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虛僞. Falschheit)·착오(錯誤. Irrtum)· 가상(假象. Schein)
'비진리'의 문제
인간은 누구나 착오를 범하기 마련이다. 인간이니까 실수한다. Errare est humanum.
착오, 실수, 환상, 가상, 거짓, 허위 등은 어느 면에서 인간에게는 불가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성격의 것으로 인정되지만, 그러나 대개는 이상적인 인간이라면 마땅히 빠지지 말아야 할, 지니지 말아야 할, 멀리해야 할 부정적인 인간적 요소로 치부된다. 그리고 그 대신에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추구해야 할 것으로 권장되는 것이 참(임)·진리·진상·진실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인식'을 말할 때, 그것은 보통 사태 자체를 파악하는 의식작용 내지는 의식작용의 결과를 뜻한다. 이 '사태 자체'를 우리는 진상(眞相)이라고 부르고, 진상을 제대로 파악한 인식을 진리라고 부른다. 이럴 경우 진상이 아닌 가짜, 즉 가상(假象, Schein)을 진상으로 혼동하는 것을 착오(錯誤, Irrtum)라 부르고, 이 착오로 인해 이른 잘못된 인식을 허위(虛僞, Falschheit)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어떤 인식이 참[진리]인지 거짓[허위]인지는 그 인식이 사태 자체 곧 진상을 드러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문제는 진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나느냐에로 귀착된다.
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 문제는 인식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에 따라 달리 답해질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인식에서는 형식적, 논리적 요소만으로, 어떤 인식에서는 경험적, 실질적 요소를 더해 고려함으로써만 '진상'을 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2+3=5"라는 인식에서 이 인식이 참된 것은 산수의 규칙에 맞는 까닭일 터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진상은 수리논리적 요소만으로써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6만 Km이다"는 인식이 참인지 거짓인지, 다시 말하면 진상을 드러내고 있는지 어떤지는 경험관찰적 요소를 고려함 없이는 답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신이 존재한다"와 같은 언표도 인식이라 주장된다면, 그 경우에 진상의 문제는 단지 논리적이거나 경험관찰적인 요소만으로써는 처리할 수가 없다.
이런 점으로 인해 인식은 형식적 인식과 경험[실질]적 인식으로 구분될 수 있고, 인간 이성이 경험의 한계 너머에서까지 무엇인가를 인식하고자 지향할 때는 '초험적 인식'도 거론될 수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이 각각에 대해서 비진리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형식적 인식과 허위
지성의 성격과 형식적 인식
인식은 의식작용이고, 의식은 어떤 사태에 대해서 그것이 어떠하다는 의견(Fürwahrhalten)을 가짐으로써, 곧 판단함으로써 인식을 얻는다. 이때 그 인식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면 참이고, 그렇지 못하면 거짓이다. 이런 인식 작용에서 판단하는 기능을 우리는 '지성'(知性, intellectus, understanding, Verstand)이라 부른다. 그러니 지성이 판단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경우에든 진리나 허위를 얘기할 수 없다.
그러면 지성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지성의 기본적인 활동은 문자 그대로 '앎의 기능'이다. 앎, 지식, 인식은 지성이 개념들을 결합, 종합하거나 분해, 분석함으로써 생긴다. 그러므로 인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개념(??)이다. 그래서 지성은 인식의 요소들인 개념들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개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료들은 감성, 감각적 경험을 통해 주어지기도 하고 상상력에 의해 제공되기도 한다. 다양한 자료들이 주어지면 지성은 이것들을 비교하고 추상하여 개념을 얻는다. 이런 점에서 지성은 '개념의 능력'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성은 또한 '판단의 능력'이기도 하다. 판단은 어떤 개념으로부터 다른 어떤 개념을 분해해 내거나 어떤 개념에다가 다른 어떤 개념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그런데 이때 이 분석적 판단이나 종합적 판단은 각기 지성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수행된다. 예컨대, 동일율, 모순율, 배중율과 같은 규칙은 분석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지성의 원리이고, '∼은 ∼하다'는 '실체-속성의 관계' 규칙이라든지, '∼이면, ∼이다'라는 '원인-결과(전제-결론)의 관계' 규칙은 종합적 판단을 위한 지성의 원리이다. 이런 지성의 기본적 규칙들은 지성에 내재적이다. 이때 '내재적'이란, 지성이 구체적인 사고활동, 판단작용에 앞서 이미 이 규칙들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이 규칙들은 지성의 구체적인 사고 수행, 판단작용에 선행한다는 뜻이다. 언제 어디로부터 어떻게 인간의 지성이 이런 사고의 내재적 규칙을 갖추어 갖게 되었는가라는 문제가 거론될 수 있겠으나, 적어도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 활동에서 '지성'의 기능을 얘기할 수 있는 한, 동시에 지성의 법칙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법칙이 없는 곳에서는 올바른 일도 그른 일도 없으므로, 지성작용의 결과인 인식에 대해서 참·거짓을 얘기할 수 있다면, 지성작용의 규준으로서의 법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지성에 내재적이어야 한다. 지성이 고유한 성격을 가진 기능인 한, 그 기능의 고유성은 그 기능의 작동방식에 있는 것이고, 지성의 법칙이란 지성의 작동방식의 일정성(一定性)이겠다. 어떤 기능의 작동방식에 일정성이 없다면, 사실상 '그 기능'이라고 칭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의 법칙이 내재적이라는 말은, 지성이 지성으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한 내재적인 법칙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성의 일정한 기능방식인 지성의 법칙과 지성은 그 성립에 있어서 동시적이다. 지성은 당초에는 '백지'였는데, 언젠가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 고유한 기능방식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으로, 이른바 '백지'(白紙)인 지성은 '지성이 아닌 것'이라고 말함이 옳다. 지성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일정한 법칙이나 기능과 함께 그리고 일정한 법칙이나 기능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미 그것은 '무엇인가가 새겨진 판(板)'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성을 '백지'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 지성의 진화나 퇴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표준적 지성'이 가정되어야 할 것인데, 대체 '표준적' 지성 그리고 이 표준적 지성의 '보편성'은 무엇에 근거할까? 그것은 현재의 지성 상태나 혹은 현재의 지성 상태를 염두에 둔 '이상적 지성' 상(像)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령 우리가 인간이란 종(種)의 생물학적 변화를 납득하고, 지성을 두뇌 활동의 한 가지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일정 시점과 일정 시점 사이에 인간의 '지성' 양상이 상당히 다르고, 또는 일정 집단의 '인간'과 또 다른 일정 집단의 '인간'의 지성 양상이 다름을 판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가 인간 지성의 진화나 퇴화를 말할 수는 없고, 기껏 '차이'를 얘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더 발달된 지성' 또는 '덜 발달된 지성' 따위는 도무지 말할 수가 없고, 단지 '서로 다른 여러 양상의 지성'을 얘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서로 다른 양상의 것들'에 대해 하나의 공동의 이름 '지성'을 줄 수 있겠는가? 서로 다른 복수(複數)의 지성이 있다면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지성인 한에서 어떤 점에서는 동일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지성의 동일한 성격이란 신체적으로[시·공간적으로, 물리·심리학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구별되는 여러 사람의 각각의 두뇌 활동과 더불어 지성의 기능이 작동한다 하더라도, 그 방식이 보편성을 가짐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점에서 지성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있어서나 동일한 기능방식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지성의 형식[形相] 또는 지성의 작용 법칙이라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성은 지성인 한 적어도 형식적으로 동일하다. 지성은 형식상 하나이다.
