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사이 번민 해결한 서구 최초 자서전
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⑩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종교는 효과적인 힐링(healing) 수단이다. 동시에 힐링이 필요하게 만드는 번뇌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의 경우에도 그랬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먹을 걱정은 없는 집이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공무원인 아버지는 쭉 안 믿다가 돌아갈 때 세례를 받았다. 나는 어렸을 때 나쁜 친구들을 사귀었다. 한 번은 친구들과 배를 서리했다. 중년이 넘은 지금도 그때 도둑질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다. 시골이지만 훌륭한 선생님들에게 초등·중등 교육을 받았다.
내 자랑을 좀 하자면 내게는 타고난 말솜씨·글솜씨가 있었다. 나는 국어 선생님이 됐다. 우리 마을에서도 가르치고 옆 마을에서도 가르쳤다. 학생들 실력이 신통치 않아 가르치는 재미가 없었다. 똑똑한 제자들을 찾아 배를 타고 멀리 서울까지 진출했다.
나는 16세부터 여색에 빠졌다. 17세 때 한 여인을 만나 동거하게 됐다. 바라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태어났다. 일단 세상에 나온 녀석을 나는 무척 사랑했다. 나를 닮아 똑똑했다. 그 여인과 13년을 같이 살았다. 정식 결혼은 못 했지만 나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런저런 여자들을 어떻게 ‘취(取)했는지’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다. 녀석들은 자랑할 게 떨어지면 무용담을 지어냈다. 나는 친구들과는 달랐지만 “순결과 금욕을 주소서. 지금은 말고요”라고 기도한 적도 있다.
아리 셰퍼(1795~1858)가 그린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어머니 성 모니카’(1846).
출세 꿈꾸다 회심 후 성직자의 길로
어머니는 내가 출세하기를 바랐고, 나 또한 출세에 관심이 있었다. 출세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웬만한 감투는 다 돈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종용으로 내게 아들을 낳아준 내연녀와 헤어졌다. 어머니는 정식 결혼을 하라며 혼처를 구해 왔다. 당장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 여성이라 약혼만 했다.
나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어떤 여자와 동거에 들어갔다. 몇 년 후 약혼녀와 결혼하고 장인이 준 돈으로 벼슬을 샀으면 나는 꽤 폼 나는 고급 공무원이 됐으리라. 그러나 하느님이 나를 위해 준비한 길은 그 길이 아니었다.
젊었을 때 나는 우리 마을에서 기독교보다 교세가 더 셌던 ‘사이비’ 종교를 믿었다. 점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내가 그 종교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은 29세 때 서울에서 만난 주교님이었다.
내가 그 사이비 종교를 믿게 된 이유는 예수의 족보 두 가지가 서로 상충되는 등 기독교 성경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아니라 문장 수준도 문제가 있었다.
『고백록』의 한글판(왼쪽)과 1645년 스페인어판 표지.
나처럼 ‘철학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기독교를 믿기 힘들다. 그러나 주교님은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었다. 32세 때 어느 날 정원에서 ‘책을 들고 읽어라’라는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성경책을 펴보니 로마서 13장 13~14절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나는 33세 때 드디어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나는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됐다. 나는 37세에 신부가 됐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나를 신부로 뽑은 것이다. 몇 년 후 42세 때는 주교가 됐다. 당시만 해도 나 같은 과거의 죄인이 신부가 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철학이 나를 하느님에게 인도했지만 내가 하느님과 만날 수 있게 한 것은 그 어떤 수준 높은 철학이나 학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내민 은총이었다.
13장으로 된 『고백록』(401년께)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어머니는 성녀 모니카, ‘아들’은 아데오다투스, 서울은 로마, ‘사이비’ 종교는 마니교, 주교님은 밀라노 주교 성 암브로시우스다.
397~398년 사이에 40대 초반 나이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집필한 『고백록』은 일반적으로 서구 세계 최초의 자서전으로 인정된다. 1~10장은 자신의 삶의 행적, 마지막 3장은 성경에 대한 것이다. 개인적인 내용이 과감하게 삭제돼 있기에 자서전이라고 보는 것은 난센스라는 주장도 있다.
『고백록』은 신(神)에게 바치는 긴 기도, 독백, 성찰, 성경을 비롯한 텍스트를 읽는 독법(讀法) 교과서로 평가되기도 한다. 과장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젊었을 때 성적인 방종에 빠졌으며 그노시스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불교가 혼합된 마니교를 9년간 믿은 그에게 『고백록』은 자신 신앙의 선명성을 입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고백록』은 신과 하나가 되고 신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을 달성한 한 인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회심하기 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마음의 평화를 막는 것은 종교와 철학, 종교와 이성 사이에 있는 거대한 강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놨다.
