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관법수행의 첫걸음-도로시 피건

rainbow3 2020. 6. 12. 07:27

관법수행의 첫걸음

BEGINNING INSIGHT MEDITATION

AND OTHER ESSAYS

 

 

Dorothy Figen

도로시 피건 지음

박태원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 85, 1980)

 

 

 

차 례

 

관법수행의 첫걸음 7

나의 체험 22

불교는 종교인가 29

세상에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56

 

 

 * 모든 주는 역주(譯註)임.


 

이 작은 책을 쓰도록 격려해 준 나의 좋은 도반이자 스승인 아나가리까 띱보뚜와와 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 많은 시사와 훌륭한 편집을 해준 남편에게 감사드린다.

일체중생이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도로시 피건

 

 

관법수행(觀法修行)의 첫걸음

 

선정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먼저 선정 중에 취해야 할 각종의 조치들에 일정한 순서를 매겨 차례로 이행해 나가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날마다 편안히 머무를 수 있고 수행 중에 방해받지 않을 조용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다음에는 얼굴과 손발을 정성들여 씻는다. 시간이 허용하면 샤워로 온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고는 헐렁하고 편안한 옷을 입는다. 가급적이면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선정공부를 하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 자신은 새들이 아침인사를 하는 오전 6시와 그들이 보금자리로 물러가는 오후 6시에 참선한다.

 

다음에 좌선에 들어갈 때의 자세를 고려해야 한다. 척추를 곧추세우고 정신을 가다듬어 앉되, 긴장하지는 말고 다만 빈틈없는 살핌의 자세를 유지하도록 유의하라. 그럼 이제 시작할 준비는 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마음가짐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수자타(Sujata)1)가 그의 조그마한 책『관(觀)』에서 말하고 있듯이, ‘선정은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초심자에게는 선(禪)이라는 것이 보는 것처럼 단순한 일은 결코 아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 너머까지를 보자면 강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자기가 알고 있는 사사로운 문제를 피하거나 제쳐놓으려 해서는 안 되고 좀더 진지하게 맞닥뜨려야 되는데 그러자면 자발적인 의욕과 훈련이 필요하다.

 

왜 선 수행을 하는가? 이유는 많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명료하게 사고하고 무지, 환상, 탐욕, 증오 및 갈애를 없애는 법을 배우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열반에 이르는 길이며 이 길로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떨쳐버려야 한다. 자아를 가진 것처럼 느끼는 이 기분은 매우 집요한 것이어서 좀처럼 근절시킬 수가 없다. 이 기분은 참으로 끈질기고 진실에서 벗어난 것이다. 겨우 소멸시켰는가 싶으면 어느덧 되살아나 불쑥 나타나기 일쑤다.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길은 먼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첩경은 있을 수 없고 오로지 끈기있는 노력에 의해서만 이를 항복시킬 수 있다.

 

이제 당신은 조용한 방안에 가부좌를 한 채 앉아 있다. 가능하면 결가부좌로 앉되 안 되면 반가부좌로 앉고, 그것도 정히 여의치 못하면 의자 위에 앉아도 좋다. 머리는 똑바로 하고 양 어깨 위에서 가볍게 균형을 잡는다. 역시 긴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 편안히, 힘을 뺀 채 주의력을 모아라.

 

좌선의 첫 단계는 단지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숨이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콧구멍에 정신을 집중하라. 콧구멍을 통과할 때 스치는 공기의 감촉을 알아차리고 있으라. 모든 것을 알고 있되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 있으라. 이 말은 모순되게 들릴 법도 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왠가? 지금 이 시간은 몽상을 하거나 이리저리 떠도는 객념(客念)을 접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대는 자신의 몸자세를 알아차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잊는다. 그대는 또 과거는 이미 죽어버린 것, 즉 지나가버린 것임을 알고 있다. 이젠, 지나간 생에 관해 어떤 특별한 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이 있을 뿐.'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있는 생명의 호흡, 리듬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이상은 재빨리 끼어들어 훼방 놓는 그 모든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남김없이 끊어버리는 것, 그래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그저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쉴 뿐, 결코 무리한 호흡은 않는다. 이제 당신은 호흡하는 사람이 아니고 호흡이 당신을 호흡하고 있다. 그런 당신마저도 시간이 경과하면 점점 더 희미해져 가다가 마침내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대의 마음으로 하여금 들락날락하는 숨결의 감촉만을 느끼도록 허용하라. 처음 단계에서는 그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호흡이 더욱 섬세하고 세밀해지면서 가늘어져 감을 알게 되고, 조만간 전혀 숨 쉬고 있지 않은 듯이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호흡의 흐름이 잔잔해 지는 모습이다. 이 때 매우 유쾌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된다.

