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⑬] 호모 핑겐스(그림 그리는 인간)와 알타미라 동굴벽화
인간은 관찰하고, 공감하고, 추상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손은 인류를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만든 그림을 그린 도구… 알타미라 동굴 안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그들은 동물, 즉 자연과 일치하려는 공감을 연습하기도
인류역사를 나누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efore the birth of Christ: BC)과 기원후(Anno Domini(Year of the Lord, ‘주의해’: AD)로 나누기도 하고, 로마문명은 로마 역사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정한 대로 로마도시가 건립된 기원전 753년 4월이 그 분기점이다. 인류역사를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의 발견된 1879년 전과 후로도 구분할 수 있다. 서양인들은 그전까지 자신들이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여긴 성서가 정해준 연대인 기원전 4004년에서 벗어나, 그 이전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알타미라 동굴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들소와 다른 야생동물이 동굴 벽에 그려져 있어 ‘제4기의 예술의 시스틴 성당’으로 불린다. 제 4기란 지질학용어로 홍적세(256만~1만 년 전)부터 충적세(1만 년전~지금)을 이르는 용어다.알타미라 동굴벽화는 1879년에 발견된 이후로 “보편적 예술의 정점”이란 찬사를 받았다. 여기에 그려진 그림이나 새겨진 조각들은 피카소 같은 화가도 감탄할 정도다. 피카소는 “우리들 중 누구도 이렇게 그릴 수는 없다. 알타미라 이후 모든 것이 쇠퇴했다”라고 관조적으로 고백했다. 이 벽화들이 공개되었을 때, 아무도 그림의 진위를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이 벽화들이 구석기인들의 작품으로 판명이 된다면, 그 당시 대부분의 저명한 학자가 주장한 이론들을 모두 폐기해야 할 위기에 처하였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유산을 암면미술(岩面美術)로 남겼다. 암면미술이란 동굴 암벽에 행한 채화와 각화(동굴벽화), 암굴부조(岩窟浮彫)를 총칭하는 말이다. 암면미술 작품이 있는 구석기 시대 유적지는 350곳이 넘는다. 이 시대 암면 미술의 절반에 해당하는 160곳이 프랑스에 집중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스페인, 이탈리아와 시실리 섬, 그리고 멀리는 루마니아와 러시아 우랄산맥에서도 발견된다.
아마추어 고고학자 사우투올라의 혁신적인 발견
선사시대 알타미라는 1만3000년 전에 끝났다. 그러나 알타미라 입구에 6m나 되는 거대한 돌이 막아 19세기까지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1876년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지역에 살던 동네사람이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하고 그 지역의 영주였던 마르켈리노 산즈 데 사우투올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는 원래 법을 연구하였지만 과학적인 호기심으로 고고학, 역사학, 그리고 식물학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검은색으로 아무렇게나 그려진 그림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사우투올라는 1878년 제3회 파리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 이 박람회에서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돌아가 구석기시대 유물들을 발굴하기도 결심했다. 특히 그는 이 박람회에서 프랑스 선사시대 고고학자 에두아르 피엣(Edouard Piette)를 만나 구석기시대 유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피엣도 사우투올라처럼 원래 법률가였다가 지질학과 고고학에 취미가 생겨 고고학자가 되었다. 사우투올라는 파리만국박람회에 다녀온 후, 1879년부터 용하기 힘든 내용이었다.스페인 북부 해안가에 있는 자신이 소유한 지역 동굴을 본격적으로 탐사하기 시작했다. 사우투올라는 알타미라 동굴 바닥에서 석기와 뼛조각을 발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여덟 살 난 딸 마리아를 데리고 동굴로 들어갔다. 그때 마리아가 본 곳은 동굴바닥이 아니라 천정이었다. 마리아는 사우투올라에게 외쳤다. “아빠, 소들을 보세요!”
