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나는 누구인가 2

rainbow3 2019. 10. 14. 00:43

[배철현 칼럼]

세월호 참사와 종교의 ‘황금률’

 

 

지난 3월30일 이스라엘 아라바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땅의 날’ 행렬에 참여하고 있다. 1967년 이스라엘의 갈릴리지역 점거에 저항하기 위해 시작된 땅의 날 시위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상징한다. <사진=신화사/뉴시스>

 

 

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④

 

당신이 당하기 싫은 방식으로 상대방 대하지 말라

 

위대한 종교와 문명을 관통하는 강력하면서도 흠모할 만한 사상이 있다면 무엇일까? 저마다 자신들이 속한 종교나 문명이 우월하다고 착각하며 살지만, 위대한 문명들과 그들이 남긴 경전들을 묵상을 통해 살펴보면 이들에게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을 ‘황금률’이라 부른다.

 

황금률의 내용은 당신이 당하기 싫은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말라” 혹은 “당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방식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라”이다. 동서양의 주요 종교들은 이 사상을 자신의 역사적인 환경에 맞게 터득하고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적용시켜왔다. 황금률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무아’ 상태로 진입하는 연습에서 시작된다.

 

인간들 간의 갈등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여러 세계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세계들을 열등하거나 틀렸다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이것들을 위장하기 위해 종종 종교를 이용한다. 이런 이들을 종교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특히 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세계에 매몰된다면 왜곡될 수밖에 없고 다른 종교들이나 세계관을 틀렸다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극악무도한 테러를 자행하면서도 그 행위가 “신의 뜻이다!”라고 외친다.

 

유대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전 토라(Torah)에 이스라엘 하느님이 “북으로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남으로 이집트의 강까지 영토를 주신다”라고 약속한 내용을 축자적으로 믿는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가자와 웨스트뱅크에서 지난 3000년 동안 거주했던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내려 하고 심지어는 중동평화를 위해 노력하던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마저 암살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꾸란(Qur’an)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국제적인 테러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이 조직한 알 카에다의 막강한 자금으로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와 9·11 미국대폭발테러를 감행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왜곡한 세계관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살인·대량살상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근본적인 행위는 일부 극단적인 정신병자들만 하는 행위가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들과 주교들은 자신들 관할 아래 있는 성직자들이 저지른 아동 성학대 스캔들을 못 본 체함으로써 수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의 고통을 무시해왔다. 몇몇 종교 지도자들은 마치 세속적 정치가들처럼 자신들의 종파를 찬양하고 상대종교에 대해 험담과 비하발언을 멈추지 않는다. 이 근본주의 종교집단의 공개적인 신앙고백에서 상대방, 특히 자신과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찾아 볼 수 없다.

 

 

1659년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Harmensz van Rijn Rembrandt)가 그린 ‘신으로부터 십계를 전달받은 모세’. 십계는 토라 계율 중 일부에 해당하며 토라는 유대 근본주의자들의 종교적 기반이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예수와 동시대인 힐렐의 교훈

 

오늘날처럼 종교와 문명의 핵심인 황금률이 이토록 간절히 요구되는 시대는 없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권력과 돈이 염려스러울 정도로 소수에게 편중되어있고, 그 결과 분노, 불안, 소외, 굴욕이 점점 커져 소외자들의 정신분열적인 무차별적 폭력과 미움이 분출되어 모두를 슬프게 한다. 북경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늘 일어나는 일이 이제 내일 서울이나 뉴욕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환경 재앙의 무서운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과거에는 소수의 권력들이 국가단위에 부여된 절대권력을 가질 수 있는 전능한 존재였다. 우리 시대만큼 황금률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우리의 종교와 도덕적 전통은 이 난제를 풀어야하는 어려운 시험에 직면해 있다.

