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문학

탈무드_돈의 지혜 1

rainbow3 2020. 3. 12. 05:34


▣ Short Summary
 
우리는 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숫자의 무게에 짓눌려 제대로 생각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은 아닐까?
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돈에 대한 철학이 빈곤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부의 편재, 가진 자의 천박하기 그지없는 소비 행태, 물질 만능주의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 무질서 등은 해묵은 논쟁거리임에도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해답을 얻기 위해선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 책은 돈과 관련된 문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예사롭지 않은 접근을 시도한다.
그러나 어렵지 않으며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강요도 없다.
적절한 일화를 통해 우리에게 충분한 울림을 주면서 서서히 돈에 대한 지혜의 눈을 뜨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가 누구이며,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깨닫게 한다.
거친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에 봉사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 중의 하나는 소유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경제활동에 대하여 좀더 넓고 윤리적으로 보는 시야를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한다.
 
▣ 차 례
 
제1장  마음과 주머니 사이의 진실한 거리 보기
 
제2장  부를 가로막는 장애물
 
제3장  보이지 않는 돈의 사이클 이해하기
 
제4장  소유하지 않는 부를 부르는 방법
 
제5장  적게 가지고 풍요롭게 사는 법
 
제6장  세상 살아가기
 
제7장  돈을 부르는 수호천사
 
제8장  부의 또 다른 얼굴 없음
 
제9장  죽을 때 당신은 가져갈 수 있습니까?
 
제10장 내세에서의 돈


제1장  마음과 주머니 사이의 진실한 거리 보기

“가장 긴 길은 우리 가슴에서 주머니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유대 격언이 있다.
우리가 삶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삶이 주는 의미를 보지 못한다면 가슴에서 주머니까지 도달할 수 없다.
돈이란 흔히 더러운 대상으로 간주된다.
또한 돈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사람들은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섹스에 관하여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는 데는 별로 어려워하지 않으면서
예금을 얼마나 하며 월급이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
심지어 아이들도 부모의 수입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돈은 ‘악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돈을 존중한다.
다만 그 돈은 생존의 가능성을 다양화시키고
영적인 공부와 학습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게 하는 부패하지 않은 진짜 돈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돈이 신성한 주제가 될 수 있는가?
어떤 돈이 내세 혹은 천국에서 화폐로 사용될 수 있는가?

잘 차려진 식탁 앞에서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

한 랍비가 연옥과 천국을 방문하도록 허락되었다.
처음에 그는 연옥으로 인도되어 괴로움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들은 고급스러운 은 식기와 사기 그릇에
최고의 음식물이 담겨진 호화로운 연회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좀더 가까이 다가갔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팔꿈치가 바깥쪽으로 굽어 있어
음식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갈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랍비는 다시 천국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연옥에서 보았던 똑같은 음식으로 차려진 연회석상과 밖으로 팔이 굳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천국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옆 사람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지옥은 시장이 없는 세계이며, 굽어 있는 팔,
그 단 하나의 어려움도 연회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회를 파괴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천국은 먹을 수 있는 즐거움 이외에도 음식물을 옆 사람의 입에 넣어줌으로써
지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낭패감을 덜어주는 곳이다.
이렇게 서로를 먹여주는 통찰력을 알아내는 것과 그렇지 못함 사이의 간격은 매우 크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땅을 갈고 돌보는(창세기)’ 임무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삶의 질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세계와 정직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계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부를 확장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며,
결핍을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최대의 부를 창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부의 획득은 인간의 요구이며 결핍에 대항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제2장  부를 가로막는 장애물
 
♣ 자기 만족을 위한 시간낭비를 하지 마라
 
랍비들은 잠언의
“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개미의 방법을 연구하고 배우라!”라는 구절을 해석할 때 개미를 ‘낭비된 일’의 상징으로 설명한다.
즉 개미가 일 년을 살기 위해 필요한 낱알은 두 알이면 족한데
개미들은 불필요한 재산을 모으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한다는 것이다.
 
유대 전통에는 시간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의 모범답안이 있다.
그것은 공부다.
일단 기본적인 생계와 생리적 욕구, 일에 대한 요구가 충족되면 모든 자유시간은 공부에 헌신 되어야 한다.
유대교에서 공부가 의미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토라에 대한 공부이며,
통찰력으로 실재를 인지하고, 타인에 대하여 동정을 느끼고,
우리 자신의 속성을 통하여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 속에서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의 공부이다.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일할 때
우리는 ‘비툴 제만’(시간의 낭비, 혹은 공부시간의 낭비)을 산출한다.
 