 

좌선할 때 나는 방안에 촛불을 켜놓는다. 여기에는 두세 가지의 좋은 점이 있다. 첫째, 마음이 산란해질 때 초점이 되어준다. 처음에는 촛불을 지켜보다가 곧 두 눈이 스르르 가볍고 편안하게 감긴다. 그러나 감긴 눈꺼풀 사이로도 불빛을 느끼게 된다. 마음의 눈으로 불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불빛은 헤매던 마음을 현재로 돌아오게 한다. 촛불을 켜놓는 두 번째 목적은 상징적인 것이다. 나에게 그 촛불은 선정수행의 기반이 되는 가르침인 바로 그 `법의 빛'을 의미한다. 끝으로 촛불은 기분 좋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향이나 꽃, 불상은 다 좋은 것이지만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방해하는 것이 없는 조용한 장소라면 어디에서나 좌선을 할 수 있다. 만약 그 장소가 집이라면 전화 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 전화기를 끄는 것이 좋다.

 

 

좌선 장소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가서 앉는 것이 좌선 습관을 붙이는 현명한 방법이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두라.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하셨고 거기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셨다. 공부가 높은 수행자라면 어떤 장소라도 -붐비는 시장, 공동묘지, 동굴, 공원 혹은 쓰레기 처리장마저도- 수행처로 삼을 수 있고 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마음을 안으로 돌리면서 그는 자신의 주변을 완전히 잊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젠 반대로 선정에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됨에 따라 주변 환경을 자신의 생각의 주제로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럴수록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이처럼 강력해지는 생각을 미리 잘 가르쳐 길들여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주변’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은 언제나 `중앙'의 위치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당신은 아직도 초보단계에 있다. 귀찮은 망상들이 기를 쓰고 당신의 마음속으로 계속 들어올 것이다. 이는 당연한 일인데, 이 침입자들이 얼마나 잡다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인지 알게 되면서 당신은 적잖이 놀랄 것이다. 그러나 침입한 망상들을 정중히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화를 내면서 그들을 밀쳐내려 하지 말라. 정중하고 친절히 대해주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라. `과거' `현재' `미래' `가치 있는 것' `무가치한 것' `증오심' `허영' `욕망' `자만' …… 이렇게 일일이 망상을 이름 붙여 파악하면 그 망상을 그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망상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당신의 마음은 코로, 호흡으로 조용히 되돌아갈 것이다. 호흡은 더욱 더 조용해질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방해물이 주제넘게 나타날 것이다. 소음이 당신의 의식을 뚫고 들어올 것이다. 아이들이 뛰놀며 떠들어대는 소리, 버스나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 등, 다른 지나가는 사념에 그랬듯이 그 소음에도 일일이 이름을 붙여보라. 느려져가는 호흡의 들이쉬고 내쉼에 의식을 계속 집중하라. 조만간 그 소음 역시 사라질 것이다. 자신이 `저쪽 바깥'에 나가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자신을 `이리로' 또 `바로 지금'으로 조용히 되돌려라. 이 ‘무상(無想)’의 상태를 적어도 30분간 지속할 수 있게 되면, 당신의 호흡은 거의 리듬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느려질 것이다. 이때야말로 호흡이 당신을 호흡하는 때이다.

 

부처님의 얼굴처럼 웃을 듯 말 듯 미소를 머금는 것이 이 모든 일에 도움이 됨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미소는 마음을 밝게 해주고 푸근하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

 

선정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인 만큼 30분이나 그 이상을 무상 상태에 있을 수 있게 되면, 거기에서 중단하고 일어나든 더 지속하든 좋을 대로 하라. 그런데 이 단계에서 `자애관'을 닦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 관법은 증오, 질투, 분노, 자기 연민을 제거해주기 때문에 좋다. 그것은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 자아의 소멸, 더불어 기뻐함, 그리고 살아있거나 이승을 떠나버린 모든 존재와 비존재2)들에 대해 자애의 마음을 갖게 해준다. 당신이 멀리 펼치는 자애심은 확대되어 지구와 우주를 에워싸게 될 것이다. 조만간 당신은 아무리 작은 벌레라도 그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게 될 것이다.

 

자애를 확장함에 있어서 먼저 `당신 자신'부터 사랑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올바른 방법으로 말이다. 당신의 생각에서 일체의 `때[垢]'를 제거해내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 스스로 이와 같이 생각하라.

“나는 내 마음에서 분노, 증오, 무지, 공포, 탐욕, 갈애 등 모든 번뇌, 모든 때를 없애겠다. 나는 내 마음을 맑고 신선하며 순수하게 만들겠다. 내 마음은 투명한 창문처럼 될 것이다. 그러고는 더러움이 없어진 마음으로 사랑과 우애의 자비심을 아낌없이 뿜어내련다.”라고.

 

당신이 자애심을 베푸는 대상인 각 개인의 영상을 마음에 떠올려 보도록 노력하라. 그 사람 안에 들어가라. 그 남자 혹은 여자3)의 인격이 당신 자신 속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당신의 느낌을 곧장 그 사람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게 하라. 조만간 일종의 정신적 감응이 생겨남을 발견할 것이다. 따스한 응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말라. 그 다음 사람에게로, 또 그 다음, 또 그 다음 사람으로 계속해 나아가라.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따스함과 자애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끌어내어 상대방 안으로 스며들게 하라.

