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문학

지상에서의 첫번째 사랑 - 이브의 일기 편

rainbow3 2020. 3. 12. 07:14


지상에서의 첫번째 사랑 - 이브의 일기 편



지상에서의 첫 번째 사랑

- 아담과 이브의 일기 -

마크트웨인 지음 / 이 상 옮김 / 안미영 그림

 


 




이브의 일기



토요일

이제 내 나이는 거의 만 하루가 된다. 나는 어제 이곳에 왔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든다.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어제 이전에 하루가 있었다면 나는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또 다른 하루가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좋다.지금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그리고 어제 이전의 날 같은 것이 생겨난다면 잘 기록해 두어야겠다.

처음을 정확히 정리해 놓음으로써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런 상세한 기록이

언제가는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는 직감이 든다. 나는 실험대에 올라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다.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실험대상이 되어 있다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실험대상이여, 단지 실험 그 자체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끔 되었다.

만일 내가 실험대상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실험의 전체인가?

아니다.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머지 실험대상(아담)도 그 일부일 것이다.

내가 실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는 해도, 다른 실험대상도 한몫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지위는 안전한가?

아니면 열심히 주의를 기울이고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끊임없는 경계심이야말로 지배권을 위한 대가가 되리라는 직감이 든다

(이 말은 나처럼 젊은 사람으로서는 썩 훌륭한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모든 것이 어제보다 한층 보기 좋다.

어제는 서둘러 마무리가 된 탓인지 산의 모양도 조잡하고 초원 곳곳에 온갖 잡동사니와 허접쓰레기들이

 어질러져 있어서 아주 고약한 풍경이었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역시 급히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이 장엄한 신세계는 정말로 비길 데 없이 빼어나고 훌륭한 작품이다.

시간이 짧았음에도 거의 놀랄만큼 완벽에 가깝다.

어느 곳에는 별이 너무 많이 몰려 있고 또 어떤 곳에는 부족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쯤은 곧 바로잡힐

것이다.

 

 


 

 

 


그런데 간밤에 달이 없어졌다.

미끄러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참으로 큰 손실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이러저러한 장신구와 장식품 가운데 아름다움과 완성도에서 달에 견줄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애초에 좀더 단단하게 붙들어 매었어야 했다.

그것을 다시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달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누구라도 그것을 줍는다면 감추어버릴 것이다. 나는 그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라도 그러고 싶으니까 말이다. 다른점에서는 나도 분명히 정직할 수 있다고 확신하다.

그렇지만 이미 나는 내 천성의 핵심과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아름다움을 향한 끝없는 정열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내게 달을 맡기는 것은 안전하지가 않다.

만일 그 달이 다른 사람의 것인데도 내가 달을 갖고 있는 것을 그 사람이 모르는 경우에는 큰일날

것이다. 내가 달을 낮 동안에 찾아낸다면 그것을 체념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쳐다보고 있지나 않은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달을 발견한다면 틀림없이 주운 사실을 숨길 무슨 변명거리 같은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달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달은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낭만적이다.

달이 다섯 개나 여섯 개쯤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난 잠도 자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싫증내는 일도 없이 늪가의 둑에 누워 달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별들도 역시 멋지다.

몇 개 따서 머리에 꽂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별들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게 된다면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도榴瑁?멀리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석류나무 류(유)   瑁옥홀 모, 대모 매 .㉠옥홀(玉笏: 제후가 조회할 때 천자가 지니던 옥으로 만든 홀)

대모(玳: 바다거북과의 하나) (매)



어젯밤에 별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긴 장대를 이용해 몇 개 따려고 했다.

그렇지만 장대는 별이 있는 곳까지 미치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팔매질을 해보았다.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팔매질을 했지만,별을 하나도 따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왼손잡이여서 팔매질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노리고 있던 별이 아닌 다른 별을 겨냥했을 때 조차도 원래의 노리던 별에 맞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몇 번인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가기는 했지만.

내가 던진 시커먼 진흙덩이는 금빛 창공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사오십 번이나 날아올랐다.

그렇지만 아주 약간씩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만일 조금만 더 힘있게 던졌더라면 하나쯤은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금 울었다.

내 나이 또래에야 그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한동안 쉰 다음 나는 바구니를 들고 둥근 하늘의 가장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별들이 지면에 거의 맞닿아 있어서 손으로도 딸 수 있는 곳이었다.

어쨌든 그것이 가장 좋을 듯해 보였다.

그러게 하면 별을 손상시키는 일 없이 살짝 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은 생각보다 멀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방법도 포기해야 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서 단 한발짝도 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발바닥이 벗겨져서

몹시 아팠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불가능하였다.

집 까지는 너무 멀고 날씨도 추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호랑이를 몇 마리 만나 그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몹시 아늑하고 편안했다. 그들의 숨결은 아주 감미롭고도 상쾌했다.