진짜 부자의 조건
 
랍비 메이르는 진실로 부자인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결핍을 야기하지 않으며,
최고의 삶의 질을 얻는 자이며, 책임을 지고 살아가고 시간낭비를 피하고
진실로 필요한 것 이외에는 자연으로부터 생계를 끌어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재산에서 근원하는 ‘내면의 평화’라고 표현했다.
다른 말로 이것은 참으로 부자 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처음에 왜 부자가 되려고 했는지를 잊지 않는
순수함을 요구하는 예술이며, 결국 부의 축적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타인의 삶의 질을 증가시키는 것이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삶에서 우리는 최고가 되기를 요구하고 요구 받는다.
이 ‘최고’는 많은 변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최고’라는 요구는 여전하다.
삶에는 환경 속에서 사람과 사물에 대한 최고의 부와 존경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균형은 내면의 평화를 가져오고 시장 전체의 부를 증가시키고 주변세계를 향상시킨다.


제3장  보이지 않는 돈의 사이클 이해하기
 
“어리석은 자는 이를 알지 못하노라.
악한 자들은 풀처럼 돋아나고,
못된 자들이 꽃처럼 피어나지만
그들은 영원히 망하게 되리라.”  - 시편
 
유대 전통에 존재하는 윤회론적 접근을 사용하는 랍비는
모든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즉 회귀가 있다고 말한다.
비록 그 순환의 범위가 너무 커서 육안의 경험으로는 원이 아닌
하나의 긴 선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이 거대한 회귀의 사이클은 불교의 카르마 개념과 비슷하다.
이것은 악한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가까운 미래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단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에 대한 좀더 교묘한 해석이다.
따라서 참된 부는 복잡한 과정이며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더 늘어난 회귀 사이클과 관련되고 존재하는 생계와 관련된다.
 
원시시대 이후 줄곧 우리를 당황하게 했던
 ‘힘든 삶과 함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과
번영으로 축복 받는 사악한 사람이 있다.’는 역설,
즉 삶의 모순을 푸는 열쇠는 바로 회귀 사이클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참하고 몰상식해 보이는 실재(현실)는
거대한 질서의 한 단계를 일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실이라는 순간적인 스냅사진을 근거로 삶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역동적인 현실(실재) 한가운데서 우리는
진실된 삶의 상황을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
이 접근법은 확실히 더 긴 영역을 가지는 회귀 사이클에 대한
엄청난 신뢰와 이해를 요구한다.
 
“왜 내가 그것을 가지지 못하지?” 혹은
 “왜 내가 이것을 가지지?”와 같은 질문은 생계의 다양한 세계에 걸쳐서
우리 잠재성의 배분을 고려하는 답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가지는 것’은 긍정적 가치만이 아니며
생계의 다른 차원에서는 심각한 손실을 반영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효과적으로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유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우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계의 여러 차원은 자신을 이 물질계에만 표현하지는 않는다.


제4장  체다카 요법 - 돈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기
 
자선(Charity)이라는 영어 단어는 체다카(Tzedakah)란
유대 개념을 번역하기 위한 단어로 쓰인다.
그러나 체다카는 ‘사랑’을 의미하는 라틴어 카리타스(Caritas)에서 기원되는
 ‘자선’이란 문자적 의미와 무관하다.
체다카의 유대적 의미는 시장과 관련되며 문자 그대로
 ‘정의(Justice)' 혹은 ‘정의롭게 하는 것(the act of justicing)’으로 번역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상사회 건립을 위한 최고의 덕목으로 사랑을 꼽는다.
그러나 유대교는 정의, 즉 체다카를 강조한다.
유대교에 따르면 개인, 인종, 환경 등 모든 차원에서 될 수 있는 한 남을 돕는다면,
즉 체다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이상적 세계는 현실화될 거라고 확신한다.
 
