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우파니샤드

rainbow3 2019. 9. 20. 20:39


우파니샤드 ➊ 3천년 전 개인의 ‘성찰’ 시대를 열다

 

 

오늘날 힌두교의 경전으로 통하는 우파니샤드는 먼저 청소년을 위해 이야기 중심으로 쓴 이재숙의 ‘우파니샤드(풀빛, 2005년)’를 읽고 이어 200개 우파니샤드 중 18개를 번역한 이재숙의 ‘우파니샤드1·2(한길사, 1996년)’를 본다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석지현의 ‘우파니샤드(일지사, 1997년)’는 요약본으로, 이명권이 우파니샤드를 연구해서 쓴 ‘우파니샤드(한길사, 2011년)’는 분석용으로 읽을 만하다.

 

 

 

 

현대인들은 과연 2000~3000년 전 인간보다 지혜로울까? 동서양에 걸친 인류의 고전들을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상념에 잠길 때가 있다.

 

칼 야스퍼스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 시기를 인류가 정신의 기원으로 삼을 수 있는 기축(基軸)이 되는 시대라며 ‘축의 시대(Axial Age)’라 이름 붙였다.

인도의 정신사를 지배하는 힌두교의 경전으로 불리는 우파니샤드는 바로 ‘축의 시대’에 만들어졌다. ‘주역’처럼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800년에 시작해 기원전 300년까지 500여년에 걸쳐 수많은 현자들의 공동 작품이었다. 우파니샤드는 그 어원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뜻인데 스승과 제자가 마주 앉아 ‘나는 누구인지,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와 아울러 인간과 우주의 근원에 대해 나눈 대화로 이뤄져 있다.

 

논어 등 고대 중국 경전은 대부분 현세적 삶에 적용되는 인간의 도리나 자기 수양과 처세, 치세 등이 주류를 이룬다. 즉 자기 수양과 덕의 실천을 통해 마침내는 현자나 대인, 군자나 성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와 달리 우파니샤드 등 인도의 고대 경전은 현세보다 선과 악의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죽음 이후’와 연결돼 있다. 살아가면서 쌓은 업(karma)에 따른 윤회(samsara)의 사슬을 끊고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를 의미하는 모크샤(moksa)에 이르는 지혜의 가르침이 우파니샤드 담론의 중심이다.

 

고대 인도 초기의 고전적 종교 경전으로 기원전 1500년에서 1000년 무렵에 형성된 ‘리그베다’를 비롯해 네 가지 베다가 있다. 리그베다는 신을 찬미하는 운문 형식의 찬가 모음집이고, 사마베다는 리그베다에서 발췌한 찬가에 운율을 붙여 만든 노래 모음집이다. 야주르베다는 제사의 예법과 제사 때 쓰이는 노래 모음집이고, 아타르바베다는 재앙을 막고 복을 얻기 위한 주문(mantra)이 담긴 주술서다.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이전 제의 중심의 베다에 나타난 사상을 인간 내면의 세계와 결부시킨 우파니샤드가 등장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계보를 이어받았지만 제사를 올리고 주문을 외우는 식의 제의적 전통을 거부하며 세상의 근원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을 발전시켰다.

500년 동안 무려 200개의 우파니샤드가 나왔다. 이 중에서 18개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와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가 핵심을 차지한다.

 

베다를 중심으로 한 고대 힌두교의 전통에서 우파니샤드의 등장은 일대 충격이었다. 그래서 베다를 구약성서에, 우파니샤드를 신약성서에 비유하기도 한다. 베다가 신화와 제의를 중심으로 주술의 세계관을 전개했다면, 우파니샤드는 신화와 제의의 겉치레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 내면의 각성과 탐구에 중점을 두는 세계관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파니샤드의 주제는 한마디로 ‘자아탐구’다. 우파니샤드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와 같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고민에서 나왔다. 삶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자아를 탐구하기 시작해 세상의 근원까지 파헤친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고통이며 그 고통을 끊기 위해서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우파니샤드는 경험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가정을 통해 그 해탈의 방정식을 제시한다.

즉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Brahman)’과 개인적 자아인 ‘아트만(Atman)’이 하나임을 알게 되면, 세상의 근원자를 이해하고 아울러 죽음을 넘어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 불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범(梵)은 브라흐만의 한역으로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이자 세상 만물을 주관하는 우주적 자아를 말한다.

‘아(我)’는 개체적 자아를 가리키는 ‘아트만’을 지칭한다.

범아일여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라는 말로 ‘진리와 나는 하나다’ 또는 ‘내가 곧 진리요, 진리가 곧 나’라는 뜻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조물주를 ‘쁘라자빠띠’라고 한다. 인간, 신, 아수라가 모두 조물주로부터 나온 자식들이다. 이 조물주를 만든 게 바로 ‘브라흐만(사제 계급을 뜻하는 ‘브라만’과 구별됨)’이다.

브라흐만은 인격 신이나 그 어떤 신도 아닐 뿐더러, 그 어떤 방법으로도 모습을 가질 수 없는 세상의 근원적인 존재다. 예컨대 인간이 호흡(푸루샤)을 함으로써 숨을 쉬고 생명을 유지하는데, 그 호흡을 처음으로 하게 해준 근원 존재라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인간이 도달할 최종 목적은 다음 세상에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업에 따른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인도인들이 피하고 싶어 한다는 윤회는 어떻게 이뤄질까. 까타 우파니샤드에는 이렇게 말한다.

 

“무지의 인간은 그 업(karma)보다 그 생각하는 바에 따라 또다시 그 자신이 모르는 육신을 입으러 세상으로 가리라.”

 

무지, 즉 해탈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마지막으로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축생이나 자연, 인간 등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간단명료한(?) 윤회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윤회에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욕망의 끈이 생겨나지 않는 순수한 행위, 업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업을 ‘니스까마 까르마(무욕의 업)’라고 한다.

브라흐만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이 모든 욕망이 부서질 때 삶과 죽음의 바퀴, 즉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이 쾌락을 주는 욕망을 버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해탈을 한 사람이 윤회에 다시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자기 의지로 태어난 영혼들을 ‘보디 사트바(Bodhi-Sattva)’라 부른다. 사족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탈해서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길을 택하기보다 보디 사트바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을까도 싶다.

 

우파니샤드는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삶을 무작정 버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을 하고 성적(性的)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살라고 한다. 다만 세상이 환영(maya)과 같이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알고 집착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이 부분이 어쩌면 불교적 세계관과 차이가 나는 부분일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또 우리 안에 있는 아트만을 찾아 살아서 백 년의 천수를 다하라고 권한다.

 

“인간이여! 항상 자신의 직무를 다하면서 마땅히 백 년을 살아갈 소망을 가져라. 인간으로서 그렇게 살고 싶으면 업보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도다.”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 말처럼 가슴을 적시는 표현이 더 있을까. 업보에 얽매이지 않고 백수를 누릴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라겠는가.

 

“이제 내 호흡은 저 불멸의 곳, 바람으로 되돌아가느니 이제 내 몸은 불 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되리니 오옴(옴), 내 마음이여 기억하라. 살아생전에 내가 했던 이 모든 일들을….”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임종의 기도’인데, 읽는 것만으로 삶을 겸허하게 해주는 것 같다.

