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언』과 ‘양생’
― 그 정치철학적 양생론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 *이 종 성 -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요 약 문
이 글은 율곡의『노자』주석서인『순언』을 중심으로 ‘양생’에 대한 내용과 입장을 살펴보는데 목표가 있다. 율곡이 보는 ‘양생’의 의미는 ‘생명을 잘 기르는 것’이라고 하는 매우 기본적인 개념정의에 충실하다. 그러나 ‘양생’이 도교 수련적 맥락을 갖는, 일종의 건강을 증진하는 일이라든가 불노장생의 신선술, 또는 위생을 증진하는 일 등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측면은 오히려 율곡에게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율곡은 ‘양생’을 도교적 맥락에서 접근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적 지반인 유가 성리학적 입장에서 접근함으로써 자신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이한다.
율곡에게서 ‘양생’은 일련의 도교적 사유의 틀을 탈각하고 유가의 ‘수양론’적 범주로 설명된다. ‘양생론’이 유가 성리학적 ‘수양론’의 맥락에서 논의된다는 것은 그것이 ‘도덕함양’의 수양론으로 전변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율곡이 생각하는 참된 ‘양생’이란 ‘진실한 덕을 기르는 일’이나 또는 ‘지극한 덕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그리고 양생의 범주는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고 기르는 차원으로부터 ‘하늘을 섬기는 일’에까지 미친다. 그 범주가 인간의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우주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양생’은 일종의 소통력이다. 이러한 소통력을 정치현실에 적용하여야 한다는 것이 율곡의 생각이다. 이에 율곡은 ‘양생’의 맥락을 정치철학적 원리로 수용하면서 특히 군왕의 마음가짐과 통치의 이념으로 제시한다.
군주의 양생은 ‘무위정치’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생론’적 접근은 조선조 유학사에 있어서 매우 특기할 만한 의의가 있다. 대부분 ‘양생론’의 범주를 도외시하고 배척하던 시대적 상황에서조차 율곡은 ‘양생론’의 범주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이를 하나의 철학적 담론의 영역 안에서 적극적으로 논의하였던 것이다. 율곡은 조선성리학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정치철학적 양생론’의 범주를 최초로 제시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잘못될 수 있는 정치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예방적 효과가 있다. 이러한 전통은 율곡 사후에『노자』를 주석했던 박세당, 서명응, 이충익, 홍석주 등에 전승되어 하나의 전통이 된다.
* 주요어: 『순언』, 양생, 수양, 무위, 소통.
1. 율곡은 왜 ‘양생’을 말하는가?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많은 것을 스스로 묻고 대답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 물음에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라든가 자신이 처해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에 대한 고민이 포함된다. 특히 삶과 죽음의 문제 중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존재열망’을 지니고 살아 간다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지위가 높든 낮든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으로서 자신의 삶이 상해를 받지 않고 온전할 수 있기를 희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1)
이러한 문제 때문에라도 전통적 방식의 ‘수양론’의 범주 안에서는 ‘생명’ 또는 ‘삶’2)을 기르고자 하는 방법과 대안들에 대하여 끊임없는 논의가 있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철학적 도가’(Philosophical Taoism)보다는 ‘종교적 도교’(Religious Taoism)3)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생명’에 대한 연장적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출하여 왔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의 문제를 ‘몸’의 담론과 함께 논의의 표면으로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것은 인간의 가장 진솔한 이야기 중의 하나임에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 가장 진솔한 이야기가 오히려 인간존재를 ‘욕망’의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역할에 충실하게 된 것은 그 담론이 지닌 근원적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과 손을 잡은 ‘생명’의 문제는 지나친 ‘몸’ 중심적 논의로 확장되면서 ‘수명을 연장하여 장수하고자 하는’(延命長壽) 꿈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의 눈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자 하는 지성인들에게 이러한 사고와 행위는 바람직하게 비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성리학적 지성의 세계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도교의 ‘섭생’이나 ‘양생’은 전통적으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섭생’ 또는 ‘양생’의 주제로 독해될 수 있는 ꡔ노자ꡕ의 일부 문구들이 율곡의 ꡔ순언ꡕ에서 배제되지 않고 소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율곡은 이를 자신의 언어를 통하여 주해하는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일찍이 율곡의『순언』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홍계희의 입장을 감안한다면, 이는 대단히 특징적인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홍계희는 율곡이『순언』을 저술하는 데 있어서 성리학적 세계관과 마찰을 일으킬만한 문구들은 의도적으로 제외하고『순언』을 편집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4)
우리의 의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율곡이 성리학적 입장과 무관해 보이는 문구들 중에서 특히 ‘섭생’ 또는 ‘양생’과 관련된 논의를 배제하지 않고『순언』안에 편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는 ‘섭생’이나 ‘양생’과 관련하여 율곡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던 것일까?
율곡이 아무런 의도도 없이 ‘섭생’ 또는 ‘양생’의 문제를 거론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율곡의 입장으로 돌아가 그 이유에 대하여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안고 본고는 율곡의『순언』에 나타난 ‘섭생’ 또는 ‘양생’에 대한 입장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하여 율곡이 생각하였던 ‘양생론’의 의의가 구명될 것이며, 또한 유가 성리학적 입장에서도 ‘양생론’의 범주가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담론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밝혀질 것이라 생각한다.
1) 張志聰 집주, 『황제내경집주』, 浙江古籍出版社, 杭州 2002, 『皇帝內經素問集注』, 권4, 「寶命全形論」, 193쪽, “君王衆庶, 盡欲全形” 및 이에 대한 왕빙(王冰)의 주, “貴賤雖殊, 然其寶命一矣. 故好生惡死者, 貴賤之常情也” 참조.
2) ‘생명’이 자연적 질서를 말하는 것임에 비하여 ‘삶’은 사회적 질서와 긴밀하게 연대한다. 그런데 인간의 사회적 ‘삶’이라는 것도 기본적인 ‘생명’의 유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생명’은 보다 본질적인 개념에 해당한다.
3) 크릴(Herrlee G. Creel)은 ‘철학적 도가’와 ‘종교적 도교’를 양분하여 논의하면서 ‘종교적 도교’를 특히 ‘선도교(仙道敎)’(Hsien Taoism)라고 명명한다. Herrlee G. Creel, What is Taoism? and Other Studies in Chinese Cultural History, The Univ.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1970, 23-24쪽 참조.
4)『순언』(규장각본 도서번호 7743), 홍계희 발문,
“啓禧攷夲文, 盖去其反經悖理者五之三尒, 其取者, 誠不害乎謂之醇也” 참조.
2. ‘양생’에 대한 기본 관점
가. ‘양생’에 대한 부정과 긍정
사전적 정의에 따른다면, ‘양생’이란 개념은 ‘생명을 기르다’라는 의미가 있다. 장수를 보존하는 것, 건강의 증진을 도모하는 것, 위생에 힘을 다하는 것, 또는 그 방법이 ‘양생’이며, 이는 ‘섭생(攝生)’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5) 이는 또한 ‘섭양(攝養)’⋅‘양수(養壽)’ 등의 개념과 함께 사용된다. 이 것은 주로 의학, 영양학, 기공술, 도인술 등의 분야와 연관된다. 따라서 ‘양생’은 주로 ‘도가적 수련’을 가리킨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중국의 서민들은 공자의 가르침인 ‘인’과 ‘의’보다는 편안하게 늙지 않고 오랫동안 사는 불로장생만이 더 없는 행복으로 생각하고 그 행복을 찾아 무엇인가에 의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원시도교에 연결되어 훨씬 토속적이고 보다 대중에 밀착되어 있었다.
불로장생의 길은 노자⋅장자의 가르침에 의탁하여 설명되었고, 다시 도교에 의하여 신선설이 세워졌다. 이것의 실질적인 방법을 노자는 ‘섭생’, 장자는 ‘양생’이라 하였다.6) ‘섭생’과 ‘양생’은 『노자』와 『장자』에 각각 나타나는 용어이며, 그 의미는 유사하게 사용된다. 여기서는 ‘섭생’을 ‘양생’의 범주 안에 포함하고 함께 논의하기로 한다.
5) 諸橋轍次, 『大漢和辭典』(12), 大修館書店, 東京 1986, 397쪽 참조. 그런데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에 따르면, ‘양생론’이라는 개념은 생명을 기르고 장수하는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위진 시대 혜강(嵇康)의 문장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혜강의 「양생론」은 『문선』 제53권에 실려 있다(諸橋轍次, 같은 책, 같은 곳 참조).
6) 『두산세계대백과사전』(18), 두산동아, 서울 2002, 238쪽 참조.
