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기억, 정신분석학 그리고 내러티브 치료*
이민용 (강원대)
I. 들어가며
우리 인간의 역사는 외상(trauma)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태초부터 자연이 일으켜온 화산, 지진, 홍수 등의 공포스러운 사건이나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한 전쟁, 살인, 폭력 등의 사건은 인간에게 외상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이런 외상적 사건들을 놓고 가족, 친지 등과 이야기하고 그것들을 또 신화, 전설, 민담 등의 이야기에 담아 표현하며 그 외상의 아픔들을 수용하고 치유해 왔다.
외과에서 일반적인 ‘외상’을 의미하는 것과 달리, 정신의학계에서는 ‘정신적 외상’을 일컫는 트라우마(trauma)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 된일이 아니다. 트라우마 연구는 미국에서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어 9.11 테러 생존자 및 희생자 가족, 중동전 참전군인, 아프리카 종족 학살의 생존자, 2차대전기의 유대인 학살 생존자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회적 관심 대상으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광주 민주화 운동,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 제주도 4.3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연구에서 트라우마가 다루어진 적이 있고, 최근에는 2014년 4월의 세월호 사건에서 대규모 인명피해가 나면서 그 유족들에 대한 관심에서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적 접근 필요성과 그 방법을 놓고 지난 한 해 논의가 크게 확산된 적이 있다.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용어는 1970년대 중반 post-vietnam syndrome(베트남전 후유 증후군)과 연관되어 등장하여 1980년에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DSM-IV>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이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한 군인들을 대상을 한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서,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페미니즘 운동에 힘입어 가정폭력이나 성학대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서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2003년 191명의 사망자를 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이후 PTSD에 대해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트라우마로 인한 PTSD는 당사자의 인생을 파탄내고 주변 가족 등의 삶도 무척 힘들게 하는 것이어서 반드시 해결돼야 할 문제이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경험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1) 그러나 PTSD의 핵심적인 특징이 과잉 각성과 회피이어서, 정신적 외상 환자들은 악몽과 플래시백(flashback)에 시달리고 그때마다 과잉각성을 경험해서 당시의 사건 현장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뛰고 땀이 나고, 공포감의 고통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트라우마 사건을 떠올리거나 말하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래이션’과 ‘외상’은 서로 극적으로 반대 지점에 놓여 있고 상호 배타적으로 보일 수 있다.2)
트라우마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가 힘들고, 그 기억들이 너무 파편적이어서 그렇게 하려고 해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분석학 자체가 내러티브라는 피터 브룩스의 언급에서도3) 알 수 있듯이 마음의 문제를 치료하려면 대부분 내러티브를 통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트라우마 치료와 내래이션, 이 두 개념이 매우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4)
이런 점에서 PTSD로 고통 받는 내담자에게 내러티브를 어떻게 활용하여 치유의 길로 이끌 것인가 하는 것이 내러티브를 통한 트라우마 치료의 핵심일 것이다.
내러티브는 인류의 모든 문화에 존재하고,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개념으로서 특별히 높은 지적 수준이 요구되지도 않고 대화만 가능하면 어린이로부터 노인들까지 대부분 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내러티브를 활용한 치료는 외상적 사건에서 생존한 사람들의 외상후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범문화적인 개입법이다.5)
공인된 트라우마 치료법으로는 EMDR(안구운동 민감성 소실 및 재처리 요법)과 인지처리치료(CPT), 정신적 외상사건 감소기법(TIR: Taurmatic Incident Reduction) 등이 있다.6)
그런데 트라우마 치료는 EMDR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치료자와 내담자가 상호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글에서는 내러티브를 이렇게 치료의 소재적 차원에서 활용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내러티브 자체의 속성을 잘 알고 활용하면서 내러티브 자체의 치유적 힘을 서사학의 관점에서 치유적으로 활용하여 PTSD 치료를 하는 방법에 접근하려고 한다.
트라우마나 PTSD를 다룬 연구들은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그 중에서 내러티브 진술과 재구성이 트라우마 사건처럼 충격적인 사건에서 받은 심한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에 효과적이라는 연구들도 있다.7) 이것들은 트라우마 경험에 대한 내러티브를 재진술함으로써 외상 경험을 새롭게 인식하고 관계된 정서를 치료할 수 있다는 연구들이다. 내러티브의 이런 치유적 속성은 여러 유형의 트라우마 사건 피해자들에게서 확인될 수 있었다.
전투 참여의 공포, 대량 학살의 참혹함에 휩쓸린 트라우마,8) 재난,9) 자녀가 사망한 충격에 노출되었던10) 생존자들은 자신의 충격적인 경험을 체계적인 내러티브로 진술하고 그 경험을 재구성함으로써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고 외상 후 성장(PTG: post-traumatic growth)을 경험할 수도 있다.11)
그러나 이런 연구들은 심리학, 상담학, 간호학 분야 등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인문학과 서사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트라우마의 원인과 그 치료법을 내러티브 활용의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에서부터 찾고 내러티브 노출치료(NET: Narrative Exposure Therapy)와 같은 현대의 PTSD 치료를 서사학의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내러티브의 속성을 그러한 치료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연구할 계획이다.
* 이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07-361-AM0056).
1) Maggie Schauer, Frank Neuner, Thomas Elbert: Narrative Exposure Therapy : a short-term treatment for traumatic stress disorders. Massachusetts, USA and Göttingen, Germany : Hogrefe Publishing, 2011, p. 31.
2) Ebd. S. 2.
3) Peter Brooks : Psychoanalysis and Storytelling, Oxford: Blackwell, 1994, p. 76.
4) Schauer, Neuner & Elbert: p. 2.
5) Ebd. S. 3.
6) 릭키 그린월드: 마음을 다친 아동 청소년을 위한 핸드북 (정성운 정운선 옮김), 학지사, 2011, 295-301쪽.
7) 최남희 유정: 트라우마 내러티브 재구성과 회복효과, 실린 곳: 피해자학연구, 제18권 제1호, 2010. 4.; Maggie Schauer, Frank Neuner, Thomas Elbert: Narrative Exposure Therapy : a short-term treatment for traumatic stress disorders. Massachusetts, USA and Göttingen, Germany : Hogrefe Publishing, 2011.; Ricky Greenwald: Child Trauma Handbook, The Howorth Press, Inc. 2002; J. H. Harvey, T. L. Orbuch, K. D. Chwalisz and G. Garwood: Coping with Sexual Assault: The Roles of Account-Making and Confiding. journal of Traumatic Stress 4, 1991, pp. 515-31.; D. Meichenbaum and D. Fitzpatrick: A Constructivist Narrative Perspective on Stress and Coping: Stress Inoculation Applications. In: L.Goldberger and S. Breznitz(eds.) Handbook of Stress: Theoretical and Clinical Aspects. New York: The Free Press, 1993, pp. 706-23; B. A. van der Kolk and R. Fisler: Dissociation and the Fragmentary Nature of Traumatic Memories: Review and Experimental Confirmation.Journal of Traumatic Stress 8, 1995, pp. 505-25.
