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眞理. veritas)
진리에 대한 철학적 물음
사람의 의식 활동 방식을 지(知)·정(情)·의(意)로 구분해보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고 가치는 진(眞)·선(善)·미(美), 이렇게 셋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우리말 사용 예에서는 이 세 종류의 가치가 '참'의 가치로 통합되기도 한다. 우리는 "사각형은 네 변을 갖는다"는 명제는 '참이다'고 말하며, 목숨 걸고 불의와 싸우는 사람의 행실은 '참되다'고 일컫고, 예쁜 아가씨더러는 '참하다'고 말한다. 이런 한글말 용례는 우리 한국 사람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참'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이 보이며, 그런 한에서 '참임'·'참됨'·'참함' 사이에는 어떤 통일 원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또한 이 세 종류의 '참'이 구별되는 한에서 이 세 가지는 각기 다른 영역, 다른 문제 지평을 갖는 것으로도 보인다. 보통 말하는 '진리'는 이렇게 구별되는 '참임'의 가치에 상응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또한 '진리'라는 말 역시 매우 다양하게 사용한다. - "진리를 따라 살자!" "인생의 진리를 터득하도록 노력하라!" "인과응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사람이 더불어 사는 존재자라는 말은 진리이다." 등등. 게다가 어떤 이는 "진리[참임, 참인 것]는 전체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오로지 "주체만이 진리 중에 있다"고 맞선다. 수학자들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임은 진리다"라고 말하고, 과학자들은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며,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가 36만 Km임은 진리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기독교 『성서』에서도 진리에 관한 잦은 언급을 본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33), "나는 […] 진리다"(요한복음 14:6),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복음 18:37)고 말한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 이것은 진리임을 자칭하는 예수에게 빌라도가 답답해하면서 제기했던 물음일 뿐만 아니라 진리를 탐구한다고 자임하는 논리학자들을 자주 난처하게 만드는 물음이다. 이 답답함을 풀고, 난처해하는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이 물음의 함축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낱말 '진리'는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참인 것, 참 이치, 참 도리, 참 지혜, 언제 누구에게나 보편 타당한 지식, 실재에 관한 옳은 인식 등등을 뜻한다. 그러니까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참 이치란 무엇인가?', '참 도리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어떠어떠한 것이 진리다'고 말해질 때, 이에 대해서 제기되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이 반문은, '그 어떠어떠한 것'이 그 말처럼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기에 그러한 것을 진리라고 하는지를 추궁하는 것이다. 즉 이 물음은 어떤 것이 진리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의 진리 여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우선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반성적으로 묻는 철학적 물음이다. 어떤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는 일상 생활의 주 관심사 중의 하나요, 그 관심에는 과학적 탐구가 부응한다. 그래서 과학은 '진리의 학문'이라고 말해진다. 이에 반해서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는 어떤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검토하기 위해 미리 요구되는 진리의 의미 규정 내지는 진리의 기준을 모색하는 관심으로, 이 관심에 부응하는 것이 철학적 탐구로서의 인식론(→)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어떤 구체적인 진리를 발견해 내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의미의 학(學)' 즉 '진리의 근본학'이다.
진리의 물음에 있어서 철학적 관심은 진리라고 주장된 어떤 내용이 그 주장된 바대로 과연 진리인가를 판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판정을 할 수 있기 위한 전제 조건, 즉 어떤 것의 진리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보편적 조건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니까 철학적 탐구로서 인식론의 현안 문제는, '인과응보'가 과연 인생의 참 이치인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다'는 명제가 과연 참인가, '예수'가 과연 진리인가가 아니라, 도대체 '진리', '참임', '참 이치'라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그래서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은 그 안에 적어도 다음의 세 물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① 무엇이 진리일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② 진리의 기준 내지 근거는 무엇인가?
③ 어떤 의미에서 '진리'인가?
무엇이 진리일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서 드러날까?
우리가 진리를 묻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한에서, 그리고 이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진리는 말해지고 생각되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런 이해에서 말이나 생각[思考]이나 인식에서 진리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맞는 말, 올바른 사고, 참 인식에서 진리는 드러난다. 그런데 반성해 보면 말은 사고나 인식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사고나 인식 그리고 이것들의 언표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진리[참]인 것은 사고 인식 혹은 언표의 형식을 빌어서 드러난다.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치는 진짜 이치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老子, 『道德經』 一 참조] 따위의 말이 함축하는 바처럼 혹시 생각될 수도 없고 인식될 수도 없으며 말해질 수도 없는 진리 내지 진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런 것에 관해서는 우리로서는 알지도 못하고,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을 터이니까 논외로 하고,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우리 인간의 앎 중에서 드러나는 진리, 말로써 표현되는 인식이 담고 있는 진리의 의미와 기준 혹은 근거만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일단 진리의 의미를 이렇게 제한하고서, 우리는 모든 인식[思考]을 논리적 인식과 대상 인식, 곧 형식적 인식과 실질적 인식으로 구분하고, 그 각각에서 참인 인식 즉 진리와 얽혀 있는 문제들을 밝혀 보기로 하자.
형식적 인식과 진리
참된 사고를 위한 두 선험적 원리
옛날 "초 나라에 방패와 창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의 방패는 견고하여, 어떤 것도 이것을 뚫을 수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또 그의 창을 가리키면서 '나의 창은 예리하여, 무엇이건 뚫는다'고 자랑하며 말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대답할 수 없었다."(『韓非子』, 亂 一)
모순고사(矛盾故事)라고 불리어지는 이 이야기에서 그러면 그 초 나라의 무기 상인은 왜 대답을 할 수 없었겠는가? 그것은 '내 방패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다'는 언표와 '내 창은 무엇이건 다 뚫는다'는 언표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언표는 문자 그대로 모순의 관계에 있고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걸맞지 않는 말, 모순 관계에 있는 언표들 가운데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다. 자기 내에 모순을 갖는 말은 결코 어떠한 진상(眞相)도 드러낼 수가 없다.
