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문학

탈무드_마음의 양식 1

rainbow3 2020. 3. 15. 18:53


♥ 1 마음의 양식.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모두 웃을 것이다.
히브리어에 '훗파'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한마디로 명료하게 번역하여 표현하기는 어렵다.
'몹시 무례하다' 혹은 '사람을 더 이상 우롱할 수 없다'라는 의미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떤 사내아이가 부모를 살해한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자.
이때 사내아이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판장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가엾은 고아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스개 소리이다.

어느 때인가 로드 공항에서 총기 사건으로 소동을 일으켰던 오카모드란 자가 재판정에서
 '나는 스타가 되고 싶다'라고 떠들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훗파'라고 비웃었다.

하늘과 땅을 웃기고 싶거든 먼저 고아를 웃겨라고 하는 말이
결코 '훗파'의 의미를 띤 행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늘지고 비참한 어떤 곳이고 간에 웃음은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말하는 고아란 의지할 데 없는 가엾고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아처럼 가엾고 불행한 사람을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디이고 밝아지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별로 눈길을 끌지 않는 대수롭지 않은 따뜻한 웃음이 이 세상 모두를 밝게 해 준다는 말이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상을 당해도 한달 이상 슬픔에만 잠겨 있어서는 안 된다.
유태인이 존경하는 하나님은 태양처럼 밝고 즐거우며
게다가 아주 웃음을 즐기는 분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직책에만 빠져 있었서는 안 된다.
우울한 기분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으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경해야 한다.'

이러한 경구말고도 <탈무드>에는 사람은 쾌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많다.
한가지 더 인용하여 보면,
 '잘못 때문에 법정에서 벌금을 냈으면 신나게 휘파람을 불면서 나오라.'
이러한 일 때문에 유태인들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뻔뻔스럽다는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 이면에는 앞에서와 같은 생활 철학이 깔려 있는 것이다.
 
♥ 마음의 양식. 

 이보다 더한 불행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라. 
가난하기로 소문난 남자가 어느날 랍비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랍비님! 저의 집은 성냥곽만한 데다가 새끼들은 주렁주렁 딸렸고,
게다가 마누라는 이 세상 둘도 없는 포악스러운 여편네입니다.
랍비님! 이 가엾은 저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유태인 사회에는 기독교와는 달리 부부지간의 이혼이 허용되고 있다.
이때는 랍비의 허락만 받으면 되는 것이다.
남자의 눈물어린 호소를 들은 랍비가 물었다. [당신은 염소를 기르고 있소?]
[예, 있고말고요. 유태인인데 염소를 기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앞으로는 염소를 집 안에 가둬 놓고 기르도록 하시오.]
남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얼굴로 돌아간 뒤, 다음날 다시 랍비를 찾아왔다.

[랍비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못된 여편네 등살에다가 염소까지 한군데에서 딩구니 말입니다.]
다시 랍비가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닭을 기르고 있소?]
[기르고 말고요. 닭을 안 기르는 유태인이 어디 있습니까?]
닭은 유태인들이 즐겨 기르는 동물이다. 랍비가 다시 일렀다.
[오늘부터 닭을 모두 집 앞에 가둬 놓고 기르도록 하시오.]
집으로 돌아갔던 남자가 다음날 또다시 찾아왔다.

[랍비님! 정말 이젠 끝장입니다.]
[그렇게도 고통스러운가?]
[말도 마십시오. 여편네 등살에다 염소에다 닭까지... 아이구 맙소사.]
랍비가 이 남자에게 다시 명령하듯 일렀다.

[오늘 돌아가서는 염소와 닭을 예전처럼 밖으로 내놓고 그리고 내일 다시 오시오.]
다음날 그 남자가 다시 찾아왔는데, 얼굴에는 환하게 기쁨이 넘쳤고,
마치 황금덩이라도 얻은 듯 밝아 보였다.

[랍비님! 말씀하신대로 염소와 닭을 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집은 대궐같이 넓습니다.
랍비님, 부디 큰 축복 있으시길 빕니다.]


♥ 3. 마음의 양식. 

일생동안 울고 허송해서도 안 되고, 웃고만 보내서도 안 된다. 

