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심리학

프로이트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 바로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

rainbow3 2019. 10. 12. 22:37


-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 바로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프로이트에게 꿈이란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의 성취’… “내 의식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이고도 이질적인 모습이 내 참모습”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가 우리의 의식이라는 가면이 벗겨진 보다 순수한 내면의 모습이라고 보았다.

 

 

20세기 초반 이태리의 전위예술가 루솔로(Luigi Russolo, 1885~1947)는 사람들이 귀에 거슬려 하는 소리들, 즉 소음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소음을 내는 엄청나게 거대한 악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미래파(futurism)의 일원이었던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두 가지 큰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소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소음은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거나 의식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귀에 흡수된다는 사실이다. 백색소음(white noise)은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가령 소음이 없는 너무 조용한 곳에서는 정신이 잘 집중되지 않는데, 이는 조금만 소리를 내어도 이를 중화시킬 수 있는 소음이 없기 때문이다.

 

백색소음은 마치 온갖 색이 다 섞여서 빛이 투명한 백색광으로 나타나듯이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는 투명한 음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연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그것을 방해하는 소음을 중화시키는 백색소음 덕택이다. 소리는 우리의 귀에 분명하게 들리고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19세기 말에 발명된 ‘축음기’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얼핏 축음기가 인간의 귀에 들리는 소리를 그대로 담는 기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축음기는 인간의 귀와 달리 소리를 의식적으로 지각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상관없이 모든 음을 기록한다. 축음기의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소리의 진동을 파형으로 그대로 기록해 홈을 새기는 것이다.

인간의 귀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과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구분해 선택하지만 축음기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의 파동을 기록한다.

 

시끄러운 카페에서도 연인의 목소리를 뚜렷이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귀가 선택적으로 작용해 듣고 싶지 않은 다른 소리는 잡음으로 걸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음기는 연인의 목소리건 다른 사람의 소리건 혹은 카페의 잡음이건 간에 모두 파형으로서의 소리를 기록할 뿐이다. 심지어 인간에게 들리지 않는 백색소음까지도 축음기는 기록한다. 그렇기 때문에 축음기에서 지각되는 음과 그렇지 않은 소음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음(音)이자 동시에 소음인 것이다.

 

 

루솔로가 제작한 소음악기. 축음기는 인간의 귀와 달리 모든 음을 기록한다.

 

 

터무니없는 말과 행위에 주목

 

오늘날 심리학의 모태가 되고 중요한 학문적 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한 정신분석학은 바로 흥미롭게도 우리가 소음이라고 간주하는 것들에 주목함으로써 탄생하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식적인 진술내용보다는 오히려 터무니없는 그들의 행동이나 무의미한 잡담 혹은 말실수 등에 주목하였다. 예전에 이러한 터무니없는 말과 행위는 마치 아무런 뜻도 없는 소음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오히려 이렇게 무의미한 소음으로 간주되는 말에 주목하여 그것이 보다 심층적인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징표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음과 소음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소리를 기록하는 축음기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모든 소리에 주목한다. 그리고 우리가 무의미하고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소음 속에서 의식보다 더 깊은 마음의 영역을 발견한다. 그 영역이 바로 무의식이며, 정신분석학은 바로 이러한 무의식의 발견과 함께 발전했다.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브로이어(Josef Breuer, 1842~1925)와 함께 집필한 <히스테리 연구>(Studien über den Hystrie, 1895)의 출간과 함께 공식적으로 출현했다. 이 책은 브로이어와 프로이트가 치료를 맡았던 ‘안나 오(Anna O)’라는 가칭의 환자를 치료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브로이어는 1882년 12월부터 안나 오의 치료를 맡았는데, 그녀는 그해 7월부터 종양에 걸린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심한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 안나 오는 오른쪽 옆구리에 심한 마비 증상을 느꼈으며, 자주 기침을 했다. 음식물을 종종 거부하고 시각 장애에 시달렸다. 때로는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망각하고 영어만으로 말했고, 환각 때문에 매우 공격적인 행동을 하곤 했다. 아마도 그녀의 증세는 아버지에 대한 열성적인 간병 때문에 생긴 히스테리 증세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보기에 그녀는 정상인과 달리 히스테리 환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간병에 지나칠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안나 오의 증세는 아버지가 이듬해인 1881년 4월에 사망한 이후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더 심해졌다.