 

 

  

 

 우파니샤드 ➋ 우파니샤드 인기 비결은 스토리텔링

 

 

 

 

우파니샤드가 수천 년에 걸쳐 인도인들에게 사랑을 받아올 수 있었던 비결은 우파니샤드가 담고 있는 수많은 비유가 담긴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오늘날 지식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이 기원전 8세기부터 500년 동안 고대 인도인들이 쓴 우파니샤드에 담겨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과 사유를 담은 우파니샤드는 근대의 이성적 사유체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사유를 요구한다. 이때 현자가 제자나 부인 또는 아들에게 이야기식으로 들려주는 우주의 근원에 대한 다양한 비유와 이야기는 독자가 우파니샤드의 세계 속으로 흥미롭게 들어갈 수 있게 이끌어준다.

 

스토리텔링의 힘은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 아루나 성자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 슈베따께뚜에게 들려주는 비유에서 그 진수를 접할 수 있다. 아루나 성자는 ‘한 톨의 씨앗’과 ‘소금물’ 비유로 아들에게 세상 근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슈베따께뚜는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스승 밑에서 공부하다 스물네 살이 돼 돌아온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반드시 스승 밑에서 ‘12년’ 동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루나 성자는 아들을 반겨 맞이하면서도 제대로 공부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낸다.

 

“지금 너는 자신감에 차 있고, 베다를 익힌 자로 당당해 보이는구나. 그래, 이런 가르침에 대해 스승께 여쭈어 보았느냐? 그것으로서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게 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는 바로 그것에 대해 말이다.”

 

이에 아들은 “존경하는 아버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라며 질문이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하는 것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베다의 몇 장 몇 절을 외워보라든가, 베다 중에서도 중요한 아그니 신 찬송을 암송해 보라든가 뭐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했다.

 

“그것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게 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는 그것에 대해 말이다. 슈베따께뚜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책을 읽고 암송한 지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깨달음을 얻었는지를 시험해보는 것이다. 외워서 하는 공부는 많이 했지만 이런 생각은 해보지 않은 슈베따께뚜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아들아, 한 줌의 흙덩어리를 알면 그 흙으로 만든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흙의 변형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그것을 소리로 부르기 위해 다른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오직 흙만이 바로 참존재인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듣기에 점점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이는 도자기든 물병이든 또는 재떨이든 모두 흙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참존재인 아트만에 대해 보리수 씨앗을 비유로 들며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보리수나무에서 열매 하나를 따와 그것을 쪼개어보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총명한 아들아, 네가 볼 수 없는 이 미세한 것, 그 미세함으로 이뤄진 이 큰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아라.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이 있음을 믿어라. 아주 미세한 존재인 그것을 세상 모든 것들은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바로 너다. 슈베따께뚜야.”

 

계절마다 꽃을 피우고 꽃이 지면 열매를 맺는 큰 나무의 경우 그 열매에 들어 있는 씨앗은 바로 그 큰 나무의 원래 모습이다. 그 열매에서 그 나무가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의 신비가 바로 세상에 나무가 끝없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나무처럼 사람 또한 맨 처음 ‘씨앗’은 하나의 미세한 정자의 씨와 난자의 결합인 것이다. 아루나 성자는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씨앗의 핵심과도 같이 아트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씨앗의 모든 가능성을 다 품은 어떤 존재라고 말한다.

 

“그를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 없으니 / 그로 말미암아 마음속 생각이 이뤄질 수 있으니 / 그대여, 바로 그가 브라흐만인 것을 알라 / 이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물건들 / 그것들은 브라흐만이 아니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이어 아루나 성자는 아들에게 소금을 물에 풀고 그 맛을 보라고 한다. 소금물은 겉으로는 물과 마찬가지인데 그 맛은 짜다. 맨 위 표면에 있는 물의 맛이나 중간, 맨 밑바닥에 있는 물의 맛도 짜다. 아버지는 이 짠맛을 통해 소금이 그 안에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듯 감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의 근원이 있다고 일러준다. 브라흐만이 세상의 참모습이고 근원이라는 것은 물에 녹은 소금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물에 소금덩어리를 풀어 놓았을 때 소금이 물속에 녹아드는 것과 같다. 이때 손으로는 물속에서 소금을 잡을 수 없지만 물의 어느 부분을 취해보든 그 맛이 소금 맛인 것이다. 그처럼 위대한 존재, 끝이 없고 경계가 없는 그 근원존재는 의식으로 세상 속에 녹아들어 있다.”

 

아루나 성자는 소금물 비유를 통해 일상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볼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일 뿐, 그것만 갖고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금물의 핵심이 소금이라면 사람의 핵심은 모습도, 소리도, 흔적도 없는 아트만”이라고 덧붙인다.

 

아트만에 대한 다른 비유로 문다까 우파니샤드에서는 ‘강과 바다’를 든다. 여러 개의 강은 다시 바다로 모여 하나가 된다. 바다에서 하나가 된 여러 강은 개별의식, 즉 ‘나는 이 강’ ‘나는 저 강’이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강들이 흘러 흘러 바다에 도달하면 / 강이라는 이름은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듯 /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은 / 이름과 형태의 구속에서 풀려난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 자신을 존재하게 한 근원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우파니샤드는 강조한다. 그게 더불어 사는 세상의 지혜라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각각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과 끝에 스승과 제자가 함께 낭독하는 ‘평화를 위한 낭독’이 있다. 브라흐만을 상징하는 ‘오움(om)’으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오움-평온 평온 평온’으로 마무리한다. 평온을 세 번 외치는 것은 마음의 평온, 세상의 평온, 그리고 정신적인 평온 등 이 세 가지 평온의 상태를 염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인들이 인도를 여행하는 것은 어쩌면 내면의 평온을 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법정스님이 쓴 ‘홀로 사는 즐거움’을 읽다 보면 인도의 혼잡한 기차 안에서 소녀들이 “우리는 부모와 선생님, 그리고 모든 어른을 존경하며 그분들의 평안과 번영이 곧 내 행복입니다”라는 말을 합창하고 암송하는 모습이 나온다. 어느 여행자에게서 들었다며 적어 놓았는데, 이게 바로 인도에 뿌리내린 우파니샤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됐다. 만일 모든 우파니샤드와 그 외의 다른 경전들이 갑자기 한 줌 재로 변하고 나서도 이샤 우파니샤드의 첫 구절만이라도 힌두교도의 기억에서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남겨진다면 힌두교는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간디의 말이다. 간디가 언급한 이샤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시작한다.

 

“변하는 것들의 세상에 모든 것은 신으로 덮여 있도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내버림의 지혜를 가져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

  

...

  

 

「우파니샤드Ⅰ」중에서 발췌한 글

- 이재숙, 도서출판 한길사, 2001.5.30 -

 

 

우파니샤드의 사상적 형성과 이론체계

 

1. 우파니샤드의 의의 (p.25∼p.26)

 

「우파니샤드의 주된 관심은 자기 자신과 세상과 우주의 원리 그리고 그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것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 혹은 '진리'이다.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의 핵심을 깨닫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를 인류사상사의 값진 유산으로 꼽는 이유는 우파니샤드가 이 인류 공통의 난제(難題)인 정신세계와 자아추구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깊숙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동서양을 통해 끊이지 않고 추구하여왔고, 지금도 물리학 등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조금씩 밝혀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풀리지 않은 미궁 속에 있다. 결국 인간의 모든 지식과 과학은 이러한 '0'(?unya)과 같은 추상적 사고에 접근하는 나름대로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나의 의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겨난 것인가? 그 이전에 생겨난 것인가? 내가 죽으면 나의 의식은 남을 것인가, 육신과 함께 사라질 것인가? 물질 이상의 것이 있는가? 생명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사람이 죽으면 무엇이 남는가?