사우투올라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본 유물과 알타미라 벽화그림이 너무 유사했기 때문이다. 사우투올라는 자신이 그 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고대 예술을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1880년에 <산타더 지역에서 출토된 몇 가지 선사시대 물건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Breves apuntes sobre algunos objetos prehistoricos de al provincia de Santander)>이란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는 이 책자에서 동굴입구에서 발견한 석기, 뼛조각들, 물감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벽화그림에서 멸종된 들소를 확인하고 이것을 그린 구석인들의 예술적인 감각을 찬양했다. 그는 또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본 유물들과 알타미라동굴의 유물과의 유사점을 근거로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구석기 시대에 속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책자는 선구적인 연구의 전형이었지만, 주류학자들도 수용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1880년 마드리드 대학 고고학자인 후안 빌라노바 이 피에라가 리스본에 본부를 둔 선사시대고고학회 연구자들을 위해 알타미라 동굴 방문을 주선했지만,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 후 독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서 알타미라 벽화는 위작으로 낙인이 찍혔다. 사우투올라와 피에라는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한 뒤에 누렸던 명성을 얻기는커녕 조롱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알타미라’를 가짜 취급한 19세기 말의 시대정신
특히 선사시대 예술연구의 중심지인 프랑스에서 했다.거센 반발이 있었다. 프랑스 학자들은 사우투올라의 연구를 사기라고 결론지었다. 1880년 리스본에서 개최된 선사시대 학회에서 당시의 최고 미술사학자인 가브리엘 드 모흐티에(Gabriel de Mortillet)와 에밀 카르타이악(Emile Cartaihac)은 사우투올라와 피에라의 가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모흐티에는 “이것은 사기다. 우스꽝스러운 그림에 불과하다. 이것은 조작되었고 정직한 고인류학자와 선사시대 역사학자들을 우롱하려고 세상에 내놓은 가짜다”라고 혹평했다. 심지어 그는 사우투울라가 누군가를 사주해 그 그림을 그렸다고 결론지었다. 또 다른 프랑스 미술학자인 에두와르 알레(Édouard Harl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우투올라가 알타미라 동굴을 방문한 1875년과 1879년 사이에 이 그림들이 만들어졌고, 시골 화가를 시켜 동굴 벽에 그려 넣었다고 주장했다.
세상은 아직 사우투올라의 혁신적인 발견과 주장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의미하는 그림의 고대성, 중요성, 탁월성, 그리고 더 나아가 엊그제 그린 것처럼 보이는 완벽한 보존성은 신비 그 자체였다. 인간은 자신의 상식 수준에서, 혹은 상식을 최대한 확장할 수 있는 경계 안에서 대상을 인식하는데, 알타미라 벽화들은 그 경계를 넘어선 충격이었다. 특히 학자들은 아마추어 고고학자에 의해 제기되고 완성된 학문적인 성과를 시기로 가득 찬 나머지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그로부터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진가를 확인하는 데는 2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고, 사우투올라는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비운의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선사시대의 유물들이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프랑스 고고학자인 부셰드 페르트(Boucher de Perthes, 1788-1868)다. 그는 세관 직원이었으나 여가시간에 틈틈이 프랑스 솜강 계곡의 단층에서 발굴한 멸종된 포유류의 뼈와 주먹도끼와 같은 석기를 연구했다. 그는 연구결과를 <고대 켈트와 노아의 대홍수 이전 시대의 유물>(1847~1864)이란 제목으로 3권으로 출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는 선사시대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성서를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신봉하고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연대를 역으로 추정하여 우주창조의 시기를 계산했다. 