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의 차별정책/일제가 더럽힌 우리 고대사

rainbow3 2019. 10. 8. 12:57


[다시 쓰는 고대사]

고구려·백제 고유 성씨, 망국과 함께 점차 사라져

 

♣ 통일신라의 차별정책

 

 

통일신라의 성(姓)은 이후 한국인 성의 주류가 됐다. 소위 이·정·손·최·배·설의 6부성과 왕을 배출한 박·석·김이다. 『삼국사기』 엔 석씨와 관련, “탈해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62살이었는데 성은 석(昔)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라고 나온다. 사진은 석탈해 왕릉. [사진 권태균]

 

 

삼한통합은 여러 갈래로 전개될 수 있던 한국사의 방향을 하나의 길로 이끈 한국사상 가장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다. 삼한통합을 통해 백제·고구려 오리진이 아닌 신라 오리진의 한국·한국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려묘지명집성』(제3판, 김용선 편저, 2001)에는 고려인 317명의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백제인·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이름은 없다. 대신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는 이름은 다수다. 박씨나 김씨의 시조 탄생신화나 이씨의 시조 알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사망한 박전지(朴全之) 묘지명에는 “가계는 죽주(竹州)에서 나왔고, 그 선조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로 자줏빛 알에서 태어났다. 그 알이 박(瓠)과 같았으며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향인들이 박(瓠)을 박(朴)이라 하였기에 성을 박이라 하고, 그 능을 봉하여 천흥(天興)이라 했다. 군(君, 박전지)은 자(혁거세)의 계통을 이은 삼한벽상공신 박기오의 13세손이다”고 나온다.

 

김봉모(金鳳毛) 묘지명에는 ‘김씨 가계는 신라 왕실에서 나왔다’고 하며 탈해왕이 김씨의 시조가 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한다.

 

 

김유신의 김씨도 왕을 배출한 신라 3성의 하나이며 현대 한국의 가장 큰 성(姓)의 하나다.

 

 

“시조는 금궤에서 나왔기에 김(金)을 성으로 삼았다. 김씨 자손이 이어져 왕에 오른 이가 50여 명이 되었다. 우리 태조가 통일하려고 하니, 왕은 형세가 힘껏 싸우지 못할 것임을 알고 나라를 들어 귀부했다. 태조가 상보(尙父) 정승공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보다 위에 두었으며 장녀 산란 공주를 처로 삼게 했다.”

 

희종 5년(1209)에 세상을 떠난 김봉모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나온다.

 

1376년 사망한 이제현의 묘지명에는 “공의 이름은 제현(濟賢)이고 자(字)는 중사(仲思)이며 아버지의 성은 이씨(李氏)다. 신라 시조 혁거세 때의 좌명대신(佐命大臣)으로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있었다”고 나온다. 고려 묘지의 많은 인물의 시조는 신라인으로 적혀 있다.

 

『한국의 성씨와 족보』(이수건, 2003)를 통해 대신라 이후 한국 지배세력의 실상을 볼 수 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멸망시키며 많은 공신을 책봉했다. 이들 삼한 공신은 고려의 각 주·부·군·현마다 토성(土姓)을 가진 몇 개의 세력을 인정해 주고, 해당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했다.

 

고려 지배 세력도 신라인이 시조

 

신라 말 왕경인도 고려 초 여러 곳으로 이주하면서 토성을 받았다. 전주로 이주한 종성 중 김씨는 전주 김씨가 되고, 육부성 중 이씨는 전주 이씨가 됐다. 원래 신라인들을 포함해 토성을 가진 세력들은 고려 지배세력인 향리층이 되었다. 고려의 향리층은 조선의 양반층으로 이어졌다.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의 많은 본관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김씨·이씨·최씨·박씨·정씨 등의 성을 가졌다. 백제나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이나 본관을 찾기는 어렵다.

 

6회에서 신라는 피정복민 차별정책을 펴서 지방에 살던 옛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진촌주층(신라 왕경의 5두품에 해당하는 대우, 현재의 면장 정도 지위)까지만 대우했다고 했다. 지방에는 그 이상 줄 자리도 없었다. 거기에 전국 주·군·현·소경의 하부 지방조직인 행정촌(현재의 면 정도)에는 왕경인을 내시령(內視令)으로 임명해 촌주를 통제했다.

 

이렇게 하여 원래 신라의 지방민뿐 아니라 옛 백제와 고구려 지방의 피정복민들까지 왕경인들과의 사회·정치적 간격을 ‘좁힐 수 없을 만큼’ 벌려 놓은 것이다. 그것이 신라 골품제 사회였다.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는 왕국 전체의 주요 관직과 상층 신분은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서라벌 소국(또는 사로국 등으로 불렸음) 사람들의 차지였다. 진한 소국들을 정복한 서라벌 소국은 신라 왕국의 서울인 왕경이 되었고, 서라벌 소국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여 왕경인(서울사람)들이 탄생했다.