 

우파니샤드는 이 모든 문제를 상징이라는 끈으로 엮어 '하나의 진리'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 진리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어서, 이 모든 문제를 한 점의 의혹도 남지 않게 풀어서 평온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들의 해답을 갈망한다는 것은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사이에 씌어진 주요 우파니샤드(pramukha upani?ad)는 당시 인도인들이 놀랄 만큼 정밀하게 인간과 자연과 우주에 관하여 분석하고 연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슈베따슈바따라 우파니샤드에는 실천적 방법으로서의 요가의 의미와 방법, 구체적인 명상의 과정과 그 과정중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요가와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맑게 하여 진리를 깨달은 그들이 주는 가르침은, 곧 우주 세계 속의 주인이 다름 아닌 '나' 자신(j?v?tman)이라는 것, 그 '나'의 가능성은 무한하게 크다는 것, 또한 스스로를 크게 혹은 작게 만드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 놀라운 정신적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대가 소화해내기 힘겨운 발견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초기 우파니샤드에 나타나는, 그들이 발견한 신비한 '나'의 초월적인 모습은 점차 신격화되어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힌두교 최대 경전으로 꼽히는 『바가바드 기따』는 우파니샤드 사상의 그러한 신격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이러한 신격화는 오래 전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자연신들의 개념을 통해 매우 경직되어 있던 유신론적 사고방식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현대의 우리 사회에서도 그러하듯,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경직된 사고는 결코 혁명적인 사상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그들은 '진리'를 신의 이름으로 왜곡하고 인격체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 쉽게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초기 우파니샤드 이후에는 종교적·종파적인 우파니샤드가 수없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3. 우피니샤드의 주요 개념 (p.34∼p.36)

 

「즉 아뜨만이란 '항시 일정하게 움직여 퍼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대공(大空)의 이름이 아뜨만이며, 사람의 육신을 채우고 있는 기(氣) 또는 숨(息)으로 지칭된다.

 

우주의 '나'를 브라흐만이라고 한다면 개체로서의 '나'는 아뜨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흐만과 아뜨만은 다르지 않으며 이 둘은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계속해서 "네가 바로 그이다"(따뜨 뜨왐아씨), "나는 브라흐만이다"(아함 브라흐머아스미)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이처럼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브라흐만은 보통 인간의 지혜 속에 있지 않고 그보다 훨씬 밖에, 어떠한 틀로써 잡을 수 없는 무한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는 묻는다. 아직 알지 못한 그 무엇을 이미 알고 있는 어휘로 표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우파니샤드는 답한다. 브라흐만은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뒤에 있는 것도 아니며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우파니샤드는 세상이 환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영원하지도 안정된 보금자리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언젠가는 사라질 이 헛된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은, 비록 이 세상이 절대 진리인 브라흐만에 비해 영원하지도 일정하지도 않으며 불안정하지만, 바로 이곳을 통해서만이 그 영원하고 변함 없는, 일체 자유롭고 평온한 브라흐만의 자리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1. 이샤 우파니샤드 (p.53∼p.66)

 

「'이샤 우파니샤드'의 이름은 본문의 첫 구절 '이샤바스야 이담 사르밤'(이 세상 모든 것은 신(神)으로 덮여 있도다)에서 딴 것이다.」

 

「이 우파니샤드는 모든 열여덟 개의 구절만으로 되어 있어, 분량은 적지만 내용면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전체 우파니샤드를 대표하는 것으로 꼽힌다. 그 내용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의무(業, karma), 현실과 이상의 균형감 그리고 아뜨만에 관한 것인데, 특히 아뜨만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핵심적이다. 그러므로 일단 이 우파니샤드를 이해하면 전체 우파니샤드의 반은 이해했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이다.」

 

「[2]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백 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

그대에게 이 길 말고

업보에 얽매이지 않을 다른 길이 없으리니.

 

역주

· 인간이여(nare) :

스스로 '바로 나'임을 내세우는 자만에 가득찬 인간이여.

 

· 의무를 다하며 백 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kurvanneva karm??i jij?vi?et ?atam sam??) :

'의무'는 베다의 제례행위 혹은 그것이 상징하는 베다에서 규정한 인간의 4대 이상으로부터 추정해볼 수 있다. 인도인들은 '인간의 도리'(다르마), '가치 있는 것의 추구'(아르타), '욕망의 추구'(까마), '해탈'(목샤), 이 네 가지를 한 평생을 사는 데 이상으로 삼았다. 이 네 가지 이상은 인생을 궁극적인 하나의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단계적인 과정이라 생각한 인도인들이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도리'란 제 분수의 처지를 알아 지켜야 할 의무이며, '가치 있는 것의 추구'란 재산이나 돈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의 추구이다. 인생의 단계에 따라 이것은 어떤 물질적인 부(富)나 명예 등이 될 수도 있고, 비물질적인 가치가 될 수도 있다.

 

비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궁극적으로 추구해 나갈 목표와 부합되는, 그래서 그에게 보람과 기쁨을 주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궁극적으로 추구해 나갈 목표와 부합되는, 그래서 그에게 보람과 기쁨을 주는 일을 하며 살아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욕망의 추구'란 그러한 의미있는 삶을 위해서는 세상에 사는 한, 욕심을 낼 필요가 있고 때에 따라서 물질적·성적(性的) 욕망까지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포함하는 말이다. 마지막 목표인 '해탈'은 이들 과정을 통해 고통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다.

 

·업보(業報, karma) :

선악의 차원이 아닌 모든 행위가 남기는 흔적, 미련이나 한(限)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 하지 못한 업보가 있는 한 개체아(個體我)는 계속해서 이 세상에 새로운 육신으로 와서 행위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개체아로 하여금 계속해서 윤회의 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소이다.

 

개체아가 현생을 살면서 전생에 그 스스로가 만든 업에 대한 업보를 치러 그것을 소멸하고, 후에 치러야 할 업보를 더 이상 만들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에게 주어지는 다르마를 성실하고 훌륭하게 수행하여 그 어떤 욕망의 끈에도 이끌리지 않는 순수하고 진실된 행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이 세상의 삶을 제대로 살지 않고 그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포기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 그리고 업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피할 수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살아나가는 과정에서도 업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 오래 살 욕심을 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만든 업보를 소멸시키기 위해) 자신만의 의무를 다하면서 살고, 더 이상의 욕망에 젖은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7]

아뜨만을 아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곧 아뜨만이다.

모두가 같은 아뜨만임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

 

역주

·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ko moha? ka? ?oka) :

욕심이나 슬픔도 나와 타인의 구별, 나에 대한 집착에서 말미암는다. 아뜨만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나면 아집에 의한 고뇌가 사라지고 따라서 욕심이나 슬픔도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8]

광휘로 빛나는 자

영혼의 몸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조금도 흠이 없는

감각을 느끼는 신경도

오점도

죄악도 가지지 않은 자

혁명의 눈을 가진 자

그리고 모든 것을 알며

사방 어디든 존재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 아뜨만은 사방 어디든 이미 가 있도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존재인 그는

창조주들을 위해 각각의 의무를 적절히 나누어 알려주었도다.