전통적으로 ‘양생’이란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하여 오래 살기를 꾀하는 것’으로서 유가보다는 주로 도가 또는 도교와 관련된 개념으로 더 많이 애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7) 그리고 이러한 ‘양생’에 대한 태
도는 주어진 생명을 온전하게 유지하여 건강하게 하고자 하는 현실적 방안과 함께 영원한 삶을 꿈꾸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 방안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율곡은 이러한 두 가지 태도를 모두 부정하는 극단론자의 입장에 서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가의 교양인답게 실현 불가능한 영원한 삶을 희구하는 입장을 모색하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노자』에 나타난 ‘양생’의 극치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은 ‘갓난아이’(赤子)와 같으니,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가 해치지 않으며 사나운 새가 낚아채지 않는다.”8)
이것은『노자』제55장의 말로서 율곡은 이를 『순언』 제23장의 내용으로 편집하였다.
‘양생’의 과정이나 방법 등에 대해서는 거론된 것이 없지만, 그 결과만큼은 대단히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매력은 일종의 신비주의적 형태를 띠고 나타나 있다. 우리는 노자의 언어를 사실적인 것이 아니면
비유적인 것으로 수용한다. 이 경우 노자의 언명은 사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비유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받아들이는 태도나 방식은 관점에 따라 여전히 이중적이다. 노자의 신비주의적 언명을 사실판단으로 믿어버리는 경우라면 이성의 범주를 초월하여 그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과 또한 거기에 도달하겠다는 신념의 체계를 확고히 갖게 된다.
그러나 이성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언명은 하나의 비유로 독해되고, 이성의 힘은 그 비유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언어의 진정성을 만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노자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철학적 도가’나 ‘종교적 도교’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종교적 도교’에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하는 율곡에게서‘신비주의적 양생’의 형태는 하나의 비유로 독해될 뿐이다.9)
7) 물론 유가의 전적에 ‘양생’이라는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다.『맹자』에는 “산 사람을 봉양하는 것은 큰일을 당하는 것만 못하고, 오직 죽은 이를 장사지내야만 큰일을 당했다고 할 만하다 (『맹자』, 「이루 하」, 養生者, 不足以當大事, 惟送死, 可以當大事)”라고 하여 ‘산 사람을 봉양하는 것’이 ‘양생’임을 밝히고 있다.
이때 ‘산 사람’이란 ‘부모’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양생’은 부모를 잘 봉양하는 행위가 된다. 맹자의 이 말은 ‘양생송사(養生送死)’라는 말로 압축되어 『예기』와 『춘추번로』등에 나타난다.『예기』, 「예운」, “所以養生送死, 事鬼神之大端也” 및 동중서,『춘추번로』, 「五行之義」, “厚養生而謹送終, 就天之制也” 참조.
율곡이 ‘양생’에 대한 도교적 접근보다는 차라리 맹자적 접근에 충실하였을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면, 맹자의 사유는 율곡 ‘양생론’의 선진 유학적 연원을 이루게 된다.
8) 『순언』제23장, “含德之厚 比於赤子ㅣ니 毒蟲이 不螫하며 猛獸ㅣ 不據하며 攫鳥不搏하나니라”.
9) ‘철학적 도가’나 ‘종교적 도교’의 차이점은 사상사적 맥락으로부터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며 그 근원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적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이 두 가지 사유는 분명 명확한 경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율곡과 같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성리학과의 관계에 있어서 상호 ‘소통’과 ‘불소통’의 거리감을 갖는 문맥으로 독해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경계를 희석시켜 논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율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은 진실하고 전일하며 거짓됨이 없으니 갓난아이의 마음과 같다.”10)
이 말에서 기존의 신비주의적 분위기는 찾아지지 않는다. 율곡은 ‘지극한 덕’이 갖추어진 상황이야말로 ‘양생’의 도를 이룬 것이라고 본다. 그 상황은 진실하고 전일하며 한 치의 거짓됨이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양생’의 도와 관련된 문맥에서 율곡은 노자처럼 ‘갓난아이’의 비유를 든다.
이것은 노자의 인간관에서 또 다른 ‘어린아이’의 비유로 등장하고 있는 ‘영아’11)라는 개념보다는 더 유가적 입장에 가까운 친화력을 보인다는 판단에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맹자 역시 ‘갓난아이’의 비유를 들어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달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12) 맹자의 성선설적 입장을 고수하는 율곡에게 있어서 ‘갓난아이’의 비유는 노자와 유가의 철학사상이 서로 접목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처럼 비쳐졌을 것이다.
그런데『노자』나『순언』에서 이상적 인간상의 대명사로 상정되는 ‘성인’과 비교해볼 때 ‘갓난아이’의 비유는 매우 역설적인 것임에 틀림없다.그것은 시간적 시점 자체를 과거로 되돌리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로 돌아간다는 행위는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러한 논의는 형식논리의 틀을 벗어나 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갓난아이’로 돌아간다는 역설은13) 인간이 지닌 현재의 특수성을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시키는 논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성인’이 주로 정치철학적 문맥에서 논의된다면, ‘갓난아이’의 비유는 ‘수양론’ 또는 ‘양생론’적 문맥에서 논의되며 일상인의 범주까지 포용하기 때문이다.
10)『순언』제23장 주, “含懷至德之人, 誠一無僞, 如赤子之心也.”.
11)『노자』에서 ‘영아’의 개념은 제10장, 제20장, 제28장의 세 곳에서 발견되며, ‘적자’는 제55장에서 한 차례 등장할 뿐이다.
12) 『맹자』, 「이루 하」,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참조.
13)『노자』제28장은 ‘되돌아감’에 대한 논리를 전개한다. ‘영아로 되돌아가고’(復歸於嬰兒), ‘무극으로 되돌아가며’(復歸於無極), ‘통나무로 되돌아간다’(復歸於樸)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영아’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무극’이나 ‘통나무’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에 충실한 것일 뿐 성인의 신체와 정신을 모두 ‘영아’로 되돌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갓난아이’나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본래의 모습은 도를 일탈하지 않은 모습, 도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것은 다시 ‘어린아이’ 자체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大賓晧, 『老子の哲學』, 勁草書房, 東京 1983, 203쪽 참조). 한 번 어른이 된사람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율곡은 동사정의 말을 인용하여 “천성이 온전한 사람은 외물이 해칠 일이 없다”고 한다.14) ‘천성이 온전한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은 사람이다.
‘천성을 온전히 한 사람’이란 ‘본연한 성품’을 간직한 사람이며, ‘선’의 범주에 놓여있는 사람이다.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다’고 하였듯이 ‘천성이 온전한 사람’은 적이 없다. 이것을 율곡은 ‘외물이 해칠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독충’과 ‘맹수’와 ‘맹금’은 ‘양생’의 측면에 있어서 일종의 ‘외물’이다. 이러한 ‘외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며, 또한 율곡의 입장이기도 하다. ‘갓난아이’는 ‘외물’의 가장 반대편에 존재하는 이상적 인간상인 것이다. 이러한 문맥으로 본다면, ‘갓난아이’의 비유는 ‘최초의 덕’ 또는 성리학적 입장의 ‘선’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15) 따라서 ‘갓난아이’는 되돌아가야 할 목표가 된다.
그 되돌아감의 목표와 과정 등에 대한 철학적 담론은 바로 ‘양생론’적 범주에 해당한다. 물론 ‘양생론’이라는 개념 자체에 거부감을 지닐 수 있는 유가의 입장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양생론’은 ‘수양론’이라는 범주로 환치되어 논의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다른 선배 유학자들처럼 ‘양생’의 도에 관하여 배척적으로만 대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율곡의 입장은 노자가 장생을 구하는 것을 ‘삶을 탐하는 것’이며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정도전(三峯 鄭道傳: 1342-1398)이나 권근(陽村 權近: 1352-1409)과 같은 위도파(衛道波) 유학자들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16) 노자를 비판하는데 선봉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던 정도전과 권근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노자는 기운의 세계를 주로 하면서 ‘양생’으로 도를 삼았다.”17)
“노자가 기필코 장생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을 탐하였기 때문이다.”18)
“사람이 죽을 만하면 죽는 것은 의로움이 몸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의롭지 않고서도 오래만 사는 것은 거북이나 뱀에 지나지 않는다.”19)
이러한 비판은 노자가 오직 사적 생명만을 탐하였을 뿐이라는 판단으로부터 연유한다. 또한 그것은 유가의 절대적 기준 아래 노자를 종속시키고자한 호교론적 태도에 의하여 노정된 비판적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율곡에 의하여『순언』에는 일정 정도의 ‘양생론’의 범주가 용인된다. 이때의 ‘양생론’은 일반적 의미의 ‘양생론’과는 달리 유가적 도덕을 함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양생론’은 대체로
‘불노장생’의 신설술과 관련이 깊다. 율곡 역시 이 같은 ‘양생론’의 입장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다.20) 노자의 입장이 전적으로 정도전, 권근이 본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면 율곡도 노자의 ‘양생론’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에게 독해된 노자는 적어도 그런 종류의 노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율곡은『순언』을 통하여 두 가지 형태의 ‘양생론’의 의미를 모두 허용하면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양생론’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입장에 선다. 율곡이 긍정하는 ‘양생’은 성리학적 의미의 ‘최초의 덕’ 을 구현해 내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지극한 덕’을 함양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14)『순언』 제23장 주, “董氏曰: 全天之人, 物無害者.”.
