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통해 본 그리스 신화 I
- 신 고고학적 방법에 의한 이미지분석에 대하여 -
* 우 성 주*
Ⅰ. 고대 문명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접근 시각
현대인들이 고대(古代) 문명을 이해하기란 마치 이정표도 없이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나서는 여행가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아주 오래된 문명이기에 무조건 감당하기 어렵다는 막연함보다는, 우리가 가진 언어나 상식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그들 고유의 문화를 어떻게 탐색해 나가야 할지 그 접근 방법에 대한 막연함이 고대 문명을 만나려는 우리들이 실감하는 어려움일 것이다.
현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처한 자연 환경 및 사회 환경이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비록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전혀 다른 관념으로 해석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더욱이 시대를 소급한 먼 과거의 일은 지금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세계 7대 불가사의”1)를 보면서 과거의 흔적이 지닌 경이로움에 대해 우리가 느끼게 되는 충격과도 같지않을까.
현대인들에게 과거는 막연히 열등하며, 인류는 미래를 향해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진보적 역사관의 시각으로 과거를 본다면, 이러한 불가사의로 이름 붙여진 고대 문화나 문명을 보면서, 분명 “과거는 지금보다 못하다”라고 결론 내릴 수 없는 무수한 요소들이 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2) 과거의 사건이나 문명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고고학자나 인류학자, 역사가는 미세한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여러 분야의 문화를 접목시켜 고대인들의 숨결을 끄집어내려 노력 분투 중이다. 결국, 작은 부분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를 만들어 놓듯, 부분을 놓쳐 버리면 전체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고대 문명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일까. 문자로 기록된 다량의 문서가 발견된다면 그 시대를 이해하기 매우 유용한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서는 극히 제한적으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제한된 기록물에 나타난 문자를 해독하기도 쉽지 않다. 문자의 구조와 운영체계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채로 해독되지 않는 문자들은 물론이고, 해독이 되는 경우에도 현대인들의 의사구조와 다른 상징 체계를 사용하거나 시대적 의미 변화의 단계에 있어서 잘못 해독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문명을 보다 정확히 알게 된 첫 걸음은 기록 문자가 사용된 시대부터라 말 할 수 있다. 물론 문자 이전 시대에도 인류가 가진 고유의 지역적 문화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남겨진 잔해만으로는 각 지역별 문화적 특색을 규정짓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겨진 고대 문자들이 근대에 들기까지는 베일에 가려진 그림 문자에 불과하였으나 수많은 학자들의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하나 판독이 가능하여져 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모든 현상학적 문화의 요소마다 기록과 흔적을 함께 고스란히 남긴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왕권을 비롯한 권력층의 묘사나 사건 등에 대한 서술은 비교적 기술의 대상이 되었으나, 대부분의 나머지 영역에 대해서는 기록이 극히 제한적이거나 아예 기록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제한적인 부분일지라도 고고학적 측면에서 문자가 지니는 의미는 대단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문자 이전 시대는 물론이고, 문자 시대에도 기록의 우선 대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고고학적 관심은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기록된 문자와 그 밖의 그림들은 모두 기록된 이미지(image)로서의 고고학적 의미를 지닌다. 문법적으로 해독이 가능한 문자의 경우에는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메시지(message) 전달이 쉽게 구현될 수 있지만, 비문자적 그림들의 경우에도 제작한 사람들의 의식과 습성이 반영된 메시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그림으로서의 이미지들은 아주 오래 된 동굴 벽화3)에서부터 암각화 그리고 조각 및 부조, 도자기에 그려진 여러 장면 등을 통하여 미쳐 문자화되지 않았던 고대인들의 숨은 이야기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구체적인 주제는 현재, 국내에서 난무하고 있는 흥미위주의 미국판 그리스 신화 해석의 유행이 지니는 학문적 단점과 오류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그리스 시대에 기록된 문자와 더불어 여러 예술품에 표현된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 신화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해석과 이해를 지향하기 위한 신 고고학적 방법론을 적용의 필요성과 그 성과에 대한 논의이다.