 

역주

· 아뜨만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이어서 브라흐만 혹은 아뜨만에 대해 설명해낸다는 것은 역시 역부족이지만 우리의 제한적인 사고 속에서나마 그 존재를 알게 하는 목적을 위해 우파니샤드의 이 구절은 그 '한정된 언어의 힘'을 빌리고 있다.

 

· 영혼의 몸(s?k?ama ?ar?ra) :

우파니샤드는 인간의 몸을 세 가지로 보았다. 물질의 몸(sth?la ?ar?ra), 영혼의 몸(s?k?ama ?ar?ra), 근원의 몸(k?ra?a ?ar?ra)이 그것이다. 물질의 몸은 피와 살로 된 몸으로 사람이 죽으면 이 몸의 피와 살, 그리고 이 몸에 달린 모든 감각기관들이 그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 영혼의 몸은 외피의 몸이 생을 살면서 지은 업을 가지고 윤회의 바퀴로 다시 들어간다.

그러니까 윤회의 쳇바퀴를 도는 것은 이 세 가지 몸 중에 영혼의 몸이다. 이 영혼의 몸이 다시 그 업에 따라 새로운 외피의 몸을 입고 세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근원의 몸은 윤회의 축으로, 바퀴가 아무리 돌아도 그 바퀴축의 위치나 모양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변화나 움직임이 없다. 매번 물질의 몸이 바뀌고, 영혼의 몸이 윤회의 바퀴 속에 돌고 돌아도 근원의 몸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그대로 바퀴를 구르게 하는 축과 같이 있을 뿐이다. 윤회의 목적인 해탈의 순간이 되면 영혼의 몸도 사라지고 오직 이 근원의 몸만 남는다. 이것이 바로 어떠한 형태나 특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뜨만인 것이다.

 

· 혁명의 눈을 가진자(kr?ntidar??) :

모든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자. 리그 베다에 이미 이 단어가 절대. 유일한 존재를 수식하는 단어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후대에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시인(詩人)을 일컫는 단어로 쓰였다.

 

· 스스로 존재하는 자(svayambhu) :

그 무엇으로부터도 태어나지 않았으며, 스스로 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자. 이렇게 스스로 생겨나기에 아뜨만의 다른 근원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 창조주들을 위해 각각의 의무를 적절히 나누어주었도다(vyadadh?c ch??vatibhya?s sam?bhya?) :

아뜨만은 세상을 한 번 창조하고 그냥 놔둔 것이 아니라 그 창조, 유지, 파괴가 반복될 수 있도록 그 작용의 의무를 '세월'(시간)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생겨나고, 유지되고, 사라지고, 또 생겨나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을 '창조주'라고 보았으므로 원문에 복수로 '창조주들'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적절히'라는 말은 어떠한 사물이라도 그 생성될 때가 있고 파괴될 때가 있는 것이어서 이러한 나름대로의 창조과정이 각각 어울리는 '시간'이 있으므로 그러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되도록 그렇게 역할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9]

무지(無智)를 숭배하는 자는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지혜만을 숭배하는 자는

그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어다.

 

역주

· 무지(avidy?) :

말 그대로 '지혜가 없음'(無智). 무명(無明)의 뜻인데 샹까라(?a?kara)는 이것을 '행위, 예배의식'(karma)으로 풀이한다. 진정한 지혜를 갖지 않고 무조건 의례로서 예배만 하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다름아닌 무지의 대상일 뿐이라고 우파니샤드는 말하고 있다.

 

· 어둠(tama?) :

무지가 부르는 것은 '어둠'이라 하였는데, 이는 예배를 하면서도 그 목적인 해탈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것이니, 악마들의 세계처럼 캄캄한 세계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우주관에는 땅에는 인간들이 살고, 공중(大空)과 그 위 하늘에 단계적으로 보다 신성한 신들이 살며, 캄캄한 지하에는 악마들이 산다는 내용이 있다.

 

· 지혜만을 숭배하는 자는 그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어다(tato bh?ya iva te tamo ya u vidhy?ya? rat??) :

행위, 예배의식을 무시하고 지혜만을 추구하는 사람의 지혜는 완전한 지혜가 될 수 없고 절름발이 지혜일 뿐이다. 이러한 사람의 지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만을 드러내게 하며, 예배의식에서 보여야 할 정성과 겸손함을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의 경우보다 훨씬 구제 불능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의 경우는 지혜를 깨달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지만, 이미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삐뚤어진 지혜를 빼면 아무것도 없으므로 삐뚤어진 지혜는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실천과 깨달음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이상이나 깨달음이라도 절름발이 구도가 될 뿐이다.」

 

 

「[11]

무지와 지혜를 같이 아는 자는

무지로써 죽음을 건너고

지혜로써 해탈을 얻으리로다.

 

역주

· 무지로써 죽음을 건너고(avidy?y? mrtyu? tirtv?) :

샹까라는 계속해서 무지(지혜가 없음)를 '행위, 예배의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무지 혹은 행위(karma)는 미혹(迷惑, m?y?)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탈을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 해탈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완전하며 모든 것인 브라흐만이 이 작은 육체 안에서 상대적인 열등감을 가진 인간이 되어 자신의 본 모습을 잊고 있는 것은 바로 무지 때문이라고 한다. 무지 없이는 아뜨만의 개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개인'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무지 없이는 우파니샤드가 제시하고 있는 구원으로 가는 방법인 개인의 무지타파가 있을 수 없고 또한 구원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지(행함) 속에 있고 그리고 해탈로 가는 길은 바로 무지(행함)을 통해야(깨야) 할 것이므로, 무지(행함)을 통해야만 죽음이라는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2]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자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만 빠져 있는 자는

그보다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역주

· 눈에 보이는 것(assambh?ti) :

직역은 '진정한 존재가 아닌 것'이며, 눈에 드러나 보이는 제례행위라든가 제물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무지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sambh?ti) : 앞에서 말한 지혜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14]

파멸하는 것과 파멸하지 않을 영원한 것

이 둘의 길을 함께 잘 병행할 때

그는 파멸하는 것으로써 죽음을 건너고

파멸하지 않을 영원한 것으로써 불멸을 얻으리라.

 

역주

· 파멸하는 것(vin??a) :

앞 구절에 '눈에 보이는 것'(asambh?ti) : 앞 구절처럼 '눈에 보이지 않은 영원한 것'을 같은 용어(sambh?ti)로 쓰고 있으나, 역자가 표현상 파멸하지 않을 영원한 것이라고 번역하였다.

 

· 지금까지 양쪽 중 어는 한 쪽에 기울게 되면 그것은 안 가느니 못한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참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절대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으로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3. 까타 우파니샤드 (p.105∼p.146)

 

「제1부 제2장

 

[1]

(죽음의 신이 말했다.)

"훌륭한 것과

쾌락을 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라.

 

이 두 가지는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일생 동안 거기에 묶이게 한단다.

