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일반

동양 고전의 해석 관점과 방법 및 자세

rainbow3 2019. 10. 1. 10:13


동양 고전의 해석 관점과 방법 및 자세   * 김 재 범

  

이 글은 동양 고전의 해석 관점과 방법이 되는 준거들을 동양 고전 속에서 찾아내고 그 근거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 고전을 대하는 자세를 학자의 근기와 지적 공정성이라는 문제와 연결시켜 논의해 보았다. 여기서 제시한 해석의 관점과 방법은 다음 여섯 가지이다.

 

1) 고전으로 고전을 해석하고, 고전을 통해 고전을 벗어나며,

2) 일체의 권위를 추종하지 않으며,

3)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4) 현재진행형으로 해석하되,

5) 리理․사事(理致와 事實)가 분명한지 비추어 보고,

6) 그래도 해석이 안 되는 것은 그냥 둔다.

 

어느 누구도 고전을 완벽하게 재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과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관점과 방법을 문제삼고 그 기준을 나름대로 제시해 본 것은, 다만 ‘어떻게 하면 왜곡과 해석의 오류를 최소화하면서 고전을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되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함께 나누며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한 해석 관점과 방법은 그러한 제안을 몇 가지 구체화한 것이다. 이 제안은 더 나은 제안에 의해 언제든 수정될 수 있고 또 그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핵심 단어: 고전 해석, 온고지신, 술이부작, 여시아문, 근기 

 

Ⅰ. 문제 제기

 

모든 학문 활동뿐 아니라 만남, 대화 등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가 해석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해석의 관점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생생하게 변화해 가는 역동적 삶을 고정화시키는 오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새삼스럽게 해석의 관점과 방법을 문제삼는가? 또 최근 동양 사상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고조되는 것과 함께 동양 고전에 대한 해석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고전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단지 옛날을 돌아보려는 복고주의 취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단순히 이미 정형화된 과거의 전통에 대한 복고적 향수일 뿐이라면 오늘을 사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과거의 것으로 고정화된 전통과 고전은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는 오늘을 살아갈 수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고전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지금 그것을 읽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김재범, 2001: 11-12). 고전 해석의 문제가 논란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고전이 이 시대 우리의 입장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고전 해석의 관점과 방법을 문제삼게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전을 과거의 고정된 것으로 형해화하지 않으면서 그 본래의 뜻을 왜곡하지 않고,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되살려 재해석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동양 고전을 읽고 해석하는 관점과 방법으로 6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그 근거를 동양 고전에서 찾아 논의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마지막으로 엄밀한 관점이나 방법론을 따지기보다 고전을 해석하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고전 읽기의 자세’라는 문제를 ‘근기根機’와 ‘지적知的 공정성公正性’의 문제와 연결시켜 간략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Ⅱ. 고전 해석의 관점과 방법

 

이 글에서 제시하는 고전 해석의 관점과 방법은 다음 여섯 가지이다:
1) 고전으로 고전을 해석하고, 고전을 통해 고전을 벗어나며, 2) 일체의 권위를 추종하지 않으며, 3)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4) 현재진행형으로 해석하되, 5) 리理․사事(理致와 事實)가 분명한지 비추어 보고, 6) 그래도 해석이 안 되는 것은 그냥 둔다.

 

여기서 제시한 여섯 가지 해석 관점과 방법은 서구의 현대 해석학이나 지식사회학을 통해서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동양 고전 속에 애초부터 이러한 기준이 아주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현대 해석학이 부딪친 난관을 넘어설 수 있는 관점과 방법이 담겨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구절을 찾아 명료히 하는 이 작업 자체가 이미 재해석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동양 고
전의 재해석의 방법을 새롭게 모색하고 또 실제로 동양 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행해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구체적 해석 방법에 관한 논의에 들어가기 전, ‘동양 고전을 대하는 태도로서의 관점’에 관한 필자의 입장을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최석만에 의하면, 종교적 경전이나 고전을 대하는 태도는 유명론唯名論과 실재론實在論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명론은 경전에 쓰인 언어가 구체적인 지시가 아니라 경전의 숨은 의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이고, 실재론은 경전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의 실재實在로 믿는 관점이다(최석만, 1999: 11). 유명론적 입장으로는 기독교 성경 해석학에서 성경의 구절을 모두 신학적 비유(allegory)로 보는 알레고리 학파와 주역周易 해석에서 왕필王弼의 득의망상설得意忘象說과 그것을 계승한 의리역학파義理易學派를 들 수 있으며, 실재론적 입장으로는 기독교 성경 해석학의 문자주의(letterism)와 문맥주의(literalism), 주역 해석에서 상수역학파象數易學派를 들 수 있다.1)

유명론과 실재론은 경전이나 고전 해석의 관점과 방법으로서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어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취하기가 어렵다. 실제 모든 종교적 경전에서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절대적 진리나 도道, 천지자연天地自然의 리법理法을 설명하는 구절은 실재론적 입장에서 해석해도 무방한 보편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어떤 구절은 당시의 역사적․사회적 상황과 관련지어야만 해석이 가능하거나 유명론적 입장에서 해석해야 할 비유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하나의 입장을 택하기보다 동양의 고전에는 이러한 내용이 두루 섞여 있다고 보고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해석의 기준을 동양 고전 자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또 하나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동양 고전을 대하는 태도로서 ‘관점’과 해석의 ‘방법’은 사실 엄밀하게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고전을 해석하는 방법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관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여섯 가지 기준은 해석의 관점이자 곧 방법이다.

 

1) 이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최석만(1999)을 참고할 것. 