 

브로이어는 안나 오의 증세를 완전히 치료하지 못하고 프로이드에게 치료를 맡겨야 했는데, 이는 그녀가 브로이어를 자신의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연정을 느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얼핏 짐작할 수 있지만, 그녀가 아버지에게 느낀 감정은 단순한 아버지에 대한 감정 이상이었다.

 

프로이트는 안나 오른쪽 옆구리의 마비 증세와 산발적인 모국어 상실이 의사를 기다리며 아버지의 병상에서 겪었던 그녀의 환각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됐다. 어느 날 병원의 침상 옆에 엎드려 졸던 그녀는 위급한 순간 잠이 깨면서 뱀이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환각을 보았는데, 오른쪽 팔엔 쥐가 나서 팔을 쓸 수 없었다. 게다가 기도를 올리려 했지만 어릴 때 배운 동요만 떠올랐다.

 

여기에서 뱀은 성적 욕망과 관련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적 욕망의 주체는 바로 안나 오라는 사실이며, 안나 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말하자면 자신이 그러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자리 잡는다.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과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말하자면 그녀의 좌절된 무의식적 욕망이 히스테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녀의 히스테리가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닌 무의식이라는 의식 깊숙이 숨겨진 보다 심층적인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히스테리를 육체적인 병으로 보았던 과거의 학문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을 의미한다. 애초에 히스테리라는 말 자체가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히스테리가 여성의 신체적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현대의 우리 역시 히스테리 하면 무엇보다도 ‘노처녀 히스테리’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노처녀 히스테리는 사실 히포크라테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여성의 자궁이 일정한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고 건조해질 경우 히스테리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남성과 성관계를 맺지 못하므로 자궁이 건조해져서 히스테리가 생긴다고 생각한 것이다.

 

 

1, 2 사진작가 신디 셔먼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과 실상의 괴리를 보여주는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자신을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상상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추악한 모습이 있다.

 

 

히스테리 연구에서 정신분석학 탄생

 

프로이트가 한때 파리에 체류하면서 배웠던 스승 샤르코(Jean Martin Charcot, 1825~93)는 최초로 히스테리를 육체적인 질병이 아닌 신경증으로 이해한 사람이다. 하지만 샤르코 역시 히스테리를 좌절된 무의식적 성적 욕망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샤르코는 히스테리를 여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보기에 히스테리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남성 역시 무의식적 욕망의 좌절과 그에 대한 금기를 통해 얼마든지 히스테리 환자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환경 때문에 여성은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 더 금기시되므로 여성에게 히스테리가 더 빈번히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안나 오의 사례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는 히스테리를 발생시키는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이 매우 부조리한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거꾸로 이를 대상화할 경우 그 증상이 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브로이어는 안나 오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갔는데, 그녀의 한 친척이 안나 오가 이상한 단어들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브로이어가 안나 오에게 그녀가 중얼거리던 단어를 들려주었더니 그녀가 그 단어에 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녀의 상태는 획기적으로 호전됐다.

 

안나 오가 반복적으로 중얼거린 단어들은 사실 정상인이 보기에는 매우 낯설고 이상하며 무의미한 미친 사람의 말로 들린다. 그런데 이 이상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는 소음이나 잡음이 아닌 그녀의 트라우마를 형성하고 있는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의 표출인 것이다. 그녀가 이 이상한 헛소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는 것은 자신의 숨겨진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경험을 밖으로 드러내고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히스테리 증세는 완화된다. 이는 마치 축음기에 녹음된 소음처럼 인간의 무의식에는 그러한 소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소음은 결코 소음이 아닌 무의식 속에 저장된 우리 내면에 있는 실상의 소리라는 사실이다. 히스테리의 발견은 곧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발견과 동일하며, 그러한 점에서 정신분석학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꿈은 현실세계의 또 다른 모습

 

정신분석학의 탄생은 무의식에 대한 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의식과 달리 우리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의식은 말 그대로 인간이 스스로 인지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무의식은 그러한 통제를 벗어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행동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종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무의식의 세계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곳을 탐사할 수 없는 심연의 세계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가 주목한 대표적인 무의식의 세계는 바로 꿈이다.