이중에 훌륭한 것을 택하는 사람은

진정한 선(善)을 갖는 것이요

쾌락을 주는 것을 택하는 사람은

결국 그가 추구하던 것을 중도에 놓치게 된단다.

 

역주

· 훌륭한 것(?reyasa) :

마땅히 해야 할 것, 옳은 것.

 

· 쾌락을 주는 것(preyasa) :

감각적으로 기쁘고, 즐겁고, 혹은 편하게 하는 것.

 

· 묶이게 한단다(sin?tah) :

인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누어 그때마다 처해진 상황에 따라 성실히 의무를 다할 것을 가르쳐왔다. 즉 학생기(學生期, brahmacarya av?sth? ??rama)에는 금욕의 생활을 몸에 익히면서 배움에 힘쓰며 부모와 스승 등 윗사람을 공경하고, 가장기(家長期, grhy?vasth? ??rama)에는 결혼하여 가장이 되고, 가족들을 모든면에서 책임지고 옳은 길로 이끌며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책임을 다한다. 숲 속 수행기(山林 修行期, v?naprasth? av?sth? ??rama)에는 인적이 드문 숲으로 들어가 세상과 나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수도 생활을 하며, 마지막으로 초탈기(超脫期, sany?sa av?sth? ?srama)에는 홀로 물질적인 모든 굴레를 벗은 사람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과정 속에 인간은 누구나 '훌륭한 것'(?reyasa)과 마음을 즐겁게 하고 감각을 기쁘게 하는 '쾌락을 주는 것'(preyasa) 혹은 '편한 것' 이 두가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마음은 편하고 감각을 즐겁게 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지만 이성(理性)은 훌륭한 것,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역류를 시키고자 애쓸 것이다. 따라서 쉽게 흐르는 조류에 몸을 내맡긴 사람들은 목적한 바를 이룰 가망이 점점 없어질 것이요, 힘들더라도 옳은 바를 좇는 사람은 종국에 가서 진정한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훌륭한 것과

쾌락을 주는 것은

항상 인간에게 동시에 부딪혀오는 것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 두 가지를 알아보고 구별해내지만

보통 어리석은 사람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므로

쾌락을 주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7]

그 지혜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그런 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수없이 듣는다 해도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바로 그런 지혜를 설명해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놀라운 사람이다.

또한 훌륭한 스승에게서 전해 듣고

스스로 깨우친 인물들

그 얼마나 훌륭한가.

 

 

[8]

평범한 스승이 가르쳐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가 없다.

아뜨만이 그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는 그러한 스승이 가르쳐야만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생각해보는

그 존재에 대한 혼동이 일지 않는다.

 

역주

· 평범한 스승(nare??vare?a) :

논리로서는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으나 진정한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가르치는 스승을 말하는 것이다.

 

· 아뜨만이 그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는 스승(ananya) :

앞에 말한 평범한 스승과 다른 그 자신을 브라흐만(아뜨만)과 다르게 생각지 않는 스승. 그 자신이 브라흐만과 하나임을 깨달은 스승을 말한다.

 

·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생각해 보는(bahudh? cintyam?na?) :

아뜨만은 가장 작은 원자보다도 더욱 작고, 더욱 미세하며, 더욱 알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런 여러 가지 비유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뜨만의 '하나'로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여러 방법으로 아뜨만을 들으면 혼동이 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

제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도다.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구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찌게따 아그니를 통하여

영원함을 얻었도다.

 

역주

· 나는 나찌께따 아그니를 통하여 영원함을 얻었도다.(tato may?n?ciketa?cito' gniranityair draviyaih pr?ptv?nasmi nityam) :

나찌께따 祭火)로 제례를 치름으로써, 즉 모든 것을 버리고 태움으로써 죽음은 물질적인 세상에서 비물질적인 단계로 승화되었다.

 

제례 자체는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제례라도 나찌께다 아그니는 그 안에 비물질적인 목적을 담고 있으므로 이것을 상징으로 알고 행한다면 그 목적을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다리가 된다. '영원함'에 가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이 그 방법, 다리로서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이라는 것은 이 형이상학적인 목적 앞에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 그 다리가 물질적인 것인 이상 그 틀 속의 영원함이란 그 틀이 파괴되는 순간 영원함의 속성을 잃는다. 그럼에도 '제례'는 앞으로 진정한 영원함을 추구해 나가게 하는 다리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3부 제1장

 

[7]

감각들을 넘어서면 마음이 있고

마음을 넘어서면 진리가 있고

진리를 넘어서면 위대한 (개체) 아뜨만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면 그보다 훌륭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 미현인이 있다.」

 

 

「[8]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를 넘어서면 뿌루샤가 있는데

그는 하늘의 광활함과 같으며

그 안에 세상에 있는 어떠한 특성도 갖고 있지 않은 자로다.

그 뿌루샤를 알게 되면

그는 해탈하여 불멸을 얻으리라.

 

역주

· 뿌루샤 :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는 우리 육신 안에 들어와 육신을 채움으로써 인간과 관계된 존재로서 그 결정에 달한다. 이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궁극적으로 인식되는 것이고 모든 진리의 탐구는 이것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뿌루샤'는 몸 안에 들어옴으로써 '몸 안을 채운 신'이란 뜻이다.」

 

 

「[11]                                                               

이처럼 감각들이 고정되어

미동하지 않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하는 것을

'요가'라고 부른다.

구도자는 조금의 자만심도 갖지 않는 지경에 이를 수 있으니

요가로써 마음의 내달림과 평온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주

· 요가(yoga) :

명상 등의 방법을 통한 구도(求道).

 

· 자만심(pramatta) :

자만심은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애착을 말한다. 우파니샤드는 자만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지(無智) 때문이라고 하며, 명상 등의 방법으로 지혜를 얻게 되면 애착은 자연히 사라진다고 말한다.」

 

 

「[14]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들에서 완전히 풀려나면

그때 그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될 것이요

육신을 입은 채로 브라흐만을 구할 수 있게 되리라.

 

 

[15]

현세에서

마음속 모든 매듭이 풀리게 되면

그때 그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될 것이요

이것이 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로다.」

 

 

 

7.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361∼p.404)

 

「제6장 제5편

 

[1]

음식을 먹으면 그것은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가장 거친 부분은 배설물이 되고, 덜 거친 부분은 살이 되고, 가장 미세한 영양분은 마음이 된다.

 

 

[2]

물을 마시면 그것은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가장 거친 부분은 오줌이 되고, 덜 거친 부분은 피가 되고, 가장 미세한 영양분은 숨이 된다.

 

 

[3]

불을 먹으면 그것은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가장 거친 부분은 뼈가 되고, 덜 거친 부분은 뼛속의 골수가 되고, 가장 미세한 영양분은 목소리가 된다.」

 

 

제8편

 

[6]

총명한 아들아, 그 육신의 뿌리가 물 이외의 어떤 것이 될 수 있겠느냐. 마찬가지로 물은 불을 뿌리로 하고 있다. 불은 참 존재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 이 모든 생물들이 그 참 존재를 뿌리로 하고 있다. 참 존재는 그들이 머무는 거처요, 참 존재는 그들의 기반이다.

 

세 속성들이 어떻게 하여 세 속성을 가진 몸에 들어가고 또 다시 각기 세 속성을 가진 자가 되는지 이미 말하였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목소리는 마음에 가서 잠기고, 마음은 숨에 가서 잠기고, 숨은 불에, 불은 지고(至高)의 존재에 가서 잠기는 것이란다.