형식적 인식의 보편성은 바로 이 지성의 동일함에 근거한다. "A=A"나 "1-1=0"이라는 인식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타당하다. 이 말은, 이런 인식은 지성의 형식, 지성의 작용[표상, 사고, 인식, 판단, 추론] 법칙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A=-A"라거나 "1-1=2"라는 판단은 틀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성의 법칙에 어긋난다. 그런데 지성의 법칙에 어긋나는 판단도 지성이 하는 일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점에서 생긴다. 지성은 어찌하여 자신의 작동 법칙에 어긋나게도 기능하는가? 무엇인가가 대체 자신의 기능 규칙에 맞지 않게 작동할 수 있는가?
형식적 인식에서의 착오 가능성
그러하지 않은 것을 그러하다고 잘못 판단하는 것은 착오이며, 이 착오에 의한 잘못된 인식은 허위이다. 그런데 판단은 지성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진리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착오를 범하거나 착오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형식적 인식에서 그러니까 지성은 자신의 규칙에서 벗어남으로써 착오에 빠지는 것이다. 이때 지성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어길 수 있는가, 아니면 무엇인가가 지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규칙을 벗어나도록 강요, 유혹하는가? 만약 '지성이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어긴다'면, 그런 '지성'은 사실 지성일 수 없다. 앞서 생각해 보았듯이, 지성이란 일정한 규칙에 따르는 사고기능을 일컫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지성의 규칙은 지성에 내재적일 것이니 말이다. 이런 사태 파악이 옳다면, 지성이 착오에 빠지는 것은 지성 이외의 힘이 지성의 작용에 영향을 미친 탓이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어떤 경우에 일어날까?
인식은 어떤 경우에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판단의 주체는 지성이다. 지성이 판단하지 않으면, 그러므로 인식이란 없고, 또한 착오도 없으며 따라서 허위 인식도 없다. 허위 인식은 사태를 잘못 안 것이니 근본적으로는 앎이라 할 수 없겠으나, 그것은 일단 인식작용의 결과이니 앎은 앎이되 잘못된 앎으로서 단적인 '모름'과는 구별할 수 있다. '모름'은 지성이 판단을 내리지 않은 경우이나, '잘못 앎'은 지성이 일단 판단을 내린 결과이다. 그런데 형식적 인식에서 허위는 지성의 자기 작동 규칙의 위반, 곧 자가당착의 산물이니, 지성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 것은 지성활동에 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어떤 큰 힘이 지성활동을 방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외부의 힘으로서 우리가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상상력, 의지, 경향성, 습성, 관심 따위이다. 우리 의식에는 지성 이외에도 다른 활동하는 힘들이 많이 있는 셈이다.
"착오는 지성의 한계나 박약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는 단지 무지(無知)가 생길 뿐이다."(Kant, 『전집』 XXIV, 1, S. 402) 물체를 움직이는 어떤 힘이 감소하면, 그 때문에 그 물체가 가던 방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속도가 줄거나 멈출 따름이듯이, 지성의 힘이 약할 경우 우리는 단지 조금 알거나 판단을 중지한다. 판단하지 않는 곳에는 허위가 없으며, 조금 알아도 그것을 우리는 충분히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착오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성의 결여로부터가 아니라 어떤 적극적인 힘이 지성의 활동에 끼어듦으로써 생긴 것이다. 그런 뜻에서 착오는 일종의 사생아(effectus hybridus)이다(Kant, 『전집』 XXIV, 1, S. 402 참조). 상상력은 한계를 모를 만큼 할동 영역을 넓혀 지성을 무디게 만든다. 예컨대, 상상은 6과 9는 반회전하면 같다하여 '6-9=0'이라 볼 수도 있고, 신의 관념에 하얀 수염의 노인을 연상하기도 하며, 지성은 상상과 더불어 유희에 빠진다. 지성은 판단하는 힘이 제한되어 있건만, 의식의 경향성은 우리가 한계에 부딪치는 곳에서조차 무엇인가를 결정하고자 하여 착오를 유발한다. "우리의 제한된 능력으로 말미암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는 데에서도 판단하고 결정하려 하는 우리의 성향이 우리를 착오에로 이끈다."(Kant, 『전집』 IX, S. 54)
의식은 "인식의 능력(facultas cognoscendi)과 자의의 자유(arbitrii libertas)인 선택의 능력(facultas eligendi), 다시 말하면 지성(intellectus)과 동시에 의지(voluntas)"를 가진다(Descartes, Meditationes, IV, 8). 우리는 "지성만으로는 다만 관념들을 파악할 따름이고, 이 관념들에 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지성 그 자체만을 엄밀히 고찰하면, 지성 안에는 본래 착오란 없다." "우리가 그것에 관한 관념을 갖지 못하는 많은 사물들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지성의 결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같은 곳) 내가 범하는 착오는 "오로지 의지의 활동영역은 지성보다 훨씬 멀리까지 열려있는데, 내가 의지를 지성의 한계 내에 가두어 두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물들에까지 활동이 미치도록 하는 데에서 생긴다. 이런 것에 관해 의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므로 쉽사리 진리에서 [···] 떨어져 나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Descartes, Med., IV, 9) 우리는 "그 진리가 분명치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는 판단 내리는 것을 유보해야 함을 상기함으로써"(Descartes, Med., IV, 16) 착오를 방지할 수가 있다. "내가 내 의지를 제한시켜" 지성으로 하여금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들에 관해서만 판단하도록 한다면, "내가 착오를 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Descartes, Med., IV, 17) 예컨대 '2÷0=2'라고 판단하는 자는 착오에 빠진 것인데, 그에게 만약 '2÷0'의 개념이 명석판명하지 않았다면 판단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고, 그 경우 그는 단지 '모름'을 드러냈을 터이다. 이런 유의 오류를 범하는 사람에게 데카르트는 "내가 완전하게 아는 것에 관해 충분히 주목하고, 이것을 내가 애매모호하게밖에는 파악하지 못하는 다른 것들과 분리하기만 하면, 나는 틀림없이 진리에 도달할 것이다"고까지 말한다(Descartes, Med., IV, 17 참조).