 

매일 한두 번씩 이렇게 하면 당신의 지평은 넓어질 것이다. 당신의 의식에 들어온 모든 존재들과 비존재들에게 예외 없이 이러한 파동을 보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것이다. 여기에는 당신이 잘 모르는 전혀 새로운 면모들도 포함될 것이다. 당신이 알지는 못하지만 거리에서 주기적으로, 혹은 이따금씩 스치고 지나는 사람들,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 죽은 모든 사람들,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모든 동물들, 곤충들, 나무들, 모든 유기체와 무기체들을 말이다. 그리고 이 쏟아지는 자애심의 흐름을 타고 당신의 `자아'도 흘러나가서 일체를 포괄하는 자아로 확산되면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좌선을 한 후에는 행선(行禪)을 시도해 보라. 그리고 그 때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생각하라. ‘모든 존재들은 태어나면 고통받기 마련이다[苦聖諦]’ 등. 그리고 계속해서 해탈의 출구[道聖諦]를 찾아 쉼없이 나아가라. 마침내 출구와 고통의 소멸에 이를 때까지! 이 안전한 길[八正道]을 찾아내어 그것을 당신의 일상생활에 구현시켜라. 그래서 길을 성취하여 바로 이곳, 지상에서 열반을 이루도록 하라!

 

 

 

 

나의 체험

 

 

미국을 떠나 스리랑카에 왔을 당시, 나는 더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미국 의사들은 내 형편없는 심장과 다른 병들에 도움이 될 거라며 대략 스물다섯 가지나 되는 각종 알약을 손에 쥐어 주었다. 남편과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여생만이라도 평화로운 나라, 부처님의 땅에서 보내고 싶어 미국을 등졌던 것이다. 긴 여로이기도 했거니와 곧 죽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정말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지병인 심근경색증 때문에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시설이 너무도 형편없었기에 차라리 아무 집이든 안방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여겼다. 결국 나는 병원에서 나와 버렸다. 남편은 우리들이 지내기에 알맞은 참한 집을 한 채 알아내었고 그곳에서 나는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심한 통증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혼란을 계속 겪고 있던 중에 마침 남편이 한 재가(在家) 불교수행자를 찾아냈는데, 그는 우리 집에 와서 기적을 행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길'을, 이 지상에 남아있을 동안 걸어갈 `길'을 일러주었다. 출가 승려와 다름이 없는, 이 충실한 부처님의 추종자, 아나가리까 띱보뚜와와는 내게 명상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명상의 네 단계 공부를 밟아나갔으며 마침내 나는 약이란 약은 모조리 집어치워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의 삶이 갖는 의미가 점점 분명해져 갔다. 명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전혀 별개의 식(識)의 지평에 머물고 있는 듯이 느끼기 시작했다. 병이 들었거나 아니거나 간에 이미 나는 더 이상 ‘나(我)’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물, 무생물을 포함한 세계와 일체가 되었다. 하나였고, 우리 모두는 새로운 세계에 있었으며 무생물까지도 더불어 하나였다. 내 인생을 파멸로 몰아갔던 `자아'라는 놈이 이제는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 태어났음을 느꼈으며 이제는 명상을 자애의 파동이 되게 하였다. 이 파동을 나는 `염(念)의 메시지'라 부른다.

 

하루는 미국에서 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 친구는 내가 보낸 `염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쁨에 차 있었고, 나에게 감사하면서 머지않아서 곧 이리로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기했던 것은 나의 언니가 보낸 한 통의 전보였다. 언니는 전보에서 3주쯤 후에 우리 집에 와서 폐를 끼쳐도 괜찮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정말 너무나 놀라서 심장이 다 멎을 정도였다. 언니의 나이 일흔 여덟. 지난 15년 동안 나는 언니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니에게 자애의 염을 전달하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언니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해지면서 온화하고 밝아져 갔다. 언니는 우리 집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일흔 여덟의 나이에 언니는 나를 만나러 지구의 반을 돌아서 찾아왔다. 도착하자 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를 보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느꼈었다”고. 우리 자매는 얼싸안고 재회를 기뻐했는데 더욱이 예상치도 않게 언니는 매일 저녁 나와 함께 명상을 하는 것이었으며 우리 집에서 맛본 그와 같은 `평화의 사랑'은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언니는 내가 바랐던 만큼 오랜 기간을 우리 부부와 같이 지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책무들을 이제는 거뜬히 `감당'해낼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이제 나는 몇 가지 서원을 세웠어. 눈을 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멀구먼.” 하면서 언니는 떠나갔다.

 

이런 몇 가지 경험담들이 듣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힘이 되었던지, 내가 누구를 개종시키려 든 적은 정말 한 번도 없었는데도, 명상지도를 받으러 나를 찾아온다. 최근에는 스위스 출신의 한 젊은이가 우리 집에 왔다. 그는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공수병으로 죽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확신했기에 그에게 당장 그 날부터 아나가리까 띱보뚜와와와 함께 명상을 해보자고 권했다.