 

기원 후 70년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국가적인 재난에 직면했다.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예루살렘을 부수고, 그들을 포로로 삼았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것이다. 성전이 기원전 515년 재건되었다. 그 후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차례차례 받으면서 자신들의 생존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유대인들에게 창의적인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유대교 랍비들은 자신들이 간직해온 경전연구를 통해 지상에서는 어떤 세력도 파괴할 수 없는 ‘영적인 예루살렘’을 짓기 시작하였다. 기원 후 200년경 등장한 유대교 경전 미쉬나(Mishnah), 그리고 5~6세기 등장한 탈무드가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경전들을 공부하는 행위가 천상의 예루살렘을 위한 벽돌을 하나씩 쌓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이 경전을 공부하여 경전에 대한 해석, 즉 ‘영적인 예루살렘’을 구축하면서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황금률’이다. 만일 토라의 내용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자비를 찾을 수 없다면 유대인들은 그 내용을 토라에서 과감하게 삭제하였다.

 

황금률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예수와 동시대에 힐렐이라는 위대한 랍비가 있었다. 1세기 위기에 빠진 유대교는 새롭고 참신한 방향을 모색 중이었다. 당시 유대교를 구축하려는 두 학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심마이라는 랍비가, 다른 하나는 힐렐이 주도하였다. 어느 이교도가 유대교로 개종하기 전에 심마이와 힐렐을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토라에 대해 물었다. 그가 먼저 심마이를 찾아 “당신이 한 다리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암송할 수 있다면, 나는 유대교로 개종하겠습니다”라고 했다. 토라 전체의 핵심을 간단히 말해달라는 질문이다. 그러자 위대한 랍비 심마이가 몽둥이를 들고 그를 내쫓으려 외친다.

 

“네가 감히 그런 질문을 하느냐? 바다를 잉크삼아 그 내용을 붓으로 쓴다 해도 다 기록하기 못할 텐데, 그런 무식한 질문을 하다니. 너는 유대교를 믿을 자격이 없다!”

 

이렇게 쫓겨난 이교도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들고 힐렐을 찾아 물었다. 그러자 힐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 스스로 생각하기에 혐오스러운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저 각주일 뿐입니다. 가서 이것을 공부하여 실천하시오.” 힐렐은 신의 유일성, 천지창조, 출애굽 혹은 613계명과 같은 교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힐렐에게 그저 황금률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위대한 종교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종교와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다른 세계, 문명, 종교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다. 그리고 배려를 장려하지 않는 종교와 문명은 가짜이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인간, 왜 진리를 떠나 살 수 없는가

 

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⑤

 

종교적 동물···묵상 통해 찾아낸 절대믿음 위해 목숨 걸어

 

누가 당신에게 ‘객관적인’ 사실로 부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삶에 필수불가결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이 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성된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자신에게 친숙한 사물과 사람, 그리고 이념들을 의지하고 믿게 된다. 누가 필자에게 무엇을 신봉하느냐라고 묻는다면 필자도 역시 자신의 경험 안에서 믿음의 대상을 찾으려 시도할 것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에 대해 믿음을 가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필자가 1988년 미국에서 종교공부를 시작했을 때, 다른 종교를 진지하고 깊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혼돈스러웠다. 기껏해야 대한민국에서의 경험은 유불선과 그리스도교 정도였다가 이슬람교, 유대교, 시크교, 힌두교, 그 외 수많은 세계종교들을 삶의 좌표로 삼는 종교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흔히 믿음이라고 하면 자신이 속한 우물 안과 같은 환경에서 만난 하나의 이데올로기, 종교 혹은 세계관에 대한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의존을 의미한다. 우리가 속한 협소한 정신적인 세계 밖으로 눈을 돌린다면 수많은 종교들을 만나 혼돈에 빠질 것이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믿음’이라 하면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배타적인’ 믿음을 연상하게 된다. 특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자신들만의 신앙체계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한국 종교지형도 안에서 믿음은 철저하게 이 배타성 위에 존재한다.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우리는 이런 광경을 쉽게 포착한다. 어깨에는 이동식 스피커를 매고, 손에 쥔 마이크에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목청이 터지라 외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 파괴적인 이단집단들과 일부 무식한 개신교 대형교회에서는 종교인들이 자기 자식에게 종교시설을 넘겨준다. 이런 집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들의 종파만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로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바로 ‘무식(無識)’이라 부른다.

 

 

웨일스 남단 카디프 세인트존 침례교회에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예수 그리스도상. 그리스도 순교자들의 믿음은 유럽문명과 세계문명의 기반이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공부는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 알기 위한 것

 

우리는 이 무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 공부한다. 이 공부는 단순히 학교에서의 공부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자연의 오묘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배우는 혜안을 포함한다.