그들이 딸기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 호랑이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을 보자마자 몸에 나 있는 줄무늬를 보고서 그들이 호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호랑이 가죽을 한장 손에 넣는다면 멋진 가운을 만들 수 있을 텐데 ‥‥‥.



오늘은 거리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안달이 나서 무턱대고 잡으려고 손을 뻗치곤 하였다.

때로는 그것이 턱없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6인치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 1피트나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덕분에 나는 교훈을 얻었다.

게다가 스스로의 머리로 내 최초의 격언을 만들어 내었다.



'가시에 찔려 봐야 가시를 피할 줄 안다!'



나 같은 젊은이로서는 제법 그럴 듯한 말이 아닌가 싶다.

나는 또 다른 실험 대상의 뒤를 밟아 보았다. 어제 오후의 일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그것을 따라갔다. 그것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가능한 한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라고는 이제껏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그 모습이 아무래도 남자 같았다.

그것의 정체는 확실히 남자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것에게 이제까지 다른 어떤 파충류에게서 느낀 것보다도 더 강한 호기심이 이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것이 파충류일 때의 이야기이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다.

구중중한 머리털과 파란 눈을 하고 있는 것이 파충류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엉덩이도 없는 데다가 몸은 당근처럼 삐쩍 말랐다. 일어설 때는 쑥 하고 기중기처럼 몸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파충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혹시 건축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것이 돌아다 볼때는 도망을 치곤 했다. 나를 쫓아올 듯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그쪽에서 피하려고 애쓸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더이상 겁을 먹지 않고, 20야드 쯤 거리를 두고는 몇 시간씩 그것의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랬더니 그것은 신경이 몹시 거슬리고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것은 몹시 귀찮아하며 나무 위로 올라가 버렸다.

나는 한동안을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돌아왔다.



오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것은 또 나무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일요일

그것은 아직 나무 위에 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구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토요일이 쉬게끔 정해져 있는 날이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쉬는 데 흥미를 가진 생물인 것 같다.

나라면 그처럼 오래 쉬고 있으면 쉽사리 피곤해지고 말 것이다.

나무 근처에 앉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나는 피곤하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지난밤에 그들은 달을 돌려주었다. 나는 몹시 기뻤다.

그들은 매우 정직한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달이 또다시 미끄러 떨어져 사라져버렸지만 나는 그다지

걱정되지 않는다. 그런 친절한 이웃들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시금 달을 돌려줄테니까. 그들에게 무슨 감사의 표시라도 하고 싶다.

별을 몇 개 보내주면 어떨까.

우리에겐 필요 이상으로 많이 있으니까. '우리'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는 게 좋겠군.

그 파충류는 이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것은 취미가 야비하고 인정머리라곤 없어 보인다.

어젯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 그곳에 가보았더니 그것은 나무에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는 연못 속에서 놀고 있는 얼룩반점 무늬의 귀여운 물고기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것에게 흙덩이를 집어던졌다.

그리하여 그것이 다시금 나무위로 기어올라가게 만들어 물고기들을 평화로이 해주었다.

그와 같은 일이 그것의 존재이유일까?

그것에게는 마음이란 게 없는 걸까?

그처럼 귀여운 생물들에 대한 조금의 동정심도 없단 말인가?

도대체 그것이 이런 야비한 일이나 하도록 만들어졌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것의 생김새부터가 다분히 그런 것 같군.



흙덩이 하나가 그것의 귓등에 맞았다. 그랬더니 그것은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나 자신의 말 말고는 이때 처음으로 말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무언가 의미심장한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것이 말을 할 줄 아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것에 대해 새로운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떠든다.

자면서도 말을 한다. 나는 매우 재미있는 존재다.

그렇지만 말벗이라도 있다면 그 배는 재미가 날 것이다.

만일 원한다면, 나는 결코 한순간도 쉬는 일 없이 계속 떠들어댈 것이다.

 

 

 


 

 

 


이 파충류가 남자라면 '그것'으로 불러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문법적으로 어긋나는 일이지 않는가.

'그'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내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그렇다면, 문법적으로 이렇게 해부될 것이다.

주격은 '그는', 목적격은 '그를', 소유격은 '그의'와 같이.

어쨌든 나는 그것을 남자로 여겨, 다른 동물로 밝혀지기까지는 '그'라고 불러야겠다.

그렇게 하는 편이 이러저러한 불확실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편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주 일요일

한 주일 내내 그의 뒤를 좇아다니며 그와 사귀어보려고 애썼다.

그가 몹시 수줍어했기 때문에 나 혼자서 떠들어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도 내가 옆에 있어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친숙한 느낌을 주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 썼다.

