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ia)
'인식론'의 개념
반성적으로 문제의 근원을 밝혀 가는 작업인 철학의 한 분야로서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ia, epistemology, theory of knowledge, Erkenntnislehre)은 인식의 가능 원리를 탐구한다. 인식론 곧 '인식에 대한 이론'은 인식에 대한 반성의 결실인데, 인식에 대해서 반성한다 함은 인식을 인식이게끔 해 주는 토대, 그것도 참된 인식 즉 진리를 진리이도록 만들어 주는 의심할 여지없는 확실한 기초를 추궁하고, 어떤 인식이 참이기 위한 조건들을 성찰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식'이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말과 의미상의 차이는 없으며, 다만 '인식'이라는 명사는 '인식하다'는 동사를 동족어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지식'은 그렇지 못한 관계로 통상 '인식'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인식론' 또는 '인식이론'을 '지식론' 또는 '지식이론'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하다.
인식론의 형성
'인식론'이라는 말은 유럽 철학계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생긴 것으로 조사되어 있고,8) 한국철학계에서도 20세기 초 서양철학이 유입되면서 여타의 철학 용어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흔히 서양의 근대철학을 '인식론 중심의 철학'이라고 일컫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인식론의 탐구는 '인식론'이라는 용어가 생기기 훨씬 이전, 적어도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부터는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얼마나 많이 거짓된 것을 참인 것으로 인정해 왔으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세운 것이 얼마나 의심스러운 것인가를 이미 여러 해 전에 깨닫고, 따라서 내가 앎들에서 언제라도 확고부동한 지주점을 정립하고자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제까지 내가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고,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였다."(Descartes,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I, 1) - 데카르트가 그의 저술 『제1철학에 관한 성찰』(1641)에서 서술한 이 자각에서 우리는 인식론의 발단을 본다.
이 자각으로부터 성찰을 시작한 데카르트가 얻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점으로 비유되는, 모든 참된 인식을 위한 흔들리지 않는 최초의 토대는 다름 아닌 인식 작업을 수행하는 '나' 자신이다. 이 확실한 인식의 출발점을 발견했다고 자부한 데카르트 자신은 그러나 인식론을 본격적으로 전개시켰다기보다는 모든 인식이 기초할 만한 근거를 이용하여 고대이래 중세를 거치면서 여전히 '철학 즉 학문'의 중심 과제였던 형이상학적인 문제들, 예컨대 신의 존재 증명, 영혼의 불멸성과 자유 그리고 세계의 실재 구조를 밝히는 데로 다시금 되돌아갔다.
이 때문에 일부 철학사가들은 로크(J. Locke, 1632-1704)의 『인간지성론』(1690)에 와서 비로소 인식론의 제반 문제들이 기초부터 검토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아닌 게 아니라 로크는 이 저술에서 인간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참된 인식을 연구하면서 이 인식의 기원(起源), 인식의 대상(對象) 및 내용(內容), 참된 인식 곧 진리(眞理)의 의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인식의 한계(限界) 등을 차례대로 검토한다. 이 검토점들이 바로 오늘날까지의 인식론의 중심 주제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식론에서 문제가 되는 '인식'이란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도 인식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 참된 인식의 원본 내지 척도로 고려된 것은 신체 없는 인간에게나 가능한 순수 오성적 인식, 계시(啓示)나 신통력에 의한 직관적 인식 내지 신(神)적 인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근대 인식론에서 문제 거리가 되는 '인식'은 수학적 인식이라든지 자연과학적 인식처럼 인간에 의해서 수행된다고 간주될 수 있는 인식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이미 이런 모든 인식의 토대는 인간인 '나'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로크 역시 이 점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인식론적 작업이 착수되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론의 문제가 부상하게 된 사정을 우리는 로크가 『인간지성론』의 서두에 쓴 '독자에게 부치는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나는, 모든 지적 작업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능력을 심사하고 우리의 지성이 어떤 대상들을 다루기에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점을 나는 동료들에게 제안하였고, 그들은 기꺼이 동의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점이 바로 우리가 첫 번째로 연구해야 할 문제라는 데 합의를 보았다."