* 한양대학교. 경기도박물관 전문위원.
1) 기원 전 2,600년경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기원전 3세기경에 세워진 높이 135m가량의 파로스(Paros) 등대, 기원전 5세기경 의자에 앉은 높이가 13m인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기원전 9세기경 120년에 걸쳐 완공된 길이 120m, 폭 60m인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기원전 3세기경 높이가 34m(혹은 120m)인 로도스 섬의 아폴론 거상, 기원전 4세기경 가로․세로 길이 32x38m, 총 높이 50m인 할리카르나소스의 모솔레움 그리고 기원전 500년경 가로․세로 4백m, 폭 15m되는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 정원.
2)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가 단순하게 발전적인 궤도를 그리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궤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의 역사를 일반화하여 평가하려는 시각을 유보하고, 비록 그것이 작은 부분일지라도,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3) 기원전 15,000 년전 스페인의 알타미라지역의 동굴 및 프랑스 남부지방의 라스코 동굴벽화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Ⅱ. 신 고고학적 방법론
2.1. 연구대상으로서의 고대 그리스 문명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고대 문화/예술의 형성을 사회 문화적 미적 감각 및 미학의 배경에 대한 다양한 요소의 분석을 이끌어 내기 위해, 종합적 미감의 대상인 건축물, 조각, 도자기 등을 대상으로 기초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연구 및 분석은 <신 고고학>의 연구 시점에서 수행하였으며, 신 고고학이란, 상대적으로 고고학이란 연구 분야가 과거를 발굴하고 그 모습을 재현하는 데 목표를 둔 것에 반하여, 인간의 사회/ 문화적 산물이 어떻게 문화/ 예술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과거와 현재, 미래로 연결되는 지를 밝히고 그를 비평하는 학문이다.4) 따라서 아크로폴리스라는 건축물을 그 구조 공학적 측면에서 발굴하고 재현하며, 기초적인 문화적 배경을 연구하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이 지닌 시대적, 지역적,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배경을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으로 연구하여,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여러 상이한 요소가 어떻게 조합되어 그 건축물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 문화/ 예술적 형성과 의미를 분석하는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다.5)
본 연구 논문은 이러한 신 고고학의 큰 줄기를 바탕으로 한, 후기 구조주의적 연구가 지향하는 연구 경향을 반영하여 진행되었다. 그리스신화를 주제로 건축물, 예술품, 장식품 등에 표현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분류하여, 문자가 포함하지 못한 많은 정보를 기록된 이미지를 분석함으로써 당대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신들에 대한 해석을 보다 더 근원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의 여러 주제와 관련된 토픽을 다층적 시각에서 분석함으로써, 문화 예술적 표현 양식에 대한 통합적 해석을 할 수 있다.6)
4) 구조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고고학을 언어학적, 종교학적, 산업적, 윤리적 관점에서 분석 연구한 내용이다. 참조, Philippe BRUNEAU. 1986. Revue d‘archéologic et d‘archéologie générale I. Paris: Presse de l‘université de Paris Sorbonne, pp.3-33.
5) 구조주의 철학가인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서도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
참조, Michel Foucault. 1992. L`archelologie du savoir. Paris: NRF, pp. 177-183.
6) 참조, Louis Frederic. 1978. Manuel pratique d`archeologie. Paris: Robert Laffont.