 

 

[7]

그 아주 미세한 존재, 그것을 세상 모든 것들은 아뜨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곧 진리이다. 그 존재가 곧 아뜨만이다. 그것은 바로 너이다.」

 

 

「제15편

 

[1]

총명한 아들아, 사람이 죽어갈 때 그 주위에 둘러앉은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 '나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나를 알아보시겠습니까' 하고 묻지 않느냐. 그 죽어가는 사람은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마음이 숨에, 숨이 열기에, 열기가 그 지고의 존재에 가 잠기기 전까지 사람들을 알아본단다.

 

 

[2]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마음이 숨에, 숨이 열기에, 열기가 그 지고의 존재에 가 잠기면 드디어 그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란다.

 

 

[3]

그 아주 미세한 존재 그것을 세상 모든 것들은 아뜨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곧 진리이다. 그 존재가 곧 아뜨만이다. 그것은 바로 너이다.」

 

 

「제7장 제1편

 

[3]

존경하는 분이시여,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은 겉으로만 아는 것일뿐 그것의 아뜨만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과 같은 분께서는 고통 자체를 이겨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바로 고통속에 있습니다. 존경하는 분이시여, 제가 고통을 넘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 모든 것, 그대의 모든 공부는 이름 공부였다.

 

 

[4]

왜냐하면 리그 베다. 야쥬르 베다. 사마 베다 그리고 아타르바 베다 이렇게 네 베다와 다섯번째 베다인 이띠하사와 뿌라나는 그것의 이름이요, 산스끄리트의 문법과 조상제례에 대한 지식, 수학, 자연 재해에 대한 지식, 광물학, 논리학, 윤리학, 어원학,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 근원요소에 대한 지식, 무예, 천문학, 뱀에 대한 지식, (음악, 무용, 조각, 그림 등) 예능까지 이 모든 것이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그 '이름'(n?ma)을 숭배하라.」

 

 

「제2편

 

[1]

"목소리(v?k)가 바로 이름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리그 베다, 야쥬르 베다, 사마 베다 그리고 아타르바 베다 이렇게 네 베다와 더섯번째 베다인 이띠하사와 뿌라나, 산스끄리트의 문법과 조상제례에 대한 지식, 수학, 자연재해에 대한 지식, 광물학, 논리학, 윤리학, 어원학,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 근원요소에 대한 지식, 무예, 천문학, 뱀에 대한 지식, (음악, 무용, 조각, 그림 등) 예능, 하늘과 땅, 공기, 대공, 물, 불, 신, 사람, 동물과 새, 풀과 나무, 벌레, 파리, 개미 등 모든 생물,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 기쁨과 기쁨이 아닌 것까지 이 모든 것을 알게 하는 것은 바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목소리를 숭배하라.」

 

「제3편

 

[1]

"마음(mana)이 진정 그 목소리보다 훌륭한 것이다. 주먹이 두 개의 과일을 한 손에 잡듯. 마음속에 이름과 목소리가 잡힌다. 마음이 만뜨라를 낭송해야겠다 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낭송할 것이요, 제례를 지내야겠다 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제례를 지낼 것이요, 자손과 가축을 소원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자손과 가축을 소원할 것이요,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소원해야겠다 하면 그렇게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진정 아뜨만이요, 마음이 진정 세상이요, 마음이 진정 브라흐만이다. 그 마음을 숭배하라.」

 

「제4편

 

[1]

"의지(意志, sa?kalpa)가 마음보다 훌륭한 것이다. '의지'로 인해 마음이 생각하며 그래야 사람이 말도 할 수 있다. 의지는 그의 뜻을 '이름'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다. 모든 만뜨라들은 '이름'에서 하나이며, 모든 제례는 만뜨라에서 하나이다.

 

 

[2]

그러므로 이름, 목소리, 마음 이 모두의 유일한 원천은 의진이다. 이들은 의지와 하나이며, 그 의지에 기반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스스로의 의지로 생겨났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그들의 의지로 생겨나자 공기와 대공도 스스로의 의지로 생겨났다. 그러자 그 대공(大空)에 비도 스스로의 의지로 내렸다. 이렇게 비의 의지에 의해 비가 내림에 따라, 음식도 스스로의 의지로 생겨났다. 또 음식이 생겨남에 따라 숨도 그 스스로의 의지로 생겨났다. 숨이 생겨남에 따라 만뜨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낭송되었다. 만뜨라가 낭송되자 제례도 스스로의 의지로 생겨났다. 그러자 제례의 결과도 스스로의 의지로 생겨났다. 이렇게 모든 것이 그 결과의 의지에 따라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이 의지로 인한 것이니 이 의지를 숭배하라.

 

 

[3] 이렇게 의지를 브라흐만으로 여기고 명상하는 자는 그가 진정 의지한 세계로 간다. 그는 그 스스로 영원한 자가 되어 그 영원한 세계로 간다. 또 그는 그 스스로 굳건히 선 자가 됨으로써 굳건한 세계로 간다. 그는 그 스스로 괴로움 없는 자가 되어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간다. 이렇게 의지를 브라흐만으로 명상하는 자는 그 의지가 다다르는 범위 안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룰 것이다."」

 

 

「제5편

 

[1]

"의식(意識, citta)이 진정 그 의지보다 훌륭한 것이다. 먼저 의식(意識)을 해야 그 다음 의지(意志)하고 그 다음 (마음으로) 생각해서 사람이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목소리를 이름에 붙여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모든 만뜨라는 이 이름에 와서 하나가 되고, 모든 제례는 만뜨라들에 와서 하나가 된다.

 

역주

· 목소리를 통해 밖으로 나온 것은 사물이나 현상의 이름이다. 그러한 이름들이 모여 이루어진 가장 성스러운 것이 만뜨라이다. 마찬가지로 제례는 많은 종류의 만뜨라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러한 만뜨라들이 모여 이룬 것이 제례이다.

 

 

[2]

이름, 목소리, 마음 등 이들은 의식(意識)을 그들의 유일한 궁극의 목적지로 삼는 것이며, 이들 모두는 바로 이 의식에서 비롯되고 바로 이 의식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의식을 쓸 줄 모르면 (다른 사람들이) '그가 진정 지식이 있거나 혹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처럼 의식이 없는 자일 수가 없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며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움이 적더라도 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늘 그의 말을 듣고자 열망한다. 이처럼 이름, 목소리, 마음 등 이들의 유일한 원천은 의식이며 의식이 이들의 근원이다. 의식이 아뜨만이다. 의식이 기반이다. 이 의식을 숭배하라.