(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ed. A. C. Fraser, N. Y. 1959, vol. 1, p.9)
현대의 거의 모든 인식론적 쟁점의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는 칸트(I. Kant, 1704-1804)의 『순수이성비판』(1781)도 이 로크적인 합의에 동참한 결과이다. 칸트 역시 참된 인식을 거론하기에 앞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805=B833)라는 물음이 물어지고 대답되어야 한다고 보고, 이 작업을 우선적으로 수행한다. 그의 '이성 비판'은 곧 인식하는 나 즉 이성 스스로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인식 대상, 인식 범위, 인식 한계를 규정함이다. 이런 문제 연관에서 오늘날 인식론은 '인식 비판'(Erkenntniskritik)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인식론의 쟁점들
물음을 그 뿌리까지 반성하여 묻는 학적 반성 작업인 철학의 한 영역으로서 인식론은 '인간에게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으면서, 인식 일반에 대해서 1) 인식의 기원, 2) 인식의 대상 및 내용, 3) 참된 인식[진리](→)의 의미, 4)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 등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철학적 노력의 이상은 언제나 진리 자체의 획득이지만, 현재까지의 철학적 작업의 결실은 제기된 철학적 물음에 대한 영구불변적인 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같은 답을 얻으려는 시도들이듯이, 인식론의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다. 동일한 문제에 관해서 대립하는 여러 '설'이 있고, 그 '설들'이 상대의 약점을 자신의 강점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서로 양보 없이 맞서고 있다는 것은, 그 문제가 아직도 미결인 채 탐구 중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것이다.
주제별로 대표적인 학설들을 살펴보자.
인식의 기원의 문제
인간의 무엇에 대한 인식의 단초는 바로 그 인식을 수행하는 인간 자신의 인식 능력이 구비하고 있는 선험적인 인식 원리라고 보는 이성론[理性論 또는 合理論, rationalism](→)과 인간에게서 모든 인식의 출발점은 감각경험이라고 보는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 또는 感覺主義 sensationalism](??), 그리고 논리학·수학과 같은 형식적 인식에서는 이성론에 동조하면서, 자연 대상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는 감각 재료가 선험적 인식 원리에 따라 규정됨으로써 인식이 생긴다고 보는 초월론[超越論 transcendentalism 또는 超越哲學 Transzendental-Philosophie, 批判哲學 Kritische Philosophie](→) 등이 서로 다른 이론을 세운다.
인식은 자기 인식이든 대상 인식이든, 일반적으로 '아직 모르는[未知의] 것에 관하여,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를, 바꿔 말해 그것의 본질[本質, essentia, Wassein, Sosein](→)과 존재방식[存在, existentia, Wiesein, Dasein](→)을 파악하는 의식의 표상작용'이다. 이 의식 내적인 표상작용의 중요 요소는 감각과 사고이고, 그리고 그것은 외적으로 언표(言表, apophansis)된다.
이성론자들은, 인식 형성의 기본 요소인 사고는 선험적(a priori)인, 그러니까 이성 자체에 내재하는(immanent) 원리에 따라 기능하고, 언표 역시 일정한 이성의 규칙을 따를 때만 인식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데, 바로 저 사고의 원리와 언표의 규칙은 표리 관계에 있다고 본다.
언표란 '무엇에 관하여 무엇을 말함(legein)'인 바, 말함에서 그것에 관해서 말해지는 그 무엇, 즉 말함에서 밑바탕에 놓여지는 것[基體, subjectum]이 주어(主語)이고, 그 말해진 것[내용]을 술어(述語)라 한다. 이 주어와 술어가 결합하여 말이 되게끔 해 주는 것이 논리[logos]이다. 이 논리의 최상의 규칙이 모순율(矛盾律, principium contradictionis)(→)이다. 주어와 술어는 서로 어긋나게 말해(contradicere)져서는 안 되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표상에도 이 표상과 어긋나는 표상은 덧붙여질 수 없다."