2.2. 문자 이미지의 의미
그리스인들의 기록이나 문자에 의한 의사소통 및 여러 정보의 교류와 공유를 살펴보면, 우선 알파벳에 a, e, i, o, u의 모음을 도입하여 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된 배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7)
그러나 호메로스 시대의 “일리아드․오디세이”에서 묘사가 되듯, 누구나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의사 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초기 묘사들을 보면, 뜻을 알 수 없는 웅성거림이나 의성어를 냄으로써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고 다만 몇 몇 정치적인 힘을 가진 권력가나 전제 군주들에 한하여서만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 할 수 있었다.8) 그리고 이 시대의 ‘말’이란 의미는 단순한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명령’이 함께 내재되어 있는 절대적인 힘이 있었다. 왜냐하면 영웅들의 세계는 신들과 결탁되어 있어, 자신의 ‘말’은 곧 ‘신의 의사’를 대신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9)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인들이 가장 경외하고 두려워 한것, 또한 신들의 의사와 행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널리 보급되고 사용되었던 도자기 안의 기록 등을 통하여서도 확인이 된다. 즉, 도기의 그림에는 거의 도공의 사인과 더불어 화가의 이름, 그리고 때때로 한 줄 혹은 두, 세 줄의 기록이 나타나곤 하였다.
기원전 730-72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네스토르10)의 잔’에 새겨진 문장을 보면, “나는 네스토르의 감미로운 잔이다. 이 잔으로 마시는 자는 영예로운 아프로디테의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기록 중 그 성질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많은 도자기의 기록들은 예를 들면 대게 “나는 도공 아킬레스에 의해 만들어 졌다”로 표기를 볼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은 사물을 ‘나’라는 1인칭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알 수 있으며, 도자기 자체를 1인칭 주어로 인격화된 표현을 통해 물질도 생명을 부여받아 신들에게 봉납됨을 찬미하였다. 즉, 이렇게 만들어진 도자기는 성소의 제물에 바쳐지기도 하였는데, 그 형식은 “아킬레스는 이 제물을 어느 신에게 바친다”고 표시하였다. 자연 뿐만 아니라 물질에게도 생명이 깃들어져 있다고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말’을 대신하여 하나의 ‘매개체’를 통하여 의사 및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에 의한 기록뿐만 아니라 도자기 위에 이미지로 영상화시킨 그 자체도 그리스인들의 기원과 안녕 그리고 고대 사회 문화의 대변인이라 볼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의 축적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어서,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광범위한 범위에서 적절한 결과물을 이끌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한다.
7) 코린 쿨레. 1999. 『고대 그리스의 의사소통』. 서울: 영림카디널. pp.21-33.
8) “에우로스(동풍)와 노토스(남풍)가 이카리아 해를 뒤흔들어 놓기 위해 아버지 제우스의 큰 구름으로부터 뛰쳐나왔을 때와 같이 청중들은 모두 파도가 거센 바다처럼 동요하였다. 혹은 제피로스(서풍)가 추수를 시샘하여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이삭들이 모두 떨어진 것처럼 민회 참석자 모두가 동요하였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모두 돛배로 달려갔다. 그들의 발아래에서 먼지들이 풀썩 일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I, 142 sq.
9) “여신이여, 당신 두 분(헤라와 아테나)의 명령은 누구나 따라야 합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가지고 있으나, 신께 복종해야, 신이 소원을 들어 주시겠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 216-218
10)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현명한 참모.