그는 그 체험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이 젊은이는 그 뒤로 날마다 저녁명상을 하러 올 뿐 아니라 날마다 새벽 5시 30분이면 싱싱한 꽃을 가져와 부처님께 올리는 것이었다. 3주 동안 집중적으로 명상하고 지도받고 또 법(Dhamma)을 읽은 다음, 그는 건강과 행복 그리고 고통받는 인류를 도우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이곳을 떠나갔다.

 

물론 이 글에서는 관법수행에 있어 더 나아갈 단계에 관한 얘기를 뺄 수밖에 없었다. 즉, 호흡관에 따르기 마련인 세 단계를 생략했는데 그것은 신체에 대한 느낌[受], 지각[想] 그리고 의식[識]이며 그 단계들의 구경(究竟)은 `청정심을 경험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들 단계들을, 이 문제에 관해 발표되어 온 수많은 간행물들을 통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작은 글이 초심자들에게 명상의 `길'과 명상을 해야만 하는 ‘까닭’을 조금이라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로선 큰 행복이다.

 

 

 

 

불교는 종교인가

 

 

불교가 종교인가 하는 것은 흔히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만일 종교를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갖고 그에게 구원과 보호와 은총을 빌며 고통으로부터 구제해달라고 비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대답은 `아니요'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은 신성(神性) 같은 것은 주장하신 적이 없었다. 다만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명징한 눈과 청정한 마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뿐이다. 이것은 깊은 직관에 의해 얻어지며 평온과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그 분은 드물게 볼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결코 신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혹시 생각이 모자란 나머지 착각에 빠진 일부 사람들이 그 분을 신의 자리에다 올려놓고 경배하면서 은총이나 특별면죄를 빌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부처님의 본래 모습이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가뜩이나 고난에 찬 이 시대에 들어와서, 아니 까마득히 먼 그 옛날부터 인간은 자신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어떤 절대자를 믿고 싶은 마음을 가져온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그리고 설사 그와 같은 절대자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한들 우리가 왜 그에게 구원을 청해 애걸해야 하는가?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보다 걸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부처님은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인간은 고통 받도록 태어난 것이다.”라고. 삶은 바로 고통인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선포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중 첫 번째 진리이다. 즉 고(苦)의 원리이다.

 

두 번째 진리에 가서 부처님은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을 우리는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신다. 고통은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세 번째의 진리에 도달하려면 고통의 원인에 대한 파악을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번째 진리에서는 팔정도를 통해 고에서 벗어나는 길을 밝히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논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불교가 종교가 아니라면 그럼 불교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불교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고 철학이고 심리학이며 사고방식이다. 불교가 그런 것이기 때문에 업력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 나가 우리의 생애를 스스로 방향지울 것인지, 그 책임지는 방법을 불교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선정은 바로 이 책임지는 법을 배워나가는 정신 정화훈련 중의 한 과정이다.

 

젊은이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묻는 일이 많다. “어떻게 하면 이제까지 지녀온 신앙과 문화를 저버리지 않고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고. 나는 그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계명(誡命)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예수님이 말한 계명과 부처님의 계율이 과연 그렇게 정반대이고 이질적인 것인가? `죽이지 말지어다, 도둑질하거나 간음하지 말지어다!' 십계명 가운데 있는 이 윤리적 강령들이야말로 바로 부처님이 설하신 도덕적 삶을 위한 계율들[五戒]과 무엇이 다른가? 판에 박은 듯 똑같지 않은가?

 

나는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불교의 성전들이 신․구약성서 및 그 주석들보다 훨씬 더 분량이 많으며 그 내용도 분명하다는 점을 일러준다. 사실, 불교의 경전[南傳經典]들은 기독교의 성전보다 열한 배나 분량이 많고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지혜로운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종교의 신앙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부처님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신이 영원히 존속하고 전능하며 모든 위기에서 인간들을 도와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하지 않으셨다. 서구의 종교가 쉽사리 받들어왔던 이 신들과 구세주들이 과연 인간의 고통, 굶주림, 비애 및 고뇌를 완화시켜 줄 수 있었단 말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분명히 회의적이다.

 

그러기에 이들 젊은 기독교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원한다면 주 예수를 믿도록 하라. 그러나 예수님 역시 결코 신을 자칭하지는 않았음을 명심하라.” 그렇다. 원한다면 유일신을 믿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속죄, 건강, 부귀, 고난으로부터의 구원 따위를 간청, 애원하는 짓은 그만 두도록 하라. 팔정도를 닦아보라. 선 수행이 가져다주는 통찰력과 깨달음을 추구해보라. 그리고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한 기도와 간청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는 길을 찾아내도록 하라.