어떤 언표도 이 모순의 규칙을 어기고서는 참일 수 없다. 사람은 모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 즉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실제로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모순율은 사고와 언표, 그리고 인식이 참이기 위한 필요조건[conditio sine qua non]이자, 무엇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성론자들은 보통 이런 사고의 최고 원리로서 이 모순율과 "근거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Nihil est sine ratione)"는 근거율 (혹은 충분이유율, principium rationis sufficientis)(→)을 든다(Leibniz, Monadologie, §31-§36 참조).
이에 반해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마음은 감각경험 이전에는 한낱 "백지"(白紙, tabula rasa, white paper)라고 주장한다(Locke, Essay, Bk Ⅱ, chp. 1, sect. 2 참조). 로크에 따르면, 사람은 "이성과 인식의 재료들"은 모두 "경험으로부터" 얻는다(같은 책, Ⅱ, 1, 2 참조). 이때 경험이란, 기본적으로 감각경험을 뜻하며, 그래서 보통 경험주의 원칙은, "감각 중에 있지 않던 어떠한 것도 지성 중에 있지 않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fuerit in sensu)고 표현된다. 그러니까, 철저한 경험론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기능은 순전히 경험에 의존적이며, 일견 필연적인 사고의 법칙 같은 것도 습관적인 경험의 산물에 불과하다(Hume,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sect. V, part Ⅱ 참조).
칸트에 의해 대변되는, 이른바 비판철학의 초월론은 이성론과 경험론의 화해를 시도한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Kant, K.d.r.V., B1)고 통찰함으로써, 한편으로 경험론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이성론의 입장에 선다. 칸트는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와 마찬가지로, 감각경험에 있지 않던 어떠한 인식 내용도 지성[이성] 중에 있지 않음을 승인하지만, 그러나 "단, 지성 자체는 제외하고(excipe: nisi ipse intellectus)"(Leibniz,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II, 1, §2)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재료[내용, Materie]와 이 재료를 정리 정돈하는 형식[틀, Form]을 요소로 해서 이루어지거니와, 인식이 사고의 산물인 한에서 인식의 형식은 사고의 형식이며, 이 사고의 형식은 이미 지성에 "예비되어 있다."(Kant, K.d.r.V., A66=B91)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인식의 밑바탕에는 선험적인 사고의 형식이 놓여 있다. 자연적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 재료가 감각경험이기 때문에 경험적 인식이라고 불려지고, 예컨대 수학적 인식처럼, 그것의 재료가 결코 감각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순수한 것일 때, 이런 인식은 선험적 인식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경험적인 재료이든 선험적인 재료이든 인식의 재료가 주어지면, 이 재료들을 종합 정리하는 기능인 사고작용을 통해서 한 인식이 성립한다. 이 사고작용은 그런데 일정한 형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컨대, '∼은 ∼이다', '그러므로', '∼과 ∼은 (지금 거기에) 있다' 등등. 이러한 형식은 어떠한 감각기관을 통하여 수용된 것도 아닌데, 사고작용의 바탕에 있다. 그래서, 칸트는 그것들을 사고 기능인 지성이 스스로 산출해 낸 개념으로 보고 "순수 지성 개념"이라 부르며, 사고 작용의 틀이라는 점에서는 "범주"(範疇, catergoria)라고 칭한다.
이런 선험적 기능 개념 가운데 근간이 되는 것을 칸트는 4종 12개로 파악한다. ① 양(量)의 규정에 쓰이는 '하나'[단일성]·'여럿'[다수성]·'모두'[전체성], ② 질(質)의 규정에 쓰이는 '∼(이)다' 또는 '∼하다'[실질성]·'∼ 아니다' 또는 '∼ 않다'[부정성]·'∼은 아니다' 또는 '∼는 않다'[제한성], ③ 관계(關係)의 규정에 쓰이는 '∼은 ∼이다(하다)'[실체성과 속성]·'∼때문에 ∼이다(하다)'[인과성]·'서로 때문에 ∼이다(하다)'[상호성, 교환적 인과성], ④ 양태[存在機能]의 규정에 쓰이는 '있을 수 있다'[(존재) 가능성]·'실제로 있다'[현존성, 현실성]·'반드시 있다'[(존재) 필연성]가 바로 그것이다.