사람은 욕구나 상상이나 성향에 이끌려 때로 착오에 빠질 수 있지만, 그러나 지성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 형식적인 인식에서 착오는 생기지 않는다. 형식적 인식에서의 착오는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형식적 인식에서 착오란 문자 그대로 지성이 명확한 것과 불명확한 것을 '뒤섞어 그릇됨'에 빠진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피해질 수 있다. 형식적 인식이란 당초부터 관념을 지성의 사고 규칙에 따라 결합하고 분리함으로써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인식과 착오
경험적 진리는 일반적으로 '인식[사고]과 실재[사실]의 합치'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잘못된 인식은 앎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경험적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판단내용을 갖는 인식은 허위이다. 그때 그 판단작용은 착오에 빠진 것이다. 이런 경험적 인식에서 착오는, 지성이 판단함에서 자신의 기능 규칙을 제대로 준수했다 하더라도, 진상이 아닌 무엇인가를 진상으로 잘못 판단하는 데서 일어나므로, 문제는 어떻게 이런 착오가 발생하는가, 그리고 과연 인간의 인식작용은 근본적으로 이런 착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경험적 인식의 착오 가능성
경험적 인식은 형식적 인식에서의 지성 활동을 그대로 밑바탕에 두고 이에 감성적 인식 소재가 더해짐으로써 생긴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착오 가능성은 형식적 인식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제한적인 상상력이나 의욕 또는 성향이 지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게 함에도 물론 있지만, 지성과 더불어 경험적 대상 인식의 또 다른 근간을 이루는 감성의 활동이 지성의 활동과 뒤섞이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은 감각 없이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터이다."(Aristoteles, De anima, 432a 6/7) 감성은 경험적 대상 인식에서 인식 소재를 직접 접하는 통로라는 점에서 인식의 실질적 원천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경험적인 진리내용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만큼, 만약 그것이 인식 소재를 잘못 제공하여 지성으로 하여금 오판하도록 한다면, 또한 "착오의 근거"이기도 하다(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295=B351 주 참조). 물론 감성 그 자체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으므로, 감성 그 자체의 활동작용이 착오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감성의 잘못된 소재 제공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섣부르게 판단을 내린 지성에 착오의 근원을 돌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경험적 대상 인식에서 허위란 한낱 주관적인 표상 즉 가상을 객관적인 것, 즉 진상으로 혼동하는 데서, 곧 착오를 일으키는 데서 생긴다. 이런 일은 보기에 따라서는 대상을 접하여 인식 소재를 수용하는 감성이 대상을 판단하는 지성에 영향을 잘못 미친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Kant, 『전집』 IX, S. 54 참조) 달리 생각하면 "지성이 감성의 저 영향에 대해 기울여야 할 만큼의 주의를 결여함으로써 그로부터 생겨난 가상, 즉 한낱 주관적인 판단의 규정 근거를 객관적인 것으로 여기고, 혹은 감성의 규칙에서 볼 때 참인 것을 지성의 법칙에 따라서도 참인 것으로 타당하도록 허용하는 가상에 지성이 자신을 내맡겨 오도하게 하는 데서 착오가 일어난다고도 볼 수 있다."(Kant, 『전집』 IX, S. 54) 그러나 어느 관점에서 보든 분명한 것은, 감성은 자신의 기능 규칙에 따라 대상에 대한 표상을 얻을 뿐 판단하지 않으며, 지성은 만약 감성으로부터 아무런 자료 제공이 없으면, 역시 대상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을 터이고, 판단이 없는 곳에서는 진리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허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진리이든 허위이든 경험적 인식은 "지성과 감성이 뒤섞인 결과"(Kant, 『전집』 XXIV, 1, S. 395)라는 점이다. "지성과 감성이 결합함으로써만 인식이 생길 수 있는"(Kant, K.d.r.V., A51=B75) 만큼, 만약 착오가 있다면 그것도 지성과 감성이 결합하는 데서 생긴다(Kant, 『전집』 XVI, S. 288: 조각글 2259 참조).
그렇다면 경험적 인식에서 생기는 착오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착오를 인간은 과연 피할 수 있는가?
대상 의식의 착오와 자기 교정 능력
허위를 진리로 여김, 주관적 가상을 객관적 진상으로 혼동함을 언필칭 착오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 착오를 언제 얘기할 수 있는가? 누군가가 인식활동에서 '허위'를 '진리'로 혼동했고, 단지 '주관적인 가상'을 '객관적인 진상'으로 잘못 알았음이 드러난 연후일 것이다. 어떤 인식은 언제 어떤 조건 아래서 '허위'로 판명되고, '진리'로 분명해지는가? '주관적인 가상'이란 무엇을 뜻하고, '객관적인 진상'이란 무엇을 함의하는가?