 

자신의 기도에 신이 응답해준다고 확신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과연 신이 응답을 하는가? 신은 기도에 답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최근에 한 젊은이가 음식과 잠자리를 구해 우리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는 젊었고, 사지가 튼튼했으며 꽤나 똑똑하였다. 우리는 그를 맞아들여 며칠 동안 음식을 주고 방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영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억지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는 몹시 분개해하지 않는가! 그가 떠날 때 우리는 그에게 왜 스스로 노력해보려 하지 않느냐, 만일 생각만 내면 자기 앞가림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필요 없소. 신께서 마련해 줄 것이오. 신의 빛만 좇으면 다 되니까요. 신께서 나를 보살펴 주실 것이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저 수많은 불행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제껴둔 채, 무엇 때문에 단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신앙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젊은 사람들을 돌보아주어야 한단 말인가?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수백만의 유태인들이 독일인의 집단수용소에 갇혀 독가스로 대량학살을 당할 때,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화덕 속의 재가 되기까지 30분 동안이나 계속되는 질식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때, 신은 과연 그들에게 어떤 돌봄을 베풀어 주었더란 말인가!

정말 신이 있어서 온 세상 구석구석에서 암이나 딴 질병들로 고통받는 수백만의 인류에게 하루하루 속절없이 괴로움만 연장시켜 주고 있다는 말인가?

 

전 세계에 걸쳐 매일처럼 홍수나 지진, 그 밖에 갖가지 재난으로 인해 집을 잃고 굶주려 기아상태에 빠져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을 신이 과연 어떤 식으로 돌보아주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신을 떠받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그렇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신을 믿어라. 그러나 제발 요구하는 짓거리는 그만두라. 구걸은 집어치워라. 먼저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당신 자신을 스스로 돌보도록 하라. 그런 다음 당신의 가슴을, 당신의 마음을 자애로 가득 채우라. 그러고 나서 힘닿는 대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걷히도록 도우라.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신을, 당신의 구세주를 얼마든지 마음껏 경배하시오. 그러나 비는 짓은 이제 그만두시오. 자기 소망을 들이대고 끝없이 애걸복걸하는 짓일랑 그만 그치시오.'라고.

 

이스라엘에서 한 유태 소녀가 선 수행을 해보고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소녀는 선 수행을 통해 행복과 평온함을 맛보았으나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었다. “물려받은 과거의 유산을 저는 잊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예루살렘 태생이며 유태 전통에 젖어 있습니다.”라고 그 소녀는 말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다. “문제될 것 없다. 선 수행을 마칠 때마다 `쉬마-(shimah)'를 외우렴!” `쉬마'란 유태인들이 보통 아침마다 외우는 기도이며 임종 때도 암송되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기도인데, 다음과 같은 말들로 되어 있다.

 

“들으라. 오, 이스라엘이여, 하나님은 우리의 신이시며, 주께선 유일하시도다.” 이 기도문은 유태교인들에게는 위안을 주는 사상이며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 소녀에게 일러주었다. 실제로 불교는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신을 믿을 권리를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불교에서는 신의 자리를 일신교나 다신교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다 둔다는 것만은 지적해 두어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너의 신앙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서도 불교가 가르치는 많은 것으로부터 이로움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선정공부에서 그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너나 나나 우리 모두는 고통에 묶인 채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종교(religion)'라는 말부터가 `결합되어 있다' 또는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 인도의 요가라는 말도 똑같은 뜻인 `합일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말들이 신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들 모두가 같이 서로 관련되고 있다는 이 경이로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유태교를 실천한다 해서 사람 상호 간의 공통관계를 부정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지 않느냐”고. 그러자 그 젊은 숙녀는 대단히 만족해 했다. 그녀는 지금도 날마다 참선을 하고 또 `쉬마'를 외우며 지내고 있는 줄로 안다.

 

불교도들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다. 무엇 때문에 향이나 등이나 꽃을 불상 앞에 놓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불교도들은 다만 탁월한 선견지명과 통찰력을 지녔고, 고금을 통해 가장 지혜로운 스승들 가운데 한 분이시며, 완전한 삶의 길과 비애, 투쟁, 고통 등을 완화시키는 길을 놓아주신 한 위대한 인물에 대해 그네들의 경의를 표시하고 있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불상에 절할 때, 불교도들은 경의와 숭배의 염에서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들이 `숭배'에 두는 의미는 서양 종교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불교도들은 그들의 개별적 자아를 위해 무엇을 요청하지 않고, 신들의 중재라든가 개인적인 은총 따위를 기원하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불교도는 그의 실천생활 속에서든 철학에 있어서든, 자신을 타인들과 분리된 개별적 존재나 단독적 자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별적 인간'이라는 관념이 없기 때문에, 특혜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불교도의 숭배는 찬양, 경의, 부처님을 본받아 배워 그 분과 같이 되고자 하는 바람, 그 분이 보여준 길을 따르고 그 분의 가르침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자 하는 소망 등을 뜻한다. 부처님은 불교도들에게 아무런 특별사면이나 은총도 베풀지 않고, 오직 법에 포함되어 있는 참다운 지혜를 알려 주신다. 이 지혜는 불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적용하기만 한다면, 결국 자기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부처님처럼 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자만, 집착, 애착, 탐욕 및 무지를 덜어줌을 의미하며, 또 부처님께서 생전에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열반에 이르면서 성취해 내신 존재의 완성에 대해 불교도들이 가지는 열망을 의미한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정치가, 토마스 페인 (Thomas Paine)은 ‘내 마음이 바로 나의 교회’라고 말했다. 이 말은 부처님의 신념을 그대로 되뇌고 있다. 불교도들은 자기가 선택한 스승을 본받아서 완성자가 되도록 나아가는 데 있어 굳이 어떤 중재역을 해줄 중개인이 있어야 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사원에서 신도들을 위해 대신 빌어 줄 사제나 율법박사, 목사 및 설교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불교 승려는 가르치는 사람이지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청정한 마음, 자비심, 그리고 일체중생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가르친다. 승려는 결혼식의 주재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오로지 전 생애를 바쳐 교학과 학문을 연찬하고 가르치며, 그러는 중에도 참선수행을 통한 자기 정화의 노력을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한다. 그 결과 그는 남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교도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불교도가 되는가? 이것 역시 흔히 받게 되는 질문이다. `아무데도 등록하거나 가입할 필요가 없고, 서류에 서명하거나 세례를 통해 가입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다른 믿음도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다. 오직 불교도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기 시작하면 되고, 부처님으로부터 영감을 얻으면 되며, 그 분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숭상하면 되고, 그 분이 가르치신 팔정도에 따라 정진하기 시작하면 되며, 선 수행을 통해 공덕과 청정을 얻도록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부처가 되겠다[成佛]고 작심하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부처세계는 결코 제한된 사회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성취했다. 바로 부처님 자신은 전생에서(그 분을 둘러싼 전설 가운데 하나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해탈시기를 미루고 윤회를 계속했다고 전한다.