8) K. Sewell: Constructional Risk Factors for a Post-traumatic Stress Response Following a Mass Murder. Journal of Constructivist Psychology, 9, 1996, pp. 97-108.
9) 최남희: 재난 생존자 경험의 내러티브 분석 재난 간호를 위한 제언, 대한간호학회지 제35권 2호, 대한간호학회, 2004, 407-418쪽.
10) E. M. Milo: Maternal Responses to the Life and Death of a Child with Developmental Disability: a Story of Hope. Death Studies. 21, 1997, pp. 443-476.
11) R. G. Tedeschi and L. G. Calhoun: Posttraumatic Growth: conceptual Foundations and empirical Evidence. In Psychology Inquiry, 15(1), 2004, pp. 1-18. ; 김지영 장현아: 외상후 성장 연구의 국내 동향과 과제, 인지행동치료 14(2), 2014, 239-265쪽.
II.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본 정신분석학의 트라우마 원인 진단 및 치료 방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생명을 위협한다고 느낄 정도의 심각한 충격적 사건을 당하거나 직접 목격하고 그 후유증으로 불시에 찾아오는 환상과 과잉 각성, 분노, 우울증, 기억 상실, 판단력 마비 등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는 것을 말한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DSM-5>에12) 따르면 PTSD 진단의 기준은 외상사건, 침습증상, 회피행동, 과잉 각성 증상, 일상 기능의 현저한 감퇴, 1달 이상의 증상 지속성 등이다.
여기서 외상사건은 인재와 자연재해 두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인재로 인한 외상 사건은 전투 참여, 집단학살의 목격, 전쟁포로 경험, 고문, 강간, 심각한 교통사고 등이 있고, 자연재해로 인한 외상 사건은 지진, 화산폭발, 태풍, 홍수 등이 있다. 이외에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 역시 피해자나 직접 목격자가 사건 도중에 생리적 경보상태에 휩싸이고, 사건 당시 공포나 무력감을 느꼈다면 외상으로 고려될 수 있다.13)
PTSD 진단의 기준으로서 침습증상은 외상사건에 대한 만성적 재경험, 즉 악몽과 플래시백(flashback)을 말하는데, 악몽이 잠들어 있을 때 힘들게 한다면, 플래시백은 깨어 있을 때 괴롭힌다.
한편 회피행동은 사건과 관련된 사람이나 장소를 회피하고 사건에 대하여 말하거나 생각하기를 피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외상 기억 촉발 단서에 대한 적극적 회피와, 타인과의 분리감, 정서적 둔감화, 해리감 등과 같은 수동적 회피로 나뉜다. 한편 일상생활 기능의 현저한 감퇴는 불안장애, 우울, 직장 결근,자살 충동 등으로 나타난다.
트라우마의 피해자들은 반복되는 침습 기억과 악몽 때문에 신체건강이 악화될 수 있으며, 그래서 삶에 의미를 못 느끼고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외상사건을 겪으면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도 손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로 인한 연쇄 반응은 호르몬과 신경 활동에 변화를 주어 뇌와 신체가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신체기관이 여러 곳에서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류와 대사활동이 증가되며 근육의 긴장이 높아지고, 소화가 잘 안되며 면역력이 급속히 떨어진다.14)
그런데 이러한 트라우마에 관한 논의는 일찍이 정신분석학 연구 초창기 때부터 있어왔다. 이것은 외상성 히스테리와 관련해서 프로이트 Sigmund Freud에게서, 특히 그의 책『히스테리 연구』(1895)에서 확인될 수 있고, 트라우마에 관한 정신분석학계의 중요한 정의로는 그의 글 쾌락원칙을 넘어서 (1920)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호 방패를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외상적>이라고 말한다. 외상(Trauma)의 개념은 자극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처하던 장벽에 어떤 파열구가 생긴 것과 필시 관련 있다고 생각된다.
정신적 외상과 같은 사건은 유기체의 에너지 기능에 대규모의 혼란을 초래하고 가능한 모든 방어적 장치를 가동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15)"
이로써 프로이트는 트라우마를 자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자극이 외부에서 가해졌을 때 때 정신계의 보호 방패가 뚫려 정신계에 일대 혼란이 생기는 사건으로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이 글 쾌락원칙을 넘어서 에서 우리의 정신 기관이 흥분의 양을 가능하면 낮은 상태로, 혹은 그것을 적어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려 노력한다는 항상성의 원칙(Konstanzprinzip)을 지닌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쾌락원칙(Lustprinzip)이 이 항상성의 원칙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래서 흥분의 양을 증가시킨다고 생각되는 것은 흥분을 낮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정신기관의 기능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불쾌한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16)
프로이트에 따르면 외부에서 온 강력한 자극의 공격으로 자아의 방어 방패가 뚫리고 거기에 균열이 생기면 그 틈 사이로 감당할 수 없는 외부 자극이 침입되어 정신계에 큰 교란 사태가 일어나고 ‘쾌락 원칙’이 잠정적으로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곧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트라우마를 정신 기관에 의해서 적절하게 방출될 수 없는 정신적 흥분 상태의 증가(Erregunszuwachs)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정신적 흥분이 신경 조직에 의해서 적절하게 방출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은 트라우마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독특한 상태, 즉 의식으로 제어되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드러남(bewußtseinsunfähige Vorstellungen)을 말하는데, 일종의 무의식적 드러남이다. 이렇게 되면 그 트라우마는 언어화되거나 정신적으로 방출되지 못하고 병리적 콤플렉스를 형성한다.17)
트라우마가 무의식 상태에서 의식으로 제어되지 못한 상태에서 파편적 언술, 왜곡된 이미지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트라우마의 병리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방어적 방패의 균열이라는 메타포는 라캉의 용어로 주체의 상징적 재현체계의 붕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18)
프로이트는 1895년 그의 동료 브로이어Josef Breuer와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로서『히스테리 연구』를 선보였는데, 정신분석학의 기초가 된 이 책에서 그는 의식으로 제어되지 못하는 이 재현이 정신병리의 핵을 형성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19) 그리고 그는 이를 치료하는 방법도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 실린 글 『히스테리의 심리치료』에서 그는 신경증 치료 사례들을 연구한 결과를 정리하면서 몇 년 전에 이미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발표했던 『히스테리 현상의 심리적 기제에 관한 예비적 보고서』의 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다시 인용한다.