 

자신을 그 속에 포함시킨다고 하는 사실이 그를 즐겁게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요일

우리는 요즈음은 꽤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그는 더이상 나를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좋은 징조다. 게다가 나를 곁에 두고 싶어하는 것 같은 조짐도 있다.

내게는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서 나도 될 수 있는 한 여러 모로 그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그의 관심을 점점 더 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이틀여 동안 나는 사물에 이름 붙이는 일을 전부 떠맡아 그가 번거롭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일에는 전혀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몹시 고마워하는 기미가 뚜렷하다.

그는 자신을 곤경에서 구할 만큼 알맞은 이름을 생각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러한 그의 결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서 새로운 생물을 만나게 될 때는, 그가 우물쭈물하며 자신의 결점을 어색해 하는 침묵에 빠져들

새도 없이. 언제나 내가 곧바로 이름을 붙여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이제까지 그를 난처한 상황으로부터 여러 차례 구해 주었다.

 

내게는 그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결점은 없다.

나는 어떤 동물을 보면 순간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생각해 볼 필요조차 전혀 없다.

적합한 이름이 즉시 떠오른다. 마치 일종의 영감(靈感)과도 같이.

의심할 필요조차 없이 그것은 틀림없는 영감이다. 그 이름이 30초쯤 전에라도 내 머릿속에 미리 떠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 생물의 생김새와 움직이는 동작만 보고서도 그것이 어떤 동물인지를

알 수 있는 모양이다.

도도새가 처음 눈에 띄었을 때 그는 그것을 살쾡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눈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난처한 입장에서 구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행여 그의 자존심이라고 건드리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다.

나는 즐거움과 경이에 휩싸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도 상대에게 지식을 전달해 주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어마! 보세요. 저거 도도새 아니예요?"



그리고는 내가 그것이 도도새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물론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게 하면서,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동물을 내가 알고 있는데

대해 조금 불쾌해 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내개 감명을 받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대단히 유쾌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들기 전에 여러 차례 그 일을 떠올리며 기쁨에 겨워하였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얼마나 즐거운 마음을

갖게 되는가!




목요일

나의 첫 슬픔. 어제 그는 나를 피했다.

그리고 나와 말도 나누고 싶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믿을 수가 없다.

무언가 오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그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였고 또한 그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게 없는데, 어떻게 그가 내게 차가운 감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떠나, 우리가 창조되던 날 아침에 처음 그를 만난 곳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 홀로 쓸쓸히 앉았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그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슬픔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하나하나가 그를 생각나게 하였다.

그래서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왜 그런지 그다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은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나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세운 새 움집을 찾아갔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으며, 어떻게 하면 잘못을 속죄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의 친절한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빗속으로 쫓아내었다..

 

이것이 나의 최초의 슬픔이었다.


 



 



일요일

이제 나는 다시금 즐겁고 행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며칠은 힘든 나날이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그 기억들을 떨쳐 버리려 애쓰고 있다.

그를 위해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몇 개 따다 주려고 했다.

몇 번 팔매질을 해보았지만 정확히 겨냥되지를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의 성의만은 그를 기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 사과는 금단의 열매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불행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내가 불행을 겪게 된다면, 왜 내가 그같은 불행을 두려워하겠는가?




월요일

오늘 아침 그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흥미를 가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묘한 일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게 가르쳐 준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분명히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이름보다도 내 귀에 더욱 감미롭게 들릴 것이다.

 

 


 

 

 


그는 몹시 말수가 적다.

아마도 자신이 그다지 총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이다.

 

총명함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귀중한 가치는 가슴속에 있는 것이다.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에 찬 선량한 마음이 참된 풍요를 낳으며, 그런 마음이 없는 지성은 빈곤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을.

그는 말수가 적기는 해도 꽤 풍부한 어휘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깜짝 놀랄 만한 훌륭한 낱말을 구사했다. 아마 스스로도 그렇게 느낀 것 같다.

그 뒤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두 번이나 그 낱말을 이야기 속에 넣어 사용한 것을 보면.

그다지 뛰어난 구사는 아니었지만, 그가 어느 정도는 사물을 감별하는 식견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잘 연마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능력의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디서 그런 낱말을 알게 되었을까? 나는 한번도 그 말을 사용한 기억이 없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내 이름에 도무지 아무런 흥미도 보여주지 않았다.

실망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아무래도 그가 알아챈 것만 같다.

나는 그의 곁을 떠나 다시 늪가의 둑으로 갔다. 둑에 앉아 두 발을 물 속에 담갔다.

그곳은 내가 상대가 그리워 견딜 수 없을 때면 항상 찾아가는 곳이다.

 

묵묵히 바라다 볼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그리울 때,

연못 속에 그려져 있는 그 사랑스러운 하얀 육체가 상대로서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엇인가의 보탬이 된다.

무언가 보탬이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고독보다는 낫다.

