있게 쓰는 수가 있다. 이런 일은 그가 통찰 력이 늘다 보니 지혜로와져서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생 긴 나머지 자연히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안락한 외부적 환경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할 때엔 그것 도 물리쳐 버린다. 또 이런 안락한 환경이나 심지어 남을 도울 수 있는 여 지마저 박탈당하게 되는 경우에도 그는 아무런 회환 없이 마음을 챙기는 채 여여(如如)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마음챙김 공부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현상들이 조건지우며 연 속해 가는 것을 끝낼 수 있는, 업짓는 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는, 즉 해탈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란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주 해
1) 소박유물론(素朴唯物論; naive materialism) : 과학적으로 논증되지 않 는 유물론의 한 형태. 유물론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그 실천에 있어 항상 자 연과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으므로 거기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유물론적인 의식이 나온다고 한다. 즉 명확하게 자각되지는 않지만 자연은 인간의 의식 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전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유물론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아, 이론적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있다.
2) 중부135경 : 브라만계급의 수브하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부처님께서 하 신 법문. 사람의 수명이 왜 길고 짧은지, 얼굴의 용모가 왜 잘나고 못났는 지, 재물의 복이 왜 각각 다른지를 수브하에게 부처님께선 이를 인과업보의 작용으로 설명해 주심.
3) 보리수잎.넷 참조 : [인과와 도덕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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