그들은 17세기 아일랜드의 주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가 계산하여 얻는 결론인 기원전 4004년을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창조된 시점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믿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유대학 교수였던 존 라이트풋(John Lightfoot, 1602-1675)은 어셔의 계산을 보완하여 우주창조의 시점은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오후라고 확정했다. 모든 사람이 영국 캠브리지 대학 학기 시점인 10월 23일이란 날짜까지는 수용하지 않았지만 인류 역사는 멀지 않은 과거에 한순간에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 후에 1856년 네안데르탈인들의 유골이 발견되고 1859년엔 프랑스 생-아슐에서 수많은 돌도끼가 발굴되었다. 학자들은 기원전 4004년의 틀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그 틀을 허문 학자는 찰스 다윈이다. 그가 1859년에 <종의 기원> 그리고 1871년에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을 출간하면서 선사시대가 과학으로 자리 잡기 위한 학문적인 논쟁이 가열되었다. 진화론과 지질학, 선사고고학과 고고학, 과학과 신학의 경계가 허물어진 혼란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시 유럽학자들은 사우투올라의 알타미라 발견과 주장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근거 없는 사기라고 생각했다. 사우투올라는 1888년 자신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성을 쫓다 실패한 인간으로 오해를 받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의심하는 자의 고해성사>와 선사시대 예술의 시
사우투올라의 주장은 그가 죽은 지 14년이 지나서야 수용되었다. 1895년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유사한 그림이 프랑스 전역에서 발견되면서 프랑스학자들은 자신이 내린 알타미라 벽화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재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사우투올라를 사기꾼으로 비난한 프랑스 미술학자 에밀 카르타이악은 1902년에 이란 책을 발간했다. 스페인어로 쓴 이 책의 제목을 번역하자면 <그림으로 장식된 동굴들, 알타미라 동굴. 의심하는 자의 고해성사>이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20년 전 나 자신이 저지를 실수와 불의를 공개적으로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현실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여야 하며 사우투울라에게 저지른 불의를 정의로 되돌리고 싶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고해성사를 썼다. 그의 오류 인정은 선사시대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그는 정직한 사람에게 불의한 일을 저지른 자신을 호되게 비판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연구나 조사를 하지도 않고서, 사우투올라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오만을 고백했다. 그는 같은 해에 알타미라를 처음으로 방문한 뒤 사우투올라의 딸 마리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현대의 탄소연대측정방법을 동원해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제작된 시기를 1만1000~1만9000년 전으로 측정했다.
알타미라 동굴은 길이가 270m이며 그 안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벽화들이 그려진 곳은 모두 세 곳이다. (위 구조도 참조) 첫 번째 장소는 ‘벽화의 방’(I), 두 번째 장소는 ‘움푹 파인 방’(Ⅷ ) 그리고 세 번째 장소는 동굴의 맨 끝인 ‘말 꼬리처럼 생긴 방’(X)이다. 이 동굴은 원래 외부로부터 가려진 가로 20m 세로 6m의 입구가 있었다. 입구는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커다란 홀과 연결되어 있다. 1만2000년 전에 입구가 무너지면서, 조그만 현관만 남았다. ‘벽화의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장소는 길이가 18m, 너비가 10m, 그리고 높이가 1.1m다. 구석기인들이 벽화를 그리기에 가장 쉬운 장소다.
‘벽화의 방’(I)과 ‘움푹 파인 방’(Ⅷ)에는 100마리가 넘는 들소가 붉은색, 검은색, 그리고 자주색 등 아름다운 다색으로 그려져 있다. 들소뿐만 아니라 말, 야생곰, 사슴, 그리고 인간 모양의 동물그림, 그 외에도 여러 개의 손그림이 그려져 있다. 학자들은 이렇게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순서를 연구했다. 천장에는 원래 붉은색 말들이 그려졌고, 그 후에 암사슴, 인간과 동물 하이브리드 그림, 그리고 다색의 들소가 나중에 더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소 그림을 목탄으로 그렸다.
‘말꼬리처럼 생긴 방’(X)은 동굴의 맨 끝으로 길이가 50m, 높이가 3m, 그리고 너비가 1m인 좁은 통로다. 여기에 여러 가지 동물이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이곳에는 지붕모양의 여러 가지 기호와 상징들이 등장한다.