15) 이러한 측면은 율곡이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에서『노자』를 독해하는 하나의 전범이 된다.
즉, 노자에게서 돌아가야 할 곳이 ‘최초의 덕’으로 상정되는 자연의 세계라면, 율곡에게 있어서 그것은 ‘선’의 세계이며 당위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세계이다.
16) 김석중, 「「순언」을 통해 본 율곡의 노자이해」, 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83쪽 참조.
17) 정도전,『삼봉집』, ,『한국문집총간』(5),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 권10, 「심기리편」, 권근 주, 469쪽. “老主乎氣, 以養生爲道.”
18) 『삼봉집』, 권10, 「심기리편」, 권근 주, 468쪽. “老氏必欲求長生, 是貪生也.”
19) 『삼봉집』, 권10, 「심기리편」, 468쪽. “可死則死, 義重於身, … 不義而壽, 龜蛇矣哉.”
20) 일찍이 율곡은 자신의 「신선책」에서 ‘불노장생’의 신선술과 같은 종류의 ‘양생론’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율곡은 실제로 불노장생한 사람이나 신선이 된 사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적들은 모두 정도를 벗어난 학설과 근거가 없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율곡전서』,율곡사상연구원 영인본(이하 『전서』라 칭함)(하), 도서출판 대제각, 서울, 1978, 습유 권5, 잡저, 「신선책」, 548쪽.
“長生不老, 久視灰劫者, 實有其人, 則不經之書, 無籍之說, 皆可盡信乎?” 참조.
나. ‘양생’과 소통 혹은 ‘하늘 섬김’의 도리
그렇다면 성리학적 입장에서 옹호될 수 있는 ‘양생’의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순언』은 제23장에 이어 제24장에서도 ‘양생’의 논의를 철학적으로 담론한다. 『순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개 듣자하니 ‘섭생’을 잘하는 자는 육로로 길을 가더라도 외뿔들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전쟁터에 나아가더라도 창상을 입지 않아서 외뿔들소가 뿔로 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으며 무기가 칼날로 벨 곳이 없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 죽음의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21)
21)『순언』 제24장,
“蓋聞호니 善攝生者난 陸行不遇兕虎하며 入軍不被甲兵하야 兕無所投其角하며 虎無所措其爪하며 兵無所容其刃이니 夫何故오 以其無死地니라”.
이것은『노자』제50장의 내용을 원용한 것으로 ꡔ순언ꡕ 제23장에서 인용된 ‘갓난아이’ 의 비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용문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한다면 ‘섭생’이라는 용어가『노자』나『순언』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며, 여기서는 이 말이 ‘양생’이란 말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인용문에 대한 율곡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섭생’을 잘 하는 사람은 생명의 도리를 온전하게 다하므로, 만나는 바가 모두 ‘올바른 하늘의 명령’이니, 반드시 하루아침에 생기는 환란이란 것은 없다.”22)
22)『순언』 제24장 주, “善攝生者, 全盡生理, 故所遇皆正命, 必無一朝之患也.”.
율곡은 ‘생명의 도리’를 온전하게 구현하는 것을 ‘섭생’이라고 본다. 여기에서도 확인되듯이 ‘섭생’(또는 ‘양생’)이란 특이한 음식을 섭취하여 영양을 유지한다든가 기공술이나 도인술 등을 연마하여 건강을 이루어내는 것, 또는 매우 특별한 성행위나 명상체험 같은 것들을 통하여 삶을 기르는 종류의 일상적 의미의 ‘양생’과는 전연 다르다. 그것은 ‘생명의 도리’를 기르는 것이며, ‘올바른 하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율곡은 이러한 측면을 명시적으로 밝힌다.『순언』제24장의 종결부분에서 율곡은『순언』의 제23장과 제24장은 모두 ‘덕’을 완전하게 하는 효과를 거듭 설명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바로 이어서 이러한 내용은『순언』제7장에서 말한 바 있는 ‘절제’(嗇)로 ‘하늘을 섬긴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23)
즉, ‘절제’가 바로 ‘양생’이다. ‘하늘을 섬기는 것’ 또한 ‘양생’이다. 전자는 사람의 일을 단속하는 것이며, 후자는 하늘의 이치에 동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장생(양생)의 도’를 ‘하늘 섬김의 도리’로 파악한『노자』제59장의 정신을 반영한다.24)
23)『순언』제24장 종결부분, “右第二十四章. 與前章, 皆申言全德之效. 七章所謂嗇以事天者, 其義止此.”.
24)『노자』제59장, “治人事天, 莫若嗇. … 長生久視之道” 참조.
율곡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사유는 유가와 도가가 공통적이다. 특히, 맹자는 이 같은 사유의 유가적 기원이 된다.
맹자는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25)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자신을 다스리고 타인을 다스리는 것은 모두 ‘절제’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절제’란 마음을 아끼고 거두어들이는 것이며, 탐내고 욕심 부리는 것을 막고 정신을 기르며 말을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의 측면에서 논의되는 ‘절제’의 덕목들이다.
또한 법도를 조심스럽게 시행하고 명령을 간략하게 하여 번거로운 조목을 줄이고 사치와 낭비를 없앰으로써 삼가 일하면서 언제나 타인을 사랑하여야 한다. 이것은 타인의 배려라는 측면에서 논의되는 ‘절제’의 덕목들이다.26)
이때 ‘절제’라고 하는 말을 ‘양생’이란 용어로 대치하여 본다면, 양생은 대자, 대타적인 분야에 걸쳐 모두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5)『맹자』, 「진심 상」,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26)『순언』제7장 주,
“董氏曰: 嗇, 乃嗇省精神, 而有歛藏貞固之意. 學者久於其道, 則心廣氣充, 而有以達乎天德之全矣.
愚按事天是自治也. 孟子曰: 存其心養其性, 所以事天也, 言自治治人, 皆當以嗇爲道.
嗇是愛惜收歛之意. 以自治言, 則防嗜慾養精神, 愼言語節飮食, 居敬行簡之類, 是嗇也. 以治人言,
則謹法度簡號令, 省繁科去浮費, 敬事愛人之類, 是嗇也” 참조.
율곡에게 있어서 ‘양생’은 부정적 논리와 긍정적 논리의 양면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것은 수렴의 논리인 동시에 확산의 논리이기도 하다. 자기를 절제한다는 측면에서는 부정의 논리가 작동하는가 하면, ‘타인에의 배
려’라든가 ‘하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자아의 확충’을 통한 긍정의 논리가 작용한다. 요컨대 ‘양생’이란 ‘버리는 것’임과 동시에 ‘기르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잘못된 지식과 욕망을 버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연의 본성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지식은 욕망의 세계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양생’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로 작용한
다. 이 가운데에서 더 근원적인 것은 물론 ‘욕망’이다. 특히 우리가 작동시키는 모든 ‘욕망’의 근저에는 ‘존재에 대한 열망’이 있고, 이것을 뿌리로하여 확장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욕망’은 언제나 자아 중심적이다.
자아 중심적인 욕망의 극단적 전개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그만큼 빨리 소멸하게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것은 제어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27)
그래서 율곡은 맹자처럼 ‘본성에서 벗어난 마음’을 구하라고 한다.28) ‘마음’은 지식과 욕망이 분출하는 근저이기 때문에 만일 이것이 ‘처음의 덕’을 상실한다면 인간의 생명은 그만큼 빠르게 소멸해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율곡은 ‘마음’을 바로 세우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양생’의 바른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맹자는 일찍이 몸의 감각만을 좇는 무리를 ‘소인’이라 규정한 반면 ‘마음’을 좇는 사람을 ‘대인’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29) 따라서 ‘마음의 양생’은 ‘대인’(또는 군자)으로 가는 길이며, ‘대인’이 가는 길이기도 하다.
27) 박원재, 「도가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연구 ― ‘자아의 완성’을 중심으로」,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6, 114쪽 참조.
