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세상 살아가기
♣ 성공과 실패는 수레바퀴의 상승과 하강일 뿐
“떨어지는 것(실패)은 올라가는 것(성공)의 필요한 부분이다.”라는 랍비 나만의 말은 생계의 필수적인 면, 즉 성공과 실패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넓은 구조 안에서 시장을 생각할 때 시장은 한 개인이나 그룹의 부분적인 생계뿐만 아니라 전체를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여기서 ‘전체’, 즉 상호연결성은 마치 수레바퀴를 닮았다. 이 수레바퀴는 반대편이 떨어질 때 다른 편은 올라간다. 가장 높은 점은 하락의 시작이며, 가장 낮은 점은 우리가 다시 상승함을 의미한다.
어떤 분야에서 풍성함과 성공을 경험한 사람 누구도 하강을 피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가 더 높이 올라갈수록 하강에 대비하여 더 많은 것을 영혼을 풍부하게 하는데 적립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강의 기간동안 우리는 다시 반복되는 상승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수레바퀴는 또 다른 하강이 계속하여 다가오기 때문에 사이클이 나선형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우리 생계의 많은 부분은 이러한 상승과 하강의 기억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확신은 생계의 순환성과 모든 세계의 상호작용성을 이해할 때 온다. 우리가 때때로 느끼는 절망은 상승과 하락이 선명하게 선적인 것으로 다가올 때이다. 수레바퀴의 회전을 역회전하여 꼭대기에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것은 단지 하강을 연장할 뿐이다. 필사적으로 우물의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작은 상승의 승리 속에 끝없는 떨어짐을 야기한다.
♣ 허술하게 계약하지 마라
어느 누구도 좋은 계약서를 작성하는 법을 이해하지 않고는 부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경 써야 한다. 우리는 사업관계에 있어서 순진하고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서면으로 자세히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증인을 세우는 것을 부끄럽거나 실례되는 일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눈 먼 자 앞에 장애물을 놓는 일’일 것이다. 부주의한 계약 때문에 경우에 따라 결혼이 파괴되고 가족은 싸우고 사회가 해체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랍비들에게 계약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약의 가장 큰 적은 거래의 규칙을 설정할 때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성숙치 못한 태도이다. 우리는 흔히 거래관계를 상세히 처리하기를 원하는 것은 신뢰나 연대의 부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올바른 사람은 연대의 한계를 알고 계약서를 조심스럽게 작성할 것이다. 우리는 창조자를 모방해야 한다. 만약 신의 시간이 계약에 헌신된다면 그때 우리의 시간 또한 그러해야 한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위한 명백한 ‘계약서’를 만들고 부주의를 피하라. 그렇지 않다면 인생에서 모든 협력관계는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
♣ 모든 창조물이 서로에게서 빌리는 것을 관찰하라
우리가 사는 우주는 대부의 세계이다. 삶 그 자체는 부모로부터 빌려온 ‘자본’으로 구성되며, 부모는 그 자본을 ‘앞 세대’ 자금에서 빌린 것이다. 대부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우리의 생존을 가능케 만드는 관대함의 활동이다. 유대 전통에서 대부는 일종의 ‘체다카’이다. 우리는 대부를 통해서 가난과 맞서 싸울 수 있으며 같은 방식으로 잉여 생산품을 세계 빈곤을 위해 사용하고 그것에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 성경이 “만약 그대가 나의 사람들 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다면, 채권자처럼 그들에게 행동하지 말라. 이자를 부과하지 말라.”라고 한 이유다.
위에서 언급된 출애굽기 구절은 많은 의문을 제기했으며 대부시장에 여러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채권자처럼 그들에게 행동하지 말라.”를 만약 채무자가 상환할 수 없으면 어떤 대부도 반환예정일이 지난 후에는 징수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 랍비들은 체다카(대부 행위)를 좋은 행위 혹은 친절한 행위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의와 친절은 명백히 구별되는 서로 다른 영역이며, 세계와 시장의 균형은 이 두 개의 구별성에 의존한다. 정의와 친절은 함께 작용하나 서로 독립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정의와 자비(친절) 사이에 조화가 있는 사회에 사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
제7장 돈을 부르는 수호천사
유대 전통에, “작은 운이 모든 차이점을 생기게 한다.”는 말과 “작은 운은 1파운드의 금보다 가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운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이 운을 적당히 분배해 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인가, 혹은 그 행운의 분배는 완전히 무작위적인 것인가?