인류는 이제 동물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얼음이 수십m 쌓여 있는 들판에서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고 난 뒤, 동굴로 돌아와 대부분은 지쳐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인 소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처럼, 자신들이 낮에 본 동물들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한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자신이 낮에 본 동물을 자세히 그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은 어떻게 피카소가 감탄할 정도로 훌륭하게 그림을 그렸을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첫 번째 천재성은 ‘관찰’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자신의 조상과 부모로부터 문화를 전수받고, 그 문화를 벽화로 완성했다. 자신이 낮에 본 사냥감을 그저 본 것이 아니라 관찰하기 시작했다. 들소의 움직임, 모양, 크기, 색 등 모든 것을 깊은 관찰을 통해 기억했다. 관찰한다는 행위는 관찰의 대상을 인내를 가지고 자세히 본다는 의미다. 피카소 아버지는 피카소가 아홉 살 때, 이젤과 물감을 사다 주면서, 1년 동안 비둘기 다리만 그리라고 요구했다. 어린 피카소는 아버지 말을 듣고 거리의 비둘기를 관찰하여 다리만 그렸다. 그 결과 그는 비둘기 다리가 한 종류가 아니라 50가지 이상으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다르게 그렸다고 전한다. 알타미라 동굴 안에는 들소가 100마리 이상인데, 모든 들소가 서로 다르다. 그 다양성은 화가가 실수해서 나온 상이한 그림이 아니라, 각각의 들소를 서로 다르게 표현했다.
인간은 직립원인을 하면서부터 주위를 살피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최선의 전략을 짜기 위해서 관찰의 능력을 배양했다. 동물을 보고, 그 동물의 특징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그 동물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는 것이 효과적인 사냥에 중요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사람들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정교하게 연습한 관찰과 기억을 바탕으로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심상에 그려진 동물들의 모습을 재현했다. 자세히 관찰하여 세세히 기억하는 연습은 그들에게 예술이란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벽화가 그려진 장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장소였다. 누군가 횃불을 들고 들어와 옆에서 비줘줘야만, 화가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예술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만의 유산으로 상징과 기호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정교한 수단이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기원전 2만 년 전부터 1만2000년 전까지 8000년 동안 제작되었다. 기원전 1만2000년은 빙하기가 끝나는 시점이며 인류가 농업을 발견한 시점이다. 다색으로 그려진 말이나 소의 크기는 1.5~1.8m, 사슴은 2m 크기다. 예술가는 먼저 생각에 잠겨 자신이 낮에 본 들소를 상상한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먼저 들소의 몸 크기와 각 부분의 비율을 상상하여 전체 윤곽을 뾰족한 나무나 돌로 새겼다. 그런 후 목탄으로 윤곽에 따라 희미하게 그리고 나서 몸 부분은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메웠다. 그들은 몇몇 들소의 머리털이나 등위-아래 털, 그리고 다리와 뿔을 그리기 위해 목탄을 사용했다. 특히 아래턱 수염부분은 가느다란 목탄 연필로 묘사했다. 또한 검은색은 목탄에서 추출하고 갈색이나 붉은색은 철에서 추출해 물에 용해해 다양한 색을 연출했다.