우리가 허위를 말하고, 착오를 말하고, 가상을 말하고 진상을 말하며, 진리를 말하는 관점은 '인식'이고, 그것도 우리 인간의 인식이다. 이 말은 우리가 착오를 말할 수 있는 관점은,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도 아니요, 이른바 '존재자 자체'의 관점일 수도 없다는 뜻이다. 신의 인식은 곧 진리요, 진상이요, 존재라 하니, 어디 허위, 착오, 가상이 끼어들 여지가 있겠는가! '존재자 자체'란 단지 이상적, 이념적 존재자일 뿐,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의식의 지향활동이 인식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제 아무리 '존재자 자체'의 관점에서 얘기하려 함을 강조하고 싶어도, 그것은 결국 "'존재자 자체'라고 생각하는" 관점 이상이 아니다. '진리 자체', '진상 자체'야 우리 인간의 인식에 독립적인 것이겠고, 착오란 인식 활동의 도중에서 발생하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진리, 허위를 말하고 착오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식의 결과를 본 연후이다.
사람은 설령 그가 착오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착오에 빠져 있는 동안은 자신이 착오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이 인식에서 착오에 빠질 수 있고 현재 착오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어떤 것을 참이라고 주장하는 한, 그 동안은 적어도 그 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의 착오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착오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도리어 착오일 수도 있다. 허위란 틀린 인식을 일컫는 것이고, 틀린 인식은 맞는 인식의 기준을 전제로 해서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니, 양자를 혼동한다는 착오도 틀린 인식, 맞는 인식이 구별된다는 전제 아래서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1-1=0'은 맞는 인식이고 '1-1=1'은 틀린 인식이다. 이런 인식의 맞고, 틀림은 이성의 규칙에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형식적 인식에서 진·위의 규준은 이성의 사고 규칙이다. 물론 '이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겠으나, 그러나 일단 우리가 공동으로 '이성'을 얘기할 수 있는 한, 앞서도 이미 논의했듯이, 우리는 이성의 기본적인 기능과 규칙을 납득하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형식적 인식에서의 허위와 진리의 판별 준거를 우리는 이성 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누군가가 '1-1=1'이라고 인식한다면, 그는 착오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이름으로 이렇게 단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경험적 인식의 진·위의 판정에는 이성의 사고 규칙이라는 규준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험적 인식의 내용은 이성의 앎의 기능, 즉 지성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6만 Km이다'는 판단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이성의 사고 규칙만으로는 판정할 수 없다. 따라서 누군가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50만 Km이다'고 판단할 때, 그가 착오에 빠졌는지 어땠는지를 우리는 사고 규칙만을 가지고서는 판정할 수 없고 그러니까 그의 인식이 틀리는지 어떤지에 대한 충분한 판정기준을 이성 내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그의 인식이 허위라는 것은 가령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6만 Km이다'가 진리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눈이 검다'는 인식이 허위임은 예컨대 '눈이 희다'가 진리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그렇다면,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6만 Km이다'나 '눈이 희다'가 진리임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이런 판단의 내용이 참인 것은, 그것이 사실[실재]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사실은 자신이 사실임을 말한다",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존재는 자신을 개시(開示)한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런 견해가 옳다면 궁극적으로 인간이 착오에 빠지는 일은 없을 터이다. 실제로는 존재는 자신을 감추고, 그렇기에 인간은 그것을 들춰내려 하는 것이고, 그것을 이름하여 인식이라 하지 않는가? 아니, 여기서 우리가 '존재는 자신을 드러낸다', 혹은 '존재는 자신을 감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존재'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를 모르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지 숨기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물음들은 우리를 다시금 경험적 인식의 근본 성격에 대한 반성에로 이끈다.
대상에 대한 경험적 인식의 구조는 보통 의식이라고 하는 '인식자'?? 그것이 '나' 혹은 '이성'이라고 통칭되든 때때로처럼 이성·지성·감성이라는 세분된 이름으로 불리든 ??와 이 인식자의 지향 대상인 '존재자 자체' 그리고 이 양자의 연결 끈인 '인식(작용·내용)'의 상관 관계 곧 '인식자[의식]-인식(작용·내용)-인식 대상[존재자 자체]'로 이해된다. 이런 이해에서 존재자를 그 자체대로 파악하려는 대상 의식에서는 한편에서는 인식자인 '나[우리]'와 이 인식자의 활동(작용)으로서의 '인식'이 구별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 인식 활동의 작용 결과인 '인식'과 이 인식 활동의 지향 표적인 '존재자 자체'가 구별된다. 그러면서도 의식은 그의 인식이 존재자에 혹은 존재자가 그의 인식에 합치할 때까지는 자기의 대상 인식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개념이 대상에, 대상이 그의 개념에 합치함"(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PdG]: GW9, S. 57)을 목표로 운동하는 대상 의식은 이 목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자신의 인식에 만족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인식을 부정한다. 의식은 "안주(安住)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이고 부정작용이다."(Hegel, Enzyklopädie, §378, Zusatz) 대상의식은 대상을 겪어 나가며 자신의 인식을 고쳐 나가는 운동인 바, 이것이 다름 아닌 경험(經驗) 즉 '지나면서 실지를 알아 봄'이다. 경험이라는 의식의 운동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과 이 의식에 대한 반성적 의식 사이의 조정 운동, 즉 자기 대화, 바꿔 말해 자기를 자기에 '비춰본다'(speculari)는 뜻에서 변증법적 사변(思辨, speculatio)이다. 이 대상의식의 사변적 자기 대화는 결국 직접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의 일치, 인식 작용과 인식 내용의 합치, 이를 통한 인식자와 인식대상, 인식과 존재자 자체의 하나됨, 말하자면 진상, 사실, 실재를 찾기 위한 의식의 자기 지양 노력이다.
