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인간으로 나아가는 길
- 순자의 본성론의 분석
* 이 글은 2007년 1학기 ‘중국고대철학’(담당교수: 장원태) 강좌의 글이다.
차 례
1. 들어가는 글
2. 순자사상의 개괄
2.1. 세계관
2.2. 인간과 자연의 구분
2.3. 인간의 보편성
3. 본성이란 무엇인가
3.1. 본성의 정의
3.2. 본성의 공통적 요소
3.3. 본성의 차별적 요소
3.3.1. 요소의 양적 차이
3.3.2. 요소의 질적 차이
3.3.3. 정과 려의 구분
4. 본성으로 인한 결과
5. 다툼과 혼란의 극복
5.1. 결여의 인식과 갈망
5.2. 극복의 대책으로서의 작위
5.2.1. 차별적 분배
5.2.2. 예의
5.3. 결여 극복의 동기부여
6. 논의 외의 한계
7. 맺는 말
* 참고문헌
1. 들어가는 글
일상의 대부분을 삶에 대한 자각없이 습관적으로 살아가다 보면 잠시 쉬기 위해 멈추었을 때 삶의 진실된 가치에 대해 어리둥절하게 마련이다.
하늘의 구름은 바람을 따라 흘러가고, 길가의 나무는 계절에 따라 푸르름을 달리하는데, 인간은 과연 무엇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옳고 그름을 알고 있는가, 불쌍한 사람을 만나서 도와주고 어른을 만나서 인사하고 아이를 보면 웃어주는 행위는 무엇에 기반하는가, 내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은 과학법칙을 수용하고 체계적인 지식을 수용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인가, 나의 행복을 위해 남을 돕고, 내가 안정된 사회에 속하고 싶은 욕망에 질서를 지키고, 내가 구원받기 위해 사회를 향한 자비를 베풀고, 내가 약자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약자를 보호하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등의 ‘나’ 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는 윤리적 행위양태들. 무너질 수 없는 도덕적 정언명제의 근원을 좇아가 보면 실은 가장 윤리적이라고 여겨졌던 가치들도 인간의 이기심에 기초하는 것은 아닐까.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과연 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잠깐의 자각은 이렇듯 수많은 질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아온다.
끝없고도 답이 없는 문제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커피 한잔을 가지고 TV 앞에 앉아 채널을 뉴스로 돌리고 신문을 펼치면 거기에도 예외없이 기상천외한 범죄와 미증유의 악행으로 가득하다. 매일같이 신문과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들은 경악할 만한 두려운 일 투성이며 그것들을 일일이 살피면 분노와 탄식의 감정이 가슴을 치고 사회의 무서움과 냉혹함에 몸을 떨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는 사건들을 접하다 보면 인간의 신념과 가치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그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지만 사회의 거대화와 조직화의 정도가 첨단으로 치닫는 동시에 급격한 현대화로 인하여 무비판적으로 서구사상이 유입되면서 전통사상이 붕괴되고 사회의 구성원리로서 작용할 확고한 사상적 기초가 자리잡지 못한 상태에서 무분별한 물질자본주의가 가장 커다란 이념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에서는 비윤리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빈도의 곡선이 더욱 가파르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경악할 만한 일들과 두려운 일들을 저지른 사람을 비난하는 나는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을까.
신문에서 눈을 돌려 다시 분석적 사고로 돌아가 보자. 타인을 어떤 점에서 비난하려면 나에게는 그 비난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그 비난이 정당화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기에 B를 비난하는 A와 악행을 저지른 B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A가 악행을 저지른 B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A가 악행을 저지를 동기가 없었다는 것과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비롯한다. 그러므로 만약 A 또한 A를 위한 행동을 하고 B 또한 B를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 것이라면 A가 B를 비판할 근거는 설득력이 미약해진다. 즉 B는 A와 동일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이유로 들어 A의 비난에 대항할 수 있다. 게다가 악행이라는 관념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라면, A가 애초에 B를 비판할 악행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사라지게 된다.
절대성의 상실은 단지 악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의 급격한 변동과 가치관의 혼란으로 그동안 사회의 구성원리로 작동해왔던 절대적 가치들이 점차 빛을 잃고 있다. 윤리와 도덕이 아우르는 수많은 가치의 당위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고 그것들이 현대사회가 수용할 만한 타당하고 명쾌한 논리력을 동반하지 못한 채 점차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개인의 가치관이 혼돈으로 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결국은 사회면을 숱하게 장식하며 난무하는 범죄는, 사회에 대한 개개인의 가치관 혼란의 징표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 대한 고민은 다시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로 수렴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할까. 삶과 가치관에 정답이란 끝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선 시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왔고 해답을 내어놓기 위해 노력해왔다.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생각은 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결여하고서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결과물을 통해 정답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고 그들의 인간에 대한 고뇌의 흔적을 통해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올바른 자아상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는 성악설로 유명한 전국 시대의 학자인 순자의 사상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정리해보고 다시 고민의 지점으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2. 순자사상의 개괄
순자는 이름이 황이며 기원전 323년경 조나라에서 태어났다. 순자가 학문을 닦은 곳은 제나라 직하로, 유가를 비롯해 묵가, 도가, 법가, 명가 등에 속하는 전국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순자의 방대한 학문과 유가경전에 대한 폭넓은 연구는 이로부터 비롯할 것이다.1)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의 혼란기로서 국가 간의 수많은 전쟁과 어지러운 정치, 백성들의 고난은 그에게 현실적인 고뇌를 안겨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순자는 고뇌와 통찰의 결과로서 인간 본성에 대한 성악설의 입장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서 인과 예의를 역설한다.
그가 유학사상에 끼친 영향은 학문에 대해서 최초로 체계화하였다는 점에 있다.
