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15)] 신석기 혁명을 이끈 호모 나투피안스(Homo Natufians)

rainbow3 2021. 9. 1. 07:38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15)] 신석기 혁명을 이끈 호모 나투피안스(Homo Natufians)

‘만물의 영장’을 향한 출발점

레케펫 동굴 무덤은 꽃과 식물로 장식한 최초 무덤… 장례문화 통해 갈등 해소하고 공동체의식 함양하기도

넓은 초원에서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며 좁은 곳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공동체 내의 질서가 필요해졌다. 나투프문화인들은 장례문화를 통해 조직 내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통합해 나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도시문명을 가능케 한 ‘석기혁명’을 성취했다. 나투프인들의 삶의 모습을 살핀다.

호모 사피엔스가 오늘날 도시문명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제4 빙하기라는 마지막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11만 년 전인 홍적세부터 1만 년 전까지 거의 10만 년간 호모 사피엔스는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야 했다. 이들 중 소수가 기원전 3만4000년 무렵부터 지하동굴로 내려가 동굴벽화를 그렸다. 이들은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회색 늑대와 공생관계를 맺어 곁에 두었다. 그 결과 회색 늑대들은 ‘개’로 변신해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가장 충직한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연명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 끝없이 얼음 벌판을 이동했다. 이들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다. 바로 이들 떠돌이가 세상을 바꾸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도시문명을 가능하게 한 ‘석기혁명’을 성취했다.

기원전 1만2500년 마침내 빙하기가 끝났다. 날씨가 좋아지면서 산과 초원에서는 나무와 온갖 식물이 자랐다. 들판에서는 동물들이 뛰놀고, 강에는 물고기가 가득했다. 사냥과 채집으로 생활하던 호모 사피엔스들에게는 가히 천국이 도래한 셈이었다. 인류는 유럽을 떠나 거주하기에 최적의 장소인 ‘중동’으로 이주했다. 이스라엘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들은 삼삼오오 이동하면서 인류의 운명을 영원히 바꿀 새로운 것들을 발견한다.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에 흩어져 있는 계곡들에서 인류를 근본적으로 진보시킬 수 있는 생활방식을 실험했다.

정착생활의 시작

‘비옥한 초승달’이란 왼쪽은 이집트에서 시작해 지중해 연안인 시리아·요르단·팔레스타인·레바논과, 그 위의 터키, 오른쪽으로 이라크와 이란을 포함하는 초승달 모양의 지역이다. ‘비옥한 초승달’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은 미국 시카고 대학의 이집트 고고학자 제임스 헨리 브레스티드(James Henry Breasted)다. 그는 고등학생들을 위한 역사교과서인 <초기 세계사(A History of the Early World)>(1916)에서 처음 이 말을 썼다. 이들 지역은 인류의 문명을 위한 거대한 진보가 꿈틀거리는 거대한 실험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인류는 여러 가지 기술과 사회구조를 혁신했다. 급기야 인류는 도시와 문자를 기반으로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이룩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생활방식은 사냥과 채집이다. 사냥과 채집이란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야생식물을 채집하며, 물고기를 잡는’ 행위를 말한다. 이와 같은 생존방식을 영위하는 동안에는 식물 재배나 동물 사육은 없다. 그러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회색 늑대를 길들여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사냥을 용이하게 하고, 거주지를 다른 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인류는 배를 채우기 위해 동·식물을 잡거나 채취해 불로 요리했지만, 그것들을 유전적으로 조작하지는 않았다. 사냥과 채집은 호모 사피엔스만의 생존방식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동물도 사냥과 채집으로 연명했다. 현생인류의 조상이 20만~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와 중동·유럽·아시아에 퍼져 정착했다. 이 기간, 인류의 삶엔 사냥과 채집의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인류가 농업을 발견하고 정착한 시기는 1만 2000년 전쯤으로 추적한다. 인류는 존재했던 기간 중 95%나 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냥과 채집으로 생존했던 것이다.