 

1. 고전으로 고전을 해석하고, 고전을 통해 고전을 벗어난다

 

‘고전으로 고전을 해석하고, 고전을 통해 고전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 글에서 제시한 나머지 다섯 가지 기준을 모두 포괄하는 동양 고전의 해석 관점과 방법의 일반 원칙이자 대원칙이다. 이 말은 이 글에서 제시하는 그 밖의 해석 방법도 모두 동양 고전에서 찾아낸 해석 기준이라는 것이다. 우선 ‘고전으로 고전을 해석한다’는 것은 현대의 다른 해석학 이론이나 방법으로 동양 고전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고전에 들어 있는 내용 중에서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관점과 방법을 찾아 고전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물론 동양 고전에서 해석의 기준이나 방법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구절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해석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구절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구절을 찾아내 그것이 어떻게 해석의 방법이 될 수 있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그리고 ‘고전으로 고전을 해석하는 것’은 고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고전을 통해 고전을 벗어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왜냐하면 동양 고전은 그 표현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스스로 자연의 이치와 도를 깨달아 자유롭게 자기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으므로 고전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야 말로 고전을 벗어나 자유로운 현재의 삶을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유롭고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일깨우는 것이 동양 고전의 궁극적 가르침이므로 그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고전은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일지라도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 이상의 것이 아니다. 동양 고전은 곳곳에서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참으로 고전을 이해하고 충실히 따른다면 우리는 고전을 통해 고전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뭇 사람이 싫어해도 반드시 살피고, 뭇 사람이 좋다 해도 반드시 살피라”2)고 하였다. 이 말은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와 해석하는 방법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남들이 아무리 훌륭한 고전이고 뛰어난 구절이라 하더라도 제 스스로 살피고 이해해 소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동양 고전을 케케묵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전은 바로 고전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이러한 태도와 방법을 취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 『論語』, 「衛靈公」, “子曰: ‘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

 

『장자莊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있으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는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해 있으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는다. 말은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있으며 생각하는 바를 알고 나면 말을 잊는다.3)"

3) 『莊子』, 「外物」,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왕필은 『장자』 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주역』 의 괘상卦象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뜻을 얻고 상을 잊는다’는 이른바 ‘득의망상설得意忘象說’을 주장한다.

그는 『주역약례周易略例』 「명상明象」에서 장자의 위 구절을 인용하고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言은 상象의 올가미요, 상象은 의意의 통발이다. 이런 까닭에 언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이는 상을 터득한 자가 아니요, 상을 여전히 갖고 있는 자는 의를 파악한 이가 아니다.

상은 의에서 생겼으니 상을 갖고 있다면 가져야 할것은 그 상이 아니요, 언은 상에서 나왔으니 언을 간수하고 있다면 간직해야할 것은 그 언이 아니다.

그런즉 상을 잊은 자는 바로 의를 터득한 이요, 언을 잊은 자는 바로 상을 얻은 이다. 의를 터득함은 상을 잊음에 있고, 상을 터득함은 언을 잊는 데 있다.…… 상을 잊음으로써 그 뜻을 구하면 의의가 이에 드러나는 것이다(王弼, 1998: 630-631)."

 

한편 주희朱熹도 「독대학법讀大學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학』 한 책에는 정경正經이 있고 장구章句가 있고 혹문或問이 있으니, 보아 가고 보아 오면 혹문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장구만 보아도 곧 될 것이요, 오래 하면 또 다만 정경을 보면 될 것이요, 또 오래 하면 자연히 한 권의 『대학』이 자신의 가슴속에 있어 정경 또한 필요 없게 될 것이다(성백효, 1991: 21)."

 

이와 같이 동양의 많은 고전은 고전을 읽되 고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바로 알아 마침내는 고전을 버리고 자기 삶을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이나 “사자는 돌을 던지는 사람을 물지만, 한나라 개는 흙덩이를 쫓아간다”(獅子咬人, 韓獹逐塊)는 선불교禪佛敎의 유명한 경구警句도 마찬가지이다.

석가가 죽기 전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며,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은 뒤에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라고 한 말을 선사禪師들은 더욱 분명하고 철저하게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 또한 진리를 바로 안다면 말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무엇을 전술傳述하겠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계절이 운행되고 온갖 만물이 생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4)"

4) 『論語』, 「陽貨」,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는 이치, 하늘의 뜻을 스스로 살피고 깨달아 안다면 누구의 말이 더 이상 필요하겠는가? 다 군더더기일 뿐이다. 이와 같이 고전의 가르침을 참으로 충실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고전을 통해 결국은 고전을 벗어나는 것이 된다. 고전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진정 고전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특정 사상의 이데올로기나 편견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마지막에는 그 고전 자체도 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충고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국 당대唐代의 임제선사臨濟禪師는 심지어 ‘살불살조殺佛殺祖’라고까지 하여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라고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떤 경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투탈자재透脫自在하게 된다(야나기다 세이잔, 1988: 173-174)."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일체의 권위를 추종하지 않는다’는 두 번째 해석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일체의 권위를 추종하지 않는다

 

편견, 선입견, 일체의 우상화된 권위를 배격하는 것은 학문 활동의 전제 조건이다. 기존의 입장은 다만 참고할 뿐이다. 추종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옛 성인에 대한 모든 신격화, 우상화, 신성화의 베일을 벗길 때, 역설적으로 그들의 생애와 가르침은 이 시대 우리의 삶의 이야기로 생생하게 되살아날 수 있다.

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의 방황과 갈등, 불우한 생애와 환경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가는 모습이야말로 소외된 사람, 보통 사람에게도 희망이 되는 삶의 모델인 것이다.

 

동서양의 성인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고뇌에서 출발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개혁적이고 변혁적이었다. 보수적이 아니었다. 기존의 고정 관념, 형식 윤리의 벽을 넘고자 부단한 문제 의식을 갖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지향하고 제시했던 사람들이었다. 현실에 대한 그들의 문제 의식이 당대의 문제를 넘어 인간 삶의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때, 그들의 가르침은 당대의 시대적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원리와 교훈으로 후대에 남겨졌다.

우리는 바로 현실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문제 의식과 근원적 성찰의 자세, 그리고 그들이 남긴 보편적 원리가 담긴 메시지의 의미를 우리식으로 성찰해야 한다. 단순히 고전에 기록된 성인의 말을 되뇌고 추종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추종자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현실의 고뇌와 문제를 뛰어넘어 변화하는 세계에서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지혜의 방법이었다.