대상의식의 경험으로서 자기 대화는 자신의 인식에 대한 검사이다. 참된 인식이란 앞서 말했듯이 인식과 대상의 합치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자기의 인식과 대상이 합치하는가를 끊임없이 검사한다. 이 검사의 척도(mensura)는 대상이다.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인식보다 선행하며 인식의 척도인 것이다."(Aristoteles, Metaphysica, 1053a 3) 그래서 만약에 이 합치 검사에서 양자가 합치하지 않고 서로 어긋나면, 모순되면, 의식은 자기의 인식을 변경한다. 대상의식은 예컨대 물체의 공간 운동에 대한 뉴턴적 인식을 아인슈타인적 인식으로 변경한다. 그러나 의식이 대상에 대한 자기 인식을 변경시키면, 그것은 바로 의식에 있어서 또한 대상 자체도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다름 아닌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이었고, 그런 한에서 그 대상은 그 인식에 속하는 것이었으니, 인식의 변화에 따라서 그 인식의 대상도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의식에게는 존재자란 단적으로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대해서만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대상에 자기의 인식이 합치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에, 대상 자신도 유지되지 못한다."(Hegel, PdG: GW9, S. 60) 다시 말하면 인식의 대상과의 합치 여부를 가리는 검사에서 인식이 합격하지 못하면, 그 검사의 척도여야 할 대상도 변경된다. 의식의 자기 검사는 인식의 검사일 뿐만 아니라 그 검사의 척도의 검사이기도 한 것이다.
인식이 변경되면 그에 상응해서 처음의 대상을 부정하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난다.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면 이에 대한 대상의식은 새로운 인식 활동을 하며, 의식의 자기 검사를 통하여 또 다시 인식이 변경된다. 이렇게, 의식의 자기 자신의 인식에 대한 검사를 통하여, 다시 말하면 의식의 자기에 대한 회의적인 반성을 통하여 일련의 새로운 대상은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면 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수행되고, 새로운 인식이 수행되면 또 다시 새로운 대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의식의 '변증법'적인 운동은 "존재와 인식이 완전히 하나"가 될 때(Hegel, PdG: GW9, S. 39)까지 계속된다. 그러니까 대상의식의 변증법적인, 자기 대화적인 운동이 그치는 그곳에서 인식과 존재자 자체는 완전히 합치하고 인식은 자신의 이상에 도달한다. 그때 비로소 진짜 사실이, 진상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그러나 대상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은 언제 어디서 끝나는 것인가? 형식적인 답은 이미 주어졌다. - 인식과 대상이 완전히 합치하는 때, 바로 그곳이라고. 그런데 인식과 대상이 완전히 합치하는 곳은 다름 아닌 대상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이 종료되는 바로 그곳이다. 우리는 무슨 답을 얻었는가?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며, "눈이 흴 때 바로 그때 '눈이 희다'는 판단은 참이다." - 누가 이것을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언명들이 경험적 진리의 형식적 규정인 '인식의 대상과의 합치'보다 무엇을 더 말해주는가? 아무것도 없을 때, 오로지 그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무엇인가가 있을 때, 오로지 그때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하며, 눈의 흴 때, 오로지 그때 "눈이 희다"는 판단은 사태에 부합하기 때문에 참이다. 그러나 저 말은 누가하고, 저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또 이 '말'과 '판단'이 "참이다"라는 판정은 누가 하는가? 저 말과 판단도 '나'[우리, 인식자, 인간 의식]가 하고, 저런 판정도 '나'가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저런 언명들은 직접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 사이의 대화 혹은 한 직접적인 의식과 또 다른 직접적인 의식과의 대화와 이를 조정하는 반성적인 의식 사이의 대화를 통한 합의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우리의 대상 인식 곧 경험적 인식이, 표준적인 말로 바꿔 표현해서, 과학적 지식이 전개 발전되는 한, 진리란 언제나 의식들 사이의 잠정적 합의에 근거하는 것이고, 그 '진리'라는 것이 언제든지 '착오'로 반전될 수 있음을 뜻한다. '과학'이라는 것이 발전하는 한, 그 발전하는 과학에 부응해서 일련의 새로운 사태가 나타나고, 그러면 다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생긴다.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전개와 때로는 또한 과학적 사고 방식의 전환을 포함하며, 이것은 단지 지식의 양의 증가뿐만 아니라 종래 지식의 수정도 뜻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이미 '사태에 맞게' 수정된 지식이 앞으로 다시 수정될 수도 있음을 함축한다. 경험적 인식 체계로서의 과학은 인간 지성 활동의 산물이고, 인간의 지성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상 인식 능력이자 또한 자신을 부정하는 힘 곧 자기 교정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최초의 문제가 고스란히 남는다. - '사태'란, '사실'이란, '존재'란, '실재'란, '진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경험적으로 참된 인식이란, 따라서 경험적 인식에서 착오란 무엇인가?
경험적 인식의 한계와 착오의 의미
경험적 인식에서도 형식적 인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식을 수행하는 기능인 지성은 상상이나 의욕이나 어떤 성향에 이끌려 자신의 작동 규칙, '정도(正道)를 일탈'(errare, irren)할 때 착오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 인식에서 지성의 착오는 방지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보편적 지성'의 권위로써 허위 인식에 대해서 그 인식이 허위임을 최종적으로 단정할 수도 있다. 물론 지성 능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이 영역에서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그런 것에 관한 지성의 판단에 대해서는 그 진·위가 미정(未定)으로 남을 터이니, 착오 여부의 판정도 미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형식적 인식에 관해서는 단정이든, 판정이든, 미정이든 이 모든 결정이 이성의 이름으로 이성 능력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반면에 경험적 인식에 관련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경험적 인식의 진리 규정: '인식의 대상과의 합치'에서 진리의 척도는 이성의 밖, 곧 '대상'에 있기 때문이고, 게다가 그 인식을 수행하는 지성이라는 것도 고유한 방식의 작용 형식을 가지고, 그 틀에 따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어서, 설령 하나의 '보편적'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인식이 과연 '대상을 그 자체대로' 파악한 것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태를 그것인 바 그대로, 있는 바 그대로 인식한 것이라는 경험적 진리가 어디까지나 인식자에 의존적이라는, 바꿔 말해 주관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객관적'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착오를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혼동함'이라고 규정할 때, 그 규정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다.