이 말은 앞에서 보아온 격언과는 상치되는 말이다.
격언이란 불변의 진리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인생에 대한 하나의 암시적인 말이기도 하다.
나 역시 여기에서 '~ 을 하시오'라고 단정짓듯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함께 음미해 볼만한 것들을 보여 주고자 힘쓸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좌우를 서로 대칭이 되도록 만들었듯이
동물이나 물고기도 이처럼 만들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인간의 절반은 하늘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땅에 속해 있다하여,
인간에게는 천성과 수성이 함께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갖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희로애락 가운데 어느 한가지 감정에만 빠져 치우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이란 균형이다.
우리는 하루 온종일 울거나 화를 내거나 웃거나 하는 일로 보낼 수는 없다.
여기에도 균형이 있어야 한다.
유태인들은 어느 한쪽에만 빠져 있는 맹신자들을 싫어한다.
비록 정의로운 일이라 해도 맹목적인 행위자를 보면 행복하지도 인간답지도 않다고 여긴다.
매사에 있어 균형, 균형... 일생 동안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4. 마음의 양식.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라.
이미 해 치워버린 일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과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는 일 가운데
어느쪽이 더 후회가 남을까?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는 묻는다면 대부분 후자의 일에 대해 큰 후회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실패때문에 소중하고 큰 것을 잃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잃은 것 못지 않은 만큼 값진 교훈도 얻게 된다.
하지만 꼭 하고 싶었던 일을 놓칠 때에는 교훈 같은걸 얻을 기회가 없다.

실패라고 하는 것은 유한한 것이지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믿는 낙관적인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하여 너무 낙관하고 있는가?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낙관적 자세에서 진보는 이루어져 왔다.

우리가 실패한 일, 이 실패가 곧 경험이 되었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실패에 의해 좌절하기도 하지만,
이때 경험과 값진 교훈을 얻기 때문에 가능성에 희망을 걸게 되고
그 좌절을 가볍게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실패는 곧 성공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데 유익하지만,
일 그 자체에 힘쓰지 않았다는 것은 가능성의 토양을 모두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
 
♥ 5. 마음의 양식. 

하나님은 밝은 사람을 축복해 준다.
낙관하는 마음은 자기 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밝게 해 준다.
유태인들은 얼핏 보기에 슬픈 눈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그러나 한없이 밝다.
이들은 진정한 슬픔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밝음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며,
어두운 밤을 알기 때문에 그만큼 밝은 태양의 감사함을 기쁜 마음으로 즐길 수가 있다.

'비관의 길은 좁지만 낙관의 길은 넓다.'
 낙관은 모든 것들을 포용해 받아들이지만 비관으로 모든 것들을 물리쳐 버리고 만다.

어느 마을의 랍비에게, 매일 노름으로 밤샘을 하는 자가 있다는 진정이 들어왔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잘하는 일이군. 한번 밤샘을 하게 되면<탈무드> 공부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도 밤샘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낙관이란 이렇게 관용의 자세이기도 하며 포용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낙관은 자기 자신에게도 착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나설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그동안 당해온 가혹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굳굳하게 살아온 것도 이들의 낙관하는 마음가짐 때문이리라.
 
♥ 6. 마음의 양식. 

행복을 얻으려면 만족하게 멀어져야 한다. 
인간이란 행복하지 않으면 만족할 줄 모른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상태의 것인가?
도대체 행복의 크기는 어떻게 잴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사람마다의 대답은 각기 다른 것이고,
또한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란 평생을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나 당신 그리고 어느 누구이고 모르는 일이다.
행복을 어떤 방법으로 잴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암시해 보겠다.
그 하나는 우리의 행복은 얻음으로써 그 얻음에 의해 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얻은 것에 따라 행복의 크기를 잰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잃는 것에 따라 행복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우리들은 건강과 질병에서 보듯이,
평소 건강할 때에는 건강에 대한 행복감을 모른다.
건강을 잃고 병마에 시달릴 때 비로소 건강을 되찾고자 몸부림친다.

병마는 몸으로 하여금 고통과 외로움을 안겨 준다.
하지만 우리가 건강할 때는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한다.
행복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행복에 취해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이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고통에 의해 그 소중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것을 잃고 나서야
 '나는 행복했었는데...'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 7. 마음의 양식. 

어차피 같은 햄을 먹는 것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라. 
이미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유태인들은 계율에 의해 금지되고 있는 음식이 많다.
돼지고기로 만든 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유태인들의 특성이라면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아주 낙관적인 성품이라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끝도 없이 낙관적이기만 하다.
이들은 어차피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지니고 살아가자는 마음가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만들어 준 세상을 축복 속에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죄악이 된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유태인들에게는 햄을 먹지 못하게 엄격하게 금지되어있다.
이러한 금지 속에서도 만약 햄을 먹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죄의식을 갖기 보다는 차라리 즐거운 마음으로 먹으라는 것이다.
정말로 유태인적인 성품을 보여주는 속담이다.
 
♥ 8.마음의 양식.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도 같다.
이 때는 당신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는다.
유태인들은 특히 선물 주기를 즐기는데,
이것은 자선하는 것을 의무시하는 유태인 사회이기 때문이리라.

