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리더의 조건] 회의주의자 퓌론의 가르침
최선의 삶을 살고 싶다면 매일 아침 선입견을 버려라! *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자신이 오감(五感)으로 인식하는 세계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 당위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사실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라는 명제로 유명하다. 소피스트들의 시조였던 이탈리아 시실리아 출신 고르기아스(Gorgias)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기 전에 철학과 수사학을 통합하여 ‘소피즘(sophism)’이란 학문 분야를 개척하였다.
그의 목적은 젊은이들에게 ‘덕(德)’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소피즘’은 동양에서 어색하게도 ‘궤변학’으로 번역되었다. 그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자연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궤변처럼 들리는 다음 네 가지를 주장하였다. 첫째,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셋째, 만일 어떤 것에 대해 알려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거나 소통할 방법은 없다.
넷째, 심지어 그것이 소통된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고르기아스는 질문한다.
“우리가 어떻게 말을 통해 색깔이란 개념을 소통할 수 있을까? 우리의 귀는 음성을 통하지 않고는 색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르기아스의 궤변학은 후대 허무주의의 시조가 되었다.
----------------------------- 궤변학을 학문으로 승화시켜 -----------------------------
고르기아스의 궤변학을 학문적 수준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있다.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 엘리스 출신 퓌론(기원전 360~기원전 270년)이다. 그는 젊었을 때, 자신의 그림이 동네 짐나지움에 걸릴 정도로 촉망받는 화가였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주도한 아테네의 영광이 저물어가고 그리스반도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가 아테네와 그리스 본토 도시들을 침공하고 있었다. 퓌론은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화가의 길을 접고, 철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맨 처음에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메가라학파의 아카이아 출신 브뤼손(Bryson)을 찾아가 제자가 된다. 메가라학파는 소크라테스 제자 유클리데스(Euclides)가 설립한 학파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를 ‘하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하나의 현상이나 본질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퓌론은 철학적 담론에 그치는 학문을 버리고 자신이 자연을 관찰하고 그 현상을 화폭에 옮기는 과정에서 고민했던 ‘대상’과 ‘인식’의 문제를 풀기 위해 새로운 스승을 찾아나선다. 그는 그리스반도 북부에 있는 트라케의 아브데라(Abdera)에 거주하는 아낙사르쿠스(Anarxarchus)를 찾아간다. 그는 모든 것의 기원인 ‘원자’라는 개념을 만든 데모크리투스의 제자다. 아낙사르쿠스는 플라톤의 이데아 존재를 거부하고 브뤼손의 ‘하나’를 물질로 해석한 유물론자다.
퓌론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사실은 자신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조차 의심한다. 그는 그 사실조차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오감에 의해 왜곡된 사실일 뿐이다. 그는 인간이 취해야 할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유일한 태도는 열린 마음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도 소크라테스처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에 대한 유산을 로마시대 문필가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Diogenes Laertius)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를 통해 유추한다.
퓌론의 회의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수백 년 동안 유행했고 그것을 이어받은 로마의 에피쿠리아와 스토아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회의주의를 수용하여 근대철학을 시작한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스스로 떠오를 때마다 이 문장은 필연적으로 옳다. 이 진리는 나의 오감에 의지하거나 물질세계의 현상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는 오감으로 인지한 정보와 물질세계를 의심하는 존재이므로 내 육체의 어떤 것도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지 않다. 내게 남은 것은 나의 생각 자체이기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는 어떤 것이다(sum res cogitans)”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나는 속성이 생각인 존재다. 나는 의심하고 생각하고 믿는 생각의 행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이 같은 회의주의의 뿌리이며 소크라테스의 주장보다 더 근본적이며 극단적인 퓌론의 회의주의는 언제 어떻게 등장했을까?