언표에서 무엇인가 참다운 것이 드러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드러냄[表現]의 매체인 말이 우선 말이 되어야 한다. 말이 말이 되도록 하는 것, 말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논리(論理)다. 그래서 말이 안 되는 말은 비논리적인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은 생각의 표현 매체이므로 말을 말이 되도록 하는 논리는 다름 아니라 생각을 생각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생각 같지 않은 생각을 그래서 사람들은 비논리적 사고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이 "사각형은 둥글다"고 말하면, 이 말이 거짓임을 우리는 직각적으로 안다. 또한 모순고사에서의 초 나라 상인처럼 누군가가 "내 방패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 "내 창은 어떤 방패건 다 뚫을 수 있다"고 말하면, 이 두 언명이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는 것을, 즉 적어도 한쪽 말은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각적으로 안다. 여기서 '직각적으로 안다' 함은, 어떤 실험 확인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로 안다는 뜻이다. 그 '방패'를 향해 주위에 있는 모든 날카로운 사물을 던져 본다거나, 그 '창'을 가지고 주위에 있는 모든 방패들을 찔러 본 후 사실의 확인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가 "나는 어제 둥근 사각형을 보았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가 명백히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직각적으로 안다. 이 '직각적인 앎'은 이제까지 누구도 둥근 사각형을 본 적이 없다는 경험 사실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둥근 사각형'의 실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언표도 '모순의 규칙'[矛盾律, principium contradictionis]을 어기고서는 참일 수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모순적인 것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 즉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어떤 진리를 지시할 수도 없다.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실제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실제로도 있을 수 없다. 모순율은 생각과 말[언표]이 참이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며,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그래서 무모순성(無矛盾性)은 존재의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사각형은 둥글다"는 언표가 허위인 까닭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한 세상에 둥근 사각형이란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사각형'에는 그것의 본성에 모순되는 '둥글음'이라는 속성[술어]이 결코 속할 수 없다는 우리의 사고의 논리 규칙에 의거해서 그러하다. 세상에 둥근 사각형이 있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는 둥근 사각형을 결코 발견할 수 없는데, 이 필연적인 사실은,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우리의 경험이 그렇게 일러 주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사고 방식이 그것을 허용치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처럼 우리의 사고 방식에는 일정한 틀[형식, 규칙]이 있고, 이 틀 자신이 진리인 근거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즉 선험적으로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원리상 우리의 사고 작용에는 몇몇의 선험적인 따라서 자명한 - 이성 자신의 성격상 그렇다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근거도 제시될 수 없는 - 규칙이 있으며, 이 규칙에 맞게 생각하고 말할 때에만 거짓을 벗어나 진리를 개진할 수 있다는 철학적 통찰을 사람들은 이성론(理性論)(→) - 혹은 보다 널리 사용되고는 있지만 그다지 적절한 명칭은 아닌 합리론(合理論) - 이라고 부른다. 이성론자들은 이런 사고의 최고 원리로서 보통 모순율과 근거율(혹은, 충분이유율, principium rationis sufficientis)을 든다. 우리의 일체의 사고는 최소한 이 두 규칙에 맞아야만 허위를 면할 수 있고, 이 두 규칙에 맞지 않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다.
모순율과 모순의 소재
모순율은 이미 『한비자(韓非子)』에서도 논리적 언표의 원리로서 파악되었으며 또한 서양의 다수 철학자들도 이 규칙의 자명성을 일찍부터 납득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2/1)는 "어떤 것이 동시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Metaphtsica, 996b 28ff.), "어떤 것이 동일한 것에 동일한 관계에서 동시에 속하며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Metaphysica, 1005b 19ff.)고 지적함으로써, 논리 규칙으로서 또한 생각 가능한 존재자의 원리로서 모순율을 제시한다. 인식의 최고 원리로서의 모순율은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를 거쳐 칸트(I. Kant, 1724-1804)에 이르러 모든 형식적[분석적] 인식의 규준(規準)으로 규정된다.
말 가운데에서도 '무엇에 관해서 무엇을 말함'이 언표(言表)다. 말함에 있어서 그것에 관해서 말해지는 그 무엇, 즉 말함에서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基體]이 주어(主語)이고, 그 말해진 것[내용]을 술어(述語)라 한다. 그러니까 언표에서의 논리란 주어와 술어가 말이 되게 결합시켜 주는 원리이다. "사각형은 둥글다"는 발언이 말이 안 되는[非論理的인] 것은 그 주어와 술어가 서로 걸맞지 않게, 바꿔 표현하면, 어긋나게 말해[contradicere, widersprechen]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모순율은 "어떤 표상에도 이 표상과 어긋나는[모순되는] 표상은 덧붙여질 수 없다"고 정식화될 수 있다. 또한 존재자에 관한 언표에서 주어가 존재자를 지시한다면, 술어는 바로 그 존재자의 성질[속성]을 지시할 것이다. 그래서 모순율은 "어떤 것에도 그것과 모순되는 술어[속성]는 속하지 않는다"는 정식으로 표현된다.