그의 주장은 학문이 성인이 되는 과정이며 범인이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수양과정의 출발선상에서의 평등을 의미하며 그의 주장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동일성과 인성의 평등을 읽어낼 수 있다.2)
그의 사상은 정통적인 유가사상과 비교하여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더욱 명쾌하게 다가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금의 인간관을 조명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순자의 여러 편을 발췌하여 그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순자, 김학주 역,『순자』, 을유문화사, 2001, pp. 9∼10. (『순자』김학주 역은 부분적으로 어색한 해석이 있고 불필요한 용어 확장이나 오타가 보인다. 본문의 인용구문은 오타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옮겨놓았다.)
2) 2007년 1학기 중국고대철학 강의 中,《8》(2007.4.27). (이하 ‘강의’로 줄여서 표기)
2.1. 세계관
순자는 하늘을 바라봄에 있어 정통적인 유가의 맥과 흐름을 달리한다. 공자-맹자로 이어지는 정통적인 유가 사상에서는 하늘이 사람들의 도덕적인 권위의 기초로서 받아들여진다.3) 그러나 순자는 하늘에는 하늘의 법칙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법칙이 있는, 즉 양자를 별개의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재앙이 있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고, 하늘로부터 시혜가 있더라도 인간이 그에 복종하지 않고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은 자연이나 자연법칙, 자연현상을 뜻한다.
역사상 인류의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 이전까지의 오랜 기간동안 인간은 샤머니즘적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자연현상에 생명성을 부여하였다.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 종속되어 있었고 종교와 문화, 사상 등도 자연과 자연의 권위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하여 왔다. 천명을 내세우는 정통적인 유가사상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그에 반론을 제기한다.
3) 순자, p. 13.
2.2. 인간과 자연의 구분
순자가 바라본 인간의 본성적 측면에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인간의 가능성은 불가항력의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극복의 가능성은 자연을 대상화함에서 나아가서 현상과 법칙을 대상화하여 분석함으로써 미신의 현혹됨 등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여 인간 본성과 사회의 구조에 대하여 보다 과학적인 논의를 가능케 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 생각한 순자의 사상은「천론」편에서 반복하여 언급된다.
"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傑亡「天論」
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요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왕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4)"
4) 위의 책, p. 476.
정통 유가사상은 인간이 하늘의 법도를 따르기를 종용했던 데 반해, 순자는 하늘의 법도를 인간의 법도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한다. 성군으로 추앙받는 요임금과 폭군으로 지탄받는 걸임금 모두 하늘의 법도에 순응하거나 역행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법도에서 어긋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법도 또한 인간의 작행으로 인해 시작하거나 종결하지 않는다. 자연의 법도와 인간의 법도가 다르다는 것은 다른 법도가 지배하는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다시 자연과 인간이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따르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자연은 더이상 악한 이에게 화를 내리고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리는 지배적 존재가 아니며, 인간이 그것을 숭배하고 복을 기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초월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다하지 않고 자연에 기대거나 부작위의 책임을 외부로 전이시킬 여지가 많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구분으로 초월적 세계관이 붕괴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능력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하고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구분을 시발점으로 순자에게 있어 유교적 이상향인 군자는 수양의 지향점을 하늘이 아닌 자기 내부로 향하게 된다.
「천론」편에서 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故君子敬其在己者, 而不慕其在天者「天論」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달려있는 것에 힘을 쓰고 하늘에 달려있는 것은 흠모하지 않는다.5)"
5) 순자, p. 485.
자연과 인간의 구분은 비단 개개인의 독립적인 노력의 경주를 유발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에 대해 더욱 폭넓은 고찰의 가능성 열어준다. 그리고 외부의 변화에 흔들림없는 자기 성찰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이상적 인간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의 구분됨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을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故明於天人之分, 則可謂至人矣「天論」
하늘과 사람의 구분에 밝으면 곧 그를 지극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6)"
위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의 구분됨에 밝은 것은 한 인간을 지극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데 수반되는 과정적 요소가 아니라 그를 바로 지극한 사람에 다다르게끔 만든다. 이것은 그 구분함을 순자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연과의 구분을 납득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순자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大天而思之, 孰與物畜而制之! 從天而頌之, 孰與制天命而用之!「天論」
하늘을 위대하게 여기고 그 생성의 힘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과, 물건을 저축하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하늘을 따르면서 그것을 기리는 것과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을 처리하면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7)"
7) 위의 책, p. 491.
하늘로부터 구분된 인간은, 한 나라에 속해 있는 신하가 다른 나라의 왕을 섬길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인간과는 별도로 일정한 법도를 따르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필요가 없음은 앞에서 보았던 바와 같다. 더 나아가 위의 질문을 통해 순자는 인간이 하늘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무지한 인간은 자연현상에 미혹되지만 이상적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써 행동한다. 따라서 순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다.
"唯聖人爲不求知天 「天論」
오직 성인만이 하늘에 대해 알려고 추구하지 않는다.8)"
8) 위의 책, p. 480. 순자의 해당부분 번역은 오타가 있어 정정한다. (原 : 알려고도 추구하지 않는다.)
