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 이론과 그 의미
전 철
1, 들어가며 : 왜 동시성 현상이 문제인가?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 왔었다는 아련한 느낌, 혹은 현실에서의 이 순간은 언젠가 꿈에서 한 번 보았던 순간 같다는 느낌을 자주 갖는다. 어떤 친구는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아침에 집에 전화를 걸어보니 아버님이 병으로 누우셨다는 말을 한다. 실로 인과율과 통계법칙으로 설명이 안되는 이러한 경험은 본인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속에 내밀하게 간직한 경험들일 것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만나는 이 생경하고 모호한 경험은 태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삶 가운데 면면히 축적된 사건이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경험을 그리 쉽사리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경험을 포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포용력은 경험의 생경함 앞에서 언제나 쉽게 좌절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강렬한 경험과 이미 타진해버린 나머지 빛이 바랜 청동거울일런지도 모른다.
칼 구스타프 융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경험 속에 산 사람이었다. 융은 이렇게 합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인과적으로 연결이 불가능한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과거와 미래의 모호한 맞물림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직시하였고, 환자들을 돌보면서 이와 관련한 다양한 임상 사례를 체험한 사람이었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희귀한 체험과 환상'[1]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융의 담대함은 '희귀한 체험과 환상'의 세계에 자신을 내어 던졌을 뿐만 아니라 언어로 쉽사리 해명될 수 없는 그 영역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진솔하게, 혹은 대담하게 돌파해 나아갔다는 점일 것이다. 당시 융은 의사의 가운을 입고 있었던 과학자였던 만큼, 서구의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쉽사리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을 건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2]
그러나 당시의 정상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과거와 미래의 뒤섞임, 인과율의 파탄,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인생을 거쳐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여든 가까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내놓은 글이 바로 <동시성 : 비인과적인 연결원리>Synchronizitat als ein Prinzip akausaler Zusammenhange (Zurich, 1952)이라는 논문이다. 여기에서는 이 논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융의 동시성 개념과 그 의미를 숙고하려 한다.
융은 이 논문에서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인 파울 카메러(Paul Kammerer, 1880-1926)의 논문에 많은 통찰을 얻었다. 카메러는 20세부터 40세까지 동시성 현상에 관련한 경험사례를 정리하여 <연속성의 법칙>Das Gesetz der Serie (Stuttgart, 1919)이라는 저서에 100가지의 사례로 수록하였다.[3] 여기에서 카메러는 물리적인 인과법칙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자연의 원리에서 비롯되는 우연의 일치를 설명하려 하였다.[4] 융은 그의 논문 서두에서 카메러의 연구를 자주 언급하였고 특히 그의 개념인 <연속성의 법칙>에 대해서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였다.[5]
동시성에 대한 카메러의 단초를 바탕으로 하여 융은 인과율에 의한 자연법칙을 단숨에 넘어서는 회귀한 경험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명을 그의 논문에서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세계에는, 특히 정신세계에는 인과율의 파탄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히고, 그럼으로 인과율의 법칙을 넘어서는 또 다른 '법칙'이 존재할 수 있음을 융은 그의 논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2. <동시성>Synchronicity에 대한 융과 제자들의 개념정의
융의 제자인 프란츠는 "동시적 사건"(Synchronic events)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동시적 사건은 비일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적 사건을 확고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인과적 법칙을 경험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시적 사건은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6] 프란츠가 잘 지적하였듯이, 동시적 사건은 우리가 일상에서 결코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건이 통계적으로 입증되고 규칙적으로 재생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고, 경험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동시적 사건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4차원 시공연속체가 포함하고 있는 일반적 사건임을 입증하는 것이다.[7] 그렇다면 융은 동시성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일단 그와 그 제자들의 개념정의를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동시성의 유형과 사례를 조명해 보도록 하자.