‘운’으로 번역되는 ‘마젤(Mazel)’은 원래 히브리어로 ‘운명’을 뜻한다. 그리고 ‘운명’은 탈무드에 따르면 “신에 대한 인간들의 존경심을 제외하고 모든 것은 신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결정과 자유의지는 신에 대한 존경심의 유무에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은 삶과 물질세계가 만날 때 그 결과로서 발생하는 일종의 환영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유대 전통에서 ‘운’으로 해석되는 ‘마젤’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마젤은 아주 작은 기적이며, 우리가 몰입하는 더 큰 시장의 불꽃이며, 우리는 가끔 이들을 불러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운을 필요로 할 때 어떻게 운을 발견할 수 있을까?
랍비 위트자크는 3일 연속으로 프라하의 다리 밑에 숨겨진 보물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도 선명해서 그는 보물을 찾기 위해 프라하로 떠난다. 그가 다리에 도착했을 때 밤낮으로 왕의 군대가 그 다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근위대의 지휘관이 와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을 때까지 거기에서 기다렸다. 위트자크는 그 지휘관에게 자신의 꿈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런 꿈을 믿으라는 겁니까?” 그 지휘관은 웃었다. “만약 내가 그 꿈을 믿는다면 나는 랍비 한 분을 찾기 위하여 멀리 있는 크라코우 마을로 떠나겠지요. 그 랍비 이름이 위트자크라고 여겨집니다. 나는 그의 침대 밑에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오.” 이 말을 듣고 위트자크는 지휘관에게 감사를 표하고 집에 돌아가 자신의 침대 밑에서 보물을 발견하였다.
이 이야기는 모든 보물의 원천은 우리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보물은 우리 자신의 집에 그것도 침대 아래 - 우리 본질 안에 깊숙이 - 있다. 현명한 사람은 하나의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화폐를 변환시키고 창문을 열기 위해 ‘침대 밑’의 보물을 사용한다. 마치 기적, 즉 작은 운이 나타나는 것처럼!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침대 밑에 숨겨진 보물로부터이다.
제8장 부의 또 다른 얼굴
유대 구전율법에서 ‘다른 면(other side)'이란 말은 악한 것을 언급할 때 주로 쓰인다. 히브리어로 적(敵)을 의미하는 ‘사탄’은 ‘부작용(side effect)’을 의미하기도 한다. 삶이 복잡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잃어야 하며 ‘다른 면’은 더욱 강렬해진다. 마치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빛에 드러나는 물질의 결과로 생기는 그늘은 더욱 뚜렷해지는 것처럼. 이것은 육체에 거주하는 존재가 가지는 어려움 중의 하나이며, 수천 년 동안 종교가 우리 인간을 물질세계의 죄인이라고 강조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부라는 것이 우리에게 고민과 물질세계의 모순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와 가난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도 없다. 궁핍은 우리를 시장과 시장의 멋진 기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파괴적인 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한 물질의 육체적 조건인 가난은 생계의 단면일 뿐이다. 우리가 보는 색상처럼 ‘잘 살고’, ‘못 살고’는 단지 육체라는 도구를 사용해 이해하는 지각일 뿐이다.
체치브의 랍비는 신이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도록 명령한 사제의 축복 ‘야훼께서 너희를 축복하고 지켜주시기를!“(민수기)에 대하여 주석을 달았다.
랍비들은 왜 ‘우리를 축복하고’, ‘지켜주시는가?’라고 의문을 나타내었다. 우리가 축복 받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지 않는가? 그런데 왜 ‘지켜주시기를!’이라고 말하였는가? 이것은 부는 종종 악한 것을 가져오기 때문이며 사제들이 ‘지켜줌’의 말과 함께 축복하는 이유이다. 사제들은 우리가 부로 축복받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동시에 부로부터 보호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물질계에서 이 ‘다른 면’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이것은 왜 영성이 중요한가의 이유이다. 왜냐하면 영에 관련되는 것은 ‘다른 면’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혼에 속하는 것, 영적인 성장에 속하는 것은 어떤 그늘도 드리우지 않으며 손실의 두려움이 없는 ‘가짐’의 형태이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도 결코 잃지 않을 우리의 신성한 면이다. 물질계에서 우리는 체다카(정의)와 거래의 책임 있는 부담을 통해서 세계의 안정과 풍부함을 위해 일해야 하며, 이렇게 일한다면 우리는 참된 부를 증가시킬 수 있다.
