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연개소문의 두 얼굴

rainbow3 2019. 10. 8. 12:32


[다시 쓰는 고대사]

후대에 영웅 대접 연개소문, 당대엔 잔인한 권력자

 

♣ 연개소문의 두 얼굴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국내성 서문. 장수왕이 수도를 옮길 때 연개소문에 이르러 고구려의 목숨이 끊어지게 될 것임을 짐작이라도 했을까. [사진 권태균]

 

668년 9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큰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군의 길잡이인 향도가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보장왕을 포로로 하는 공을 세웠다. 그 때문에 그해 12월 당 고종(高宗)이 보장왕 등에게 벼슬을 줄 때 남생은 향도(鄕導)한 공이 있다고 했다(『구당서』 199상, ‘고려’). 남생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정권쟁탈전에서 밀려 당나라에 몸을 의탁한 것이다.

 

『삼국사기』 49, 『개소문(蓋蘇文)』편엔 연개소문의 삶과 정치에 대한 평가가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개소문의 성은 연(燕)씨다. 그는 스스로 물에서 났다고 하여 뭇 사람들을 미혹시켰는데,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동부 대인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뒤를 이어야 했으나 국인(國人)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그를 미워하였기에 뒤를 잇지 못했다. 개소문이 머리를 굽혀 절하고 사과하면서 관직을 이어받기를 청하고 만약 잘못이 생기면 비록 폐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마침내 지위를 이어받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흉악하고 잔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들이 (영류)왕과 비밀히 의논하여 개소문을 죽이려 하였는데, 일이 누설되었다. 개소문은 그의 부(동부)의 군사를 다 모아 사열하는 것처럼 하고, 아울러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준비하여 여러 대신을 함께 와서 보도록 했다. 초대된 손님들이 이르자 이들을 모두 죽였으니, 무릇 100여 명이나 되었다. 곧 달려가 궁궐로 들어가서 왕을 죽여 몸을 잘라 몇 동강을 내어 구렁에 버렸다.

그는 왕의 아우의 아들 장(臧)을 세워 왕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 원근을 호령하여 국사(國事)를 전제(專制)했다. 그는 매우 위엄이 있었으며 몸에는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고 좌우의 사람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매양 말을 타고 내릴 때에는 항상 귀인과 무장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밟고 오르내렸다.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반드시 대오를 정렬시키게 하고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서 구덩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고 숨어야 했으니, 국인이 심히 괴롭게 여겼다.”

 

 

낙양 근교에 있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석 앞·뒷면.

 

 

당 태종, 영류왕 사망 소식에 조문 사절

 

후대에 연개소문은 영웅이다. 그러나 당대 인식은 달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류왕과 대인들이 연개소문이 흉악하고 잔인하여 죽이려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5부 중 4부의 지배세력을 모두 죽였다. 나라를 이끌 인재 풀을 괴멸시켰다. 거기에 더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하여 나라의 운명을 재촉했다.

 

주목할 사실이 있다. 당 태종이 이세적(고구려 침공 총사령관)에게 “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성주는 재주와 용기가 있어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켜 복종하지 않아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능히 함락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대로 성을 주었다고 하오”라 한 말이다(『삼국사기』 21, 보장왕 4년).

같은 이야기가 『당서』220, ‘고려전’에도 나온다.

 

당 태종의 말만으론 연개소문이 언제 안시성을 공격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642년 10월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쥔 뒤부터 645년 8월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일 것이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후 안시성을 제압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성주에게 성을 그대로 장악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다른 성들은 어땠을까? 고구려의 모든 성들이 안시성과 같이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에 맞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지방의 성들을 완전 장악하지 못한 것도 분명하다.

 

당 태종은 영류왕 사망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자를 통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644년 고구려에 신라와 잘 지낼 것을 권하고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 고구려를 칠 것”이라 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책을 폈다. 이에 당 태종이 신하들에게 “대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연개소문)는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라 했다(『구당서』 199, ‘고려’).

 

당 태종은 많은 준비를 하고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645년 4월 이적(이세적)의 군대가 요하(遼河)를 건너 개모성을 함락하고, 5월 16일 당 태종과 합세해 요동성을 함락하고 요주로 삼았다. 5월 28일 백암성을 공략해 6월 항복을 받았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 북부 욕살(褥薩, 지방장관)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고구려와 말갈병(靺鞨兵)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나섰다. 기록엔 ‘연개소문이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은 안시성을 구원해주러 군대를 보냈다’고 했지만 실제론 당 태종의 야욕을 물리치려고 군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들 구원병은 패했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 태종에게 항복했다. 당 태종은 욕살 이하 3500명을 가려 당나라 군직(軍職)을 주어 내지(內地, 당나라)로 옮겼고, 말갈인 3300명은 구덩이를 파서 묻고, 나머지는 평양으로 돌려보냈다(『구당서』 199, ‘고려’).