인간의 생존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능하다. 어린아이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라고 부른 존재를 절대 신뢰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내가 어떤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로 고백해 천당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그런 저급한 차원이 아니다.

 

기원후 302년 가을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우스가 시리아의 안디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로마관원이었으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로마누스가 로마황제를 위한 제사를 방해한 적이 있었다. 로마누스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화형선고를 받았으나 디오클레티우스는 그의 혀를 자르라고 명했다. 그는 약 10년간 로마제국의 동편에서 2만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이 순교자들의 믿음은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존재 이유였다. 이 순교자들이 가진 믿음이 무엇이었길래, 유럽문명과 세계문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나?

 

그리스도교에서 ‘믿음’에 해당하는 고전 그리스어 단어는 ‘피스티스’이다. ‘피스티스’는 사실 ‘어떤 교리나 사실을 믿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뢰·충성·최선·위임’이란 의미다.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예수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여준 행동들, 즉 ‘가난한 자·고아·과부,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을 자신의 몸처럼 보살피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에 옷을 주라고 주문한다. 또한 학연·지연에 얽매이지 말고 하늘의 새나 들의 백합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며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신비를 관찰하여 이 만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아버지-어머니 같은 존재인 신을 의지하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자신의 일상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그 안에 내재한 신비를 통해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매겨 행동하는 것, 바로 그것이 ‘피스티스’다.

 

제롬(기원후 342~420년)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로마제국의 공인된 종교로서 그 위상을 마련하기 위해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믿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 ‘피스티스’를 라틴어 ‘피데스’(Fides)와 ‘크레도’(Credo)로 번역했다. 라틴어 명사 ‘피데스’는 영어단어 ‘피델러티’(Fidelity)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는 ‘약속에 대한 엄수·충실·(배우자에 대한)정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의 태도이지 어떤 사실을 믿는 정신적인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 질서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라틴어 동사 ‘크레도’(Credo)를 보면 원래 의미가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나는 믿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크레도’(Credo)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심장’을 의미하는 ‘크르’(cr-)와 ‘우주의 질서에 맞게 삼라만상을 정렬하다’라는 의미인 ‘도’(do)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크레도’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란 뜻이다. 우리가 흔히 교리(Creed)라고 하는 것들은 ‘말로 하는 고백’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망해 우주의 질서가 무엇인지,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탐구해 그 사람의 체취로 묻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의 사성제 팔정도를 말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깊은 묵상을 통해 알아내고,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11세기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캔터베리의 주교 안셀무스는 ‘Credo ut intelligam’이란 라틴어 명구를 남겼다. 직역을 하자면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인데, 그 의미는 ‘나는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을 묵상을 통해 찾아내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 삼라만상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 되지 않을까.

 

당신에게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원칙, 아니 ‘믿음’이 있습니까?

 

 

 

 

 

 ‘아레테’가 지도자 최고 덕목

 

 

소아시아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도시 에페소, 켈수스 도서관의 아레테 조각상 <사진=위키미디어>

 

 