2.3. 인간의 보편성
관점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돌리자 인간의 속성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자연과 분리된 독립된 주체로서의 인간은 기존의 철학이 상정했던 인간관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 사유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인간 본성론의 가장 기초적인 사실로서 순자는 경험적인 관찰로부터 인간의 보편성에 동의한다. 그리고 호오의 동일함을 발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人之所惡者, 吾亦惡之.「不苟」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나도 역시 싫어한다.9)"
9) 순자, p. 90.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내면과 타인의 내면의 공통성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애초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역시 싫어한다와 같은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凡人有所一同 :飢而欲食, 寒而欲煖, 勞而欲息, 好利而惡害, 是人之所生而有也, 是無待而然者也, 是禹傑之所同也.「榮辱」
모든 사람들은 다 같이 배고프면 먹기를 바라고, 추우면 따뜻하기를 바라고, 피곤하면 쉬기를 바라고, 이익을 좋아하나 해가 되는 것은 싫어한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다.10)"
모든 사람은 이러하다. 인간은 각자의 생김새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고 욕구하는 데에 있어서 모든 인간이 동일하고 그러한 점에 있어서 인간은 보편적이다. 인간의 보편성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인간에게 보편성이 결여되어 각인각색의 특징을 가진다면 인간본성에 대한 고찰은 불가능할 것이다. 거꾸로 생각한다면 사람 사이에서 보편성을 가진 요소는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을 자연과 구분된 존재로 간주하고 인간의 보편성을 긍정한 것은 순자가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다음 장에서는 도출된 인간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본성에 대한 순자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3. 본성이란 무엇인가
3.1. 본성의 정의
모든 논의는 용어의 정의를 필요로 한다. 서로 다른 뜻으로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벌어지는 논의는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순자가「정명」편에서 용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순자가 내리는 본성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生之所以然者, 謂之性, 性之和所生, 精合感應, 不事而自然, 謂之性.「正名」
나면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본성이라 하고, 나면서 조화되어 생겨난 것이 안의 정기와 합쳐지고 밖의 감각과 호응하여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그러한 것 또한 본성이라 한다.11)"
11) 위의 책, p. 630.
위 구문에 따르면 나면서 그렇게 되어 있는 것, 스스로 그러한 것이 본성이다.
다음 구문은 또다른 방식의 본성의 정의이다.
"性者, 本始材朴也「禮論」
사람의 본성이란 시작의 근본이며 소박한 본질이다.12)"
12) 위의 책, p. 561.
나면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시간적으로 인간의 출발점을 뜻하므로 그것은 시작의 근본이라는 말과도 같다. 질료적으로는 무가공의 상태를 말한다. 즉 시간이 흐르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런 작위를 거치지 않은 무엇인가가 본성이다. 연속되는 변화의 시간선상에서 가장 앞선 자리에 위치하는, 아직 변화하지 않은 상태로 인간이 타고난 것들은 모두 본성의 요소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 압축적으로는 작위가 결여된 것이 본성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을까.
※ 교재의 해석 : 본성이란 뿌리이자 시작이고 애초의 자질이자 가공되지 않은 재료이다. (2007년 1학기 중국고대철학 강의자료 Ⅶ, p. 43.)
김학주 역의 해석을 따르면 材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고 朴의 의미가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수수하다는 뜻의 사전적 의미와 혼동될 우려가 있으므로 고전해석의 정확성에 있어서 교재의 해석이 타당하다. 교재의 해석을 따르면 순자에게서 나타나는 性이 시작, 뿌리, 바탕, 질료라고 표현될 수 있으며 질료적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시간적 흐름에서 앞에 위치하는, 즉 처음이나 출발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性이 오늘날의 本性의 쓰임과 다른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논의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김학주 역의 해석을 따르면 性의 의미를 위와 같이 이해하는 것에 무리가 따른다. 본문에서는 순자의 性과 오늘날의 本性의 차이점을 구별하는 논의를 따로 가지지는 못하였으나 본성의 분석에 있어 질료적 의미와 시간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원문을 발췌하였다.
3.2. 본성의 공통적 요소
인간의 본성을 언급하는 순자의 구문들을 살펴보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본성을 정리해보려 한다. 우선 앞에서 인간 보편성의 예로 들었던 구문의 일부분을 다시 보면, 이미 언급했던 호오의 분별은 인간이 보편적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지표이며 동시에 인간의 대표적인 본성이다. 그것은 인간이 나면서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 중 하나이다.
"好利而惡害.「榮辱」
이익을 좋아하나 해가 되는 것은 싫어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작위를 거치지 않은 자연상태로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순자는「정론」편에서 구체적으로 눈과 귀와 입, 코, 몸이 욕구하는 바를 예로 들어 인간의 본성상의 욕망을 부인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然則亦以人之情爲欲目不欲綦色, 耳不欲綦聲, 口不欲綦味, 鼻不欲綦臭, 形不欲綦佚,.
此吾綦者, 亦以人之情爲不欲乎? 曰, 人之情欲是已.「正論」
그렇다면 사람들의 감정은, 눈은 아름다운 색깔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으며, 입은 단 맛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코는 향기로운 냄새를 추구하려 하지 않으며, 몸은 안락함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러한 다섯 가지 오관(五官)의 욕구가 있는데도 사람들의 감정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것은 사람의 감정 속의 욕망인 것이다.13)"
13) 순자, p. 530.
위 구문은 오관의 욕구를 예로 들고 있다. 본문에는 싣지 않았지만 위 구문에 이어지는「정론」편의 해당부분을 참고하면 상과 형벌이 사람들에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을 근본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사실 상을 받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상을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손상을 입지 않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세상에 형벌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욕망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욕망이 있는데도 그것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욕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단지 상과 벌의 제도만을 놓고 생각해보아도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 이렇듯 상과 형벌제도까지 언급하며, 욕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순자의 생각은 확고하다. 본성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갖추고 있다.
결국 순자에 의하면 욕망의 성질은 원래 그 양이 적은데 외부 유혹에 의해 생겨나는 것[욕망부정론]도 아니고, 또한 욕망은 그것을 통제하여 마땅히 줄여나가야만 하는 성질의 것[욕망절제론]도 아니다.14)
그래서 상⋅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전에 언급했다. 이것은 욕망에 대한 순자의 현실주의적 태도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다. 다음 구문은 욕망의 존재를 재확인한다.
14) 강의 中,《8》(2007.4.27).
"有欲無欲, 異類也, 生死也.「正名」
욕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이다. 그것은 나면서 본성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15)"
15) 순자, p. 647, 이 부분 각주에는 生死也가 뒤에 나오는 性之具也 대신 잘못 들어와 있는 말(王念孫)이므로 ‘나면서 본성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을 뜻한다고 씌여 있다.