"인식이란 일종의 작용이며, 작용이란 작용자로부터 나온 활동을 말한다."(Th. Aquinas, Summa Theologiae, I, qu. 14, art. 4) 이 인식하는 활동을 통해 무엇인가가 인식되는 것이며, "인식된 것의 상(像, species)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 "왜냐하면, 인식되는 것은 인식하는 자의 존재 방식대로 인식하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다."(Th. Aquinas, ST, I, qu. 14, art. 1) 인식이라는 것이 본디 어떤 것이 인식자에게 수용되는 것인 만큼, 그것은 인식자의 인식 방식, 수용 방식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인식자가 체용(體用)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써 사물은 실체와 활용의 틀로 파악이 되고, 인식자가 수량(數量)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써 사물은 측량된다. 그러므로 인식자가 제 아무리 자신의 인식이 존재자 자체와 합치하는가를 검사한다 해도, 그것을 자기의 능력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수단을 가지고서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경험적 인식은 그것이 '진리'라고, 곧 대상과 합치한다고 보편적 이성에 의해 확인되는 순간에도 착오일 가능성을 포함한다.
인간의 경험적 인식은 예술가의 창작 활동도 아니며, 신의 존재 창조도 아니다. 경험적 인식에서 인식되는 것이 인식자의 인식 방식에 따라 수용되고 규정된다 해도, 그렇다고 인식 대상이 인식자의 창작물은 아니다. 예술품의 창작이나 신의 세계 창조에서는 허위가 있을 수 없다. 경험적 인식에서 허위가 얘기되는 것은 합치 여부의 검사의 척도가 인식자 밖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경험적 인식은 어디까지나 인식자 밖에 있는 것에 접근 동화(assimilatio cognoscentis ad rem cognitam)함이다. 이것이 경험적 인식이 창작이 아니고 '인식'인 의미이다.
인간의 경험적 인식은 존재하는 것의 본질과 존재 방식을 파악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적 인식에서 진리는 그 인식이 존재하는 것 자체에 합치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우리는 객관적 인식이라 한다. 이때 '객관적'이란 그러니까 '존재자 자체(객관)에 타당한'이라는 뜻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이른바 '경험적 진리'라는 것도 인식이 인식자 곧 '주관에 의존적'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존재자 자체[객관]에 타당한' 것도 '주관에 의존적'임을 뜻한다. 즉 객관도 궁극적으로는 주관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주관적 표상을 객관적으로 혼동함을 착오라 규정할 때, 이 '주관적'과 '객관적'의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만약 여기서 '주관적'은 '인식 활동하는 경험적인 그 개인에게만 타당한'의 뜻으로, '객관적'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타당한', 그러니까 결국 '상호 주관적으로 합의된'이라는 의미에서 '보편타당한'의 뜻으로 쓰인다면, 이때 착오란 사적(私的) 인식의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겠고, 참된 인식이란 학적(學的) 인식을 지시하는 것이겠다. 이런 제한된 의미에서 사적인 경험적인 착오는 이성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방지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인간은 학적 인식에서도 많은 착오를 범한다. 그것은 과학사가 입증해 주는 바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착오는 인간의 경험적 인식에게는 불가피하다. 경험적 진리, 존재자 자체에 타당한 인식, 객관적으로 타당한 인식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주관이라고 하는 인식자에 의존하는 한, 그리고 이 인식자가 신과 같은 완전함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인간의 경험 의식을 지칭하는 한, 경험적 진리는 언제나 착오일 가능성을 가진다. 인간의 대상의식의 경험적 진리 추구의 길은 반복되는 착오의 길이기도 하고, 헤겔 말처럼 "회의(懷疑)의 길"이고 "절망의 길"(Hegel, PdG: GW9, S. 56)이다. 그러나 착오와 회의와 절망의 길은 의식이 그에게 등장하는 존재자를 관통하는 즉 경험(經驗)하는 길이며, 그 길의 종착점은 의식이 마침내 존재자와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희망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뜻에서 의식의 경험은 진리를 향한 "의식 자신의 도야(陶冶)의 역정(歷程)"(같은 곳)이다.
'초험적 인식'과 가상
선험적 인식과 초월적 진리
경험적 인식에서 진리를 "인식의 존재와의 합치"라고 규정할 때, '인식'이란 인식의 내용 곧 인식된 것을, '존재'란 존재하는 것 곧 존재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경험적 진리란 경험의식에 의해 인식된 내용이 존재하는 것 그대로와 똑같음이다. 과연 인간의 경험적 인식에서 그런 경우가 있겠는가, 있다면 무슨 의미에서 그러하겠는가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앞에서 해명된 것을 받아서 말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 저런 의미에서의 경험적 진리를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경험적 진리가 있음을 납득하기로 하고, 이제 진리인 경험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자.