정의 1 : "나는 그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나 그 사이에 같거나 비슷한 의미가 있으며, 또 시간적으로 일치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둘이나 그 이상 사이의 사건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이 개념은 두 가지 사건이 단순하게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동시(synchronism)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동시성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계기에 한 개인의 정신적인 상태와 외부적인 사건 사이에 일치가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8]
정의 2 : "동시성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사건들의 의미 있는 일치이다."[9]
정의 3 : "동시성은 우리 의식의 일상적인 차원과 근원적인 차원, 즉 두 정신적 차원의 순간적인 연합이다.[10]
정의 4 : 첫째, 동시성은 인과적으로 서로 결부되어 있지 않은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 혹은 상응을 묘사하기 위해서 창안한 개념이다. 그러한 동시적 현상은 예컨대 내적인 사건(꿈, 환상, 예감)이 외부적인 현실에서 상응한 것을 가질 때, 내적인 상(像) 또는 예감이 진실임이 판명된다. 둘째, 비슷한, 혹은 같은 꿈, 생각들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일어난다. 어느 하나도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들은 오히려 무의식에서의 원형적 과정과 상호 관련된다.[11]
3. 동시성 현상의 세 가지 유형과 그 사례
동시성 현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12]
첫째, 관찰자의 의식상태(M)와, 외부의 사건(과거/N)이 동시적으로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이 첫째의 유형에 관한 융의 경험은 다음과 같다. 융은 지나치게 합리적이어서 치료에 강한 저항을 보이던 여자환자와 분석을 진행하고 있었다. 닫혀 있는 창을 등 뒤로 하고 앉아서 융은 이 환자가 자기의 꿈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환자의 꿈은 매우 인상 깊은 꿈이었는데, 누군가가 황금색 풍뎅이 모양의 고귀한 보석을 선물로 주는 내용이었다. 순간 등 뒤의 창 밖에서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융이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니 황금색 풍뎅이와 유사한 곤충이 방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이었다. 융은 창을 열어 그 곤충을 잡아 환자에게 "여기에 당신의 풍뎅이가 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건네 주었다. 이러한 사건은 환자의 냉철한 합리주의와 지적인 저항에 금을 가게 하였고, 이후에 그 환자에 대한 치료는 매우 원활하게 진행되었다고 융은 말하고 있다.[13]
둘째, 관찰자의 의식상태(M)와, 관찰자의 지각영역으로 포섭되지 못하는 외부의 사건(N)이 동시적으로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두번째의 유형에 관한 융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융이 언급한 이 사례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회고하였던 사례이고, 많은 문헌에 기록된 사건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스웨덴보그는 스톡흘롬에서 큰 화재가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환상은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순간에 스톡흘롬에서는 대 화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에는 투시, 텔레파시라 불리울 수 있는 것들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고 융은 해석하고 있다.[14]
셋째, 관찰자의 의식상태(M)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미래/N)과 일치를 보이는 경우이다.
세번째 유형에 관한 융의 진술과 경험은 다음과 같다. 융은 1902년 봄에 던(I.W. Dunne)이 꾼 꿈을 인용한다. 던은 꿈에서 자신이 화산에 서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그 곳은 섬이었고 던은 화산 폭발의 위험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꿈에서 4,000명의 주민을 대피시키기 위하여 뛰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며칠 후에 던은 신문을 받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다음과 같은 신문의 헤드라인에 쏠리게 되었다. "마르티니크의 화산폭발―용암이 도시를 휩쓸어 갔다. 40,000명 이상의 인명 유실."[15]
또 다른 경험은 다음과 같다. 한 등산가가 융을 찾아왔다. 그 등산가는 어느 날 밤 높은 산의 정상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융에게 말해주었다. 융은 그 꿈을 다 듣고 등산가의 앞에 닥쳐올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융은 꿈이 주는 경고를 강조하여 그에게 스스로 등산을 자제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등산 중에 발을 헛디뎌 "허공으로" 낙하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미래를 감지하고 그것은 꿈으로 전달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등산가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16]
4. 동시성 현상의 역학과 의미
우리는 위에서 동시성 현상의 세 가지 유형을 살펴 보았다. 이 유형과 사례를 바탕으로 동시성 현상은 어떠한 역학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숙고해 보도록 하자.
첫째, 동시성은 무의식의 보완기제의 산물이다.
실로 <집중>은 의식의 특징이다. 우리는 의식적 집중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사리분별을 가하고 세계를 분명하게 파악한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집중의 강도가 높아지는 반면, 세계 전체에 대한 통전적이고도 온전한 수용력이 낮아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전체의 세계에 대한 조명을 쉽게 상실해버릴 우려가 있다. 이런 면에서 의식의 예리한 칼날은 무의식의 육중함에 비해 쉽게 소진되거나 마모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갇힌 의식의 감옥 철창 사이로, 끊임없이 온전하고 보편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의식을 향해 암호와 메시지를 보낸다.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동시성의 경험은 무의식의 보완기제이며, 또한 개인의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경험인 것이다. 빅터 만스필드(Victor Mansfield)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동시성 경험의 의미와 목적은 무의식적 보완을 통하여 구현되는 것이다. ... 동시성 경험은 개인적인 측면의 의미를 지닐 지언정, 그 경험은 원형적인 차원이며 보편적인 차원이다."[17]
둘째, 융의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에 기반하고 있는 정신 현상에 관한 해명이다.