532년에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 구해(또는 구형)와 그 일족과 같이 신라에 항복했거나 정복당한 피정복민들 중 일부가 왕경으로 옮겨져 왕경인이 되기도 했다.

 

원래 왕경인은 육부성(六部姓)과 종성(宗姓)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 나오는 육부성부터 보자.

“진한(서라벌)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인데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 방면이다. (촌)장은 알평이며 그가 처음 표암봉에 내려왔으며 급량부 이(李)씨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고허촌인데 장은 소벌도리이며 그가 처음 형산에 내려왔다. 이가 사량부 정(鄭)씨의 조상이 되었다.

셋째는 무산대수촌인데 장은 구례마이며 처음 이산에 내려왔다.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孫)씨의 조상이 되었다.

넷째는 자산진지촌인데 장은 지백호이며 처음 화산에 내려왔고 본피부 최(崔)씨의 조상이 되었다.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인데 장은 지타이며 처음 명활산에 내려왔고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 되었다.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장은 호진이며 처음 금강산에 내려왔고 습비부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

(『삼국유사』 1, 기이 2, 신라시조 혁거세왕)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에 최씨, 본피부에 정씨로 바뀌어 있지만 신라 건국신화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다수가 사용하고 있는 육부성(이씨·정씨·손씨·최씨·배씨·설씨)의 시조를 알 수 있다. 혁거세가 등장하기 이전 6촌장들이 각 촌의 최고 지배세력으로 있을 때 한자(漢字) 성을 사용했을 리 없다.

6촌의 촌락민들은 알평 등 시조를 기억하고, 촌장들을 기억하며 그 씨족을 유지해 나갔다. 후에 한자식 성을 사용할 때 비로소 이씨 등의 성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박씨·석씨·김씨의 종성(宗姓) 또는 천강성(天降姓, 왕을 배출한 성)의 기원이다. 『삼국사기』엔 “(신라)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기원전 57년)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이다. 그때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 탈해왕 즉위조에는 “탈해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62살이었는데 성은 석(昔)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라고 나온다. 또 탈해왕 9년 조에는 금성 서쪽 시림의 작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나온 알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가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씨라 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 통일로 한국사 무대 좁아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라 초기의 왕을 배출한 박씨·석씨·김씨의 종성(宗姓)과 건국신화나 유리왕 9년에 주었다는 이씨·정씨·손씨·최씨·배씨·설씨의 육부성(『삼국사기』의 순서)이 한국인의 다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신라인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까지 포함하면 한국인의 태반이 신라인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이 통계를 그대로 믿자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역사의 대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신라로 합류한 백제·고구려인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피정복민이 됐다 해도 피는 계속 흐를 것 아닌가. 진촌주층으로 편입된 피정복민은 혈족을 유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원래 신라인들과 혼인해 혈연적 유대를 맺고 시간이 지나며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 신라인이 되어 갔다.

 

평인(백성)이 된 사람들은 도태의 흐름에 쓸려 갔다. 당시 평인의 삶은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48, ‘효녀지은 조’엔 궁핍한 사정이 나온다.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 지은은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나이 서른둘에 시집을 가지 못했다. 품을 팔고 밥을 얻어 어머니를 먹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쌀 10여 섬에 몸을 팔아 부잣집의 종이 됐다. 낮에는 종일 주인집에서 일하고 밤에 돌아와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그런 사정을 알고 두 사람이 통곡을 했다.” 신라인이 그럴 정도다.

 

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된 『촌락문서』도 참고할 만하다. 신라 촌락에는 노비가 된 평민들이 있다. 촌주의 일족들이 평인으로 신분이 떨어지기도 하고, 평인들은 결혼을 못해 가족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노비로 몸을 파는 일도 벌어졌다. 그런 이들 가운데 백제·고구려 사람들의 피가 흐르긴 할 것이다. 그러나 대신라시대에 신라인으로 정체성이 바뀌면서 피가 흐려지거나 사라져 간 것이 피정복민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고조선·백제·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들은 대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현재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면 한국인은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현재 한국인은 없을 것이고, 한국사를 이어 온 왕국들도 신라·고려·조선이 아니라 고구려를 이어 또 다른 나라들이 이어졌을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결과 한국사의 무대가 좁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혈족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인가?