"처음에 우리는 매우 놀랍게도 다음의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즉, 우리가 개별적인 히스테리 증상을 촉발시킨 사건에 대한 기억을 뚜렷하게 상기시키고 거기에 얽혀 있는 정동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면, 그리고 환자가 그 사건에 대하여 가능한 한 자세히 서술하고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게 되면, 개개의 히스테리 증상은 곧 소멸되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20)(밑줄 강조 논문 필자)."
분석치료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언어적 표현없이 외상적 정동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으며 정신분석적 증상의 실재는 오직 상징, 내러티브 등의 우회로를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는 것이다.21) 프로이트는 “그의 분석 지침 1호”가22) 되었던 위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여기에서 비롯된 치료법을 다음과 같이 또 밝힌다.
12)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DSM-5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fifth edition), Washinton DC, London England: American Psychiatric Publishing,2013, p. 271f.
13) Schauer, Neuner & Elbert: p. 16.
14) Ebd. S. 16f.
15) Freud, Sigmund: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24 Vols. Translated from the German under the General Editionship of James Strachey, London: The Hogarth Press, 1953~1973. (이하, SE로 약칭함) SE 18(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Group Psychology and Other Works), p. 29.
16) Ebd.: S. 9.
17) SE 1: p. 121f.
18) 박찬부: 에로스와 죽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309쪽.
19) SE 2: p. 286f.
20) SE 2: p. 6, 255.
21) 박찬부, 2013: 225쪽.
22) 위의 책: 224쪽.
"“그것(그 치료법)은 질식되어 있던 감정이 언어를 통해 표출되도록 함으로써 처음에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소산되지 않은 관념의 작용력을 제거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념을 정상 의식 상태(가벼운 최면)로 끌어들이거나, 치료자의 암시를 통해 관념을 제거함으로써(건망증을 수반한 몽유 상태라 해도) 그것을 연상에 의해 수정하게 하는 것이다.”23)"
정신분석은 상징을 매개로 내러티브로써 실재를 공략하는 것이다. 특히 외상적 실재(traumatic real)는 언어 속에서만, 언어를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는 것이 정신분석의 정론이다. “피분석가로 하여금 외상적 ‘사건’에 대해서 꿈꾸거나 백일몽 상상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아무리 일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말들과 연결시키고 더 많은 기표들과 연계시키도록”24) 하는 일, 그것이 분석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아무리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외상적 사건에 대해 꿈꾸게 하거나 자유연상, 최면으로 말하게 한 후 이것을 말들과 연결시키고 더 많은 기표와 연계시키는 작업은 대부분 내러티브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필자가 밑줄로 강조한 글, 즉 “사건에 대해 가능한 한 자세히 서술”하는 것은 서사(敍事), 즉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내러티브’는 우리말로 ‘이야기’라고 하고 다른 말로는 ‘서사(敍事)’라고 하기 때문이다. ‘서사’라는 말이 ‘사건을 서술한다’라는 뜻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는 어떤 인물이 어느 시간과 환경 속에서 겪은 어떤 사건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말이나 글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인물, 사건, 시간 공간 배경이다.
이야기가 논증, 설명, 묘사와 같은 다른 언술들과 구별되는 것은 이런 특징 때문이다. 여기에 내러티브를 통한 치료의 정신분석학적 근거가 있다. 이야기로써 정신적인 문제가 치료된다는 점을 프로이트가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밝힌 이러한 이야기를 통한 치료의 핵심적인 방법은 “증상을 촉발시킨 사건에 대한 기억을 뚜렷하게 상기시키고 거기에 얽혀 있는 감정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방법,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건에 대하여 가능한 한 자세히 서술하고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게” 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대부분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내러티브를 활용한다는 뜻이다. 피분석가의 이런 이야기에는 대부분 인물, 사건, 시간, 공간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를 통한 외상성 히스테리 치료는 이 책『히스테리 연구』에 소개된 안나 O.에 관한 치료 사례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안나는 처녀의 몸으로 시골에서 한밤중에 얼마 후에 사망한 아버지를 혼자 간호하던 중에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뱀이 벽에서 내려와 아버지를 물려하고, 아버지의 머리가 시체로 변해 보이고 자신의 손가락들이 죽은 사람의 머리(손톱)를 한 작은 뱀으로 변해 보이는 환각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신체 일부 마비, 실어증, 착어증 등의 신체화 증상까지 겪는다.
그러던 그녀가 유최면이나 브로이어가 유도한 최면 중에 자신의 증상을 야기했던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 얘기하고 나면 “완전히 진정이 되고, 다음날에는 다루기 쉬워지며 부지런해지고 쾌활해지기까지 했다.”25) 이것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안데르센 동화와 같은 이야기들을 함으로써 소정의 치료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가 유최면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를 통해 어떤 치유 상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슬픈 내용이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 이야기는 매혹적이었으며, 한스 안데르센의 <그림 없는 그림책> 스타일이었다. 짐작컨대 그 책이 모델인 것 같다. 이야기의 처음이나 중요 시점에서는 으레, 불안한 마음으로 병상 옆에 앉은 소녀가 등장한다.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꾸미기도 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끝낸 후 곧 깨어났는데, 확실히 진정된 상태, 혹은 그녀가 이름 붙이길 “편안한” 상태에 놓였다.26)"
안나 O.를 치료한 브로이어의 보고로 된 위의 글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병상 옆에 앉은 소녀”는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던 안나 O. 자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27)
한편 비슷하게 브로이어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또 보고했다.
"그녀는 이러한 과정을 적절하게 표현했는데, 진지하게 말할 때는 ‘토킹 큐어 talking cure’라고 말하고, 농담 식으로 말할 때는 ‘굴뚝 청소 (chimney-sweeping)’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환각들을 말로 표현하고 나면 자신의 모든 고집스러운 언행과 스스로 ‘에너지’라고 표현한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8)"
여기서 ‘토킹’은 단순한 토킹이 아니라 대부분 이야기 방식의 토킹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위에서 ‘말로 표현하고’는 ‘이야기하고’로 바꾸어 생각될 수 있으며, ‘자신의 고집스러운 언행’은 ‘자신의 정신적 외상에서 비롯된 병리적 사고와 행동’을 의미하며, 스스로 ‘에너지’라고 표현한 것은 ‘트라우마적 사건에 얽힌 정동(affect,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역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표현된 토킹 큐어는 실질적으로 대부분 내러티브 치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 토킹 큐어가 전부 다 내러티브 방식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통곡과 같은 감정 표출이 주류인 토킹도 카타르시스 치료 효과의 일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을 직접 겪어도 정신적 외상을 입지만, 가까운 사람이 그런 경우를 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할 때도 그렇다. 안나 O.가 나이 어린 처녀였고 한밤중에 혼자 있는 상태에서 환각을 겪고 생리적 경보 상태에 빠졌다는 점에서 그녀는 트라우마 경험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극도로 스트레스가 되는 사건도 피해자나 목격자가 사건 도중에 생리적 경보 상태에 처하고, 당시 공포나 무력감 혹은 양자를 다 느꼈을 때는 외상으로 고려된다”고29)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히스테리 연구』에서 밝혀진 안나 O. 양의 히스테리는 외상성 히스테리이고 여기서 밝혀진 정신분석의 지침은 일반 트라우마 치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산물들이 히스테리를 촉발하는 외상에 연관되어 있다고30) 말하고 일반 히스테리의 병인론을 가지고 외상성 신경증의 병인론을 유추해 나갈 수 있고, 외상성 히스테리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31)
23) SE 2: p. 17, 255.