이 범주들에 의거해 주어지는 잡다한 자료를 통일하는 작용 곧 사고는 판단으로 표출되고, 그래서 판단 역시 4종 12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모든 판단은 ① 양의 면에서는 단칭판단·특칭판단·전칭판단으로, ② 질의 면에서는 긍정판단·부정판단·무한판단으로, ③ 관계의 면에서는 정언판단·가언판단·선언판단으로, ④ 양태의 면에서는 미정판단·확정판단·명증판단으로 나누어진다.
판단의 방식으로 인식이 이루어지고, 판단은 범주에서의 통일작용이므로, 순수 지성 개념인 범주가 인식을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 자신은 선험적인 표상이면서, 즉 경험에 앞서 있으면서도 경험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것을 칸트는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인식은 의식의 초월성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초월적인 의식 기능에는, 칸트의 파악에 따르면, 순수 지성 개념 외에도, 순수 감성의 형식인 공간·시간 표상이 있다.
공간·시간은 무엇인가?
공간·시간의 성격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는 크게 보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간·시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견해다. 모든 존재자들을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이를테면 '그릇'으로서 공간·시간을 이해하는 이런 생각을 우리는 뉴턴(I. Newton, 1643-1727)의 소위 절대공간-절대시간론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공간·시간이 절대적으로 즉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때 '존재하다'가 어떤 뜻인가이다. 만약 그것이 논리적으로 생각 가능하다는 뜻이라면, 논리적 사고 가능성은 곧 존재 가능성이라는 등식을 함축함으로써 존재론적 쟁점에 빠져든다. 논리적 사고 불가능성은 존재 불가능성을 함축하지만, 그러나, 논리적 가능성 즉 무모순성이 존재 가능성까지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공간·시간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감각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문제는, 어떤 감각기관을 통하여 공간·시간이 감각되는가이다. 공간·시간이 어떤 감각기관을 통해서도 감촉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둘째로, 공간·시간은 그 자체가 존재자는 아니고, 존재자의 성질 내지는 존재자들간의 질서 관계라는 견해가 있게 된다. 이 두 번째 견해는 다시금 존재자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더라도 존재자에 속하는 성질 내지는 질서 관계로 보는 편과, 존재자가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한에서, 그 존재자가 가지는 성질로 보는 편이 있다. 앞서의 생각은 예컨대 물질적 실체의 본성을 '연장성'으로 파악한 데카르트나 로크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만약 공간·시간이 이런 것이라면, 가령 공간 표상을 전제로 하는 기하학이 연장성을 가지는 사물들에 대한 감각경험을 토대로 한 학문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 이것이 문제점으로 등장한다. 뒤의 생각, 즉 공간·시간은 존재자가 감각 지각되는 한에서 존재자의 성질이라는 생각은 라이프니츠나 칸트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간에도 차이가 있어서, 라이프니츠에게서 공간·시간은 감각경험에 의한 표상이고, 그래서 예컨대 기하학이 경험학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칸트에게서는 공간·시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각을 통해 존재자를 수용하는 감성적 의식이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이지만, 이 관념의 질서에 따라서만 존재자가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즉 현상으로서의 존재자의 틀[형식]로 이해된다. 이때 기하학은 선험적인, 말하자면 관념적인, 그러니까 형식적인 인식 체계로 파악된다.
그래서, 칸트의 파악에 따르면, 선험적인 표상인 공간·시간의 질서 위에서 갖가지 감각재료들이 수용되고 이 수용된 감각질료들이 범주로 기능하는 순수 지성 개념에 따라 종합 통일됨으로써 우리에게 한 존재자가 무엇으로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무엇인 한 존재자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인식에서 그리고 그 인식에서 인식된 존재자는 인식하는 의식의 선험적 표상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월론에 따르면, 사고의 형식인 범주는 인식의 성립 조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인식에서 인식되는 대상의 성립 조건이기도 하다.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바로 그 인식에서 인식된 존재자의 가능 조건인 것이다.