 

고전 분야의 대가나 전문가들이 행하는 정통적 해설의 고정된 규준에 얽매이면 오히려 고전을 형해화하고 우상화하여 본래 의미를 살리지 못 할 수도 있다. 성인조차 추종할 필요가 없거늘, 하물며 대가나 해당 분야의 전공 학위를 가진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추종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임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까지 하지 않았는가. 비록 경전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말과 글의 형식논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석가는 죽기 전에 “나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했고, 성철선사도 말년의 한 방송 인터뷰에서 “내 말에 속지 마라.나는 한평생 거짓말하고 산 사람이다” 하였다. 앞에서 인용한 선가의 경구처럼 “손가락만 쳐다보고” “한로축괴韓獹逐塊” 하듯이 고전의 형식적 구절에 얽매여 맹신적 추종자가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공자는 “군자는 말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기용하지 않으며, 사람을보고 말을 내치지도 않는다”5)고 하였다. 이 말은 권위나 유명세에 얽매여 어떤 말을 추종하지 말아야 하거니와 사람의 지위나 출신, 겉모습을 보고 그 말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는 앞 절에서 인용한 “뭇 사람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스스로 살펴라”라는 말과 함께 유명세에 혹하기 쉬운 오늘의 대중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생활의 경구이자, 책을 읽고 해석하는 기준 내지 방법이 될 수 있다.

5) 『論語』, 「衛靈公」, “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 

 

지난해와 올해 초 김용옥의 『노자』 강의와 『논어』 강의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고전의 권위와 재해석이라는 문제와 관련시켜 볼 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 사건이었다. 동양 고전과 전통을 애정을 갖고 긍정적으로 보든 아니면 케케묵은 옛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든, 지금까지 동양 고전은 ‘정해진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 동양 고전을 숭앙하고 옹호하는 측도 고전의 가르침이 일정하게 정해진 진리라고 생각해 왔고(특히 한국 유학계의 주류는 주자와 퇴계의 학설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 이러한 입장을 취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부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동양 고전을 형해화되고 고정된 과거의 유물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김용옥의 강의와 그를 둘러싼 고전 해석 논쟁은 동양 고전의 해석이 결코 정설로 완결된 것이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 있는 것임을 대중에게 알려주었다. 동양 고전이 단순히 규범화되고 형해화된 것도 아니며, 무조건 존중하고 숭앙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하여 고전의 해설에 대한 무조건적인 권위를 배격하여 새로운 해석의 장을 열게 된 것이 최대의 성과이다.

 

3.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해석한다

 

오래된 고전을 읽을 때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시대 상황을 고려해야 고전에 사용된 말의 본래 의미에 근접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적․문화적 배경이나 사건과 관련된 문장은 그 역사적 상황을 모르면 해석이 불가능하다. 물론 깨달음이나 내면적 덕성과 심성의 문제 등 시공時空의 제약과 무관한 보편적 성격의 문장은 역사적․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많은 고전의 기록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돼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그 안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고전을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 기준을 우리는 바로『논어』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중 ‘온고溫故’에서 찾을 수 있다.

 

‘온溫’은 ‘따뜻하게 하다’, ‘익히다’, ‘복습하다’의 뜻이다. 싸늘하게 식은 찬밥을 새로 따뜻하게 데우듯이 ‘옛것을 익히는’(溫故) 것은 옛것을 오늘에 되살려 내는 것이다. 그러나 ‘옛것을 익히는’ 것은 단순히 옛것을 답습하는 게 아니다. 옛것을 따뜻하게 데우고 익히는 행위 자체가 이미 새로운 해석, 즉 재해석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찬밥을 데우기 위해서는 먼저 찬밥이 있어야 하듯이 우리가 새롭게 익히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료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데우는 행위가 원래는 따듯했던 밥의 원형에 최대한 접근하기 위한 행위인 것처럼 고전의 ‘온고’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되살리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찬밥은 아무리 잘 데워도 새 밥이 될 수 없지만, 옛 고전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알아내면’(知新)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창조적 사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전을 ‘온고’하고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알아내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전을 읽으며 그것이 기록된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고려하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원래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살려 내기 위해서이지만, 결국엔 그것을 통해 그 고전이 오늘날 갖는 의미를 보다 명료히 하기 위해서이다.

과거의 역사는 끊임없는 재해석 과정을 통해 후대에 의미 있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해 준다. 역사적 사실 자체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온고’이다. 주희는 「독대학법」에서 ‘온고이지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 일찍이 한 말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노니, 다만 『대학大學』을 가지고 하루에 한 차례씩 읽어 어떤 것이 대인大人의 학문이며, 어떤 것이 『소학小學』이며, 어떤 것이 명명덕明明德이며, 어떤 것이 신민新民이며, 어떤 것이 지어지선至於至善인가를 보아, 날마다 이와 같이 읽어 달이 가고 날이 가면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니, 이른바 ‘온고이지신’이라는 것이다. 모름지기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하니, 날마다 새로운 것을 보아야 될 것이다. 이는 도리道理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오, 다만 자기의 의사意思가 자라나 새로워지는 것이다
(성백효, 1991: 19)."

 

이와 같이 고전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것은 날마다 ‘온고’하는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두 번 읽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비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적 맥락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 ‘온고’를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워지는 것이다. 역사를 탐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와 전통이 진지하게 탐구되고 재해석될 때 역사는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를 전망하는 지침의 구실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동서양의 역사에서 전통과 고전은 끊임없는 재해석을 통해 창조적으로 전승되어 그 생명력을 이어 왔으며 새 시대를 여는 밑거름의 역할을 해 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대 그리스 사상을 재해석하여 근대의 여명을 열었던 르네상스와, 불교․도교를 습합習合하면서 원시 유교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이념을 제시했던 성리학性理學이다. 이처럼 전통과 고전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창조적으로 계승되어 생명력을 가질 때 고전은 현대를 살아가는 훌륭한 방법과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비전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김재범, 2001: 27).

고전에 대한 과거형 해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해석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4. 현재진행형으로 해석한다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고전을 해석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고전의 해석이 단순히 과거의 사실에 대한 기록을 검토하는 것이라면 오늘을 사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현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을 때, 고전은 고전으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
행형으로 재해석되어야 오늘날 우리에게 그 의미가 되살아난다.

 

현재진행형으로 고전을 해석한다는 것은 고전을 옛날 얘기가 아니라 ‘지금 & 여기’의 우리 삶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말을 빌리면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活句로 해석하는 것으로, 곧 ‘온고이지신’의 ‘지신知新’이 여기에 해당한다. 옛것을 익히되 그것을 새롭게 깨달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고전의 현재진행형 해석이다. 따라서 논어 「위정爲政」 11장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라는 구절은 종래와 같이 해석해선 안 된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라고 해석해 왔다.