인과론의 파탄 속에서도 이러한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해명한 융의 시도는 가히 예언자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융이 최초로 이론화한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에 기반한 정신적 현상의 한 면을 밝히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융의 동료인 폰 프란츠(Marie-Louise von Franz)는 융의 심리학과 과학과의 관련성을 <인간과 그의 상징>Man and His Symbols 후반부에서 개괄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프란츠에 의하면 융이 전개한 정신현상에 관한 이론과 현대과학은 긴밀한 연관을 보여준다고 한다.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융의 저 이론에 대하여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융의 동시성 이론을 물리학적으로 해명하는데 매우 커다란 일조를 한 융디안 빅터 만스필드(Victor Mansfield)는 EPR 사고실험과 양자 파동과 데이비드 봄의 내장 질서(Implicate Order)와 동시성 현상과의 관련성을 심도깊게 논의하고 있다.[19]
EPR 사고실험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EPR 사고실험을 통하여, 전자와 다른 전자 사이의 정보소통에 있어서 시간의 개입이 없이도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장(field)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35년 아인슈타인은 동료제자인 포돌스키와 로젠과 함께 중요한 사고실험의 결과인 논문을 발표하였다.[20] 이 세 사람의 약자를 띤 실험은, 초기 상태에서는 상호작용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 서로 분리된 양자적 대상인 S1과 S2의 두 체계를 상정하였다. S1과 S2는 물론 공간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이 실험의 요약은, S1에 외부의 영향력으로 인해 결과로서 S1이 변했을 때 아무 관계도 없는 S2가 동시적으로 S1의 변화값 만큼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물론 상식적인 거시적 인과율을 어기는 일이다. 이 결과는 당시로서는 사고 실험이었으나 1982년 프랑스의 아스페(Aspect)의 세 번에 걸친 실험에 의해 결정적으로 판명된 실험이었다. 그 결과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실재가 알지 못할 상관성이 있고 서로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세계는 근본적으로는 인과율을 넘어선 관계로 직조된 세계라는 것을 밝혔다.[21]
만스필드는 인간의 내적인 정신의 영역이 바로 거시적 인과율을 어기는 EPR이 작동하는 영역, 그리고 인과성과 확률을 동시에 고려하는 양자역학에 있어서 살아있는 내적인 정신의 영역을 양자파동(quantum wave)의 영역으로 해명하고 있다.[22] 또한 그는 현대물리학의 입장에서, 초심리학적인 현상은 자연법칙의 비인과적 표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서 초심리학[23]을 자연법칙의 일부로 편입시켜 놓고 있다.[24]
셋째, 동시성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무의식은 현존하는 인과적 시공구조를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영역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부영은 "무의식에는 의식의 제약된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이를 상대화 하는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25]고 본다. 의식은 4차원 시공연속체를 매개로 한 사태이지만 무의식은 4차원 시공연속체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초기에 융은 고전적인 물리적 세계상의 3요소인 공간, 시간, 인과성에 동시성을 결합시켰다. 이후 융은 물리학의 혁명의 영향과 파울리의 도움을 받아 시공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공식을 에너지(보존)―(시공)연속성으로 대치하였다. 이는 시공의 절대좌표 조차도 정신 안에서 상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라는 그 아르키미데스 점은 시공연속체 안에 있으면서 그를 넘어서는, 다차원적으로 열린 초점이라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정신은 시공 안에 있지만 정신은 시공을 넘어서 있다.