<알렉산더 원정 동행 동양철학과 만남>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이집트에서 스키타이, 이오니아에서 인도까지 점령하여 인류 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23개나 되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문화주의와 다언어주의를 표방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정치를 폈다. 페르시아제국을 하나로 묶는 ‘왕의 대로(大路)’가 페르시아의 수사에서 이오니아의 사르디스까지 만들어지고, 우편제도와 화폐제도를 도입하여 유기적인 행정체계를 구축하였다. 페르시아제국의 정체된 문화를 하나의 융합된 새로운 문화로 탄생시킨 사람은 기원전 4세기에 등장하여 페르시아제국을 물리친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전수받은 이데아를 지상에 구축하려는 ‘실질적인 지혜’인 프로네시스(phronesis)를 실험한 인물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퓌론과 아낙사르쿠스와 같은 철학자들을 동방 원정에 합류시켰다는 점이다.
퓌론은 아낙사르쿠스와 함께 알렉산더 대왕 원정대 일원이 되어 동방을 여행한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 사제인 ‘마기(magi)’를 만났다. ‘차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가 기원전 7세기경 이란의 동부 ‘라이’에서 태어났다. 차라투스트라는 기원전 12세기부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고대 이란 전통을 집대성하여 하나의 중요한 신앙으로 만들었다. 이 신앙을 ‘마즈다이즘’이라고 부른다. 마즈다이즘은 세상을 이원론으로 구분한다. 태초에 선의 화신인 아후라마즈다(Ahura Mazda) 신과 악의 화신인 앙그라 마이누스(Angra Mainus)가 대결하였다는 것이다. 급진적인 이원론을 기반으로 한 마즈다이즘은 지상의 삶은 유기와 극복의 대상이며, 천상을 가기 위한 정거장일 뿐이라고 본다.
퓌론은 마즈다이즘을 통해 허무주의를 강화하고 지상의 현상에 대한 회의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퓌론과 아낙사르쿠스는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다시 인도로 원정을 떠난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는 ‘탁월한 철학자들의 삶’이라는 저서에서 퓌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는 아낙사르쿠스가 가는 곳은 어디나 가서 인도에서는 짐노소피스트(gymnosophist), 페르시아에서는 마기를 만난다. 그는 이 만남을 통해 가장 숭고한 철학을 수용한다. 이 철학은 ‘불가지론’과 ‘판단의 유보’다.
그는 어떤 사항이 명예롭거나 불명예스럽거나, 혹은 정의롭거나 불의하다는 구분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관습과 관례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
조로아스터교 사제인 마기와 함께 그가 인도에서 만난 짐노소피스트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고대 인도의 철학자들을 지칭한다.
퓌론은 자명하지 않은 주장을 전복시키는 데 능숙하다. 그는 단순히 그 주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는 판단을 유보하여 그 주장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가능성을 배제시켜 스스로 평정을 유지한다.
짐노소피스트는 영적 해탈인 ‘목사(moksa)’를 위해 방해되는 것들, 심지어 음식이나 의복과 같이 기본적인 것들도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이것을 거부하며 단식하고 벌거벗고 지냈다. 짐노소피스트들에 대한 기록이 기원후 1세기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알렉산더 대왕 편에 등장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인들의 골칫거리인 사바인들을 반란하게 만든 열 명의 짐노소피스트인들을 체포했다. 이 철학자들은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기로 유명했다.
알렉산더는 그들에게 한 명씩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잘 하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 중 최고 연장자에게 물었다.
‘죽은 자들과 산 자들 중 누가 수가 많은가?’
그는 ‘산 자가 많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사람에게 ‘땅과 바다에서, 어느 쪽에 몸집이 큰 동물들이 많은가?’라고 질문했다.
그는 ‘땅이다. 왜냐하면 바다는 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사람에게 ‘어떤 동물이 가장 교활한가?’라고 질문하니 그는 ‘지금까지 인간은 그 동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대답하였다.
… 그리고 마지막 사람에게 ‘인간은 얼마 동안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니, 그는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을 때까지다’라고 대답하였다.
… 알렉산더는 이 철학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하사하였다.”
퓌론은 동방기행을 통해 현상계의 허무함과 무상함에 대해 깊이 숙고하면서 자신의 회의주의 철학을 구축하게 되었다.