내가 말을 하면 물 속의 그것도 말을 하고, 내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한다.

그리고는 연민을 갖고 나를 이렇게 위로해 주는 것이다.

"낙담하지 말려무나, 친구도 없는 가여운 소녀야. 내가 네 친구가 되어 줄게."

정말로 그녀는 내게 좋은 친구다. 나의 단 하나의 친구. 나의 자매다.

바로 그녀가 나를 처음으로 져버린 그 시간!

아아, 나는 그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내 가슴은 육체 속에서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외쳤다.

"그녀는 나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가 버렸다!"

그리고는 절망한 나머지 이렇게 부르짖었다.

"터져 버려라. 가슴아. 더이상 내 삶을 견딜 수 없노라!"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나를 위로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보니 그녀가 다시금 그곳에 있었다.

하얗고 빛나고 아름다운 자태로. 나는 그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었다.

전에도 행복을 맛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까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황홀의 극치였다.

그 이후 나는 결코 그녀를 의심해 본 일이 없다.

때때로 그녀가 사라지는 일은 있었다.

아마도 1시간 남짓이나 혹은 만 하루 가까이. 그렇지만 나는 기다릴 뿐 의심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는 바쁜가봐. 아니면 어디 여행이라도 갔겠지. 그렇지만 꼭 돌아올걸."



항상 그러했다. 그녀는 언젠고 돌아와 주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면 그녀는 오지 않는다. 그녀는 겁장이 어린 소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달이 뜨면 반드시 와 주었다.

나는 어둠 같은 게 무섭지 않지만, 그녀는 나보다도 더 어린 것이다. 나보다도 뒤에 생겨났으니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나는 그녀를 찾아갔다.

내게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면(하기야 나의 매일매일이 대부분 그랬지만) 그녀는 위안이 되어주고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화요일



오전 내내 우리의 소유지를 손질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일부러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하였다.

그가 외로움을 느껴 내게로 오리라는 희망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정오가 되자 나는 오늘 일은 그쯤 해두고 레크리에이션을 시작했다.

꿀벌, 나비와 함께 여기저기를 마구 뛰어다니며 놀았다.

이 아름다운 꽃들은 하늘로부터 신의 미소를 빨아 들여 그것을 제 몸 안에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나는 꽃들을 꺾어 화환이랑 화관(花冠)을 만들어 몸에 두르고 점심을 먹었다. 물론 사과였다.

그리고는 나무 그늘에 앉아 그가 와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그가 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그는 꽃 따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꽃들을 잡동사니라고 부르는가 하면, 여러 가지 꽃들을 구별할 줄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것이 위대한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는 내게도 관심이 없고, 꽃에도 관심이 없다. 땅거미 질 무렵의 진홍빛 저녁노을에도 관심이 없다.

도대체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걸까?

그저 그토록 아름답고 깨끗한 비를 피해 들어갈 수 있는 움집을 짓는 일외에.

그리고 멜론을 툭툭 하고 두드려 본다든지 포도를 시식해 본다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만지작거려 봄으로써 자신의 양식이 잘 자라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외에.



나는 마른 나뭇가지를 땅 위에 놓고 다른 나무 막대기로 거기에 구멍을 뚫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전부터 구상해 오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나는 곧 기절초풍할 만큼 공포에 사로잡혔다.

엷고 투명하게 보이는 푸른색의 막(膜)이 그 구멍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며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았다.

그것이 영혼같은 것일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만큼이나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쫓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바위에 기대서서 휴식을 취하며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안정을 되찾기까지 한동안은 팔다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그런 다음 용의주도하게 살금살금 기어 그곳으로 돌아가 보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길을 떼지 않으며,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도망갈 궁리를 단단히 하였다.

근처에까지 다가간 다음 나는 장미 덩굴 뒤에 숨어서 가지를 밀쳐내며 그쪽을 살짜기 엿보았다.

그 부근 어딘가에 그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아주 영리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그 요정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곳에 가 보았더니 막대기의 구멍 안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부드러운 핑크색 먼지가 들어 있을 뿐이었

다. 그것을 만져 보기 위해 구멍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순간 나는 '앗!' 하고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잡아빼었다. 참을 수 없는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래서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신음을 토해내며 발을 동동거렸다.

덕분에 고통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문득 내 가슴속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 구멍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선 그 핑크색의 먼지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 몹시 궁금했다.

그러자 난데없이 그것의 이름이 퍼뜩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이름은 '불'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이름은 이제껏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불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사람들이 세상의 어떤 일에 확신을 보내는 것보다도 훨씬 강하게.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름을 붙여 버렸다.

불이라고.



나는 일찌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창조해냈다.

이 세상의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것에 새로이 하나를 덧붙인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위업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달려가 그를 찾아내서는 이 이야기를 해주려고 생각하였다. 그가 나를 생각하는 존경심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나는 생각을 바꾸어 단념하고 말았다.