 

현재도 경주에 있는 신라의 종성(박씨의 숭덕전, 김씨의 숭혜전, 석씨의 숭신전)과 육부성 등 시조나 조상을 모신 사당이나 태종무열대왕왕릉 등에서 전국에서 온 후손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들은 한국·한국인·한국사회·한국문화의 오리진이 신라라는 역사적 코드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쓰는 고대사]

임나설 정당화 노린 일본 “내물왕 이전 기록은 허구” 억지

 

일제가 더럽힌 우리 고대사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 고대사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왜곡은 와세다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교수가 출발점이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역사, 『일본서기』 『고사기』에 나오는 고대 일왕의 기록을 근거가 없다고 비웃었다. 일본 민족의 한반도 도래설을 차단하고 지배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런 학설을 한국인 학자들도 받아들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왜인(倭人)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함께 일본 상대(고대)사를 밝힐 수 있는 사료다. ‘신라본기’의 기록을 보자.

 

“왜인들이 군대를 끌고 와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뛰어난 덕이 있음을 알고 돌아갔다.”(혁거세왕 8년, 기원전 50년)

 

“왜인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 왕이 친히 나가서 싸우니 적이 달아나므로, 날랜 기병이 뒤쫓아 1000여 급을 베었다.”(조분왕 3년, 232).

 

왜인·왜병들은 신라 왕도의 금성·월성·명활성을 기습하기도 했다. 눌지왕 24년(440)에는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을 약탈해 갔는데 6월에도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은 소지왕 22년(500)까지 30여 건 나온다. 기록에 등장하는 왜인·왜병들은 소규모 도둑들이었고, 거의 잡혀 죽었다.

 

『일본서기』에는 스잔오존(『역주 일본서기 1』)의 신라 방문 신화가 나온다. 또 『고사기』에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도래했다고 써 있다. 이런 신화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와 교류했고 일본이 한반도 고대국가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의 진실들은 2000여 년이 지난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학자와 그들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자에 의해 왜곡됐다. 왜 그랬는가.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한국을 폐멸(廢滅)시키는 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하고 8월 29일 공표했다. 폐멸이라는 단어는 너무 과격했던지 당시 잘 쓰지 않던 병합이란 단어를 써 ‘병합조약(倂合條約)’이라고 꾸몄다.(요시노 마코토, 한철호 역,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2005) 이후 일본 식민학자들은 실증사학을 내세우며 한국사 폐멸 작업을 했다. 소위 식민사학이라 불러왔던 것인데 필자는 이를 폐멸사학이라 불러도 좋다고 본다.

 

이들의 대표적 죄악이 신라 내물왕(재위 356~402년) 이전의 역사에 침묵하고 은폐한 것이다. 그 역사는 신라 천년사의 5분의 2나 된다. 신라뿐 아니라 한국사에 영향을 미친 정치·사회·문화의 구조적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현재 다수의 한국인이 사용하는 종성(宗姓)과 육부성(6部姓, 김·이·박·최 등)의 시조 모두 내물왕 이전에 등장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그 시기에 들어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꼬집어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국사 폐멸을 추구하던 일본인 연구자들이 이 대목을 지나칠 리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왼쪽), 경주에 있는 내물왕릉.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 신라의 역사를 침묵시킨 최초의 일본인은 일본 최고의 역사가라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다. 와세다대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신연구, 1919; 『쓰다 소키치전집』(이하 『전집』) 별권 1, 1966)라는 논문에서 장황하게 신라의 기록을 짓밟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상대(고대) 부분에 왜·왜인 기사가 풍부하게 포함돼 있다. 이 중에는 『고사기』 『일본서기』와 함께 일본 상대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인 것처럼 생각된 것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상대 부분은 역사적 사실을 기재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이 점) 동방 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 사이엔 이론이 없어 왜에 관한 기록들도 마찬가지로 사료적 가치가 없다….”

 

그러면서 당시 유행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료를 근거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료를 비판하는’ 방법을 썼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료’로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과 그 안에 인용된 ‘위략(魏略)’을 꼽았고 그것을 최초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3세기 신라는 진한 12국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소부락이라 못 박았다. 나아가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기록 전체가 조작된 것이라 했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건국신화에 나오는 ‘조선유민’은 기자나 위만 조선계 중국인이다. 신라인에 중국인이 안 나타나는 것이 문제다.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설화이므로 믿기 어렵다.

▶3세기까지 진한의 한 소부락이었던 신라가 파사왕대(80~112)에 음즙벌국·실직국·압독국 등을 병합했다는 것은 『삼국지』 ‘한전’의 기록에 배치된다. 그러므로 영토 관계 기록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왕실 계보도 혁거세·탈해·알지의 출생 이야기는 모두 설화이지 사실이 아니다.