욕망에 따라 인간은 이익을 좇아 행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인간에게 항상 동일한 성질의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크기의 욕망이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고려해 볼 때 욕망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정명」편에 그에 대한 설명이 있다.
"情者, 性之質也, 欲者, 性之應也.「正名」
감정이란 본성의 실질이며, 욕망이란 감정의 반응이다.16)"
16) 위의 책, p. 648.
위에 따르면 욕망은 외부에 대한 감정으로부터 생겨난다. 감정이란 본성의 실질이므로 인간의 본성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감정은 호오나 희노애락의 감정을 포괄적으로 나타낸다. 기쁜 감정은 대상에 다가서거나 대상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강하게 상승시킬 것이다. 반면에 분노한 감정은 대상으로부터 유리되거나 대상의 근원을 소멸시키려는 욕구를 또한 크게 상승시킬 것이다. 욕망은 감정에 밀착되어 있고 감정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감정은 인간이 나면서부터 그러한 본성적 요소이다.
정리하자면 본성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외부에 대한 감정의 반응으로서 인간 내부에 호오의 분별과 욕망이 일어난다.
"水火有氣而無生, 草木有生而無知, 禽獸有知而無義, 人有氣有生有知亦且有義.「王制」
물과 불은 기운은 있으나 생명이 없고, 풀과 나무는 생명은 있으나 지각이 없고, 새와 짐승은 지각은 있으나 의로움이 없다. 사람은 기운도 있고 생명도 있고 지각도 있고 의로움도 있다.17)"
17) 위의 책, p. 239.
위에서 살펴본 욕망은 동물에게도 있는 것이다. 동물에게 없는 인간의 공통된 본성은 무엇이 있을까. 순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의로움이 있다. 의로움이 있음으로서 금수와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선 본성들과 의로움의 차이점은 호오와 감정, 욕망 등이 인위를 거치지 않은 자연적인 상태를 의미했었던 것에 비해 의로움은 자연과의 공통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구분될 수 있는 인간만의 특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동물과 구분짓는 특성은 바로 의로움이다.
그렇다면 다음 구문은 또다른 구분의 지표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분별 능력이다.
"人之所以爲人者, 何已也? 曰, 以其有辨也.「非相」
사람을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분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18)"
18) 위의 책, p. 127.
의로움은 무생물, 식물, 동물에게는 결여되어 있어 인간을 특징짓는 본성이며 분별은 참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본성이다.
사람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스스로 분별할 수 없다면- 사람의 외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의로움과 분별 모두 ‘무엇인가를 구분짓는’ 본성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 의로움과 분별의 공통점이 보인다.
"人生而有知, 知而有志, 志也者, 臧也. ... 心生而有知, 知而有異.「解蔽」
사람은 나면서부터 지각이 있고, 지각이 있으면 사물을 기억하게 되며, 기억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가 쌓이게 된다....마음은 생겨나면서부터 지각이 있고, 지각이 있으면 여러 가지를 분별하게 된다.19)"
19) 순자, p. 610.
「왕제」의 구문에서 새와 짐승에게는 의로움이 없지만 지각은 있다. 그 다음「비상」에서는 사람에게 분별능력이 있다. 그리고「해폐」에서는 지각이 있으면 분별이 생긴다.
금수에게도 지각이 있으므로 분별능력이 생기는 것일까?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비상」편에 의하면 사람밖에 없다. 즉 금수는 지각이 있어도 분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금수는 지각이 있어도 의로움은 있을 수 없다. 분별과 의로움은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분지을 수 있는 기준선이다.
논의를 더욱 전개해보자. 앞에서 욕망이 감정의 반응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본 적이 있다. 이 구문은 분별이 지각으로부터 발생함을 설명한다. 인간의 본성은 감정과 함께 지각을 기본적 요소로 하며 감정으로부터 욕망이, 지각으로부터 분별이 도출된다. 지각이 의로움과 분별처럼 인간을 특징하는 본성요소가 아님은 앞에서 보았던 바와 같다. 지각은 새와 짐승에게도 있다.
그러나 순자가 생각하는 인간 본성의 핵심은 발췌된 구문들을 분석할 때 지각과 감정으로 나뉘어 있는 듯하다. 지각과 기억은 분별의 바탕이 되며, 감정은 욕망의 바탕이 된다. 욕망은 감정을 지녔다면 동물에게도 있다. 그러나 동물은 지각을 지녔지만 분별을 지니지는 못한다. 이것은 욕망은 감정에 대하여 수동적인 지위에 있는 반면에 분별은 지각에 대하여 적극적인 지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양자의 지위의 차이는 분별로 하여금 욕망을 인도하는 위치에 설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미 여기에서 우리는 욕망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는 반면에 분별은 기준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을 욕망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여기에서 보인다. 순자는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근원적 두 지점인 감정과 지각으로부터 짚어내고 있다.
"材性知能, 君子小人一也. 好榮惡辱, 好利惡害, 是君子小人之所同也, 若其所以求之之道則異矣.「榮辱」
재성(材性)과 지능은 군자와 소인이 똑같다. 영예를 좋아하고 치욕을 싫어하며, 이로움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하는 것도 군자와 소인이 다 같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다.20)"
20) 위의 책, p. 104.
예를 들어 위의 구문을 보자. 재성과 지능은 군자와 소인이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본성이면서 호오나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각과 관련된 본성임을 알 수 있다. 앞서 본 의로움은-논의한대로 분별과 함께- 감정이 아니라 지각으로부터 발원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순자에게서 감정, 욕망과 지각, 분별이 서로 대립하는지의 여부와 양자의 가치판단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3.3. 본성의 차별적 요소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게 본성을 갖추고 있는데 실제 사회에서 동일한 모습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본성을 구성하는 각 요소의 개인별 차이에 기인한다. 순자는 그것을 양적/질적 차이로 구분한다.
3.3.1. 요소의 양적 차이
순자는 인간의 본성 중 욕망이 양적 차이를 낸다고 보고 있다. 다음 구문을 읽어보자.