'사각형은 둥글다' 혹은 '둥근 사각형' 등은 말이 안 되는 말, 비논리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순율을 지키지 않은, 다시 말하면 자기 내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말 가운데 모순이 있음을, 모순적인 언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경우 그 말은 말이 안 되는 말, 거짓된 말이 된다. 그러니까 어떤 말이 진리를 담기 위해서는 그 말 안에 자기 모순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둥근 사각형'은 어떤 실재를 지시할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하며, 누군가가 "나는 지금 나의 책상 위에서 둥근 사각형을 본다"고 말하면, 그 판단 내지 인식은 잘못된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명하다 함은, 우리가 그의 책상 위에 과연 둥근 사각형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할 필요 없이 즉 선험적으로 그의 인식의 허위성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기 내에 자기와 모순되는 속성을 갖는 존재자란 있을 수 없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이나 판단, 인식은 경우에 따라 자기 내 모순을 포함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우리는 그것을 잘못된 말, 잘못된 판단, 잘못된 인식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된'이라는 수식어가 부가될 수 있는 존재자란 아예 있을 수 없다. 즉 '둥근 사각형'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동근 사각형은 잘못된 사각형이 아니라, 사각형이 아닌 것이고, 아니 도대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그런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치는 앞서의 모순고사의 내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는 공존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을 실험적 확인을 통해서 비로소 아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안다. 누군가가 "내 오른손에는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이 있으며, 내 왼손에는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때 그의 두 말 사이에는 모순 관계가 성립하고 따라서 그 두 말은 동시에 참일 수는 없으며, 그렇기에 그의 말은 전체적으로 볼 때 거짓말이다. 이 예가 보여 주듯이, 말 속에는 모순이 있을 수도 있으나 ?? 형식상 거짓인 말 또는 말이 안 되는 말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그러나 그 모순된 말이 지시하는 존재자는 없다. 그러니까 자신 안에 모순을 포함한 존재자는 없다. 바꿔 말하면, 모순은 존재자 안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고나 언표가 참답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는 표상들이나 말들이 서로 알맞아야 하고, 여러 사고나 언표가 한 인식의 체계를 이룰 때는, 체계 내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언표나 사고들 간의 일관성과 그것들의 체계 내의 통일성을 사고나 언표의 정합성(整合性)이라고 부르고, 정합적인 사고나 언표 중에만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언표나 사고가 정합적이라 해서 반드시 진리가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비정합적인 언표나 사고 가운데에는 결코 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정합성은 사고나 인식이 진리이기 위한 소극적인 최소한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진리에 관한 이런 생각을 흔히들 '진리 정합설'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는, 거듭 말하거니와, 결코 함께 존재할 수가 없다.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이 존재한다면,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란 어디에도 없으며, 만약 그런 '방패'가 있다면, 그런 '창'이란 없다. 세상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내에 모순을 포함하는 사물은 없으며, 상호 모순 관계에 놓여 있는 두 사물은 함께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 사물이 존재할 수 없다 함은, 우리는 그런 사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함은 곧, 그 사물이 존재할 수 없음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논리적 사고 불가능성은 존재 불가능성을 함축하고 이런 소극적 의미에서 사고는 존재를 함의한다. 이성론자들이 "사고는 존재다"고 언명할 때, 적어도 소극적인 뜻에서는, 그것은 이의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비록 논리적으로 사고 가능함이 바로 존재 가능함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순율과 '변증법적 모순'
자기 안에 혹은 현존하는 다른 것과의 모순 관계를 갖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른바 '변증법적 사상가'들은 "모든 사물들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Hegel, Wissenschaft der Logik I: GW 11, S. 286)고 파악한다. 더 나아가서, 사물 내의 이 모순성이야말로 "사물의 진리[진상]이자 본질"이고, "모든 운동과 생명성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위 '변증법적 모순'이란 한 사물 내의 성질들 간의, 부분적 '모순', 즉 한 사물 내의 '특정한 내용의 부정'이지, 한 사물에 속하는 어떤 성질이 그 사물 자체와 모순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전체는 부분이다'는 명제는 모순율을 어기고 있는 명백히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다수인 하나다(혹은 하나인 다수다)'는 명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다수인 하나'라는 술어는 주어 '전체'와 모순 관계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수'와 '하나'라는 상반된 성질이 '전체'와 동일한 관점에서 관계 맺는다기보다는, 전체는 보기에 따라서는 '다수'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라고 이해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역사의 모든 알력들은 […] 생산능력들과 유통형식 사이의 모순에 그 근원을 갖는다"(Marx/Engels, Deutsche Ideologie, MEGA 3, S. 73)는 언명에서도 '생산 능력들'과 '유통형식' 사이의 소위 '모순'이란, '생산능력들'이 있는 곳엔 '유통형식'이 있을 수 없고 후자가 있는 곳엔 전자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적 모순이 아니다. 또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순관계에 있다. 그리고 노동자도 현존하고 자본가도 현존하니, 단지 잘못된 사고에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모순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 결코 논리적 모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변증법론자들이 말하는 모순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간의 모순이므로, 만약 노동자와 자본가가 어떤 의미에서건 모순 관계에 있다면, 이 노동자와 자본가는 무엇인가의 성질 내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름 아닌 인간사회의 부분[구성원]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위의 말은 "인간사회 안에는 서로 모순 대립하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있다"는 생각의 표현이고, 이때 '모순 대립하는'은 '이해가 상충하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이 생각은 결코 모순율을 위배하고 있지 않다. 설령 서로 아귀가 안 맞는 노동자 집단과 자본가 집단이 그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사회'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는 '무엇이든 다 뚫는 창'과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의 관계에서 이해되는 그런 '모순' 관계가 있다고 보아지지 않는다. 양자 사이가 만약 그런 관계라면, 일단 '노동자'가 있는 곳에는 '자본가'가 있을 리 없고, 자본가가 있는 곳에는 노동자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인간사회는 모순 대립하는 두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다"는 명제는 모순율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인간사회는 사람을 구성원으로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모순 규칙을 벗어난 것이고 무의미하고 거짓이다.