▶왕에 덕이 있다는 등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중국 사상의 소산으로 사실이 아니다.

▶신라의 기년과 역대 국왕의 세계(世系)도 모두 허구다.

▶그래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상대 부분 기사는 거의 공허하다.

▶4세기 후반~5세기에 걸쳐 일본(왜)이 가야를 근거로 삼아 신라와 대적했다는 명백한 사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에 관한 기사를 취할 수 없다. 이는 쓰다 소키치가 소위 임나일본부가 가야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의 배경이다.

▶실성이사금(402~417) 무렵에도 허구적 기사가 있고 이전 내물이사금(356~402) 무렵, 즉 왜병이 처음으로 신라를 압박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기사도 다른 확실한 사료의 기록과 비교할 대상이 없어 신용할 수 없다.

▶어느 나라의 상대사도 특수한 의도에 따라 조작되는 경우가 있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로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크게 10대 주장이다.

 

그런데 쓰다의 ‘신라본기’에 대한 비판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가 ‘믿을 수 있다’고 여긴 『삼국지』 ‘위서 한전’은 일종의 인문지리서일 뿐 신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할 만한 자료가 아니다. 사료 비판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쓰다가 그렇게 한 데는 목적이 있다. 내물왕 이전 기록을 사료로 인정하면 신라는 1세기 중반~3세기 중반까지 현재 경상북도 일대를 정복한 왕국이 된다. 그런데 그런 사실(史實)이 쓰다에겐 유감이다. 내물왕 이전·이후 왜는 신라에 비교할 수 없는 약한 세력이었고 그러면 임나일본부설은 성립할 수 없다. 이에 신라의 성장을 은폐하기 위해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기록을 조작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쓰다의 주장에 영향받은 한국 연구자 때문에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불신받고, 『삼국지』 ‘위서 한전’을 근거로 삼한론이 펼쳐져 왔다. 필자는 두 사서를 모두 중요한 사서로 이용해 왔다. 서로 다른 면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둘을 종합하면 역사는 한 권만 볼 때보다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여전히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쓰다 소키치는 어떤 역사가였을까. 세키네 히데유키(關根英行)의 ‘쓰다사학(津田史學)의 신대사(神代史·고대사) 해석과 한·일 민족의 계통관계’(일본사상 12, 2007)를 보면 몇 가지 특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쓰다는 황국사관에 강력히 맞선 연구자처럼 돼 있지만 실제론 “…황실과 국민은 본래 일체이며 멀리 떨어진 대립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뼈와 살처럼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본래 끊을 수 없는 관계, 끊어서는 안 되는 관계이며 그러므로 만세일계다”(『전집』 별권 1, 2)라는 말을 했다. 황국사관으로 천황제를 옹호한 것이다.

 

둘째, 쓰다는 “4~6세기 한반도와 이에 연결된 대륙의 민족 할거의 형세 때문에 어느 민족도 바다 건너 일본으로 진격해 온 적이 없다”(『전집』 3권)고 했다. 일본의 단일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단절시키는 역사를 만들었다.

 

셋째,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제1대 진무천황(神武天皇·기원전 660~585)에서 추아이천황(仲哀天皇·기원후 192~200)까지의 고대사나 초기천황 기사에서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고 다만 고대인의 사상을 밝히는 데만 의미가 있다고 했다. 소위 ‘쓰다사학’으로 학계에 수용돼 일본 정복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도래설’의 근거를 차단한 것이다.

 

결국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의 왜·왜인 관계 기록, 나아가 그 전체 기록을 조작된 것이라고 외면하는 것은 일왕(천황)제를 옹호하고 일본 민족의 한반도 도래설을 차단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물왕 이전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한국인의 역사인식을 말살의 길로 끌고 갔다. 첫째, 일선동조론을 도왔다. 그는 일선동조론을 부정했지만 한국인의 신라 오리진에 대한 역사를 잘라냄으로써 일선동조론을 펼 바탕을 마련했다. 둘째, 창씨개명을 도왔다. 일본은 1940년 2월 11일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국인이 강력하게 유지해온 부계나 종족 의식을 파괴하고 일본의 가(家)를 단위로 한 씨(氏)를 만들어 천황제의 가족들로 편제시킨 것이다.(요시노 마코토 지음, 한철호 옮김, 앞의 책)

 

역사가의 조그만 논문 하나가 큰 후과를 초래했다. 쓰다가 침묵을 강요했던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는 ‘오리의 각인’이 돼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삼한론의 문제 그리고 한국인에게 특별한 역사인 내물왕 이전 역사는 다음 편에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