이러한 해석에 따른다면 옛것인 사서삼경을 배워 익히고 새롭게 대두된 컴퓨터나 유전공학 등 첨단 학문과 기술을 알면, 선생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정도로 이해할 가능성이있다. 그러나 논어 에서 말하는 스승은 단지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아는 이가 아니다. 스승은 인생을 통찰하고 인생의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온고’하여 ‘지신’한다고 할 때의 ‘신新’은 새롭게 대두된 새것이 아니라 ‘옛것을 익히는 가운데 그로부터 새롭게 알게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석할 때, ‘지신’은 바로 현재진행형 해석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위정」 11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면, 그 것으로써(새롭게 안 것으로써) 스승을 삼을 수 있다.”6)

 

스승이 되는 주체를 익히고 아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옛것을 익히고 새롭게 이해하면 그 옛것이 곧 우리의 스승이 된다는 말이다. 이는 공자가 몇백 년 앞선 주공周公을 그리워하며 스승으로 삼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승은 비록 앞서 산 옛사람이지만 스승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의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전을 읽고 해석하며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 것
은 현재의 삶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가르침을 바로 그 안에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고전을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고전을 새롭게 아는 ‘지신知新’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 는 ‘창신創新’의 시사점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말한 바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7)

 

한편 현대 해석학에서도 고전 텍스트가 악보라면 재해석은 연주와 같은 창조 행위라고 말한다. 그런데 연주를 위해서는 악보 보표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의미만 파악하는 것으로는 악보가 아무 소용이 없다. 악보가 악보로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은 연주자의 연주를 통해서이다. 연주를 위해서는 살아 있는 소리로 재생해야 한다(팔머, 1988: 39-40).
이 같은 살아 있는 소리로의 재생이 바로 고전의 현재진행형 해석이다.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은 악보를 연주해 내는 것과 같이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현재진행형으로 고전을 해석하는 작업이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생생한 삶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

 

6) 이수태는 이 구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이 잘못이라 하고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이수태, 1999: 43-44).

7) 연암은 “옛것을 본받으려는 자는 옛날의 자취에 구애되는 병폐가 있고, 새것을 만들어내는 자는 법도가 없는 것이 폐단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되 변통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내되 법도가 있다면, 오늘날의 글이 옛날의 글과 같을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박희병, 1998: 169에서 재인용). 

 

5. 리理․사事가 분명하게 해석한다

 

리․사가 분명하게 해석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이치와 사실에 부합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문장의 전후 관계나 문맥을 고려하는 것만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으로 진리와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고전의 해석 기준이 바로『논어』의 ‘술이부작述而不作’과 대부분의 불경 첫머리에 나오는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다. 먼저『논어』 「술이述而」 1장을 살펴보자.

 

"공자가 말하였다. “설명하되 지어내지 않는다.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점에서 남 몰래 나를 노팽老彭에 견주어 본다.”8)"

8) 『論語』, 「述而」,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술이부작’에서 ‘술述’하는 것은 옛 성인의 말씀을 전하여 설명하는 것이며, ‘지어내지 않는 것’(不作)은 것은 성인의 말씀을 감히 제 마음대로 꾸며서 지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저 “옛 성인의 말씀을 믿고 좋아할(信而
好古)” 뿐인 것이다.

 

이런 태도를 두고 많은 서양의 동양 학자들, 특히 베버(Max Weber)는 동양의 유학자들이 고전적 대가들의 정통적 해설의 고정된 규준에 얽매여 있으며 경서에 속박되어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해 이상향을 과거에 둠으로써 동양 사회는 역사 발전이 없이 정체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온고지신’의 ‘고故’는 ‘신이호고信而好古’의 ‘고古’와 같이 옛것을 말한다. 그런데 동양 고전에서 ‘고古’의 쓰임을 다시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동양 고전에서 흔히 “고인古人이 이르시되”, “선인先人이 말씀하시되”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인용구를 볼 수 있다. 여기서 ‘고인’과 ‘선인’은 단순히 옛 사람, 죽은 사람, 앞서 산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옛 성인聖人과 선각자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온고지신’과 “술이부작, 신이 호고”에서 ‘옛것’(故=古)은 바로 이러한 성인의 말씀과 가르침이다. 그들의 가르침을 ‘술이부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옛 사람의 말을 절대시하여 전달하거나 전통의 가르침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술이부작의 내용으로 무엇을 서술하고 무엇을 짓지 않는지가 검토되어야 한다.

 

노자老子는 “성인은 나아가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파악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이룬다”9)고 하였다. 결국 동양에서 성인은 도道를 알고 천명天命을 알아 그러한 이치를 있는 그대로 일러주는 사람이며 우주의 운행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은 곧 천명이고 도와 동일시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술’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술’하는 것이다. ‘짓지 않는다’(不作)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어긋나게 함부로 지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다만 그러한 진리를 믿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옛 성인을 스승으로 본받는 이유도 바로 그들이 ‘술이부작’하기 때문이다. 즉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는 사람이기에 믿고 따르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믿음은 단순한 종교적 신앙이 아니다.

 

9) 老子, “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북계자의北溪字義』에 의하면, 믿음(信)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한 것”(從首至尾, 皆眞實), “실질적으로 행하여 거짓되지 않은 것”(誠然而不妄), “말한 대로 실천하기를 내실 있게 잘하는 것”(所以爲是踐言之實)”, “사물의 실질을 따라 말해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는것”(循那物之實而言, 無些違背他)이다

(陳淳, 1993: 121-129). 따라서 ‘술이부작’ 하고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술이부작’하는 자세는 바로 동양 사상의 학문관과 교육관에 내재하는 고유의 성격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서에 기록된 성인들의 가르침을 통해 제시된 도道, 천명天命, 깨달음 등을 학문 활동과 현실 생활의 궁극적․근원적 목표 내지 준거로 삼고, 그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려는 부단한 실천적 노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동양의 지식인들, 특히 유자儒者들이 성인의 말씀을 따라 ‘술이부작’하려 한 것은 베버가 이해하듯이 단순히 경서에 속박되거나 고전적 대가들의 정통 해설의 고정된 규준에 얽매인 것이 아니다.10) ‘술이부작’은 차라리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이 철학에 대해 말한 바 “철학은 실로 ‘순전히 기술적記述的인 것’으로만 존재하며”(Wittgenstein, 1958: 18), “말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한다”(Wittgenstein, 1988: 90-91)11)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술이부작은 성인의 말씀을 단순히 추종하는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성인이 가르친 ‘쉽게 말할 수 없는 도道’를 함부로 개념 규정하여 억견을 짓지 않고, 그 가르침의 본뜻을 있는 그대로 지시한다는 의미에서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김재범, 2001: 80-81).

