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굳이 말하려고 하지 말라 - 정원 목사
앞에서 이와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좀 더 언급하려고 한다. 이것은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아주 중요한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일상의 삶에서도 TV프로에서도 많이 본다. 그러한 일은 평화를 가져오는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스트레스와 분노를 일으킬 뿐이다.
논리를 통하여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굴복시키거나 상대를 설득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일인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서점가에서는 상대방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설득의 기술이나 원리에 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일들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구태여 의견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지 말 것이며 그러한 논쟁의 장에서는 가급적이면 물러서 있으라고 권하고 싶다. 아주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나는 그러한 설득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일시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래 전 전도사 시절에 안면이 있는 자매가 중요한 일이 있으니 꼭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과도 친한 사이였고 자주 놀러가던 사이이기 때문에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집에 갔었다. 그리고 그 집에 도착한 나는 즉시 내가 가지 않았어야 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상한 이단에 빠져있었다. 누군가 자기를 보혜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거기에 빠져서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자매는 그 어머니를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초청한 것이다.
내가 도착해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다니는 그 이상한 교회의 여전도사도 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를 설득하기 위하여 전도사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판 승부를 위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전도사를 불러온 것이다. 그 여전도사는 나와 한판 붙으려고 전의를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를 설득하라니. 그게 설득인가? 나는 내가 마치 투견장에 끌려나온 개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살기등등하던 그 여전도사님은 성경을 가지고 따져보자며 피스톤처럼 성경구절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슷한 경험이 많이 있는 듯 익숙하게 정말 피스톤처럼 성경을 쏟아놓았다.
대화가 되겠는가? 그것은 쓸데없는 시간낭비이며 싸움일 뿐이었다.
토론이나 논쟁에는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서로 균등하게 대화의 기회를 가져야 하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상대방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는 있되 감정적인 표현이나 인신공격과 같은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니까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초적인 룰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토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단에 빠진 이들과 그러한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그녀는 애당초 이쪽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하면 순식간에 가로막고 자기의 이야기를 쏟아 부었다. 성경에 대한 피상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해석을 늘어놓으면서 그저 한 가지 피스톤처럼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많은 성경구절을 빠른 속도로 많이 이야기하기만 하면 모든 이들이 감동을 받고 설득을 당할 것이라고 믿는 것에 틀림없었다.
애당초 대화가 되지 않는 상대였기 때문에 나는 대화를 포기했다. 그리고 옆에서 참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화가 나서 그녀와 싸움에 가까운 논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대화에는 룰이 필요하다. 인격이 필요하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한다면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그러한 이들과는 아무런 대화도 나눌 수가 없다.
나에게 그와 비슷한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이단에 빠졌는데 그들을 좀 설득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요청을 하는 이들의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그런 자리에는 가급적이면 가지 않도록 권하는 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설득의 원리와 방법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거기에 어느 정도 빠져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거기에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맹목적으로 빠져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어떠한 영에 잡혀 있는 것이며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알콜 중독이나 도박에 빠진 사람을 대화로 설득해서 정상으로 고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설득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의 문제이다. 영에게 잡힌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귀가 얇은 편이고 그 쪽 이단에 확실하게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직 다른 이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라면 그 때는 어느 정도 권면이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설득이 가능하느냐의 여부는 그 사람이 어느 정도 깊이 들어갔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어떤 이가 자기의 의지로 그것을 굳게 원한다면 그것을 바꿀 방법은 없다.
하나의 방법은 있다. 만약 당신이 영적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며 영적 권능을 경험하고 영의 싸움에 대해서 조금 안다면 그 영들을 결박할 수 있다. 이단에 빠진 이들을 예수 이름으로 그 배후의 영을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몸의 여기저기가 자꾸 아프게 된다. 그리고 무기력해지게 된다. 그것은 영이 약해지는 과정인데 그렇게 반복하면서 그들의 영들을 부수고 그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서 많이 약해지면 그들을 설득하거나 도울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한 방법은 그리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몸이 회복되면 다시 그 영들에게 잡히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힘이나 강제를 통해서 바뀌어지지는 않는다. 설득을 통해서 굴복당하고 마음이 바뀌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누가 다른 사람을 설득해서 그들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먹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 그것은 별로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니다. 복음전도란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며 준비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달이지 논쟁이 아니다.