24) 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Princeton: Princeton UP, 1995, p. 26.
25) SE 2: p. 29.
26) Ebd.
27) 실제 이야기와 픽션 이야기는 모두 스토리와 서사담화, 인물 사건 시간 공간의 스토리 요소, 시점 관점 등의 서사담화 요소라는 공통의 속성을 공유한다는 면에서 같은 내러티브이다. 폴 리쾨르 Paul Ricoeur도 『시간과 이야기』3부작에서 문학 이야기와 역사 이야기를 다 다루고 있다.
내러티브를 활용한 치료에서도 실제 이야기와 픽션 이야기를 다 다룬다. 실제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치료가 내러티브 테라피라면 문학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는 치료가 문학치료이고, 양자를 모두 다 다루는 것이 스토리텔링 치료라고 할 수 있다.
28) Ebd.: S. 30.
29) Schauer, Neuner & Elbert: p. 7.
30) SE 2: p. 4.
31) Ebd.: S. 45.
프로이트는 분석의 목표를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내’가 있게 하라 Wo Es war, soll Ich werden>는 표현으로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것(Es)’은 ‘무의식’을 뜻하는 것이어서 이 문장은 무의식의 의식화(‘내가 있게 하기’)를 말하고, 주체성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정신분석학에서 갈라진 칼 구스타프 융의 경우도 자아(ego)를 무의식의 세계로 확장해서 궁극적으로 자기(self)에 이르는 전인화 개성화(Individuation)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크 라캉의 경우도 상징계로써 상상계를 극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언어적 상징을 통해 실재에 접근하는 것이 분석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라캉에게 실재(the real)는 언어적인 것이 아니지만,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 그래서 언어를 통해 무의식에 접근하고, 이를 통해 우회적으로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 정신분석 목표에서 우리는 ‘그것(Es)’을 프로이트의 ‘이드(Id, 원초 아)’나 ‘무의식’, 혹은 라캉의 ‘대타자(the Other)’로 볼 수 있고, ‘나(ich)’는 ‘자아’나 ‘의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 분석 목표를 트라우마 치료에 적용하여 ‘트라우마적 기억이 있었던 곳에 내러티브를 통한 통합된 주체가 들어서게 하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여기서 언어적 재현으로 중요한 것은 대부분 내러티브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러티브를 통한 트라우마 치료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때 내러티브 재현은 꼭 언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뿐만 아니라 만화, 동영상, 행동 등을 통한 표현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원래 내러티브가 언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다른 여러 매체에 두루 들어 있고, 스토리텔링에서 ‘텔링’의 의미가 언어 외의 영상, 몸짓, 음악, 그림 등을 통한 전달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나 O.도 앞에서 언급한 외상성 히스테리 증상을 “아버지의 그 병실과 비슷하게 방안을 재배치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앞에서 언급된, 그녀의 모든 병적인 증상의 근원이 되었던, 그 끔찍한 환각을 재구성해내는”32) 방법으로써 치유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에는 항상 정동이 함께 처리되어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언급이 또한 트라우마 치료에 중요하다. 이러한 작업에는 감정을 동반하고 촉발시킬 수 있는 내러티브의 속성이 잘 활용될 필요가 있다.
내러티브에는 인물이 있고 그 인물에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며, 인물들 간의 사건에서 또 감정이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석치료에 있어서 상징 차원의 억압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외상적 사건에 부착된 정동을 소산(Abreaktion, abreaction)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라캉의 표현대로 증상의 주이상스는 상징적 조작만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억, 상징, 기
표들이 원래의 외상적 경험에 부착되어 있는 정동에 충격을 주어 그것을 변화의 무대로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인용했던 프로이트 ‘분석 지침 1호’ 글(1895)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 분석 지침과 함께, 외상성 히스테리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두 원리가 (정동의) 소산과 (기억의) 재구성(Reproduktion, reproduction)이라는 프로이트와 브로이어의 말을33) 다시 한 번 상기해보면 프로이트가 19세기 말 정신분석의 원년기에 분석 치료에 대해서 이런 통찰력을 보인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34)
이것은 라캉적 분석 방향이나 현대의 내러티브 노출 치료(NET)와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정통 라캉주의 분석가 브루스 핑크가 지적하고 있는 라캉주의 분석 지침을 앞의 프로이트의 분석 지침과 연결해서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환자가 자신의 역사를 말로 서술하고 동시에 어떤 것, 즉 정서나 정동을 느낄 때만이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동 없는 재현은 불모적이다. 이것이 이른바 자기 분석의 불모성에 대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35)(강조 원문)"
이러한 프로이트와 핑크 두 사람의 주장을 박찬부 교수는 다음과 같이 공통적으로 정리한다.
“분석 현장에서 분석 주체는 자신을 환자로 원인 지웠다고 생각되는 외상적 사건을 언어적 발성(말)을 통해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서술해야되고, 그것과 동시에 그때 느꼈던 감정(affect)을 불러일으켜 경험해야 한다는 것
이다. 감정 없는 재현은 분석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치료적 효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36)
이것은 프로이트와 브로이어의 다음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정동(affect) 없는 기억은 거의 항상 아무런 결과도 산출하지 못한다.”37)
여기서 외상적 사건을 언어적 발성(말)을 통해 서술한다는 것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내러티브 방식이다. 그런데 트라우마 환자가 “외상적 사건을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서술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직 상징적인 차원의 것이고 파편적인 것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트라우마 환자는 파편적 기억과 촉발 자극 회피 성향 때문에 자발적으로는 내러티브 방식으로 서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트라우마의 외상성이 불완전한 상징적 재현(symbolic representation)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내러티브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치료라고 할 수 있다.
내러티브는 인물과 사건, 시간과 공간의 배경 및 서술자의 시점과 관점, 심리적 거리감 등의 요소가 있어서 주체가 경험한 트라우마적 사건들이 의미 있게 서로 연결되도록 해서 이해와 깨달음, 그리고 그 관련 정동의 소산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밝혀진 이러한 PTSD의 원인과 그 치료의 원리를 내러티브 속성을 살려 구체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트라우마 치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 트라우마 치료와도 거의 일치한다.38)
32) Ebd.: S. 40.