신석기혁명

농업의 발견은 인류 문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학자들은 농업의 기원을 사냥과 채집에서 찾는다. 빙하기가 끝나고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우연히 농업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남아시아의 나투프 문화와 중국의 초기 신석기 문화에서 정착문화(sedentism)는 농경문화로 가기 위한 기반이 되었다. 이때까지도 야생식물을 채집했을 뿐 재배하지는 않았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빙하기가 끝나면서 저장 가능한 곡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인류는 이들 곡물을 저장하면서 정착해 살게 되고, 나아가 조그만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위 ‘신석기혁명’이란 식용식물을 선별해 그 씨앗을 심고 추수하는 정착생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간은 이제 한 곳에서 자연을 관찰하는 삶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생각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인류의 삶은 먹을 것을 찾아 끝없이 방랑하는 사냥과 채집의 삶에서 한 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곡물을 저장하는 형태로 급격히 전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류는 급격히 증가했다.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학자는 비어 고던 차이드(Vere Gore Childe, 1892-1957)라는 호주의 고고학자이자 고전문헌학자다. 비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실험된 농업의 발견이 인류의 삶에 끼친 영향을 고려해 ‘혁명’이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신석기혁명은 기원전 1만 년경부터 시작되었다. 동식물을 사육하며 정착해 살던 인류는 점차 마을을 조성했다. 인류는 자신의 삶을 위해 자연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수로 개발이나 벌목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신석기혁명을 가능하게 한 농업문화의 기반을 닦은 문화를 나투프 문화라고 부른다.

나투프 정착문화

기원전 2만 년경 마지막 빙하시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15~50명이 무리를 지어 나무가 거의 없는 대초원지대를 옮겨 다녔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덩이줄기식물이나 견과류를 캐내고 사슴이나 영양을 사냥했다. 기원전 1만2500년경 기후가 급격히 따뜻해졌다. 피스타치오·올리브·참나무가 보리와 밀과 함께 대평원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요르단·시리아·레바논에 거주하던 수렵채집인들은 이전에는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다. 이들은 돌과 나무를 이용해 영구적인 가옥을 짓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들의 거주지 바닥을 파 가족의 시신을 매장하고 정교한 장례를 치렀다. 절구와 절구공이로 곡물을 갈거나 동물뼈로 도구와 예술작품을 제작했다. 이들은 공동체의 종교지도자인 샤먼을 선출하고, 수백 명이 함께 거주하는 정착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을 ‘나투프인(Natufians)’이라고 부른다.

고고학자들은 이들이 이전에 존재하던 호모 사피엔스들과 너무도 달라, 멀리서 이주해온 잠입자들로 생각했다. 나투프인들이 만든 정교한 공동체는 인간문명의 특성인 도시문명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나투프 문화는 고대 근동에서 농경정착문화로 가는 인류의 긴 여정의 마지막 단계로 ‘신석기시대의 혁명’인 농업문화의 근간을 마련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돌과 진흙으로 만든 노동집약적 마을을 형성하고, 벽에 예술작품을 남기며 자신들의 조상을 마루 밑에 매장했다.

나투프 문화는 기원전 1만2500년에 시작해 기원전 9500년에 끝난다. 기원전 9500년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농업이 시작된 시점이다. 나투프 문화는 농업사회는 아니었지만 몇몇 곡물의 재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착생활을 했다. 정착문화는 농업혁명을 위한 준비였다. 정착문화의 특징은 인구가 증가하고 가옥과 마을이 형성되며, 새로운 석기와 값비싼 장식물, 무덤과 장례의식, 샤먼, 그리고 물물교환 등이다. 정착생활을 통해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중동지방의 곡물이 유럽의 양과 교환되면서 인류에겐 ‘선물’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등장한다. 나투프인들은 유목생활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 정착생활을 융합하는 삶을 추구했다.