제9장 죽을 때 당신은 가져갈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현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금과 함께 우리는 ‘가짐’의 많은 가능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금은 투자가 아니라 투자에 대한 회수이며 일시적인 생계의 수단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미래의 생계를 위해 일하고 투자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투자는 무엇인가?
탈무드의 다음 이야기는 ‘투자’하는 방법에 대한 비밀의 계명을 발견하게 할 것이다.
기근 시기에 왕 모노바즈는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국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의 형제와 친척들은 “왕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돈뿐만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까지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라며 항의하였다.
그러자 왕은, “나의 조상은 여기(땅)에 재산을 모았소.
그러나 나는 천국에다 재산을 축적할 것이오. 왜냐하면
‘진리는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리라.’(시편)라고
써 있기 때문이오.”라고 말하였다.
“나의 조상은 인간의 손이 훔칠 수 있는 장소에 보물을 저장하였소.
그러나 나는 어떤 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보물을 저장하오.
성경에는 ‘정의와 공정은 당신의 왕관의 토대입니다.’(시편)라고 써 있기 때문이오.”
“나의 조상은 보물을 보관하였으나 지금 이자도 받지 못하오.
나는 이자를 받기 위하여 그들을 보관하오.
성경에는 ‘복되어라 올바른 사람,
자기의 일한 보람을 먹고 사는구나!’(이사야)라고 써 있기 때문이오
나의 조상은 그들의 돈을 금고에 저장하였으나
나는 구원되어진 혼에다 돈을 보관하오.
‘올바른 자의 과실(현금)은 생명나무이며
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사람은 현명하도다.’(시편)라고 써 있기 때문이오.
나의 조상은 자신의 후손을 위해 보물을 보관하였으나
나는 내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보관하오.
‘그대를 위하여 정의는 신 앞에서 명예롭게 되어야 한다.’(신명기)라고 써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거래의 진실한 창조물이기 위하여 모든 차원에서
투자하고 저축하는 방법을 시장에서 배워야 한다.
만약 우리가 물질계에서 단지 물질적인 것만 축적하는데 시간을 소비한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그들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단계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유일한 것은
그 단계는 어떤 물질적인 것의 통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투자를 위해 우리는 다른 것, 즉 이 우주에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인 이웃을 찾아냄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투자할 때 우리는 이 세계로부터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잠언에 “얼굴을 비치는 물과 같이 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비춘다.”라는 말이 있다.
랍비들은 “왜 물이고 거울이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는
“왜냐하면 물 위에 자신을 비춰보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물에 가까이 가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답을 구했다.
제10장 내세에서의 돈
어떤 한 농부의 소환을 명령한 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 농부는 그 소환에 매우 놀랐다.
그는 곧 짐을 꾸려 왕궁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친구들은 그를 마을 입구까지 동행하였고 가족들은 왕궁 성문까지 동행하였다.
그 후로부터는 단지 농부의 공덕과 스스로를 돌볼 능력만이 그와 같이 하였다.
랍비들은 이것을 삶에 대한 우화로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는 그 왕궁으로 불려갈 것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친구로 불리는 우리의 소유재산은 마을의 외곽까지만 우리를 따른다.
다른 말로 우리는 재산을 마지막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만 즐길 수 있다.
가족은 우리가 묻힐 때까지만 즉 왕궁의 입구까지 동행한다.
그러나 더 이상 함께 가지 않는다.
그 왕궁 안으로 그리고 연회장 안으로는 단지 우리의 선한 행동만이 동행할 수 있다.
왕을 만날 때 삶에서 우리가 만든 선택,
즉 신용으로 변환될 수 있는 좋은 거래만을 가져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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