"欲之多寡, 異類也, 情之數也.「正名」
욕망이 많고 적은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이다.21)"
21) 위의 책, p. 647.
위 구문은「정명」편에서 발췌한 것이다. 앞서 욕망의 유무를 인간본성의 중요한 특질로 언급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 내용은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다. 욕망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욕망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같은’ 정도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커다란 감정에도 작은 욕망만을 분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감정에도 넘치는 욕망을 분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본성을 구성하는 욕망이 개개인간에 양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3.3.2. 요소의 질적 차이
앞에서 언급했던 욕망의 양적 차이를 없는 것으로 가정해보자. 모든 이의 욕구가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는 여전하다. 같은 정도로 기쁨의 욕구를 느끼는데도 각자가 보이는 결과는 상이하다.
결국 요소의 양은 차이의 유일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본성의 질적 차이는 동일한 양의 욕구를 접해도 다른 양태를 끌어낼 수 있다.「부국」편에 다음과 같은 구문이 있다.
"人倫竝處, 同求而異道, 同欲而異知, 生也.「富國」
인류가 모두 함께 생활하면서 욕구는 같은데도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이 다르고, 욕망이 같은데도 그것에 대한 지혜는 서로 다른 것은 본성이다.22)"
22) 순자, p. 264.
위에 따르면 욕망을 추구하는 방법과 욕망에 대한 지혜는 각자가 다르다. 하지만 욕망을 추구하고 욕망에 대처하는 것도 욕망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이다.
3.3.3. 정과 려의 구분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양적/질적 차이를 알아보았다. 이제 여기 정과 려의 구분을 잠시 살펴보겠다.
"性之好惡喜怒哀樂, 謂之情.
情然而心爲之擇, 謂之慮.
心慮而能爲之動, 謂之僞. 慮積焉, 能習焉, 而後成, 謂之僞.「正名」
본성으로부터 나타나는 좋아함과 싫어함,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감정(情)이라고 한다.
감정이 그러하여 마음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을 생각(慮)이라 한다.
마음이 생각해 그것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작위라 한다.
생각이 쌓이고 능력이 익숙해진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을 인위라 한다.23)"
23) 위의 책, p. 630.
감정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욕구는 감정에 대한 반응으로 수동적으로 발생하는데 비해, 생각(慮)은 마음에 의해 선택되므로 감정에 대해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감정은 확실히 인간의 본성이고 작위는 확실히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생각은 어떠한가. 생각은 감정과 작위를 잇는 교량의 역할을 하고 있고, 분별과 같이 능동적 지위에 있다. ‘마음이 그것을 선택하는 것’으로서의 생각, 이것은 넓게는 지각과 분별을 포함한 인간의 사고 작용, 본성의 반쪽 전체를 포함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과에 따라 지금까지 논의한 인간의 본성의 절반은 본성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이 구문만으로는 이것을 본성이나 작위의 한 쪽 범주로 판단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두도록 한다.
4. 본성으로 인한 결과
<3.2. 본성의 공통적 요소>의 후반부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본성의 가치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또는 긍정적인 것인가, 부정적인 것인가.
이 양자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작위가 제거된 상태에서 본성만으로서 도출되는 결과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순자는「영욕」편에서 그 검토결과를 보여준다.
"人之有鬪, 何哉? ...而好惡多同.「榮辱」
사람들이 다투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도 대부분 남들과 같기 때문이다.24)"
위 구문에서 인간의 본성 중 호오의 감정이 보편성을 띠기 때문에 충돌하게 된다. 좋아하는 감정이 같으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게 된다. 싫어하는 감정이 같으면 서로 떨어지기 위해 다툰다. 이로 인해 본성 상태인 감정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음을 알 수 있다.
"人之生故25)小人, 無師無法, 則唯利之見耳.「榮辱」
사람은 태어나면서 본래 소인이어서 스승도 없고 법도도 없다면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26)"
25) 뒤에 이어지는 말은 人之生固小人으로써 故와 固의 해석이 동일하다. 故 또한 ‘본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해석상의 무리는 없지만, 순자의 전편을 검토해 보기에는 대부분의 쓰임이 故는 접속사로 ‘그리하여, 그런 이유로’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고, 固는 부사로 ‘본래’의 뜻으로 쓰이고 있으니 오타가 아닐까 추측한다.
26) 순자, p. 109.
사람은 태어나면서 본래 소인인데 소인의 상태는 작위에 의해 변형되지 않은 순수한 본성을 지닌 상태와 같다. 스승이나 법도와 같은 작위가 없으면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은 이로움을 추구하는 욕망을 말한다.
"今人之性, 生而有好利焉, 順是, 故爭奪生而辭讓亡焉.「性惡」
지금 사람들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기고 사양함이 없어진다.27)"
27) 위의 책, p. 657.
"埶位齊而欲惡同, 物不能澹, 則必爭. 爭則必亂, 亂則窮矣.「王制」
세력과 지위가 같으면서 바라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같으면, 물건이 충분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다투게 된다. 다투면 반드시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반드시 궁해질 것이다.28)"
28) 위의 책, p. 219.
순자는 단순히 이익을 따르기 때문에 다툼이 생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로움을 추구하는 욕망은 인간의 호오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 지점에서 일치할 것이고 한정된 재화는 다툼을 초래하게 된다.
「영욕」,「성악」,「왕제」편을 아우르는 욕망에 의한 부정적인 결과 도출은 마치 한 문장처럼 일관된다. 결국 인간의 본성 중 감정과 욕망은 자연상태에서는 부정적이다. 반대로 지각과 분별은 그렇지 않다.
결국 순자는 그의 저서에서 지각과 분별을 가치판단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므로 가치판단의 대상은 감정과 욕망뿐이다.
순자는「성악」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性惡」
人之性惡.29)"
29) 위의 책, p. 658.