나투프 문화는 곧 시작되는 신석기혁명의 조상이다. 그러나 나투프 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기후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나투프 문화가 성숙 단계로 접어들 무렵인 기원전 1만800년 경 지구는 다시 빙하기로 진입했다. 이때의 빙하기는 13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시기(기원전 1만800~기원전 9500년)를 ‘신드리아스기(Younger Dryas Period)’라 부른다. 이 지역의 연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2~6℃ 정도 낮아져 인류는 다시 채집수렵경제로 전환해야만 했다. 신드리아스기라는 이름은 추위에 적응된 식물 ‘드리아스 옥토페탈라(Dryas octopetala)’의 등장 때문에 붙여졌다. 학자들은 이 식물의 화분(花粉)을 조사해 근동지방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투프인들은 농업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농경에 필요한 문화적 기술을 축적한 시기였다.

나투프인들의 문화를 발견한 고고학자는 도로시 개로드(Dorothy Garrod, 1892~1968)다. 개로드는 선사시대 연구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영국 캠브리지 대학 최초의 여교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28㎞ 떨어진 ‘슈크바(Shuqba)’로 불리는 동네의 한 동굴에서 목탄 흔적과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초승달 모양의 세석기(細石器)를 발굴했다. 이곳에서는 영양과 개의 뼈와 함께 45명이나 되는 인간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었다. 중동지방에서는 지금까지 크고 작은 60개의 나투프 마을이 확인되었다. 초승달 모양 세석기는 화살촉 혹은 식물이나 곡물을 자르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힐라존 타흐팃’ 동굴과 샤먼

개로드는 이스라엘의 갈멜산 근처에서 ‘와디-함메(Wadi Hammeh)’라는 동굴도 발굴했다. 개로드는 이 동굴에서 5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가 거주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동굴에서는 1만2000년 전에 매장된 한 남성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 남성은 조가비로 촘촘하고 아름답게 제작한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었다. 개로드는 이들을 나투프인들이라고 불렀다. 개로드는 이곳에서 새로운 도구를 찾아냈다. 이 도구는 뼈로 만든 손잡이에 날카로운 날이 달려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날에 남겨진 야생 풀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야생 풀은 밀의 조상이었다. 나푸트인들은 매년 광활한 지역에서 여러 종류의 풀을 채집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먹을 수 없는 식물이었지만, 몇 가지 유용한 종을 골라내기도 했다.

나투프인들은 소가족 단위로 모여 살며, 자신들이 추수한 모든 것을 가지고 옮겨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 불편이 인류의 삶을 바꿨다. 당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는 1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이곳에는 먹을 것이 충분했다. 한 명이 3주 동안 야생곡물을 채집하면 한 식구가 1년 동안 편히 먹을 수 있었다. 이 야생곡물이 나중에 등장하게 될 밀과 보리 등 곡물의 조상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이 곡물을 주식으로 삼는다. 이들 곡물의 특징은 잘 말려 보관하면 썩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류는 처음으로 오랜 시간 보관하며 삶을 의존할 수 있는 음식을 갖게 되었다.

곡식을 저장하게 되면서 나투프인들은 더 이상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따라 나투프인들은 임시 거처가 아니라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는 가옥을 짓기 시작한다. 25~50명이 거주할 수 있는 가옥 안에서는 돌을 뜨겁게 달군 다음 그 위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이들이 남긴 쓰레기더미를 통해 이들의 식단을 예측할 수 있다. 나투프인들은 헤엄치고, 걷고, 달리고, 기어다니고, 날아다니는 모든 동물과 지상의 과일·뿌리·열매·견과류 등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먹었다. 이들의 주식은 야생영양이었다. 여기에 지금은 사라진 야생 염소와 황소, 늑대·여우·거북이, 그리고 온갖 새가 이들의 특별 식단이었다. 나투피아인들은 이들 동물을 잡기 위해 창이 아닌 새로운 무기를 개발한다. 바로 ‘물매’다. 물매는 가죽 등으로 만든 끈에 돌을 담아 돌리다 끈을 놓아 그 안에 담았던 돌로 목표물을 맞히는 도구다. 성서에 등장하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도구가 바로 이 물매다. 이 물매는 후에 목동이 맹수로부터 가축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와디 함메’가 나투프인들의 물질적 삶을 보여준다면, ‘힐라존 타흐팃(Hilazon Tachtit)’ 동굴은 이들의 정신적 삶을 보여주는 장소다. 인간이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이들은 같은 지역에 사는 동료들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며 사회적인 의식으로 공동 식사를 곁들인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매장지인 힐라존 타흐팃 동굴에서는 다량의 거북이와 야생염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매장지이자 동시에 공동의 식사 장소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 동굴로 들어와 공동 식사라는 중요한 의례를 행했다. 이들은 인위적으로 구축한 장소에서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동시에 사회적 연대를 강화했다. 이 의식은 신석기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활동이다.