 

 

[3]

이렇게 의식을 브라흐만으로 여기고 명상하는 자는 그가 진정 의식한 세계로 간다. 그는 그 스스로 영원한 자가 되어 그 영원한 세계로 간다. 또 그는 그 스스로 굳건히 선 자가 됨으로써 굳건한 세계로 간다. 그는 그 스스로 괴로움 없는 자가 되어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간다. 이렇게 의식을 브라흐만으로 삼아 명상하는 자는 그 의식이 다다르는 범위 안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게 된다."」

 

 

「제6편

 

[1]

"집중(集中, dhyãnam)이 그 의식보다 훌륭한 것이다. 아마도 땅도 집중하고 있는 듯, 대공도 집중하고 있는 듯, 천상도 집중하고 있는 듯, 물도 집중하고 있는 듯, 산도 집중하고 있는 듯, 신과 같은 인간들도 집중하고 있는 듯(모두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단계에 이르른 사람들도 바로 이 집중을 통해 나아간 결과로 그리 된 것이다. 그러므로 소인(小人)은 다른 사람과 늘 다투고 질투하고 살상하기를 좋아하나,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주는 대인(大人)은 (집중의 결과로) 훌륭한 품행을 갖추고 있다. 이 집중을 숭배하라.

 

 

[2]

이렇게 '집중'(集中)을 브라흐만으로 여기고 명상하는 자는 그가 진정 집중한 세계로 간다. 집중 자체를 브라흐만으로 여기고 명상하는 자는 그 집중이 다다르는 범위 안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리라."」

 

 

「제7편

 

[1]

"분별력(vijn?nam)이 진정 그 집중보다 훌륭한 것이다. 이 분별력을 통해 사람이 리그 베다. 야쥬르 베다. 사마 베다 그리고 아타르바 베다 이렇게 네 베다와 다섯 번째 베다인 이띠하사(역사적 설화)와 뿌라나(신화), 산스끄리트의 문법과 조상제례에 대한 지식, 수학, 자연재해에 대한 지식, 광물학, 논리학, 윤리학, 어원학,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 근원요소에 대한 지식, 무예, 천문학, 뱀에 대한 지식, (음악, 무용, 조각, 그림 등) 예능, 하늘과 땅, 공기, 대공, 물, 불, 신, 사람, 동물과 새, 풀과 나무, 벌레, 파리, 개미 등 모든 생물,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 기쁨과 기쁨이 아닌 것까지 아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게 하는 것은 바로 분별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분별력을 숭배하라.」

 

 

「제8편

 

[1]

"힘"(bala)이 진정 분별력보다 훌륭한 것이다.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백 명이라도 한 사람의 힘센 자 앞에 몸을 떤다. 사람이 힘이 있어야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승과 같은) 다른 사람들을 받들고, 스승 곁에 가까이 가 앉을 수 있다. 그렇게 가까이 앉아 그는 보고, 듣고, 생각하여, 깨달은 자, 진정 행하는 자, 분별력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바로 이 힘으로 땅이 서 있다. 바로 이 힘으로 대공이 서 있다. 바로 이 힘으로 천상이 서 있다. 바로 이 힘으로 산이 서 있다. 바로 이 힘으로 신과 간은 인간(성자)들이 서 있다. 바로 이 힘으로 새들도, 풀과 나무도, 맹수들도 그리고 저 벌레, 파리, 개미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 있다. 이 세상은 힘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 힘을 숭배하라.」

 

 

「제9편

 

[1]

"음식(annam)이 진정 그 힘보다 훌륭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열흘이 되도록 음식을 먹지 않으면 숨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생각할 수도, 의식을 가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느니, 다시 그가 음식을 먹어야만 회복하여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수행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음식을 숭배하라.」

 

 

「제10편

 

[1]

"물(apa)이 음식보다 훌륭한 것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는 모든 생물들이 '음식이 귀해지겠구나'하고 괴로워한다. 다시 비가 충분히 내리면 생물들은 '이제 음식이 충분해질 것이다'하고 즐거워한다.

 

물은 진정 형태를 가진 모든 것이다. 저 땅, 저 대공, 저 천상, 저 산, 저 신과 같은 사람 그리고 저 새, 풀, 나무, 짐승, 벌레, 파리, 개미, 이 모든 것의 형태를 이루는 것은 물이다. 그러므로 물을 숭배하라.」

 

 

「제11편

 

[1]

"열기(熱氣, tejas)가 진정 그 물보다도 훌륭한 것이다. 이 열기는 공기를 붙잡아 대공을 뜨겁게 달군다. 그러면 사람들은 '달구어지고 있다. 뜨거워졌다. 그러니 이제 비가 올 것이다'하고 말한다. 이처럼 먼저 그 스스로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물을 만드는 것은 바로 열기이다. 천둥이 울리는 소리로 그 열기는 번쩍이는 빛을 위로 쏘아 겪어지게 하며 돌아다닌다. 그럴 때 사람들은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고 있다. 그러니 분명히 비가 올 것이다.'하고 말한다. 먼저 그의 모습을 번개, 천둥으로 보여주고 그 다음 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열기이니 그 열기를 숭배하라.

 

 

[2]

누구든 이 열기를 브라흐만으로 숭배하는 자, 그는 그 스스로 영원한 자가 되어 그 영원한 세계로 간다. 또 그는 그 스스로 굳건히 선 자가 됨으로써 굳건한 세계로 간다. 그는 그 스스로 괴로움 없는 자가 되어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간다. 누구든 이 열기를 브라흐만으로 숭배하는 자는 그 열기가 다다르는 범위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제12편

 

[1]

"대공(大空, ?k??a)이 그 열기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해와 달, 번개, 별 그리고 불 이 모두가 그 대공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를 때도 대공을 통해 소리쳐 부르고 들을 때도 그 대공을 통해 전달된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이 대공 속에 즐겁게 놀기도, 놀지 않기도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이 대공 속에 태어나고 이 대공 속에서 성장한다. 이 대공을 숭배하라.

 

 

[2]

누구든 이 대공을 브라흐만으로 숭배하는 자, 그는 그 스스로 영원한 자가 되어 그 영원한 세계로 간다. 또 그는 그 스스로 굳건히 선 자가 됨으로써 굳건한 세계로 간다. 그는 그 스스로 괴로움 없는 자가 되어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간다. 누구든 이 대공을 브라흐만으로 숭배하는 자는 그 대공이 다다르는 범위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제13편

 

[1]

"기억력(smara)이 그 대공보다 훌륭한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못할 것이요, 생각해보지 못할 것이요, 알지 못할 것이다. 기억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듣고, 생각하고, 아는 것이다. 바로 이 기억을 통해 사람이 아들을 알아보고 짐승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 기억력을 숭배하라.」

 

 

「제14편

 

[1]

"희망(???)이 그 기억력보다 훌륭한 것이다. 희망으로 고무되어 기억력이 만뜨라를 낭송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례를 수행함으로써 아들을 기원하고 짐승을 기원하고 이 세상을 기원하고 저 세상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 희망을 숭배하라.

 

 

[2]

누구든 이 '희망'을 브라흐만으로 여기고 숭배하는 자, 그의 모든 소원은 반드시 성취되리라. 모든 소원이 성취되리라. 누구든 이 희망을 브라흐만으로 숭배하는 자는 그 희망이 다다르는 범위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제15편

 

[1]

"숨(pr??a?)이 그 '희망'보다 훌륭한 것이다. 수레바퀴에 바퀴살들이 바퀴의 중심에 모두 걸쳐 있듯,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은 그 숨에 의지해 있다. 숨이 그 숨에 의해 작용한다. 그 숨이 숨에게 숨을 나누어준다. 그러므로 숨은 진정 아버지요, 숨은 진정 어머니요, 숨은 진정 형제요, 숨은 자매요, 숨은 스승이요, 숨은 사제이다.」

 

「 역주

·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스승, 사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사실은 숨이다. 숨이 그 몸에서 나가고 나면 더 이상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스승, 사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숨이 진정 이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 이렇게 보고, 이렇게 마음에 새기고, 이렇게 알면 그는 목소리에 있어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너는 목소리가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넘었다'라고 말하면 '그렇다, 나는 한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니 숨길 필요가 없다.」

 

 

「제16편

 

[1]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목소리에 초월성을 얻은 자는 진정 말로서 말 이상의 것을 말하게 된다."