결국 순자의 이 유명한 한마디는 지각과 분별작용을 제외하고 오직 감정과 욕망의 본성을 대상으로 할 때만 논리적으로 유효하게 성립한다. 그러나 분석없이 이 선언을 접하면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전부 부정적으로 매도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그것은 사람간의 신뢰를 붕괴시키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감정적인 박대를 받을 성악설이다.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본성을 총칭하여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이 짧은 말은, 순자의 사상이 비교적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오해의 소지가 더욱 크다.
이 한마디에 순자는 유학의 주류에서 밀려나 이단과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역사의 오랜 기간 뒤안길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구문을 분석해보면 그 성악설이 부정적 욕망을 통제하고 노력을 통해 자기를 발전시키는 정통 유교의 가르침과 상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욕망의 작용과 사고의 작용으로 분리시킨 사상적 체계성은 누구보다 현대에 가까운 과학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체계성이 철학사적으로 묻혀버린 일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 다툼과 혼란의 극복
순자는 욕망으로 인하여 발생한 다툼과 혼란을 제어할 방법을 제시하였다.
5.1. 결여의 인식과 갈망
"凡人之欲爲善者, 爲性惡也. 夫薄願厚, 惡願美, 狹願廣, 貧願富, 賤願貴. 苟無之中者, 必求於外,
故富貴而不願埶, 苟有之中者, 必不及於外. 用此觀之, 人之欲爲善者, 爲性惡也.「性惡」
무릇 사람들이 선해지고자 하는 것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얇으면 두터워지기를 바라고 보기 흉하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며 좁으면 넓어지기를 바라고 가난하면 부유해지기를 바라며 천하면 귀해지기를 바라는데, 진실로 자기에게 없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구하려 한다.
그러므로 부유하면 재산을 바라지 않고 귀하면 권세를 바라지 않는 것이니, 진실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이 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30)"
「성악」편의 위의 구문은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단 없음으로부터 소유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없다는 것은 없는 상태에 대한 혐오를 동반한다. 그리고 그것은 있는 것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킨다. 갈망은 있는 것에 대한 표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표상을 향해 노동을 실천하여 결국 소유하게 된다.31)
발췌된 구문을 여기에 대입해보자.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악함(감정, 욕망)은 있을지라도-지각과 분별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선함은 없다. 따라서 본성은 악하므로 선함의 결여를 인식하고 결여된 상태를 혐오하게 된다. 그리고 선함에 대해 갈망하게 된다. 선함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갈망하기 위해서는 표상이 필요하다. 선함의 표상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본성으로부터 답을 찾을 수 있다. 본성은 악함이다. 그리고 처음 본성을 정의할 때 전제했듯이 본성은 작위를 결여하고 있다. 결여된 작위를 찾는 작업은 결여된 선함의 표상을 찾는 일과 같을 것이다.
31) 강의 中,《8》(2007.4.27).
5.2. 극복의 대책으로서의 작위
그렇다면 작위는 무엇일까. 이미 작위는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이제 「성악」편이 규정짓고 있는 작위의 모습을 살펴보자.
"배워서 행할 수 없고 노력해 이루어질 수 없는데도 사람에게 있는 것을 본성이라 하고, 배우면 행할 수 있고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작위라 한다.「性惡」
不可學, 不可事而在人者, 謂之性, 可學而能, 可事而成之在人者, 謂之僞.32)"
32) 순자, p. 661.
본성을 처음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면 작위는 후에 갖추게 되는 것이다. 순자에게 僞33)는 항상 무엇인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성에 작위가 가해지면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33) 장원태 선생님은 강의 중에, 순자가 僞를 爲로 바꾸어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爲를 쓰지 않고 굳이 僞를 고집하는 이유는 ‘僞’가 자연에 속하지 않으며 인간의 노력이 부가되었음을 부각하고자 하는 순자의 마음이 들어있는 듯 하다고 설명하신 바 있다. ‘僞’의 쓰임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의 中,《8》(2007.4.27))
"性者, 本始材朴也. 僞者, 文理隆盛也. 無性則僞之無所加, 無僞則性不能自美. 性僞合, 然後聖人 之名, 一天下之功於是就也.「禮論」
사람의 본성이란 시작의 근본이며 소박한 본질이요, 작위란 형식과 무늬가 융성된 것이라 하는 것이다.34) 본성이 없다면 작위가 가해질 곳이 없고 작위가 없다면 본성은 스스로 아름다울 수가 없다. 본성과 작위가 합쳐진 다음에라야 성인이란 이름과 천하를 통일하는 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35)"
34) 교재의 해석 : 본성이란 뿌리이자 시작이고 애초의 자질이자 가공되지 않은 재료이다. 인위란 형식과 무늬가 융성한 것이다. (2007년 1학기 중국고대철학 강의자료 Ⅶ, p 43) 앞서 [2.1. 본성의 정의]에서 해석의 차이를 논한 바 있다. (각주 13 참조)
35) 순자, p. 561.
본성에 작위가 가해진 이후에는 본성과 작위가 하나로 합쳐진다. 그 합쳐짐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본성은 악하다. 부정적인 본성이 긍정적인 상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양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악한 본성은 양적으로 증대되어봤자 결과적으로 악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성은 작위가 합쳐져 질적인 비약을 이루어내야 한다. 순자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악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본성인 상태로부터의 연속적인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위 구문 「예론」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인이란 이름과 천하를 통일하는 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의 본성을 처음의 부정적 상태로부터 계속 멀어지게끔 하다가 반드시 어느 순간 긍정적 상태로 전환을 시켜야 한다.
본성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위의 모습은 여러 편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5.2.1. 차별적 분배
"羣而無分則爭.「富國」
여러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지만 분계가 없다면 서로 다툴 것이다.36)"
36) 위의 책, p. 266.
"人何以能羣. 曰, 分.「王制」
사람이 어떻게 힘을 합쳐 살 수 있는가? 그것은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37)"
37) 위의 책, p. 240.