요컨대, 형식 논리상의 모순과 '변증법적 모순'은 동일한 의미의 모순이 아니고, 따라서 상호 배척적이거나 상호 보완적인 것이 아니며, '모순'이라는 한 낱말에서 서로 다른 사태가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말의 논리가 아니라, '사태 자체의 진행'의 논리로서 변증법을 주장하는 변증법론자들이 '변증법적 모순'과 형식 논리학의 모순을 엄밀히 구별하지 않고 그들의 진술을 전개하는 것은, "모순된 사태는 반드시 지양된다"는 모순의 필연적 폐기를 '논리적으로' -그래서 설득력 있게 -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형식 논리의 법칙에 준거하면 '모순된 사태'는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모순된 사태'가 있을 경우, 그 사태는 자기 내 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양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순된 사태'란 애당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모순된 사태'란 본래부터 없으니 지양되어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만약 변증법론자들의 생각처럼 '모순된 사태'가 있다면, 그때 '모순'은 형식 논리적 모순으로 이해될 수 없고, 그렇다면 이 사태가 '반드시[필연적으로] 지양된다'는 그 '필연성'의 논리적 근거는 없다. '필연성'이 형식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한은 그렇다.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대립'이나 '생산능력과 유통형식 사이의 모순', 즉 이해 상충 내지 갈등이 반드시 지양[해소]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상이나 당위(當爲)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논리적 필연성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사태에는 인간의 의식적 작업으로서의 실천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변증법론자들이 말하는 여러 "모순 대립"은 시간(역사)의 경과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특히 인간의 의지적 노력으로 해소되고, 절충되고, 때로는 그렇게 되고 있지 않다. 즉 하나의 '모순'된 사태가 여전히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그 '모순'이 논리적인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위적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이 그렇듯이 '변증법적 모순'과 논리적 모순은 말만 같지 서로 다른 사태이다.
근거율과 사고 규칙
어떠한 말이나 인식은 그것이 참이기 위해서 최소한 모순의 규칙은 준수해야 한다. 이 모순율은 이성의 사고 법칙이고, 따라서 모든 이성적[형식적] 인식은 경험에 문의함이 없이 모순율에 의거해서 진리일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정 받는다. 그러나 무모순성은 어떤 인식이 진리이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으로, 어느 인식이 모순을 범하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진리라고 곧바로 말해질 수는 없다. 즉 어떤 인식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무모순적일 뿐 아니라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의 규칙을 근거율 혹은 충분 이유율이라고 한다.
"근거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근거율도 그러나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모순율적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발생하면 필시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까닭 없이 무엇인가가 발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편린을 우리는 이미 불교 경전에서도 읽을 수 있고, 플라톤(Platon, BC 427-347)의 『대화편』 곳곳에서도 발견한다. -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곧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있고, 나아가서는 순전한 괴로움 덩어리가 생기며, 무명이 사라짐으로써 행이 멸하고 나아가서는 순전한 괴로움 덩어리가 멸한다."(「雜阿含經」, 卷十二, 緣起法經) "발생하는 모든 것이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Platon, Philebos, 26e) "발생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원인에 의거해서 발생한다."(Platon, Timaios, 28a) 왜 그런가?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인가? 우리가 보는 한에서, 즉 경험하는 한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의 원인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가 발생의 원인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원인을 미처 알고 있지 못한 발생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에 의거해서만 얘기한다면, "모든 발생하는 것은 원인을 갖는다"거나,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발생하는 것의 원인이 있음을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발생하는 것은 원인이 있었다는 통계적 귀납적 인식에 의한 것인가? 그러니까, 원인을 찾는 과학적 사고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탐구 결과가 보여 주듯이, 으레 발생에는 원인이 있었으니까 이번의 발생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제까지의 우리의 탐구 결과로 얻은, 발생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경험적 사실이 이제부터 탐구하려 하는 혹은 수천 년 동안 탐구해 왔지만 아직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한 발생에 대해서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의 바탕이 될 수 있는가? 인류에게 과학적 탐구가 시작된 이래 여전히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가운데, 예컨대 생명의 원인이 있다. 우리는 왜 생명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른바 경험론자들은, 이런 탐구의 경향은 경험의 축적 즉 관습에 의한 연상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흄(D. Hume, 1711-1776)은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존재의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도 논증적으로도 확실치 않다"(A Treatise of Human Nature, ed. Selby-Bigge, pp.78-9)고 주장한다. 이 말은, 생명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도 논증적으로도 확실치 않지만 우리는 오랜 경험의 습관이라는 "위대한 안내자"를 따라 이것을 탐구한다고 응용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원인이 반드시 있으며, 우리는 어떤 것의 원인을 '모른다' 해서 그것이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의 원인이 없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니 말이다. 데카르트(R. Desartes, 1596-1650)는 "무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는 것은 "자연의 빛"(Descartes, Meditationes, III, 14)이요,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무는 유의 충분한 이유[근거]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근거율의 타당성의 근거도, 모순율이 그러하듯이, 이성 자체에 있다. 근거율은 모순율과 마찬가지로 사고의 규칙인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충분한 근거의 규칙을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 없이는, 어떤 사실도 참이라고, 존재한다고, 그리고 어떤 진술도 옳다고 증명될 수 없다"(Leibniz, Monadologie, §32)고 일반화함으로써, 존재뿐만 아니라 인식과 진술이 참이기 위한 원리로 납득한다.
선험적 인식 원리의 문제
이성이 어떤 감각적 경험에도 의존함이 없이, 즉 선험적으로 갖는 자명한 원리들, 예컨대 모순율이나 근거율과 같은 것이 있으며, 여타의 많은 이성 인식들이 이로부터 연역될 뿐만 아니라, 어떤 경험적인 인식이나 존재의 발생도 이 규칙을 벗어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 이것이 이른바 이성론의 기본주장이다. 이에 반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성이니 지성이니 하는 기능들도 모두 인간의 유전적 소질이며, 이것은 인간의 축적된 감각경험에 그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본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감각에 있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이성[지성] 중에 있지 않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fuerit in sensu.) - 이것이 이른바 경험론의 기본 주장이다.