"존경하는 분이시여, 제가 그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말로서 말 이상의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제17편

 

[1]

"진리를 알고 나면 진리를 말하게 되어 있다. 알지 못하고는 절대로 진리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니 먼저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제18편

 

[1]

"마음속으로 성찰하면 알게 된다. 마음속으로 성찰하지 못하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안다'고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성찰해야만 가능한 것이니 먼저 '마음으로 성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19편

 

[1]

"스승에 대해 '경외와 믿음'을 둘 수 있어야 사람은 마음으로 성찰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외와 믿음없이 그러한 마음의 성찰을 할 수는 없다. 이처럼 경외와 믿음을 겨졌을 때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니 경외와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20편

 

[1]

"스승을 공경으로 받들게 되면 그는 경외와 믿음을 갖게 된다. 공경하지 않으면 경외와 믿음을 얻을 수 없다. 성의껏 다해 받듦으로써만이 경외와 믿음을 얻게 되니, 공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21편

 

[1]

"사람이 (절제와 집중을 염두에 두고) 기꺼이 행하다 보면 공경하게 되는 것이다. 기꺼이 행하지 않고 공경하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행함으로써 공경하게 되니, 기꺼이 행함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22편

 

[1]

"사람은 즐거움을 얻는 일을 기꺼이 행하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 없이 기꺼이 행하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처럼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기꺼이 행하는 것이니,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23편

 

[1]

"즐거움이란 무한함에 있는 것이다. 유한한 것에는 즐거움이 없다. 무한한 것만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무한함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24편

 

[1]

"무한함이란 누가 누구를 보지 않고, 누가 누구를 듣지 않고, 누가 누구를 알지도 않는 그런 곳에 있는 것이다. 유한함은 누가 누구를 보고, 듣고, 아는 그런 곳에 있는 것이다. 무한함은 불멸이며 유한함은 죽음이다."

 

"존경하는 분이여. 그것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 자신의 권능 속에 있다. 혹은 그것은 권능이 아닌지도 모르지.

 

역주

· 권능이 아닌지도 모르지(yadi v? na mahimniti) :

권능이라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

 

 

[2]

사람의 권능은 소, 말, 코끼리, 금, 노예, 부인, 밭 그리고 집 등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또 다른 것에 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5편

 

[1]

그의 무한함은 아래요, 위요, 뒤요, 앞이요, 남쪽이요, 북쪽이다. 그는 모든 것이다. 자각의식을 통해서 사람은 '나는 아랫니다. 나는 위이다. 나는 서쪽이다. 나는 동쪽이다. 나는 남쪽이다. 나는 북쪽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역주

· 자각의식(aha?k?ra) :

'나'라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헛된 자만심을 갖게도 하지만, 자각하는 자로 하여금 무한함의 존재를 자신과 하나로 인식하게 한다.

 

 

[2]

그 무한함은 아뜨만이다. 이 아뜨만이 아래, 위, 뒤, 앞, 서쪽, 동쪽, 남쪽, 북쪽, 아뜨만이 이 모든 것이다. 이 아뜨만이 보고, 마음으로 성찰하고, 진정 아는 자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아뜨만 안에서 유희를 누리고, 아뜨만 안에서 희열을 느끼고, 아뜨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아뜨만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아뜨만 안에서 스스로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모든 세상에서의 모든 움직임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통치자 아래로 간다. 결국 파멸로 이르는 세계로 가게 된다. 그들은 어떤 세상에서도 스스로의 뜻으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제26편

 

[2]

깨달은 자에게는 죽음도 질병도 슬픔조차도 없다.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

그는 하나가 된다.

그는 세 개가 되기고 하고

다섯이 되기도 하고

일곱이 되기도 하고

아홉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열하나가 되기도 하고

백열 개가 되기도 하고

혹은 천이십 개가 되기도 한다.

음식이 깨끗하고 성스러우면 소화기관이 깨끗해지고

소화기관이 깨끗하면 기억력이 좋게 되고

기억력이 좋게 되면 가슴속 모든 매듭이 풀어진다."」

 

 

「제8장 제1편

 

[5]

이 육신의 노쇠함에도 그 브라흐만은 노쇠하지 않는다. 육신이 무기에 상처를 입고 죽음을 당해도 그 브라흐만(의 자리)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이 브라흐만은 참이요, 이 안에 모든 욕망들이 담겨 있다. 이 아뜨만은 옳고 그름의 구별이 없고, 노쇠함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픔이 없고, 걱정이 없고, 갈증이 없으며, 참 욕망이요, 참 의지이다. 백성들이 그 왕의 명령을 받들 듯, 그는 그 안에 담긴 어떤 것을 원하든 그 어떤 자리 땅을 원하든, 그 원함대로 그것을 모두 취하게 된다.」

 

 

「제4편

 

[1]

그 아뜨만은 세상들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세상들을 잘 보존하게 하는 다리(교, setu)와 같다. 이 다리와 같은 아뜨만은 낮과 밤이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아뜨만은 나이도, 죽음도, 슬픔도, 선과 악도 다다르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은 아뜨만이 죄악이란 조금도 없는 브라흐만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

다리와 같은 이 아뜨만에 다다르면 장님은 눈을 뜨고, 상처입은 자는 상처가 나을 것이며, 환자는 병을 고친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어두운 밤도 낮이 된다. 이 브라흐만의 세계는 항상 빛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금욕의 실천으로, 경전과 스승의 말씀으로 브라흐만의 세계를 알게 된 사람은, 반드시 그 브라흐만의 세계를 가게 된다. 모든 세상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는 풍요로운 자가 될 것이다.」

 

 

「제6편

 

[2]

마치 하나의 큰 길이 두 개의 마을로 다다르는 길이 될 수 있듯, 태양의 광선은 두 개의 세계, 저 세계와 이 세계에 모두 다다른다. 광선들은 태양에서 뻗어나와 사람 몸의 신경으로 들어가고, 거기에서 온몸으로 퍼져서 저 태양으로 들어간다.

 

 

[3]

태양의 광선은 그 사람의 모든 감각들이 거두어지고 평화로우며 아무런 꿈조차 꾸지 않을 때, 그 몸의 신경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는 어떠한 악(惡)도 그에게 닿지 않으며 오로지 태양의 열기로 충만한 상태이다.

 

 

[4]

사람이 쇠약해져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묻는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는 태양의 광선이 그의 몸을 떠나기 전까지만 그들을 알아본다.

 

 

[5]

이제 태양의 광선이 그 몸을 떠날 때가 되면 그는 바로 이들 광선을 통해 위로 올라간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오움으로 명상하면서 위로 올라갈 것이나, 깨달음 없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할 것이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마음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때 걸리는 시간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에 태양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깨달은 영혼들에게 이것(태양)은 브라흐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린 문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닫힌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