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신의 위대한 질문⑬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에스겔 37장 3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신의 첫 행동은 빛을 만들어 어둠을 쫓는 일…아우슈비츠 같은 지옥 속에서도 인간의 삶을 지탱케 하는 위대한 힘은 희망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해 번제를 지내려했던 예루살렘의 바위 성전. 신은 천사를 보내 아브라함의 번제를 막는다. 바위성전의 알레고리는 신의 자비로움이고, 이는 엘리아젤의 <흑야>에서 나타난 신의 침묵과 무반응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희망’ 이란 자신의 삶을 누르는 질곡에서 사건이나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고 기다리는 마음의 상태이다. 밤이 가장 깊어야 새벽 여명의 빛이 모습을 드러내듯이 희망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과정을 겪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희망’은 바로 고통과 절망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인간이 존재하면서 씨름한 인간 고유의 사유다.
고대 그리스 신화 ‘판도라 이야기’는 ‘희망’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해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대 인도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생각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인들이 문자로 남긴 최초의 작품은 기원전 750년경 헤시오도스가 기록한 서사시 <신통기>다.
이 책 560~612행에 인간창조 이야기 안에 ‘판도라상자 이야기’가 담겨있다. 프로메테우스(‘선견지명’이란 의미)와 에피메테우스(‘후견지명’이란 의미)는 동료 타이탄들의 올림푸스 신들에 대한 반란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세계인 타르타루스에 감금되지 않았다.
신들은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들을 대신해서 노동할 ‘인간’의 창조를 허용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진흙으로 만들고 아테나는 그 진흙 형상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한편 프로메테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지상의 동물들이 각자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예를 들어 빠름·힘·가죽·날개 등을 만들어 선사한다.
마침내 에피메테우스는 모든 자질을 주어 인간에게 할애할 자질이 없었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신들처럼 걷게 만들고 ‘불’을 선물로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들의 동료인 타이탄들을 지하세계로 감금한 올림푸스의 신들을 공경하지 않고 대신 인간을 아끼게 된다. 제우스 신이 인간에게 신에게 제사로 드릴 동물의 가장 좋은 부위를 바치라고 명령했을 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이려고 마음먹는다. 프로메테우스는 두 개의 고기 덩어리를 준비했는데 하나는 향기가 나고 먹음직스러운 기름이 붙어있는 뼈와 다른 하나는 가죽으로 둘러쌓인 고깃덩어리다.
‘아름다운 악’ 인 여자를 만들도록 명령한 제우스
제우스는 겉모양을 보고 뼈를 선택하였다. 제우스가 앞으로 자신이 선택한 것을 정기적으로 제사음식으로 받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뼈만 정기적으로 제사받을 운명에 처했다.
제우스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인간문명의 핵심인 불을 빼앗는다. 프로메테우스는 태양에서 횃불에 불을 붙여 인간에게 건네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는 더욱더 화가 나 인간과 프로메테우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을 가한다.
인간이 프로메테우스로부터 그가 하늘에서 훔친 불을 선물로 받자, 이 사실을 안 제우스가 화가 나 인간에게 벌을 주기로 했다. 그는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에게 인간에게 고통을 줄 ‘아름다운 악’인 여자를 만들도록 명령한다. 당시 가부장적인 그리스 사회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한 듯하다. 흙과 물로 빚어 몸이 완성되자 네 가지 바람이 불어와 생명을 불어넣었다.
헤파이스토스가 여자를 창조한 후, 아프로디테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했고, 아테나 여신은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솜씨’와 은색 가운, 찬란하게 수놓은 베일, 목걸이 그리고 은으로 만든 정교한 왕관을 선사한다. 포세이돈은 진주 목걸이를 선물하여 바다에 익사하지 않도록 만들고, 아폴로는 하프 연주하는 법과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다.
제우스는 바보 같고 장난기가 많은, 동시에 게으른 본성을 선사하였다. 헤라는 치명적인 호기심을 선사하였다. 헤르메스 신은 그 인간에게 남을 속이려는 마음과 거짓말하는 혀를 선사한다.
이 여인의 이름은 <신통기>에서 밝히진 않지만 헤시오도스의 또 다른 작품인 <일들과 날들> 590~593행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그녀가 처음으로 신과 인간 앞에 섰을 때, ‘놀라움’이 그들을 사로잡았고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간교함’이 있었다.
“그녀로부터 여자와 여성이라는 인종이 나왔다.
그녀는 치명적인 인종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남성들 사이에 그들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존재이다.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으나, 부가 있을 때만 도움이 된다.”