여기에서 심각한 모순이 발생한다. 앞에서 금수와의 구분을 짓는 기준으로서 의로움과, 지각의 작용으로서 분별을 이미 인간의 본성으로 언급한 바 있는데, 위의「부국」과「왕제」의 두 구문에서는 분계와 분별이 부정적 본성을 극복하는 작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이 모순은 두 가지 별개의 원인 중 하나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첫째는 인간에게 나면서부터 스스로 그러한 것의 범주가 순자가 의도한 본성의 범주와 어긋나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한문원문과 비교하여 매 구문을 엄격히 따져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압축성으로 인하여 “나면서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으로의 분류에 제한이 따랐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이것으로 인한 모순이라면 순자의 본성론이 감정과 지각에 기초하고 있다는 본문의 내용은 인간의 본성에서 지각과 사고작용을 배제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논의에서 잠시 제쳐둔 정과 려의 구분으로부터 비롯하였을 가능성이다. 순자의 관점을 생각(慮)이 사고 작용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정과 려의 구분에서 이미 사고작용은 인간의 본질이지만 본성은 아니게 된다. 두 번째 가능성이 옳다면, “나면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본성이라 하고, 나면서 조화되어 생겨난 것이 안의 정기와 합쳐지고 밖의 감각과 호응하여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그러한 것 또한 본성이라 한다.” 라는 순자의 본성 정의는 범주가 너무 넓은 것이 된다. 이것은 본성을 정의하는 필요충분조건형 명제이므로 다른 조건에 의해 범주가 변형되지 않는다. 만약 두 번째 가능성에 따라 본질과 본성을 재차 구분한다면 위 두 구문의 작위는 모순되지 않는다.
모순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볼 때, 순자는 다툼을 종식하기 위해서 분배를 제안한다. 분배는 혼란과 투쟁으로부터 결여된 안정과 평화를 위한 대책이며, 악한 본성에 가해지는 작위로서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선함의 표상이다. 이제 분배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分均則不偏, 埶齊則不壹, 衆齊則不使.
... 夫兩貴之不能相事, 兩賤之不能相使, 是天數也.「王制」
신분이 고르면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고, 세력이 고르면 세상이 통일되지 않을 것이며, 대중이 고르면 부릴 수가 없을 것이다. ...(중략)...
대체로 양편이 모두 귀한 사람이면 서로 섬길 수가 없고, 양편이 모두 천하면 서로 부릴 수가 없는데, 이것은 하늘의 섭리이다.38)"
분배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분배는 신분이나 세력 등에 따라 차등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모든 피분배자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자연히 서열과 질서가 생겨난다. 그로부터 다툼과 투쟁을 지양할 수 있게 된다.
5.2.2. 예의
순자의 핵심적인 선함에 대한 징표는 예의로 귀결된다. 예의는 본성에 대한 작위이고 없는 것에 대한 궁극의 표상이다. 여러 편에서 순자는 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故至備, 情文俱盡.「禮論」
지극히 잘 갖추어진 예는 감정과 형식을 모두 다하고 있다.39)"
39) 위의 책, p. 543.
앞서「예론」편에서 ‘작위란 형식과 무늬가 융성된 것이라 하는 것이다’라는 구문을 발췌하여 작위에 대하여 설명했었는데, 예는 작위의 전형적인 모습에 정확히 부합한다.
"禮者, 貴賤有等, 長幼有差, 貧富輕重皆有稱者也.「富國」
예의란 귀하고 천한 등급을 매겨 주고, 나이 많은 이와 적은 이의 차등이 있게 하고, 가난하고 부유한 사람과 신분이 가볍고 무거운 사람에 따라 모두 어울리는 대우를 하는 것이다.40)"
40) 위의 책, p. 269.
앞서 갈망은 결여된 것에 대한 표상을 필요로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본성에 대한 작위도 결여된 것에 대한 여러 표상들을 아우르지만, 순자가 강조한 결여는 언급했듯이 예이다. 예가 본래부터 인간에게 결여된 것이었다면 그것을 갈망하기 위해서는 표상이 필요하다. 그 표상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그를 설명하기 위해 순자는 성왕을 제시한다. 그의 설명은 본래 성왕으로부터 예의가 나오고 예의로부터 분수가 나오며, 분수로부터 분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분별을 통해 한정된 재화를 나누고 이로움을 추구하는 욕구를 적절히 분배하여 혼란을 피하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예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故禮者, 養也.「禮論」
그러므로 예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42)"
42) 순자, p. 534.
이미 욕망을 충족시켰다면 욕망을 충족시켜준 분별을 좋아하고 그로부터 예의를 따르며 성왕을 추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군자임에야 욕망 충족 후에 분별을 좋아할 것은 틀림없다.
"君子旣得其養, 又好其別.「禮論」
군자가 이미 그의 욕망을 충족시켰다면 또 그 분별을 좋아할 것이다.43)"
43) 위의 책, p. 534.
아래는 순자가 예의 절대성을 강조한 말이다.
"公輸不能加於繩, 聖人莫能加於禮,
禮者, 衆人法而不知, 聖人法而知之.「法行」
공수 같은 명장도 먹줄보다 더 곧게 만들 수는 없고, 성인도 예의를 더 손질할 수는 없다.
예의라는 것은 민중들이 법도로 받들기는 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성인이 법도로 받들며 그뜻을 알고 있는 것이다.44)"
44) 위의 책, p. 830.
5.3. 결여 극복의 동기부여
순자는 단지 결여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에서 멈추지 않고, 결여를 극복하기 위한 개개인의 갈망을 고취시키는 여러 주장을 하고 있다.「천론」편과「성악」,「영욕」편에서 각각 일부를 발췌한다.