 

우리가 아는 개소문, 역사 기록과 달라

 

8월에 군영을 옮겨 안시성을 공격했는데, 성민이 당 태종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며 저항을 했다. 이를 보고 당 태종이 노여워하자 이적이 “성을 함락하는 날 남자는 다 죽여 버리십시오” 했다(『구당서』 199, ‘고려’). 성안 사람들이 이를 알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안시성 전투를 여기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당 태종은 군량이 동나고 사졸들이 추위와 동상에 시달리게 되자 철군을 명했다. 당나라 군대가 성을 지날 때 성안에서는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누인 채 성주가 성 위에 올라 손을 모아 절을 하며 하직을 했다.

 당 태종은 그들이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주고 임금을 섬기는 절개를 격려했다고 한다(『구당서』 199, ‘고려’). 무섭게 전투를 벌이던 안시성주와 당 태종이 서로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그때 안시성을 지킨 것은 보장왕이나 연개소문이 아니라, 안시성의 성주와 성민이었다.

 

연개소문이 전제하던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당나라에 강경 정책을 폈다. 649년 당 태종이 죽으며 고구려와의 전쟁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됐다. 연개소문의 고구려는 당나라와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다. 연개소문과 그 일족은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아갔다.

 

연개소문은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왕국 전체의 세력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국사를 전제하다가 666년 죽었다. 이후 668년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남건·남산 사이에 정권쟁탈전이 벌어졌다. 얼마나 숨가쁘게 망해가는지를 『삼국사기』 22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먼저 맏아들 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해 막리지가 됐다. 남생이 여러 성을 순시하러 나가자 두 동생이 왕명으로 불렀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안 남생은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자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국내성에 웅거하고 그 아들 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목숨을 구걸했다. 6월 남생은 당나라로 도망갔다. 8월 보장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 병마사를 맡도록 했다. 9월에 당 황제가 남생을 요동도독에 임명하고 평양도 안무대사를 겸하게 하고 현도군공을 봉했다. 12월에는 연정토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했다(『삼국사기』 6, 문무왕 6년). 667년 9월에 이적이 신성(新城)을 공격하자 성 사람들이 성주를 묶고 항복했다. 이적의 군대가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항복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고구려의 여러 성들이 당나라와 신라로 넘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668년 2월 이적·설인귀 등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빼앗았다. 그렇게 되자 부여천(夫餘川)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했다. 9월 21일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이적에 항복했다. 남건이 성문을 닫고 싸웠으나, 5일 만에 승려 신성(信誠)이 성문을 열어놓자 당군이 들어갔다. 남건은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고구려의 항복을 받은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덕남 및 대신 등 20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이로써 보장왕의 일족들과 연개소문의 아들들도 당나라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 『당서』 220, ‘고려전’에 “보장은 영순 초에 죽으니 위위경(衛尉卿, 임금을 호위하는 벼슬)을 추증하고, 힐리(頡利, 당에 포로가 된 동돌궐의 군장)의 묘 왼쪽에 장사 지내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고구려의) 옛 성(城)들은 왕왕 신라로 편입되었고,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달아났다. 이로써 고씨(高氏) 군장은 다 끊겼다”라 나온다.

역신(逆臣) 연개소문 일족이 고구려 왕실, 나아가 고구려인 자체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앞에서 그동안 은폐돼온 사료(史料)를 통해 연개소문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는 지난 100여 년 동안 만들어진 연개소문 상과는 다르다. 이제 642년에 만났던 두 사람, 즉 양신을 거느렸던 신라의 춘추(태종대왕)와 역신인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한국사에 남긴 역사의 발자취를 옳게 이야기할 때가 됐다.

신라의 춘추(태종대왕)가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연개소문과 그 일족이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아갔기에, 한국사의 무대가 패강(浿江, 청천강) 이남으로 위축됐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다시 쓰는 고대사]

국경 허문 신라, 피정복민 통합정책 대신 극심한 차별

 

♣ 통일신라의 논공행상

 

 

신라통일 후 백제·고구려인은 하층민이 됐다. 신라인은 각종 논공행상으로 부유층이 됐다. 성주사의 낭혜화상탑은 통일 후 김인문이 받은 봉토가 200년 동안 후손들에게 어떻게 세습됐는지를 알려준다. [사진 권태균]

 

 