인간은 관찰을 통해 기억에 저장된 동물의 모양을 간략하면서도 충분히 그렸다. 관찰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그린 동물의 감정을 공유하는 단계로 진입한다. 이런 단계를 공감이라고 말한다. 인내를 가지고 동물을 가만히 응시하면 어느 순간에 자신이 동물의 감정을 공유한다. 대상과 감정을 공유하는 공감은 관찰자가 자신이 관찰하는 능동자란 사실을 잊어버리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대상과 일치하는 과정을 ‘엑스타시’라고 부른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두 번째 천재성, 공감
이 그림을 그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동굴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움푹파인 방’(Ⅷ)은 알타미라 동굴 입구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어떤 빛이나 소리도 들리지 않은 진공상태와 같은 신비한 장소다. 예술가는 여기에 다양한 동물을 그렸다. 왼편에는 사슴의 머리가 보인다. 그는 사슴 머리의 윤곽을 목탄으로 그렸고 얼굴은 옅은 붉은색으로 칠했다. 특히 점을 찍어 눈을 표시해보는 사람을 응시하는 느낌이다. 가운데와 오른쪽엔 검은색으로 들소의 윤곽을 그렸다. 가운데 들소를 세로로 그려 들소가 하늘로 유영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그 들소 옆으로 규모는 작지만 몇 마리 들소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서있다. 이 벽화의 아래쪽엔 가운데 들소처럼 위로 치솟는 들소가 있다. 가운데 묘사된 들소와는 달리 몸을 붉은색으로 채웠다. 동물들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장면은 왼쪽 하단에 있는 양팔을 벌리고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이다. 조그만 크기의 인간이 사선으로 그려져 있다. 구석기 시대 벽화에서 인간의 모습은 드물다. 인간이 묘사되었다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왼쪽 발은 비율에 맞지 않게 길게 늘어져 있어 두 발의 길이가 다르다. 팔도 마찬가지다. 오른팔은 두껍고 짧게, 왼팔은 구부러져 위를 향해 들려져 있다. 그 팔은 다시 활과 같이 생긴 기호와 연결되었다. 이런 불완전하고 불균형한 신체 모습은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에서도 발견되었다.
예술가는 정기적으로 동굴 안의 가장 은밀한 곳으로 들어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동물과 일치하려는 공감을 연습했다. 이 공감의 연습을 황홀경이라고 부른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진입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배다.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인간 위로 배가 그려져 있다. 이곳은 예술가가 들어와 현실세계에서 이상세계로 가는 엑스터시를 경험하던 지성소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세 번째 천재성, 추상
추상은 우리 주위에 너무 흔히 퍼져 있어서 우리는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추상이란 우리가 오감으로 감지하는 복잡한 것들을 관통하는 단순함이다. 가장 근본적인 단순함으로부터 이론이 자연스럽게 유출된다. 우리가 보는 현상은 복잡하나 그 복잡성을 설명하는 가장 단순한 법칙이 있다. 그 단순한 법칙을 추출해내는 과정이 바로 추상적 사고다.
‘말꼬리처럼 생긴 방’(Ⅹ) 안에 추상적인 기호와 상징들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목탄으로 검게 세로로 여섯 줄을 그렸고, 왼편부터 첫 칸은 가로로 일자의 짧은 선들을 위에서 아래로 채웠다. 그리고 두 번째 엑스 표시로 채웠고, 세 번째는 다시 일자로, 네 번째는 엑스 표시로, 다섯 번째 칸은 마지막으로 일자로 채웠다.
선사시대의 동굴 예술에 동굴 그림과 추상 기호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손의 그림이다. 손 그림은 다음 두 가지로 완성되었다. 손을 물감으로 직접 그리던지 아니면 스텐실 방법으로 그렸다. 스텐실 방법이란 손을 동굴벽에 대고 페이트 물감을 가운데 구멍이 난 뼈나 갈대와 같은 튜브에 채워 입으로 불어 그 실루엣이 이미지를 남긴다. 스텐실 손 그림을 분석한 미국 펜실바니아 주립대학 딘 스노우(Dean Snow)의 연구에 의하면, 이 손은 대부분 여성의 손으로 밝혀졌다. 이 손 그림이 동굴벽화를 그린 사람의 것인지 아니면 예술가를 따라온 사람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시대의 예술창작에 여성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등장하는 스텐실 손 그림들은 크기가 다른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세 사람의 다른 사람의 그림인 것 같다. 왼편 위는 손이 작아 어린아이 것으로, 그 밑은 넓적한 것으로 남자의 손으로 추정하고, 오른 편 위는 여성의 손인 것 같다. 이들은 이 동굴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자신들이 지상에서 보았던 동물들을 상상하며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존재를 손 그림으로 남겼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손은 인류를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만든 그림을 그린 도구로 찬란한 문명을 펼쳐나갈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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