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일본의 역사왜곡은 과거 우리나라를 일시 강탈하고 괴롭혔던 자신들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다시 강탈·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2세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야만적이고 치졸한 행태다. 일본은 여전히 날조·왜곡된 거짓역사를 눈 하나 꿈적 않고 변조하는 작태를 벌이고 있다. 중국의 우리 고대사 말살 또한 역사를 도둑질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자신들의 영혼을 파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국력을 앞세워 허황된 언어의 사술(詐術)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 할 수 없다. 나아가 이를 용납해서도, 왜곡을 답습하게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교과서는 그들의 왜곡한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가 중국과 일본에 선구자이며, 우리는 고대부터 중국 본토에 먼저 선주해 선진강대민족으로 그들을 지배하며 대륙에서 활동했다. 일본 역시 저급한 문화를 가졌었기 때문에 4세기부터 우리가 일본의 문화전반과 국가사회구성에 지대한 공덕이 있었음은 부인 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은 삼국시대에 와서 그들이 우리보다 우월한 문화를 갖기 시작했다. 일본에게는 우리가 대륙의 문화를 받아 들여서 이를 융합·발전시켜 전해주었다.
우리는 그들을 깨우쳐주고 농경이며 문화며 우리의 도움을 주고 선도했다. 가장 많은 우리의 도움을 받은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이런 은혜를 잊고 망나니 같이 우리나라를 수시로 침입하며 온갖 수탈을 일삼아 왔다. 우리가 북한의 6.25남침까지 총 932회의 외침을 받았는데, 이 외침의 거의가 일본이었다. 왜의 외침은 사실 노략질 수준이라과 봐야 정확하다. 왜구의 노략질이 무려 800여회였다는 점이다. 예컨대 13세기인 1223년~1265년 사이 우리영토를 무수히 침범한 왜구는 14세기에 들어 극에 달했다. 그 기록은 1350년~1391년 경인년(庚寅年) 이후 40년 동안에 무려 591회의 기록을 갖고 있는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더욱이 1392년~1555년 왜구의 출몰로 해안지대의 피해가 속출하자 조선조정은 울릉도 주민을 이주시켜 무인도화까지 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 민족은 다른 외국에도 좋은 일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명나라 초기 명제(明帝)가 일본에 왜구의 출몰이 심해 금지를 요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4세기부터 일본을 문명사회로 개화시키며 지배해온 역사를 숨길 수 없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을 고대시대부터 지배해 왔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민족이 그들보다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칼럼은 배달국의 문명을 일으키고 세계에 우리의 기상을 떨치고 난후 당시 유라시아는 물론 세계로 퍼져간 우리 선조들이 어떠했는지 등에 초점을 맞추어 그 당시 세계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류 5대문명·유라시아와 세계·대륙의 변화
인류의 5대 문명은 세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종래 농경이나 목축이 먼저인 것은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일어났음을 앞서 칼럼에서 이미 기술했다. 상고시대부터 일어난 농경이나 목축은 우리 한민족, 특히 배달국에서 발원해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으로 번져 나갔다. 보리와 조, 콩 등은 이 시대에도 심어서 거둬들였다. 거둬들인 콩으로 된장을 만든 것도 우리 민족이다. 일본의 나카오(中尾佐助)는 신학설이라 하며 일본의 ‘중학사회역사’ 책등에 ‘최고(最古)의 농경이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지대에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니다. 쌀농사며 농경을 시작하고 농기구를 만든 것은 우리 한민족이 처음이었다. 2001년 세계 500여명의 학자가 참가한 ‘제4회 국제 벼 유전학술회의’가 마닐라에서, 2003년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가 워싱턴에서 각각 개최됐다. 이 행사들에서도 우리 한민족이 가장 먼저 ‘재배 벼’를 개발해 전 세계로 전파, 세계 쌀 문화가 시작된 사실을 발표했다. 이 발표로 지금까지 나온 여러 학설을 일거에 모두 잠재웠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은 유라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명과 문화, 쌀농사를 이끈 주인공이다. 당시 한민족은 메소포타미아까지 이동해 타민족이 교역을 생각지도 않을 때 놀라운 역할을 했다. 한민족은 메소포타미아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각 대륙의 십자로에 위치해 있을 알고 교역로가 필요하다고 봤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바다와 육지를 연결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 최초로 배를 건조하고 육지에서는 기마민족으로 활발한 기동력을 통해 어느 민족보다 일찍부터 교역에 나선 것이 우리 한민족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우르고 지배하며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결과가 상고시대의 유라시아 대제국이었다.