TV에서 하고 있는 정치 토론을 가끔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정말 살벌한 싸움과 같았다. 초청 받은 사람들은 일방적인 자신의 주장을 펼 뿐 상대방을 배려하는 부분을 보기가 힘들었다.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토론은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물론 없다. 그것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도 같이 상하게 할 것이다.
사람은 논리에 의해서 설득되는가?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의해서 설득된다. 그러므로 똑같은 논리에 의해서도 결론은 다르게 나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면 그가 얼마나 상황이 힘들었으면 도둑질을 했겠느냐고 생각하여 그를 더 좋아하고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다. 또한 싫어하는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면 그는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며 더 싫어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실도 어떠한 논리도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의 성향에 따라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 성향을 설득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논리에 의해서 꼼짝 못하고 케이오 패를 당했다고 하자. 그는 진정 굴복될 것인가? 아니다. 그의 안에는 더욱 더 적개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속으로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을 아시고 지적할 때 그들이 깨달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다. 바른 지적을 받는다고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성향과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떤 칼럼니스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다. 예리하면서도 선명한 논리로 많은 이들의 속을 후련하게 한다는 평을 듣고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잘못된 것을 하나 하나 조목조목 짚어서 비판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그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다 옳다. 그런데 만약 이 글의 대상이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 논리에 굴복해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칠까? 아니면 원수처럼 생각하게 될까? 나는 아마 두 번째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우리를 향해서 날카롭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논리의 공격이 있을 때 우리들은 아마 그 말에 굴복하는 것보다는 분노하는 것이 더 쉽지 않겠는가.
사람은 논리에 의해서 굴복되지 않는다. 오직 사랑에 의해서 굴복된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굴복되며 또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 의해서 굴복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랑스러이 여기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사람을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설득이나 논쟁은 정말 좋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후유증을 낳게 된다. 상대를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는 상대를 바르게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상대와 싸우기보다는 상대를 이해하는 쪽이 더 나은 것이다.
일본에 전설적인 무사가 있었다.
이 사람은 신기에 가까운 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 무사가 어느 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어떤 불량배가 배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이었다.
무사가 다가가서 제지하려고 하자 그는 노려보면서 칼을 뽑았다.
무사는 말했다.
"여기서 싸우면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여기서 조금 가면 무인도가 나오니 거기서 한 판 붙는 것이 어떠냐?"
불량배는 좋다고 말했다. 그들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배가 무인도에 도착했다.
불량배는 배가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날듯이 뛰어서 가볍게 땅으로 뛰어내렸다. 날렵한 솜씨. 한 눈에 보기에도 보통 솜씨가 아닌 듯이 보였다.
그가 내리자 무사는 긴 막대기로 땅을 힘껏 밀었다. 그러자 배는 스스로 미끄러져 다시 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불량배를 무인도에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이다.
섬에 혼자 남겨진 불량배가 뒤에서 '야, 이 비겁한 놈아!' 하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승리라는 것이다. 열심히 싸우고 피를 흘리고 논쟁을 하고 서로의 감정에 상처를 주고 받고.. 그것은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많은 네티즌들이 여기 저기서 많은 글들을 올린다. 의견이 다른 이들은 다른 이들의 의견을 반박하는 글들을 올린다.
그러나 익명으로 글을 쓰기 때문인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상호 인신공격과 욕설, 비방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와 같은 분위기다. 어떤 소수 의견이 있으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온갖 테러에 가까운 공격을 해댄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끔 이러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이들은 광신도로 매도되어 엄청난 공격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복음이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것이며 아무 데서나 함부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흥분하고 격앙된 상태에서는 복음과 같이 귀한 것을 우리의 영혼이 흡수할 수 없다.
사람은 잔잔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마음이 열리게 되며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사람의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이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분위기가 아닌 곳에서, 자연스럽고 따뜻한 대화가 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사람에게도 억지로 말을 통하게 하려고 한다. 그것이 좋은 일인가? 그것은 좋지 않다.
