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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울산 월봉사 오심스님

rainbow3 2020. 3. 10. 04:13


운명


중국 당나라 때 배휴(裵休)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현 배휴와 배탁은 외삼촌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일행선사(一行禪師)라는 고승이 그들 형제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외삼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저 아이들을 내보내시오. 저 아이들의 관상을 보아하니 앞은 거지상이요, 뒤는 거적대기상입니다.

워낙 복이 없어 거지가 되지 않을 수 없고, 그냥 놓아두면 저 아이들로 말미암아 이웃이 가난해집니다.”


 방문 밖에서 외삼촌과 일행 선사의 대화를 엿들은 배도는 선사가 돌아간 뒤 외삼촌께 말했습니다.


 “아까 일행 선사님과 나눈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형제가 빌어먹을 팔자라면 일찍 빌어먹을 일이지,

외삼촌 집안까지 망하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떠나겠습니다.”


자꾸만 만류하는 외삼촌을 뿌리치고 거지가 되어 하루하루를 구걸하며 살던 어느 날 형제는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의 혼령도 편안하지가 못할 것이다. 산으로 들어가서 숯이나

구워 팔면서 공부도 하고 무술도 익히자.”


그들은 산속에 들어가 숯을 구웠고, 틈틈이 글 읽기를 하고 검술도 익혔습니다.

그리고 넉넉하게 구워 남은 숯들을 집집마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기를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이렇게 꾸준히 숯을 보시하자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던 마을 사람들도 감사하게 생각하였고, ‘양식에 보태라’며 쌀을 대문 밖에 내어놓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형제는 먹을 만큼 이상의 양식은 절대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두 형제는 우연히 일행 선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선사는 그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너 정승이 되겠구나.”


 “스님, 언제는 저희 형제더러 빌어먹겠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어찌 정승이 되겠다고 하십니까?”


 “전날에는 너의 얼굴에 거지 팔자가 가득 붙었더니, 오늘은 정승의 심상이 보이는구나.

 그동안 무슨 일을 하였느냐?”


 배도와 배탁이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자 일행 선사는 무릎을 치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의 마음가짐이 거지 팔자를 정승 팔자로 바꾸어 놓았구나.”


그 뒤 참으로 배도는 정승이 되었고, 동생 배탁은 대장군의 벼슬을 마다하고 뱃사공이 되어 오가는 사람을

건네주며 고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점이나 사주팔자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좋은 소리를 들으면 그나마 희망이라도 있을진대 나쁜 소리를 들으면 의례히 무시하면서도 걱정으로

전전긍긍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말 한마디에 맡기고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자신이 만들어 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고 또한 실천하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울산 월봉사 오심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