이 인간의 이름은 ‘모든 선물’이란 의미를 지닌 ‘판도라’다. ‘판도라’는 첫 여성이며, 처음에 존재했던 인간은 이제 그 상대적인 존재로 남성이 되었다. 헤르메스는 판도라에게 정교하게 만든 상자를 주면서 결코 열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런 후 제우스는 화려한 옷을 입은 판도라를 인간들과 지상에 거주하고 있던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낸다. 프로메테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의 선물인 판도라를 받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판도라가 지상에 거주하게 되었다.
판도라는 신들이 열지 말라는 상자를 바라보면서 호기심으로 가득 차 마침내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게 된다. 그 상자에서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악이 빠져나왔다. 슬픔, 재난, 불행 등…. 그러나 상자 맨 밑바닥에 이전 것들과는 전혀 다른 한 가지가 나왔는데, 바로 그것이 희망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삶이 고되다 할지라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어 살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1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당한 유대인들의 신발 더미.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의 충격적 경험을 담은 소설 <흑야(黑夜)>를 통해 신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2 유대인 학살을 총 지휘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다.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장교였던 그는 독일 항복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가 이스라엘로 압송돼 1962년 처형됐다.
홀로코스트의 충격과 10년 동안의 침묵
우리가 희망의 빛이 사라지고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 한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은 1928년 당시 루마니아에 있는 트란실바니아(후에 헝가리에 편입됐다)의 조그만 동네에서 태어났다. 엘리위젤은 보수적인 유대 가정에서 정통 유대인으로 성장한다.
그의 아버지 슬로모는 유대인 게토인 ‘쉬테틀’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신앙생활에 열정적이었다. 엘리 위젤은 어려서부터 유대인 경전 토라, 그리고 토라에 대한 구전 해석을 모아놓은 탈무드, 심지어는 유대 신비주의인 까발라에 심취하여 깊은 신앙심을 가졌다. 헝가리에 반유대인 정서가 만연했지만, 나치의 반유대 정책이 영향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안전했다.
그러나 1944년 3월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했고 헝가리에 꼭두각시 정부를 수립하면서 엘리 위젤을 포함한 헝가리 유대인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헝가리에 거주하는 유대인 학살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헝가리에 도착한다. 1944년 당시, 유일하게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헝가리에서 독일과 폴란드로 이동되어 56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엘리 위젤이 살던 ‘시겟’이란 도시에서는 1만5000명의 유대인 중 50 가정만 살아남았다. 1944년 5월 그가 15세였을 때, 그의 가족과 쉬테틀 거주자들은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엘리 위젤은 거기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고 혼자 살아남아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엘리 위젤은 홀로코스트의 충격으로 10년 동안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가족, 친구들, 그리고 유대인종이 학살된 것을 목격한 청소년 엘리 위젤은 침묵하였다.
인간의 언어로,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담기가 어려웠다. 그는 1956년 이디시어 제목 ‘운 디 벨트 호트 게쉬비근(Un di Velt Hot Geshvign)’ 즉 ‘그리고 세상은 침묵하였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경험을 다룬 소설을 출간한다.
그 후 1958년 그의 작품은 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 출간됐고, 이 책은 다시 영어로 로 한국에서는 <흑야>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경험과 같은 절망적 내용을 담긴 책이라 출판사조차 처음에는 출판하기를 꺼렸지만, 이 책은 홀로코스트에 관해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읽힌 책이 되었다.
소설 <흑야>에서 내레이터는 엘리 에제르라는 소년이다. 엘리 에제르는 작가 엘리 위젤의 경험을 전하는 소설의 ‘제2의 자아’다. <흑야>는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정통 유대교 소년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간성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발견한, 세상에 환멸을 느낀 청년으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엘리 에제르의 신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신에게 기도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왜 기도했냐고?… 왜 사냐고? 왜 숨 쉬냐고?”라고 되묻는다. 전지전능하고 자애로운 신에 대한 그의 믿음은 무조건적이며 그는 신앙이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던 그의 신앙은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엘리 에제르의 신앙은 유대 신비주의인 ‘까발라’였다. 까발라는 신은 세상 어디에나 계시며 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적인 세계의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선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엘리에제르의 이런 믿음은 홀로코스트에서 자신이 경험한 잔혹성과 악의 엄연한 횡포로 인해 흔들리고 만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신이여,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그는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에게 선을 베푸시는 신이 나치로 상징된 절대악이 만행을 저지르도록 허락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신앙심으로 가득한 동료 유대인들이 이 극한 상황에서 종교심을 쉽게 포기하고 이기심으로 가득한 잔인함과 폭력을 일삼는 동물로 변하는 모습에 실망한다. 만일 모든 유대인이 나치의 만행에 항거해 힘을 합친다면, 엘리 에제르는 나치의 위협을 객관화해 악으로 대상화할 수 있지만, 동료 유대인들 안에 만연한 인간 본성인 악의 모습은 설명할 수 없었다.