33) Ebd.: S. 11.
34) 박찬부 2013: 225쪽.
35) Bruce Fink: Lacan to Letter: Reading Écrits Closely, Minneapolis: U of Minnesota, 2004, p. 142.
36) 박찬부 2013: 231쪽.
37) SE 2: p. 6.
38) Schauer, Neuner & Elbert: p. 41, 47f.
III. 기억의 관점에서 접근한 트라우마 내러티브 치료
지금까지 트라우마에서 오는 정신적 상처가 심리적 재현의 문제와 관련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연구를 언급했다. 그런데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치료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프로이트가 분석지침으로 “증상을 촉발시킨 사건에 대한 기억을 뚜렷하게 상기시키고 거기에 얽혀 있는 정동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면, 그리고 환자가 그 사건에 대하여 가능한 한 자세히 서술하고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게 되면”39) 외상성 히스테리 증상이 “곧 소멸되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트라우마 환자에게 트라우마 기억을 재구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의 본질을 이해하고, 어떤 기억을 어떻게 재현하는 것이 트라우마 치료에 주효할 것인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할 때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정보를 뇌 속에 저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저장된 것을 꺼내는 것, 즉 기억해내는 것이다.
전자의 기억은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외상적 사건을 경험하는 당사자의 특별한 상황과 반응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외상을 당하는 사람은 당시에 극도의 공포감, 경악으로 생리적 경보 상태에 처하기 때문에 보통의 일상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당사자는 극도의 정서적 흥분 상태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대뇌의 편도체가 흥분하고 교감신경이 극도로 활발하게 작동하는 와중이어서 상황을 전체적으로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으며 순간의 정보들이 파편적으로 강한 자극과 함께 기억되게 된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후 플래시백의 형태로 의식에 침습해 들어오고 잠 속에서는 악몽으로 괴롭히게 된다. 한편 후자의 기억, 즉 기억해내는 것은 트라우마 치료에서 더욱 중요하다. ‘기억’을 의미하는 단어는 ‘memory’ 외에도 ‘recollection’도 있고, ‘기억하다’를 뜻하는 ‘remember’도 있다. ‘remember’, ‘recollection’의 ‘re-’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억은 ‘구성요소(member)’를 다시 짜고 ‘모으기(collection)’를 다시 하는 것, 즉 ‘재구성’이다.
그래서 기억은 다음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력된 것이 그대로 나오는 컴퓨터 데이터 출력 같은 것과는 다르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리처드 레스탁 Richard Restak 교수의 말처럼 인간의 기억력은 기계에 집어넣으면 똑같이 재생되는 DVD와는 다르다. 우리의 기억은 기억을 꺼낼 때마다 계속 바뀐다. 기억은 나만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매번 다르게 해석할 뿐이다. 그 점이 우리를 타인과 구별되는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40)"
우리의 기억은 DVD처럼 저장된 정보를 언제나 똑같이 재생하지는 않는다.
기억은 꺼낼 때마다 계속 바뀐다. 기억을 꺼낼 당시의 연상, 관심, 상황 등에 따라 꺼내지는 기억의 내용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렇게 달라진 방식으로 인출된 기억이 다시 저장될 때도 그대로 저장되지 않고 그 사이 다른 자극이나 정보와 생각, 판단 등과 상호작용한 후 변화된 형태로 저장된다.
우리의 뇌는 DVD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실시간 기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명한 작곡가 존 케이지 John Cage가, 연주가가 피아노 앞에 4분 33초 동안 피아노 뚜껑을 열어 놓은 채 연주를 시작하지 않을 때 공연장의 침묵과 청중들의 웅성거림, 기침 소리 등이 모두 반영된 현장의 소리를 한 편의 음악 작품 <4' 33''>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
개개인에게 이렇게 다르게 만들어진 기억의 결과가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고 개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트라우마 기억을 이렇게 치유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PTSD의 치료과정이라고 할 수있다.
이러한 기억은 몇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기억은 단기 기억(short term memory)과 장기 기억(long term memory)으로 나뉘는데, 단기 기억은 우리 뇌 속의 해마에, 그리고 장기 기억은 대뇌 피질에 저장된다.
스콰이어 Squire의41) 신경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기억은 그 내용을 서술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외현기억(explicit memory)과 그럴 수 없는 암묵 기억(implicit memory)으로 나뉠 수 있다.
그래서 외현기억은 서술기억(declarative memory), 암묵기억은 비서술 기억(nondeclarative memory)이라고도 하며, 암묵기억은 자전거 타기나 수영처럼 그 과정을 기억하는 것이어서 절차기억(procedure memory)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술기억은 결혼, 졸업과 같은 명백한 사건을 기억하고, 역사나 지리 등에 관한 지식을 기억한다. 이에 비해 비서술기억은 능력이나 습관, 정서, 조건 반응 등을 포괄한다.
한편 털빙 Endel Tulving은42) 더 나아가 의미 기억(semantic memory)과 에피소드 기억(episodic memory)을 구분하였다. 의미 기억은 우리 지식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억은 경험과 꼭 연관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이 기억은 ‘5 × 14 = 70’이라는 지식이나 남극대륙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는 지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미의 기억을 구축하기 위해 남극대륙을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다.
반면에 에피소드 기억은 말 그대로 에피소드, 즉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일어난 일로서 저장되고 그 내용, 시간, 장소와 같은 정보를 포함한다. 에피소드 기억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회상된 경험이다. 이 기억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전의 사건들을 의식적으로 재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감각적 지각적 경험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사건의 경험을 기억하는 에피소드 기억은 내러티브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43)
그런데 실제 기억은 이런 구분된 기억이 어느 정도씩 섞여 있다. 예컨대 누군가 처음 자전거를 배웠다면 그가 자전거를 배운 날은 그의 인생의 자서전적인 의미 기억으로 저장되고 언제, 어디서, 누구랑 배웠는지 회상해 낼 수 있다. 이는 서술 기억의 예이다. 한편 자전거를 익숙하게 타게 되면 자전거를 탈 때의 매 단계를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에게 자전거 타기는 하나의 능력이 되어 자발적인 회상 없이도 쉽게 활성화 된다. 이것은 비서술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
한편 일상적인 기억보다 트라우마 기억은 비서술 기억에 가깝다. 스콰이어(1994)에 따르면 자발적으로 인출될 수 있는 서술기억(외현기억)과 달리, 암묵기억(비서술 기억)은 자발적으로 인출되지 못하고 의식적 회상이 필요하지 않으며, 환경적 단서나 내적 단서를 비롯한 다른 과정에 의해서만 활성화된다.