2.3. 조형 이미지 연구 방법의 등장과 그 의미
그리스적인 문화유산들에서 빛나는 많은 것들 중, 유독 그 전 시대와 특별한 것은 우선 집단 지배층에게 편중되어 있던 건축물의 축조 요인이나 왕궁의 사업들이 일반 이름 없는 도공이나 건축가 예술가들의 서명을 허락하였으며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금의 예술적 가치들이 존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국한된 몇 몇 왕족이나 귀족들에 대한 것만을 표현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와는 달리 일반인들의 삶과 죽음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고 나아가 그들의 일반적 신화관도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런 작품들 중, 그리스가 다른 문명권과 달리 유독 많은 유물을 남긴 도자기에 대한 관심은 2차 세계 대전 이후11) 독일이 방대한 고대 유물들을 수집하면서, 유럽에서는 그리스 도자기의 유형 및 양식(style)을 정리하게 되었다. 특히 조각난 그리스 도기화의 부분들을 월터 리즐러(Walter Riezler)에 의해 원형이 보존될 수 있는 방대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두 번에 걸쳐 세계 대전을 치른 유럽은 1940년대에 들어서야 지금껏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리스. 로마 유물과 유적들을 정리. 보존하는 문화사업에 심려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고대 문화사 연구의 가장 큰 난이도는 남겨진 고증서(text)의 진실성과 다양한 자료들이 엄청나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원전 6세기경의 아테네의 도기 화가 중 명성이 높았던 폴루그노토스(Polugnotos) 12)의 작품은 다만 기원전 3세기-1세기경 역사가들의 기행문에서만 접할 수 있을 뿐, 실재 아무런 그의 작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 대한 각 역사가들의 평을 어디까지 객관적으로 받아 들 수 있는 지는 모호한 점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고증서에 대한 부족도 역시 고대 문화사에서는 늘 따라다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이 즐겨 도기화에 그려 놓은 많은 그림을 통하여 숨겨져 있었던 그들의 생각과 종교, 철학, 풍습 등 문화생활 및 일반사에 접근을 시도하는 연구가 그리스. 로마 미술 고고학의 한 기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리스, 로마 고고 미술사 연구는 유럽의 연구진들이 발굴되어진 여러 유물과 유적 및 고증서 등을 시대별, 형식별, 장소별 여러 형태로 분류한 것을 직접적으로 역사적 현장과 실증을 찾아 대입하는 과정에서 고증서가 존재하지 않는 부분과 존재하는 부분을 재시도하여 접근하는 방법론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각 대학별 그 특색을 달리 하게 되었고 박물관도 저마다의 특색을 갖추어 다른 각 측면으로서 특징을 보여 주었다. 미술사적 측면에서의 고고학 연구가 인류학, 역사학의 범주로까지 광범위하게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구가 1964년부터 고고학의 영역을 보다 폭 넓게 인류학과 사회학에 예속시켜, 발굴작업을 통해 얻어진 자료와 도기화 등 유물의 과학적 해석을 도입하여 밝혀진 자료 등을 함께 비교 분석하는 연구가 파리(Paris)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그 연구 목표는 주로 고대 그리스 로마사를 중심으로 고고학적, 철학적, 민족학적 시점에서의 관점을 통하여 그들의 사상과 종교, 이미지(image)에 의한 자료 분석집 등을 각 분야별 연구진들의 현장답사 및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함께 얻어진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수렴하여 고대사의 문화와 사회를 밝혀 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기화에 담겨진 영상 및 이미지(image)를 예술적 가치로서의 그림으로만 취중 하였던 것을, 같은 테마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혹은 같은 영상들을 수집 정리하여 하나의 분류집(corups)을 만들고 남겨진 고증서와 역사적 증거들을 대입시켜 동일하거나 또는 다른 현상들을 비교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도기화에 그려진 여인들의 모습에서 무덤을 방문할 때 매번 빠지지 않고 죽은 이들을 위한 음식과 향료, 제수 그리고 꽃 등을 바닥이 넓은 광주리에 담아 죽은 이를 애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13)
다시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 여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탄생과 결혼 - 인생의 중요한 지점에서는 남성들의 역할보다 여성들의 역할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14) 그동안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절대적인 보고들이 결코 여인들의 삶을 바로 조명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기록보다 분명한 이미지로써의 다양한 표현양식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던 신화의 이야기이나 그리스인들에게 동시에 암시되고 있는 또 다른 이면의 이야기도 발견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보여 지는 작은 오브제가 끊임없이 연결되는 이미지화에서 우리는 기록보다 더 강한 그들의 메세지(message)를 읽어 낼 수 있다.15) 마치 현대인들의 말이 생략된 강한 동작의 상업광고가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나아가 우리의 문화를 한 눈에 잡아 낼 수 있듯이 말이다.