이런 상반된 주장에 대해서 제 삼의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이미 경험론자들이 지적했듯이 모순율이나 근거율이나 경험에 비추어 보는 한 그것의 필연적 타당성을 설명할 수가 없다. 경험은 우리에게 기껏해야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려 줄 뿐, "그 사실은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일러 줄 수는 없다. 제 아무리 동일한 사실에 대한 경험이 반복된다 해도 이 사실의 반복이 그 사실의 필연성을 말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순율을 어긴 말은 필연적으로 진리를 담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한다. 이때 '필연적'이라는 말은 이제까지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사실상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원리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하는 능력 즉 이성은 무엇이 원리적으로 필연적임을 사실 경험에 문의해 보지 않고서도 안다. 예컨대, 같은 것에서 같은 것을 제하면 반드시 남는 것이 없다[1-1=0]는 것을 우리는 어떤 사실적 경험에 앞서서 안다. 그런 한에서 이성은 선험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이 선험적 이성능력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것뿐이다. 수학적 인식의 체계는 어떤 사실의 관찰이나 실험에 의거함이 없이 이성능력만으로 구성되어 지지만, 그 인식들은 단지 형식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실질적인 인식들은 인간의 선험적 인식능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논리학이나 수학과 같은 형식적인 인식들은 인간의 선험적 이성능력만으로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형식적 인식들의 진리는, 그 인식이 순수한 사고의 형식으로서의 '지성(이성)의 보편적 법칙과 합치'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인식이 그 형식에 맞음을 넘어서서 어떤 실질적인 내용을 포함할 경우에는, 이 조건만의 충족으로는 여전히 그 인식이 진리인지 어떤지를 알 수 없다. 예컨대, 누군가가 "2에서 2를 빼면 1이다"고 말하면, 이 언표는 형식상 맞지 않고 따라서 거짓임이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누군가가 "지금 백 아무개의 집 정원에는 장미 두 그루가 있다"고 말하면, 이 언표 안에 형식상으로 잘못된 점이 없지만, 즉 이 언표 자체는 무모순적이지만, 그러나 이 언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이 언표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실재적인 인식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정당성이나 형식 논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실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실과 합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인식과 진리
인식의 이상으로서의 '실재와의 합치'
언표가 무엇인가에 관한 언표인 한, 그 언표의 참 거짓은 그 언표가 그 언표되어지는 것을 제대로 언표하고 있는가, 즉 그 언표되어지는 것에 상응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인식이 무엇엔가에 관한 인식인 한, 그 인식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그 인식이 그 인식된 대상과 합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리란 '언표의 사실과의 부합'이나 '인식의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부합'이니 '합치'니 하는 것은 언표나 인식을 참이도록 해주는 근거가 된다. 사실에 부합하는 언표는 참이고, 실재와 합치하는 인식은 참이다. 진리에 관한 이와 같은 견해를 보통 '대응설'(對應說) 혹은 '합치설'(合致說, 一致說)이라고 하거니와, 많은 철학자들의 오래된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 (Metaphysica, 1011b 26f.)이며, 분리되어 있는 것에 관해 분리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복합적인 것에 관하여 복합적이라고 언표하면 그 판단과 언표는 참이다. 이런 견해는 최근까지도 필요한 만큼 변형되어 반복되고 있다. 예컨대 타르스키(A. Tarski, 1902-1983)는 "눈이 흴 때 바로 그때 '눈이 희다'는 명제는 참이다"고 말한다.
눈의 흴 때 그때 누군가가 "눈이 희다"고 판단하고 인식하고 언표하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참이다.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면 그 말 역시 참이다. 그래서 참임의 근거가 '부합' 혹은 '합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 '부합' 내지 '합치'를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에 있다. 누군가가 '눈이 희다'고 인식할 때 이 인식이 실재와 합치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묻게 되는 것은 '눈은 과연 실제로 흰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신은 존재한다"고 언표할 때 이 언표가 사실과 부합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은 실제로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언표의 사실과의 부합 여부는 사실 인식을 전제로 해서만 결정될 수 있으며, 하나의 사실 인식이 주장되면 다시금 그것이 사실 인식인가가 확인되어야만 한다. 이런 (무한하게 소급될) 확인이 어떻게 가능할까?