“돌은 딱딱하나 쇠가 그 돌을 자르고, 쇠가 강하다 하나 불이 그 강함을 녹인다.
불은 강력하나 물이 불을 끄고, 물은 무겁기는 하나 구름이 물을 나른다.
구름은 강하나 바람이 이를 흩트리고, 바람은 강하나 우리 육체는 이를 견디어낸다.
육체는 강하나 두려움이 이를 파괴하고,
두려움은 강하나 포도주는 두려움을 피하게 하고, 포도주는 강하나 잠이 정복한다.
죽음은 이러한 것 중 가장 강하나 체다카는 죽음에서 구한다.“
 
이 예화를 통해 랍비 예후다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죽음’의 개념 너머에 삶, 의미, 교환의 개념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체다카가 교환할 수 있는 구체적 추상개념이라면 죽음은 비교환의 추상개념이다.
이러한 속성을 이해하고 체다카의 책임완수를 위한
시간을 배정하는 사람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격정을 몰아내고 치료를 받는다.
체다카의 가치를 진실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부’로 인식하게 된다.
체다카는 축적될 수 있으며 흥미로운 어떤 상거래에 헌신하는
그러한 열정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덜 가짐으로써 드러나는 믿을 수 없는 부의 현시인 것이다.


제5장  적게 가지고 풍요롭게 사는 법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자와 같고,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또한 너의 것은 내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으며,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또한 너의 것도 너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올바르며, ‘내 것은 내 것이고 또한 너의 것도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악한 사람이다.
 
만약 사람들이 무조건 생존해야 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경우
올바른 자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만약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라는 명제가 사실이라면
올바른 자는 굶어 죽을 것이다.
미슈나(유대 구전법전)는 삶의 일부로서 즉각적으로 결과가 나타나는
사이클을 무시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신의 손님이라는 이해, 즉 ‘환대’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증진시키려는 것이다.
 
다소 역설적이고 불공평하게 보일지라도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작은 회귀 사이클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난에 집착함 없이 여러 세계의 풍부함을 기꺼이 함께 하려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는 어떤 종류의 보상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또한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라고 함에 의해서
‘가짐’의 한계와 무게를 자신에게서 제거한다. 적게 가질 때 진실로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부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적게 가짐으로써 늘어나는 부에 관하여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
부를 얻으려는 강박관념을 피하는 것은 일종의 진실한 부라는 것이다.
이 강박관념은 부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더 어렵게 만들뿐만 아니라
또한 탈무드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물을 구하는 자는 자신의 죽음을 재촉한다.’에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우리의 야망 수준을 주시해야 한다.
우리는 체다카와 공부를 통해서 ‘적음’을 ‘많음’으로 변형시키려고 할 때
그 자체 안에 부의 형태와 우리에게 열려 있는 선택권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소유권을 즐겨야 큰 이익이 온다
 
우주시장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권리와 잠정적 소유의 계속적 흐름 속에 있다.
그런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음식의 적절한 교환(섭취)을 무시하고 많이 먹는 사람은 비만이 될 것이며, 필요 이상의 음식을 자신의 신체에 보유하는 것이며 이로써 시장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다.
만약 재산의 순환법칙을 지키고 삶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를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를 적절하게 쓰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하고 대신 선물을 줄 시기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랍비 나만은 한때 자신의 집에 가난한 여행자를 투숙시켰다. 다음날 아침 그 손님이 자신의 코트를 가지고 떠났음을 알았다. 랍비 나만이 유대교당에 도착했을 때 한 젊은 사람이 다가와서 말하길, “랍비님, 조금 전에 랍비님의 옷과 똑같은 코트를 입은 사람을 보았지요. 처음에는 그 코트가 랍비님 코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지금 코트를 입지 않고 계시는 것을 보니 이젠 확신이 듭니다.” 하였다. 그러자 랍비가 “그 코트가 그 사람에 잘 맞던가?” 물었다. 그 젊은이는 “그 사람에게 아주 잘 맞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그 사람이 계속 입게 두게. 그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고 올 겨울은 너무나 춥다네.”라고 랍비는 말하였다.
 
올바른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나 자신의 소유물이 더 이상 자신의 소유물이 아님을 알 때 이를 포기함으로써 가져올 더 큰 이익의 시기를 안다.
우리의 소유물이 가장 가치 있을 때, 우리를 위해 가장 큰 즐거움과 보상을 발생시킬 수 있을 때, 그 소유물을 떠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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