고고학연구는 늘 발굴현장이 우선적으로 토대가 되었고 그리고 그 위에 역사와 문화를 연결시켜왔던 방법을, 이미지 연구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인하여, 역(逆)으로 역사나 문화 안에서 살아 숨쉬는 사건과 이야기, 즉 그리스 신화 등을 끊임없이 다른 각도의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을 재발견하여 발굴현장에서 미처 밝혀내지 못한 시각을 이끌어 내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리스연구는 “신화”와 “전설” 에서부터 시작되어 우주의 근원과 그리스 신들의 전쟁과 변형 그리고 인간을 중심으로 질투와 암투, 근친상간과 부모살해로 얼룩진 인간의 비극사 등의 보여 지는 외면 안에 존재된 내면을, 즉 부정적 요인 뒤에 긍정적인 요인이 함축되어있음을 밝혀내었다.
11) 2차 세계대전 전인, 19세기에는 인류사에 잊지 못할 고고학 대 발굴이 두 곳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mann)에 의하여 신화 속에 묻혀져 있던 미케네 문명이 고스란히 발굴되는 역사적인 이벤트가 연출되었다. 어린 시절 슐리만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오디세이』를 읽으면서 자신이 성장하면 필히 트로이의 목마를 찾아 낼 것이라는 믿음을 실재로 이루어낸 것이다. 또한 영국인, 존 에반스(John Evans)는 크레타문명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였고, 19세기의 거대한 이 두 성과에 의하여
그리스 고고학은 그리스 문명이 있기 전, 에게 해 문명권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제공됨으로써 그리스 문명의 다양한 측면의 재해석을 가능케 하였다.
12)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기화가로서 주로 아테네에서 활동을 했으며,주요 작품은 <델피>와 <Platees>의 신전 벽화로 추정된다.
13) "기원전 5세기경에 접어들면서 도기화의 장면들은 보다 더 상징적인 의미를 띄게된다. 장례를 치른 집에서부터 무덤까지 주검을 운반하는 행렬의 단순한 장면을 넘어서서 육신의 내면에 깔려있는 영혼으로 향한 여행임을 암시하고 있다“ Le Vsiècle préfère des scènes plus symbolliques. Les mentalités ont changé et des
préoccupations spirituelles annoncent une ère nouvelle. Le voyage mis en scènen‘est plus celui qui transférait simplement le corps du mort de la maison aucimetière", BERNARD, Claude et DURAND, Jean-Louis. 1984. Entrer en imagérie. in La cité des Images religion et société en grec antique. Paris: Fernand Nathan. Lausanne-Paris. p. 101.
14) CASSIMATIS Hlne. Imagérie et femme. in La femme dans le monde méditerraneén I. Antiquité. Travaux de la Maison de l'Orient n° 10. sous la direction d'Anne-Marie VERILHAC, G.H. 1985. Lyon: Maison de l'Orient Méditerraneén. p. 221.
15) “이미지의 어원은 라틴어의 «이마고» 혹은 그리스어의 «eikôn»(닮다)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오늘날 고고학 작업에서 파괴된 여러 작품들을 복귀시켜주는 좋은 증거록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L‘Image est étymologiquement àl‘origine du latin «imago»(imiter) ou du grec «eikôn »(ressembler) : celui quifait de limage une donnée archéologique témoignant de ce quétait originellement un ouvrage aujourdhui détruit ou mutilé”, Philippe BRUNEAU. 1986. Revue d‘archéologic et d‘archéologie générale II. Paris: Presse de l‘université de Paris Sorbonne, p. 261.
2.4. 이미지 분석의 예로서, 디오니소스 신16)에 대한 이미지 해석
오리엔트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는 주로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신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그들은 올림포스 신전에 사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하늘과 땅의 중간지대인 올림포스 위에 신전을 짓고 살았던 신들과 땅 위의 인간들 사이에는 무수한 사랑과 증오, 전쟁과 화합의 이야기들로 난무하였다.