그리스·로마 철학을 기독교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집대성했다. 이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500만 단어 분량의 책·서한문·강론을 집필했다. 『신국론』(427)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1000년간 규정한 틀이 됐다.
신과 영혼 탐구 위해 거세까지 고려
북아프리카 로마의 속주 누미디아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난 그는 베르베르·로마·페니키아의 피가 흐르는 유색인종이었다. ‘마지막 고대인이자 최초의 중세인’ ‘중세 최고의 철학자·신학자’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의 아버지이자 개신교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확립했다. 종교개혁 기간에는 가톨릭·개신교 측이 모두 그를 인용하며 상대편이 이단이라고 공격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년께~1274)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서구에서 가장 유명한 어머니는 성 마리아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성 모니카다. 성 모니카는 ‘서구의 맹모(孟母)’였다. 맹모가 아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이사를 갔다면, 성 모니카는 아들의 회심을 위해 눈물로써 기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무엇에 대해 알려고 하는가.”
이렇게 답했다. “단 두 가지, 하느님과 영혼.”
그는 한때 거세를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로 신과 영혼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는 고리타분한 중세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남자와 여자는 마음과 영혼이 전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남긴 문헌 중에는 ‘이단적’인 내용도 있다.
그는 우주가 6일이 아니라 한꺼번에 창조됐다고 주장했다. 성경 구절을 글자 그대로만 읽을 게 아니라 과학이나 신이 인간에게 준 이성과 모순이 되면 은유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진보적’인 신학자이기도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을 통해 본 “시간론”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은 자서전이지만, 기독교를 표방하면서도 교묘히 말씀에서 벗어나는 마니교를 비롯한 여러 이단과의 투쟁서이며, 인간 사유의 내적인 질문의 답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하며 찾는 철학서이다. 한 개인의 경험적 삶을 통해 말씀 안에 있는 기독교의 교리를 온전히 세우고 인간의 철학적 질문을 밀도 있게 구성해내는『고백록』은 과히 두 세기를 지내 온 지금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기에 그의 자서전은 두세기동안 일반인들에게는 감동의 교양서적으로, 종교개혁론자들에게는 신학 지침서로 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사유의 발견으로 읽혀왔다.
신앙과 이성의 분리라는 “근대의 길”
우리나라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대부분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만남, 혹은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만남 정도로 그 의미를 부여하며 소개하는 데 그쳐왔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한 플라톤적 사유의 영향력은 13세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나 철학자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새롭게 연구되기 이전까지 서양 철학의 긴 역사속에서 지속하여 왔다. 또한, 아퀴나스와아우구스티누스의 대표적인 전공자 에티엔느 질송이 그의 저서『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교리에 맞는 한 어떠한 플라톤적 사유도 받아들이고 있다.” 라는 아퀴나스의 말을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아우구스티누스가 읽게 된 빅토리아뉴스의 라틴어 플라톤 저서들이 아우구스티누스를 회심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 플라톤적인 사유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임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게 하는 증거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럼에도 기독교를 떠나서 궁극적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인간의 이성적 한계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보에티우스와 같은 많은 신학자나 철학자들에게서 오히려 볼 수 있듯이 플라톤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와 철학을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시각 안에서 플라톤적인 철학적 사유의 한예를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이러한 신앙안에서의 이성의 추구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사유의 출발은 성 안셀무스에 의해 계승되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또 한번 시도 되었으며, 14세기 유명론을 주장하는 윌리엄 오캄에 의해 신앙과 이성의 분리라는 “근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다.
시간론과 창조론
『고백록』의 10-13장은 특별히 시간론과 창조론을 다루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그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학의 한 범주로서의 시간개념에 정면 대립하는 것이며, 플라톤주의적인 시간개념을 정립화하면서도 그 한계를 벗어나는 철학적 사유의 풍요를 경험하게 한다. 이러한 시간개념은 그 이후 철학적 지형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데카르트와 후설의 시간론에 그리고 베르그송의 시간론이나 현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시간론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하게 한다.