28)『순언』 제11장 주, “萬物皆備於我, 豈待他求哉? 求其放心, 則可以見道矣.”.
맹자는 “어짊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로움은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 그런데도 그 길을 버리고 가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도 구할 줄 모르니, 애처롭다! 사람이 닭이나 개를 잃으면 찾을 줄 알면서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찾을 줄 모른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맹자』, 「고자 상」, “仁, 人心也. 義, 人路也. 舍其路而不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고 하여 ‘본성에서 벗어난 마음’을 찾는 일을 학문의 제일가는 과제로 삼았다.
29)『맹자』, 「고자 상」, “養其小者爲小人, 養其大者爲大人.”.
‘소인’이 몸을 좇는 욕망 중에서 생명을 도모하는 일만큼 자아 중심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노자는 이러한 욕망이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고 일침을 놓는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도모하는 것은 ‘상서롭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상서롭다’라고 하는 것은 ‘길상’인 동시에 ‘재앙’이기 때문에 ‘상서로운 것’이며 또한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생명을 도모하는 일’이 일상인들에게는 ‘길상스럽다’고 여겨지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재앙이 되는 것’이다. 이를 나타내기 위해 노자가 일부러 ‘상서롭다’고 한 것이라 여겨진다.31)
아무튼 이러한 이중의 문맥을 갖추고 있는 ‘상서로움’의 역설은『순언』제23장에서 논의한 ‘양생’의 이야기 다음에 나와야 할 대목이다.『노자』제55장이 『순언』제23장으로 편집되었음에도 불구하고,『노자』제55장의 후반부의 문구들은 편집되지 않았기에 이 내용은『순언』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적적으로 생명을 도모하고자하는 욕망은 여전히 ‘양생’의 최대 장애물이다. 생명에의 집착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30)『노자』제55장, “益生曰祥” 참조.
31) 김형효,『사유하는 도덕경』, 소나무, 서울 2004, 414쪽 참조.
그래서『순언』제24장의 본문 마지막 구절은 ‘죽음의 영역을 벗어난 것’에 관하여 이야기한다.32) 사람들은 살려고 나와서 죽음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33)
‘생명을 좇는 자’나 ‘죽음을 좇는 자’는 모두 ‘양생’을 그르치는 자들이다. 본성에는 본디 생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취득하고 생명을 보양하는 자는 지나치게 생명에 대한 애착이 두텁다. 이런 무리가 ‘생명을 좇는 무리’이다.
또한 물질적인 감각에 취해서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자가 있다. 이러한 자들은 ‘죽음을 좇는 무리’이다. 그리고 일을 지을 줄만 알지 쉴 줄을 모르고, 말할 줄만 알지 침묵할 줄 모르고, 생각할 줄만 알지 잊을 줄을 모르는 자가 있다. 이러한 자들은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무리’이다.
이것은 소철(蘇轍: 1039-1112)의 주해를 빌어 김형효가 현대적으로 풀어낸 말이다.34) 그런데 이 말은『순언』제24장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 이것은『노자』제50장 전반부의 문구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순언』제24장은 이 내용을 제외하고『노자』제50장의 후반부 문구만으로 편집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밀착관계가 있다.
결국 일상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는 근원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순언』의 입장이다. 그래서 율곡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라고 한다.
32)『순언』제24장, “以其無死地니라”.
33)『노자』제50장, “出生入死.”.
34) 김형효, 앞의 책, 387쪽 참조.
『순언』에서는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성취한 이가 곧 ‘성현’이다. 성현은 생명의 도리를 온전하게 잘 발휘한 경우이다. 성현이 그러함은 하늘이 부여해준 본심과 덕성을 가장 잘 보존하고 길러 간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덕성은 하늘의 도와도 일치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받은 생명도 가장 잘 길러갈 수 있는 것이다.35)
그렇다고 ‘성현’에게 삶과 죽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성현’도 해를 당하거나 요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순언』은 ‘성현’이 되고서도 왜 해를 당하고 요사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그것은 율곡이 답변을 준비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을 장황하게 개진할 만큼『순언』의 여백이 여유롭지 못하였던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된다.36) 율곡은 간결한 주해방식을 통해『순언』을 저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순언』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과는 서로 상충하는 것이라는 판단에서였고, 율곡의 말을 빌린다면 그것이 ‘한가로운 담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7)
35) 김석중, 앞의 논문, 82쪽.
36) 김석중, 앞의 논문, 82쪽 참조.
37)『순언』제24장 주, “善攝生者, 全盡生理, 故所遇皆正命, 必無一朝之患也. 或疑聖賢亦有未免禍患者, 曰: 此只言其理而已, 若或然之變, 則有未暇論也” 참조.
『순언』에는 이와 관련된 설명이 생략되어 있지만, 이에 대한 답변은 일찍이 율곡이 지은 「수요책」에 제시된 바 있다. 「수요책」에는 인간의 ‘장수와 요절’에 대한 내용과 그 원인 등이 소개되어 있다.
율곡은 ‘장수와 요절’의 원인이 ‘기질의 후박’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안연과 같은 성현이 요절할 수 있는 반면 도척 같은 악인이 장수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이 박하더라도 배양의 공효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한다.
만일 요절한 안연이 도척과 같은 행위로 자신의 몸을 해쳤다면 안연은 자신의 박약한 기질을 해쳐 30세도 못살고 더 일찍 요사하였을지 모른다고 한다.
따라서 삶과 죽음이 ‘하늘의 명령’과도 같아서 인간의 욕망으로는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이 타고난 기질을 수양하는 것만큼은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38)
“무릇 몸을 닦아 ‘하늘의 명령’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치로 기질을 기르는 사람이요,
‘섭생’을 해서 장수하기를 구하는 사람은 기운으로써 기질을 기르는 사람이다.
이치로써 기질을 기르면 장수를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장수를 얻을 수 있고, 기운으로써 기질을 기르면 비록 장수를 얻을지라도 혹시 이치에 해로울 수 있다.”39)
이는 유가적 ‘수양’이 ‘섭생’보다 더욱 가치 있는 ‘양생’의 방법임을 시사한다. 또한 이처럼 이치로써 기질을 기르면 구하지 않아도 장수를 얻을수 있다는 것은 ‘생명을 잘 길러나감’을 ‘완전한 덕성의 효용’으로 본『순언』의 주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40)
율곡은 ‘양생’을 ‘장생술적인 것’과 ‘덕성의 효용’이라는 차원에서 서로 차별화한다. ‘섭생’이 전자와 같은 것이라면 이는 한계가 있을 것이지만, 만일 ‘섭생’의 의미가 후자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생명을 잘 기른다’는 함의를 갖춘 ‘양생’이나 유가적 ‘수양’의 의미와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다. ‘섭생’이 극단적으로 죽음의 영역을 외면하고자 할 때 삶은 자신의 고유한 생명의 가치를 상실한다.
38)『전서』(하), 습유 권5, 잡저2, 「수요책」, 558쪽,
“人之受氣之淸者, 善則善矣, 淸者未必厚, 則仁者, 不可必其壽也.
受其之濁者, 惡則惡矣, 濁者未必薄, 則不仁者, 不可必其夭也.
顔子之夭, 盜蹠之壽, 又何疑哉?
… 如以顔子之氣, 有盜蹠之行, 氣本薄矣, 又從而戕之, 則安知其不至於三十而死也” 참조.
39)『전서』(하), 습유 권5, 잡저2, 「수요책」, 558-559쪽,
“夫修身而俟命者, 以理養氣者也.
攝生而求壽者, 以氣養氣者也.
以理養氣, 則未嘗求壽而自得其壽, 以氣養氣, 則雖得其壽, 而或妨於理.”.
40) 김석중, 앞의 논문, 83쪽 참조.