그는 꿈 연구를 집대성한 책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1990)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의 핵심은 꿈에 대한 해석이 과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꿈에 관한 기존의 학설을 매우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기존의 학설은 꿈을 수면이라는 생리학적 현상과 결합시켜 이해하든가 혹은 매우 초자연적인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꿈을 수면활동과 연관짓는다는 것은 이미 수면활동이라는 생리적 현상과 결합시켜서 꿈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꿈을 전적으로 심리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과는 대치된다.

 

여기에는 수면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꿈의 세계는 깨어있는 현실과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집약적인 표현은 부르다흐나 슈트렘펠 등이 표현한 “꿈꾸는 사람은 깨어있는 동안의 의식세계에 등을 돌린다”라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이 활동하지 않는 공상의 세계가 바로 꿈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같은 논리를 프로이트에 앞서 밝힌 사람은 인간의 기억을 축음기에 비유한 심리학자 조셉 델뵈프였다. 그는 인간의 뇌를 축음기에 비유했는데, 인간의 뇌는 마치 축음기가 주변의 소음을 모두 다 기록하는 것처럼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자료처럼 뇌 속에 저장되어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꺼낼 수 없을 따름이다. 그런데 델뵈프에 따르면, 이렇게 뇌 속에 저장되었지만 망각된 기억들이 가끔씩 꿈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1862년 어느 날 꾸었던 꿈의 사례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어느 날 그는 눈 덮인 자신의 집 뜰에서 반쯤 언 도마뱀 두 마리가 눈 속에 파묻힌 것을 보고 도마뱀의 몸을 녹여주고 양치류 잎을 먹이로 주는 꿈을 꾸었다. 그의 꿈속에서 그 식물의 이름은 ‘아스플레니움 루타뮤랄리스’라는 학명으로 등장했다.

 

그가 꿈을 깬 후에 그 식물의 이름이 기억났지만 그것은 결코 그가 이전에 알고 있던 이름이 아니었다. 델뵈프는 식물도감을 찾아본 순간 깜짝 놀랐는데, 다름아니라 그 식물명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16년 후에야 그는 이 꿈의 비밀을 알게 됐다. 델뵈프가 그 꿈을 꾸기 2년 전 한 식물 표본집에 자신이 아스플레니움이라는 글씨를 적어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도 잊고 있었던 기억이 꿈속에서 떠오른 것이다.

 

델뵈프는 이처럼 꿈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긴 했지만, 여전히 꿈이 어떻게 현실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왜 잊혀진 아스플레니움이 갑작스럽게 꿈속에서 떠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프로이트의 관심은 바로 꿈의 현상이 어떻게 현실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결론은 꿈이란 ‘현실의 좌절된 욕망의 성취’라는 사실이다. 가령 아침잠에 쫓기는 회사원이 세수를 하는 꿈을 꾼다면 이는 곧 이미 세수를 했을 경우 준비시간을 줄이고 잠을 더 잘 수 있다는 현실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반론도 가능하다. 가령 다음날 달리기 시합을 앞둔 학생이 발이 떨어지지 않는 꿈을 꾸는 것도 욕망의 성취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발이 떨어지지 않음으로써 달리기 시합에서 질 수 있는 불안한 결과를 미리 사전에 합리화하고자 하는 방어기제로 불 수 있다는 것이다.

 

 

한스 벨머의 구체 관절인형 작품. 구체관절인형은 우리와 너무나도 닮아있기에 끔찍하고도 충격적이다.

 

 

꿈속의 ‘압축’과 ‘전치’

 

물론 꿈이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의 성취라고 했을때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꿈이 앞에서든 예처럼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꿈은 매우 난해한 형태로 나타나서 거의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꿈속에서도 검열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란 주로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과 관련이 있다. 가령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시체 확인, 근친상간 등과 같은 행위는 우리의 의식이 행동뿐만아니라 상상하는 것조차 통제한다.