말하자면 “시간”이라는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운 그래서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많은 철학자들이 피해간 수수께끼와 같은 개념이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립되고 있었으며,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시간의 문제로 돌아가려고 할 때 결코 그의 논의의 결과를 사소히 지나 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의 사유를 지배하는 시간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시간개념 다시 말하자면 크로노스(Chronos)적인 역학적 시간 개념이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분은 60초인 시간, “영속적인 운동의 수”로서의 시간을 설명하는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코스모스가 영원하듯이 시간의 운동도 영원하다. 모든 것들은 이 운동에 의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드러나게 된다. 즉 미래로부터 현재, 과거로 진행된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지배적 논리에 단연코 반대의 깃발을 든다. 이 눈에 보이는 세계는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시간도 세계와 더불어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또한, 하나님은 시,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으로 그분에게 있는 것은 영원뿐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의 다른 설명인 현재뿐이라는 것이다. 시간은 세상의 창조와 더불어 빛과 함께 창조되었으며, 그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인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영혼에 의해 일어나고 파악된다.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의 영원 모방으로서의 시간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의『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제작, 창조의 신인 데미우르고는 선의 이데 아를 비롯한 모든 각각의 이데아로부터 그를 본뜬 감각적 사물계라는 현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 후에 시간이라는 이데아의 영속성을 모양하는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만들었다. 물론 이때 나오는 창조의 신은 기독교의 무에서의 창조가 아닌 혼돈 속에서 단지 질서 지우는 역할을 하는 신을 의미할 뿐이다. 데모크리토스의“만물의 생성은 원자들의 우연한 충돌로 이루어졌다.”라는 설명을 반박하기 위해 플라톤은 실제로 피타고라스적인 설명에 근거하여 행성의 궤도들의 엄격한 기하학적 간격과 규칙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결코 우연성에 의해 설명 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베르그송과 들뢰즈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으로 돌아가 오로지 영원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성을 사유해보자.
우리는 어떠한 “현재”라는 시간의 공간 즉 자리를 발견할 수 없다. 현재는 아마도 질 들뢰즈의 표현처럼“지나가기를 그치지 않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의 베르그송에 근거한 시간개념 속에서 이러한 “현재”는 순간이라는 결코 그 공간을 셀 수 없는 “찰나”에 의해서나 가능하므로 진정 존재 하는것은 “과거” 일뿐이다. 또한, 이러한 과거는 베르그송의 콘(corn)의 비유에서 처럼 전체를 상징하며 꼭짓점 부분에서 곧바로 현재는 과거와 함께하는 찰나만을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현재는 없고 과거는 현재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오는 것이며 현재가 “현 실태”라면 그와 공존하며 오히려 존재의 이름인 과거는 “잠재태”인 것이다. 이렇게 현재와 한쌍을 이루는 과거외에 우리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가진 “과거일반”은 존재 자체의 이름으로 언제나 선제하므로 “순수과거”로서 “지속”을 형성한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보편적 사유가 주장해오고 습관처럼 생각하듯이 현재만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모든 현재의 현재와 과거 현재, 미래의 현재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의 현재에서도 그 장소를 찾을 수가 없다. 이러한 세밀한 파악은 두 철학자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같은 관찰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베르그송과 들뢰즈는 과거만이 존재한다는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같은 예시로부터 기인하는 시간론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들뢰즈에게서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흥미롭고 이러한 이유의 근거가 그들의 철학적 사유의 선택에서 근거하는 것으로 결코 우연이 아님을 볼때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들뢰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서 파악되고 있는 신의 현재성에 동의와 감탄을 표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시간일뿐이다. 들뢰즈는 우리의 시간은 미래와 과거로 영원히 분리되는 아이온이라는 찰나의 사건으로서의 시간, 의미를 생성하는 생성으로서의 시간만이 있을뿐이며, 이러한 생성은 현실태를 구성하되 잠재태 자체인 “과거”만이 그 존재의 이름을 갖는다. 영겁 회귀로 돌아오는 비동일자의 돌아옴으로의 니체적인 시간만이 들뢰즈에게 중요한 무게를 지닐 뿐이다. 따라서 알랭 바디우의 지적대로 들뢰즈에게 있어서는 탈시간적 “시간”만이 존재의 이름을 갖는 영웅일 뿐이다.
철학뿐만 아니라 현대의 많은 예술과 문화, 사람들의 전체적 사유 흐름이 시간을 대상으로 그 영역을 펼치고 있다. 너무도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으로 가상 세계의 홍수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필자는 알랭 바디우의 시간에 대한 숙고의 저버림이 왠지 동의하기 어렵다. 이 미개척지처럼 보이는 영역은 레비나스에게도 들뢰즈에게도 또 다른 현대 철학자들에게도 결코 그냥 지나쳐갈 수 없는 거대한 미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문철학 >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의식에의 접근 - 칼 구스타프 융 (0) | 2019.09.24 |
---|---|
우파니샤드 (0) | 2019.09.20 |
대니얼 카너먼-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 (0) | 2019.09.20 |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0) | 2019.09.19 |
마음은 어디로부터 와, 어디로 가는가 (0) | 2019.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