인식이란, 일반적으로 아직 모르는[未知의] 것에 관해서,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지를, 즉 본질과 존재방식을 파악하는 의식의 표상작용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하면 그 인식은 참이다. 그러나 이제 누군가가 미지의 것, 그래서 지금 인식해야 할 대상인 것에 관해서 "그것은 존재한다"고 언표하고, 이렇게 언표한 까닭은 자기는 그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의 인식이 실재와 합치하는지 않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미지의 것이니, 우리 역시 그것은 무엇인가, 어떠한가 인식해 봄으로써만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의 결과가 "그것은 존재한다"가 되면, 그의 인식이 참되다는 것이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의 인식의 결과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되거나 "그것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모르겠다"가 되면 그의 인식의 참임, 즉 실재와의 합치는 어떻게 가려지겠는가? 우리 모두의 인식내용과 그의 인식내용이 다르니, 그의 인식이 잘못된 것 즉 실재와 불일치하는 것이 되는가? 아니 반대로, 그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인식내용이 일치하면, 이때 우리 모두의 이 '인식'은 '실재'와 합치하는 것이 되는가? 이렇다면, 참된 인식 즉 진리란 인식하는 자들의 동의 내지 합의를 뜻하게 된다. 즉 인식과 실재의 합치는 인식자들 상호간의 인식내용의 합치, 의견의 일치를 뜻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인식내용과 그의 인식내용이 다를 경우에 그는 수적 열세로 인하여 "그래도 그것은 존재한다"고 또는 갈리레오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혼잣말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인식자들의 동의나 합의가 없음에도 만약 한 인식자의 인식 내용인 "그래도 그것은 존재한다"라는 언표가 의미가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언표도 '사실과 부합'한다는 기준에 근거하여 참일 수 있다면, 이것은 인식자들의 합의에 인식의 진리임이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어떤 인식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더라도 진리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사실'이나 '실재'는 인식자들에게 각기 다르게 인식되더라도 혹은 도대체 누구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더라도 '사실'이나 '실재'일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서도 인식된 바 없는 '사실'이나 '실재'라는 의미에서 그 사실이나 실재와의 부합이니 합치니 하는 진리의 규정이 실제로 무슨 의의를 가지겠는가? 그것은 단지, 진리의 개념 내지는 참된 인식의 이상(理想)을 말해 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인식이란 실재와 합치하는 인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가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단지 사고의 법칙과의 합치 여부로 그 진위가 판별되는 형식적인 인식과는 달리, 사실과 관련한 실질적인[내용 있는] 인식에서, 참된 인식의 규정으로서 '인식과 실재와의 합치'가 이런 내용 없는 형식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참된 인식[진리]은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는 진리의 이념을 예로부터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합치' 여부의 판별은 실제에서는 인식자들의 공통된 인식 내지는 합의에 의하거나 이것마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생활에서의 유용성의 정도에 의거하는 방도 외에는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리는 상호주관성이라거나 통교성(通交性) 혹은 유용성이라고 생각하며, 진리에 관한 이런 생각은 통칭 '합의설'(合意說), '의사소통설', 혹은 '실용주의 진리관'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진리의 본질을 '합의'나 '유용성'에서 보는 한, 진리는 '영원불변하며 보편 타당한' 무엇이라는 이념이 유지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한 때 합의 보았고, 또 한 때 사람들에게 대단히 큰 유용성이 있어서 '진리'로 통용되던 인식들이, 학문의 역사 특히 자연과학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잘못된 것으로 판정되는 경우를 우리는 드물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그 '잘못됨'의 판정 기준이 기왕의 합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합의'이거나 기왕의 유용성보다 '더 높은 유용성'에 있을 경우도 있지만, 기존의 인식이 '사실과 맞지 않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다시금 '사실과의 부합'이라는 이념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렇게 되면, '사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문제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실이나 실재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발달하며 따라서 진리도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형식[논리]적 인식의 진리임의 근거가 형식상은 '사고의 법칙과의 합치'이되 인간 지성의 진전에 따라 내용상 새로운 형식적 인식들이 발견되고 전개되듯이, 실질적인[내용 있는] 인식들은 '실재와의 합치'라는 진리의 이념 밑에서 학문의 진보와 더불어 발달하며, 우리 인간의 지성 발달은 그 지성에 의한 인식이 실재에 합치할 때에 완성된다고 본다. 그러니까 '합의'나 '유용성'이라는 기준은 지성 발달의 도중에서 불가피하게 채택되는 잠정적인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진리는 인식의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식이 내용상 사실과 합치할 때 그 인식은 진리라는 이 규정은,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전개되는 한 즉 사실과학이 지속적으로 발달하는 한 이상적인 규정으로 남을 뿐, 최종적인 합치 여부는 인간 역사의 종점까지 유보될 것이다.
'인식과 실재의 합치'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
우리는 이제까지 형식적 인식의 진리임은 그 인식이 사고의 보편적 법칙에 합치하는가 어떤가에 따라 판정될 수 있으며, 실질적인[내용 있는] 인식은 이 조건의 충족과 더불어 '실재'와도 합치해야만 참일 수 있다고 말해 왔다. 이런 구분의 의미가 분명해지려면, '실질적' 인식, '실재', '합치' 등의 개념부터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어떤 것에서 같은 것을 제하면 그 어떤 것의 두 배가 남는다"[1-1=2], 혹은 "수녀는 수도하는 여자다"는 언표의 진위는 어떤 감각경험[관찰이나 실험]도 필요 없이 우리는 판정할 수 있다. 또 "이 쪽의 둥근 사각형이 저 쪽의 둥근 사각형에 비하여 넓이가 두 배다"라는 언표의 무의미함도 순수한 사고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언표 내지 진술이 앎의 표현이라는 뜻에서 이런 언표들도 인식을 담고 있고, 이와 같이 순전히 (논리적) 사고만을 통해서 그 언표의 유무의미함 혹은 진위가 원리상 판정될 수 있는 인식을 우리는 '형식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에 "지금 백 아무개의 집 뜰에 장미 두 그루가 있다", "수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다", 혹은 "이 쪽의 인어가 저 쪽의 인어보다 두 배나 크다" 등등의 언표의 진위나 유무의미함은 감각경험을 빌리지 않고서는 판정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인식을 우리는 '실질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 '실질적'이라는 말은 '실재하는 내용[質]을 갖는'이라는 뜻이다.
실재하는 내용을 갖는 인식의 유무의미함 혹은 진위의 판정에는, 그런데 반드시 감각경험이 필요하다. 이것은 실재하는 내용은 감각경험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감각경험만이 실재하는 내용을 포착할 수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다.