경험적 인식도 언제나 판단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판단은 내용뿐만 아니라 일정한 형식을 갖는다. 예컨대, "지금 저기에 두 사람이 서 있다", "한 사람은 황인이고, 또 한 사람은 백인이다", "저 장미꽃은 붉다", "햇빛이 저 장미를 붉게 물들게 했다" 등등에서 보는 것처럼, 인식을 표현하고 있는 판단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얼마만큼) (어째서) 있다'든가 혹은 '무엇이 (왜) 어떠하다' 등의 틀로 짜여져 있다. 그러니까 판단들은 따라서 인식들은 이런 형식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형식들이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를 반성해 보면, 그것이 인식하는 이성 자체에 원천을 둠을 알 수 있다. 경험적 인식은 바로 저런 형식에 근거하는데, 이 형식이 거꾸로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런 형식을 '선험적'이라고 불렀다. 우리 이성은 이와 같은 선험적인 표상을 가지고 있고, 이 선험적 표상들의 사용 규칙 또한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모든 직관들은 연장적 크기들이다",(Kant, K.d.r.V., B202) "발생(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규칙상 바로 그에 뒤따르는 어떤 것을 전제한다"(같은 책, A189) 등과 같은 순수 지성 개념의 객관적 사용의 원칙들이 그런 것이다. 이처럼 순전히 이성으로부터 유래한 표상들로 이루어진 인식을 우리는 선험적 인식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험적 인식은 인식하는 의식의 작용 규칙들로서, 이 규칙 아래에서 의식이 작동되는 것이므로 그것들은 인식하는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자 의식의 틀[형식]이다. 이런 틀을 바탕으로 해서 무엇인가 대상을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의식이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의식이 활동해야 비로소 무엇인가가 인식된다. 그러니까 이런 경험 의식을 가능케 하는 근거·조건이 바로 경험 의식에서 인식되는 것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Kant, 같은 책, A158=B197; 『전집』 X, S. 130; XVIII, S. 347: 조각글 5761; XXVIII, S. 239·S. 550 참조).
저런 선험적 인식이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것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자 조건이라 함은, 선험적 인식을 기초로 해서 경험적 인식이 성립하고, 그래야 비로소 인식되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선험적 인식이 인식되는 것의 존재 형식을 이룬다는 것도 의미한다.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반드시 '무엇'[실체]이고, '어떠하며'[속성], '언제'[시간], '어디에'[공간], '어떻게'[양태] 있다. 경험적 인식의 틀을 이루는 이와 같은 '실체', '속성', '시간', '공간', '양태' 등의 선험적 표상과 이 선험적 표상들의 사용 규칙인 선험적 인식들이 인식되는 것, 따라서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존재 틀을 이룬다. 이것은 인식 기능의 선험적인 기본 틀이 인식 대상의 기본틀임을 말한다. "인식하는 수단은 그것의 소질상 그의 대상과 같아야 한다."(Aristoteles, De anima, 430b 23f.) 다시 말하면 인식하는 의식작용과 인식되는 존재자는 기본적으로 동형성(同形性, conformitas)을 가지며, 이 점에서 양자는 일치한다(Th. Aquinas, ST, I, qu. 16, art. 2. 2 참조). 다름 아닌 이 형식의 일치에 근거해서 인식의 내용과 존재하는 것의 합치, 곧 경험적 진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칸트는 저 틀[형식]의 일치를 "모든 경험적 진리에 선행하면서 바로 이 경험적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적 진리"(Kant, K.d.r.V., A146=B185)라고 부른다.
우리가 여기서 칸트의 용어법을 그대로 따른다면, '초월적 진리'란 의식의 경험적 인식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본래적인, 그러므로 경험 활동에 선행하는 기능구조와 의식의 경험적 인식에서 인식되는 존재자의 존재구조가 일치함을 말한다. 그것이 '진리'인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인식자[의식]와 인식 대상[존재자]이, 그러니까 의식의 의식임[본질]과 존재자의 존재임[본질]이 일치함을 뜻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초월적'임은 그 인식하는 의식의 작용 형식이자 존재하는 것의 존재 형식인 표상들이 그 자신은 선험적이면서도 그러나 경험적인 의식 활동과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대상들을 가능하게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초월적 진리'를 이런 의미로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바는, 앞서 형식적 진리란 형식적 인식의 참임을, 경험적 진리란 경험적 인식의 참임을 뜻한 반면에 초월적 진리는 같은 의미에서의 초월적 인식의 참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식적 인식은 그것이 이성의 규칙에 어긋나면 허위가 되고, 경험적 인식 역시 사실과 맞지 않으면 허위가 된다. 그러나 초월적 인식에는 허위가 없다. 초월적 인식이란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인식을 일컫는 것이니, 만약 하나의 선험적 인식이 경험적 인식을 가능토록 기능하며, 그것은 초월적 인식인 것이며, 어떠한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한낱 주관적인 표상에 머무는 것뿐이다. 또한 초월적 인식으로 기능하는 선험적 인식은 그것에 기초하여 경험적 진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진리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선험적 인식에 허위란 있을 수 없다. 선험적 인식은 초월적 기능을 하거나 말거나 하기는 하지만, 허위인 경우는 없고, 또한 마찬가지로 초월적 인식도 허위인 경우는 없다. 그것은 신이 하는 인식에 허위가 없는 것에 비견될 수 있다. 신의 인식은 다름 아닌 신의 존재 창조로서, 신은 인식하거나 말거나, 즉 존재를 창조하거나 말거나지, 잘못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이성의 선험적 인식이 신의 인식처럼 완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선험적 인식의 성격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초월적 가상과 '초험적 인식'
선험적 인식은 대상을 형상(形相)화한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으로 진리일 수는 있으나 결코 허위일 수는 없다. 선험적 인식은 경험적 의식 작용을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대상을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대상과 합치한다는 점에서 참된 인식이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초월적 진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에 반대되는 것 곧 초월적 허위라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허위란 이를테면 선험적 인식이 자기의 작동에 의해 형상화된 대상의 대상성과 합치하지 않음이겠는데,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험적 인식이 초월적으로 기능하지 않으면 아무런 대상도 형상화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일단 기능하면 그것은 그것에 의해 형상화된 대상의 순수 형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다 해서, 선험적 인식이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선험적 인식도 종종 월권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로써 종종 '초월적 가상'이라 불려야 할 것이 나타난다.
