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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칼럼]낭만적 사랑을 꿈꾸다

rainbow3 2020. 3. 10. 04:30


[도종환 칼럼]낭만적 사랑을 꿈꾸다

 

<시인>

 

낭만적인 이야기, 낭만적인 소설이나 드라마가 열광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세상에서 인정되지 않는 것을 상상 속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좌절된 자기정체성을 실제 생활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가상현실 속에서나마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주의로 무장한 비평가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꿈을 깨주고, 반사실적 사고의 허약함을 들추어내 주며,

병리적인 현상임을 가르쳐준다.

 

베이컨의 말대로 “사랑에 빠지면서 동시에 현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일러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인 백석은 참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백석이 박경련이란 여자를 만난 것은 친구인 허준과 신현중의 여동생이 결혼식을 올린 뒤

축하 회식이 있던 자리였다.

신현중 누나의 제자인 박경련은 이화여고보 학생이었다.

백석은 이 여고생에게 빠져서 세 번이나 그녀의 고향인 통영을 찾아가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온다.

그리고 다음해 말에 청혼했으나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듣고 돌아온다.

 

그런데 박경련은 넉 달 뒤 친구인 신현중과 결혼한다.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자가 친구의 부인이 된 것이다.

 

그런 마음의 상처가 ‘내가 생각하는 것은’과 같은 시에 나타난다.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이던 백석은 그 뒤 기생집에서 김자야를 만난다.

김자야의 회고에 의하면 백석은 자신을 보자마자 손을 꼭 잡고 마누라라고 불렀고

자야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집안의 강권에 의해 혼례를 치렀으나 바로 김자야에게로 도망쳐오기도 한다.

김자야가 백석을 위해 함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자 백석은 영생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 김자야와 동거를 시작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그렇다고 자야와 결혼을 할 수도 없었던 백석은 신문사에도 사표를 내고 평안도, 함경도, 만주를 떠돈다.

해방 뒤 백석은 평양음악학교 여교사와 결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하고

3년 뒤 이윤희와 재혼했다.



-백석의 대책없는 러브스토리-

 



그는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전형적인 낭만주의자이다.

가난한 나와 아름다운 나타샤라는 대비가 그렇고,

자신을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이 그렇고,

그 안에 순결한 자아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렇다.

 

이 시 자체가 현실이 아닌 몽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세상한테 질 수밖에 없는 자신과 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의식,

세상이 더러워 내가 버렸다는 주관적 해석 모두가 두루 낭만주의자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비현실성’ 불구 많은이들 동경-



낭만적 사랑을 하는 이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다.

첫눈이라는 말이 타자의 특성에 대한 직관적 포착이기도 하지만

찰나적 매혹에 빠진 것에 불과하기도 하다.

 

백석은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싶다.

백석은 ‘낭만적 사랑이’라기보다 앤서니 기든스가 이야기 하는 아무르 파씨옹(amour passion) 즉,

‘열정적 사랑’의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열정적 사랑의 상태는 타자와의 감정적인 연루가 너무도 강렬히 스며들어 자기의 통상적인 책무를

무시하게 만든다.

 

인간관계는 파괴적이며, 현실을 도외시하는 등 줄줄이 이어지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시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묻는 여론조사를 해 보면 백석이 첫 순위로

꼽힐 때가 많다.

 

박목월, 박용래, 신경림, 안도현 등 많은 시인들의 시 속에 백석의 시가 스며들어 있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

 

왜 이 대책 없는 시인을 좋아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기 때문은 아닐까.

 

낭만적인 사랑이 분별 있는 사랑은 아니겠지만

분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게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