 

10) 베버는 儒敎와 道敎(1990: 181∼189)에서 중국의 교양이 한편으로는 완전히 세속적인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적 대가들의 정통 해설의 고정된 규준에 얽매여 있으며, 극도로 문학적․典籍的 성격을 지녔다고 하였다. 또 그는 중국의 교육과 철학이 經書에 속박되어 있으며, 서양의 모든 철학의 핵심적 문제 영역이 중국 철학에서는 인지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공자의 많은 진술이 그 비유적 성격으로 인해 일종의 합리적 논증이라기 보다 오히려 인디언 추장의 표현 방법을 상기시키는 형태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 철학과 교육에 대한 베버의 이런 이해는 단순한 서구 중심주의적 편견일까? 그가 가진 서구합리적 사고의 한계일까, 아니면 당시의 부정확한 자료와 정보 때문일까? 어쨌든 여기서 보이는 베버의 중국 철학에 대한 견해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한 전형 아니면 무지에 가까울 정도의 피상적인 몰이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아직도 국내의 일부 베버 학자 가운데 베버의 이 같은 중국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11) 인용은 박영식 외 옮김, 論理哲學論考(정음사, 1988)의 번역을 일부 수정함. 

 

불교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는 구절도 바로 이런 입장에서 이해할 때 전형적인 고전의 해석 기준과 방법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불교 경전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한다. 이 역시 ‘술이부작’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들어서 되뇌는 것이 아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여시아문’에 대해 ‘이와 같이’와 ‘들었다’를 나누어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먼저 ‘이와 같이’를 풀이한 구절을 살펴보자.

 

"불법의 큰 바다에는 믿음으로 능히 들어가고 지혜로 능히 건너가니 ‘이와 같이’라고 함은 곧 믿음이라, 믿음이 없는 이는 불법에 들어가지 못한다. 믿지 않는 이는 이 일이 이와 같지 않다 하나니, 이는 믿지 않는 모습이거니와 믿는 이는 이 일이 이와 같다 한다( 『大智度論』, 1994: 48)."

 

"불법의 첫머리에 ‘이와 같이’라 하셨으니, 부처님의 뜻은 이와 같이, 나의 제자들은 애착하는 법도 없고 물든 법도 없고 패거리를 지음도 없이 오직 괴로움을 여의어 해탈하고 희론을 떠난 모든 법상만을 구하라 하심이니라( 『大智度論』, 1994: 52)."

 

"또 나의 법은 진실이다, 남의 법은 망어이다, 나의 법은 제일이다, 남의 법은 진실치 못하다 하는 것은 투쟁의 근본이다. 이제 ‘이와 같다’ 하는 이치로 사람들에게 다툼 없는 법을 보이면, 남의 말하는 바를 듣고 남에게 허물이 없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의 첫머리에 ‘이와 같이’라는 말을 두었다( 『大智度論』, 1994: 53)."

 

이러한 풀이를 보면 곧 ‘이와 같이’는 논어 의 ‘술이부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 진실을 서술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귀로써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요, 이식耳識이나 의식意識으로도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여러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니, 한 법이 능히 소리를 듣는다고 말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귀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식識은 빛도 대질對質도 곳(處)도 없기 때문에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리는 감각도 없고 뿌리도 없기 때문에 또한 소리를 알지 못한다. 그럴 때에 귀가 파괴되지 않고, 소리가 들을 수 있는 곳에 이르렀고, 뜻으로 듣고자 한다면 정情과 진塵과 뜻(意)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이식이 생기고, 이식이 생기기만 하면 의식이 능히 갖가지 인연을 분별하여 소리를 듣게 된다( 『大智度論』, 1994: 55).

 

그러므로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러 인연의 화합을 통해 완전히 깨달아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佛法 즉 진리를 사실로 깨닫게 되어 믿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전하는 게 바로 진리(佛法)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사실 동양 고전에 나오는 성인들의 말과 글은 읽고 듣는 사람 각자가 제 스스로의 깨달음이 없으면 알 수도 믿을 수도 전할 수도 없다. ‘술이부작’하지도 못하며, ‘여시아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거나 설명하여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지어내면 바로 이치와 사실을 왜곡하여 견강부회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술이부작’과 ‘여시아문’ 얼마나 고전의 해석에 중요한 기준과 방법인가 분명해진다.

 

동양의 성인(聖)은 귀(耳)와 입(口)이 최고(王)인(聖=耳+口+王), 듣고 말하는 데 능통한 사람 곧 “의사 소통의 달인(Master Communicator)”(Hall and Ames, 1987: 259)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어야 한다기보다는 진리를 그렇게 듣고 알고 말할 수 있으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그런 의미에서 성인이 되어야 다른 성인의 소리를 듣고 이해할 수 있으며,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지어내지 않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치와 사실에 부합하게 고전을 해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듣고 말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고전에 대한 신중한 접근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6. 해석이 안 되는 것은 그냥 둔다

 

위에서 제시한 방법에 따라 해석하더라도 여전히 고전에는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 고전에 기록된 내용이 말해지거나 기록된 시점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불분명한 경우가 있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역사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입장에서 현재진행형으로 해석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진행형으로 해석을 한다고해서 역사적 맥락이나 리理․사事를 무시하고 함부로 견강부회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해석이 안 되는 것은 억지로 해석하지 말고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 낫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12)이라 하였고, 노자는 “알지 못하는 바를 아는 것이 최상이며,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 병이 병인 줄 알면 병이 아니다. 성인이 병폐에 빠지지 않는 것은 병을 병이라 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병 들지 않는 것이다”13)라고 하였다.

모르는 것을 억지로 해석하려 하지 않고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고전에 대한 왜곡과 아전인수식 해석을 막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열린 해석이요 새로이 열어 가는 해석 방법과 자세라 할 수 있다. 「독대학법」에 보이는 주희의 다음과 같은 언명은 고전을 어떤 자세와 방법으로 읽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 준다.