신라의 삼한통합은 한국사의 진로를 신라 중심으로 이끌었다. 통일 신라에는 중요한 두 과제가 놓였다. 하나는 백제·고구려 피정복민을 신라인으로 편제하는 인사정책. 다른 하나는 삼한통합에 동원된 신라인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태종무열대왕 7년(660년) 11월 22일 통일신라의 논공행상이 있었다. 백제를 정벌하고 온 뒤였다. 백제인들이 재능에 따라 임용됐다. 좌평(佐平, 백제의 1등 관위)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達率, 백제의 2등 관위) 자간에겐 일길찬(신라의 7등 관위)을 주어 총관으로 삼았다. 충상과 상영은 660년 7월 9일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다(『삼국사기』 7, 태종무열대왕 7년).

그중 충상은 648년 백제로 가져갔던 품석과 고타소의 뼈와 백제 비장 여덟 명을 바꾸도록 의자왕에게 말한 사람이었다(『삼국사기』 41, 김유신 상). 상영은 660년 7월 신라와 당나라의 대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충신인 좌평 의직의 진언을 반대하였던 인물이다. 은솔 무수는 대나마(신라의 10등 관위)를 주어 대감으로 삼고 은솔 인수는 대나마를 주어 제감으로 삼았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고구려인도 관직을 받았다. 문무왕 때인 670년 8월 1일 연정토의 아들 안승은 고구려왕이 됐고 이어 674년 9월 보덕왕이 됐다. 680년 3월 문무왕은 안승에게 누이동생(혹은 김의관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신문왕 3년(683년) 10월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고 훌륭한 집과 좋은 땅을 주었다. 고구려인 중 안승은 특별히 진골 대우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안승과 충상·상여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신라 왕경인(신라의 서울인 지금의 경주 사람들. 당시에는 대경·왕경으로 부름)으로 편입된 고구려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안승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며 도태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백제 출신으로 관직을 받은 이들은 어떤 면에서 백제의 멸망을 도운 사람들이다.

실제로 피정복민으로서 왕경인이 되어 대우를 받은 이들은 신라를 위해 간첩활동을 하는 등의 공이 있었던 소수일 뿐이다.

 

 

삼국의 언어는 같았다. 그러나 사는 모습은 너무 달랐다. 공통성은 없었다. 다른 형식의 무덤이 그 한 예다. 왼쪽부터 신라의 대능원, 공주 무령왕릉 내부(백제), 지안 환도산성 아래 떼무덤(고구려).

 

 

같은 말 쓰는 동족이지만 신라인만 특권

 

고구려·백제·신라 사람들을 동족(同族) 또는 단일민족으로 보는 한국인들은 신라가 피정복국 사람을 잘 대우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삼국 관계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물길을 포함한 동이(東夷) 중 말갈(靺鞨)이라고 부르는 물길(勿吉)의 언어는 홀로 다르다”(『북사』 94, 물길)고 한 것을 보아 삼국인은 말이 통했던 하나의 종족(種族)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의 호칭, 정치조직, 신분제도 등 모든 면이 달랐다. 또 5~6세기께 축조된 고구려의 장군총, 백제의 무령왕릉, 신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은 구조가 달랐다. 사실 삼국은 초기국가 형성 때부터 독립국이었고 하나로 뭉친 적이 없어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면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삼한통합을 통해 비로소 신라 중심의 국가로 통합되었다.

 

정복자인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무섭게 차별화했다. 신라인은 우대해 정복자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했다.

 

먼저 백제인과 고구려인을 차등화해 신라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보자. 신라는 그들을 동등하게 대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세력들. 백제와 고구려의 왕과 그 일족 그리고 대신들은 신라인으로 삼을 수 없었다. 태종대왕이 보낸 5만 신라군과 당 고종이 보낸 13만 당군이 660년 7월 백제를 멸망시켰던 그해 9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 신하들 93명과 백성 1만2000명을 배에 태워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대왕 5년).

668년 이적이 거느린 당나라 군사와 신라군이 평양을 포위하자 고구려왕은 항복했다.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과 덕남 등 대신과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그 때문에 두 피정복국의 왕과 그 일족, 고위 신료들과 많은 백성은 당나라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 포로는? 668년 문무왕은 고구려인 포로 7000명을 왕경으로 끌고 왔고, 문무 신료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묘에서 제사를 지냈다(『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포로들의 운명에 대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구서당(九誓幢)은 실마리를 준다. 구서당의 아홉 군단 중 세 번째인 백금서당은 문무왕 12년(672) 백제민, 다섯째인 황금서당은 신문왕 3년(683) 고구려민, 여섯째인 흑금서당은 말갈국민(靺鞨國民), 일곱째인 벽금서당과 여덟째인 적금서당은 보덕성민, 아홉째인 청금서당은 백제 잔민(殘民)으로 당(幢, 부대)을 이룬 것으로 나온다(『삼국사기』 40, 무관). 문무왕의 7000포로는 지배세력들의 노비로 나눠주거나 후일 구서당과 같은 부대의 병사로 편입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안승은 진골, 충상과 상영은 골품제의 6두품 대우를 받았지만 구서당에 편입된 피정복민들은 평인(백성)이거나 하급 두품 신분을 가진 정도였다.