어떤 거칠은 남자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기 아내가 워낙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사람을 만드느라고 엄청 많이 두드려 팼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원래 강아지로 태어났으나 워낙 많이 맞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도대체 때려서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나는 그의 부인이 과연 사람이 되어서 그에게 고분고분한 것인지 아니면 폭력이 두려워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자기 말을 듣게 하려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폭력을 사용해서 되겠는가?
물리적인 폭력보다야 낫겠지만 논리적인 폭력도 나쁜 것은 마찬가지다. 논쟁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논리를 통해서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가 꼼짝 못하도록 논리의 칼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싫어하더라도 반대할 수 없는 논리를 내세워 그들의 의견을 따르게 한다. 그것이 좋은 일인가? 그것 역시 독재이며 폭력이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내가 하기 싫은 일이 있다. 그것은 싫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당위성을 내세워 그것을 시킨다면 그것은 피곤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강요다. 우리는 원치 않는 것을 강요당할 이유가 없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화의 룰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쪽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며 그들의 말만을 강요한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자꾸 요구한다.
우리는 그들을 참아야 하는가? 우리는 억지로 계속 대화를 해 나가야 하는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 통하는 것이 나오게 되는가?
나는 꿈을 버리라고 충고하고 싶다.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하고는 오래 이야기하고 있어야 서로 피곤할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니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대화가 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과 많은 시간 논쟁을 벌였다. 주님께 많은 것을 물어보고 주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그들은 변화되었는가? 변화되지 않았다.
주님의 설교가 모자랐는가? 주님의 진리가 부족한 면이 있었는가? 그것은 온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세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본 애굽 왕 바로는 변화되었는가? 그는 전 애굽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엎드러졌는가?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적도 주님의 진리의 말씀도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자신의 변화를 원하는 이들만이 변화와 생명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람의 변화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화를 통해서 사람이 바뀌어지리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오직 변화를 구하는 사람만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은 그것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더 분열되는 것이다.
나는 가족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을 참 많이 보아왔다. 그들은 가족이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마음으로 살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나는 그러한 이들에게 포기하라고 가르치곤 했으며 많은 전쟁의 고통을 겪고 후유증을 겪은 후에 사람들은 비로소 포기를 배우곤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포기를 한 후에 사람들은 가족들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곤 했다.
당신은 주변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대화를 하면 고통스럽지만 거리를 두자니 마음이 좁은 것은 아닐까 싶어서 부담을 느끼는가? 다시 말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굳이 말을 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이 편안하게 사는 길이다. 분쟁 없이 갈등 없이 편하게 사는 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폭력을 써서라도 논리로 설득을 해서라도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말라.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대접을 받지 말라. 그것은 서로 괴로운 일이다.
주님이 허락하실 때 주님이 원하시고 인도하실 때 당신은 비로소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굳이 하려고 당신이 애쓸 필요가 없다.
주님의 인도는 무엇이든지 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억지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살라. 결코 억지로 하지 말라. 강요하지 말며 강요당하지 말라. 당신은 자유인이다.
상대가 원하지 않을 때 상대를 내버려 두라. 상대를 묶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열매 맺는 삶이 아니다.
계절은 항상 자연스럽게 온다. 어느 새 왔는지 모르게 봄이 온다.
그 추웠던 계절이 어느 덧 사라지고 따뜻한 봄이 온다. 너무나 더워서 질식할 것 같았던 여름도 어느덧 지나가고 서늘한 바람이 분다. 자연은 항상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억지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그것을 일치시키려고 너무 애를 쓰지 말라. 그저 주님께 맡기고 자연스럽게 하라.
사랑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안 나오는 사랑을 하려고 애를 쓰지는 말라.
웃음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웃음을 웃어야만 한다고 부담을 가지지는 말라.
우리는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부드럽게 역사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가 긴장을 풀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억지로 하려고 하지말고 자연스럽게 내어두라. 주님은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당신을 이끄실 것이며 자연스럽게 당신의 마음 속에 조그만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 주님의 인도하심에 깨어 있으라.
그러면 당신은 언제 봄이 오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느덧 겨울은 사라지고 봄이 오게 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에는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말이 통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대화를 나눌 때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로의 영혼을 교환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때이다. 그 주의 때를 기다리라.
그러므로 지금은 자연스럽게 하라.
말이 통하지 않으면 하지 말라.
그렇게 조금씩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
당신은 성령 안에서
주의 인도하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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