 

이제 고통을 소멸시켜 주는 부처님의 처방을 음미해 보도록 하자.

전에 나의 친구 한 사람이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해. `올바른 생각[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을 실천하면 되지.”

매우 훌륭하며 또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나 친구여, 너무 성급하게 결론짓지는 말자. 그대가 언급한 내용뿐만 아니라 팔정도 전부가 반드시 다 필요하다. 팔정도는 모두가 서로 훌륭하게 연결되어 있다. `올바른 이해[正見]'와 더불어 `올바른 말[正語]'이 있어야 한다. `올바른 행위[正業]'가 있어야 하고, `올바른 노력[正精進]'이 있어야만 한다. 또 `올바른 노력'을 기울이면서 `올바른 삶[正命]'을 따라야만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해내려면 그들을 하나의 층층대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한 걸음 디뎌 올라서고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린다면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말 것이다. 당신은 이제 이상의 각 단계들을 결합하고 묶고 연관시켜야 하며 끝으로 한 단계를 더 내디뎌 이들 각 단계들을 절정으로 이끌어 마침내 최종단계[正定]에 이르게 함으로써 완성시켜야 한다. 이 마지막 단계 이전의 한 단계가 바로 올바른 마음챙김[正念]의 단계이다.

 

팔정도의 모든 단계들은 흡사 목걸이의 진주알처럼 앞뒤가 멋지게 들어맞고 있으니 놀랍지 아니한가!

 

이쯤에서 `올바름[正]'이란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말과 생각과 행위 등의 `올바름'에 대해서 말이다. 팔정도의 맥락 속에서 `올바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올바름'은 그릇됨에 대한 반대 의미로 쓰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또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고빗길에 처할 때마다 매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별할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올바름'은 알맞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알맞은 행위, 알맞은 말 등등의 의미로 쓰인 것일까? 알맞음은 적당함을, 어떤 경우에 걸맞은 적당함을 뜻한다. 그런데 그게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올바름'이란 말을 쓰신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는 혹시 `선택해야 할 것이 있으며, 바로 ‘우리’가 선택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 누구나 이 길이나 혹은 저 길로 갈 수 있으며 우리의 길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지 부처님이나 신, 혹은 절대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처님은 지적하고 있다'라는 의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선택력이나 의지가 결국은 우리 자신의 업(業)으로 쌓이게 된다는 것을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그 뿐 아니라 우리의 선택, 취향의 상당 부분은 전생이랄까 아니면 유전학적이랄까,

 

어떻게 생각하고 싶든지 간에 그런 방식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는 이 업을 변화시킬 수 있고, 고칠 수 있으며, 바꾸어 버리고, 순화시킬 수 있으며, 목표에 수정을 가할 수 있고, 업의 흐름의 방향마저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가 해줄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해내야 할 문제라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즉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증오에 가득 차고 적대적이고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성향들을 그와 정반대되는 `관대함', `이기심 없는 마음', `사랑함', `친절함', `도와줌'의 성질을 지닌 행위와 말과 생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의 이면을 볼 것이지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며, 말의 본질적인  - 다시 말하면, 핵심적인 의미들을 수용하라고 일러주시는 것은 아닐까?

 

이제 다시 불교가 종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자. 우리가 다 같이 보다 나은 삶을 더불어 살도록, 우리를 결합시켜주는 데 도움되는 도덕규범을 마련해준다는 뜻에서라면 그렇다. 불교는 종교다. `다시 맺어주고 다시 결합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종교의 내면적, 핵심적 의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를 통치하고 있고 사사로운 특혜를 위한 기도나 간청에 의해 매수될 수 있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라는 전제를 요구한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애당초 그런 짓은 하지도 않는다.