그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일에 쓸모 있는 것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만일 그것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고 단지 아름다움, 오직 아름다움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래서 나는 한숨만 들이쉴 뿐, 그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다.

불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움집을 짓는 데도, 멜론을 개량하는 데도, 과일의 수확을 앞당기는 데도 전혀 도움되는 게 아니었다.

불은 무용지물인 것이다. 그저 시시하고 하찮은 것일 따름이었다.

그는 그것을 경멸하고 신랄한 말들을 퍼부어댈 것이다.

그러나 불은 내게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뇌었다.



"오, 그대 불이여. 내 그대를 사랑하노라. 우아한 핑크빛 창조물이여.

애오라지 그대의 아름다움 때문일 뿐, 그로써 충분치 아니한가!"



그리고는 불을 품에 안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그때 또  하나의 격언이 떠올랐다.

이것은 내가 최초로 만들어낸 앞서의 격언과 꽤 닮았기 때문에, 단지 그것을 베낀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화상을 입어 보아야 불을 피하게 된다."



나는 다시금 열심히 불을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불똥이 생겨나자, 나는 갈색 마른 풀 한 줌을 집어 거기에 불똥을 부었다.

집에 가지고 가 잘 간수해 두고 함께 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바람이 불어오자 불은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워서는 맹렬한 기세로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그것을 내동댕이치며 달아났다.

뒤를 돌아다보니 푸른 요정이 위로 솟구쳐오르며 구름처럼 퍼졌다가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그것의 이름이 떠올랐다.

연기! 맹세코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눈부시게 노랗고 빨간 불길이 연기 속을 뚫고 나왔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불꽃이라고 이름붙였다. 역시 내 생각이 옳았다.

비록 그것이 세상 최초의 불꽃이긴 했지만. 불꽃은 나무 위를 기어올랐다.

그리고는 커다란 덩치를 점점 더 부풀리면서 흘러가는 연기의 안팎에서 멋지게 번쩍거렸다.

나는 기쁨에 겨워 손뼉을 치고 깔깔거리고 춤을 추고 하였다.

그만큼 새롭고 진기하고 멋있고 아름다운 광경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달려왔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우뚝 선 채로 그 광경을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 그처럼 노골적인 질문을 던져오다니, 그건 너무 좋지 않은 태도였다.

물론 나는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은 불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몰라서 물어야만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화나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그를 마음 상하게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으니까.

조금 있다가 그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서 생겨났지?"

마찬가지로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만들었어."

불은 점점 멀리멀리 번져갔다. 그

는 불탄 자리 가장자리까지 가서 멈춰서더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렇게 물었다.



"이것들은 뭐지?"

"숯"

그는 숯을 하나 집어들고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마음이 변했는지 도로 땅에다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아무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흥미를 느꼈다. 거기에는 회색의 보드랍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재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타다 남은 나무 등걸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쉬 알 수 있었다. 사과도 눈에 띄었다. 잿더미를 헤치고 찾아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한창 젊은 나이인데다 식욕도 왕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여간 낙심한 것이 아니었다.

사과는 어는것 할 것 없이 껍질이 벌어져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망가져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날것으로 먹을 때보다도 맛이 좋았다.

불은 아름답다.

언젠가 반드시 쓸모 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금요일

다시 그를 만났다. 지난 월요일 저녁에 아주 잠깐 동안 그를 보았던 것이다.

내가 대지를 보살펴 주고 있는 데 대해 그가 칭찬해 줄 것으로 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선한 의도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열심히 일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그대로 가 버렸다.

그는 또 다른 이유로도 기분이 언짢아 하였다.

내가 제발 그 폭포 가까이는 가지 말라고 그를 설득했던 것이다.

그것은 불이 내게 하나의 새로운 감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새로운 것으로서,

사랑이라든지 슬픔이라든지 혹은 그 밖의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것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다름아닌 공포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두렵다. 그와 같은 것은 차라리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내게 어두운 순간을 주고, 내 행복을 망가뜨리고 있다.

나는 추위와 공포와 온갖 고통으로 인해 몸이 부들부들 떨려옴을 느껴여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직 공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의 일기로부터

그녀가 아직은 몹시 나이 어린 천진난만한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마도 나는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좀더 관대해져야겠다. 그녀는 호기심과 정열과 의욕이 용솟음친다.

이 세상이 그녀에게는 매력덩어리이자, 경이요, 신비요, 환희인 것이다.

새로운 꽃을 보면 그녀는 기쁨에 겨워 말로만 표현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 꽃을 어루만지고, 애무하고, 냄새를 맡고, 말도 걸어 보고, 사랑스런 이름도 지어 준다.

게다가 그녀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색채에 탐닉한다.

