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궁금해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러해야 한다'
'내가 알 수 없는 그 엄청난 무엇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더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과 자기 자신과의 사이를
너무 멀리 잡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깨달음은 그 어떤 특정한 근기의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수행자라고 자부하는 이들마저도
'이번 생에는 복이나 짓고 그러다보면 다음 생 언젠가 깨칠 날이 있겠지'
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법회 때 한번은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성불(成佛)하는 것이 이번 생의 원(願)이신 분?'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 생각은 하였지만 이 정도로 안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입으로는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 하면서
실은 성불보다는 눈앞에 닥친 욕망의 충족에 더 큰 마음을 쓰고 살아갑니다.
성불, 깨달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딴 세상의 일일거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10년 씩 장좌불와하는 스님들이나,
수십 년 세속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너무도 큽니다.
그러나 법우님, 생활수행자 도반님들!
깨달음에 대한 환상에서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나'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깨달음 그 자체는 환상도 아니요,
신비주의적인 그 어떤 오묘한 형상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깨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그렇게 어렵게 바라보고 있는
그 시선이 나를 깨달음과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깨달음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일 것이며,
하늘이 열리고 온 우주가 개벽을 하고
천지가 내 안에 와락 들어와 안기게 될 것이라는
그런 환상적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은 이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분별 망상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가장 단순한 일이며,
가장 평범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운 것입니다.
그 어떤 엄청난 노력과 집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 그 자체가 우리를 진리에서 너무도 멀어지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자리, 참나 주인공이란
멀리서,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안에서 언제나처럼
은은한 시선과 미소로 우리의 내면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일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찾을 수 없는,
눈이 다른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지만
늘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눈)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보여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닐 터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일체 법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正見)'
바로 그것이 깨달음일 것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단순하면서도 가까운 것 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단순한 것이기에
우리들의 깨달음에 대한 환상적 고정관념이
깨달음에서 우리 스스로를 점점 멀어지게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신의 잣대로 재고 분별하여 바라보는 이가 중생이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가 깨달은 이일 터입니다.
깨달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터입니다.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나는 과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눈을 가졌는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들의 시야는 그러지 못합니다.
천지 법계는 있는 그대로 언제나처럼 그렇게 여여한 모습으로 놓여있건만
우리의 시선은 온통 고정관념과 업식(業識)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는 숯한 편견과 색안경을 낀 채 '자기잣대'로 삐뚫어지게 세상을 바라 봅니다.
어느 한 대상을 바라봄에도
자기잣대 만큼만 바라보고 자기만큼만 판단합니다.
내 식대로의 바라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을 바라봄에도
수백, 수천명이 바라보는 그 '한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여여히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 사람이건만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 수대로 수백, 수천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에 대해
읽고 계시는 분들은 어느 한 분이라도
똑같은 모습으로서의 글쓴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읽고 계시는 분들 모두는 '자기의 잣대만큼의 글쓴이'를 인지할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는 오직 하나이건만
바라보는 이는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를 천차만별의 잣대로 인지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눈은 정견(正見)의 바라봄이 되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가 쌓아 온 만큼의 업식따라 제 멋대로 바라봅니다.
온갖 분별심을 투영하여 대상을 바라봅니다.
'과연 나는 분별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가'
하고 수행자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반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을 보더라도 생김새며 출신, 학벌 등과 상관없이
처음보는 그 사람을 여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것들 말입니다.
깨달음의 시선은
무분별(無分別), 무소유(無所有), 무소득(無所得), 무집착(無執着)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편견 없는 맑은 시야입니다.
분별하지 않음이며,
소유하지 않음이며,
얻고자 하지 않음이고,
그렇기에 집착하지 않는 맑은 마음입니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지 않으며,
'내것이다, 네것이다' 소유의 관념을 짓지 않고,
아집 때문에 내것으로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무분별의 맑은 시야입니다.
그저 일체의 모든 대상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분별 지을 수도 없고,
소유 할 수도 없으며, 집착 할 것도 없는
애써 말한다면 '그저 그런 것' 일 뿐입니다.
숭산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입니다.
어떻게도 이름 지을수 없고 분별할 수 없기에
'이것이 무엇인가(이뭣고)' '나는 누구인가' 했을 때
앞뒤가 꽉 막혀 버리고, 말을 꺼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오직 '의문'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이렇듯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추구하는 우리 생활수행자 밝은 도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연습을 해 나가는 일입니다.
그 연습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연습이며, 부처님 마음 연습이 됩니다.
그러한 편견 없는 '바라보기'는 일체 대상 을 대함에 있어
'무분별' '무소유' '무소득' '무집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실천이며,
방하착(放下着)의 생활수행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을 버리고
분별하지 말고, 소유하려 들지 말고, 얻으려 들지 말고, 집착하지 않음,
그래서 일체를 다 놓고 가는 방하착의 생활실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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