이로써 칸트는, 진리를 "사물과 지성의 일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라 규정하고(Th. Aquinas, Quaestiones disp. - De veritate, qu. 1, art. 1 참조), 인간의 참된 사물 인식은 "인식자의 인식 대상에로의 동일화"(assimilatio cognoscentis ad rem cognitam)로 해석해 오던 전통을 벗어나, 참된 인식은 "존재자의 지성에의 합치"(convenientia entis ad intellectum)로 인하여 성립한다는 사상을 표명하여, 이른바 인식자-인식 대상 사이의 '코페르니크스적 전환'(Kant, K.d.r.V., BXVI 참조)을 수행한다. "창조될 사물의 神의 지성에의 합치"(adaequatio rei creandae ad intellectum divinum)를 전제로 "인식되는 사물의 형식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Th. Aquinas, Summa Theologiae, I, qu. 16, art. 2, 2)고 생각했던 전통 형이상학을,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의 사물 인식에 대해서도 적용함으로써, "사물과 지성의 일치"를 "[인간] 지성과 [인간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사물의 동일형식성(conformitas)"으로 해석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사물의 창조자"(Kant, 『전집』 XV, 조각글 254 참조)로 격상시켰다.
인식의 대상 및 내용의 문제
인식 작용의 상관자로서 인식 내용이 있고, 이것이 바로 인식 대상이라고 보는 관념론(觀念論, idealism)(→) 내지 현상론(現象論, phenomenalism)과 인식 작용이란 인식 대상을 수용하는 매개의 기능으로서 인식 대상은 인식 작용에 독립해서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론(實在論, realism)(→)의 대립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실재론의 형태에도 여럿이 있지만, 실재론의 주장은 근본적으로는 상식적 직관에서 출발한다. 외적 대상(external object)에 대한 인식은, 외적 대상이 우리 마음(mind)에 인상 내지 관념들(ideas)을 불러일으키고, 이 관념의 중개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외적으로 실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론에 의하면, '실재하는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 이전부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든 말든, 인식하는 우리에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식은 우리의 관념들과 사물들의 실재 사이에 합치가 있는 한에서만 실재적이다."(Locke, Essay, Ⅳ, 4, 3) 그리고 이 실재적 인식만이 참된 인식 곧 진리이다.
이런 실재론은, 인식은 실재하는 사물[대상] - 인식하는 주관[마음 또는 의식] 사이에서 성립하는데, 이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관념 내지는 표상임을 말함으로써, 인식 형성의 세 요소 이론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모사설(模寫說, copy theory, Abbildtheorie)과 표상설(representative theory)을 함축한다.
이에 대해서 관념론는, 실재론이 전혀 명증적이지 못한 가정 위에 서 있다고 논박한다. '인식하는 의식에 독립적인, 인식하는 자가 인식하거나 말거나 그 자체로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개념은 순전히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라도, '우리가 인식하는 한'에서만 무엇엔가에 대하여 권리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는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esse is percipi)"(Berkeley,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I, 3)고 확언한다.
관념론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인식은 그리고 모든 주의 주장은 명증적으로 확실한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통찰을 존중한다. '나는 존재하고, 나는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나에 의해 의식된 것[ego-cogito-cogitatum]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론자들은 인식의 두 요소, 곧 인식하는 자와 그에 의해서 인식된 것[내용]만을 말한다. 이른바 '실재하는 사물'이란, 우리 의식에 독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 의해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인식된 것', 그러니까 그렇게 인식하는 우리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는 칸트뿐만 아니라, 후설(E.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Phänomenologie)도 동조한다고 볼 수 있다.