삶과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동일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결탁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삶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전연 다르다. ‘욕망’을 버릴 때
그것은 잘못된 마음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잘못된 마음을 버린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자아 중심적인 방식으로 대면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온전한 마음을 기른다’는 것은 하늘의 도리에 따라 하늘의 질서를섬긴다는 의미가 있다. 일찍이 주자도 ‘기른다’는 것의 의미를 ‘따르고 해치지 않는 것’41)이라고 규정한 바 있듯이, ‘양생’이란 인간과 하늘의 긴밀한 관계맺음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율곡 역시 마음의 질서를 하늘의 세계로 옮겨 놓는다. ‘양생’에도 ‘마음의 형이상학’이 구축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 섬김이란 인간 안에 하늘을 가져와 안는다는 의미가 있으며, 하늘과 인간이 하나로 소통한다는 의미가 있다. 율곡은 ‘양생’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본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기존의 모든 ‘불소통적 관계’를 ‘소통의 관계’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양생’이 매개체가 된다는 것은 이제 정치철학적 측면에서도 ‘양생’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41) 주희, 『사서장구집주』, 중화서국, 북경 2001, 『맹자집주』, 「진심 상」, 349쪽,
“養, 謂順而不害.”. 이러한 정신을 감안한다면, 율곡이 생각하는 ‘양생’이란 몸을 훼손하지 않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모 섬김’의 도리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을 섬긴다’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또한 하늘과 땅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장횡거(張橫渠: 1020-1077)의 주장처럼 ‘건곤천지(乾坤天地)’를 부모처럼 섬겨야 하는 데, ‘천지부모를 섬기는 행위’ 역시 ‘양생’의 도리이다. 그런데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이와 관련된 맹자의 사유형태에 관해서는 채인후의 『공맹순철학』, 학생서국, 대북 1994, 230쪽을 참조하라.
3. ‘양생’에 대한 정치철학적 입장
가. ‘양생’의 정치철학적 맥락과 ‘군왕’
‘양생’의 의미가 ‘생명을 온전히 하는 것’ 또는 ‘생명을 온전하게 잘 기르는 것’이라고 할 때 ‘양생’이란 말만큼 정치철학적 담론에 효과적으로 적용될 개념도 달리 없을 것이다.42)
‘생명을 잘 기르는 정치’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정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개
인의 개체적 삶만을 온전하게 보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양생’이 하늘에 미치는 것처럼 그 범위는 전우주적이다.
우주자연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근원적인 원초적 기운의 질서로 연대되어 있다. 또한 그것의 분화를 통하여 나타난 음과 양의 질서를 비롯한 다섯 가지 기운의 질서도 인간의 생명과 긴밀한 유대력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질서가 잘 유지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생명현상은 균형된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극단적 교란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는 개인과 사회, 국가 등의 범주에 모두 적용된다. 사실 우주자연
과 국가정치가 ‘양생’의 논의와 접합될 수 있다는 연관성에 대해서는 일찍이 하상공(河上公)이 자신의 노자관을 빌어 논의한 바 있다.43)
물론『순언』에서 ‘양생’에 관한 하상공적 사유와 직접적으로 일치될만한 요소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유의 내용은 비록 다른 것일지라도『순언』역시 우주자연과 국가정치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면서 ‘양생’을 논의한 사유의 흔적들은 얼마든지 발견된다. 이러한 연관성의 토대는 주로 유가 형이상학적인 것이며 성리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의 자연력은 하상공과는 달리 유가 성리학적 입장에서 윤리ㆍ도덕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 논의된다는 특징이 있다.
42) ‘양생’은 실존적 맥락이나 우주론적(또는 존재론적) 맥락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적인 맥락에서도 논의가 가능한 넓은 외연적 의미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실존적 생명과 자연세계의 생명을 온전하게 지키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길러나가는 모든 실천적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양생’은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생명과 관련하여 담론화되는 일체의 내용에 모두 적용된다.
43) 잘 알려진 것처럼 하상공『노자』주석의 특징은 ‘양생론’이라는 기조 위에 놓여있다. 하상공은 인간의 몸과 우주자연의 몸의 구조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몸’과 ‘국가’가 동일한 구조 위에 놓여 있다는 ‘국신동일론(國身同一論)’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그의 철학적 의의가 복권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의『노자』주석은 별다른 조명을 받아오지 못하였다. 특히 그는 성리학적 견해를 가진 유가적 교양인들에게는 더 심하게 단순한 도교적 전통의 ‘양생론자’로 치부되어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조차 기피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이러한 ‘양생론’은 보다 구체적인 현실문제의 해법으로서 정치철학적 측면으로의 전회를 목표로 논의된다. 세상에는 모든 ‘불소통적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양생’의 도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ꡔ순언ꡕ에 나타난 정치철학적 문맥은 ‘수양론’ 또는 ‘양생론’적 맥락과 서로 무관하지 않다. 율곡은 기존 ‘양생론’의 범주 안에서 불노장생의 ‘신선술’이나 ‘도인술’, ‘기공술’ 등의 도교적 요소들을 모두 소거시켜 배제함으로써44) ‘생명을 잘 기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바로 ‘양생론’이라고 여긴다. 율곡에게서 도가적 개념에 가까운 ‘양생론’의 개념은 별다른 거부감이나 마찰 없이 성리학적 학문의 범주 안에 수용될 수 있는 성격으로 전환되어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수양론’의 한 형태를 나타내는 별칭적 성격을 띠기에 이른다.
44) 이러한 측면이야말로 율곡이 노자를 유가 성리학적 방식의 틀로 독해하는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율곡은 기존의 철학적 범주의 적용 범위까지도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재정립하여 논의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양생론’의 의미를 성리학적 이성의 기준틀을 적용하여 철저히 여과시킨 후 노자의 ‘양생론’이 유가 철학적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자신의 결론을 도출해 낸다. 성리학적 이성에 의하여 여과된 것과 여과되지 못한 것의 분열의 경계는 명확하다. 이러한 측면은 유가적 시각에서 본다면 대단히 창의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혹은 그 창의적이라는 것이 도리어 진실을 호도하는 결과를 남길 수는 없는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이러한 점은 일찍이 송익필(龜峯 宋翼弼: 1534-1599)이 걱정하였던『순언』비평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것은 노자의 본지가 아니다. 그것은 구차하게 유가의 입장에서 동일성을 찾고자 한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이 같은 송익필의 비평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순언』 종결부분, 홍계희 발문,
“當先生之編此也, 龜峯宋先生止之曰: 非老子之本旨, 有苟同之嫌. 其言亦直截可喜” 및 『구봉집』, 『한국문집총간』(42),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 권4, 「玄繩篇 上」, <與叔獻書>, 450쪽,
“見兄新編諄言一帙. … 失老子本旨, 而於吾道. 亦有苟同之嫌, 註又牽合” 참조.
자기 수양이 전제되지 않는 정치의 행위란 무의미하다. 자기 수양과 정치의 행위는 별개의 것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가 철학에서는 ‘수기(修己)’의 범주와 ‘치인(治人)’의 범주를 무관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때 ‘수기’의 영역 안에는 ‘수양론’ 또는 ‘양생론’의 범주가 동시에 적용 가능하다. 그리고 ‘수기’는 단순한 자기 수양에만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수기’의 자기 확장력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 타자에게로 무한하게 펼
쳐져 나아가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순언』제26장에 잘 드러나있다.
“자신의 몸을 닦음에 그 덕이 진실하면 집안을 닦음에 덕이 넉넉해지고, 마을을 닦음에 덕이 장대해지고, 나라를 닦음에 덕이 풍요로워지고, 천하를 닦음에 덕이 넓어진다.”45)
이것은『노자』 제54장의 문구를 원용한 것인데, 율곡은 이에 대해 다음처럼 주해하였다.
“‘진실하다’는 것은 ‘성실하고 함부로 함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진실한 이치로 자신을 닦고 여력을 미루어 타인을 다스리니, 집안과 국가와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을 따름이다.”46)
즉, 자신의 ‘양생’이나 ‘수신’의 전제 없이 바람직한 정치의 구현은 없다. 물론 이때의 ‘양생’이란 ‘지극한 덕’, 또는 ‘진실한 덕’을 함양한다는 함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45)『순언』제26장,
“修之身애 其德乃眞이면 修之家애 其德乃餘하고 修之鄕애 其德乃長하고 修之國애 其德乃豊하고 修之天下애 其德乃普ㅣ니라”.
46)『순언』제26장 주,
“眞者, 誠實無妄之謂也. 以眞實之理, 修身, 推其餘, 以治人, 家國天下, 不外乎是而已.”.
율곡에게서 ‘진실한 덕’이란 ‘성실하고 함부로 함이 없는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할 때 자신의 자아와 집안과 국가, 천하는 모두 하나로 소통된다. 그래서 자신의 자아가 집안이 되기도 하고, 나라가 되기도 하며, 천하가 되기도 한다. 또한 거꾸로 천하가 나라가 되고, 집안이 되고, 자신의 자아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승과 하강의 논리가 가능한 것은 이들의 관계적 구도에서 일방적인 힘의 우열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곡은 일찍이 이를 가리켜 ‘치중화(致中和)의 공효’라고 말한 바 있다.