히브리어에서는 '자선'과'정의'가 '체다카'라고 하는 같은 말로 쓰이는데,
영어에서 자선을 뜻하는 '체리티'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의 '기독교인이 사랑'이라는 말이며,
'남에게 베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태인들의 의식으로는 자선이란 남에게 베푼다는 뜻이 아니라
해야 할 당연한 행위로 되어 있다.
유태인의 어떤 가정에서고 아이가 어릴 때부터 저금통을 갖게 하는데,
 이 저금통이 바로 자선에 쓰이는 것이다.
저금통이 가득 채워지면 '시나고케'를 통해 자선에 쓰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자선에도 일정한 제한이 있다.
자기 수입의 어느 일정한도 이상을 자선에 내놓는 일은 계율로 금지되어 있다.
부자로 사는 여유 있는 사람의 경우 5분의 1정도가 허용되고,
보통 가정의 경우 10분의 1까지 허용된다. 물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받게 된다.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 볼 수 있는 복지제도의 바탕이 된 구민법이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
 17세기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미 유태교의 계율에서는 복지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제다카'정신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유태인 사회는 동족끼리는 마치 친형제와 같이 가깝게 지낸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기쁘게 돕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탈무드>는 남의 힘에 의해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고 있지만,
지금도 유태인 지역에 생활이 어려운 동족이 있으면 서로 수입금의 일부를 내 놔
어려운 동족을 돕고 있는 현실이다.
친절과 선행을 베풀어 남을 기쁘게 해 주는 일은 물론
자기 자신도 함께 즐거움을 갖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 9. 마음의 양식. 

남의 강요에 의해 베푼 자선은 스스로 한 자선의 절반의 가치밖에 없다.
<미드라시>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거리의 모퉁이에서 눈이 먼 거지가 구걸하고 있는 데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동전 한닢을 적선했지만, 다른 사람은 그냥 지나쳤다.
이때 사신이 나타나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가엾은 거지에게 적선을 한 사람은 앞으로 50년 동안 더 살 수 있다.
하지만 적선을 외면한 자는 곧 세상을 하직해야 할 것이다.]

사신의 말을 들은 사람은 얼굴이 창백해지면 말했다.

 [지금 곧 거지에게 최선을 베풀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닐세,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뒤에
그 배 밑에 구멍이 났는지 아닌지를 찾아보아 무엇하겠는가?]
 
♥ 10. 마음의 양식. 

모르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은 천사에게 베푸는 친절과 같다.
 
어느 유태인 지역에 이름난 랍비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또한 아버지 못지 않게 정직하고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아들이 랍비인 아버지에게 간절한 소원을 호소하였다.

[아버지, 성서에 등장하는 성인들을 만날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흔히 듣고 있는 전설같은 것을 보면,
죽은 자들도 일년에 몇 차례씩 이 땅 위에 내려온다고 들어온 것처럼
이 아들도 그런 얘기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네게 달려 있다. 항상 바르고 경건하게 생활에 충실하면 성인들도 만날 수 있지.]

아버지의 이 같은 대답을 믿은 아들은 더욱 경건한 생활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약속한 대로
성인들을 만나게 해줄 기색이 보이지 않아
아들이 물으면 '인내를 갖고 좀더 기다려 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착한 일을 했다고 하여 내일 당장 모세를 만날 수 있겠느냐?]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서 또 1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버지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예배소에 남루한 거지가 찾아와 하루 저녁만 자고 가자고 하였다.
아들은 거지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쫓아내었다.
[여기는 잠을 자는 여관이 아니고 경건한 예배소요. 어서 나가시오.]

아무 생각 없이 거지를 쫓아낸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물었다.
[그래 오늘도 후회 없는 하루를 보냈느냐?]
아들은 저녁때 있었던 거지와의 일을 숨김없이 말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 랍비는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회를 놓쳤구나. 바로 그 사람이 네가 기다리던 성서 속의 현자였단다.]

아들은 너무도 기가 막히고 안타까워 다시 애원하였다.
 [아버지, 그렇다면 저는 평생 이 일을 후회하며 살아야 합니까?
돌이킬 수 있는 길은 없나요?]

[또 기회는 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너를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 11. 마음의 양식.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함과 겸허함이다.
 
남달리 믿음이 좋은 어떤 사람이 랍비에게 불만스럽게 말했다.

[나는 지금껏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온 정성을 다 해 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발전이 없습니다.
나는 역시 무식하고 재주 없는 시시한 놈일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기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큰 축복을 받을 것이오.
자기 스스로 자신이 어떻다는 지혜를 배웠소.
당신의 겸허한 태도가 바로 그것이오.]

여기서 말하는 겸허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상대방을 인정하는 일이다.
자기만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의 의견과 뜻을 인정하려고 노력한 태도이다.
친절함과 겸허는 한 형제와 같다.
결코 겸허해지지 않고 친절할 수 없으며,
친절하지 않고는 겸허해 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