그리스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이러한 신화는 서양 문화의 전반에 걸쳐 지금까지도 방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 문화를 언급하면서 신화의 세계를 배제한 일상의 삶에 대한 묘사란 제한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제우스17)는 올림포스 신전의 주신이며, 또한 동시에 지상의 인간 세계에서도 절대적 왕으로 인격화되었다. 올림포스의 주요 신들은 누구나 인간사에 관여하기를 즐겼으며,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신들을 제각기 자신들 도시국가의 수호신으로 추앙하였다.18) 그러므로 신화의 세계관과 현실적 세계관이 긴밀한 관계로 맺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스의 다문화적 특징이 신화적 다양성으로 반영되면서, 다양한 신의 모습도 나타났다. 다양성을 반영한 그리스 신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보안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19) 또한 동일한 신에 대한 이미지에 있어서도 시대 및 지역별로 동일한 해석이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올림포스 신전의 주역이었던 12신들 중, 반인반신(半人半神)인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 신의 예를 살펴보도록 하자.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로 디오니소스를 일반화할 수 있을까?
그리스 전역에서 시대별로 제작된 여러 예술작품에서 드러난 이미지는 단일하게 고정되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하고 이질적인 경향을 띠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대별로 기록된 이미지에 대한 분석은 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틀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미지는 초기 아카익 시대(archaïque)20)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는 전제군주들이 도시국가를 지배했으나, 서민들의 애환이나 고충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도 빠져 있을 만큼 사회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21)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하여 술로 빚어 마심으로써, 광란과 열정으로 의식을 잃게 되는 순간 신과의 합일을 느낀다고 믿었던 서민층에서는 억압된 자신의 삶의 탈출구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이 사실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도 그에 대한 찬미의 합창대의 춤22)이 도입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23)
포도나무 가지 위에 매달려 포도를 수확하고 있는 사튀로스(Satyros)들과 나무아래 큰 광주리에 담겨지는 포도를 바라다보며 양손에 포도주 잔을 들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림 1>24)의 디오니소스에서는 신적인 요소보다 인간사25)에 친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혹은 포도나무가 매달린 돛대 아래, 홀로 배 위에 비스듬히 누워 춤추는 돌고래를 바라다보고 있는 <그림 2>26)의 모습에서도 서민들의 생활사에 나타나 그들 곁에 친근한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아카익 시대의 디오니소스 신은 올림포스 신전에 머물지 않고 서민들 곁에 내려 와 있는 모습을 통해 결코 권력층에서 선호하던 신이 아닌 서민층에서 숭배한 것을 알 수 있다.
16) 제우스와 테바이의 창시자 카드모드의 딸 세멜레의 아들로써 ‘두 번 태어난 자’ 라는 뜻의 이름이다. 헤라의 질투에 의해 6달 된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넓적다리에 넣고 다니다 태어났다.
17) 티탄족의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빛나는 하늘의 신’으로 대기 현상이 일어나는 공간을 주관하는 신이다.
18) BERARD, Claude et DURAND, Jean-Louis. 1984. Entrer en imagérie. in La cité des images religion et société en grec antique. Paris: Fernand Nathan.Lausanne-Paris. p. 28.
19) Jean-Pierre Vernant. 1999. L'univers les Dieux les hommes. Paris: Editions du Seuil. p. 15.
20) 4단계로 구분된 그리스 예술양식(기하학, 아카익, 고전, 헬레니즘 양식) 중 ‘오래된 것’이라는 뜻의 아카익 시대 즉,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나타난 예술양식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건축에서 도리아(doria)와 이오니아(ionia)식 양식이 나타나게 되고, 조각에서는 ‘쿠로스(kouros)'와 '코레(koré)'가 등장한다.
21) 마이클 그랜트(서미석 역). 1999. 『그리스 로마신화』. 서울: 현대지성사. p. 407.
22) ‘마이나데스(Mainades)'라는 여사제와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동물인 '사튀로스(Satyros)', 나귀를 탄 ’실레노스(Silenos)' 그리고 옹성한 생식력의 ‘프리아포스(Priapos)'와 그를 길러준 요정들이 함께 등장하여 춤을 춘다.
23) “디오니소스는 다음과 같은 축복을 주었다네./
신들의 잔치에서,/ 빛나는 포도주가 엎질러질 때,/
포도주 잔은 잠을 잊고, / 담쟁이덩굴로 머리를 장식한 채 /
향연을 즐기는 이들에게 / 피리소리에 따라 같이 웃고, / 모든 근심을 사라지게 해 준다네.”