“치중화의 공효가 한 집안에 그치면 곧 한 집안의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밝은 덕이 한 집안에서 밝을 것이고, 한 나라에 그치면 한 나라의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밝은 덕이 천하에 밝을 것이다.”47)
즉, 개인의 자아와 집안, 나라, 천하가 모두 공통의 생명현상 위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은 타자의 생명과 무관하지 않다. 타자의 생명도 자신의 생명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자아와 타자의 바람직한 관계맺음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말로 이해 가능한 ‘어짊’을 토대로 연결된다. 한 개인의 온전한 사랑이 온 집안의 사랑이 되고, 온 나라의 사랑이 되고, 나아가 온 천하의 사랑이 된다. 사랑은 소통의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생’을 이루는 이상적 모범이 된다.
‘양생’의 주체는 일상의 보편적 인간이 모두 해당될 것임에 분명하다. 인간은 누구나가 하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철학적 문맥에서 볼 때『순언』에서 ‘양생’의 주체는 특히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통치자를 지칭한다. 통치를 담당하고 있는 ‘군왕’은 생명을 온전히 발휘하는 ‘양생’의 도를 터득하여야만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군왕’이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발휘한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이상적인 것이며, 현실적으로는 요청적인 것이다. 그만큼 타자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간존재가 ‘군왕’과 같은 통치자이다. 그에게는 일반 서민에게는 부여되지 않은 강력한 권력과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능이 갖추어져 있다. 더군다나 군왕의 권능은 하늘로부터 부여된다는 믿음이 전제된다면, 군왕과 하늘의 관계야말로 천부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군왕이 ‘하늘을 잘 섬겨야 함’은 우주론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더욱 절실하다.48) 군왕의 ‘양생’은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47)『전서』(상), 「성학집요」 제1, 통설, “致中和之功, 止於一家, 止於一國, 則一國天地位, 萬物育, 而明德, 明於一國, 及於天下, 則天下之天地位, 萬物育, 而明德, 明於天下矣.”.
48) 군왕의 실천적 ‘양생’을 위해서는 우주론적(또는 존재론적) 의미의 배경이 전제되는데, 이 측면에서 유가적 배경설정은 매우 도덕적인 이념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양생’의 기준에 ‘도덕’이 관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우주의 이기적 욕망에 기원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이념적으로 ‘생명을 잘 기른다’는 것에는 우주와 인간의 연결망으로 작동하는 ‘도덕’을 현실화하여 구현한다는 의미가 전제된다.
군왕의 ‘양생’은 수렴과 확산의 양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군왕은 우선 자신의 ‘욕망’을 배제하는 자기 수렴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리고 타자를 배려하는 사랑의 확산에 이바지해야 한다. 따라서 군왕의 ‘양생’은 언제나 자아 중심적인 자신의 ‘몸’의 질서로부터 탈피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몸’은 ‘욕망’을 행사하기 위하여 타인과 타물을 자기화하는 실현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자기화란 자기 소유가 될 수 없는 것
을 자기의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존재의 사유화로 나타난다.
그런데 많은 타자를 자기화하는데 있어서 군왕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주체도 드물다. 군왕은 강력한 주체의 표본이다. 절대왕권이 유지되는 시간과 공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만일 군왕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화하여 천하를 대한다면 천하는 깃털처럼 ‘가벼운 외물’로 변질된다. 그 ‘존재의 가벼움’을 보는 군왕에게서 ‘양생’, 즉 생명을 잘 기르는 일을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만이 지녔다고 여기는 ‘존재의 무거움’이 외물적 ‘존재의 가벼움’을 압박하면서 강력하게 내리누르기 때문이다. 이즈음에 이르면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양분되어 차별화되어버린 존재의 세계는 이미 형평의 질서를 잃었다.
군왕의 강력한 주체는 온갖 권위주의적인 형태의 자아와 연대한다. 이러한 주체는 타자를 균형감 있는 시각으로 바라보지를 못하며, 타자는 그에 의하여 평가절하 된다. 군왕에 의하여 타자의 존재와 생명은 가볍게
취급되고, 때로는 그가 지닌 욕망의 담보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에『순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찌 천자의 신분으로 자기 한 몸 때문에 천하를 가볍게 보겠는가? 군왕이 가볍게 행동하면 신하의 마음을 잃고, 신하가 조급하게 행동하면 군왕의 마음을 잃는다.”49)
이것은『노자』제26장이 인용된 것이다. 율곡은 동사정의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동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귀한 천자는 욕망으로 생기는 사사로움을 마음대로 행하여 천하라는 무거운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군왕이 가볍게 행동하면 신하의 마음을 잃고, 신하가 조급하게 행동하면 군왕의 마음을 잃는다. 가까이 몸에서 취하면 마음으로 군왕을 삼고 기운으로 신하를 삼으니, 가볍게 행동하는 것은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여 기운의 질서를 난폭하게 했기 때문이며,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기운의 질서가 소란을 피워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50)
49)『순언』제20장, “奈何萬乘之主ㅣ 而以身輕天下ㅣ리오 輕則失臣고 躁則失君이니라”.
50)『순언』제20장 주, “董氏曰: 萬乘之尊, 不可縱所欲之私, 而不顧天下之重也. 君輕則失於臣, 臣躁則失於君矣. 近取諸身, 則以心爲君, 以氣爲臣, 輕則心妄動, 而暴其氣, 躁則氣擾亂, 而動其心.”.
율곡은 동사정의 의견에 따라 천하와 백성을 모두 무겁게 대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는 인식에 기초한다.51)
천하와 백성이야말로 군왕의 뿌리이다. 맹자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이어야 하며, 가장 가벼운 존재는 오히려 군왕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52)
이때 ‘무거움’의 비유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군왕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백성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사유의 기저에는 민본적 정치사상이 강하게 관류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맹자의 왕도정치 사상에 강하게 매료되어 있던 율곡에게서 이와 같은 종류의 사유방식은 유가적 사유와 상호 근친적인 것이라 여겨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율곡은 백성을 대하는 군왕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주목한다. 그는 백성의 ‘존재적 무거움’이란 유비를 통하여 백성의 귀중함을 각인시키고, 그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결코 가벼워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잊지 않는다.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경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군왕의 자세는 언제나 신중하여야 한다. 그래서 율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중함은 근본이다. 경솔함은 말단이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53)
특히, 군왕이 백성의 ‘생명을 잘 기르기 위해서’는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고, 백성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며,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신중함을 잃지 않아야만 한다. 신중함은 정치적 ‘양생’에 있어서 뿌리가 되는 것으로, 타인의 ‘양생’을 도모하는 소통의 창구와도 같은 것이다.
51)『순언』제20장, “重爲輕根이오” 참조.
52)『맹자』, 「진심 하」,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53)『순언』제20장 주, “重是本, 輕是末, 不可捨夲而趨末.”.
나. ‘물’의 귀감과 ‘마음의 양생’
노자의 여러 가지 비유 중에서 ‘물’만큼 중요한 소재도 달리 없다. ‘물’은 여성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존재의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울’의 상징어로 대체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물’
은 ‘마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또한 ‘물’의 비유는 마음의 작용과 공능에 관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순언』은 군왕의 마음과 심법을 ‘물’로 비유할 경우가 많다.『노자』를 직접 원용하여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54) 이상적인 군왕은 ‘하류’에 존재하는 물처럼 아래로 내려가 거처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55)
물의 ‘하류’는 물들의 집합점이다. 거기에는 상류로부터 흘러내려온 온갖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 ‘하류’의 물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정치적 군장인 왕은 이러한 곳에서 도리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정치를 담당하는 주체이기 이전에 덕성을 발휘하는 ‘성인’의 품격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데, 탁류 속에서도 자신을 맑힐 수 있는 ‘자기 정화’의 힘이 그에게는 요청된다. 진정한 ‘자기 정화’의 힘은 유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 것은 ‘무위’의 힘이며, 그 힘은 타자의 정화에까지 확장력을 갖는다. 따라서 ‘하류’의 더러운 것들과 함께 거처하면서도 이를 맑힐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요청된다. 마치 진흙 속의 연꽃처럼 ‘하류’에 거처하면서도 스스로는 ‘맑고 고요함’을 유지하고,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하류’의 물을 맑게할 책무가 그에게는 뒤따른다.
54) 『순언』제17장, “上善은 若水하니 水ㅣ 善利萬物하고 又不爭하며 處衆人之所惡ㅣ라 故幾於
道ㅣ니라”.
55) 『순언』제17장,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난 以其善下之라 故能爲百谷王이니 是以聖人은 以言下之하며 以身後之라 是以處上而人不重하며 處前而人不害하며 天下ㅣ 樂推而不厭하나니라”.
율곡은 군왕의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야’ 한다고 본다. ‘맑고 고요함’은 ‘물’의 유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맑고 고요한 물’은 깊다. 그래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이러한 물은 수면의 흔들림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수
면의 흔들림에 가볍게 흔들리는 물은 깊지 않다. 깊이가 깊은 물은 그 행위가 가벼운 법이 없다.