 

정복된 백제·고구려 옛땅에 사는 피정복민은 말하자면 면장 정도로 대우했다. 정복된 땅을 지방행정조직으로 새로 편제해 주군현(州郡縣)의 지방관인 총관(도독)·태수·현령에는 기본적으로 신라인을 임명했다. 그리고 그 밑 행정촌(현재의 ‘면’에 해당, 장은 5두품 대우를 받던 진촌주)과 자연촌(현재의 ‘이’에 해당, 장은 4두품 대우를 받던 차촌주)에는 피정복민을 촌주로 임명했다. 면장쯤으로 임명한 피정복민을 통해 통치 효율을 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말도 같아 신라인들은 통치하기도 쉽고 더 강력하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고구려인들은 과거의 영광도 잃고 사회·정치적으로 도태돼 갔다.

 

반면 삼한통합 전쟁에 공을 세운 신라인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 걸쳐 광범위하게 논공행상을 했다. 원조 신라인들의 지위는 한층 높아졌다.

 

고구려·백제인은 하층 신분에 편제

 

668년 9월 21일 고구려를 평정한 뒤 10월 22일 김유신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내렸고 김인문에게 대각간(大角干)의 관위를 내렸고, 그 밖의 이찬으로서 장군이 된 사람들에게는 각간(角干)을 주고, 소판 이하는 모두 관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8년). 김유신에겐 660년 백제 평정 뒤 대각간을 내렸었다(『삼국사기』 38, 잡지 7).

 

관위(官位)에 따라 토지도 줬다. 669년에 문무왕은 전국의 마거(馬阹) 174곳을 아홉 구분해 나눠 주었는데 내성(內省, 왕궁의 일을 담당)에 22곳, 관부(왕정을 담당하던 관청)에 10곳, 태대각간 유신에게 6곳, 대각간 인문에게 5곳, 각간 7인에게 각 3곳, 이찬 5인에게 각 2곳, 소판 4인에게 각 2곳, 파진찬 6인과 대아찬 12인에게 각 1곳을 주고 이하 74곳은 편의에 따라 나누어주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9년). 이런 토지는 세습됐다.

 

성주사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에서 그런 사정을 알 수 있다. 태종무열대왕은 낭혜화상 무염(無染·800~888)의 8대조다. 낭혜화상은 845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성주사에 머물렀는데, 성주사는 김흔(金昕)의 조상인 임해공(김인문)의 수봉지소(受封之所, 봉토로 받은 곳)에 세워진 절이다.

탑비의 기록을 보면 삼한통합의 공으로 김인문 등이 받았던 토지가 거의 200년간 여러 대에 걸쳐 그의 후손에게 세습된 것을 볼 수 있다. 삼한통합에서 공을 세운 신라인의 후손이 번성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668년 9월 고구려를 정복했을 때 신라의 병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벌을 시작한 지 9년이 지나 인력이 모두 다하였는데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여 여러 대의 오랜 바람을 오늘에야 이루게 되었다. 반드시 나라에서는 충성을 다한 인정을 받아야 하고, 우리 군사들은 힘을 바친 상(賞)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라 했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조). 참전병사에겐 고구려 평정 후 관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8년). 관위가 오르면 보수가 늘어났고 신라인들의 생활은 한층 여유가 생겼다.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도 논공행상이 이뤄졌다. 669년 2월 21일 내린 교(敎)에 “지금 두 적(백제·고구려)이 이미 평정되었고, 사방이 안정되어 태평하다.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다 같이 이미 상을 주었고, 전쟁에서 죽어 혼령이 된 이에게는 명복을 빌 비용을 추증해 주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 7, 문무왕 9년).

 

신라인들은 옛 백제인과 고구려인에게 빚이 없었다.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차별화하고 도태시키는 정책을 율령으로 만들어 펼쳤다. 당시 이루어진 논공행상은 삼한통합을 이룬 신라인 그들의 잔치였다.

옛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은 그 잔치에 끼어들 틈이 없었고, 기본적으로 하층 신분으로 편제돼 한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