에우리피데스. 『바카이』378-85.
24) 기원전 7세기경 암포라(Amphore), 로마의 빌라 지굴리아(Villa Giulia) 2609에 소장.
25) 인간들에게 포도를 수확하여 술로 빗게 하는 법을 가르치며 함께 빗어진 술을 마시고 춤추는 신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26) 기원전 6세기 중엽의 굽 잔(coupe), 문휀(Munich)의 안티켄삼룽(Antikensammlung)에 소장
Thiasus. Dionysus and members of his thiasos on an Attic black-figure krater-psykter (525–500 BCE, Louvre Museum)
<그림 1>
<그림 2> The Dionysus Cup, a 6th-century BC kylix with Dionysus sailing with the pirates he transformed to dolphins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되면 디오니소스 신의 행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와 겹쳐 묘사가 되기도 하면서 아카익 시대와는 달리 주요한 신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노천극장에서도 그에 대한 주제가 주를 이루게 된다.27) 서민들의 곁에 있던 친근한 신의 이미지는 인간적 풍미를 벗어난 초인적 이미지가 가득한 신의 이미지로 변모되어 표현되기 시작한것이다.
<그림 3>28)에서 보듯, 디오니소스 신의 제단 앞에 그를 추종하는 여사제 마이나데스(Mainades)들이 광란의 춤과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림 4>29)의 디오니소스 얼굴이 묘사된 동전은 마치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찬미의 모습과도 같은 포즈로, 머리에는 포도나무로 왕관을 썼고 뒷머리는 포도나무 줄기로 말아 올린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30)
<그림 3>
Head of bearded Dionysos right, crowned with ivy. Obverse of a silver tetradrachm of Naxos, Sicily.
<그림 4>
27)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는 재미있고 외설스러운 ‘코모스(comos)’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이 나중에 ‘코메디(comédie)’라는 말로 발전하게 되며, 디오니소스에게 희생 양을 제물로 바치며 부르는 ‘트라고스(tragos)’라는 노래는 ‘비극’을 뜻하는 ‘트라제디(tragédie)’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디오니소스 무리 중 반인반수인 사티로스 주위에서 부르는 노래에서 발전한 것이 풍자극(drame satyrique)이다.” 이진성. 2004. 『그리스신화의 이해』. 서울: 아카넷. p. 217.
28) 비즐리(Beazley) 1151.2.에 정리. 나폴리 2419에 소장.
29) 기원 후 1세기경. 낙소스(Naxos)에서 발굴. 파리의 국립 도서관 메달 관에 소장.
30) Joel SCHMIDT. 1965. Dictionnaire de la mythologie grecque et romaine. Paris: Larousse. p. 100.
즉,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전역, 오리엔트 지역까지 나아가 로마시대에는 수천 개의 대리석으로 묘사된 그에 대한 숭배는 내세에서의 안락과 성공을 기원하는 희망이었다. 이미 곁에서 찾을 수 있던 인격적 모습의 초기 이미지는 하늘 높은 곳에 자리한 닿을 수 없는 초월적 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별 이미지들을 통해서 확인한 것처럼, 초기의 디오니소스는 인간의 근심을 술과 노래, 춤으로 근심을 잊게 하여 주었고, 후기로 와서는 강한 종교적 힘을 가진 숭배와 찬미의 대상으로 변화되었다.