융은 구체적으로 그의 자서전 12장 <죽음 뒤의 생(生)에 관하여>에서 정신의 일부는 시공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시공간의 관념과 인과론이 모두 완전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완전한 세계상을 최종적으로 그려낼 때에는 이전의 관념과는 다른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간, 공간, 인과론을 지닌 인간의 세계가 그 배후에 또는 그 이면에 있는 사물의 다른 질서에 관련되며, 그곳에서는 "여기와 저기"도 "이전에, 그리고 뒷날에"라는 구별도 중요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융은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 질수록 그것은 절대성인 무시간성, 무공간성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고 술회하고 있다.[26]
동시성은 철학적인 견해도 아니고 인식에 필요한 원리를 제시하는 경험적인 개념이며 물질주의나 형이상학도 아니라고 융은 그의 글 속에서 분명하게 제시하였다.[27] 그러나 정신적 현상으로서의 동시성에 관한 융의 착상과 지론은 이미 경험과학으로서의 심리학 안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수위를 훨씬 넘어버린, 매우 중대한 신학적, 형이상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신학적으로는 신 인식에 관련한 신론과 닿아 있고 형이상학적으로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인식지평을 논의하는 인식론, 주체와 주체 사이의 정체성과 관계성을 논의하는 관계론, 또한 주체를 근거지우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의 존재론과 닿아 있다.
융의 동시성은 인과적으로 상호 독립된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화이트헤드의 동시적인 것과 지속에 대한 논의[28]가 융의 동시성 현상에 어떠한 관점을 제공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화이트헤드의 동시적 세계와 지속은 융의 동시성 현상에 대하여 다섯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1) 동시적인 것은, 동시성 현상의 기초가 되는 인과율로부터 독립된 사건들의 존재론적 기반을 형성한다. 동시적인 존재들은 상호간에 인과적으로 독립해서 발생하는 존재들이다. 인과율에 저촉되지 않는 동시적인 영역의 확보는 절대시공간에서 상대시공간으로 넘어가는 융의 시공간 이해의 가장 구체적인 성과이다.
(2) 동시적인 것은, 동시성 현상, 즉 의미있는 사건의 우연적인 일치가 의식적 차원에서는 놀라운 경험일 수는 있어도, 결코 놀라운 경험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존재는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이라는 근원적인 지각양태에 바탕하고 있다. 모든 정보는 광속을 기준으로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로 축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태양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어떠한 존재의 정보라도 7분 30초 이내에 <동시성 현상>으로 사건화되는 것은 결코 낯선 사건이 아니다. 인과적 효과성의 '강물'은 나와 너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한 Unus Mundus와 매우 가까운 영역이다. 의식적 지각의 후기양태로서의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은 인과적 효과성의 견실한 여건을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연장적 관계를 동시적인 영역에 투사시킨다. 우리의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는 우주 전체와 동시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우리의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는 나의 신체와 동시적인 영역에만 관계를 유지한다(cf. 동시성 현상의 두번째 유형).
(3) 동시적인 것이라는 특성에 의해 정의되는 지속은 동시성 현상의 다차원적 실재성을 보증해 준다. 고전적인 시공이론을 넘어서서 상대성이론을 그의 체계 속에 통합시키는 방식은 바로 M을 관통하는 지속이 하나 이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성 현상'은 우리의 4차원 시공연속체 안에서 무한히 다양한 양태로 출현할 수 있다.
(4) 현재라고 하는, 시간폭을 가지고 있는 지속의 영역은 인과관계가 파괴하는 영역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최소 지속의 단위가 현재에 적용된다면 아래의 보기와 같이 최소 지속 내부에서는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이 현재라고 하는 시간폭을 가지고 있는 영역에서는 광속보다 빠르지 않는 물체의 세계에서도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29] 융의 동시성 현상은 바로 현재라고 하는 영역에서 인과율이 파기되면서, 동시에 세계 전체의 '순간'에 대한 의식적 파악이 진행된 찰나인 것이다(cf. 동시성 현상의 세번째 유형의 접근가능성).
(5) 세계의 직접적인 현재의 상태를 확보해 주는 현재화된 지속은 개별적인 인격들의 정체성을 구유(具有)해 줄 뿐만 아니라 Unus Mundus 개념을 구체적으로 조명해 준다.
모든 인격은 동시적 세계의 존재이다. 동시적 사건의 정의는 그것들이 상호간에 인과적으로 독립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동시적 계기(M와 N)는 그 어느 쪽도 다른 쪽의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적 계기는 자기 독립의 절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동시성은 모든 존재의 동등한 위상을 지시한다. 거기에는 비교도 없고 가치도 없다. 바로 그것은 동시적 존재들의 독자적 주체성이 확보됨을 의미한다. 동시에 연대성이 상실됨을 의미한다.