------------------------- 리더를 위한 퓌론의 질문 -------------------------
퓌론은 자신이 오감으로 인식하는 세계를 진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이것을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불렀다. 불가지론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는 ‘아카탈렙시아(acatalepsia)’다. 그는 지금의 지식은 미래의 시점에서 항상 극복과 제거의 대상이기 때문에 진리는 인간에게 영원히 숨겨져 있다고 여겼다.
인간이 발견한 첨단의 지식도 시간이 지나면 남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지식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속성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이데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일 뿐이다.
퓌론은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퓌론식 회의주의’를 창안하였다. 당시 아테네 플라톤 아카데미는 ‘퓌론식 회의주의’에 반발하여 ‘학문적 회의주의 전통’을 시작하였다.
아테네의 ‘학문적 회의주의’는 전통적인 의견을 숙고하여 판단을 유보하는 절차를 밟아 이데아 세계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퓌론처럼 내적인 논쟁을 통해 판단을 초월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해탈, 즉 ‘평정(平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평정을 그리스어로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그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깊이 숙고하였다.
퓌론에 의하면 우리는 감각을 감지하는 수단인 오감은 믿을 수 없다.
오감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감을 신봉한 행위는 실패로 이어진다. 감각 세계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도 등장했듯이, 내가 ‘진리’리고 착각한 ‘의견’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어떤 동물과 같다. 그것이 고라니일 수도 있고 멧돼지일 수도 있다. 인간의 오감은 그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획득하기 위해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파른 낭떠러지가 있는 절벽 끝으로는 가기를 꺼린다. 낭떠러지 밑을 보는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퓌론은 오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절벽 끝으로 가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기가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자신이 다칠 것이라고 미리 상상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살아 있거나 죽거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오늘날 퓌론을 만났다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는 일반적 상식으로는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알고 확신하는 여러 정보들이 명백히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혹은 그런 상식으로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행위를 제어하는가?
상상이나 오감을 통해 잘못 알려진 정보는 나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해꾼일 뿐이다.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진리라고 여겨진 모든 것들을 의심해야 한다.
퓌론은 평정을 얻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묻기를 바란다. 이 질문은 리더가 스스로에게 항상 던져야 할 질문들이기도 하다.
첫째, 내가 인식하는 대상인 사물은 정말 무엇과 같은가?
그 사물은 내가 상상하는 그 대상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추정하는 그것인가?
둘째, 내가 그 대상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고 나서 그것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항상 살피는 관조의 습관을 지니고 있는가?
셋째, 관조하는 삶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우리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아마도 그 대상의 본질을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지식은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상대방이나 어떤 주제에 대한 선입견을 매일 아침 버려야 한다. 플라톤이 주장한 것처럼, 원형은 천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추론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다고 호도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 이 시간, 그 사물에 대한 나의 순간적인 시선일 뿐이다. 우리가 시선의 순간성을 인정하면,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을 위한 최선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높은 경지에서 항상 굽어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제3자가 되는 수련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퓌론은 이 관조의 삶을 행복으로 여겼다. 이 관조의 삶이 ‘아타락시아’, 즉 평정으로 이어진다. 그는 자신과 주위를 평정심을 갖고 볼 수 있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런 삶은 퓌론이 인도에서 만난 짐노소피스트들의 삶이다.
퓌론의 사상은 가파른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날리려는 무모함과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 허무주의를 지니고 있다. 그가 제시한 삶은 위험하고 가혹하며 반(反)사회적이기도 하다. 그런 삶이 정말 그가 제시한 대로 평정심을 가져다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를 둘러싼 상식과 관습이란 지식이 이론이 되고, 그 이론이 사상과 종교가 되어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퓌론은 우리에게 촉구한다.
“우리 자신을 위한 최선을 삶을 추구하기 위해, 군더더기와 같은 생각을 버리십시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등에가 되어 잠을 자려는 아테네인들에게 질문하라고 촉구했다면, 퓌론은 자신도 알게 모르게 수용하여 자신의 정신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상식을 면밀하게 살펴보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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