"君子敬其在己者, 而不慕其在天者, 是以日進也., 小人錯其在己者, 而慕其在天者, 是以日退也.「天論」
군자는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에 힘쓰고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은 흠모하지 않기 때문에 날로 발전한다. 소인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은 버려 두고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을 흠모하기 때문에 날로 퇴보한다.45)"
45) 위의 책, p. 486.
인간과 자연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면 미신에 기대어 노력을 게을리하고 자신의 운을 하늘에 맡겨버리게 된다. 그러나 본문의 초반에서도 밝혔듯이 인간과 자연은 구분되어 있다.
하늘의 법도와 인간의 법도는 별개의 것이므로 하늘에 아무리 기도해봤자 인간에게 돌아오는 것은 노력에 대한 결과뿐이다. 그러므로 위 구문은 인간이 다른 어디에 의지할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과 노력을 믿어야 하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今塗之人者, 皆內可以知父子之義, 外可以知君臣之正. 然則其可以知之質, 可以能之具, 其在塗之人明矣.「性惡」
지금 길거리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안으로는 아버지와 자식의 도리를 알 수 있고, 밖으로는 임금과 신하의 올바른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것들을 알 수 있는 자질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길거리의 사람에게도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46)"
46) 순자, p. 675.
「성악」편에서는 인간에게 가능성을 열어준다. 누구나 지각이 있고 분별이 있는 것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자질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결여는 누구나 인식하고 또 누구나 결여의 극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
"可以爲堯禹, 可以爲傑跖, 可以爲工匠, 可以爲農賈,
在埶注錯習俗47)之所積耳.「榮辱」
누구든 요임금, 우임금이 될 수도 있고, 걸왕이나 도척이 될 수도 있으며, 목수와 공인이 될 수도 있고, 농사꾼이나 장사꾼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형세와 마음가짐과 행동과 배움과 버릇이 쌓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요임금, 우임금처럼 되면 언제나 안락하고 영화롭지만, 걸왕이나 도척처럼 되면 언제나 위태롭고 욕을 보게 된다.48)"
47)『순자』의 이 부분 각주에는 왕선겸이 순자집해에서 埶注錯習俗 중의 埶가 잘못 끼어든 글자로 무의미하다고 했다는 보충설명이 있다. 그에 따르면 해당부분은 ‘마음가짐과 행동과 배움과 버릇’으로 해석된다.
48) 위의 책, p. 109.
그러나 노력하지 않는다면 「영욕」편의 걸왕이나 도척처럼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우리 모두는 열심히 노력해야만 한다. 노력하면 누구나 요임금이나 우임금과 같이 후대에 성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을 것이다.
6. 논의 외의 한계
"墨子至言昭昭然, 爲天下優不足. 夫不足, 非天下之公患也, 特墨者之私優過計也.「富國」
묵자의 말은 뻔한 것이다. 그는 세상을 위하여 물자가 부족케 될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부족하다는 것은 온 천하 전체의 걱정이 아니라, 다만 묵자의 개인적인 걱정이요 지나친 생각일 따름이다.49)"
49) 위의 책, p. 279.
순자의 논의의 한계는 여러 가지가 발견되는데 분량의 제한으로 인하여 다음 기회로 미뤄두기로 한다. 본성에서 작위를 거쳐 성인이 되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비약과 연속성의 결여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누구나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될 수 있는 것’과 ‘되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물자의 분배와 욕망충돌의 지양은 사고실험에 국한되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욕망을 제한하는 한정선과 물자 분배의 적정선은 예의에 대한 기술처럼 구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부국」편에서 그는 물자는 차등적으로 잘 배분하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묵자를 비난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물자는 차등적으로 배분해도 부족하다. 또는 욕망의 제한선을 그가 경험해보지 못한 만큼 하한선까지 내려야 배분이 가능할 것이다. 여러 역사기록을 볼 때 당시는 지금만큼 심각한 사태로 여겨졌어야 정상이다. 순자는 아마도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본문 논의의 자체적 한계는 다 집어내기도 힘들다. 원전 전체를 통해 순자의 인간 본성론을 정리해 보고 싶었으나 능력이 닿지 않았다. 예컨대 본성에 속한 것은 모두 하늘의 결과이며 그러므로 자연에 따라 자발적이라는 John Knoblock의 견해는 날카로운 지적이었지만 아직 본인의 순자 이해도에서는 수용하기 힘들고 구성한 논리에도 맞지 않아 본문에 반영할 수 없었다. 그 밖에도 첨부한 참고목록의 전부가 작성 전에 원전을 연구해 볼 때는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소화되지 않은 한 본문에 반영하지 않도록 작성 중에는 참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의는 더욱 문제 투성이가 된 듯하다. 또한 순자를 읽으며 발견한 모순 또는 부정확성을 논의의 진행 과정에 실어보고 싶었으나 본문이 어지러워진 느낌만 든다. 그나마 수업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순자 원전을 읽은 후 순자를 재구성해 보고 싶은 소망을 약간은 실어낸 듯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논의를 마친다.
7. 맺는 말
순자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예의로써 그것을 극복하여 성인이 되기를 권고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국토에 전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서론에서 제시한 많은 고민들에 순자가 일일이 답을 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극도로 어지러운 시기를 살았던 그는 수없이 고뇌하였던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체념하지 말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고찰은 뒤로 한 채 타인을 욕하고 비판하며 욕망을 숨긴 채 스스로를 미화하려는 위선적인 현대인들을 본다면 순자는 『순자』에서 말했던 것보다 훨씬 격하게 우리를 비난하리라 생각한다.
감정과 욕망과 그로 인한 다툼은 10년, 50년 전부터 갑작스레 있어왔던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의 세대를 살다 간 선현들도 겪었던 일이다. 그러므로 순자 사상의 탐구를 비단 인간의 본성론에 대한 검토에서 그칠 일은 아니다. 그들은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끊임없이 경주하였다. 이것이 성악설을 통해 순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사상사적 공헌을 논의하지 않더라고 순자의 인간성 극복의지는 면면히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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