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⑥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등 통해 위대한 영웅 찬양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위대한 국가나 기업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한 나라를 창건한 왕이라고 해서, 혹은 한 기업을 창업했다고 해서 자식에게 그 나라나 기업을 물려주는 몰염치한 상황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종교인들, 특히 대표적인 대형 교회의 목사들 중 자식에게 넘겨주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전근대적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왜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나? 왜 다른 동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애쓰는 것인가? 서울대는 신입생들에게 입학 전 2박3일간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한다. 필자는 나름대로 ‘수재’소리를 들으면서 입학한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1%의 노력과 99%의 운으로 서울대에 입학했다”고 강의한다. 그 나이 또래 대부분은 아프리카나 중동 등 이름 모를 지역에서 99% 태어난다. 대한민국 같은 나라 혹은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에 태어날 가능성은 1% 미만이다. 서울대에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의 운을 감사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는 150개 이상의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도시국가는 고대 오리엔트의 정치 틀인 왕정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었다. 당시 소아시아(터키) 해변에는 그리스에서 이주한 이오니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 등장한 페르시아제국이 이 해변도시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참주(僭主)제도를 정착시키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제국에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왕정이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 신분은 공동체인 도시(Polis)에서 ‘아레테(Arete)’를 실현하기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지도자는 고대 그리스어로 ‘아레테’를 어김없이 발휘한 자들 중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과정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왕권을 자식에게 불려주는 행위를 ‘바바로스’ 즉 ‘야만적’이라고 정의하였다. 영어 단어 Barbarian이 여기서 파생하였다. 즉 ‘야만인’은 ‘아레테’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가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말에 매달고 트로이 성문 앞을 의기양양하게 질주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아레테’ 갖춘 자 투표로 선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아레테’는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의미한다. 굴뚝의 ‘아레테’도 있고, ‘황소’의 아레테도 있고, 사람의 ‘아레테’도 있다. 아레테는 그것이 무엇을 묘사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사물이나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고유한 아레테가 있기 때문이다. 아레테의 원래 의미는 ‘자신의 삶을 우주의 질서에 맞게 연결시킨 것’이다. 인간 자신이 시공간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묵상을 통해 깨달아 그런 삶을 추구하는 삶을 바로 아레테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크랫(Aristocrat)’이란 영어 단어는 흔히 ‘귀족’으로 번역되는데, 숨겨진 본래 의미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달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며, 이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하는 일이 천직이라고 깨닫고 묵묵히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분이 모두 아리스토크랫이다.

기원전 750년 호메로스는 450년 이상 구전으로 내려온 서사시를 문자로 옮긴다. 고대 그리스에는 다소 난해한 음절문자인 선형문자 A와 선형문자 B가 있었으나, 그들이 수백년간 노래한 서사시를 기록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은 페니키아인들로부터 배운 셈족 알파벳을 차용하여 이 노래를 적었다. 이 노래가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다. 이들은 각각 두 명의 위대한 영웅들의 아레테를 찬양하고 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바로 아킬레우스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 영웅으로 아레테를 발휘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함락시키러 갔지만, 아킬레우스 도움 없이 그 전쟁을 이길 수 없다. <일리아스>에 처음으로 등장한 ‘아레테’라는 개념은 바로 아킬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용맹성을 의미한다. 후에 등장하는 그리스 교육과 그리스 올림픽은 바로 이 육체적인 탁월함인 아레테을 연마하는 장소이다.

<오딧세이아>의 주인공 오딧세우스는 아킬레우스와는 다른 아레테를 지녔다. 그는 자신의 말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말솜씨를 지녔다. 그는 트로이전쟁서 아킬레우스처럼 죽지 않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아타카로 항해하는 동안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사이렌과 같은 여신의 유혹을 대화로 설득하여 자신의 뜻을 이룬다. 아레테는 육체적인 탁월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을 통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언변의 탁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아레테를 ‘인간 노력의 탁월함’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아레테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레테는 자신이 최선을 이루겠다는 결심과 노력이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지속적인 마음이다.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확신, 이를 지속적으로 완성해 나가려는 겸손에서 아레테는 시작한다. 그리스 교육체계는 암기가 아니라 참여다. 매일매일 체육관에서 운동을 통해 육체를 연마하며 그동안 알지 못하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는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무아(無我)상태를 연마하여 정신적인 최선을 지향한다. 거기에는 사지선다가 없다.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성적이 아니라 경쟁이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올림픽경기를 통해 경쟁하는 것처럼, 시·산문· 연극·음악·그림·연설을 통해 아레테를 연마한다.

 

시·연극·운동 등 통해 연마

 

아레테를 가장 많이 연마한 자들인 아리스토크랫은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적·정신적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한다. 타인의 다양한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고 그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바로 공부다. 이런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이에 따라 공동체는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여 자연스레 ‘존경’을 보낸다. 이 존경을 그리스어로 ‘티메’라고 부른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선을 지향하는 노력이 바로 아레테이다. 스스로 최선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레테는 떠나버린다. 오랜 연마를 통해 아레테에 이른 이에게 공동체는 존경심인 티메를 선사한다. 티메는 사람이 타인의 다양한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무아의 능력으로 그에게 서서히 쌓이는 신의 선물과 같은 것이다. 티메는 지도자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없는 ‘야만인 지도자’가 많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여러 길 중에 하나는 아레테를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아레테를 깊이 연마해야 티메가 오며, 티메를 지닌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