'실재'(實在)라는 말로 우리는 '실제로 존재함[있음]' 혹은 '실제로 존재하는[있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모순율과 같은 사고의 법칙이 있다", "공간과 시간이 있다", "수 3과 삼각형이 있다", "홍길동이 있다", "교정에 느티나무들이 있다", "3.1운동이 있었다",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존재의 원인을 가지며, 이 원인 역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며, 게다가 그 내용은 그 원인에 의해 생겨난 존재자의 내용만큼은 커야 하고 그 원인이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 그 원인의 원인이 있어야 하고, … 마침내 궁극의 원인이 있음에 틀림이 없고, 이 궁극의 원인은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니까 더 이상 자기 존재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갖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원인(自己原因)적 존재자 혹은 자기로부터의 존재자,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자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 ?? 이처럼 많은 것에 관해서 우리는 '있다[존재한다]'고 언표한다. 또한 "모순율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단지 사고의 법칙 중의 하나이다", "홍길동은 실제로 있지는 않고, 소설 속에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삼각형은 사고 속에만 있다" 등등도 의미 있게 말해진다. 이런 여러 '있음' 가운데 '실제로 있음'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사고는, 경험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대상에 관한 것인 한, 그 대상이 어떻게 있는가[존재양태]를 생각하며, 일정한 규정 규칙에 따라 그것의 존재방식에 대한 태도를 취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것이 경험적으로 포착 가능하기 위해서는 첫째, 공간·시간상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둘째, 감각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의 충족 여부에 따라, 우리는 어떤 것이 '가능하게 있다 (혹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있다 (혹은 없다)', '필연적으로[반드시] (혹은 우연적으로) 있다'고 규정한다. 어떤 것이 공간, 시간상에 나타나고 양(量)적으로 질(質)적으로 규정될 수 있으면 그것은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원리상 감각될 수 있으면 그것은 '실제로 있다'. 어떤 것이 실제로 있는 것과 실체와 속성, 원인과 결과, 상호 공존의 법칙에 따라 관계 맺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있다.'(Kant, K.d.r.V., A218=B265f. 참조)
이 규준(規準)은 경험적인 사고작용이 그 사고의 대상의 존재방식을 규정함에서 사고작용을 규제하는 원리이다. 그렇다면 이 원리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 원리는 우리 지성[이성]이 존재하는 것의 방식에 대한 태도를 정할 때 사용키 위해 스스로 마련해 가진 것, 즉 선험적으로 산출해 낸 것이다.
이제 '실재' 즉 실제로 있음의 여부가 감각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판정된다 함은 무엇을 함축하는가? 그것은 실재하는 내용을 갖는 실질적 인식은 그 인식의 대상이 주어지는 것임을 말해 준다. 실질적 인식이란 주어지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다. 실질적 인식에서 인식되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한낱 관념들이나 그 관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관념들의 인식에는 감각경험이 필요하지 않다. 감각경험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관념이 아닌 어떤 것에 우리가 이를 수 있고 혹은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인 것이다. '실재적' 곧 '감각경험(가능)적'이라는 이 생각은 우리 인간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실재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 것에 관해서는 '실질적인 인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주어지는 것에 관해서만 실질적인 인식을 할 수 있고 그러므로 실질적인 인식은 수용(受容)적인 혹은 수동(受動)적인 인식이다.
무엇인가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즉 감각하는 우리의 의식기능을 통괄해서 감성(感性)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감성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감각기관이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기관은 공간·시간상에 주어지는 것만을 수용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영혼을 생각할 수는 있는데 보거나 만지거나 맛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을 수는 없다. 그것은 영혼이 공간, 시간상에 감각질을 가지고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간,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하는 것인가? 앞서 우리는 '실재'하는 것은 '감각되는' 것이라는 규정을 보았다. 그런데 공간, 시간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들리지도 냄새나지도 않고 맛볼 수도 없는 것, 즉 어떤 방식으로도 감각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즉 공간, 시간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감각기관은 어떤 것을 수용할 때, 그것은 무엇의 '곁에' 있고, 무엇에 '잇따라' 있다는 질서 표상 위에서 수용하는데, 공간·시간은 바로 이런 감성적 의식의 질서 표상이다. 그러니까, 공간·시간은 그 자신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어떤 실재하는 것을 수용하는 우리 감성에 감각적으로 수용된 바 없는, 그러므로 감각경험에 앞서 즉,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수용하는 것을 정리 정돈하는 질서의 틀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시간은 감각적 수용 즉 감성의 형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우리는 이 공간·시간이라는 형식에 준거해서 나타나는 것만을 감각[수용]할 수 있고 따라서 공간·시간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의 틀, 즉 감성적 "현상(現象)의 형식"이라고 부르고, 이 감각에서 수용된 내용을 우리에게 나타난 것의 실질이라는 의미에서 "현상의 질료(質料)"라고 부른다(Kant, K.d.r.V., A20=B34 참조).
지금까지 우리는 '인식의 실재와의 합치'의 함축을 드러내기 위해서 '실질적' 인식과 '실재'의 의미를 어느 정도 밝혀 보았다. 이제 '합치'란 무엇을 말할까?
앞서 인식이란 어떤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를 파악함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실질적 인식이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 즉 실제로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함이겠다. 그런데 '인식'이란 '인식함[작용]'을 뜻하기도 하고 '인식된 것[내용]'을 뜻하기도 하며, 이미 지적했듯이 '실재' 역시 '실재함[실제로 그러그러하게 있음]'을 뜻하기도 하고, '실재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의상으로만 보면, '인식과 실재의 합치'에서 네 가지 경우의 '합치'가 생각될 수 있겠으나,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고려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즉 '인식된 것[인식내용]과 실재하는 것의 합치'와 '인식함[인식작용]과 실재함[실재하는 것이 그러그러하게 있음]의 합치'의 경우이다. 첫 번째 '합치'는 이미 앞서 인식의 이상을 설명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경우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서 "그것은 장미이고, 그 장미는 빨갛다"고 인식했다면 이 인식내용의 진리임의 여부는 '실제로 그것이 빨간 장미'인가 여부에 따라 밝혀진다. 그리고 인식내용은 인식작용의 결과인 의식상의 표상이고 실재는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때 '합치'란 '상응' 내지 '대응'(對應, correspondentia) 혹은 내용상 '같음'(convenientia)을 뜻하며, 이 합치의 의의는 앞서 살펴본 그대로이다.