인류의 농경이 시작되고 요하문명이 전개된 이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황하로 이어진 대하(大河)유역에서 발생한 5대문명은 세계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 문명이 발생 후 BC 3000년~2001년간(이 기간을 전(前)3000년 기(紀)라 말한다) 많은 도시왕국이 생겨 서로 싸우는 속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통합이 진행되기도 했다. 바빌로니아 왕국이 BC 2000년 기(紀)경 탄생했다. 그리고 함무라비 왕(BC 1700년경) 때에 사회의 규범을 규정한 ‘함무라비법전’이 완성된다. 이집트에서는 BC 3000년 기(紀)에 도시국가가 통일왕국으로 성숙했다. 그 후 왕조는 몇 번이고 교체되고 기마민족의 정복왕조도 이때 이뤄졌다. 이집트는 내세의 신앙을 가져 사후의 부활을 믿고 ‘미라’를 만들었다. 왕은 신의 아들인 자(子)였다.
북서인도에서는 인더스문명으로 농경을 넓혀 각지에 훌륭한 도시가 형성됐다. BC 1500년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목민이 서북인도에 침입해 선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 BC 1000년경에는 갠지스 유역에 진출, 철기를 만들어 쌀농사를 넓혀 도시를 형성하고 ‘카스트’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즉, 아리안인 사회에서는 신(神)에 봉사하는 승려(僧侶)를 비롯해 왕, 무사(武士)가 특권적 지위를 누리며 농·공·상업에 종사하는 평민과 선주민·노예 등을 지배했다. 황하유역에서도 BC 1500~1200경 각지에서 도시국가가 생겨나고 은(殷)이 가장 강성했다. 이 때 서아시아와 북방에 있던 우리 선조들이 청동의 칼등 무기를 가져다주었다. BC 11세기경에는 주(周)가 은(殷)을 넘어뜨리고 그 일족과 공신을 각지에 파견해 봉건제도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어 기원전 4세기 기마민족의 침입이 계속되면서 제후들은 각지에서 나라를 세운다. 이들도 앞선 기마전술이나 철제무기를 적극적으로 들여와 철제농구를 보급하고 농업을 발달시켜 상업까지 번성시킨다. 우리는 이런 흐름의 중심에 있는 기마민족이었다.
진(秦)의 등장 전까지 중원은 우리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유라시아 중원은 우리 한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명과 문화를 주도한 민족이 한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하족(華夏族) 등이 선진 한민족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들 화하족의 인구증가는 큰 변화를 가져온다. 물론 화하족들의 농경은 한민족에 의해 시작됐다. 농경과 함께 야생동물을 가축화·목축화 하는 일도 시작했는데, 바로 우리가 화하족에게 이를 전수시켰다. 이러한 생업이 일어나면서 농경민, 유목민, 수렵민이 공존하고 서로 교류하게 되면서 이들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문명이 일어나고 지배자가 출현해서 국가가 서게 된 것이었다.
기원전 8세기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주왕(周王)의 힘이 쇠해지고 제후(諸侯)들은 각지에서 나라를 세워 우리의 기마전술과 철제무기를 적극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철제농구가 보급되면서 농업이 발달하고 상업이 번성하게 됐다. 그 결과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이후 진시황(秦始皇)이 BC 221년 중원의 제국(諸國)을 통일한다. 진시황의 통일 이전까지 중국은 한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우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강 및 황하유역 등에 왕조를 세워 대륙을 호령했다. 농경과 함께 일어난 목축을 토대로 한 우리의 문명과 문화는 국가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또한 일본의 한 학자는 농경의 발상지가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아메리카라고 주장하면서 신학설 운운하며 왜곡하려 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미 밝혀진 대로 1만5000년 전 재배볍씨의 발견(충북 소로리)으로 우리의 농업이 동북아시아에서 세계로 전파된 것이 입증됐다.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유라시아와 세계로 문명의 기틀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 대빙하시대(BC 5만~2만5000년 전)에는 지구의 28%가 빙하에 뒤덮여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남부의 쇼베(Chauvet)동굴에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동굴벽화(3만5000년 전)를 남겼던 인류와 다른 지역의 인류들은 혹독한 기후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땅은 비교적 따뜻하고 다습한 기후가 유지된 천혜의 축복된 땅이었다. 그 증거의 하나로 충북 단양 금굴 유적지 한 곳에서는 20만 년 전 인류보다 훨씬 앞선 70만 년 전부터 후대까지 전시대에 걸친 유적들이 고루 발굴되고 있다. 공룡의 화석과 더불어 많은 발자국마저 발견되고 있는 것은 우리 땅이 빙하기를 이길 수 있었던 환경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2005년 제주도 서귀포시 상모리, 사계리(沙溪里)에서 2만여년 전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ce) 화석이 발견된 사실이다. 즉, 옷을 지어입고 언어를 구사하는 고도의 지능을 갖춘 인류가 지금의 우리 조상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실은 KBS <역사스페셜-제주도 사람발자국 화석의 비밀>에서도 방영했다.