두 시대에 나타난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미지는 동일한 것을 넘어서, 오히려 이질적인 면모를 포함하며 서로 대립되기도 한다. 지역별로 섬세하게 다양한 디오니소스 신의 이미지 안에는 때로는 환희와 공포, 통찰력과 광
기, 순진한 쾌활함과 어두운 잔인성과 같은 상충되는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탄생』에서 묘사된 디오니소스 신은 단순히 그리스 시대에 일반화된 신화의 내용만이 기술되어있다. 그러나 여러 시대별로 남겨진 이미지들 속에는 때론 고요히 포도나무아래서 휴식을 취하며 이미 취기가 올라 있는 신의 모습에서부터 많은 무리들이 그의 입상 앞이나 제단에 모여 풍성한 제의를 올리고 있는 이미지까지 매우 다양한 표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야기 속에만 존재했던 신화로부터 벗어나 실재 그리스인들의 사회/문화의 내면적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증거가 된다. 그렇듯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신들의 성향을 통해 인간사를 반추하고 있다.
Ⅲ. 결론
기록된 문자에 의존한 평면의 일률적인 해석으로 알려져 있던 신화의 이야기를 이미지 분석을 통해 살펴보면, 시대별 공간별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더불어 사회의 의식구조가 함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층적인 변화를 민감하게 인식하여 고고학의 주요 방법론으로 들여오게 된 것이 신고고학에서의 이미지 분석이다.
이러한 조형적 이미지가 반영된 건축, 미술품 등의 분석을 통해 신 고고학적 접근 방법은 고대 그리스 인들의 문화를 연구하고 나아가 대상물에 투사된 당시 거주인들의 의식구조의 분석과 사회 문화/ 예술적 측면의 미감에 대한 연구 분석 또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하나의 도기나 장신구에 제작된 이미지를 통하여 문자 기록물이 담고 있던 단편적인 이야기가 미처 담아내지 못했던 역사/문화 속에 내포되어 있는 다각적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디오니소스 신의 이미지 분석 작업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미지 분석 작업은 역사, 문화 속에서 빠져 있는 중요한 사건이나 관습, 종교, 예술 및 사고 등 미처 고증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도 새롭게 열어갈 수 있는 실마리와 증거를 제시하여 준다. 그러므로 고대 유물의 어느 작은 오브제 하나일지라도 절대적인 고증서의 실마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는 기원전 4세기 전후 아티카(Attica)31) 지역을 중심으로 건축물에 장식된 부조 및 조각 그리고 도기화가 성행하였고, 더불어 그들의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를 그려 놓음으로써 오늘날, 이미 지워져 버렸거나 찾을 수 없었던 건축물에서부터 예술의 전역에 걸쳐 재건축 및 재 복구를 가능하게 도왔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시민 문화의식이 높았던 그리스 문명은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수준과 기술로 인하여 그들의 문화/역사를 오늘날 가늠케 하여주었다.32)
이렇듯, 왕족과 종교 권력가들에 의한 정치가 아닌 시민들에 의한 민주정치는 평범한 일반인들과 여성 및 어린이들에 대한 생활사를 기록은 극히 단편적이지만 남겨진 이미지들을 통하여 역사 뒷면에 가려진 일반사가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본 연구의 목적이 이러한 연구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입증하거나 확인하려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분석 사례 중심의 논의를 밝히려는 의도는 디오니소스의 경우를 통해 간략하게 그 방법론을 소개하는 정도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앞으로 후속연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신화를 중심 연구 시점으로 삼아, 올림포스의 주요 신들과 영웅들을 시각적 이미지 분석에 의한 구조주의적 비교/ 분석으로 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31) 그리스 반도의 주.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4세기까지 그리스문화의 중심지.
32)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남녀노소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흔적 혹은 예술품에 대한 기록 및 예술가들의 작품서명 등이 고스란히 남겨진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명의 단계에서는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Ⅳ. 참고문헌 - 제외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농사를 지은 한국 (0) | 2020.02.01 |
---|---|
인류문명 발원 ‘한민족 농업언어’ 사인언스에 게재 - 이을형교수 (0) | 2020.02.01 |
헬리코박터균의 세계분포도로 살펴 본 한민족의 형성과 인류이동 (0) | 2020.01.15 |
Y염색체 분포도로 살펴 본 한민족의 형성과 인류이동 (0) | 2020.01.15 |
일만 년의 세계사를 지배해온 한민족의 정신문명사 (0) | 2020.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