이들이 이전 호모 사피엔스들과 구별되는 점은 섬세한 예술적 표현, 의례 행위, 시신의 처리, 무덤과 새로운 매장 관습 등이다. 이들 사이에는 신석시 시대에나 등장하는 사회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타의 수렵채집사회들처럼 평등사회였다. 많은 사람이 생활공간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가족이나 친족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오랫동안 생활해야 했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어울려 살다 보니 사회 통합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조절장치를 종교체계에 편입시켰다.

인간의 신앙체계의 기원과 변형을 추적하는 작업은 신기루를 쫓는 일과 같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고고학적 자료들은 인간의 사회적이며 영적 열망에 대한 미흡한 물질적 흔적들이다. 물론 장례와 관련된 유물들은 구석기인들의 신앙에 대한 결정적 자료이지만, 최근까지 그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힐라존 타흐팃 동굴은 이들의 신앙체계를 알게 해준 소중한 자료다. 이 동굴에서는 한 나이 든 여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후대에 펼쳐질 인간 문화의 핵심인 불멸에 대한 영적 추구의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힐라존 타흐팃 동굴은 28명의 유골이 발견된 나투프인들의 공동묘지다. 이 동굴은 지중해에서 14㎞ 떨어져 있고, 나할 힐라존 강 위로 150m쯤 솟아오른 급경사 면의 움푹 팬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동굴은 기원전 1만2400~1만2000년에 형성되었다. 나투프인들은 이 동굴 안에 무덤 구조물 두 개(A, B)와 무덤 구멍 세 개(1, 2, 3)를 구축했다. 그들은 동굴 바닥을 파내고 계란 모양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이들 중 무덤 구조물 A는 특별한 사람을 위해 매장 전에 건축되었다. 나투프인들은 진흙을 구덩이의 사방 벽과 바닥에 바르고 그 위를 넓적한 사암 판(40㎝ x 75㎝)으로 막았다.

이 무덤 안에는 시신의 머리·골반·양팔 앞에 10개의 큰 돌이 의례적으로 놓여 있다. 시신은 특이한 모습으로 매장되었다. 둥근 모양의 무덤 남쪽 벽에 몸의 왼쪽을 대고 누웠는데, 양 다리는 무덤의 형태에 따라 무릎을 굽혀 몸쪽으로 오므린 모습이다. 이 시신은 키가 150㎝인 연약한 여인으로 추정되었다. 이 무덤에는 이 여인의 시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왼 발 앞에는 길이 14㎝ 정도의 현무암 그릇, 그리고 성인 남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잘 다듬어진 발뼈가 놓여 있다. 그녀의 왼쪽 정강이뼈 앞에는 수직으로 뼈로 만든 도구가 놓여 있고, 골반뼈 앞에는 두 개의 선이 그려진 조약돌이 놓여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여인을 덮고 있는 적어도 50개 이상의 거북 등껍질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거북 등껍질은 손도끼로 정교하게 다듬어 비슷한 크기를 하고 있다. 수렵 채집으로 연명하던 시대, 먹을 것이 귀했을 것임에도 50마리 이상의 거북이를 희생시켰다는 것은 나투프인들이 이 여인의 장례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증거다.