 

이에 대해 기독교 신자는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신이 없는 인간, 우주의 지배자가 없는 인간은 짐승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기 마련이다'라고. 이 말은, 즉 엄한 주인이 없이는 인간은 존속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애란 말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일일이 누군가가 일러주지 않으면 살아남지도 못할 만큼 우리는 그렇게 나약한 존재란 말인가? 이 점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은 분명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닦아 올바른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정의의 신에 의해 구제받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생각이 궁극적으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로 인간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올바른 도덕행위[戒], 올바른 선정[定] 및 올바른 지혜[慧]로써 이루어진다.

 

이제 불교를 똑바로 바라보자. 불교는 당신을 내려다보기보다는 우러러보며, 어린애로 다루기보다는 어른으로 대우하며,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맛[一味]4)의 가르침을 끈기있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대로 몸 받아 태어난 존재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즉 업은 우리가 짓고, 우리가 틀 지으며 따라서 우리가 금생에 행하는 일이 내생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가슴을 치며 운명을 억울해 할 필요가 없어지며, ‘회개하라’는 권위적 요구에 전전긍긍해야 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는 자신을 멍들게 하는 나태와 무감각, 삿됨과 사악함에서 벗어나 일어설 수 있다. 복수심에 가득 찬 신이 없이는 사람은 인간 이하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진실이라면, 수천 년 동안 서로서로 평화와 사랑 속에 살고 있는 불교도들의 존재는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과 부처님은 많은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나는 남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들에게 자비로울 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유태인들에게 ‘네가 네 자신에게 하지 않을 짓을 남들에게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후일 예수님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뒤집어서 긍정적․적극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의 백성들에게 해석해 준 사람이 모세였는데, 그렇다고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떠받들지는 않았으며, 그도 역시 신으로 행세하지 않았다. 불교신자와 기독교신자들이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예수님에게 신의 권위를 부여했던 반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에게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존경을 바쳤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부처님께서는 (나는 여기서 보통명사인 부처님보다 고유명사인 부처님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 많은 부처님이 나오셨고 독자인 여러분도 역시 언젠가는 부처님이 되고 싶은 포부를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떨어진 나 자신'이란 관념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에게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동떨어진 나 자신이란 말이 은연 중 나타내는 것은 자기본위라는 갈애이다. 이것은 환상이며, 그것도 근본적인 환상이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은 갈애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다. 즉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신이라는 관념마저도 이 자기중심주의를 미래의 삶에까지  - 그것이 천상세계든 다른 어디든 간에 - 연장시키고 싶어 하는 생각의 표출인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고통없는 멋진 내세 또는 현세의 지속을 갈구한다. 그 답례로 그는 그의 신에게 착한 행실을 약속하는 것이다.

 

좋은 시절은 덧없이 지나가버리며, 인생은 길지 않고 무상하다는 것, 그리고 괴로움과 슬픔은 갈애로 헐떡이는 자기중심의 이기심 때문에 빚어진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 갈애가 바로 고통이다. 갈애(craving)는 겁 많음(cravenness)을 의미한다. 겁이 많다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고통이다. 인생은 두려움으로 차 있다.

 

두려움에 찬, 두려움에 떠는 자아가 홀로 동떨어져 있다는 환상을 놓아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고통이 존재하게 된다. 그 동떨어진 이기의 주체는 자신의 공포심, 이기주의, 탄원, 소망, 갈애에 매달린다. ‘주소서’, ‘도우소서’ 하면서 신에게 애원한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그분은 ‘자기라는 관념을, 그 관념이 빚는 탐욕과 증오와 무지를 스스로 닦아내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또 이 무지란 무엇인가? `나 자신'이란 것이 근본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결국 선정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왜 우리는 선정을 닦아야 하는가. 선정은 하나의 방법이다. 자기를 정화하고 자기를 비우며, 무상하고 환상에 불과한 것들에 집착하는 이 마음을 해방시키는 부처님의 방법이다. 선정을 통해 우리는 망상으로부터 자기를 떼어내고, 자아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이란 점을 깨달으며, 우리 마음을 온갖 번뇌와 환상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또한 지혜와 자비를 닦음으로써 열반이 가져다주는 궁극적인 고의 단절, 자아의식의 철저한 포기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선정에서는 영원 같은 것은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끝없는 지속도 또 어떤 식의 멸진(滅盡)도 있을 수 없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터에 멸진시킬 그 무엇이 있겠으며, 영원해야 할 그 무엇이 있겠는가?

 

구함이 떨어져버린 평온, 고요, 그리고 고의 종식을 가져오는 이 신조와 신념이야말로 얼마나 장엄하고 신비로운 사유의 세계인가? 모든 존재는 결국은 신비 그것이며, 이렇듯 두려움에 떨고 있는 덧없기만 한 존재가 기실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저 깊디깊은 대양 가운데 한 방울의 허망한 물방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인가?