이렇게 이 땅에 우리 조상이 정착해 산 것은 일반적인 인류사의 시작(20만 년 전)을 넘어서는 훨씬 앞서고 빠른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해수면이 낮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오가며 살 수 있었고, 서해도 지금보다 해수면이 1백m 낮은 땅이었기 때문에(지상 60m) 당시 우리 조상들은 지금의 중국 땅을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지리적 혜택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과학 동아-2004년 4월호> 이것은 유럽과 시베리아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전 세계 해수면이 100m 상승하기 전의 일이다. 인류의 조상은 과연 누구이며 그 인류는 어떻게 이동했는지 역사는 말한다.
인류의 조상과 인류의 이동역사 중심에 ‘동북아’
우리의 땅은 빙하기에 제주도와 육지가 거의 붙어 있었고 서해의 대륙붕(평균40m)이 전부 육지였다. 다시 말해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현재의 중국이 같은 하나의 대륙이었다. 그 당시 이곳에 중국인은 없었고 우리 한민족만이 물가를 에워싸고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이런 넓은 대륙은 1만5000년 전부터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변했다. 우리 조상의 삶의 터전이었던 서해지역의 땅은 서서히 40m 수심의 대륙붕의 바다로 변했다. 전설의 섬으로 불려지는 이어도 또한 1만1000년 전인 빙하기 까지도 제주도와 연결돼 있었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민요로 불러지는 이어도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지금의 대륙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학자들에 의해서도 밝혀지고 있다. 호주 시드니 대학의 지질학자들도 ‘1만년 이전의 한반도 서남해지역이 빙하가 녹기 전에는 육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빙하가 녹아내려 우리의 땅이 좁아지자 한국문명을 갖고 세계로 확대해 나간 것이다.
즉, 요하에서 시작한 요하문명(홍산문명, BC4500년~BC 3000년)은 메소포타미아문명(BC 3500년)을 거쳐 이집트문명(BC 3200~BC 343년), 인더스문명(BC 2600년~BC 1900년), 황하문명 BC 2000년), 그리스문명(BC 1100~BC,14년), 로마문명(BC 27~AD476년)으로 확산돼 갔다. 이는 인류의 문명루트다. 세계문명의 시원지(始原地)가 자랑스럽게도 우리의 땅이요, 우리나라 배달국시대이었다. 또한 놀라운 것은 2003년 3월과 4월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는 인류사에 놀라운 논문이 게재된다. 그것은 ‘헬리코 파이로린 박테리아의 유전자로 추적한 인류이동’(3월7일자)과 ‘농업언어의 전파’(4월25일자)라는 논문이다.
1만년전 첫 인류이동·농업언어(문명) 한민족 입증
이 두 논문은 모두 ‘약 1만 년 전(1만2000년~8000년 전)에 동북아시아로부터 어떤 집단이 세계로 확장됐음을 가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에는 우리 한민족이 있었다. 쌀의 볍씨가 1만5000년 전에 발견됨으로 인해 우리의 농업과 언어가 동북아시아에서 세계로 전파된 것이 놀랍다. 아울러 헬리코 파이로린 박테리아의 동아시아 형(EA형) 원시유형자의 원형이 오로지 한국인에게서만 100% 독립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스메르지역의 이라크인들(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한 아메리카 인디언(마야, 잉카문명)에게서 변형된 동아시아(EA형) 원시유전자가 분포돼 있음을 밝힌 놀라운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두 연구는 모두 ‘한국인이 동아시아의 조상’으로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 세계에 한국의 문명과 문화의 흔적이 수 없이 많이 있었던 것이고, 가축의 조상 또한 우리 것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 개의 조상도 한국 개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생물교과서는 개의 조상은 한국 개였음을 DNA를 통해 추정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문명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역으로 그 중심에 서있었기 때문이며, 우리보다 선진민족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1926~36년에 걸쳐서 북경 서남 약 50Km 교외의 주구점동굴(周口店洞窟)에서 수만 년 전의 북경인이 40체 이상 발견됐다. 이중 1933~34년에 발견된 인골은 고생인류(古生人類)의 원생인류(原生人類)로서 홍적세기 후기 5만 년 전에 활동하고 불을 사용해서 식물의 조리를 알고 수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북경인이 중국 한족(漢族)의 조선(祖先)이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중국인(화하족(華夏族)=동남아시아인)이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인류문명의 시작과 이동이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시작되고 주도됐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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