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게으름을 즐겨라

rainbow3 2019. 9. 14. 23:27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게으름을 즐겨라

 

“게으름은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자신에게 돌아가는 시간”

 

이솝우화에서 개미는 부지런하고 베짱이는 게으르다. 개미는 일하는 자, 베짱이는 노는 자를 상징한다. 이 우화는 겨울이라는 고난의 시절을 맞아 굶주림과 죽음에 이르는 베짱이의 비극을 강조하며 끝난다.

게으르면 베짱이처럼 되는 거야! 가난뱅이가 되고 마침내는 죽게 돼! 절대로 게으르면 안돼! 게으름이 초래하는 비참한 결과를 교훈으로 예시하는 이 우화는 씁쓸하다. 개미는 선량하고 베짱이는 악덕이라고 낙인찍는 이 우화는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베짱이의 행위를 악덕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능률을 숭배하고, 근로의 미덕을 강조하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지배자들은 자본과 권력을 점유한다. 그들은 늘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일터로 내모는데, 체제의 존속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도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건희씨나 정몽구씨와 같은 재벌기업 총수들이 일하지 않고 노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한다.

 

 

 

 

버트란트 러셀은 일을 두 가지로 나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버트란트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앞의 일은 힘들고 돈도 적게 받는다. 뒤의 일은 편하고 돈도 더 받는다. 더 많은 자본과 권력을 쥔 사람들은 대개 이 일을 해라, 저 일을 해라 하고 지시를 내리는 일을 한다.

그들은 입만 열면 “근면하라, 절주하라, 먼 장래의 이익을 위해 장시간 일하려는 의욕을 가져라, 심지어는 당국에 순종하라”(버트란트 러셀, 앞의 책)고 말한다.

 

그 말에 따라 끝없이 일에 몸 바치는 노동자들은 더 잘 살게 되었는가?

진실은 무엇인가?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아내도 남편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도 나이가 차는 대로 노동력을 보탰겠지만 말이다. 최소한의 필요를 웃도는 적은 양의 잉여물이 생긴다 해도 전사나 사제 집단에게 돌아갔다.”(버트란트 러셀, 앞의 책)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자는 여전히 가난하다는 것, 그리고 잉여가 생길 때 그것을 가져가는 집단은 따로 있다는 것, 이게 진실이다.

 

일손을 놓고 노는 사람들을 우리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오랫동안 게으름과 게으른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으름은 마땅히 해야만 할 일들에 대한 고의적인 방기와 연관된다.

사회가 게으른 사람을 기피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게으름으로 인해 누군가 손해를 입거나 누군가 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는 까닭이다. 우리가 게으름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딱 한가지다. 게으름이 “타인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버트란트 러셀, 앞의 책)이라는 점이다.

만약 한 사회가 게으른 사람들로만 이루어진다면 그 사회는 기능을 잃고 와해될 게 분명하다. 거리에 쓰레기가 쌓이고, 전기가 끊기고, 우편물은 배달되지 않고, 식료품을 조달하는데도 애를 먹을 것이고, 버스·철도·항공기들의 운항은 중단될 것이다. 그게 다 게으름 때문에 빚어질 수도 있는 가상현실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삶의 가치가 우리가 한 일의 성과와 의미에서 결정된다면, 일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도 보람도 만들지 않는 무용함에 해당할 것이다. 오죽하면 속담에 “노느니 장독 깬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노는 것은 차라리 장독을 깨는 것보다 못한 짓이다. 그만큼 노는 것은 인류 사회에서 몰아내야 할 악덕이다.

 

 

현대사회에서 게으름은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찾아야 할 덕목의 하나이다.

일손을 놓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무(無) 속에 방임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정말 게으름이 나쁘기만 한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들이 공리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퍼뜨린 게으름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라고 여긴다.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것은 나와 식구들을 부양하고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데 중요하지만 사람은 일만 하는 황소와는 다르다. 게으름을 경멸하는 공리주의자들은 우리 삶이 일과 쉼의 조화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일과 수고가 가장 가치를 발현하는 것은 쉴 때, 즉 게으름 속에서 그 일과 수고의 달콤한 과실을 맛볼 때다.

 

게으름에 덧씌운 악의적인 소문들을 걷어내고 게으름의 본질을 바로 보자.

 

“게으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남이다. 그러나 정신까지도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맞서는 것을 잠깐 멈추는 식의 물러남이다. 이 세상이 뭐가 되든지, 되어 가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피에르 상소 외, ‘게으름의 즐거움’)

 

그렇다. 게으름은 물러남이다. 게으름은 일손을 놓고, 휴식과 창조를 위해,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다. 게으름은 병리학적인 마비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잠겨 흘러가도록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들어주기, 꿈꾸기, 글쓰기 따위처럼 사람들이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버려진 순간에 깃들여 있다.”

(피에르 상소 외, 앞의 책)

 

게으름은 타성과 관성의 굳음을 물렁물렁하게 만든다. 게으름 속에 있을 때 우리 몸도 마음도 물렁물렁해진다. 우리는 물렁물렁해져서 존재의 아름다운 순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근대사회 이후 노동의 강도는 더 높아지고 성과에 대한 요구는 절대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깊은 심심함과 사색적 휴식은 과잉활동성으로 대체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없는 여유를 잃어버린 우리의 울퉁불퉁한 개성과 자아는 균질화된다. 이 매끈해진 균질화 속에서 우리는 정체성을 잃고 다만 노동기계로 전락한다.

 

게으름이란 이 전락에 대한 항의이자 몸의 성과주의적 부림에 대한 태업이고 성과사회가 만들어낸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에 대한 저항이다.

 

“게으름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제 게으름은 그저 게으름뱅이들의, 아무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속성이 아니다. 지점 폐쇄나 정리해고로 말미암아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대신에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위하여 게을러지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피에르 상소 외, 앞의 책)

 

현대사회에서 게으름은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 할 덕목의 하나이다.

 

분주한 한 주일이 끝나고 일요일이 돌아온다. 일요일을 앞두고 우리 마음은 해방감의 기쁨으로 차오른다. 무엇보다도 일요일은 늦잠을 잘 수가 있다. 늦잠은 우리가 시간의 지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다.

 

“일요일은 기항지며 피난처다.”(피에르 상소 외, 앞의 책)

 

일요일의 고요, 일요일의 평화는 곧 주중의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의 가속화를 감속함으로써 얻어진 축복이다. 일요일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날이 깊은 심심함 속으로 한껏 게으름의 자맥질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날이고, “현재라는 아찔한 현기증 속에서 우리를 본디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피에르 상소 외, 앞의 책) 날이기 때문이다.

 

게으름에도 분명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부분이 있다. 게으름은 일손을 놓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무(無) 속에 방임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몸과 마음의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우리가 타고난 바 자유를 누리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겨보는 느림 속의 자기방기가 바로 게으름이다. 게으름이야말로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일손을 놓고 놀이, 사교적 만남, 음주와 가무, 낮잠에서 얻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즐거움을 위해, 여유를 위해. 가끔은 자기 자신을 노동의 속박에서 풀어주고, 느긋하게 휴식과 창조의 시간 속에서 서성거려 보라. 여러 관습과 책임과 의무들의 속박에 옥죄어 있던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삶은 총체적으로 훨씬 더 여유로워지고 풍요해질 것이다. 그게 게으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열심히 일하라! 게으름을 두려워 마라! 한껏 게으름을 누리라! 게으름의 태평함, 게으름의 자유로움은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빚어낼 있는 자의 권리이자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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