그의 실망은 바로 악의 무정형성, 무객관성에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는 홀로코스트를 통해 나치뿐만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 심지어 자신 안에 숨어있는 이기심, 악 그리고 잔인함을 확인하였다. 이 세상은 이기적이고 잔인하기 때문에, 신도 이기적이고 잔인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험은 엘리 에제르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일깨운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는 자신의 신앙과 씨름한다. 이 씨름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존재에 꼭 필요한 요소다. 엘리 에제르의 까발라 신비주의 스승인 랍비 모세가 왜 기도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신이 저에게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질문은 신앙의 핵심이다. 홀로코스트는 엘리 에제르에게 선과 악의 본질, 신의 존재에 대한 적나라한 질문을 묻도록 강요한다. 그가 아직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가 신을 의지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엘리 에제르를 가장 괴롭히는 풀 수 없는 숙제는 신이 침묵한다는 사실이다.
“내게서 나의 살고 싶은 욕망을 영원히 빼앗은 그 칠흑 같은 침묵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또한 게슈타포가 어린아이를 목 매달아 처형하는 장면을 보고 한 유대인이 “신은 도대체 어디 있나?”라고 외치자 그 대답은 ‘아우슈비츠 안에 도도히 흐르는 완전한 침묵’이었다.
전지전능한 신이 이런 극악무도한 폭행을, 특히 신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하고 방관할 수 있는가? 이런 공포의 존재와 신의 침묵이 엘리 에제르의 신앙을 뒤흔든다.
이 장면은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장면과 유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 소위 ‘아케다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신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이 이삭을 바치려는 순간, 신은 자신의 전령인 천사를 보내 이삭을 살린다.
천사는 신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고 전한다. 신은 결코 무고한 피를 흘리는 그런 매정한 존재가 아니다.
<흑야>에서 침묵과 무반응으로 점철된 신과는 달리 아케다의 신은 침묵하지 않았다.
<흑야>는 아케다 이야기에 대한 충격적인 반전이다. 그 끔찍한 순간에 신은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려고 개입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갈 때처럼 신은 침묵한다. 천사가 아우슈비츠로 내려와 유대인들을 구해내고 아우슈비츠를 불태우지 않는다.
심지어는 엘리에제르의 아버지 슬로모가 두들겨 맞아 피범벅이 되었을 때, 엘리 에제르가 아무리 신을 불러봐도 돌아오는 반응은 ‘침묵’이다. 아케다 사건에서 신은 희생을 요구하나 궁극적으로 자비로운 분이라는 점을 말하나, 홀로코스트에서 신의 묵음은 신이 자비롭지 않다는 증거다.
그런 신이 이 세상에 필요한가? 신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인간 허상의 투영인가?
신의 침묵에 절망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국가적인 재난에 신은 전혀 반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인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에스겔은 구약성서의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이며 신비한 예언자 중 한 명이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사제이자 사독의 자손인 부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스겔은 유다의 여호아킨 왕과 함께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 멸망한 후,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였다. 바빌론에서 에스겔은 유대인들 안에 파고들어가 자리 잡은 ‘절망’을 깊이 묵상한 자였다.
“형식적인 의례 버리고 신의 말씀을 실천하라”
그는 바빌로니아 남부에 있는 니푸르라는 도시에 있는 그발강 수로사업에 투입되어 포로들과 함께 살았다. 대부분 포로의 삶이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그는 고된 노동을 하거나 노예로 지낸 것은 아니다. 그는 결혼하여 자신의 집에서 살았으며 많은 저명한 손님을 환대하였다. 그는 종종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유대인들의 죄를 짊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동료 유대인들에게 가졌던 불만은 그들이 너무 자아도취에 빠져 있고 아무 생각도 없이 바빌로니아 풍습을 기꺼이 수용하려던 점이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온 지 5년째 되던 해, 그발강 둑에 앉아 신의 계시를 받는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병은 바로 절망이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대안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는 하루살이처럼 사는 동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충격적인 행동을 통해 희망을 보여줄 것을 계획한다.