그러면 두 번째의 경우 즉 '인식함(작용)과 실재함의 합치'는 어떤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 우리의 '인식작용이 실재와 합치'할 수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진리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다"(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De veritate, qu. 1, art. 1; Summa Theologiae, I, qu. 16, art. 2, 2)고 정의하였다. 참 인식은 그 '인식의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는 생각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진리 규정에 소급한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는 이 진리 규정의 해설에서 '지성'을 신의 창조적 지성과 인간의 파생적 지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서나 그것은 인식작용(자) 내지는 인식능력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이 점을 원용하여 '인식과 실재의 합치'의 형식상의 함축을 드러내 보기로 한다.
근대 이래의 자연과학을 수학적 자연과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자연 즉 물질적 실재에 관한 학적 탐구가 수학적 원리에 따라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학은 인간 지성[이성]의 사고 법칙에 준거한 지식의 체계이다. 이런 수학의 분야에서 해석기하학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데카르트는 "내 견해로는 자연 안에서 모든 일은 수학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우리가 자연 안의 사태들을 수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수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지성이 인식함에서 자기 사고의 법칙인 수학적 원리에 따라서 작용하면 이 작용은 자연의 실재 방식과 합치한다. 이때 합치란 '일치' 혹은 '동일함'을 의미한다. 사고의 법칙이 바로 실재의 방식, 실재의 형식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사고의 법칙을 "자연의 빛"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인식작용이 그에 따라 수행되는 그 원리가 만약 실재의 존재 원리이기도 하다면, 바로 이 원리에서 '인식함과 실재함은 동일'하다, 즉 합치한다.
데카르트의 "일치" 이론은, 신의 창조물인 자연세계는 우리의 인식작용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되, 같은 원리에 따라서 인간 역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세계 인식의 원리와 자연세계의 존재 원리가 동일하다는 일종의 신이성론(神理性論)으로 해석된다. 즉 신은 세계를 수학적 원리에 따라 창조 운행하면서 그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인 우리 인간을 그의 다른 창조물들을 그의 세계 운행 원리인 바로 그 수학적 원리에 따라 인식하도록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 인식작용의 원리와 자연 실재의 방식이 일치한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신의 위격(位格, personalitas)을 납득한다면 이런 생각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달리 칸트는 신의 역할을 전제함이 없이 어떤 것의 '실제로 있음' 즉 존재의 방식이 인식작용하는 의식에 의해서 규정되듯이, 어떤 것의 '그러그러함'[본질]도 인식작용에 의한 규정이므로 인식을 가능하게 한 바로 그 사고의 원리가 그 인식에서 '실재'라고 인식되어진 것 즉 실재하는 것의 실재함의 틀이고, 이런 한에서 인식함과 실재함은 동일하다고 파악한다.
실재하는 것의 실재함[실제로 그러그러하게 있음]이 인식하는 사고작용의 원리에 의해 규정된다 함은 무슨 뜻인가? 인식작용 중에서 예컨대 "그것은 한 송이의 장미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제까지도 봉오리였는데, 오늘 아침 활짝 피었다"는 인식이 성립한다. '그것'이라고 지칭된 하나의 장미꽃이라는 '실재'는 감각을 통하여 수용된 일정한 모양, 색깔, 냄새 등등의 잡다한 재료[질료]가 '하나'라는 양(量)의 개념과 그것이 봉오리일 때나 활짝 피어있을 때에나 마찬가지로 어떤 고정불변적인 '그것'이라는 실체(實體)개념과 '∼이다'는 내용규정[實質性]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통일되기 때문이다. 이런 통일작용이 다름 아닌 사고(思考)이다. 저 잡다한 감각재료들은 사고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사고에 주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지성의 사고작용이 저 잡다하게 수용된 감각자료들을 "하나의 어떤 것이다"라는 틀[형식]에서 통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송이의 장미꽃이다"는 인식이 성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인식이 없으면 '그 한 송이의 장미꽃'이라는 실재도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 사고의 형식은 우리 인식을 가능케 하는 토대[원리]이자, 이 인식에서 인식되는 실재 즉 우리에게 현상하는 존재자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토대[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사고의 형식으로 기능하는 개념들을 사람들은 "범주"(範疇, kategoria)라고 불러 여느 개념들과 구별한다.
인식된 실재는 그것이 인식되어지는 것인 한에서 인식하는 자에 의해서 규정(determinatio)된다는 뜻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식되는 사물의 형식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ST, I, qu. 16, art. 2, 2)고 말한다. 인식과 실재의 합치란 인식작용 즉 "지성과 (인식되는 실재인) 사물의 동일형식성(conformitas)"(ST, I, qu. 15, art. 1, 3)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 그 '합치'는 인식작용이 실재하는 것에로 다가가 동화(assimilatio)됨으로써 가능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의 편린을 우리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40/515-480)의 「조각글」(Frag. 3) "사고와 존재는 곧 같은 것이다"에서도 이미 발견한다. 후자의 입장에서 '합치'를 설명하려는 사상을 실재론(實在論)(→)이라고 부르고, 전자의 입장에서 '일치'를 설명하려는 사상을 관념론(觀念論)(→)이라고 통칭한다. 그러나 '관념론'을 우리가 표상하는 사물은 모두 우리 인간의 의식에 어떤 의미에서든 의존되어 있다는 이론으로 이해한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와 데카르트처럼 '인식하는 자' 혹은 '지성' 아래서 신을 염두에 둔 사상은 오히려 '실재론'이라고 보아야 하고, 인식하는 자를 오로지 인간 의식으로 보는 칸트의 초월철학(超越哲學)(→) 같은 것만을 관념론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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