외상 생존자의 기억이 이와 유사하다.44) 트라우마 기억은 파편적인 기억으로서 감정이 분출하는 기억이며, 과거의 경악했던 공포스러운 기억이 플래시백(flashback)으로 침습해 들어오는 기억이다.
그러가 하면 멧컬프와 제이콥스 Metcalfe & Jacobs는45) 기억을 차가운 기억(cold memory)과 뜨거운 기억(hot memory)으로 나누었는데, 차가운 기억이 자서전적 맥락의 기억이고 언어접근 기억(verbally accessible memory)이라면, 뜨거운 기억은 상황접근 기억(situationally accessible memory)으로서 외상 사건에 대한 감각-지각-정서적 표상이다.46)
PTSD로 고통받는 사람은 자서전적 기억에 명백한 왜곡이 있다.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PTSD의 가장 명백한 증상은 플래시백의 형태로 외상 사건을 재경험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자발적 침습은 외상 사건의 상황을 회상시키는 시각 심상, 소리, 냄새, 신체 감각, 연상 등과 같은 단서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데, 이것의 특징은 과거 사건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다시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이게 한다는 것이다. PTSD로 고통 받는 생존자들은 자서전적 기억에도 문제가 있다. 이들은 사건에 대한 두려움을 정확한 시간과 공간으로 구분하지 못하고 생애시점 내에 명료히 위치하게 하지도 못한다.
39) SE 2: p. 255, 6.
40) 김윤환, 기억 제작팀: 기억 - KBS 사이언스 대기획 인간탐구, KBS미디어 예담, 2011, 56쪽.
41) L. R. Squire: Declarative and nondeclarative memory: Multiple brain systems supporting learning and memory. In L. L. Schacter & E. Tulving (Eds.), Memory Systems (pp.207-228). Cambridge, MA: MIT press, 1994.
42) Endel Tulving: Episodic memory and common sense: how far apart?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ies B: Biological Science, 356, 2001, pp.1505-1515.
43) 조지프 르두: 시냅스와 자아 (강봉균 옮김), 도서출판 소소, 2005, 174 184 191쪽.
44) Schauer, Neuner & Elbert: p. 21.
45) J. Metcalfe & W. Jacobs: A hot-system/cool-system view of memory under stress. PTSD Research Quarterly, 7, 1996, pp. 1-3.
46) Schauer, Neuner & Elbert: p. 25.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장면은 계속 내 마음으로 돌아온다. 선생님이나 친구 같은 일상의 사람들을 바라보다가도 갑자기 가해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럼 나는 화가 나고 공격적이 되어서 그 상대를 해치려 한다. 나는 물건을 던지고 폭력적으로 변한다. 때로 나는 이상한 장소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다.
지붕 위에 앉아서 울고 있다거나. 하지만 내가 어떻게 거기에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마치 내 안에 두 개의 인격이 살고 있는 것만 같다.47)"
소말리아의 종족 분쟁 소용돌이 속에서 트라우마를 겪었던 13세 아동의 말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플래시백 현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플러시백이 일어나는 동안 PTSD 환자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과거 경험에서 활성화 된 기억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외상 상황에 다시 돌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상 사건의 기억은 실제 발생했던 시간 맥락과 공간 맥락에 제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존자들은 외상 경험을 감각적으로 보고 느끼고 들을 수 있지만, 이 경험을 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외상 경험을 시간 흐름에 따라 조리 있게 구체적으로 이야기로 표현해내는 것이 아주 어렵다. 이들은 비자발적인 고통스러운 회상을 하면서 그 외상 사건을 아주 잘 기억한다고 말한다.48) 그러나 사건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내레이션은 전형적으로 조직적이지도 않고 파편화되어 있으며 일관적이지 않다.
이것은 유대인 학살 사건 생존자의 이야기를 기록한 로젠탈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다.
"인생의 서로 다른 장면들 간의 관계를 확립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장면이란 박해 이전의 시간, 박해 받은 시간, 그리고 생존 이후의 시간을 뜻한다. 이 장면 속에서 서로 다른 사건 사이의 관계는 조각나 있다.
모든 장면은 말 없음의 영역으로 침잠하고, 전기 작가에게는 오직 단일 파편, 사진, 기분으로만 보인다.49)"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외상 기억의 특징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여러 감각을 포함하여 사건에 관해 아주 생생하게 회상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에 대면하여 구체적인 조각을 시간 순서에 따라 조리 있는 말로 표현하기가 매우 힘들다. 외상 사건은 일상의 기억과는 다른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요 사건을 일반 사건으로 기억하는 사람들과 달리, PTSD가 있는 사람들에게 외상 사건은 일반사건으로 명료하게 표상되어 있지 않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생애시점 내에 위치가 명백히 잡혀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외상 사건에 대한 기억과 감각-지각 표상이 매우 강하고 지속적일지라도, 기억이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에 관한 타당한 자서전적 구조가 없는 경우가 많다.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개인사를 잘 조직화된 자서전적 기억의 형태로 회상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PTSD 생존자들은 흔히 외상 경험을 기술하지 못한다. 자서전적 기억의 연속 장면이 조직화되어 있지 못하고 왜곡되어 있다. 멧컬프와 제이콥스는 감각-지각 표상이 별도로 활성화되는 PTSD 기억의 전형적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별도의 뜨거운 체계로 부호화된 기억과 반응은 생존자 자신과 치료자 모두에게 매우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파편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을 현실과 묶어주는 내러티브와 공간적-시간적 맥락의 닻이 없어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은 불편한데,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두려움에 더하여, 그 낯섦 때문이다.50)"
한편 에피소드 기억은 서술 기억이다. 그리고 에피소드는 내러티브이고, 내러티브는 날 것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서 사건들을 연결해준다. 다시 말해 내러티브는 트라우마를 일으킨 경험적 사건들을 연결해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트라우마 치료는 환자의 트라우마에 관한 암묵 기억을 서술 기억으로 바꾸고, 파편적 트라우마 기억을 내러티브 기억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정서와 분리된 기억을 정서와 통합된 기억으로 바꾸는 것이고, 자극에 촉발되는 기억과 감정을 논리적 기억과 통제된 감정으로 바꾸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트라우마 기억들을 묶고 통제하는 내러티브 기억으로 바꿔주는 것이 트라우마 치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작업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서사학의 관점에서 접근해보기로 하자.
47) Ebd.: S. 2.에서 재인용
48) Ebd.: S. 20f.
49) G. Rosenthal: Truamatische Familienvergangenheiten. In: G. Rosenthal (Ed.), Der Holocaust im Leben von drei Generationen. Gießen, Germany: Psychosozial-Verlag, 1997: S. 40.
50) J. Metcalfe & W. Jacobs: A hot-system/coo-system view of memory under stress. PTSD Research Quarterly, 7, 1996, p. 2.