 

수면상태에서는 우리 의식의 통제와 검열이 현실보다 느슨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현실에서 억압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꿈속에서 전혀 검열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꿈속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교묘하게 위장하여 표출한다.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장치가 ‘압축’(Verdichtung)과 ‘전치’(Verschiebung)이다.

 

압축이란 욕망의 대상을 은폐시키기 위해 여러개의 유사한 것을 압축시켜서 변형하는 장치다. 가령 현실에서 금기시된 인물을 꿈에서 성적으로 욕망할 경우 그 인물을 명확하게 알아볼 수 없게 하기 위해 여러 인물과 뒤섞어 놓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압축 과정은 매우 교묘하고 복잡하게 발생하므로 꿈속의 표상이 정확하게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지 해석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한편 ‘전치’란 자리바꿈을 의미하는데, 욕망하는 대상의 노골적인 드러남을 피하는 장치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을 그 인물이 입고 있던 구두끈 색깔로 살짝 대체하여 표상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심지어 구두끈과 상관없이 구두끈 색깔로만 대체될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의 표상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꿈의 해석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프로이트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든 꿈의 표상은 현실에서 좌절된 무의식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꿈은 무의식의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의 세계는 우리의 의식이라는 가면이 벗겨진 보다 순수한 내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현실보다 무의식의 세계, 즉 초현실의 세계에 집착한 것은 무의식의 세계야말로 현실의 가식이 제거된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우리 모두는 나의 참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만 정작 그 모습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참모습이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진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의 작품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과 실상의 괴리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자신을 모델로 하여 찍은 ‘무제’(untitled)라는 제목의 일련의 작품들은 그녀를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나타낸다. 다소 극단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우리 모두가 현실 속에서 자신이고자 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상상하며, 이렇게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에 맞추어 욕망을 통제하며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디 셔먼은 이와는 다른 일련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모습과 대비되는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썩은 음식물이나 구토한 오물 등을 사진에 담기도 하며. 심지어 어딘지 모르게 괴기스러운 인형을 사진에 담기도 한다. 이 기괴한 인형은 인간과 매우 흡사하지만 쳐다보기 흉측할 정도로 섬뜩한 충격을 준다.

 

아마도 이 작품의 기원은 독일의 작가 한스 벨머(Hans Bellmer, 1902~75)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한스 벨머는 자신이 직접 인간처럼 사지를 꺾을 수 있는 구체관절인형을 제작하고 이를 사진에 담았다. 그의 작품은 매우 섹슈얼하긴 하지만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역겹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나의 참모습, 익숙하지만 낯선 존재

 

그의 작품이 에로틱하면서도 역겨울 정도로 충격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우리들 자신 속에 내재한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끔찍한 구체관절인형은 우리와 너무나도 닮아있기에 끔찍하고도 충격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와 전혀 무관하게 보이거나 실제로 무관하다면 우리가 이 작품을 보면서 어떠한 충격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매우 익숙하지만 왠지 모르게 낯선 것 같은 이 느낌,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자신 속에 감춰진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것을 ‘익숙하지만 낯선’(das Unheimliche, the uncanny)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독일어의 어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unheimlich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은밀한, 비밀의, 사적인, 친근한, 고향과 같은’ 등을 나타내는 heimlich라는 형용사에 반대접두사 un을 붙인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흥미로운 사실은 unheimlich는 반대 접두사 un이 붙었지만 그 의미를 궁극적으로 파고들면 heimlich의 반대가 아닌 동일한 의미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장 익숙하고 친밀한 것이 사실은 가장 낯선 것이라는 얘기다. 이 괴상한 변증법적 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의식의 통제와 검열을 받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우리들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 모습이 진짜 나에게 친밀한 나의 모습일까? 그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의 모습은 아닐까? 만약 현실에서 의식이 통제하고 있는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면 어느 다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나 혼자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있을 때의 모습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자아나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만약 그것이 나의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모습이라면 그 모습은 내 현실 속의 정돈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히 나의 모습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코 내 의식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이고도 이질적인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이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설고 기괴한 모습 속에 나의 참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는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 은밀한 곳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