성서에서 에스겔만큼 개성이 뚜렷한 예언자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예언자임을 절감하고 그는 절망에 빠진 유대인 포로에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려 노력한 신앙인이었다. 예언자들 가운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자신의 엉덩이를 내놓은 채 3년 동안 돌아다녔고, 예레미야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호세아는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에스겔만큼 자신의 상징적인 행동과 알레고리를 그의 삶의 전부로 만든 예언자는 없을 것이다. 또한 에스겔은 자신의 기이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사지가 마비되거나 혀가 굳어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에스겔> 1장에는 하늘에 있는 왕좌가 등장한다. 이 왕좌에 대한 환상은 <에스겔> 전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면이다. 신은 에스겔의 삶을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인들에게 어떤 ‘표식’이 되길 바란다.
에스겔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신의 뜻을 드러내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그는 집 문밖으로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며, 자신을 몸을 묶고 침묵하기도 한다.
에스겔이 그발강가에서 다른 포로들과 함께 있는데, 신이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었다. 다른 포로들은 에스겔의 환상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었다. 그가 눈을 들어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데, 큰 구름이 밀려오고, 불빛이 계속 번쩍이며, 그 구름 둘레에는 광채가 나고, 그 광채 한가운데서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반짝이더니 그 광채 한가운데서 사람처럼 생긴 생물의 형상이 보였다.
그리고 이 형상들 위에 있는 창고 모양의 덮개 위에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고, 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앉아 있었다. 에스겔은 이 형상이 신이라 생각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신이 말한다.
“사람아, 일어서라! 이스라엘인들은 패역한 백성이며 나를 배반하는 사람들이다. 네가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을 전하여라.”
신은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온 이유를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죄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거룩한 공간인 예루살렘에만 가면 자신들이 신을 만나고 신의 축복을 획득했다고 믿는 자만심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의 명령을 듣고 삶으로 실천하기 위한 목적을 상실했다. 신은 형식적인 의례만 행하는 이스라엘인들을 벌주신 것이다.
신은 에스겔에게 신의 말을 내재화하여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너 사람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어라”라고 말한다. 신의 말씀은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내재화하여 내 삶으로 만드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 온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신의 첫 행동은 빛을 만들어 암흑을 쫓는 일이었다.
“아내가 죽더라도 슬퍼하거나 곡하지 말라”
하늘에서 한 손이 내려왔다. 자세히 보니, 그 손안에 두루마리 책이 한 권 있었다. 이전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십계명과는 달리, 그 안팎에 적힌 글들은 슬픈 노래와 재앙으로 가득 찼다.
신은 에스겔에게 “사람아,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려주어라.”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신이 이전에는 거룩한 장소인 예루살렘이란 공간에 거주하다가, 신의 존재가 ‘두루마리’라는 책이 되었다는 점이다.
신이 계신 곳은 장소가 아니라 신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안에 있다는 교훈이다. 에스겔이 입을 벌렸더니 신이 그 두루마리를 먹여주시며, “사람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너의 배를 불리며, 너의 속을 그것으로 가득히 채워라”라고 말한다.
신의 명령대로 두루마리를 먹었더니, 에스겔은 “그 두루마리가 꿀같이 달았다” 라고 기록한다. 실제로 두루마리가 꿀같이 단 것은 아니다. 신의 말씀대로 산다면, 인생이 보람되고 달콤할 것이라는 메타포이다.
그는 신이 보여준 환상으로 그발강가에서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인들과 7일 동안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 후에 신은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너는 집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집 안에 있고 사람들이 너를 포승으로 묶어 놓아서, 네가 사람들에게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내가 네 혀를 입천장에 붙여 너를 벙어리로 만들어서, 그들을 꾸짖지도 못하게 하겠다.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다시 말할 때에, 네 입을 열어줄 것이다.”
에스겔은 포승줄로 묶인 채 방안에 갇혀있으며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된다. 이스라엘인들이 말을 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강퍅함을 드러내기 위해 에스겔은 벙어리가 된다. 그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390일 동안 한쪽으로 누워있기도 했다.
그 후에는 신이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을 모형으로 만들어, 그 앞에서 다시 다른 쪽으로 누워 390일 동안을 버텼다. 에스겔은 2년 넘게 누워 있으면서 자신의 민족이 당한 재난과 수모의 원인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한 것이다. 심지어 신은 에스겔에게 밀가루 빵을 인간의 똥으로 만든 연료 위에서 굽도록 명령한다. 에스겔은 신에게 이런 비위생적인 행위는 이스라엘 정결법에 위배된다고 말하자, 신은 “그럼, 빵을 소똥으로 만든 연료 위에서 구워라!”라고 말한다.