동시적 존재들은 상호 독립하기에 서로 연대할 수 없다(M≠N). 이는 하나님의 부재(Deus absconditus)이다. 하지만 동시적 세계의 타자성은 이제 세계의 연대성으로 전진한다. 세계의 직접적인 현재의 상태를 확보해 주는 현재화된 지속이 바로 Unus Mundus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현존(Deus revelatus)이다. Unus Mundus에 의하여 동시적 세계의 현실적 존재들은 세계와의 조화를 구현할 수 있다(M=N). 이는 Unus Mundus에 근거한 절대지의 활동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살아있음'을 의미한다.[30]
넷째,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동시성 현상을 통하여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차이를 강조하는 클레아투라와 통합이 이루어지는 플레로마 사이의 불가분리적 연결인 하나의 세계(Unus Mundus)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또한 이 안에서 운행하는 절대지(das absolute Wissen)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동시성은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사이의 의미있는 일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인과적 주관적 의식의 카테고리가 박살나고 이 하나의 세계에 내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의 그물로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직관적 파악은 동시성 현상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매우 강렬한 체험인 것이다. 또한 원형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을 동시성 현상은 열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 대한 주체의 파악(파악의 주체)과 그 파악의 근거가 되는 객관적 세계[존재론적 시공간], 혹은 그 파악을 매개로 투사되는 객관적 세계[인식론적 시공간] 사이의 흩어진 조각들은 주체가 세계에 가하는 논리적인 분별지(分別智)에 불과할 뿐, 실제적으로는 Unus Mundus가 존재할 수가 있음을 보여준다. Unus Mundus는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닌, 오히려 이들을 품는 근원적인 깊이이다. 융은 Unus Mundus를 물질과 마음이 분화되지 않고 따로 따로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라고 부르고 있다. 융에 의하면 "절대지"는 감각이나 경험적인 자아의 지식으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31]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시공의 일상적인 범주의 제한을 넘어서는 동시성의 사건을 매개로 절대지와 접촉하게 된다.
5. 나가며 : 동시성 이론의 현재적 의미와 성찰
첫째, 현대문명은 합리성에 의하여 바벨탑을 축조하였다. 완고한 탑의 벽돌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의 질료는 비합리성을 신화로 매도하었다. 왜냐하면 바벨탑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시대는 비합리성이 사멸한 시대이다. 문명사적으로 보면, 융의 동시성 이론은 맹목적인 합리성과 과학성에 찌든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거점을 확보해 준다.[32]
둘째, 심리적으로 동시성 현상은 <자기>Self의 표현과 관련이 있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Ego를 향해 전체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아의 결여를 직시하고 미래의 혹은 현재의 치명적인 손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단히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 프란츠는 동시성이라는 현상 안에서 Unus Mundus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인간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33] 동시성 현상 역시 무의식의 작용인 한, 그것은 인간 정신의 전체성과 관련되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려 하고 있음에 틀림없기[34]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레 다가오는 기이한 조짐들을 잘 포착해 내는 것, 그리고 무의식의 미세한 음성을 귀담아 듣는 것이 매우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서 융의 동시성 현상은 인간 인격의 온전한 <개성화>Individuation의 과정과도 연계[35]되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동시성 현상은 종교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던져준다. 인간은 동시성 체험을 통하여 온전한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체험은 누미노제[36]적인 것일 수 있고 더욱 커다란 존재에 의하여 자신이 운행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영적인 성숙을 인도한다. 특히 비인과적 연계성인 동시성은 우리에게 주체와 대상, 정신과 물질, 인과성과 목적론 사이의 온전한 조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동시성 현상은 주체의 인식론적 영역과 세계의 존재론적 영역 사이에 의미있는 일치를 심오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37] 어쩌면 우리는 다시 적막감이 끝도 없이 감도는 무한한 동일성의 우주를 머리속으로 그려낼 수 밖에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실로 동시성 현상은, 우리를 향한 융의 투명한 해명과 제시가 아니라 더욱 우리를 미궁으로 인도하는 암호가 된다. 융은 물질과 정신의 문제, 몸과 마음의 문제[38]를 해명하는 데 매우 고려할만한 유용한 단서로서 '동시성'의 문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비밀이자 역사의 비밀인, 누적적인 시간의 문제, 우주의 대극에서의 영혼의 위치와 영혼의 불멸, 물질과 정신을 동시에 아우르고 분유하는 Unus Mundus의 그 깊이에 관한 물음이 스산하게 다가온다. 실로, 우주는 아직도 인류가 해명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을 비밀로 간직한 채 저렇게 유유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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