IV. 서사학의 관점에서 본 내러티브 활용 트라우마 치료
트라우마 치료에 관련해서 내러티브의 특징과 그 구조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PTSD 치료에 의미 있는 내러티브의 특징으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로는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의미 연결성과 이를 통한 기억의 재구성 능력이다. 내러티브에는 핵심 내용으로서 스토리가 있다. 그런데 그 스토리는 개인이 경험한 수많은 파편적인 사건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시간 순서로 조리 있게 연결한 것이어서, 내러티브 표현과 소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구축하고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된 것을 회상해서 재기억하는 과정을 내러티브로 표현함으로써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로써 파편적인 외상적 사건의 기억을 의미 있는 기억의 연결체로 재구성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치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로는 내러티브의 감성적 내용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내러티브는 인물 사건 시간 공간을 구성 요소로 하는 특성이 있어서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건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감정이나 정서, 정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래서 수준 높은 소설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감동의 경험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내러티브가 아닌 다른 언술, 즉 묘사나 설명, 논증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앞에서 언급한 트라우마 치료의 두 가지 측면, 즉 기억의 재구성과 정동의 소산 중에서 정동의 소산에 내러티브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내러티브에는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트라우마 환자의 의식화 주체화에 잘 활용될 수 있다. 개인이 마음속에 지니고 삶 속에서 실현해내는 이야기와 어떤 사회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담론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담론이 마련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폴 리쾨르는『시간과 이야기』3부작에서 우리가 내러티브를 통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서 늙어 죽어가는 시간 속의 존재이지만 추상적인 그 시간을 그대로 체험할 수는 없고, 그 시간 속 실제 삶의 경험을 통해 체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 속 체험들은 그 자체로는 파편적인 무질서의 세계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간 속의 체험들이 어떤 연관된 의미를 지니려면 내러티브의 세계로 포섭되어야 한다.
이야기의 스토리에는 시간의 순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의미의 연결고리를 구성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의 “구성(plot) 덕분에 목표와 원인과 우연들은 전체적이고 완전한 어떤 행동이 갖는 시간적인 통일성 아래 규합된다.”51)
우리는 이러한 시간 체험을 내러티브로써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이해를 심화시킴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리쾨르는 이것을 이야기 정체성(identité narrative; narrative identity)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이름을 내건 행동의 주체를,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 전체에 걸쳐 동일한 사람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대답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
이야기된 스토리는 행동의 누구(주체)를 말해준다. ‘누구’의 정체성은 따라서 이야기 정체성이다. 이야기 하는 행위의 도움 없이는 인격적 정체성의 문제는 사실상 해결책 없는 이율배반에 빠지고 만다.52)"
그런데 이러한 내러티브는 내러티브의 관한 체계적 학문인 서사학(narratology)의 관점에서 보면 겉보기처럼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세부적으로 몇 개의 층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서사 2층위론 3층위론 4층위론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경우로는 내러티브를 내용과 표현의 2층위로 나누는 것이다. 즉 내러티브를 무엇(what)이 일어났는가 하는 내용 층위와 그것을 어떻게(how) 나타낼 것인가 하는 표현 층위로 구분하는 것이다. 서사학자 시모어 채트먼은 내러티브의 내용을 스토리(story)로, 내러티브의 표현을 서사담화(narrative discourse)라고 말한다.53) 패트릭 오닐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현대 서사학 이론이 토대로 삼는 기초적인 층위 구분은 정확히 말해 스토리(story)와 담화(discourse), 두 층위로 나누는 것이다.”54)
내러티브의 중요한 두 층위 중의 하나인 스토리 층위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스토리는 내러티브의 중요한 줄거리로서 인물과 사건, 사건을 추동하는 모티프, 시간적 배경, 공간적 배경 등을 주요 요소로 하고 있다. 특히 스토리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의미 있게 연결한 것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겪게 되는 경험들은 아주 많다. 그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만 선택되어 연결된 것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의미 있는 것들만 선택된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말이 되는 것들 중에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스토리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러티브 스토리의 특성을 트라우마 치료에 이용할 수 있다.
트라우마 치료에서는 내러티브의 이런 속성이 잘 이용될 필요가 있다. 우선 스토리 차원에서 사건의 기억과 거기에 얽혀 있는 감정들을 이해하고 조리 있게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심리적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적 사건에서 내담자의 행동과 증상이 비합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았는지 살피고 내담자의 내러티브속에서 어느 부분이 비합리적으로 연결되어 드러나는지 분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된 사건에서 드러나는 상징적 재현과 그 결과로 나타난 심리적 문제의 이야기가 합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틈새를 찾아 그 틈새를 정신‘분석’하고 그 틈새를 연결할 스토리를 찾거나 만들어 이해시켜야 한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내러티브 '분석'이 전부는 아니고 반드시 내러티브의 '연결과 종합'으로 나아가야 한다.55)
이와 함께 트라우마 사건을 추동하는 모티프를 논리적으로 연결하고, 트라우마적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확정하여 그 기억을 현실의 시간적 공간적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파편적인 트라우마적 기억이 자서전적인 내러티브 기억으로 구조화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정신분석 배경의 트라우마 치료에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의 내러티브 노출 치료(Narrative Exposure Therapy)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치료적 내러티브에서 그 스토리의 시간적 연결과 합리적 연결이 중요한 것 외에도 스토리의 다른 요소들의 치료적 활용, 즉 사건 연결 모티프의 재구성, 스토리 공간의 재확정, 스토리 인물의 정체성과 인물들 관계의 재조정 등이 치료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한편 내러티브에는 스토리 층위 외에도 서사담화 층위가 있는데, 담화의 구성요소로는 서술 시간, 서술 공간, 서술 시점과 관점, 심리적 거리감 등이 있다. 그래서 PTSD 치료를 위해서는 트라우마 사건을 내러티브로 표현하는 관점과 시점, 그 사건을 대하는 심리적 거리감을 조절하는 문제와, 서술 장소와 서술 시간의 문제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은 스토리 차원 외에도 담론 차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스토리 차원의 시간 속의 사건이 담론 차원의 시간에서 의식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수십 년 전의 외상 사건의 원인과 과정이 암묵기억 속에 있다가 수십 년 만에 의식적인 기억에 떠올라 담화를 거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51) Paul Ricoeur: Time and Narrative. Volume 1. translated by Kathleen Blamey and David Pellauer. Chicago and London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1983], p. ix.
52) Paul Ricoeur: Time and Narrative. Volume 3. translated by Kathleen Blamey and David
Pellauer. Chicago and London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1985], p. 246.
53) Seymour Chatman: Story and Discourse, Narrative Structure in Fiction and Film.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78, p. 22.
54) Patrick O’neill: Fictions of Discourse. Reading Narrative Theory. Toronto Buffalo London: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1994[Reprinted in paperback 1996], p. 35.