신은 심지어 에스겔에게, 아니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과감히 행한다. 신은 “사람아, 내가 네 보는 앞에서 너의 기쁨인 아내를 앗아가려고 한다.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 조용히 신음하고 죽은 자를 위해 곡하지 말라.” 에스겔이 이 말을 사람들에게 전한 후, 그의 아내가 저녁에 죽었다.
에스겔은 바빌론포로기를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이 이런 재난을 받은 이유를 자신의 기이한 행동을 통해 전하고, 이들이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더욱더 깊은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들은 이제 도저히 재생할 수 없는 시체들이며, 그것도 모자라 무수한 세월이 지난 마른 뼈들과 같았다. 마른 뼈와 같은 이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신이 에스겔을 잔인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가 신의 백성에 대한 상징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에스겔이 자기 아내의 죽음조차 슬퍼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애도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 두 경우에 신이 그 재난을 만들었으며, 예루살렘의 경우는 이스라엘인들의 죄 때문이며, 에스겔의 아내의 경우는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다. 이런 경우, 이스라엘인들이나 에스겔이 보여줄 수 있는 행위는 애도가 아니라 회개와 겸손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의 법 ‘루아흐’
에스겔의 가장 유명한 환상은 소위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이다. 신은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리고 간다. 이 골짜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는 ‘게헨나’와 같은 시체를 유기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게헨나는 고대 가나안인들이 자신들의 신인 ‘몰록’에게 바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던 장소로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고 전한다.
에스겔은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에 서 있었다. 신이 그에게 묻는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에스겔은 “당신만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신은 에스겔에게 뼈들에게 예언의 말을 전하라고 명령한다.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며 실의에 찬 사람들이다.
소설 <흑야>에서 엘리 에제르가 자신의 아버지가 피 흘려 죽는 것을 목격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공황상태를 바로 마른 뼈로 비유한 것이다.
신은 에스겔에게 이 마른 뼈들을 향해 예언하도록 요구한다.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신이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행하는 이유는 그때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인들이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분이 바로 야훼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봄에 뿌린 씨가 발아하여 줄기와 잎사귀를 내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과정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다. 신은 생명을 창조하는 신비를 운행하는 분이시다. 신은 보기에는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 넣겠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생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루아흐(ruah)’다. ‘루아흐’는 모든 동식물에 깃든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루아흐’는 씨앗을 발아하게 하는 안 보이는 힘이며, 포유류의 x·y 염색체가 만나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신비다.
‘루아흐’는 또한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바다에서 여러 달 동안 수천㎞나 헤엄쳐서 산란지인 강 상류에 도착하여 암컷이 구멍에 알을 낳으면, 수컷이 그 위에 정자를 뿌려 수정시키고, 산란을 끝낸 암수는 지쳐서 모두 죽는 정교한 의례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의 법이다.
에스겔은 이제 신의 특성인 ‘루아흐’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만물이 바로 보이지 않는 ‘루아흐’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희망은 불가능하지만 바랄 수밖에 없는 미래
에스겔이 신으로부터 유임을 받은 명령을 대언하니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루아흐’ 즉 생기가 없었다. 인간이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그 안에 영혼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은 에스겔에게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곧이어 에스겔은 마지막 환상에 나온다.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하고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는 예언이 <에스겔> 40~48장에 등장한다. 그 안에 자세한 묘사가 등장한다.
건축 계획, 크기, 건축자재, 사제들을 위한 방, 의례, 종교 축제,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 간의 부동산 분배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는다.
에스겔은 모든 세대에 말을 걸고 특히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을 보여준다. 오늘날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는 ‘영적인 용기’라는 부인할 수 없는 힘과 숭고한 꿈이 필요하다. 1세기 예수 운동을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그리스-로마세계로 소개하여, 그리스도교로 발전시킨 바울은 인간은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선포한다.
성서는 신이 우주를 창조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 온 세상은 “혼돈하며 공허하고 어둠이 ‘깊음’ 위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신의 첫 행동은 빛을 만들어 어둠을 쫓는 일이었다. 어둠과 밤은 신이 없는 세상을 상징한다.
에스겔이 목도한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른 뼈들 위에 힘줄과 살이 오르고 살갗으로 덮인 후, 생기가 들어가 사람이 되어 움직인 것처럼,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라는 또 다른 마른 뼈 골짜기에서 불가능하지만 바랄 수 밖에 없는 미래,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렀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이 환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에스겔에게 그것은 오랫동안 죽어 뼈만 남은 현대인을 위한 이야기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조망과 희망은 단순히 뼈, 힘줄, 살 그리고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존재를 알 수 없지만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과 같은 ‘생기’가 들어와야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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