그래서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한 것은 조급한 것의 왕이 된다”56)고 하는 것이다. 깊이가 깊은 물은 수면의 온갖 침전물을 스스로 정화한다. 또한 깊은 물은 심연이 고요하기 때문에 표면에 떠올라 있는 여러 가지 행위에도 흔들림이 없다. 고요한 물은 스스로 침전물을 제거하여 타자를 비친다. 스스로 침전물을 제거하는 것은 물의 중요한 속성이다. 물은 고요할 때 이질적인 물질이 가라앉아 맑고 빈 상태가 된다.57)
“물의 본성은 동요하지 않을 때 맑아지고, 움직이지 않을 때 수평이 된다. 그러나 막혀 흐르지 못할 때는 맑아지지 못한다.”58)
56) 『순언』제20장, “重爲輕根이오 靜爲躁君이라”.
57) 사라 알란, 오만종 옮김, 『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예문서원, 서울 1999, 87-88쪽 참조.
58) 『장자』, 「각의」, “水之性, 不雜則淸, 莫動則平; 鬱閉而不流, 亦不能淸.”.
깊은 물처럼 인간의 마음도 심연이 깊어야 하며, 맑고 고요하여야 한다. 정치현장의 중심부에 서 있는 군왕은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깊고 넓어야 한다. ‘맑고 고요한 마음’은 물의 심연과 같다. 그런데 심연의 물과 표면의 물은 상호 비교된다. 그와 같은 방식에 해당하는 각각의 인간적 마음도 서로 비교된다. 또한 거기에 적용될 수 있는 세계의 존재방식도 상호 대비된다. 그것은 존재의 세계와 욕망의 세계로 양분되는 특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화려한 외물의 볼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초연하게 편안히 처하여야만 한다.59) 그래서 율곡은 다음처럼 말한다.
“비록 화려하고 부귀하게 되더라도 그것에 얽매여 연연하는 마음이 없이 항상 초연하게 물욕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동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려하게 보이는 것은 외물에 달려 있고 편안히 있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오직 외물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한다. 그러므로 돌아다니면서 화려하고 즐거운 것을 보더라도 그것에 얽매이는 일이 없다.”60)
욕망의 세계는 욕망과 욕망, 욕망과 대상의 상호 마찰과 충돌 때문에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그러나 존재의 세계에 이러한 얽힘은 무의미하다. 만일 군왕이 존재의 심연에 동참하지 않고 욕망의 세계에 몸과 마음을 둔다면 세상에는 큰 비극이 따른다. 그러므로 고요함과 신중함을 위주로 하여 외물 때문에 동요되는 법이 없어야 한다. 율곡은 이러한 행위가 또한 ‘절제’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61)
59)『순언』제20장, “雖有榮觀이나 燕處超然하나니라”.
60)『순언』제20장 주, “雖在繁華富貴之中, 而無所係戀, 常超然自得於物欲之外也. 董氏曰: 榮觀在物, 燕處在己, 惟不以物易己. 故遊觀榮樂, 而無所係著也.”.
61)『순언』제20장 종결부분, “右第二十章. 言君子主乎靜重, 而不動於外物, 亦嗇之義也.”.
그런데 인간의 절제력을 무디게 하는 것은 모두 ‘외물’의 속성을 지녔다. 그것은 물의 표면이 바람결에도 움직이는 것처럼 마음을 동요시키는 마력을 지녔다. 그러나 그것은 영속적 생명을 지닌 것들이 아니다. ‘외물’
의 가치는 한시적이고 유한하다. 이러한 측면을 율곡은 “미친 듯이 사납게 부는 바람은 아침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멎으며,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그친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도 오히려 오래갈 수 없거늘 하물며 사람들이 하는 일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62)라고 한『노자』제23장의 문구를 빌어서 설명한다.
사실 이 문구는 대단히 비판적 입장에 서 있는 노자의 정치철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인용문의 문구는 반 자연한 행위를 비유한 것이다. 노자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 문구의 앞에 ‘희언자연(希言自然)’63)이라는 말을 배치하였다. 번잡한 법령의 시행이 많아서 마치 소낙비와 폭풍처럼 백성들에게 몰아친다면, 이는 ‘자연’의 연고에 맞지 않아서 오래 갈 수가 없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광풍과 폭우는 군왕의 폭정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64)
62)『순언』제20장, “飄風不終朝ㅣ오 驟雨不終日이니 天地도 尙不能久이어든 而況於人乎ㅣ따녀”.
63) ‘희언자연’에 대한 해석은 주석가들마다 다르다. 왕필은 이를 형이상학적인 측면으로 풀이하는가 하면, 장석창과 진고응은 정치철학적 문맥으로 독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후자의 입장으로 볼 때 ‘희언’은 정치적 법령을 더하여 시행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이종성, 「노자의 자연관」, 『동서철학연구』 제24호, 한국동서철학회, 2002, 231쪽 참조.
64) 이종성, 앞의 논문, 231-232쪽 참조.
그러나 율곡은 이를 다른 문맥에서 독해한다. 율곡은 동사정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친 듯이 사납게 부는 바람과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바로 음과 양이 부딪쳐 갑자기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에 오래갈 수 없다. 아침부터 정오까지가 아침나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경박하고 조급한 병이 있으면 반드시 급하고 난폭한 행동을 하게 된다. 갑자기 화를 내는 자에게는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되는 것부터 갑자기 부자가 되거나 귀해진 자에게는 반드시 화가 뒤 따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은 모두가 영원한 도가 아니다.”65)
65)『순언』제20장 주, “董氏曰: 狂疾之風, 急暴之雨, 此陰陽擊搏, 忽然之變, 故不能久. 自朝至中, 爲終朝. 愚按, 有輕躁之病, 則必有急暴之行, 暴怒者, 必有後悔, 以至暴富暴貴者, 必有後禍, 皆非長久之道也.”.
율곡은 동사정처럼 자연환경의 변화를 인간의 행위에 적용하고, 이를 경계의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 자연환경의 변화는 하나의 모범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시의 변화가 있듯이 인간의 삶의 양태도 끊임없이 변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정체되어 있는 것에는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다.
정체되어 있는 물은 맑아지지 못하고 썩어버리듯이 정체되어 있는 인간의 의식은 외부의 환경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 정체된 자아의 의식과 대상세계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욕망하는 자아만이 남는다. 그 욕망하는 자아는 율곡이 볼 때 ‘경박증’과 ‘조급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이러한 병에 걸리면 마치 폭풍과 폭우가 몰아치듯 난폭한 행위를 하게 된다고 한다. 갑자기 화를 내는 자라든가, 또는 갑자기 부자가된 사람들,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자들치고 ‘경박증’과 ‘조급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 율곡의 생각이다. 모든 것이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위적이고 반자연한 행위를 수반함으로써 성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경박증’과 ‘조급증’이라는 병으로부터 치유되는 일이야말로 ‘생명을 온전히 하는 일’일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양생’의 방법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순언』은 제20장에 이어 제21장에서도 ‘양생’의 방편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은 ‘경박증’과 ‘조급증’을 벗어날 때 ‘맑고 고요한 상태’가 유지된다고 하는 ‘양생’의 결과에 대한 논의이다. 그것은 제20장의 ‘양생’의 논의를 잇는 것이면서도, ‘양생’의 결과 나타나는 ‘맑고 고요함’의 의의가 일상적인 것과 다르다는 의의를 천명하기 위하여 논의된다.
『순언』제21장 본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은 짧은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조급하게 움직여야 한기를 이기고 가만히 있어야 열기를 이겨 내지만, ‘맑고 고요한 것’이 천하의 바름이 된다.”66)
66)『순언』제21장, “躁勝寒하고 靜勝熱이어니와 淸靜이 爲天下正이니라”.
『노자』제45장의 문구를 원용한 이 문구에 대하여 율곡은 여기서도 동사정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동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움직임’은 ‘양’의 질서에 해당하고, ‘고요함’은 ‘음’의 질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움직여야 한기를 이기고 가만히 있어야 열기를 이겨 내는 것은 모두 한쪽에 치우침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맑고 고요한 것’이란 ‘움직임’과 ‘고요함’이 일치가 된 것이므로 천하의 바름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맑고 고요한 것’이란 고요히 외부의 유혹으로부터 오는 장애가 없어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안정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67)
67)『순언』제21장 주,
“董氏曰: 動屬陽, 靜屬陰. 故躁勝寒, 靜勝熱, 皆未免於一偏也.
淸靜者, 動靜一致, 故爲天下正.