참된 인식 곧 진리의 문제
인식이 무엇에 대한 인식이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데, 무모순성과 체계 내 일관성을 진리의 척도로 보는 정합설(整合說, coherence theory), '인식의 사실과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일치설[一致說, 合致說 또는 對應說, correspondence theory](→), 실생활에서의 유용성을 진리의 의미로 보는 실용설(實用說, pragmatism), 인식하는 자들 사이의 합의 내지는 일반적 의사 소통을 진리의 기준으로 보는 상호주관성이론(相互主觀性理論, Intersubjektivitättheorie) 내지는 합의설(合意說, Konsensustheorie) 등이 각기 특장을 가지고서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이 가운데서도 일치설은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사실' 내지 '실재'를 문제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의 진리론들은 사실상 이 일치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인해 대안적으로 고려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이 '실재와 합치'하고 '사실과 일치'할 때, 그것이 참임은 자명하고, 사실 이것은 진리의 정의(定義, defintio)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과의 일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사실[실재]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을 묻자마자 부상한다. 인식은 미지의 것을 지향하고 있고, 그 미지의 것은 인식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러니까, 인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 다름 아닌 '사실'이고 '실재'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식한 것[내용]이 바로 사실이고 실재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도대체 '인식과 실재의 합치' 여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그것이 만약, 어제 밤 어둠 속에서의 나의 인식과 오늘 낮 밝은 데서의 나의 인식, 한 사람의 인식과 여러 사람의 인식, 상식인의 인식과 과학자의 인식을 대조해 봄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라 한다면, 이 대조는 단지 인식과 인식을 비교해 본 것에 불과 하니, 그것으로써 '사실'과의 부합을 얘기할 수는 없게 된다.
우리는 분명 "참된 인식[진리]이란 실재와 합치하는 인식이다"는 진리의 정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참된 인식의 이상을 표명할 뿐, 현실적으로 진리의 척도로 기능하는 것은, 어떤 인식의 유용성, 또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설득력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나면, '사실' 또는 '실재'라는 말로써 상정했던 것, 곧 인식하는 자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이 그 내용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 인간의 지식의 역사는 어떤 지식의 유용성과 사람들에 대한 설득력이 변화함을 보여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에 의거하면 영구불변의 진리라는 개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진리론은 다른 인식론의 문제들, 특히 관념론/실재론과 얽혀 있고, 또한 진리 불변이론과 가변 이론은 인간 인식의 한계에 관한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인식(능력)의 한계 문제
인간의 인식 능력은 구조적으로 일정 불변하고 한계를 가지며 일정한 대상 영역을 넘어서면 아무런 의미 있는 인식도 갖지 못한다는 인식 형식의 한정이론(限定理論)과 인식 내용의 유한성이론[有限性理論 또는 不可知論, agnosticism]과 인간의 인식 능력이 현재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단계적으로 진보하기 때문에, 원리상 인식의 한계는 없다는 인식진화론(認識進化論, evolutionäre Erkenntnistheorie) 또는 변증법(Dialektik)적 이론(辨證法的 理論)의 대립이 있다.
대상에 대한 현재의 인간의 인식이 완벽하다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불가지론자는, 인간은 원리상 그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오로지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변증법론자들은, 우리의 인식은 많은 착오를 겪으면서 종국에는 진상(眞相)에 이를 것이라고 본다.
헤겔(G. W. F. Hegel, 1770-1831)에 의하면, 대상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주관이라고 하는 인식자에 의존하는 한, 그리고 이 인식자가 신과 같은 완전함을 가지고 있지 못한 한, 그 인식은 언제나 착오일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한 인식자인 인간의 대상 인식은 그래서 반복되는 착오의 길이기도 하고 "회의(懷疑)의 길"이고 "절망의 길"(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Gesammelte Werke[GW], Bd. 9, hrsg. v. W. Bonsiepen/ R. Heede, Hamburg 1980, S. 56)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착오와 회의와 절망의 길은 의식이 그에게 다가오는 존재자를 관통하는 즉 경험(經驗)하는 길이며, 그 길의 종착점은 착오를 범하면서도 자기 교정 능력이 있는 의식이 마침내 존재자와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이런 뜻에서 의식의 경험은 진리를 향상 "의식 자신의 도야(陶冶)의 역정(歷程)"이다.
인간의 인식의 수준이 이러한 만큼,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식의 원리에 대한 이론으로서 인식론도 논의의 도정에 있으며, 논제마다 서로 엇갈리는, 서로 얽혀 있는 숱한 학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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