갈색 바위, 노랑 모래, 회색 이끼, 초록 나뭇잎, 푸른 하늘이며, 진주빛 먼동, 산마루에 걸린 자주빛

그림자, 해질녘 진홍빛 바다위의 금빛 섬, 조각구름 사이를 달려가는 창백한 달, 광막한 우주 위에서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별무리. 내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어느 하나도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그것들이 색깔을 가지고 있고 멋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할 뿐 아니라,

때로 이성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잠깐 동안만이라도 침착하게 조용히 있어 준다면 참으로 평화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어도 즐거운 기분이 들 것으로 생각된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요즘 들어 차츰 그녀가 실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창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연하고, 날씬하고, 산뜻하고, 보동보동하고, 멋진 몸매에 민첩하면서도 우아하다.

어느 날 그녀가 대리석같이 흰 온몸 가득 햇볕을 받으며 둥근 바위 위에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손을 이마에 대어 그늘지게 하고는 나는 새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았다.






월요일 낮

만일 이 지구상에 그녀가 흥미를 갖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은 내 목록 속에는 없다.

내겐 별 흥미 없는 동물이 여럿 있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일이란 없다.

그녀는 분별력이라곤 없이 모든 동물들에게 마음을 열어 주고 어느 것이라도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동물을 환영해 받아 들인다.

저 거대한 브론토자우루스(중생데이 북아메리카 지방에 살았던 공룡)가 우리의 거주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을 때도 그녀는 그것을 굉장한 행운으로 생각하였다.

반면에 내게는 영락없는 재앙으로 비쳤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두 사람의 사물을 보는 견해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그녀는 그 동물을 길들여 키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녀석에게 집터를 넘겨 주고 어디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것을 친절히 잘 다루면 길들일 수가 있을 것이고, 좋은 애완동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그 녀석에게 키가 21피트나 되고 길이가 84피트나 되는 큰 놈은 우리집 가까이에서

기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해 주었다.

다시 없을 만큼의 선의를 갖고 있을 뿐 아무런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 해도, 녀석이 무심코 우리집

위에 덜컥 올라앉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순간 콩가루가 되고 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녀석의 눈매를 보면 누구라도 녀석이 몹시 산만한 동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그녀는 그 동물을 기르고 싶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단념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낙농(酪農)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의 젖을 짜는 일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곤란하였다.

아무래도 위험하기 짝이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암컷인가 수컷인가 하는 문제도 옳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사다리도 없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녀는 이 괴물의 등에 타고 주변 경치를 구경하고 싶어하였다.

30피트 내지 40피트나 되는 녀석의 꼬리가 땅바닥에 가로놓여 있었다. 마치 쓰러진 나무 둥치와 같았다.

그녀는 꼬리에서부터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경사가 급한 곳에 이르렀을 때 괴물의 몸이 너무나 매끄러웠기 때문에 그녀는 죽 미끄러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곁에서 도와주었기 망정이지 크게 다칠 뻔했다.

이만하면 그녀도 납득하게 되었을까?

아니, 천만의 말씀이다.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실물교육뿐이다.

실증되지 않은 이론들은 그녀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와 같은 이론은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다.

나도 그것은 인정한다. 마음이 끌릴 뿐더러 그 영향력을 느끼고도 있다.

그녀와 좀더 오래 같이 산다면, 틀림없이 나 자신도 그런 태도를 몸에 지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는 이 거대한 괴물에 대해 또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 괴물을 길들여 말 잘 듣는 놈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 괴물을 강 가운데 세워 두고

다리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괴물은 이미 충분히 길들여져 있는(적어도 그녀에게만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이론을 검증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였다.

그녀가 그 괴물을 강물 속의 알맞은 위치로 몰아넣은 다음 강 기슭으로 돌아와 녀석의 등 위를 건너

보려고 할 때마다, 괴물도 강에서 따라나와 그녀의 등 뒤를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길들여진 산덩어리와 흡사하였다.

다른 동물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한결같았다.






금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리고 오늘. 나흘 동안이나 그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혼자서 지낸 셈이다.

그렇지만 함께 지내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나는 친구 없이는 잘 지내지를 못한다.

나란 존재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여러 동물들과 사이 좋게 지내고 있다.

그것들은 아주 매력적인데다 더할 수 없이 성질이 착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한다.

결코 앵토라지는 법이 없고, 누구에게도 귀찮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미소지으며 꼬리를 흔든다. 물론 그 동물에게 꼬리가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만, 그리고 그들은

함께 장난을 치며 노는 일이든 멀리 산보를 가는 일이든, 원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곧바로 응해

주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완벽한 신사라고 생각한다.



요즘 나는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외롭다는 생각은 없다.

외롭다니, 천만의 말씀. 왜냐하면 내 주변에는 언제나 그들이 때로는 4, 5에이커에 달할 정도로 무리를

지어 득실대고 있기 때문이다. 마릿수를 헤아린다든지하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다.