 

12) 『論語』, 「述而」,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13) 『老子』, 71장, “知不知上, 不知知病. 夫惟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대학』 을 볼 때에는 대지大指를 보기를 기다려 다른 책에 미쳐야 한다. 다만 볼 때에 모름지기 다시 큰 단락을 가지고 나누어 작은 단락으로 만들어, 자자구구字字句句를 용이하게 지나쳐 버리지 말 것이요, 항시 암송하고 묵묵히 생각하며 반복하여 연구해서 아직 입에 오르지 않았을 때에는 모름지기 입에 오르게 하고, 아직 통투通透하지 못했을 때에는 모름지기 통투하게 하고, 이미 통투한 뒤에는 순숙純熟하기를 요要하여, 곧바로 사색하지 않을 때에도 이 뜻이 항상 마음과 가슴 사이에 있어 쫓아 보내도 가지 않기를 기다려서야 바야흐로 이 한 단락을 마치고 또 한 단락을 바꾸어 보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기를 몇 단락을 한 뒤에는 마음이 편안하고 이치가 익숙해져 공부하기에 힘이 덜 드는 것을 느낄 때에 곧 점점 득력得力하게 될 것이다(성백효, 1991: 19)."

 

주희의 이와 같은 언급은 현대 해석학에서 말하는 ‘해석학적 순환’을 연상시킨다. 리처드 팔머(Richard E. Palm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문장 전체와의 연관하에서 각각의 개별 단어를 봄으로써만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한다. 그리고 이와 상호적으로 전체로서 문장의 의미는 개별적인 단어들의 의미에 의존한다. 이를 확대해서 보면, 개별적인 개념은 그것이 입각해 있는 맥락(context)이나 지평(horizon)으로부터 의미가 도출된다. 하지만 지평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해 주는 바로 그 요소(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와 부분의 변증법적 상호 작용에 의하여 이들 각각은 서로에 대해 다른 의미를 제공한다. 그래서 이해는 순환적이다. 의미는 이러한 순환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부른다(팔머, 1988: 133-134)."

 

그러나 주희의 고전 읽기는 문장과 문맥의 이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을 읽는 목적이 현대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넘어 도덕적 실천이라는 가치론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구절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대학』을 읽는 것이 어찌 그 언어를 봄에 있으리요? 바로 이 마음에 어떠한가 징험하려고 해야 하니, 마치 호색好色을 좋아하듯이 하고 악취惡臭를 미워하듯이 함을 내 마음에 시험하여, 과연 능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을 이와 같이 하는가, 한가히 거처할 때 불선不善함이 과연 이러함이 나에게도 있는가 하여, 하나라도 지극하지 못함이 있으면 용맹하게 분발하고 뛰어 일어나 그치지 않아야 반드시 큰 진전이 있는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이 할 줄을 알지 못하면 책은 책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일 것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성백효, 1991: 20)"

 

이와 같이 우리가 동양 고전을 읽고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단순히 한문漢文이라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양 고전의 함축적이고 복합적인 성격, 즉 존재론과 인식론, 가치론의 포괄적인 내용이 하나로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흔히 도나 천명, 본성本性, 불성佛性등으로 표현되는 세계와 우주의 본질 및 근원이라는 존재론의 문제가 득도得道, 지천명知天命, 견성見性, 깨달음이라는 인식론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고, 그러한 깨달음을 현실의 삶에서 실현하며 살아간다는 실천의 문제인 가치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인식과 실천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아직 공부가 덜된 것이라고 하는 동양의 학문관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동양 고전을 읽고 해석하면서 해석이 안 되는 것은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Ⅲ. 고전 읽기의 자세: 근기와 지적 공정성

 

여기서는 고전 해석의 방법과 함께 고전을 읽는 자세와 관련된 학인學人의 자질 문제를 동양 고전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베버가 말한 학자로서의 지적 공정성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흔히 선가禪家에서는 학인의 됨직한 기틀을 ‘근기根機’라고 표현한다.

즉 공부에 자질이 있어 보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누어 ‘상근기上根機’, ‘하근기下根機’라고 평한다. 선가의 어록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에는 학인의 근기와 관련된 내용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주희의『논어집주論語集註』 「서설序說」에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논어 를 읽는 사람의 종류를 평하는 말이 나온다. 해당 구절과 그 밖의 고전에서 유사한 구절을 살펴보고, 고전을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하는지 근기의 문제와 함께 논의해 보기로 한다.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를 읽는데, 다 읽은 뒤에 전혀 아무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구절을 터득하고는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알게 된 것을 참으로 좋아하는 자도 있다. 또 다 읽은 뒤에 곧 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을 구르며 뛰는 자도 있다.”14)"

14) 『論語集註』, 「序說」,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이 구절을 읽으며 우선 떠오르는 단상은, ‘어떤 사람들은 자왈子曰 운운하는『논어』는 고리타분한 유교의 봉건 도덕을 얘기하는 것쯤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정자는『논어』를 읽고 춤을 추며 뛸 듯이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까’ 하는 의문이다. 똑같은『논어』를 읽어도 사람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사람마다 타고난 근기 혹은 자질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자의 이 구절뿐 아니라 동양 고전에서는 사람마다 근기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곳곳에서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다음의 구절들은 그러한 근기의 차이를 잘 드러내 설명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며, 답답해서야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지만, 답답해도 배우지 않는 자는 백성으로서 최하가 된다.”15)"

15) 『論語』, 「季氏」,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상급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 실천하고, 중간인 사람은 도가 있는지 없는지 반신반의한다. 하급은 도를 듣자마자 크게 웃는다. 이런 무리가 웃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기까지 하다.16)"

16)『老子』, 41장,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법法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건만,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으므로 돈점이라 한다.17)"

17) 심재열, 『六祖壇經講義』(1992), “法無頓漸, 人有利鈍, 故名頓漸.” 

 

그런데 이러한 근기의 차이는 단순한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읽고 난 뒤 실제 삶에서 개개인의 행동의 변화로 입증되는 것이다. 