愚按淸靜者, 泊然無外誘之累, 而動靜皆定者也.”.
율곡은『순언』제21장의 종결부분에서 결론적으로 이 말이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제21장이다. 이것은 제20장에 있는 ‘조급함’과 ‘고요함’의 의미를 가지고 ‘맑고 고요한 것’의 바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고요함’에만 치우칠까 걱정이 되어 언급한 것이다.”68)
68)『순언』제21장 종결부분, “右第二十一章. 因上章躁靜之義, 而言淸靜之正, 恐人之偏於靜也.”.
이렇게 본다면, 율곡에게 있어서 ‘맑고 고요함’이라는 ‘양생’의 경지는 ‘맑음’만을 거론코자 논의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고요함’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율곡은 ‘생명을 기르는 행위’에 있어서 ‘고요함’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자칫 불교나 도교 등에서 말하는 ‘허무적멸’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도록 경계한다. 무엇이든지 지나침이 과도하면 미치지 못함만 같지 않다. 그래서 ‘고요함’ 역시 ‘고요함’ 자체에만 일방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율곡에게서 ‘고요함’은 ‘움직임’을 전제로 논의되며, ‘움직임’ 없는 ‘고요함’은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측면이야말로 율곡이 지닌 성리학적 교양이 발동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율곡은 ‘물’의 비유를 들어 군왕의 정치철학적 ‘양생’의 태도에 관하여 담론한다. 그것은 실존적 주체가 지닌 신체적 자아의 ‘양생’에 대한 생물학적 보존과 기름이라는 차원에서보다는 주로 ‘마음의 양생’
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69)
율곡은 ‘몸의 양생’보다 ‘마음의 양생’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몸과 마음을 분절적으로 갈라 극단적으로 맞세우는 심신이원론의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 말은 몸과 마음이 함께 하지만 일상의 관심이 몸에 대한 집착력을 보다 강화하고 있다 보니 불가피하게 마음의 수양이 배제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사유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기도하다. 이미 ‘마음의 형이상학’을 통하여 인간존재와 우주자연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있던 율곡에게서 ‘마음’과 ‘정치’의 문제는 상호 유기적인 맥락적 관계를 긴밀하게 갖추고 등장한다. 그것은 ‘양생’이라는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율곡에게서 ‘마음의 양생’은 ‘정치의 양생’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군왕의 ‘양생’은 마음의 세계와 정치의 현실에 모두 적용되는데, 그 마음이 물을 닮아 물 같은 정치를 이루어내야 한다. 사사로움이 없이, 또한 강고한 주관적 편견이 없이 물처럼 ‘맑고 고요한’ 심연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을 기르는 일’의 제 일보이다. 또한 물처럼 낮은 곳에 임하여 그곳에서 타자까지 ‘맑고 고요하게’ 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기르는 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유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무위’의 효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라야 한다.
69)『순언』제9장은 “몸은 비록 죽었더라도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 자는 장수한 것이다(死而不亡者난 壽ㅣ니라)”라고 하는데, 율곡은 공자나 안연의 예를 들어 이들이 죽은 지가 수천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해와 달처럼 빛나는 것은 이들이 진정으로 장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순언』제9장 주, “孔顔旣歿, 數千載, 而耿光如日月, 豈非壽乎?”).
이러한 내용을 보더라도 율곡은 ‘몸’의 ‘양생’에 대해서보다 ‘마음’의 ‘양생’에 대하여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이 확인된다.
4. 정치철학적 ‘양생론’의 사상사적 의의
현대에 접어들면서 ‘철학적 도가’와 ‘종교적 도교’의 경계를 희석시켜가면서까지 이들의 상호 접점을 찾아 그 동일성을 보고자 하는 일종의 ‘근원주의적 태도’가 학계의 저변에 점차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근원은 분명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 위에 나타나는 ‘도가’와 ‘도교’의 경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진한 시대 이전의 역사적 사실들이 아직도 신비에 싸여 그 정확한 역사성 자체를 알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진한 시대 이후의 ‘도가’와 ‘도교’의 구분은 어느 정도 눈에 잡히는 것들이 있다. 구체적인 ‘도교’의 교단이 등장하는가 하면, 현학자들에 의해 매우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독해되는 ‘도가’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철학적 도가’와 ‘종교적 도교’의 근원과 경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에 대한 논의는 본고의 범주를 넘어선다. 다만, 율곡은『순언』을 저술하면서 ‘철학적 노자’와 ‘종교적 노자’
의 경계를 획정하고, ‘철학적 노자’의 입장에서 그 동안 ‘종교적 노자’에 의하여 가려졌던 ‘노자’의 본모습을 복권시키고자 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만큼은 공감한다. 율곡은 ‘철학적 노자’를 복권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노자』를 독해하였고, 그것을『순언』이라는 주석서로 엮어낸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정신에 가장 부합할만한 주제는 바로 ‘양생론’의 주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노자’를 넘어 ‘철학적 노자’를 만나고자한 율곡이었기 때문에 ‘양생론’에 대한 주제적 접근 역시 ‘철학적 노자’의 얼굴을 닮았다.
왜냐 하면 우리가 ‘양생론’이라고 하면 그것은 대체로 신체적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가지 행위의 비결 정도로 인식할 수 있는데, 율곡은 이러한 측면에서 ‘양생론’을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이유이
다. 또한, ‘양생론’의 개념을 유가 성리학적 측면의 ‘수양론’의 범주와 별다른 차별 없이 동일하게 논의하는 태도가 그 두 번째 이유이다. 대부분 ‘수양’이란 ‘도를 닦고 덕을 기른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자신의 고유한 품성을 닦아 인격을 완성시키기 위한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수양’의 의미이다.
이에 비하여 ‘양생’은 생명의 유지와 장수의 전제조건으로 하는 신체 기능의 보존과 강화의 의미를 지닌다. 요컨대 ‘수양’과 ‘양생’은 모두 무언가를 닦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측면이 발견되지만, ‘수양’은 정신적, 내면적인 것인 반면에 ‘양생’은 신체적, 외면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70)
그러나 율곡의『순언』에 표명된 ‘양생’의 맥락은 전연 이와 같지 않다. ‘양생’도 ‘수양’처럼 신체적, 외면적인 것을 넘어서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은 율곡이 일반적 ‘양생’의 개념으로 ‘양생’을 이해하지 않고, 가장 직절하게 한자의 원의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소박한 의미로 ‘양생’을 독해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순언』에서 ‘양생’이란 ‘생명을 기르는 일’ 이외의 다른 문의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데 일반적인 도가적 전통이 그러하듯이 율곡 역시 ‘양생론’의 적용 주체를 특히 군왕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를 정치철학적으로 논의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 점은 대단히 특기할 만한 일이다. 유가적 교양인인 율곡에게서 ‘양생론’의 범주가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독해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조 사대부들 중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던 일이 율곡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율곡의 독창성이다. 또한 이것은 율곡이 지닌 학문적 개방성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기도 하다. 그 불가능을 전복시켜 가능하게 만든 것은 학문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 것임에 분명하다.
율곡은 조선 성리학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정치철학적 양생론’의 범주를 최초로 제시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율곡 사후에『노자』를 주석했던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 서명응(保晩齋 徐命膺: 1716-1787), 이충익(椒園 李忠翊: 1744-1816), 홍석주(淵泉 洪奭周: 1774-1842) 등에 그대로 전승되어 하나의 전통이 된다.
70) 紫田淸繼, 「修養と養生」, 『中國古代養生思想の總合的硏究』, 平河出版社, 東京 1988, 175-176쪽 참조.
사실 일반적인 맥락에서 이해되는 ‘양생론’은 신체의 건강을 온전히 한다는 의미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특히 현대의 ‘예방의학’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질병의 내적 원인에 초점을 두고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신체를 수련하여 ‘생명을 기르는 행위’가 의학적으로도 보다 근원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예방의학’은 신체 내의 ‘음’적 기운의 질서와 ‘양’적 기운의 질서가 상호 교직하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균형과 불균형의 측면에 관심을 갖는다. 거칠게 말하여 그 질서가 균형을 이룰 때 신체도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질서가 불균형을 이룰 때 건강도 파괴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순언』과 거리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또한 정치철학적 ‘양생론’의 측면에 적용 가능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정치의 세계 역시 그 질서가 파괴되어 병적 현상을 드러내기 이전에, 만일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예방정치’를 구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가 잘못 되기 이전에 그 정치적 잘못을 예방하는 것만큼 철저한 정치철학적 대안도 달리 없을 것이다. 『순언』에 나타난 ‘정치철학적 양생론’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참 고 문 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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