무리 한가운데 위치한 바위 위에 올라가 동물들의 털로 뒤덮인 광활한 벌판을 바라보라.

형형색색의 빛깔과 약동하는 광택, 태양의 눈부심으로 알록달록 수놓이고, 물방물이 햇빛 속으로

날아오르듯이 영롱한 빛을 발하는 생기발랄한,

그리고 동물 가죽의 줄무늬가 잔물결이 이는 듯이 보이는 것이, 마치 호수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줄 잘 알고 있겠지만. 게다가 붙임성 좋은 작은 새들의 한바탕

폭풍과 씽씽 힘차게 나는 새떼들의 허리케인이라도 시작되어 보라.

햇살이 새떼의 깃털에 닿아 부서지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색깔들이 한꺼번에

불타오르는 듯해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몇 차례나 오랜 여행을 떠나곤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을 보았다.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초의 여행가이자 유일한 여행가인 것이다.

우리가 행진하는 모습은 정말 당당한 것이었다. 여기에 버금갈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편안한 여행을 위해 나는 호랑이나 표범을 타고 다녔다.

이 녀석들은 유순한데다 등이 둥글넓적해서 올라앉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매우 아름다운 동물이었다. 그러나 멀리 여행한다든지 경치를 구경하러 갈 때에는

코끼리를 탔다. 올라탈 때는 코끼리가 나를 코로 감아올려 주었지만, 내릴 때에는 나 혼자서도 가능했다.

우리가 야영을 하려고 할 때면, 코끼리가 허리를 낮춰 준다.

그러면 나는 코끼리 등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다.



새들도 짐승들도 모두 사이가 좋다. 어떤 일로도 서로 다투는 법이 없다.

그들은 모두 말을 할 줄 알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내 귀에는 낯선 언어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제법 알아듣는다. 특히 개와 코끼리가 그렇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들이 나보다 머리가 좋고 따라서 나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라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좀 불쾌했다.

내 자신이 만물 가운데서 최고의 피조물이 되고 싶었고, 또 그렇게 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매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이제는 교양도 몸에 지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물이 언덕을 거슬러올라가는 것을 보려고 열심히 주의를

기울여 지켜보고 있었건만,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일은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물이란 결코 언덕을 거슬러오를 수 없다는 것을(한밤중에는

예외이지만) 알아낸 것이다. 한밤중에는 물도 거꾸로 흐른다.

연못의 물이 결코 마르는 일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이 밤중에 연못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물론 연못의 물은 마르고 말 것이다.

제일 좋은 것은 실험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단지 추측이나, 상상, 억측에 의지한다면 결코 교양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물에 따라서는 사람이 발견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추측과 상상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결코, 참을성있게 실험을 계속하다 보면, 마침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세상을 아주 흥미있게 해준다.

만일 해결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세상은 몹시도 무미건조할 것이다. 설령 발견하려고 하다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것은 발견하려는 노력 끝에 마침내 발견에 이른 경우에 못지않게 재미있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 물의 비밀도 처음에는 보물단지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손에 넣게 되자 흥분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험에 의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무가 헤엄을 치고, 낙엽과 깃털은 물론 그 밖의 많은 것들이 헤엄을 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그런 증거들을 모두 하나하나 쌓아가게 되면, 바위도 헤엄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같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증명 방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흥분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슬퍼졌다.

내가 차츰 무언가를 발견해 내게 되면, 그만큼 더 흥분할 일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흥분하기를 그만큼 좋아한다.

요즈음 나는 그런 일들을 생각하느라 불면의 밤을 보냈다.



처음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불가사의한 세계의 비밀을 찾아내 즐기고, 그 모든 것을 창조해낸 조물주에게 감사하기 위해서라고,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꼭 그랬으면 싶다.

그다지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쉬엄쉬엄 하다 보면 몇 주일 걸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깃털 하나를 던져 올리면 그것은 공중으로 날아올라가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러나 흙덩이을 던져 올리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매번 곧바로 땅 위로 떨어진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실험을 해보았다.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나는 도대체 왜 그런가 하고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흙덩이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이것은 틀림없이 착시 현상일 것이다.

결국 둘 가운데 하나는 말이다. 어는 족이 그런지는 모르겠다.

깃털 쪽일 수도 흙덩이 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는 쪽인지 나로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단지 가능한 것은 이쪽이든 아니면 저쪽이든 어는 한쪽이 가짜라는 사실을 실제로 통해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다음 어느 쪽이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쪽을 선택하게 할 수밖에 없다.



쭉 관찰해온 덕분에 나는 별들도 영원히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장 멋있는 별들 가운데 몇 개인가가 하늘로부터 녹아 내리는 것을 보았다.