 

"정자가 말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논어 를 읽는데,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었는데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이런 사람이라면 곧 이런 사람은 읽은 것이 아니다.”18)"

18) 『論語集註』, 「序說」, “程子曰: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 是此等人, 讀了後, 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오직 가장 지혜로운 자와 가장 어리석은 자만 움직이지 않는다.19)"

19) 『論語』, 「陽貨」, “子曰: ‘唯上知與下愚不移.’” 

 

그렇다면 과연 근기는 타고난 것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후천적인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여지는 없는가? 기본적으로 타고난 자질을 인정하면서도 동양 고전에서는 근기의 문제를 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스스로의 공부 자세와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비록 근기의 차이가 있어 궁극의 도를 아는 데 쉽고 어려운 차이는 있지만 앎에 도달해서는 그 앎이 똑같다고 한다. 

 

"염구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부족한 사람은 중도에서 그친다.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는 것이다.”20)"

20) 『論語』, 「雍也」,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고 말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21)"

21) 『論語』, 「衛靈公」, “子曰: ‘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것(達道)을 알고, 혹은 배워서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이것을 아는데, 앎에 미쳐서는 똑같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 이것을 행하는데, 그 성공함에 미쳐서는 똑같다.22)"

22) 『中庸』, 20장,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결국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상근기와 하근기는 반드시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과 본인의 자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천적으로 상근기가 되고 하근기가 되는 것은 본인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근기와 상근기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하근기는 ‘곤이지지困而知之’에서 ‘곤困’자의 답답한 모습처럼 앞뒤․상하․좌우가 꽉 막힌 답답한 사람, 스스로 한계를 긋는 사람, 스스로 마음을 닫는(not open-minded) 사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 자만과 열등감을 가진 사람, “내가 그걸 알면 여기 이러고 있겠나?” 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똑똑하다 해도 헛똑똑이일 가능성이 높다.

마음을 비웠다며, 그 비웠다는 교만과 아만으로 꽉 찬 사람도 답답한 하근기이다. 가장 하근기는 진지한 문제 의식에서 나오는 어떤 의심이나 의문도 없이 무조건 고전의 권위를 믿으며 맹신적 추종자가 되는 사람이다.

테야르 드 샤르뎅 신부는 “크리스천이 되지 말라! 그리스도가 되라!”(Don't be a Christian! Be a Christ!)
고 설교했다 한다. 동양 고전이 하근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추종자(follower)가 되지 말라!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라! 기독교 신자나 불교 신자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가 되고 부처가 되라!(Don't be a Christian! Don't be a Buddhist! Be a Christ! Be a Buddha!)

 

반대로 상근기는 마음을 열고, 항상 ‘지금 & 여기’를 살피고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깨친다’는 것은 ‘마음이 열린다’ 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여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언하言下에 깨칠 수 있다. 마음이 열리고 깨닫는다는 것은 국집한 소견과 편견, 선입견이 타파되고, 자기 안의 의혹과 미혹이 타파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상․하근기의 차이는 학력의 고하, 상대적 지식의 유무나 과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세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문맹이었다는 육조 혜능대사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된다.

동양 고전에서 궁극적인 학문의 목표인 성인의 길, 깨달음의 길은 세속적인 상대적 지식이나 허세로는 이를 수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 알지 못하는 줄 아는 데서 나오는 의심이 깨달음의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상근기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진지한 문제 의식에서 나온 탐구심으로서의 철저한 의심을 가진 사람, 그것을 통해 자신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심信心을 가진 사람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믿음(信)은 언행이 일치하는 것, 말하는 대로 사실의 실제가 진실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하면서도 말과 행동에 신실함이 없는 사람은 하근기이다. 공부를 하면서 진정한 문제 의식에서 나온 탐구심, 참된 의문과 질문이 없으면 하근기이다.

공자는 묻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했고, 석가는 인연因緣 없는 중생은 제도濟度할 수 없다고 했다. 진지한 의문으로 알고자 노력하고 스스로 인연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상근기이다.

 

석가모니의 출가 동기, 공자의 학문은 곧 의문, 의심에서 출발했다. 이들과 차원은 다르지만,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의 해석학을 탈신비화론이라고 하며, 이들에게 있어 “진정한 사고는 회의와 의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팔머, 1988: 78).

어쨌든 학문의 출발선에서 요구되는 상근기의 자질과 자세는 세계의 본질을 철저하게 규명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또 그 일을 성취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모든 현상과 기존의 일체 사고에 대한 문제 의식으로서의 방법론적 회의를 철저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근기의 문제를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지적 공정성”의 문제와 연결시켜 논의해 보기로 한다.23)

베버는 합리화와 주지주의화, 세계의 탈주술화를 특징으로 하는 시대의 학문에는 솔직한 지적 공정성 이외에는 어떤 덕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베버, 1994:56-57).

물론 이런 주장은 당시의 일부 학자들이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혼동하고 강단 예언을 일삼는 것에 대한 우려와 비판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베버의 학문관의 한계라는 점 또한 분명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베버 자신이 근대 철학의 ‘인간과 자연’, ‘합리와 비합리’라는 이원론과 이분법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합리화의 신화에 매여 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3) 이후 베버의 지적 공정성과 관련된 논의는 김재범(2001: 168과 254-257)을 참고하여 일부 재인용함.

 

"학문은 오늘날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각과 사실 관계의 인식에 이바지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행해지는 ‘직업’이지 구원재救援財와 계시를 주는 예견자나 예언자로부터 받는 은총의 선물이 아니며 또한 세계의 의미에 대한 현인賢人과 철학자의 반성의 일부분도 아닙니다(베버, 1994: 51)."

 

베버는 이와 같이 학문을 종교나 철학적 반성과 엄밀히 분리한다. 그에게 종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신앙으로서 소유하는 것이지 지식이 아니다(베버, 1994: 54). 즉 베버에게 종교는 불합리한 것이기에 신앙으로 소유하는 것일 뿐 이해나 설명으로 알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또 그에게는 철학자의 반성도 학문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베버의 학문관은 엄밀한 사실 판단에 의한 현실 과학과 경험 과학으로서의 사회 과학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사회 과학이 맞는 한계와 위기의 한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도대체 반성 없이 어떻게 학문이 가능한가? 인간의 사회적 행위와 “타자에 대한 해석은 도덕적 차원을 내포하기 때문에”(블레이처, 1987: 252) 인문 과학뿐 아니라 사회 과학도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인간 본성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면하지 않고는 한 사람의 사회과학자가 될 수 없다”는 트리그(R. Trigg, 1985: 205)의 말이나 테일러(C.Taylor)의 다음 논변은 인문 사회 과학의 어떤 분야도 예외일 수 없다.