형식적 인식은 표상들을 오로지 지성의 순수한 사고 규칙에 따라 결합하고 분리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형식적 인식은 그것만으로는 결코 적극적으로 어떤 실재성도 함의하지 않는다. '2+3=5'라는 판단이 맞다 하여, '2'나 '3'이나 '5'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푸른 하늘은 푸르고, 검은 하늘은 검다'는 판단이 참이라 하여, 이로부터 '푸른 하늘'이 존재하고 '검은 하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다'라는 개념을 '이 책상이 존재한다', '물이 존재한다'는 언표에서의 '존재하다'는 개념의 뜻과 똑같이 사용한다면 말이다. 또한 "완전한 것은 완전함이라는 성질을 갖는다. 그런데 완전함에는 당연히 존재함도 포함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존재함을 결여할 터이고 따라서 완전함일 수 없으니까, 따라서 완전한 것은 존재한다"는 추론도, 우리가 '존재함'을 감각 지각에 기초한 사물에 대한 의식의 태도로 납득하는 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형식적 인식은 어느 경우나 의식 내 표상들의 연관 관계를 표현할 뿐, 의식 밖의 세계와 관련이 없다. 의식 밖의 세계, 통칭 존재하는 세계에 관계하는 것은 경험 의식이다. 경험이란 다름 아닌 존재하는 세계를 관통하여 증험하는 의식작용을 일컬으니 말이다.
경험이 의식 밖의 세계를 인식하는 의식 활동이고, 의식 활동 중에서도 의식 밖의 세계와 접하는 유일한 통로가 감각인 한, 존재하는 사물은 감각 재료를 바탕으로 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 만큼 경험적 인식에서 대상을 대상으로 형상화하는 선험적 인식의 초월적 기능도 그 활동 범위가 감각적 대상으로 제한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선험적 인식도 감각 경험의 세계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상도 규정할 수가 없다. 규정될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냐, 둘이냐, 모두냐 하는 양(量)의 개념도, 순도(純度)가 몇 %다고 하는 질(質)의 개념도, 무엇 때문에 그것이 발생했다는 인과의 관계(關係) 개념도, 실제로 있다·없다는 존재양태(存在樣態) 개념도, 언제·어디에 라는 시간·공간 표상도 모두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재료를 틀지우는 선험적 표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경험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 않고, 이념을 세우고 그를 실천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달성될 수 없는 곳에는 희망의 나래를 펴 닿으려 한다. 그래서 이성은 마땅히 경험적 인식 영역에 그 사용을 국한시켜야 할 선험적 도구들을, 경험 영역을 넘어가는, 즉 초험적인 영역을 설계하는 도구로도 곧잘 사용한다.
인식이 한계에 부딪쳐도 이성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사변(思辨)이다. 이때 사변을 의미 있게 주도하는 것은 진리의 이념이 아니라 이성의 관심이다. 무엇이 지식의 체계를 위해서, 자연의 전 질서 체계를 위해서, 인간의 도덕성의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가에 이성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 때문에 그의 생각에 필요한 자료가 감각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을 때 이성은 상상력을 통해서라도 사변의 자료를 얻는다.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자연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는 것은 경험적 사고의 일반 규칙이다. 이에 이성은 이 원인 계열의 최초의 것을 상정하고, 그것을 우주의 시초라 생각한다. 또한 결과 계열의 최종의 것을 생각하고 우주의 종말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주의 '시초'란 더 이상 무엇에로 소급시킬 수 없는 것을 뜻할 터이니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는다'는 사고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만약 그것이 '무(無)'를 지시한다면 없음으로부터 있음이 유래한다는 모순을 표현하는 것이다. '종말' 역시 그것이 존재로부터 완전한 무에로의 이행을 뜻한다면 모순된 생각이긴 마찬가지다. 인간 이성은 스스로 능력의 한계, 지혜의 한계를 자각한다. 그리고 이런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은 자기 내에 완전함의 표상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런 완전함의 표상을 일으키는 자, 곧 완전한 자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대응하는 존재자는 언제·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 능력이 아직 덜 발달되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초부터 지성의 한계 밖의 것이어서 지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은 원리상 시간·공간적으로, 감각적으로 표상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경험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에는 따라서 아무런 실질적 존재자도 대응하지 않으므로 그런 것들은 이를테면 초월적 가상이다.
이런 초월적 가상에 이끌려 이성은 마치 무엇인가를 인식한 것처럼 말한다: '우주의 종말이 오면, 전지전능하고 전선(全善)한 자가 착한 사람은 구제해 준다.' 이런 언표도 인식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보아 일종의 인식, 이를테면 '초험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정확히 표현하면 이런 것은 인식이라기보다는 인간 이성의 상상이거나 희망이다.
인간적 인식의 한계와 의미
인간에게서 인식은 형식적인 인식에서처럼 관념들의 논리적 연결이거나, 경험적 인식에서처럼 대상에 대한 감각적 파악이다. 형식적 인식은 그것이 참이라 하더라도 실질성을 갖지 못하며, 감각을 통해 실질성을 얻는 경험적 인식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인간에게는 고유한 인식의 틀이 있고,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음으로써, 인간의 인식은 언제든 착오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 의식은 착오의 도정에서 성장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착오에 빠진다지만, 그렇다고 착오가 두려워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착오를 피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착오란 판단하는 데 있으므로, 결코 판단하지 말지어다, 그러면 결코 착오에 빠지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지식도 판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니, 판단하지 않는 자는 아는 것도 없을 터이다.
"인간이 판단할 때 전적으로 착오에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착오적인 판단에서조차 지성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한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이 허위일 수는 없고, 언제나 무엇인가 진리적인 것이 들어있다."(Kant, 『전집』 XXIV, 1, S. 84) 어떤 판단이든 지성으로부터 생겨나며, 따라서 그것은 항상 어느 정도 지성의 성질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일견 일관되게 허위인 것으로 여겨진 인식도 언제나 부분적으로 허위인 것이며, 언제나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다. 심지어 미치광이의 판단에서도 이를 잘 조사해 보면 적어도 부분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Kant, 『전집』 XXIV,1, S. 94 참조). 인간 의식은 착오를 통해서 진리에 이르고, 착오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오로지 지성적이라면 그는 판단함에서 언제나 충분히 주의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요소가 있을 때는 판단을 중지할 것이다. 그로써 그는 결코 착오에 빠지지 않는 대신에, 아주 조금 아는 좁은 세계 속에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의식에는 지성과 더불어 상상력, 정념도 심어져 있어서, 인간은 잘 모르지만 그리고 때로는 틀리게 알지만 그러나 훨씬 더 넓은 세계 속에서 산다. 어느 편이 인간적인가?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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