거북 등껍질뿐만 아니라 당시 다른 곳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여러 동물 뼈가 함께 발견되었다. 나투프인들과 같은 원시인들은 동물 뼈를 온전히 남겨두지 않는다. 뼛속에 든 기름을 얻기 위해 잘게 부수기 때문이다. 또 바위담비처럼 털이 많은 동물은 통상 가죽을 얻는 과정에서 뼈에 날카로운 자국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두 마리의 바위담비 뼈 중에서 한 마리는 온전한 형태로, 다른 한 마리는 반 정도만 시신의 손뼈 위아래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들 바위담비의 뼈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나투프인들은 바위담비 머리를 그대로 매장했다. 시신의 두 팔 아래에는 독수리의 날개 끝을 지탱하는 팔목손바닥뼈와 첫 번째 손가락뼈가 놓여 있다. 이 날개 끝은 독수리의 웅장하고 다채로운 날개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야생소의 미추골과 표범·야생곰 등 나푸트 시대에는 거의 볼 수 없는 동물 뼈도 놓여 있다. 표범의 골반뼈가 두 개의 거북 등껍질 사이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야생 곰의 앞발 전체가 여인의 왼쪽 위 팔뼈 앞에 정렬돼 있다. 여인의 골반 근처에서는 야생 숫영양의 각골이 발견되었다. 숫 영양의 각골은 나투프 문화에서 사회기능적이며 영적인 상징물로, 다른 나투프 무덤에서도 발견되었다.

힐라존 하트팃 동굴에서 발견된 이 여인의 무덤은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들의 무덤과는 전혀 다르다. 나투프인들은 새로운 경제·사회적인 행위를 통해 스스로 혁명적인 문화의 주인이 되었다. 그들은 매장 풍습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의 특징을 드러냈다. 나투프인들은 죽은 자들을 자신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 매장한 첫 번째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인이 사용하던 장식물, 뼈나 돌로 만든 도구, 혹은 동물 신체 전체나 일부를 함께 매장하기도 했다. 힐라존 하트팃 동굴은 나투프인들이 살던 ‘하요님(Hayonim)’에서 10㎞가량 떨어져 있다. 나투프인들은 이 여인의 장례를 오랫동안 준비해 하요님과 강이 내려다보이는 급경사면 동굴에 매장한 것이다. 이 여인은 샤먼이다.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한 나투프인들은 갈등을 해결해 주던 샤먼의 장례를 통해 사회를 통합했던 듯하다.

꽃과 식물로 장식된 ‘라케펫’ 동굴

나푸트인들은 무덤을 꽃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북부 이스라엘 갈멜산에 위치한 ‘라케펫(Raqefet)’ 동굴은 기원전 1만 1700~9900년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이 동굴에서 발견된 무덤은 오늘날 성대한 장례식에 사용되는 꽃이 등장한다. 갈멜산은 나투프 문화의 중심지였고, 많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나투프 묘지에서는 29명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간난아이, 어린이, 어른 모두를 포함한다. 대부분 단독 무덤이지만, 몇몇은 두 사람을 합장했다. 네 개의 무덤은 다양한 식물과 꽃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꽃은 진흙 위에 정교하게 발라져 있다. 나투프인들은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푸른 식물과 향기 나는 꽃을 정성스럽게 펼쳐놓았다. 꽃들은 대부분 민트 향이 나는 것들이다. 이들 꽃은 갈멜산에서 봄에 핀다. 장례가 봄에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레케펫 동굴의 무덤은 꽃과 식물로 장식된 최초의 무덤이다.

이런 화단 장식은 어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는 이곳에 살던 나투프인들의 관습이었다. 나투프인들이 무덤에 꽃장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꽃은 인간 내면의 무의식을 자극해 긍정적 감정을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꽃장식은 장례에 참여한 사람들 간의 유대를 강화한다.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하던 나투프인들은 장례를 통해 농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공동체를 창조했다. 그들은 또한 사후세계에 대한 동경과 믿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조차 극복하려는 나투프인들의 장례문화를 통해 인류는 만물의 영장으로 자신만의 위대한 여정에 들어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