 

사람들은 신들에게 기도하고 간구함으로써 가끔씩 일종의 정신적 정화를 성취한다. 심지어 회의론자들의 기도조차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오는 수가 있다. 기도가 위안과 평온과 고통의 완화를 가져온다면, 그것이 나쁠 리는 없다. 그러나 그 위안이 지속적이지 못할 때는 어찌 될까? 기도가 외부의 권위, 그것도 초자연적 권위에 의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재론할 여지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문제는 일단 젖혀놓더라도, 기도는 `타자(他者)'에 대립하는 `자기'란 개념에 근거하고 있으며, 자기와 타자를 일종의 흥정 과정 속에 묶으려는 생각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애당초 자기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흥정을 할 당사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일단 수용한다면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매듭지으면서 나는 짤막한 일화 하나를 떠올려본다.

 

한 기독교 선교사가 절에서 염불하고 있는 중국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이 염불을 마치자, 선교사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무에게도 기도하지 않았소.”

스님은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습니까?”

선교사가 다그쳐 물었다.

“기도한 게 없었소.”

스님의 대답이었다. 그 선교사는 매우 당혹한 채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절을 떠나려고 나설 때, 스님은 다음과 같이 자상하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도 없었다오. 아시겠습니까!”

 

나는 다른 길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진리를 선 수행을 통해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고통[苦]의 원인에 대하여 비록 그 궁극적인 깊은 뜻을 의심 없이, 완전히 이해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각고의 경험과 마음챙김[正念]으로 적어도 그 원인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광대하다는 점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칠순에 이르러, 수시로 격렬한 협심증에 시달리는 가운데, 관절염의 고통 때문에 앉아 있기도 거북하여 좌선 중에 자주 몸을 뒤척이거나 입선(立禪)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귀가 어두워 매일같이 점점 멀어져 가는 청각과 침침해져 가는 시각 때문에 고통 받는 가운데서, 그리고 호흡을 관하고 백골관을 닦는 중에 무상(無常)이 바로 그 고통의 원천임을 깨닫게 되면서 이런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무상을 깨닫다보니, 우리가 무언가 확연히 구분 가능한 어떤 지속되는 영속체 같은 나를 지니고 있다는 이 환상이 얼마나 광범하게 구석구석까지 작용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의 고통들은 이 근본적인 환상, 다시 말해 고통을 받고 있거나 받을 수 있는 어떤 당사자, 어떤 자아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근본 상황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또한 눈치 채게 된 것이다.

 

하긴 고통의 현실, 고의 보편성 그리고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종교가 다 널리 인정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삶의 근본적인 비극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불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더 나아가는 면은 바로 무아(無我)의 교설을 신봉, 견지한다는 점이다. 무아설의 입장에 서면 생과 사, 무상과 고는 한낱 전개과정에 불과하게 되며,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전개과정에는 개인의 참여가 성립될 수 없다. 바로 이 같은 자각에서 해탈과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그 때는 우리의 존재는 그저 한낱 현상으로 지속되다가 마지막으로 육체가 붕괴되면서 죽음이 우리를 거두어들임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전개과정에는 이미 어떤 자아의식도 개입돼 있지 않으므로 그것(전개과정)은 비개체화(非個體化)한다.

 

우리는 더 이상 재난과 절망과 질병의 피해자가 아니며 심지어 그런 것들의 침투대상도 아니다. 불안․실망․걱정․공포․고뇌․쇠퇴․쇠약․노쇠는 더 이상 우리와 상관없다. 이와 같은 소극적 정서들뿐만 아니라, 갈망․갈애․희망․욕구․소망․애착 등과 같은 적극적 정서들로부터 벗어났음을 입증하는 새로운 지혜와 더불어 고요와 평온이 찾아든다. 왜냐하면 이러한 적극적 정서들을 통해 추구한 결과나 목표들이 실현되거나 성취되었든 아니든 고통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적극적 욕구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면 괴로워하게 되며 실망하게 된다. 또 성취하게 될 경우라도, 그것들이 무상한 것인지라 나름대로 쇠퇴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며 그 손실 때문에 우리는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맛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안달이나 반감, 불확실성 따위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저 평정한 마음의 비개체적인 중도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증오도 원한도 생길 수 없다. 누구든 이곳에서는 복종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항적이지도 않다. 사사로운 사랑이나 미움을 일삼고 있을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 평온이 찾아온다. 해탈하게 된다. 이런 상태들이 바로 위빠싸나[觀] 수행이 이르는 종착점인 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이 수행의 원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를 어느 정도 실현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찾아내는 가르침의 질과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 선정수행을 행할 때 얼마나 열심히 마음챙김 공부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스틸포인트 연구소 교사. 미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로 지구의 절반을 홀로 돌아다니며 깨달은 이들을 친견하다. ‘자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구도자의 한 사람. 저서에 『관(Beginning To See)』이 있음.


2) 『청정도론』에서는 죽은 사람은 자애관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한다.


3) 초심자는 이성을 자애관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 좋다.


4) 부처님의 교설을 외면적으로 관(觀)하면 다종다양한 듯하나, 그 뜻은 하나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