55) 이민용: 내러티브를 통해 본 정신분석학과 내러티브 치료, in: 문학치료연구, 제25집, 한국문학치료학회, 2012.10, 121쪽.
"어느 날 거울을 보았다. 내가 내 몸을 칼로 긋거나 불에 지져 팔다리에 성한 구석이란 거의 없었다. (...)
나는 서른 살이었다. 이번에는 14주 동안 입원해야 했다.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기만 57번째. 나는 그때부터 16년 동안 섭식장애, 신체통증과 약물남용으로 고통 받았다.
입원 2주째가 되었을 때 조부로부터 성학대에 대한 나의 플래시백을 느닷없이 겪었다. 나는 나를 강간하는 그를 보았다. 그 후로 나는 공황발작과 악몽을 겪었다. 더 많은 기억들이 등장했다. 아버지도 나에게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독한 혐오를 느꼈다. 나는 손목을 그었다. 죽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였다.
그 후 다섯 달 동안 나는 보호병동에 머물렀다. 아동 성매매를 하던 포주에게로 팔려갔을 당시의 끔찍한 기억 파편들이 나를 괴롭혔다. 굶어 죽기로 작정했을 때, 성공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D.I. 경계선 성격장애로 진단 받은 생존자.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정신과 외래 클리닉의 진단면접에서 발췌. 독일 라이헤나우, 2010.]56)."
위의 사례에서 외상 사건이 수십 년 만에 의식의 기억에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동안 암묵 기억에 있던 것이 떠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의 표현대로 “이해되지 않은 것은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 매장되지 않은 유령과 같이 그것은 안식을 찾지 못한다. 미스터리가 풀리고 마법이 깨질 때까지.”57)
고통스러운 감정과 함께 자꾸 플래시백 되는 파편적인 트라우마 기억들을 내러티브를 통해 이해시키고 현실 기억의 맥락과 연결시키고 자서전적인 기억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의지와 무관하게 침습해오는 트라우마 기억들이 당시 상황과 다른 안전한 현재의 현실 속의 기억이라는 점을 깨닫고 느끼도록 심리적 서사담화 능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내러티브 담화 차원에서 의미부여, 해석, 심리적 거리감. 트라우마적 경험들을 연관 짓고(binding), 통제(mastery)하는 훈련도 모두 트라우마 치료에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에 치료자가 트라우마 환자의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해석해서 트라우마 상황을 이해시키고, 거기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도록 해주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플래시백으로 불시에 침습하는 외상적 기억들이 ‘지금 여기’의 현실이 아니라 ‘그때 거기’의 기억일 뿐이라는 관점을 견지할 수 있도록 시점과 관점, 심리적 거리감 등을 조절하고 익히는 훈련을 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한편 트라우마 치료에는 개인적 담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억도 중요하다. 사회적 기억은 사회적 담론(discourse)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서사학에서 내러티브의 표현 층위를 나타내는 ‘discourse’ 라는 용어는 내러티브 표현을 개인적 차원에서 주로 다루는 언어학이나 문학에서는 ‘담화’로, 집단적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는 사회학 등에서는 ‘담론’으로 사용된다.
트라우마 치료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별하고 가해자에 윤리적 책임을 지우는 사회적 담론 역시 중요하다. 그래서 이 속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와 사회에 사죄를 비는 담론이 유지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 긍정적인 평가를 주도록 하고 위로와 위안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도록 사회적 담론을 구성하는 것이 개인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데에 중요하다.
개인적 트라우마 기억의 기록물, 예컨대 , 외국의 종교학살, 독일의 유대인 학살, 인종 학살 등의 개인 트라우마 기억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사회에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사회적 담론 속의 처벌로서도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적 외상 기억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외상 기억과 달리 사회적 외상 기억은 개인의 외상기억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외상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잊혀서는 안 된다. 과거 이스라엘을 방문한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죄의 말을 하자, 이스라엘 수상이 했다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는 말처럼 사회적으로 외상을 일으킨 원인과 과정을 기억하는 사회적 담론은 사회 치유를 위해 잘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트라우마의 희생자 개인의 치유도 이러한 사회적 치유 속에서 함께 이루어질 때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개인의 트라우마 치료 담론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으면 사회적 담론으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56) Schauer, Neuner & Elbert: p. 2에서 재인용.
57) SE 10: p. 122.
V. 마무리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상징적으로 재현된 무의식을 내러티브 기억으로 재구성하고, 이때 거기에 연계되어 있는 정동을 함께 소산시키는 작업이다. 프로이트 분석 지침의 중요한 두 가지는 기억의 재구성과 정동의 소산이고 이것은 트라우마 치료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트라우마 치료에서 이 두 가지를 잘 할 수 있는 것이 내러티브이다. 그래서 의식의 지배 하에서 표현되지 않고,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트라우마의 파편적인 기억과 암묵적인 기억들을 내러티브 에
피소드 기억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내러티브 활용 트라우마 치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내러티브를 그 구성요소의 치유적 속성을 잘 살려내는 방식으로 재현해서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트라우마 기억을 스토리 차원에서 트라우마 사건을 순차적으로 연결하고,사건의 모티프를 논리적으로 연결하며, 트라우마적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확정하고 전후 시간적 공간적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파편적인 트라우마적 기억이 자서전적인 내러티브 기억으로 구조화되도록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은 내러티브의 담화 차원에서 트라우마적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점, 그 사건을 대하는 심리적 거리감을 조절하는 문제와, 서술 장소와 시간의 문제 등을 살펴보았다. 한편 이러한 작업에서 항상 기억과 함께 트라우마적 정동(감정)도 같이 안전하게 처리되도록 하였다.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정신적 외상의 “모든 치료들은 기억을 노출한다는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있”고, “외상 병력의 회상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아주 비슷하다”는58) 점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밝힌 트라우마 치료의 선구적인 원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내러티브 치료를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서사적 관점에서 트라우마에 치료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한 트라우마 치료가 EMDR(안구운동 민감성 소실 및 재처리 요법)과 같은 구체적인 몸을 활용하는 치료와 함께 하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트라우마 증상이 생기는 것은 외상적 경험의 스토리가 파편적으로 끊겨 있고, 트라우마 경험을 서술하는 서사담화(discourse)가 현실적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결 스토리를 발굴해서 스토리를 연결하고, 잘못된 스토리 연결과 건강하지 못한 담화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도 치료이다. 스토리 연결과 서사담화의 치유적 변화를 통해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때 스토리텔링의 요소와 원리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내러티브 트라우마 치료방법은 일반적인 내러티브 심리상담 치료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8) 릭키 그린월드: 마음을 다친 아동ㆍ청소년을 위한 핸드북 (정성운ㆍ정운선 옮김), 학지사, 2011, 301쪽.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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