 

"인문 과학은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인문 과학은 동시에 도덕 과학이기 때문이다.…… 인문 과학이 성공하려면 자신의 생활 방식에 뿌리를 두고 표현되는 오류나 환상에서 벗어나 높은 정도의 자기 인식을 먼저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블레이처, 1987: 253)."

 

또 베버의 종교관도 동양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있다. 베버가 말한 것처럼 동양의 종교는 불합리하기에 믿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신앙으로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동양의 종교는 학문과 수행이 분리되지 않는 공부이다. 설령 서구 근대의 합리성이라는 기준과 인식론상의 용법에 비추어 보더라도 동양의 종교는 ‘비합리적’24)일 수는 있어도 ‘불합리’ 한 것은 아니다. 종교를 불합리한 것으로 보는 것은 베버의 종교관이 기독교적 종교관, 특히 근대 이후의 철학과 과학 등 학문 일반과 분리된 종교 개념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전통 종교에서는 베버 식의 종교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는 학문과 종교를 분리하지 않고,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는 궁극적 깨달음을 최종 목표로 제시하며, 앎과 체험, 종교적․도덕적 자기 수양과 사회적 윤리의 실천을 하나로 보고 있다. 맹자孟子와 중용中庸의 학문관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 준다.

 

24) ‘비합리적’이라는 말은 근대의 인식론적 용법으로, 베르그송이 지적했듯이 ‘측정되지 않는다’, ‘양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는 분석적 이성으로는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는 실재의 어떤 측면을 뜻하는 것이다(이정우, 2000: 284-285).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찾을 줄 모르니, 애처롭다! 사람이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찾을 줄 알면서도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 모르는구나. 학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없다. 그 잃어버린 마음(放心)을 찾는 것일 뿐이다.25)"

25)『孟子』, 「告子上」, 11장, “仁, 人心也, 義, 人路也. 舍其路而不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人有鷄犬放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

 

"넓게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26)"

26)『中庸』, 20장,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이러한 학문관은 배움이 종교적․도덕적 실천과 결부되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학문이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인仁을 찾는 것이고, 인을 찾는 것은 의義를 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정이程頤가 『중용』 에서 말한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폐廢하면 학문이 아니라고 했듯이,27) 학문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과는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7) 『中庸集註』, 朱熹註, “程子曰: ‘五者, 廢其一, 非學也.’”

 

결국 이 같은 동양 고전의 학문관에 비추어 보면 베버를 포함한 오늘날 대다수의 사회 과학자들은 테일러의 말처럼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스스로 “이해 능력이 부족”한 것을 합리적이니 과학적이니 하는 구실로 변명하며 자신의 무지를 합리화하고 지적 기만에 빠져 있는 하근기들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베버가 말한 “솔직한 지적 공정성”이라는 것이 과학과 전문적인 직업이라는 이름 하에 종교는 물론 철학자의 반성마저도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이라며 사회학의 탐구 활동에서 배제하고 거부해 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하고 아직은 모르지만 더 탐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한 지적 공정성일 것이다.

모든 학문에서 학자의 자기 성찰과 반성․자각은 결코 배제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이란 이름
하에 그러한 가치의 문제나 반성은 사회 과학의 탐구 대상과 목표가 될 수 없다고 미리 경계짓는 것은 마치 먹어 보지도 않고 “저 포도는 시다” 라고 한 이솝우화 의 여우와 다를 바 없다. 이는 자신의 무지와 무능의
한계를 과학의 이름을 빌려 합리화하거나, 기껏해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적 자기 기만일 뿐이다.

동양 고전의 근기론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자세야말로 자기 스스로를 미리 한계 짓고, 철저한 문제 의식과 탐구 정신으로서 의문과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 하근기의 자세이다. 오늘날 인문 사회 과학이 맞고 있는 위기는 어쩌면 과학과 지적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정작 중요한 문제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학자들의 이 같은 자기 기만적 자세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김재범, 2001: 14). 

 

Ⅳ. 맺음말

 

어느 누구도 고전을 완벽하게 재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과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역동적 해석 활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데 유일하고 절대적인 방법이 있을 수 없듯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고전 해석 방법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관점과 방법을 문제삼고 그 기준을 나름대로 제시해 본 것은, 다만 ‘어떻게 하면 왜곡과 해석의 오류를 최소화하면서 고전을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되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함께 나누며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자는 제안을 하려는 것일 뿐이다.

앞서 제시한 해석 관점과 방법은 그러한 제안을 몇 가지 구체화한 것이다. 이 제안은 더 나은 제안에 의해 언제든 수정될 수 있고, 또 그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와 함께 고전을 대하는 자세로서 근기와 지적 공정성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근대 서구 학계에서 정립된 표준 과학관의 입장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동양 고전을 해석할 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고전이라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는 엄밀하고 비판적인 자세로 읽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또한 반대로 고전을 그저 단순한 과거의 텍스트로만 간주하여 분석적으로만 읽고 해석하면 그 근원적인 뜻은 간과한 채 수박 겉 핥기 식의 해석으로 그칠 우려가 있다.

사실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동양의 고전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너무 게을리 했다. 대개의 경우 동양 고전의 근원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탐색은 결여한 채 그저 서양의 이론과 방법론을 빌려다가 지극히 표피적인 요소들을 분석하고 분류해내 기능적 평가를 하기가 일쑤였다.

이 점에서 어쩌면 해석의 관점과 방법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자세인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역사를 가진 나라치고 우리 나라만큼 전통을 일시에 팽개친 나라는 거의 없을 것이다. 서구 학계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발빠르게 수입하면서도, 왜 그러한 논쟁이 그들의 고대 전통 사상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의 고전을 돌아보고 재해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해석의 관점과 방법에 대한 논의와 함께 우리가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면피나 하려는 지적 공정성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참으로 솔직한 지적 공정성과 철저하고 근원적인 문제 의식을 가진 학인의 근기가 요청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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