하나가 녹아 내릴 수 있다면 모든 별들이 다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별들이 녹아 내릴 수 있다면 그것들이 전부 하룻밤 사이에 녹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슬픔을 언젠가는 맛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부터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 한 매일 밤 늦게까지 가만히 앉아서 별들을 지켜

보아야겠다. 그리고 이 빛나는 하늘의 벌판을 내 기억 속에 새겨 놓을 작정이다.

그렇게 하면 마침내 저 하늘의 별들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나는 스스로의 공상 속에서 이 아름다운

무수한 별들을 어두운 밤하늘에 되살려 그것들이 다시 한번 반짝거리게 할 수도 있고,

내 흐린 눈물 속에서 별들의 수를 배로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타락 그후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동산'이 내게는 꿈만 같다. 그곳은 아름다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고 황홀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곳을 잃어버렸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동산을 잃은 대신 나는 그를 발견하였다.

나는 그것에 만족한다.

그는 정성을 다해 나를 사랑한다. 나도 내가 지니고 있는 온 열정을 다 기울여 그를 사랑한다.

이렇게 하는 일이야말로 나의 젊음과 여자라는 성(性)에 꼭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스스로를 향해 왜 그를 사랑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애태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애정이란 이론과 통계의 산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파충류나 짐승에 대해 품는 애정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느 새를 사랑하는 것은 그 노랫소리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담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노래 때문이 아니다. 결코 그런일 때문이 아니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나는 점점 그의 노래를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그가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분명히 내게는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그의 노래를 참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우유가 신맛으로 변하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우유를 마시는 일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머리가 좋기 때문은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아니다.

그에게는 실은 총명함이 부족한 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신이 만들어 놓은 그대로의 머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에는 현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잘 안다.

결국은 그의 머리도 점점 좋아지게 될 것이다.

물론 갑작스럽게 변화가 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지만. 게다가 서두를 필요라고는 없는 것이다.

그는 지금 그대로도 잘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우아하고 사려 깊은 태도라든지 혹은 마음씨 때문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이런 면에서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그대로 충분하다. 게다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근면함 때문도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아니다.

나는 그도 근면함의 자질을 지니고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가 이런 사실을 내게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고통거리다.

그 밖의 다른 점에서는 그도 이제는 내게 솔직하고 허심탄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확실히 그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내게 비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이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잊어버려야겠다. 그런 일로 나의 행복이 방해받을 수는 없다.

나의 행복은 그것만 아니라면 철철 흘러넘칠 정도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교양 때문도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아니다.

그는 독학으로 교양을 몸에 지니게 되었지만, 정말 여러 부문에 걸쳐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것도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기사도 정신 때문도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아니다.

그는 나를 고자질한 일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책망하지 않는다.

고자질은 남자의 특성일 거라고 생각되며, 그가 스스로 남자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를 고자질하는 따위의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그러나 그것 또한 여자의 특성인 것이며, 나는 그런 일로 명예로워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스스로 여자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단지 그가 남성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본성이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설령 그가 나를 때리고 욕설을 퍼붓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성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힘이 세고 잘 생겼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훌륭한 점이 없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가 못생겼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설령 그가 병든 몸이 된다고 해도 나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변함없이 그를 위해 일하고, 그를 위해 노예처럼 순종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병상을 지킬 것이다.



그렇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가 '내 것'이고 남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대로, 결국 이러한 사랑은 이론이나 통계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오는 것'이다.

어디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리고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문제를 심사숙고해 본 최초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무지와 경험 부족 때문에 내가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지도 모르겠다.





40년 후

우리 둘이 함께 이세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나의 소망이자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와 같은 동경은 결코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법 없이,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남편을 사랑하는 모든 아내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을 사람들은 나의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둘 가운데 누군가 먼제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부디 내가 먼저이기를 빈다.

그는 강하고 나는 약하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필요한 만큼은 내가 그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없는 생활은 삶의 의미가 없다.

어째서 내가 그런 생활을 참아내야 한단 말인가?

나의 이 소원도 불멸의 것이 되어,

나의 종족이 계속되는 한 언제까지라도 중단되는 일 없이 받들어지리라.

 



나는 이 세상 최초의 아내이다. 그리고 최후의 아내 속에서도 내 삶은 되풀이될 것이다.

 

 

 





 

 

 


이브의 무덤에서

아담 : 비록 어디일지라도 그녀가 있던 곳, 바로 그곳이 에덴이었노라.

 


'인문철학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무드_마음의 양식 1  (0) 2020.03.15
가난한 날의 행복_김소운  (0) 2020.03.13
지상에서의 첫번째 사랑 - 아담의 일기 편  (0) 2020.03.12
탈무드_돈의 지혜 2  (0) 2020.03.12
탈무드_돈의 지혜 1  (0) 2020.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